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산(獅子山, 1,160m)
산행일 : ‘13. 5. 17(금)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과 횡성군 안흥면의 경계
산행코스 : 법흥사→절골→허공다리폭포→능선안부→사자2봉→사자산→연화봉→법흥사(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사자산은 산세(山勢) 자체만 보아서는 다른 산에 비해 뛰어난 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자산보다는 바로 근처에 있는 백덕산을 더 즐겨 찾는 편이다. 그러나 사자산을 법흥사와 연관을 시킬 때에는 또 얘기가 달라진다.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을 품고 있는 법흥사의 뒷산이며, 적멸보궁 안에다 모시지 못하고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이 산 어디엔가 모셔져 있다 해서 신성(神聖)시 여기기 때문이다.
* 법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대표적인 불교성지이다.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사리를 봉안한 후,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사찰이름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 신라 말에 절중(折中)이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불에 타서 명맥만 이어오다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성지(聖地) 중의 하나인 점을 감안할 때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빈약하다. 한국 5대 적멸보궁에 속하는 법흥사 적멸보궁,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당나라에서 사리를 넣어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분(石墳:강원유형문화재 109)이 있다. 이밖에 영월 징효국사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탑비(보물 612),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강원기념물 6) 등이 있다.
▼ 산행들머리는 법흥사 주차장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를 타고 영월방면으로 들어가면 주천면소재지(面所在地)에 이르게 된다. 면소재지인 주천리를 막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맞은편 코너에 ‘다하누 꽁깍지가든점’이 보임)에서 좌회전하여 주천강(江)을 건너면 이번에는 수주면 소재지이다. 수주면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면소재지인 무릉리를 통과하고 나면 이번에는 주천강의 지류(支流)인 법흥천(川)을 만나게 된다. 일단 다리를 건넌 후에 법흥천을 따라 상류로 쭉 올라가면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 산행들머리인 법흥사 주차장이다.
▼ 산행은 법흥사 원음루(圓音樓)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오늘은 ‘사월 초파일’, 그러니까 불교(佛敎)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이다. 웬만한 절들도 오늘은 사람들로 넘치는 법인데, 이곳 법흥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는 적멸보궁(寂滅寶宮)까지 있으니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는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일주문(一柱門)을 지나자마자 버스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만 얼마 안가서 차는 꼼짝 않고 멈춰버린다. 이곳에서 법흥사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 그나마 이곳까지라도 올라온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산행을 시작한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법흥사의 대문 역할을 하는 원음루가 보인다. 그러나 사자산으로 가려면 주차장을 그냥 지나쳐야 한다. 주차장 끄트머리 등산로 초입에 ‘하이원 평화캠프장’이 보이니 참조하면 될 것이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는 길에 보면 왼편에 소나무 숲이 보인다.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할 정도로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즐비하니 한번쯤 고개를 돌려볼 일이다. 이곳부터 시작된 소나무 숲은 절골을 따라 사자산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법흥사의 오랜 연륜(年輪)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백 년 된 거송(巨松)들이 사자산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에 연화봉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소나무들과 바위 절벽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눈앞에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그려내고 있다.
