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7구간(송정-오미)
여행일 : ‘22. 5. 7(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원
여행코스 : 송정마을(1.8km)→송정계곡(1.4km)→원송계곡(2.7km)→노인요양원(4.5km)→문수저수지→오미마을(거리 및 시간 : 10.4km/ 실제는 10.78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7구간(송정-오미)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0.4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간도 역시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된다. 342m 높이의 ‘의승재’를 오롯이 넘어야하는데다 나머지 구간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길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다채로운 형태의 숲들을 만날 수 있어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들머리는 송정마을 ‘둘레길 주차장’(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 82-22)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한수교’ 직전에서 좌회전 ‘토지·송정길’로 들어서 1km 조금 못되게 올라오면 둘레길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꼬맹이 주차장이 나온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가탄 10.6㎞←송정→오미 10.4㎞)는 내한마을 쪽으로 100m쯤 올라간 곳(‘별밤펜션’입구 근처)에 설치되어 있다. 17구간도 그곳에서 시작됨은 물론이다.
▼ 15구간의 거리는 10.4km. 숲길·임도·농로·마을길 등 다채로운 길을 걸으며 토지면의 전경과 섬진강을 눈에 담아가는 여정이다. 조선의 선비정신도 엿볼 수 있다. 오미마을에서 만나는 운조루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noblesse oblige’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자신의 쌀독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구제한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내한마을 쪽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레길이 100m쯤 올라간 지점을 횡으로 째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송정마을은 한국전쟁 때 소실의 아픔을 겪었던 마을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별장과 펜션이 계곡을 따라 줄지어 들어섰다.
▼ 곧바로 숲으로 들어서면서 돌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가팔라도 너무 가파른 것이다. 시작부터 기를 확 죽이는 것이 명색이 지리산인데 섣불리 덤비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는 것 같다.
▼ 10분쯤 올랐을까 첫 번째 벅수(오미 10.1㎞/ 송정 0.3㎞)가 보이는가 싶더니 길은 산모퉁이를 돌아 우측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나무 숲속에서 집터의 흔적을 찾아낸다. 뒤란 밖으로는 잡풀에 뒤덮인 묵밭이 상당한 넓이로 펼쳐진다. 오래 전 누군가가 살았음이리라.
▼ 묵밭을 지나자 길은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잠깐 쉬며 타월을 쥐어짜니 쏟아지는 땀방울이 한 됫박은 될 성 싶다. 그러고 보니 그제가 입하(立夏). 절기는 겨우 여름의 문턱을 넘어섰건만 날씨는 이미 삼복으로 들어서버린 느낌이다.
▼ 그렇게 15분쯤 더 오르자 두 번째 벅수(오미 9.7㎞/ 송정 0.7㎞)를 만나고, 이 부근에서 우린 산불의 흔적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소방헬기 17대가 이틀간이나 물을 뿌리고 나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는 현장이다. 11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푸르러졌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 않았던가.
▼ 호흡이라도 가다듬으려는 듯 길은 완급을 조절해가며 이어진다. 그러다보면 어른의 허리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 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이렇듯 이 구간에서 만나는 숲은 다채롭다. 산불에 데였는가하면 조림을 위해 벌거벗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새 생명이 지란다. 속살이 차가면서 지리산은 예전처럼 아름다워져 간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랄까?
▼ 10분(들머리에서 35분)쯤 더 오르자 ‘의승재’이다. 17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342m)으로, ‘의승’이란 지명은 정유재란 때 구례 사람들이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 고갯마루에는 이름표(의승재)까지 단 벅수(오미 9.3㎞/ 송정 1.1㎞)말고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라도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 ‘고진감래’랄까? 의승재로 오르면서 겪었던 고생은 고갯마루를 넘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온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심신안정과 피로회복에 그만이라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들로 가득한 산길을 걷는데 까짓 피로쯤이야 어찌 줄행랑치지 않겠는가.
▼ 가뿐하게 내려서는데 편백나무의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 있던 피로감이 덜어졌음은 물론이다.
▼ 편백나무 숲을 지나자 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올라왔던 만큼 떨어지는 대신 길은 다채로움을 더한다. 굽어졌다 펴졌다 하는 길, 돌계단, 얕은 축대로 막은 비탈 그리고 그 아래 흙길. 우두커니 서있는 나무들 사이로는 햇살이 비치고 나뭇잎은 햇살에 반짝인다.
▼ 휘파람 불어가며 15분쯤 내려섰을까 둘레길은 ‘송정계곡’이라는 작은 개울을 건넌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숲에서 만난 귀하신 몸이다. 발을 담글 수 있는 유일한 계곡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먼저 도착한 이들 몇이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땀에 젖은 몸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씻고 발을 담그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 봄 가뭄 탓이지 물이 흐르지를 못하고 곳곳에 웅덩이만 만들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들로 뒤덮인 것이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제 몫을 다할 수도 있겠다.
