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금) - 7(월)
일 정 :
○ 9.4(금)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 9.5(토)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 9.6(일)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이화원(頥和園)
특징 :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 beijing)의 서북쪽에 위치한 이화원(頤和園)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황실정원이다. 750년간 황제의 정원으로 사랑받아오다가 ‘제2차 아편전쟁’ 중 불타 없어진 것을 서태후가 재건해서 별궁(別宮)으로 삼았다. 290만㎡나 되는 어마어마한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만수산(萬壽山: 인공산)과 곤명호(昆明湖: 인공호수)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청(淸)나라의 황실 가든(garden)이었던 이화원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황실정원으로서 북방정원의 장중함과 남방정원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고 있다. 쉽게 말해 중국 정원예술의 진수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12월 2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로 이화원은 승덕(承德)의 피서산장과 소주(蘇州)의 졸정원(拙政園), 그리고 류원(留園)과 함께 중국 최고의 4대 정원으로 꼽힌다.
▼ 이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궁문(東宮門)과 북궁문(北宮門) 등 두 개가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궁문을 이용한다. 접근이 편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에는 백여 채의 건물과 크고 작은 뜰 20여 곳이 있고 고목 1,600여 그루가 있다. 그 중 불향각(佛香閣), 회랑(長廊), 돌배(石舫), 소주거리, 17공교, 해취원(諧趣園), 극장 등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대표적 전통 건물이다.
▼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의 앞에는 한 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다.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부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이라고 적힌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란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형형색색의 얼굴색을 가진 수많은 관광객들이 매표소 앞에서 북적이고 있다. 이화원에 들어가기 위해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다. 입장료는 기본이 30위안이고, 덕화원(德和园) 5위안, 불향각(佛香阁)과 소주가(苏州街) 10위안, 문창원(文昌院) 20위안 등 일부 시설은 별도의 입장료를 더 내야 한다. 자유이용권(50위안)을 사면 모두 무료이나 성수기(盛需期)에는 10위안이 더 붙는다니 참조한다.
▼ 잠시 후 한자와 만주어로 적힌 편액(扁額)을 달고 있는 인수문(仁壽門)이 나온다. 인수전(仁壽殿)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서태후의 만수무강(萬壽無疆), 즉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착한 자는 장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태후가 지혜롭고 착했다는 의미인데, 그녀의 삶이 그렇지 못했기에 그래주기를 바라는 아랫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서태후는 중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이다. 비록 측천무후처럼 칭왕(稱王)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그녀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제 그녀가 죽고 그녀의 손으로 옹립한 마지막 황제 선통황제(부의)가 3년 후(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때까지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역사 속에 언제나 화려하게 앞머리를 장식한 이름 석자는 늘 서태후였다.
▼ 인수문 뒤쪽에는 숨 가팠던 청말(淸末)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인수전(仁壽殿)이 있다. 이곳은 서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황제 광서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곳이다. 경복궁(景福宮)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 쯤으로 치면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원 시절까지만 해도 ‘근정전(勤政殿)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던 것을 1886년에 재건하면서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인수전‘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자줏빛에 황금색 무늬로 단장한 기둥과 문이 화려한 인수전은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유신 변법’을 모의했으나 봉건 보수 세력의 반대로 10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백일 유신’이라 부른다. 인수전 안에는 옥좌, 병풍, 공작 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 모양의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병풍에는 아홉 마리의 용과 각기 다른 226개의 수(壽)를 새겨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구(電球)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 인수전 앞에는 태호석(太湖石)이 놓여 있는데 그 생김새가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태호석이란 중국의 쑤저우 부근에 있는 태호(太湖) 주변의 구릉에서 채취하는 까무잡잡하고 구멍이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이다. 이전에 내해(內海)였던 태호의 물에 의해 오랜 기간 잠식된 석회석에 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 이런 형태를 띠게 된 것이란다. 쑤저우의 정원에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그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사람들에 의해 수요가 늘어나 중국 각지의 정원에 설치되고 있다.
