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금) - 7(월)
일 정 :
○ 9.4(금)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 9.5(토)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 9.6(일)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명십삼릉(明十三陵)
특징 : 북경 시내에서 약 50km 떨어진 옌산(燕山,연산) 기슭의 티엔쇼우산(天寿山,천수산)에 있는 명대 황제들의 무덤군(群)이다. 영락(永乐) 7년(1409)에 창링(长陵,장릉)을 시작으로 명 최후의 황제 숭정(崇祯)제의 무덤인 쓰링(思陵,사릉)까지 230년간 재위했던 13황제의 능묘, 7개의 황비 무덤에 23명의 황비, 2명의 태자, 1개의 태감(太监)묘가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온전하고 고분의 보유량이 가장 많은 고분군(古墳群)으로, 1959년부터 대외에 개방되었으며 2003년에는 주원장(朱元璋)의 능묘인 난징(南京,남경)의 명 효릉(明孝陵)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409년부터 1644년까지 형성되어 300~500년의 역사를 가진 밍스싼링은 동,서,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 상으로 명승지에 속한다. 총 면적 120만㎢에 정 중앙에 위치한 청주링(成祖陵, 성조릉)을 기준으로 좌우로 13개의 무덤이 나뉘어져 있다. 건립 순서에 따라 성조(成祖)의 창링(长陵,장릉), 인종(仁宗)의 시엔링(献陵,헌릉), 선종(宣宗)의 징링(景陵,경릉), 영종(英宗)의 위링(裕陵,유릉), 헌종(宪宗)의 마오링(茂陵,무릉), 효종(孝宗)의 타이링(泰陵,태릉), 무종(武宗)의 캉링(康陵,강릉), 세종(世宗)의 용링(永陵,영릉), 목종(穆宗)의 자오링(昭陵,소릉), 신종(神宗)의 띵링(定陵,정릉), 광종(光宗)의 칭링(庆陵,경릉), 희종(熹宗)의 더링(德陵,덕릉), 사종(思宗)의 쓰링(思陵,사릉)이 있고, 이 중 선따오(神道,신도)와 창링(长陵, 장릉), 자오링(昭陵, 소릉), 띵링(定陵, 정릉)만 개방되고 있다. 오늘 둘러보게 될 무덤은 신종이 묻혀있는 정릉(定陵)이다. 참고로 명대에는 16명의 황제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13명의 황제만이 묻혀있다. 3명의 황제가 이곳에 묻히지 못한 이유는, 먼저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 시기에는 수도가 난징(南京,남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난징에 ‘명효릉(明孝陵)’으로 존재한다.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文)은 그의 숙부 주체(朱棣)가 난을 일으켜 폐위되어 종적을 알 수 없었기에 능묘를 만들 수 없었다. 7대 황제인 주기옥(朱祁鈺)도 형제인 영종(英宗)에 의해 황위를 찬탈 당해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의 신분으로 북경 교외 옥천산(玉泉山)의 징타이링(景泰陵,경태릉)에 묻혔다. 이렇게 해서 명대 16명의 황제 중 13명의 능묘만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 오늘 둘러보게 될 곳은 명십삼릉 중의 하나인 정릉, 즉 신종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관광버스가 정릉의 입구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곳을 들러야할 필요는 없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찾아갔던 관광지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었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주차장에서 조금만 걸으면 커다란 빗돌(碑石)이 나타난다. 무자비(無字碑)란다. 무자비는 말 그대로 글자가 새겨져있지 않는 비석이다. 첫 번째 능문(陵門) 앞에 위치해 있는 대형 석비로 이무기 머리에 거북의 다리를 가졌다. 명13릉의 모든 능 앞에 대형 석비가 있는데, 성조의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비에도 글자가 없다고 한다. 이는 현대에 와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단다. 사료에 따르면 본래 장릉, 헌릉, 경릉, 유릉, 무릉, 태릉, 강릉 등 일곱 능문 앞에는 비석이 없었으며, 가정제 때 와서야 비로소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예부상서 엄숭이 황제에게 7개의 비문을 적을 것을 청했으나, 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가정제가 비를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흥헌왕(추존황제로 시호는 예종)을 추숭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주색(酒色)에 탐닉하느라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서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입장권을 구입해서 아래 사진의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능(陵)의 첫 번째 문인데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출입문이 저렇게 크다면 저 안에 있는 건물들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사뭇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하긴 황제가 죽은 뒤 거주하게 될 지하궁전을 형상화한 것이 황릉(皇陵)이다. 그렇다면 자금성(紫禁城)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을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규모가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능으로 들어가는 신로(神路)의 길이만 해도 3km에 이를 정도라니 그 크기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 정릉(定陵)은 ‘신종(神宗, 朱翊均) 만력제(萬曆帝, 재위:1573-1620)’와 황후 ‘효단현황후 왕씨(孝端顯皇后 王氏)’, 그리고 29일짜리 황제인 태창제(泰昌帝)를 낳은 ‘효정황태후 왕씨(孝靖皇太后 王氏)’를 함께 묻은 무덤으로 1956년 5월부터 1년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무덤 내부의 지하궁전은 현재 관광 상품으로 민간에 개방되어 있다. 정릉의 발굴은 중국 황제의 능묘발굴로는 최초였기에 명나라 시대의 연구와 고고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고고학술이 미숙했던 시기에 발굴되었던 탓에 대량의 문화재가 파괴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중국정부는 오늘날까지 황제 능묘의 발굴을 허가하지 않고 있단다. 아무튼 이 무덤에는 당사자들인 만력제와 효단현황후, 효정황태후의 유골이 없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6년 8월 24일, 구(舊) 사상과 문화의 파괴를 주장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정릉이 반사회적 유산으로 낙인찍히면서 지하에 보존되어 있던 유골들을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안으로 들어서면 저만큼에 돌계단이 나타난다. 세 개로 나누어진 계단의 위는 반반하다. 뭔가 건물이 있었을 듯도 싶다. 능원의 두 번째 문이 능운문(稜恩門)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있었던 문이 아닐까 싶다.