▼ 주차장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오른편으로 어렴풋이 오솔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입구에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禁)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출입을 금하거나 말거나 이곳을 들머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으나, 연화봉에서 산을 내려와 본 결과에 의하면 들머리는 이곳에서 50m쯤 더 올라간 지점에 있다. 그러나 들머리를 찾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오른편 보이는 오솔길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 등 어떠한 표시(表示)도 없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을 경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참고로 사자산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 이정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근처의 백덕산이나 구봉대산의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에 비하며 일부러 방치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자산에서 만난 등산객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법흥사에서 일부러 제거한 것이라고 한다. 스님들의 수도처인 법흥사의 뒷산이다 보니 등산객들로 인해 스님들의 정진이 방해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연화봉 들머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절골계곡과 함께 나란히 이어진다. 산길의 반대편에 바위 절벽(絶壁)을 낀 계곡은 다른 소문난 계곡들에 비해 웅장하지도 그렇다고 빼어나지도 않지만,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기이한 풍경(風景)들을 심심찮게 보여주고 있다. 절골은 골이 깊지 않은 탓인지 흐르는 물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산을 내려와 흘린 땀을 씻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量)은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주변은 점점 더 원시(原始)의 숲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의 통행이 흔하지 않은 탓인지 산길도 점점 희미해진다. 왔다갔다 계곡을 가로지르면서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나무 숲 사이로 폭포(瀑布) 하나가 나타난다. 허공다리폭포인데 물길을 길게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신비로운 감을 주고 있다. ‘연화봉 갈림길’에서 40분이 조금 더 걸리는 지점이다. 허공다리폭포는 높이가 약 20미터 정도인데, 옛날 인근사람들이 안흥장을 보러 다닐 때 저곳에 걸려있던 허공다리를 건너 다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허공다리폭포는 규모만 놓고 볼 것 같으면 다른 유명한 폭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수량(水量)이 적을뿐더러 바닥에까지 떨어지는 동안 몇 번에 걸쳐 방향을 꺾기 때문에 왜소(矮小)하다는 느낌이 든다. 산길은 폭포(瀑布)의 맞은편 산사면(山 斜面)의 끝자락에서 방향을 크게 튼 후, 폭포의 위를 지나 능선으로 붙게 된다. 폭포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지점은 폭포의 맞은편 산사면이니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은 참고할 일이다.
▼ 폭포를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가면 사자2봉을 거치지 않고 사자산으로 곧장 가게 되므로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왼편으로 접어들어 10분 정도 오르면 ‘전만이 모듬(산막을 이르는 심마니들의 은어)’이다. 작은 돌탑 몇 개가 보이는 ‘전만이 모듬’은 여러 겹으로 돌담이 쌓여 있다. 이곳은 KBS에서 방영된 ‘전설의 고향’에서 전만이라는 선비와 구렁이 여인사이에 얽힌 애잔한 사랑으로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진 곳이다. 담 안에 보이는 돌탑들은 조선조 말에 전만이라는 선비가 쌓았다고 한다.
▼ ‘전만이 모듬’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다보니 한꺼번에 고도(高度)를 높이지 못하고, 끝내는 갈지(之)자를 만들고서야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든 오르막길은 길기까지 하다. 능선의 끝에 하늘이 보이건만, 능선에 올라보면 또 다른 가파른 능선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주변 경관(景觀)도 특이한 것이 없고 조망(眺望)도 일절 트이지 않기 때문에, 그저 땅만 바라보면서 걷다보면 30분 후에는 주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 주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갑자기 순해진다. 온통 산죽(山竹)으로 뒤덮인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오른편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사자바위(사암봉)이다. 사자바위는 법흥사 방향이 수십 길의 바위절벽(絶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봉우리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바위 위로 오를 수가 있고, 전망 또한 뛰어나다는 사전정보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친다. 집사람과 함께 하는 산행에서는 모험보다는 안전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 사자바위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면 곧이어 사자산 2봉이다. 정상은 산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능선 상에 뽈록하게 솟아오른 한 지점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板)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고맙기는 한데 ‘사자2봉’이 아니라 ‘사재2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살을 찌부리게 만든다. 법흥사의 뒷산으로 더 알려진 산이 사자산이고, 또한 지도에도 사자산으로 등재(登載)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사자2봉’으로 적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자산은 연화봉의 석굴(石窟)에 많이 있었다는 꿀과, 먹을 수 있는 흙인 전단포, 그리고 칠기의 도장 재료인 옻나무와 산삼 등 네 가지 재보(財寶)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일명 사재산(四財山)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표지판은 공통으로 사용되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사자2봉은 정상어림이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은 별로다. 다만 법흥사 방향의 나뭇가지 위로 법흥리 너머의 산들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을 따름이다.