▼ 인수전은 청대 건륭제때 만든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이 지키고 있다. 사슴의 뿔과 용의 얼굴, 사자의 갈기, 물고기의 비늘로 된 몸통, 소의 발굽을 하고 있는 청동상(靑銅像)이다. 기린은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사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 앞마당에 이런 짐승을 놓아둠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상징했다고 한다.
▼ 인수전 뒤로는 곤명호에 접해서 3개의 대형 사합원(四合院), 즉 옥란당(玉澜堂)과 낙수당(乐寿堂)、의예관(宜芸馆)이 있고, 경극을 상영하던 덕화원(德和园)이 있다. 이중 옥란당(玉澜堂)은 곤명호를 마주 보고 있는 중국 전통의 사합원(四合院)식 건물로 건륭제(乾隆帝)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892년에 다시 지었다. 사합원이란 그 의미상 네 개의 건물이 '원자'(院子; 뜰, 정원)라고 불리는 중정(中庭)을 둘러싼다는 뜻을 갖는데, 과거에는 ‘사합방(四合房)’이라고도 불렀다. 전형적인 사합원의 공간구성은 한나라(漢 B.C.206~A.D.220)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 중국 사회를 지배해 온 유교의 제도를 잘 보여주는 주택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 청나라의 근대화와 입헌군주제 개헌을 위한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이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에 의해 좌절된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옥란당에 유폐한다. 옥란당 동쪽의 동난각은 광서제가 식사를 하던 곳이며, 서쪽의 서난각은 침실이고, 옥란당 옆의 의예관은 광서제의 황후 륭유(隆裕)가 갇혀 있던 곳이다. 참고로 옥란당 건물 안쪽을 보면 벽돌로 쌓은 벽이 보일 것이다. 광서제가 외부와 소통을 하지 못하도록 서태후가 쌓은 벽이다. 모든 실권을 잃은 광서제는 겨울에는 중남해, 여름에는 옥란당을 전전하며 허울뿐인 황제의 설움을 느껴야 했다. 너무 늙어 기력이 다한 서태후는 자신의 사망 이후 광서제가 복위하는 것을 두려워해 끝내는 그를 독살해버린다.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서태후도 역시 죽게 된다. 그리고 세 살배기 마지막 황제 푸의가 뒤를 잇는다.
▼ 옥란당의 중정에서 본 덕화원(德和園), 덕화원은 광서제가 대신(大臣)들과 함께 시와 문예를 함께 논하던 곳이었는데 경극(京劇)을 좋아한 서태후가 경극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전면 개조하였다. 건물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기세 또한 장엄하다 하여 ‘경극의 요람’이라 칭송을 받고 있으며, 자금성의 창음각, 하북성 승덕 피서산장의 청음각과 함께 청나라 궁전의 삼대 희극관으로 꼽히고 있다. 아쉽게도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패키지여행을 따라나선 이상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애로가 아닐까 싶다.
▼ 옥란당(玉瀾堂)을 지나면 호수가 나온다. 그리고 호숫가를 따라 낙수당(樂壽堂)으로 이동한다. 왼쪽에 곤명호를 끼고 걷다보니 멋진 풍경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 진행방향 저만큼에 수목자친(水木自親)이 보인다. 5간의 천당전(穿堂殿)식 건축물로 낙수당의 정문이기도 하다. 곤명호 북안에 자리한 수목자친은 물가에 부두를 끼고 있다. 서태후가 수로(水路)로 이화원에 올 때에는 이곳을 통해 뭍으로 올라 낙수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이화원은 호수 너머로 보이는 전경이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효과를 준다. 호수에서부터 궁궐까지 모든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의 풍광이지만 요소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며 심상의 편안함을 준다.
