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淸凉山, 870m)

 

 

산행코스 : 청량사 앞 주차장→일주문→산꾼의 집→응진전→김생굴→경일봉→자소봉→연적봉→뒷실고개→하늘다리→장인봉→뒷실고개(회귀)→청량사→대형버스 주차장 (산행시간 : 4시간40분)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과 안동시 예안면의 경계

산행일 : ‘11. 6. 4(토)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색 :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자연경관이 수려(秀麗)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산(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3호), 월출산,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꼽힌다. 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찾아오기가 쉽지 않으나, 수려한 경관 속에서 선현(先賢)들의 흔적(원효대사와, 최치원·김생·이황·주세붕)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한번쯤은 시간을 내어 찾아봐야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청량사 입구 주차장

중앙고속도로 영주 I.C에서 내려서서 영주 시내(市內)를 통과한 후, 36번 국도(國道)를 타고 달리다가 봉화읍을 지나 금봉교차로(交叉路)에서 빠져나온다. 금봉교차로에서 연결되는 918번 지방도(地方道)를 이용 명호면사무소 소재지까지 진행한다. 이곳에서 다시 3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향으로 내려오면 청량산도립공원관리소가 있는 청량산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청량교를 건너면 청량산에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청량사로 오르는 길은 초반부터 급경사 오르막이다. 하도 경사가 심하다보니, 가장자리 인도(人道)는 아예 계단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가파르다. 들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급경사 오르막 도로(道路)를 따라 20여분 정도를 숨이 차게 오르다보면, 저만큼 앞에 청량사 전각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량사로 곧바로 오르지 않고, 오른편으로 소로(小路)로 접어든다. ‘산꾼의 집’과 응진전을 거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들머리에 세워진 ‘산꾼의 집’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100m 정도 올라가면 붉은 색 지붕의 아담한 가옥이 보인다. ‘산꾼의 집’이다. 이곳은 달마도의 명장(名匠)으로 소문난 이대실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 ‘오고 가고 아픈 다리 약차 한 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려.‘ 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팻말 그대로 약차 한 잔 마신 후, 제 손으로 사용한 그릇을 씻어두고 나오면 될 일이지만, 시간에 쫒기고 있는 난, 그 잠시의 짬도 내지 못하고 응진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꾼이 집‘ 옆에 보이는, 단청을 하지 않아 한결 맛이 고풍스럽게 보이는 건물이 오산당이다.

* 오산당(吾山堂), 태어나자마자 부친을 여읜 퇴계 이황은 13세 때, 당시 안동부사였던 숙부를 따라 청량산에 들어갔다. 그 때 그가 머물던 곳이 오산당. 혹은 청량정사로서, 그의 숙부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 수학했던 그는 나중에 이곳에 들어와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도산십이곡도 여기 오산당에서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량산인으로 불리어질 만큼 청량산을 좋아했던 그는 ‘청량산가(淸凉山歌)’에서 『청량산 육,육봉(12봉)을 아는 이 나와 흰 기러기 너 뿐이니, 백구 너야 의젓하니 소문 아니 낼 것이고 문제는 저놈의 도화 꽃이로다. 저 도화 꽃이 강물에 떨어지면 어부(고깃배)가 그걸 보고 육육봉을 알까 하노라』라고 읊었다. 퇴계가 표현하고 있는 육·육봉은 구구법(九九法)에 의한 36봉이 아니라 ‘6 더하기 6’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곧 12개의 봉우리라는 얘기이다. 그 12기봉(奇峰)은 장인봉(丈人峰,=의상봉,870.4m), 선학봉(仙鶴峰, 821m), 자란봉(紫鸞峰, 796m)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탁필봉(卓筆峰, 620m), 연적봉(硯滴峰, 850m), 연화봉(蓮花峰), 향로봉(香爐峰), 경일봉(擎日峰, 750m), 금탑봉(金塔峰, 620m), 축융봉(祝融峰, 845.2m) 등, 12개의 봉우리이다. 이 12봉이 내청량사(內淸凉寺)를 빙 둘러 바위로 솟아 둘러싸고 있다. 이 12봉우리는 하나하나가 연꽃잎이요, 청량사 터는 그 연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풍수 지리학상 청량사는 길지(吉地) 중에 길지(吉地)라 한다.

