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산 (1,365m)


산행코스 : 모릿재→임도→잠두산→안부→백석산→마랑치→영암사→던지골→송어양식장 (산행시간 : 점심 및 휴식시간 포함, 5시간)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대화면의 경계

산행일 : ‘09. 5. 23(토요일)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색 :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높은 산이지만, 버스가 다니는 모릿재에서 시작하면 짧은 시간 안에 잠두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바윗길이 간간히 섞인 등산로는 대부분 포근한 흙길... 다만 던지골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경사가 만만치 않다. 봄철 나물채취 산행이 아니라면 구태여 시간을 내어 찾아볼 이유는 없을 듯...   

 

 

산행들머리인 모릿재 터널

대화면 신리와 진부면 마평리를 잇는 지방도로가 백적산과 잠두산 사이의 낮은 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산행은 터널 50m 전방에서 우측의 임도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임도의 고갯마루에서 잠두산을 가려면 우측의 통신시설 방향으로 올라서야한다. 반대편 산 들머리에는 백적산 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있다.

오늘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 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구나.

 

 

잠두산 가는 등산로는 비교적 유순한 능선이 계속된다. 등산로 주변은 신갈나무 군락... 몇 십년 살아왔음직한 거대한 참나무들이 신록의 빛깔에 젖어 하늘 한자락 보여주지 않는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씩 곰씹으면서 지루해 질수 있는 삶을 추수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잠두산 가는 길은 큰 고도차가 없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수림아래 발목을 덮는 낙엽길을 걸으니 푹신푹신한 양탄자 위를 걷는 듯, 심신이 두루 평안하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신록이 눈이 부시다. 거뭇거뭇한 소나무의 진녹빛에서 참새 혀처럼 뾰족하게 솟은 청아한 빛, 그리고 하늘을 가려버린 참나무의 짙은 연록빛까지 산은 온통 푸르다. 농담을 달리하는 녹색의 계조, 이 계절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드문드문 스러져가는 철쭉꽃의 농염함까지 가세했으니, 어느 시인이 있어 이런 아름다움을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길가엔 등산로 주변엔 철쭉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그 분홍빛 꽃잎따라 흩어지는 붉은 빛살... 5월 중순의 연초록 빛 전지위에 알알이 박힌 붉음은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철쭉나무도 땅에 착 달라붙어있는 듯한 작은 나무가 아니라 가지가 다발을 이룬 높이 2미터가 넘을 듯한 큰 나무들이다

 

 

잠두산 정상이 빼곡히 보이는 곳에서부터 등산로는 급경사가 시작된다. 가파른 바위지대가 정상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물먹은 바위가 수입등산화의 비브람창까지 거부할 정도로 미끄럽기 한량없다. 조심, 또 조심...  

내가 바라는 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릴 것이다.

 

 

잠두산이 가깝게 보여 금방 오를 듯 했는데도, 정상은 시종 그만그만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가 전위봉을 출발한 지 30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잠두산 정상에 도착... 급경사 오르막길이 무척 힘들다 했더니만, 확인해 보니 전위봉에서 정상까지 약 250m의 고도차를 보이고 있다. 힘들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것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잠두산 정상(산의 모습이 누에벌레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바위와 잡목터널을 지나면 T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에 잠두산이라 적힌 푯말이 매달려 있다. 이렇다할 정상석 하나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산... 날씨가 맑으면 왼쪽에 금당산과 거문산, 오른편에 오대산, 발왕산 등이 보이겠으나, 오늘의 일기예보는 가는 비... 사위는 온통 구름에 덥혀 조망은 일절 없다.  

 

 

 

걷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파란 산죽이 운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 뒤에 원시림을 이룬 거목들이 병정처럼 줄지어 있으니 이런 길이라면 마냥 걸어도 전혀 힘들다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잠두산에서 백석산에 이르는 능선은 가히 산나물의 천국...