▼ 수목자친 안쪽은 낙수당(樂壽堂)이다. 전각의 명칭은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건륭제가 모후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을 즐기던 곳이었지만, 서태후의 침궁(寢宮)으로 개조되어 말년에 일상 활동과 식사를 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대형 사합원(四閤院)으로 정전(正殿), 와실(臥室), 기거실(起居室) 등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887년 서태후가 여름 별장으로 재건하여 48명의 시종과 수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머물렀다고 하며, 1903년에는 중국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낙수당 앞에 놓여있는 청동 사슴(鹿)과 학(鶴), 병(甁)은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 낙수당의 안뜰에는 세계 최대의 원림석이라는 청지수(靑芝岫 : 푸른색의 영지靈芝,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괴석 이란 뜻)가 있다. 이 돌은 명대(明代)의 미만종이란 부자가 북경교외에서 발견해 자기 집으로 가져다 놓았던 것이데 건륭황제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아무튼 이 돌은 ‘패가석(敗家石)’이란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당시 수백 톤이나 나가는 이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겨울철을 이용해 수로를 파고 물을 얼려 밀고 오는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경비가 하도 많이 들어 첫 발견자인 미만종이란 부자가 그 과정에서 가산을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당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이 돌은 낙수당에서 곤명호의 전경을 쉽게 볼 수 없도록 하는 기능을 한단다. 이러한 배치는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도 해당돼 중요한 곳을 한눈에 보여주지 아니하고, 악한 기운이 직접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국 전통 원림의 양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돌과 같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일부러라도 패가망신(敗家亡身)을 원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 낙수당을 빠져나오는 길에 보이는 석가루(夕佳樓), 옥란당과 의예관 사이에 자리한 석가루는 호숫가에 건축한 2층 건물로 청대의 황제와 황후들이 누각에서 곤명호와 만수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던 장소라고 한다.
▼ 이후부터는 장랑(長廊)을 따른다. 건륭제가 어머니 효성헌황후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회랑(回廊)으로, 서태후는 곤명호의 풍경을 감상할 때나 불향각으로 행차할 때에 이 길을 거닐었다. 장랑은 동쪽 요월문((邀月門 : 달을 요청해서 즐기는 문)에서 시작되어 서쪽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데 만수산의 중심축인 배운전(排雲殿)을 기준으로 동쪽 장랑과 서쪽 장랑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한편 장랑은 곤명호변을 따라 만수산의 건축물들과 아래의 자연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화랑이다.
▼ 장랑의 총 길이는 728m, 273칸으로 되어 있는 회랑(回廊)의 천장과 기둥, 기둥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공간에는 14,000여 폭의 전통색채화, 풍경화,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등 역사와 신화, 자연과 전설을 담은 그림들이 끝도 없이 그려져 있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이때 그린 546폭의 서호 경치를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넣었다고 한다. 이후 금세기(今世紀)들어 60년대에 중국정부는 서호의 풍경화에다 민족의 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 폭을 더 그려 넣어 장랑을 세계 제일의 회랑으로 만들었다.
▼ 걷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 장랑은 굴곡과 꺾임을 통해 단조로움을 극복했는데, 이는 시야의 변화를 통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장랑 중간 중간에는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請遙)라는 4개의 8각 처마정자 가 있는데, 걷다가 쉬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으로, 춘, 하, 추, 동 사계절을 뜻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이화원의 상징이라는 불향각(佛香閣)이다.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다. 1891년 중건된 불향각은 이화원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높이 36.48m로 8각 3층에 4중 처마양식을 한 목조건물이다. 41m의 석조기단 위에 우뚝서있는 불향각의 위엄 앞에 누구도 함부로 서태후의 권위를 넘볼 수 없게 하려는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불향각의 일층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데 명나라 만력2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5미터이고 무게가 만근이라고 한다. 참고로 불향각은 항주의 육화탑(六和塔)을 모방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은 1989년에 비로소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전망이 좋아 남쪽으로는 곤명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향산과 동쪽으로는 원명원이 보인다.
▼ 만수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이화원의 중요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맨 아래 중심에는 서태후의 생일 연회를 열던 연회장인 배운전(排云殿)이 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원래는 명나라 때 홍치제가 세운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였다. 배운전이란 이름은 '신선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神仙排雲出) 보이는 것은 금과 은으로 된 대였노라(但見金銀臺)'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자소전(紫霄殿)·옥화전(玉華殿)·방휘전(芳輝殿)·운금전(雲錦殿)의 4개 배전이 딸려 있으며 배운전 뒤쪽에는 덕휘전(德輝殿)이 있다.