 

 

 

‘산꾼의 집’에서 응진전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급경사 오르막길로 올라서야 한다. 숨이 턱에 차게 10분 정도를 오르면 삼거리가 보인다. 이곳에서 왼편은 김생굴로 가는 길(200m)이고, 응진전은 오른편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가야만 한다. 이정표(김생굴 0.2km<10분>/청량사 0.4km<10분>/응진전 0.4km)

응진전(應眞殿)과 만난다. 꼭대기가 둥그스름한 고구마 같은 기암이 몇 개 옹기종기 살을 맞대고 서서 하나의 커다란 암봉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햇살을 받아 뚜렷이 입체감이 드러난 그 기암봉 아래에 응진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암봉(奇巖峰)을 포함한 봉우리 전체가 금탑봉이다. 금탑봉 아래 자리 잡은 응진전은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자(庵子)이다. 낭떠러지에 걸치듯 세워놓은 암자, 그러나 암자가 자라잡고 있는 곳은 의외로 넓은 분지(盆地)이다. 낭떠러지 위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이다. 응진전은 홍건적 2차 침입 때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이곳에서 피란을 와서 불공을 드린 곳으로 유명하다.

* 응진전(應眞殿) : 청량사의 부속 건물로 금탑봉 중간의 절벽에 위치한 작은 암자이다. 건물내부에는 익살맞은 표정의 16나한상(羅漢像)이 봉안 되어 있고, 공민왕의 부인 노국공주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 금탑봉(金塔峯, 620m), 경일봉의 동남쪽에 있으며 옛날에는 치원봉(致遠峰)이라고 불렀다. 연대(蓮臺, 지금의 오층석탑 자리)에서 바라보면, 3층으로 이루어진 동남쪽 층암절벽(層巖絶壁)이 마치 삼층탑의 형상으로 돋아있는 형상이다.

 

 

 

총명수(聰明水), 금탑봉을 멀리서 보면 3층으로 되었는데 그 층마다 소나무로 빙 둘러 있고 그곳에 평탄한 환상적인 길이 있다. 입석에서 응진전을 거쳐 김생굴로 가는 길은 그 중 중층(中層)인데, 길가 벼랑 밑에 큰 가뭄에도 물의 양이 일정하다는 총명수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말기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청량산에 들러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총명하기가 배가(倍加)하여졌다고 하여 총명수라는 이름이 생겼단다. 그러나 물 위에는 이물질이 떠 있고, 물은 썩어가는 듯하여 마시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보는 것 까지도 사양하면서 급히 자리를 뜬다.

 

 

 

응진전을 둘러보고 김생굴을 향해 금탑봉의 산허리를 돌아간다. 산허리를 뚫듯이 이어지고 있는 길은, 오른편 머리위로 절벽이 펼쳐지고 있고, 길의 아래도 아스라한 절벽이 끝이 없다. 길은 비록 아스라한 절벽위로 이어지고 있지만 결코 위험하지는 않다. 길의 폭이 넓은 원인이기도 하지만, 벼랑 쪽 가장자리에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벼랑아래가 내려다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풍대에 이르면 청량산의 전경(全景)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하늘 높이 솟구친 암봉들은 병풍을 이루고, 그 암봉들 사이에 청량사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산등성이에 가득한 나무숲은 두텁게 우거졌다. 옹골찬 암산(巖山)이면서도 능선이 숲으로 덮여있어 풍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아마 청량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한다. 어풍대는 청량산 제일의 전망대이다. 이곳에 서면 왜 청량사에서 전국 사찰(寺刹) 중 가장 먼저 산상 음악회(山上 音樂會)를 열었는지 알 수 있다. 소리가 깨지지 않고 본래의 음(音)을 유지하려면 원형의 터널과 같은 장소가 필요한데, 어풍대에서는 청량산의 봉우리들이 절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생굴(金生窟), 어풍대를 지나서 조금 더 걸으면 김생굴이다. 이곳 청량산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들른다는 곳, 산행대장의 안내도 꼭 들러봐야 할 곳으로 ‘자소봉, 하늘다리와 함께 이곳 김생굴’을 꼽았다. 김생굴은 경일봉의 중간어림에 위치하고 있는 반월형(半月型)의 자연암굴로서,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오늘은 맑은 날씨인데도 바위 위에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폭포가 되어 물이 떨어진단다. 아까 금탑봉 아래에서 발견되었던 최치원의 흔적에 이어 김생이라니, 신라시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 두 분의 흔적을 청량산에서 찾을 수 있단다. 그렇다면 청량산은 실로 뜻을 세운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도, 이름에 발목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머물 만한 땅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둘러본 청량산은 높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산이었다.

