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산 (796m)-소룡산巢龍山, 761m)
산행코스 : 신촌경로당→절재→바랑산→큰재→새이덤→소룡산→무제봉→강굴→망바위→오휴마을 (산행시간 : 나물채취 시간까지 합쳐서 4시간30분)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오부면의 경계
산행일 : ‘11. 4. 28(목)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색 : 바랑산과 소룡산은 거창과 산청의 경계를 짓고 있는 산릉(山稜)이며, 진양기맥의 한 구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다 내세울만한 게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소박한 산이다. 소룡산에 어느 정도의 암릉이 돌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인근의 월여산에 비할 수가 없고, 크기로도 인근의 황석산이나 거망산에다 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 오지마을 중의 하나라는 오휴마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곳의 산하(山河)는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순수 그대로이다. 살다보면 세월도 비켜갈 만한 곳, 공기 좋고 물 맑은 이런 곳이 바로 피안(彼岸)의 세계가 아닐까 한다.
▼ 산행들머리는 오부면 중촌리 신촌마을 정류장
산청IC에서 빠져나와 산청읍 市街地를 통과한 후, 3번 國道를 타고 생초 방면으로 가다가, 양촌교차로에서 1026번 地方道路 오전리 방면으로 들어가면 신촌마을 주차장에 다다른다.
들머리인 신촌마을 버스정류장에는 제법 널따란 주차공간과 간이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우선 마을을 지켜주는 우람한 당산나무가 오른편 언덕 위에서 우릴 반겨준다. ‘신촌마을 노인정’ 건물 앞으로 난 시멘트 포장도로(農路)를 따라 北쪽으로 올라가면 이내 비포장 농로가 나타난다.
▼ 산행을 출발한 지 20분쯤 지나자 최근에 개간한 것 같은 널따란 밭이 보인다. 심어진 作物(아마 도라지일 것이다)의 새싹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밭의 끝은 계곡과 닿아있다. 밭의 맞은편 언덕 위에서 누군가가 외치고 있으나 알아들을 수 없기에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밭을 지나 마시오.’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밭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던 길이 계곡에 닿자마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길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별수 없이 우린 밭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장이 보면 싫어할 테니까 약초를 밟지 마세요.’ 약초(藥草)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 말씀이다. 맞다. 조금 전에 저편 언덕에서 뭐라고 외치던 분이 어쩜 이 밭의 주인이었나 보다. 藥草밭을 지나서 다시 또렷해진 등산로를 따라 얼마간 오르면 예동마을로 넘어가는 林道와 다시 만나게 된다.
* 신촌마을에 산을 오를 경우, 초입(初入)의 農路에서 예동마을로 넘어가는 林道로 옮기는 과정에서 남의 밭을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초가 심어진 밭을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데 좋아할 주인은 없을 것이다. 비록 주인의 승낙을 받고 통과하지는 못할지라도 내딛는 걸음마다 조심스럽게 옮겨보자. 그것만이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禮儀)일 테니까....
▼ 다시 만난 林道는 시멘트로 포장된 道路, 인위적(人爲的)인 도로는 싫지만 진양기맥이 지나가는 바랑산의 주능선으로 가는 길이 이 길 뿐이니 별 수 없다. 예동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도로는 구불구불, 조금씩 고도(高度)를 높여가면서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 만에 진양기맥이 지나는 능선에 다다랐다. 여기서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예동마을에 닿게 된다. 기맥 너머 예동마을이 있는 거창 쪽은 해발 540m의 고원(高原) 구릉지(丘陵地)이다.
*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의 예동마을은 산 속에 있어 역골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어느 지리학자가의 권유에 따라 마을 이름을 예동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단다.
▼ 진양기맥과 만나게 되는 능선에는 ‘진양기맥 종주등산로 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시멘트포장 임도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바랑산으로 향한다. 기맥주변은 갖가지 묘목들이 심어져 있는 등 ‘기맥 마루금’이 많이 파헤쳐져 있다. 인간들의,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을 위한 개발(開發)... 그 개발의 반대급부가 생채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긴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도 여기저기 생채기를 내고 있기는 매 한가지이다.
* 진양기맥(남강기맥) :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부터 분기되어 진양호로 빠져들면서 마감되는 163km 길이의 산줄기, 능선 상의 주요 산으로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자굴산 등을 꼽을 수 있다.