▼ 배운전에서 곤명호의 안에 있는 인공(人工)의 섬 남호도(南湖島)까지는 유람선으로 이동한다.
▼ 배를 타고가다 보면 불향각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불향각이 자리 잡고 있는 산은 만수산(萬壽山)이다. 곤명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만수산은 원래 봉산과 봉산호가 있던 것을 확대시킨 것으로 곤명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人工)의 산이다. 물과 산을 통해 옥천산과 서산의 여러 산봉우리들과 이어져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으며, 만수산을 뒤덮고 있는 오랜 측백나무와 푸르른 소나무들 밑으로 웅장한 궁궐들과 유서 깊은 사찰, 그리고 이름난 사당들이 서로 어울리고 있다. 불향각 뒤편 산의 정상에는 불당인 지혜해(智慧海)가있어 여러 불상을 배치해 드넓은 곤명호와 이화원 전체를 내려다보게 하고 있다. 이곳의 ‘관음보살’과 불향각의 ‘천수천안관음상’은 서태후를 바라보며 하늘의 권력을 그녀에게 위임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 각각의 건물들은 하나 같이 모두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도 물론 흥미롭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호수 너머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중국 풍경이다. 바다처럼 넓은 인공 호수의 자연 풍광이 정자, 전각, 궁전, 사원, 교각 등의 인공 요소들과 결합하여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화원은 또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이 큰 중국 문화 양식의 깊은 미의식을 반영하는 중국 정원 조경의 철학과 숙련을 한 몸에 보여주고 있다.
▼ 곤명호(昆明湖)는 본래 조그만 연못이었던 것을 인력으로 바닥을 파내서 만든 인공호수다. 면적 2.2㎢에 둘레의 길이가 8km로 이화원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항주에 있는 서호(西湖)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광활한 것이 호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지 속의 바다'라고 부르는가 보다. 곤명호는 또 다른 기능도 갖고 있다. 곤명호로부터 공원의 구석구석까지 물을 끌어들여 이화원의 경관을 높인다.
▼ 남호도 복판에는 용왕묘(龍王廟)가 자리 잡고 있다. '광윤영우사(廣潤靈雨寺)'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서해 용왕인 광윤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용이 비바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용왕묘를 통해 수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남호도에는 산석을 쌓아 만든 높은 대 위에 건축한 함허당(涵虛堂)이 있다. 서태후가 해군의 수상 훈련을 관람하던 곳이라는데 사진이 흐려 게시하지는 않았다.
▼ 중국 정원은 모두 호수를 품고 있는데 이화원이 유명해진 것은 규모나 화려한 건축물도 있지만 전체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호수 곤명호 때문이다. 곤명호는 과거 서태후가 중국 해군 훈련을 시켰던 거대한 인공 호수다.
▼ 인공의 섬인 남호도(南湖島)는 십칠공교(十七孔橋)를 통해 ‘동쪽의 제방(東堤)으로 연결된다. 아치형의 돌다리인데, 다리의 중간에 1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해서 십칠공교 라고 부른다.
▼ 십칠공교는 길이 150m에 넓이가 8m인데, 다리의 난간에는 544개의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돌사자들이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 다리를 건너면 곽여정(郭如亭)을 만난다. 팔방정(八方亭)이라고도 부르며 십칠공교 동단에 위치한 8각 2중 처마의 정자이다. 안팎으로 24개의 원기둥과 16개의 사각기둥이 있다. 면적이 130여 m²에 달해 중국의 정자 건축 중에서는 가장 크단다.
▼ 이화원을 다 둘러보고 난 후에는 신건궁문(新建宮門)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다. ‘광서(光緖) 17년’에 지어진 이 문은 동쪽을 바라보며 3층 너비에 권붕헐(卷棚歇)식 처마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문의 정면 쪽 제방 위에는 3층의 충전식 패루(牌樓)가 지어졌다. 패루는 동서 양쪽에 서운(瑞雲)과 연욱(延旭)이라는 편액(扁額)을 달고 있었단다. 1985년에 패루를 복구했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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