* 김생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를 살다 간 명필로서,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고까지 불렸고, 송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소문났다

 

 

 

 

김생굴을 보고 삼거리로 되돌아와(100m) 급경사 길을 오르면, 금탑봉에서 경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안부다. 여기서 남쪽 금탑봉으로 가는 길은 폐쇄되어 있다. 그러니 왼쪽의 경일봉 방향의 능선으로 올라서는 수밖에 없다. 능선을 걷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산 자체가 워낙 가파르다보니 숨이 턱에 닿는 가파른 길의 연속이다. 중간의 일부 구간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 놓았다. 이곳뿐이 아니다. 청량산 등산로의 어느 구간이든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철제계단이나 밧줄을 설치해 놓았다. 능선을 따라 급경사 오르막길을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경일봉 정상이다. 경일봉 정상은 특이한 점이 눈에 띄지 않는, 능선상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평범한 봉우리일 뿐이다. 경일봉을 지나 자소봉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봉우리들이 대부분 경일봉보다 더 높다. 왜 이곳에 정상석을 세웠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경일봉으로 오르는 도중에 간혹 나무숲 사이로 멀리 청량사가 바라보인다. 그러나 어풍대에서 바라본 경관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사진촬영은 그만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 경일봉(擎日峯, 750m), 연대(蓮臺, 지금의 5층 석탑 자리)에서 정동(正東)쪽 방향에 있는데, 매년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연대에서 보면 해가 경일봉 정상의 한 가운데서 떠오르므로 주세붕이 인빈욱일(寅賓旭日 : 동방에 해가 떠서 빛난다는 뜻)의 뜻을 취(取)하여 '경일봉'이라 이름을 지었다.

 

 

 

 

 

경일봉에서 자소봉으로 이어지는 1.2Km, 탁립봉 갈림길까지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대부분 흙길이기 때문에 걷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고, 간혹 바윗길이 나타나지만 거북하다고 느껴질 경우에는 돌아갈 수 있으니, 사색을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구간이다.

 

 

 

 

 

청량산은 골산(骨山)이다. 첨봉(尖峰)으로 이루어진 골산이 아니라 노년(老年)의 골산이다. 봉우리들이 아스라한 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의 봉우리들은 머리에다 소나무를 하나 둘 얹어두고 있다. 때마침 낙동강에서 피어오른 안개라도 계곡따라 올라온다면 선경(仙境)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암벽(巖壁)에서, 마지못해 왼편으로 돌아 내려서면 청량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고, 100m쯤 더 걸으면 이내 자소봉 밑에 다다르게 된다. 바위절벽위로 걸쳐진 아스라한 나무계단을 오르면 자소봉이다. 나무계단을 오르면 봉우리의 동쪽 허리쯤에 30~4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널따란 암반이 펼쳐져 있다. 자소봉 꼭대기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정상표지석과 내청량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세워져 있다.

* 자소봉(紫霄峯, 845m), 연대의 뒤(북쪽)에 위치한 바위봉우리로 얼핏보면 청량산의 주봉(主峰)처럼 보인다. 푸른 바위가 천 길이나 높이 허공으로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봉우리의 명칭이 옛날에는 보살봉(菩薩峰)이었는데 주세붕이 자소봉으로 개명(改名)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청량산을 ‘숨어 있는 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래전 신라시대부터 눈 밝은 선현(先賢)들이 거처로 삼았던 열린 산이지만, 몸소 다가오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는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청량산은 내륙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전부터 선현들이 찾았던 청량산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행선(行禪)을 하는 노덕처럼 산길을 걸어보자. 서둘러 정상에 오르지도, 헐떡이며 봉우리를 밟아 나가지도 말고, 구름과 바람의 얘기를 다 들으며 천천히 걸어보자. 그래도 한나절이면 충분하니까...

 

 

 

자소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경사(傾斜)가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자소봉에서 얼마 안 걸으면 능선의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거대한 돌탑 같은 형체가 앞을 가로 막는다. 바위 봉우리의 왼편 아래로 지나가는 등산로의 가장자리에 탁필봉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탁필봉은 퇴적암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사람이 오를 수는 없다.