▼ 생채기의 흔적이 끝나갈 즈음에, 예동마을로 넘어가는 길과 나뉘는 절재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등산로는 오른편으로 급히 방향을 틀면서 산속으로 접어든다. 임도 수준으로 넓던 길도 어느새 좁은 오솔길로 변해있다. 사실상 본격적인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등산로 주변은 빽빽한 소나무 숲이다. 등산로 주변은 정비가 잘된 편,,,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준 이곳의 공무원분들에게 감사드려본다. 그러나 간벌하면서 생긴 잔가지들까지도 깔끔하게 치워주었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 사이를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 진다. 특히 이렇게 경사가 완만한 솔숲 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코끝을 스치는 소나무향 속에는 피톤치드까지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 도심의 오염에 찌들었던 이내 가슴은 어느새 밑바닥까지 깔끔하게 정화되어 있다. 소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오솔길을 쉬엄쉬엄 걷다보면 어느새 바랑산 정상이다. 바랑산은 제법 널따란 분지,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표지석 외에 특이하게 방위만 표시되어 있는 삼각점이 있고 삼각점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따로 세워 놓았다. 정상에 서면 덕유산을 비롯해서 황석산과 기백산, 그리고 황매산이 잘 바라보인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정도 지났다.
* 바랑은 '배낭'이 변한 말로 스님들이 지고 다니는 볼록한 주머니다. 산청 바랑산은 원래 마고할미의 주머니였다고 한다. 인근 소룡산의 새이덤은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 가다 흘린 돌무더기. 옆에 있는 월여산은 딸. 보록산은 아들이라고 한다.
▼ 바랑산에서 소룡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큰재까지 한참 내려서야 한다. 진달래가 곱게 핀 능선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흐르다가 갑자기 급경사로 변해버린다. 완만(緩慢)과 급경사(急傾斜)를 번갈아 하더니만, 이내 평탄하고 포근한 길로 변해 있다. ‘완전히 소나무 천지네요’ 집사람의 감탄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등산로 주변은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어쩌다 산벚꽃 한그루 섞인 것쯤이야 어떠랴... 김정일 주체사상으로 도배하고 있는 북녘 땅에서조차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소나무 숲에 다른 나무 한두 그루 정도 섞인 것쯤은 살짝 눈감아 주어도 될 일이다. 피톤치드 향이 짙은 오솔길을 쉬엄쉬엄 걷다보면 이내 큰재이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소룡산을 거치지 않고 천지사나 독촉주차장으로 탈출하는 길이 보이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편한 길을 걸으면서 힘들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랑산에서 이곳까지 약 40분 정도 걸렸다.
▼ 큰재에 붙은 이정표에는 바랑산과 소룡산의 중간지점(양쪽 모두 1.7Km)이라고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소룡산 쪽이 훨씬 가까울 듯 싶다. 큰재를 지나자 산림욕장이라는 녹색 간판이 보인다. 삼림욕장(山林浴場) 주변의 소나무들은 오늘 산행 중에서 만났던 소나무들보다 훨씬 굵고 커다랗다. 그러나 산림욕을 즐기기에 충분한 울창한 소나무 숲은 보이는데 반해, 벤치 등 편의시설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무슨 의도(意圖)로 산림욕장을 만들었으며, 누구를 주요 고객(顧客)으로 삼은 것일까? 평생을 공직에 몸담아왔던 내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當然之事)일 것이다.
▼ 산림욕장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진행방향의 소나무 가지사이로 세이덤이 얼핏 바라보인다. 조금 후, 그렇게 걷기에 편하던 등산로는 갑자기 급경사로 변해버리고, 오르는 이들을 위해 통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계단길이 더욱 가팔라지더니, 종내는 로프까지 매어 놓고 있다. 첫 번째 급경사 오르막길을 오르면 진행방향의 왼편에 거대한 바위벼랑이 펼쳐진다. 바로 세이덤이다.
▼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헐떡이다보면 세이덤의 이정표가 보인다. 왼편으로 20m정도 들어서면 진달래 꽃무리 사이로 얼핏 바위가 들어나 보인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바위 절벽 끝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은 바위는 마고할미가 가죽옷을 기울 때 쓰던 바늘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송곳바위일 것이다. 진달래 꽃 사이를 헤치고 바위벼랑 위에 선다. 전면에 거창군 신원면 일대가 펼쳐진다. 오른쪽으로는 월여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주변 산세뿐만 아니라 산촌마을의 전경이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이곳이 오늘 코스 중 최고의 조망처(眺望處)이다. ‘세이’와 ‘덤’은 이곳 지방에서 ‘형’과 ‘바위’를 나타내는 사투리, 그럼 ‘세이덤’은 ‘형 바위’라는 말인데, 과연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필요 없는 질문으로 머리를 어지럽히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세이덤을 지나면 바로 소룡산에 올라서게 된다. 소룡산 정상은 두 곳이다. 세이덤 바로위의 봉우리에는 묘지만 덩그렇고, 정상석은 5분쯤 더 걸으면 닿게 되는 다른 봉우리에 세워져 있다. 족히 100평은 됨직한 널따란 분지인 소룡산 정상은 한 가운데에 정상표지석과 이정표가 서 있다. 정상에 서면 월여산과 황매산 등 산군(山群)들이 잘 조망된다. 소룡산을 오르다보면 유난히 무덤이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신령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곳에서 말이다. 세이덤의 바위 사이나 소룡산의 정상 등... 옛날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오랫동안 비가 안 오는 이유를, 이런 곳에 묘를 썼기 때문이라면서, 묘혈을 파 헤치는 이유로 삼았었다.