▼ 사자2봉을 지나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에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전망대(1089봉인지 모르겠다)인데 아름드리 노송(老松)까지 함께하는 운치(韻致) 있는 전망대이다. 법흥사 방향으로 수십 길 수직절벽(垂直絶壁)을 형성하고 있는 전망바위 위로 오르면 먼저 사자산의 정상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백덕산이 너무나 장쾌하다. 물론 발아래에는 절골과 법흥사가 아스라하게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구봉대산이 버티고 있다. 또한 멀리로는 치악산의 주능선까지 조망(眺望)된다.
▼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능선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그 떨어지는 구간은 바윗길의 연속이다. 능선을 온통 거대한 바위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길이 바위를 넘는 것은 아니다. 산길은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바위들을 우회하면서 아래로 향한다. 사자산으로 가는 능선의 특징은 오른편은 바위절벽, 그리고 왼편은 바위는 아니지만 경사가 가파른 사면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산길이 바위를 피해 우회할 경우에는 왼편으로 도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산길은 대부분 오른편으로 돌고 있다. 아무래도 흙으로 이루어진 비탈보다는 바위의 크랙(crack)을 잡고 내려가는 것이 더 안전했던 모양이다.
▼ 가파른 바윗길이 내리막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흙길로 변하면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그 오르막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고도를 높여가되 급할 것 없이 조금씩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걷는 게 편하다보니 자연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능선에는 단풍취가 천지다. 그러나 집사람이 눈길 한번 안주고 내닫는 것을 보면, 단풍취 정도로는 집사람의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능선에는 단풍취 외에는 다른 산나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능선이 습기가 많은 음지(陰地)에다 참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산나물이 군락(群落)을 이룰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그 흔한 참취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 2봉을 출발한지 50분 가까이 되면 드디어 사자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사자산 정상도 2봉과 마찬가지로 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밋밋하게 흐르던 능선이 한순간 뽈록하게 솟아오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자산 정상에도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아까 2봉에서 보았던 나무로 만든 정상표시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사재산 1봉’이라고 쓰인 정상표시판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눈에 띄지 않던 취가 정상어림에서는 눈에 띈다. 그것도 취들 가운데서도 최고로 쳐주는 곰취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곰취에다 삼겹살을 싸먹는 호사(豪奢)를 누릴 수가 있었다. 물론 반주로 소주를 곁들이는 것은 결코 빠뜨렸을 리가 없다. 참고로 사자산이라는 이름은 산세(山勢)가 사자의 허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잡목(雜木)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정상은 전혀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연화봉 방향으로 20m 정도만 나아가면 뽈록하게 솟은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오는데 이곳이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정 중앙인 법흥리 방향으로는 연화봉 능선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은 화채봉과 삿갓봉,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아마 치악산 자락일 것이다. 그리고 연화봉의 왼편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봉우리는 신선바위봉이 틀림없다.
▼ 사자산 정상에서 연화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곳 정상에서 길이 네 갈래(당재방향/ 관음사 방향/ 연화봉 방향/ 사자2봉 방향)로 나뉘기 때문에 방향을 잡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이정표가 없는데다 네 곳 모두 산악회의 리본들이 매달려있어 방향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화봉은 예외이다. 조금 전에 올랐던 전망대에서 법흥리가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법흥사 방향으로 늘어선 능선만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연화봉에 이를 수가 있다.