* 탁필봉(卓筆峯, 820m), 봉우리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뾰족한 봉우리의 형상이 붓끝을 모아 놓은 것과 닮았다하여 옛날에는 '필봉(筆峯)'이라 하였는데, 주세붕이 '탁(卓)'자를 더하여 '탁필봉' 이라 개명했단다. 중국 여산(廬山)의 '탁필봉(卓筆峯)'을 모티브(motive)로 삼았음이니 이 또한 모화사상의 한 단면이 아닐까?

 

 

탁필봉

 

 

 

탁필봉 바로 옆에 위치한 문필봉에 올라선다. 10여명이 한꺼번에 쉴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한 정상에서 올라서면, 지나온 방향의 바로 앞에 탁필봉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자소봉이 연이어 보인다. 서쪽으로 하늘다리가 보인다지만 녹음에 가린 탓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연적봉(硯滴峯, 850m), 탁필봉의 바로 옆에 탁필봉과 나란히 솟아 있다. 정상이 조금 평평한 것이 흡사 연적(硯滴; 벼루의 물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연적봉에서부터 능선은 다시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안부 갈림길인 연적고개에 닿고, 다시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은 후 제법 길고도 경사가 심한 철제계단을 내려서면 뒷실고개이다. 정상인 장인봉으로 가려면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야하고, 왼편은 청량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 길은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이, 자소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상인 장인봉으로 갈 경우에 이용하는 길이다. 뒷실고개 이정표(하늘다리 0.5km/청량사 0.8km/자소봉 0.7km)

 

 

뒷실고개에서 침목계단과 철제계단을 번갈아 오르면 자란봉이다. 자란봉 정상은 어디가 정상인지 구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밋밋하고 평범한 봉우리일 따름이다. 물론 정상 표지석도 찾아볼 수 없다. 조망도 없기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하늘다리로 향한다.

* 자란봉(紫鸞峯, 796m), 선학봉(仙鶴峰)의 동쪽과 내산(內山) 경계에 위치하며 그 모양이 마치 신비로운 새가 춤을 추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자란봉의 봉우리를 넘자마자 허공에 걸린 구름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쪽 자란봉과 반대편 선학봉의 이마 어림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다리’이다. 지상에서 70m의 높이에 아찔하게 걸린 다리이건만,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최신공법으로 지어졌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다리 한복판은 일부러 투명아크릴로 바닥을 만들었다고 해서 일부러 쭈그리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아크릴에 흠집이 생겼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나은 재료를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난해 대학원 동기들끼리 중국 상하이에 들러, 492m 높이의 ‘국제 금융센터 빌딩’ 전망대(展望臺)에 올랐을 때, 지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투명아크릴 바닥 위에서 오금이 저려서 당황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어본다.

* 하늘다리, 선학봉(해발 826m)과 자란봉(해발 806m)을 잇는 해발 800m 지점에 놓여 진 이 현수교(懸垂橋, 길이 90m)는 국내 최장·최고를 자랑한다. 산악지대에 설치된 보도형 교량(橋梁) 중 가장 길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늘과 가장 가깝다 해서 ‘하늘다리’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 보면 문득 아이스크림 생각이 난다. 아마 아름다운 풍경이 달콤한 미각(味覺)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선학봉도 자란봉과 마찬가지로 아무 특징도 없고, 당연히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다. 선학봉에서 통나무계단을 따라 깊게 내려섰다가, 가파른 철제계단을 밟고 길게 올라서면 청량산 최고봉인 장인봉이다.

* 선학봉(仙鶴峰 821m), 장인봉의 동쪽에 있으며 외산삼봉(外山三峰)중에서 가운데 있는 돌봉우리로 옛날에 학(鶴)의 집이 있었다 하여 주세붕이 '선학(仙鶴)'이라 이름 지었단다.

 

 

 

장인봉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널따란 분지(盆地)이다. 한 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정상석의 글씨는 청량산과 인연이 깊은 '김생'의 친필을 모아서(集子) 새긴 것이란다. 정상에서 약 2분 정도를 더 나가면 벼랑위 전망대에 닿는다. 망원경까지 설치된 전망대에 서면, 남쪽의 기암봉과 괴석(怪石), 그 기암봉 사이사이로 펼쳐지는 무르익은 짙푸른 녹음, 산허리를 돌아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의 물결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조망의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의미까지도 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빼어난 조망지다. 고개를 들어보면 산 너머 산이 첩첩(疊疊)이 쌓여있고, 발아래에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절벽, 조망의 기쁨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늘어만 간다.