▼ 능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머리만 내밀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그림틀을 설치해 놓았다. 옆에는 전통의상을 빌려주는 대여점도 보인다. 이곳도 역시 소문난 관광지 중의 하나라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은 비록 관광객들이 눈에 띄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난다. 이번에도 역시 세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운데 계단의 중앙에는 용과 학이 조각된 옥판(玉板)으로 장식되어 있다. 자금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각(殿閣)으로 오르는 계단의 양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의 위에 오르니 주춧돌들이 일정한 배열을 이루며 늘어서 있다. 이로보아 건축 당시에는 이곳에 전각이 있었을 것이다. 능운문(稜恩門) 다음에 배치했다는 능운전(稜恩殿)이 아닐까 싶다. 제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궁전이자 황릉의 중심적인 건축물로서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 역할을 했다는 그 전각 말이다.
▼ 돌계단의 가운데 대리석에는 용과 학, 그리고 구름, 산 등 다양한 상징들이 조각되어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문장들인 걸로 보아 어로석조(御路石彫)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계단은 황제가 지나다니던 통로였을 것이다. 신하나 외국의 사신들은 양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했을 것이고 말이다.
▼ 지하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13릉 박물관’에 들른다. 명조 황제의 자료와 명조 황제능묘의 개요, 명 13릉의 구도, 그리고 정릉에서 발굴되었다는 옷과 관, 신발, 도기, 장신구 등의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까 들어올 때 구입했던 입장권만 있으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니 참조한다. 아무튼 이곳은 관람객들로 항상 붐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우리 일행들뿐이다. 빗속을 걸어 다니는 게 짜증스럽지만 대신 좋은 점도 있나보다. 이래서 사람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냈을 지도 모르겠다.
▼ 황제가 썼다는 왕관이다. 이 관은 금사(金絲)로 직조되었는데 그 무게가 놀랄 만큼 가볍다고 한다.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 황후의 관인데 봉황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봉관이라 부른다. 왕관은 화려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꽤나 무겁게 보이는 것이 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웨난’의 저서 ‘황릉의 비밀’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는 책의 말미에 정릉을 방문한 여러 유명인사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강청의 일화도 실려 있다. 직접 관을 써본 그녀가 생각보다 관이 무겁게 느껴지자 '황후 되기도 쉽지 않았겠군.'하며 벗었다는 것이다.
▼ 견직물도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이다. 당시 명나라의 직조(織造) 수준이 세계최고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릉에서도 엄청난 양의 피륙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발굴당시의 보존기술 미흡으로 인해 상당수를 상하게 했다는데 그나마 제대로 보존이 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 박물관을 나와 지하궁전으로 향한다. 길은 명루(明樓)의 옆으로 나있다. 아니 보성(寶城)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황릉을 둘러싼 원형의 담장을 보성이라고 하는데, 보성과 명루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길, 건물의 벽을 뚫고 나온 커다란 나무들이 보인다. 4년 전쯤엔가 캄보디아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관광차 ‘따 프롬(Ta Prohm)’에 들렀을 때 난 열린 입을 다물 줄 몰랐었다. 건물의 벽(壁)과 공생(共生)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무뿌리가 사원의 기둥과 지붕을 감싸 안거나 무너뜨리고 있었으니 공생이란 말은 잘못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덕분에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액션과 판타지에 모험까지 곁들인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의 촬영까지 하게 되었다지만 내 눈에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곳도 ‘따 프롬’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에 거론해 봤다.
▼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5~6층 높이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도굴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능묘(陵墓)는 아주 견고하게 건축되었고 묻고 난 후에는 매우 엄밀하게 봉해 놓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개봉이 되지 않은 능묘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한다.