▼ 연화봉으로 내려가는 능선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능선의 숲은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탓인지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이 참나무로 이루어진 숲에는 오래 묵은 참나무들 외에도 어른 둘이서 둘러서야 겨우 서로의 팔이 닿을 정도로 굵은 소나무들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몇 년 전에 발견되었다는 '원주사자황장산금표(原州獅子黃腸山禁標)'가 생각나는 소나무들이다. 저렇게 굵고 곧기에 궁궐(宮闕)의 재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연화봉 능선은 의외로 길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러다가 내리막이 싫증날 즈음이면 짧게 오르막길을 만들었다가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사자산을 출발해서 45분 정도 가파른 내리막길과 씨름하다보면 소나무에 둘러싸인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연화봉이려니 하고 증명사진까지 찍었으나 짐작이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능선을 조금만 더 내려가면 진짜 연화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연화봉도 역시 조금 전의 봉우리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에게 둘러싸인 바위봉우리 형태인 것이다. 다만 이곳의 바위 위에는 돌탑이 얹히어 있는 것이 다르다. 등산객들이 쌓아 놓은 모양인데, 이 돌탑이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연화봉의 법흥사 방향은 수직에 가까운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암릉임에도 불구하고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주변을 가득 메운 노송(老松)들이 시야(視野)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산행날머리는 법흥사주차장
연화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 가파른 능선에 바위들까지 곳곳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좌우로 바위를 우회(迂廻)하거나, 어떤 때는 아예 바위를 타고 넘으면서 내려설 수밖에 없다. 당연히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거기다 바위가 아닌 지점은 흙과 돌이 섞여 있어 까딱하면 돌이 굴러 떨어지기까지 한다. 쉽지 않은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30분 정도 후에는 산행을 시작하면서 지나갔던 절골 옆의 임도에 이르게 된다.
▼ 산행을 끝내고 법흥사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라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기 위해서이다. 법흥사 투어는 주차장 위에 있는 원음루(圓音樓) 아래를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원음루는 이층으로 된 누각으로 위층은 북을 매달아 놓았고, 아래층은 금강문(金剛門)이라는 현판이 매달려 있다. 그런데 법흥사의 금강문은 좀 특이하다.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고 있는 금강문은 인왕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인왕상(仁王像)이라고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흥사의 금강문에는 금강역사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법흥사(法興寺)는 어쩐지 정돈(整頓)되지 않은 느낌이다. 보통의 사찰들은 대웅전 등 주불전(主佛殿)을 중앙에 놓고, 다른 전각들은 주불전의 앞 좌우로 대칭(對稱)을 이루도록 배치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곳 법흥사는 사찰(寺刹)을 구성하고 있는 전각(殿閣)들이 일정한 배열이 없이 중구난방으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휑하고 어수선한 것이 영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라는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찾아온 법흥사의 첫 인상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 왼편에는 수령이 200년이 넘는 밤나무가 비스듬히 산비탈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아래에 보이는 것은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浮屠)이다. 징효대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절감도윤 스님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일으킨 분이라고 한다.
▼ 적멸보궁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소나무 숲 아래로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바닥의 시멘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양(兩)쪽으로 펼쳐지는 잘생긴 소나무들이 그 못마땅함을 일거에 해소시켜 버린다. 법흥사의 소나무들은 한마디로 잘 생겼다.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되는 소나무들은 이리 굽고 저리 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의 소나무들은 곧게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랐다. 태백산맥의 동쪽에서나 만나볼 수 있음직한 멋진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림전문가들도 이곳의 솔숲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형질(形質)을 보유한 솔숲의 하나로 친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몇 년 전에 인근 신촌마을에서 도로공사를 하는 중에 '원주사자황장산금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는 이곳이 궁궐을 짓는데 사용하는 질 좋은 황장목(黃腸木)의 생산지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조선 왕실에서 보호했던 황장목이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소나무 숲이 끝나면 약수터가 나오고, 감로수로 목을 축인 후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파란색 기와를 머리에 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이 나타난다. 그리고 적멸보궁의 지붕 위로 뾰쪽한 봉우리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奉安)되어 있다는 연화봉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진신사리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적멸보궁의 안에는 부처님이 없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부처님으로 여기기 때문에 따로 안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 적멸보궁 좌측 뒤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토굴(土窟)이 있다. 토굴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石築)을 올렸다.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가 있다. 그리고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넣고 사자의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石函)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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