* 장인봉(丈人峯, 870.4m), 청량산의 가장 높은 주봉(主峰)으로서 옛날의 명칭은'대봉(大峰)'이었으나 주세붕이 '장인봉(丈人峯)'으로 개명하였다. '장인(丈人)'의 '장(丈)'은 대자(大字)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써 멀리 중국 태산(泰山)의 장악(丈嶽; 큰산)을 빗댄 것이란다. 청량산을 가장 극찬했던 사람은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다. 그는 ‘청량산록(淸凉山錄)’에서 인간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언어로 청량산을 표현했다. 『해동 여러 산 가운데 웅장하기는 두류산(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이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작기는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그러나 청량산 최고봉의 이름을 중국 태산의 장악을 본떠 ‘장인봉(丈人峯)’으로 개명한 것을 보면 주세붕은 도가 지나친 모화주의자(慕華主義者)였음이 틀림없다(최근 의상봉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 청량산은 범접하기 힘든 신비의 산이었다. 장인봉의 정상석 뒷면에는 주세붕의 싯구(詩句)가 음각되어 있었다.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에게로 가고 싶네』

 

 

 

장인봉에서 청량사로 내려서기 위해서는 뒷실고개까지 1.2km의 거리를 되돌아 나와야한다. 장인봉에서 내려서면 오른편으로 청량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만 이를 무시하면 된다. 뒷실고개에서 청량사까지는 0.6km로 30분이면 내려갈 수 있지만 급경사의 나무계단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다. ‘몇 개나 될까요? 헤아려 보셨수?’ 집사람에게 말을 건네 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평소에 잘도 헤아리던 그녀도 너무나 길게 이어지는 계단에 헤아려볼 엄두를 내지 못했나보다.

 

 

 

나무계단이 넌더리가 날 즈음에 길은 수평으로 숲의 터널을 통과하게 되고 이내 청량사의 유리보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청량사 경내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산행차림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 많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청량사에 뭔가가 있음일터...

* 청량사(淸凉寺),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청량산 중턱의 아늑한 산세에 자리 잡고 있다. 청량사에는 유리보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7호)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이 지불(紙佛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이 유명한데 지금은 개금(금칠)을 해 놓았다. 유리보전이란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청량사는 ‘산사(山寺) 음악회’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 유리보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편액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모시는 곳인데, 주불전(主佛殿)에서 약사여래불을 모시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주불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대웅보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적광전(비로전),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무량수전)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청량사 풍광의 백미(白眉)중 하나는 ‘5층 석탑’, 유리보전 앞에 서면 벼랑 끝에 세워진 석탑이 보인다. 석탑(石塔)은 마치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 사이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 연꽃 형상을 이루는 이곳 청량산 12봉우리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청량사, 그중에서도 이 석탑이 자리한 위치가 연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부분이란다. 이 탑은 영화 ‘워낭소리’의 오프닝 촬영지이기도 하다.

* 유리보전 우측 전방 5층석탑이 서 있는 연대 앞에는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는 노송(老松)이 운치 있게 세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오랜 옛날 한 농사꾼의 집에 등치는 낙타만하고 힘이 센 소가 태어났단다. 그 소가 일은 하지 않고 밥만 축내자, 농사꾼이 연대사(蓮臺寺, 후에 청량사)에 시주를 해 버렸나보다. 그런데 이 소가 절을 짓는 일에는 꾀도 안 부리고 열심히 일을 했고, 절을 다 짓고 나서는 곧바로 죽어버렸단다. 그 소(牛)가 죽은 자리에서 소의 뿔처럼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돋아났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하고 그 소나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하였단다.

 

 

경내를 둘러보다 범종각 앞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병을 가득 채운 후, 하산을 서두른다, 문득 절 입구에 들어앉은 안심당의 굴뚝이 눈에 띄기에 발걸음을 옮긴다. 굴뚝이 깜찍하다. 황토로 지어진 안심당은 절에서 만든 전통찻집인데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출입문 위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서각이 걸려 있었다. 차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찻집이다

 

 

산행날머리는 청량사 대형버스 주차장

청량사 경내를 빠져나와 가파른 경사(傾斜)의 찻길(車道)을 내려서면 얼마 안 있어 산행을 시작할 때, 들머리로 삼았던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근처 계곡에서 탁족(濯足)을 즐기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오늘 산행이 마무리되는 대형버스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100m정도 아래에 음식점을 겸한 민박집이 있으니, 박주(薄酒)에 소찬(素餐)으로 요기를 달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