잠두산에서 백석산까지의 길은 큰 고도차가 없어 아주 편안한 진행이 된다. 특히 중간 안부까지는 펑퍼짐한 육산형태인데다가 거의 평지길에 가깝다. 이 능선 곳곳은 산나물의 보고이다. 산록의 5월 중순을 나타내려는 듯 노랑제비꽃들이 화원을 이루고 있는 사이사이에 곰취, 참취, 단풍취가 자주 눈에 띄고, 참나물과 당귀의 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산나물은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육산의 경사면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노랑 제비꽃으로 가득한 풀밭화원... 별처럼 빛나는 작은 꽃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가히 천상화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온통 짙은 운무에 둘러싸여있는데도 저렇듯 아름다운데, 만일 화창한 날씨였다면 얼마나 더 화사했을까? 비록 이곳뿐만이 아니고, 5월의 우리 산들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요란한 천상의 화원이 되어 간다.  

 

 

백석산 정상

정상은 헬기장이다. 여긴 잠두산보다는 조금 나은 듯... 대화면장이 세워 놓은 정상표시판이 서 있다. 비록 작고 초라할망정... 백석산에서 마량치로 가는 능선에는 백석산 정상보다 더 높은 봉우리들이 있어서 표시판이 없으면 정상이 어딘지 몰라 헤매고 다닐 것이 뻔하다.  

 

 

백석산은 이름으로 유추해 보면 ‘하얀 바위가 있는 산’, 그러나 백석산 어디에도 흰 바위는 없다.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석이버섯을 멀리서 보면 하얗게 보이는데, 이곳 백석산 바위에 석이버섯이 많다’ 그래서 백석산이라 불리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온다.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요샌 한창 땅기운이 왕성할 때다.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산천초목을 통해 지상으로 분출하고 있다.

 

 

백석산 정상은 뾰족한 암봉이다. 암봉은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 비슷한 암봉 두어 개를 더 솟구치고 있다. 하지만 백석산은 서쪽이 험준한 암벽을 이루고 있을 뿐 동쪽은 밋밋한 사면으로 이루어진 육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암봉으로 보이던 것은 주능선 서쪽을 형성하고 있는 일정한 높이의 단애일 뿐이다.

흙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힘이 비록 나에게 이르러 잎이나 꽃이 되어 피어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 풍진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어찌 미소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마랑치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1Km 정도의 거리로서, 정상과의 고도차이가 60m정도밖에 되지 않아 길은 평탄하다. 이 구간에는 참취와 곰취 등 산나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땅기운과의 편안한 친화감에 힘입어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된다. '이렇게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만 살게하소서' 라고,허나 이렇게 엄청난 욕심이 어찌 기도가 되겠는가. 응석이지...

 

 

 

해발고도가 1200여 미터쯤에 위치한 영암사에서 던지골까지는 약 600미터의 고도차를 보이는 급경사... 겨울이건 여름이건 이 급사면을 오르는 일은 꽤나 힘이 들듯 싶다.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영암사는, 개화기 때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기 위해 지어 사용했는데, 6·25전쟁 이후 사찰이 되었단다. ‘허름하고 퇴락한 여염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 )  

 

 

하산길 능선은 암릉은 아니지만 곳곳에 바위가 불거져 있어서 암릉같아 보인다.

 

효율적으로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지그재그로 길을 내 놓아, 심한 경사도에 비해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거기다 곳곳에 하얀 동아줄을 매어놓아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마 절을 찾는 신도들을 위해서 영암사에서 설치한 듯...  

 

 

던지골

영암사에서 도상거리 1km 정도의 구간을 고도 600m가까이 낮추는 것은 그야말로 뚝 떨어지는 급경사... 내리막길을 40분쯤 내려오면 계곡을 접하게 된다. 계곡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수량은 풍부한 편으로 여름철 알탕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평창은 진경산수의 땅이다. 송림과 활엽수림, 그리고 유장하게 흐르는 평창강이 어우러져 속 깊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땅 어디라고 그런 미학이 없는 곳 없겠지만... 적당한 산과 적당한 물, 그리고 숲이 찾는 이의 한가로움을 자극한다.  

 

 

산행 날머리인 던지골 입구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임도를 따라 10분을 내려가면 던지골 마을이 나타난다.

오늘 찾은 백석산, 잠두산은 보는 시점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지만 한결같이 장엄하고, 관대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섣불리 산을 정복해 보겠다고 날치는 젊은 날들에는 결코 볼수 없는 산의 진면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