▼ 지하궁전으로 들어간다. 이 무덤의 주인인 만력제는 2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받아 무려 48년간이나 재위를 했던 황제이다. 재위기간이 길었던 덕분인지 6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자신의 묘(墓)인 지하궁전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당시 이 묘를 건설하는데 백은 800만냥(2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이 들어갔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대명제국의 몰락에 이를 정도로 주색에만 몰두했던 황제다운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하긴 공사가 끝난 뒤, 황후와 왕비, 그리고 대신들을 데리고 자신의 수궁(壽宮) 내에서 큰 연회를 벌렸다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 능묘는 마치 하나의 지하궁전과 같은 형태이다. 중전(中殿)을 가운데에 두고 전후좌우(前後左右)에 네 개의 공간을 배치했다.
▼ 뭔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모두가 지폐(紙幣)이란다.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기댈 뭔가를 찾는 그들의 눈에는 이곳 지하궁전까지도 그 대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네모진 대 앞에 ‘관상(棺床)’이란 팻말이 세워져있다. 이로보아 만력제의 관이 놓여있던 자리가 아닐까 싶다.
▼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도자기들도 진열되어 있다. 정릉은 수십 미터의 지하 깊숙이 묘가 있었던 덕분에 전란이나 도굴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 고고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잠자던 지하궁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400여년을 지하에서 잠자던 3천여 점의 문화재가 발견되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단다. 황금으로 만든 금관과 옥으로 만든 옥관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단다.
▼ 커다랗고 붉은 관이 보인다. 제일 큰 황제의 관을 가운데에 두고 그 양쪽에 황후들의 관을 배치했다. 주위에 보이는 작은 관들은 유물들을 넣었었지 않나 싶다. 발굴 당시 유골(遺骨) 주위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비단이 가득 차있었다고 한다.
▼ 지하궁전은 도합 7개의 커다란 돌문들로 연결되며, 문과 동굴은 모두 한백옥석(漢白玉石)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전체 공간을 다섯 개의 궁전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돌로 만들어진 공간들은 하나같이 기둥과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지하궁전에서 빠져나오면 명루(明樓)가 나온다.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명루 내에는 거대한 석비(石碑)가 있다. 명루 앞에는 석오공(石五供)이라는 석물이 있는데, 석오공은 상징적 재물이란다.
▼ 이번 여행은 딸의 가족과 함께 했다. 모처럼 손자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여행 중에 내가 아는 사료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나 알아들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명(明)의 제13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 재위:1573-1620)는 48년의 재위기간에 명(明)과 암(暗)을 함께 보여준 황제이다. 초기에는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는 등의 내정 개혁을 추진하여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 친정(親政)을 하면서 황제의 역할과 정무(政務)를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하여 명(明)의 정치적 혼란을 가져오게 하여 멸망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재위 중에 ‘광세(鑛稅)의 화(禍)’나 ‘직용(織庸)의 변(變)’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으며, 후반기인 1619(만력 47년)에는 양호(楊鎬) 사로(四路)의 군대가 후금(後金, 淸)에게 완패를 당하기도 했다. 재위 48년이 되던 해에 사망했는데, 멸망의 해인 갑신지변(甲申之變)으로부터 고작 24년을 남겨둔 시점이었으니 그가 명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황제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구원병력(救援兵力)을 파견해 준 이가 바로 만력제(萬曆帝, 1563.9.4.~1620.8.18) 신종(神宗)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래봤자 가만두면 언제 자기 나라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왜군들이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그가 아니었으면 조선이란 나라는 이 땅에서 없어졌을 것을. 고마울 따름이다.
▼ 명루에서 바라본 명십삼릉(明十三陵), 연산산맥(燕山山脉)에 감싸여있는 황릉은 초록 수목과 붉은 색 지붕이 어우러져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금성의 엄격하고 화려한 느낌과는 또 다른 자연과의 조화이다. 웅장한 규모와 완벽한 보존 상태, 그리고 고즈넉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 황릉(皇陵)이라 할 수 있다.
▼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홍수로 인해 형성된 작은 분지가 있는데, 녹색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산기슭의 동, 서, 북쪽에 홍색 벽과 황색 기와를 가진 능묘 건축물이 위치해 있다. 이들은 북쪽 산기슭 정중앙에 위치한 청쭈링(成祖陵, 성조릉)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으며, 전체적인 구조가 조화로우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 명루에 올라 주변경관을 둘러봤다면 정릉의 투어가 끝이 났다고 보면 된다. 이제 아까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걷지는 말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아까 들어올 때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의 풍물들이 다른 의미를 갖고 다가올 것이다. 또한 명릉의 주변은 과수원이 많은 지역이다. 철따라 다양한 과일들이 나오지만 특히 복숭아가 유명하다고 한다. 한두 개 구입해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맛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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