▼ 소룡산에서 오휴마을로 하산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소룡산 정상 바로 밑에 위치한 헬기장을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왼편의 길은 진양기맥 마룻금이기 때문에, 오휴마을로 가려면 오른편 길로 내려서야만 한다. 그러나 이곳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무심코 걷다가는, 선등자(先登者)들의 리본이 많이 걸려있는 왼편으로 들어설 우려가 높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진양기맥을 답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때문이다. 산악회 안내지를 보고 왼편으로 한참을 내려서고 있는데, 저 밑에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선두대장께서 방향을 잘못 잡은 모양이다. 꽤 멀리 내려온 것이 억울하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는 것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참을 더 많이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게 사람의 인심(人心)인 것을 어찌하랴??
▼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에 무제봉(舞祭峰)을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올 때, 이곳의 관할 관청에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이란다. 혹시 위에서 말한바 있는, 산봉우리 등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묘혈(墓穴)들을 파 해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제봉에서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15분 정도 더 내려가면 왼편에 강씨굴이 있다. 임진왜란 때 강씨 성을 쓰는 사람이 부모님을 모시고 난을 피했던 곳이라는데, 높다란 절벽 밑에 서너 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동혈이 입을 벌리고 있다.
▼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도 20~30년 정도는 보통이요 많게는 100년도 넘은 老松들로... 그런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나무가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림자보다도 우릴 먼저 반기는 것은 은은한 솔향이다. 나른한 봄 볓에 지친 늦은 봄이지만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서, 솔향에 취하고 또 피톤치드에 젖다보면 산을 오르는 힘듬 정도는 금방 보상받게 된다
▼ 강씨굴에서 진귀암 방향 下山路와 나뉘는 삼거리를 지난 후, 조금 더 내려가면 이곳 소룡산에서 임란을 피했던 사람들이 왜적(倭敵)들의 동태를 살폈을 것으로 보인다는 망(望)바위이다. 망바위에 올라서면 지리산 방향의 高峰들이 선선히 눈앞으로 이끌려온다.
▼ 망바위에서 비탈이 심한 계단을 내려서면 오른편으로 홍씨굴의 이정표가 보인다. 경사가 심한 흙길을 100m 정도 내려가면 거대한 암벽의 틈새가 보이고, 그 앞에 ‘임진왜란 때 인근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서 난을 피했다’는 내력이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나라에 난(亂)이 발생할 경우, 수많은 선현(先賢)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적을 물리치는데 나섰다. 유림(儒林)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초들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양반이라는 사람들이 난을 피해 이런 곳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니... 과연 안내판까지 내걸어가며 이를 홍보해야 하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홍씨굴에서 숲을 벗어나는 지점까지는 얼마 멀지 않다.
*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던 중, 흰 까마귀가 막대기를 물고 가는 곳을 보고 뒤따라가 보니, 홍굴 앞 바위에 머물더란다. 그래서 그 아래에 터를 잡고 산 것이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을 오휴(烏休)라고 불렀단다.
▼ 산행날머리는 오휴마을 주차장(駐車場)
소룡산의 숲을 벗어난 등산로는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와 연결시켜 놓는다. 오휴마을까지 길게 이어지는 등산로 주변에는 쑥과 고(꼬)들빼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산행을 마친 아낙들은 너나할 것 없이 주저앉아 나물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왼편에 보이는 저수지를 벗어나, 모퉁이를 돌고나면 저 아래에 오늘의 산행이 마감되는 오휴마을이 바라보인다. ‘뭐 볼만한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왔능교?’ 동네어귀에서 만난 아지매의 말씀과 같이, 오래토록 남을 만한 특징은 얻지 못한 채로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 수확(收穫)의 계절이 꼭 가을만은 아니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철마다 나름대로 수확할 것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오늘은 이른 봄, 산과 들은 나물들로 가득 차 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취나물은 산의 아랫자락에서 꽤 많이 보였고(능선 상에도 많이 보였으나 채취하기에는 조금 일렀다), 소룡산 정상에서는 토실토실 살이 오른 고사리들이 반겨 주었다. 물론 산행 내내 함께 한 원추리도 있었고... 산을 내려오는 農路의 길가에는 쑥과 고들빼기들... 부지런한 집사람 덕분에 우리 집 밥상은 당분간 풍요로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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