▼ 조금 더 걷자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벅수(오미 1.9㎞/ 송정 8.5㎞)는 ‘석주관 갈림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이 길을 따라가면 국도변에 ‘석주관(石柱關)’이 있다.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고,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으며,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쌓은 성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이곳을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한 ‘일곱 의사의 무덤(七義士墓, 사적 제106호)’과 사당이 있다.
▼ 둘레길은 이곳에서 ‘남도 이순신길’과 만난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했다. 그런데도 이정표는 ‘백의 종군로’라고 우긴다. ‘백의종군로’는 이순신이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투옥(1597년)되었다가 출옥한 후, 의금부를 출발하여 경기·충청·전북·전남을 거쳐 율곡면(합천군)에서 권율 도원수를 만날 때까지의 행로(670km)를 말하는데도 말이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남도 이순신길’을 보탠다. 그리고는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고개나 산을 넘어가는 것은 아니고 그저 산허리를 에둘러 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길은 산허리를 째며 이어진다. 가끔 오르막도 있지만 주로 산허리를 돌아가는 완만한 길이라 걷기에 편안하다.
▼ 산허리를 에돌다보니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발아래 섬진강변에는 ‘어류생태관’이 들어섰고, 그 뒤는 2016년에 올라봤던 계족산(鷄足山, 705m)이 버틴다.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난 바윗길에서의 스릴과 툭 터진 조망을 핑계 삼아 다시 가고 싶다고 꼽았던 산이기도 하다.
▼ 산모롱이를 돌아 임도로 내려선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지그재그로 산허리를 감아나간다. 경사로를 내려가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내가 무릎이 불편한지 거꾸로 내려가고 있는데,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부부애의 자연스런 표출이 아닐까 싶다.
▼ 송정계곡에서 33분(들머리에서는 1시간25분). 밤나무단지(벅수 : 오미 7.2㎞/ 송정 3.2㎞)에 내려서니 둘레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왼편으로 내려가면 섬진강변에 위치한 ‘원송마을’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작은 개울을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원송계곡’일 것이다.
▼ 개울을 건넌 둘레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산허리를 에돌아가며 위로 향한다. 이때 밧줄난간을 매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 산모롱이에 올라서자 눈이 즐거워진다. 편백나무 조림지가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섬진강 건너에는 간전면의 하천산이 우뚝하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밤나무단지(벅수 : 오미 6.8㎞/ 송정 3.6㎞)가 나온다. 이 부근의 길은 수없이 갈라지고 또 합쳐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벅수(이정표)’를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길을 잃었다면 하나만 기억해 두자.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놓친 벅수를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다. 벅수가 촘촘히 세워져 있기 때문에 금방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5분. 육각정(벅수 : 오미 6.7㎞/ 송정 3.7㎞)이 걸터앉은 언덕에 올라섰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를 안주삼아 박주 한잔 나누기에 더 좋은 장소다.
▼ 육각정을 지나면서 또 다시 임도를 따른다. 가슴에 담을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으나, 그렇다고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다.
▼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데 젊은이들 몇이 쉬고 있었다. 이처럼 지리산둘레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저런 싱싱한 청춘들 말고도 부모를 모시거나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보는 이들까지 가슴 설레게 만드는 연인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조금 더 걷자 시야가 열리면서 ‘토지면(파도리)’의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이 넓은 치마폭을 펼쳐 보이는가 하면, 그 뒤편으로는 오산이 걸려있다. 맞다. 이렇듯 17구간(송정-오미)은 토지면의 들녘과 굽이굽이 섬진강을 걷는 내내 바라보게 된다.
▼ 강 안쪽 습지가 발달된 곳에는 수달 보호로 유명한 ‘섬진강어류생태관’이 들어섰다. 섬진강 민물고기의 생태전시관과 민물고기학습장, 생태연못 등으로 꾸며졌는데, 멋진 스카이워크 전망대를 새로 지으면서 또 다른 진화를 예고하고 있다.
▼ 굽이굽이 섬진강이 더욱 또렷해졌다. 구례에서 잠시 들판을 적신 섬진강은 간전교를 지나면서 골짜기로 접어든다. 그 물줄기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유연하다. ‘그림 같은 풍경’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풍경에 반한 집사람의 발걸음은 자꾸만 더뎌지고 말이다. 그걸 본 나 또한 즐거우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시야를 열어주며 20분쯤 이어지던 둘레길이 또 다시 숲속(벅수 : 오미 5.8㎞/ 송정 4.7㎞)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예쁘장한 나무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 이름 없는 개울이지만 다리 아래 물길은 상당히 넓었다. 지도에까지 나오는 송정계곡이나 원송계곡보다 오히려 넓을 듯. 봄 가뭄으로 인해 갇혀버린 물웅덩이의 규모가 제법 큰 것이 여름철에는 물놀이 장소로 제격이겠다.
▼ 이를 놓칠 지자체가 아니다. 개울가에 평상을 놓고 그늘막까지 쳐 의젓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 쉼터에는 ‘남도수군재건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과정은 구례에서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해 곡성·순천·보성으로 이어진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군량·군선을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 쉼터를 끝으로 숲길을 빠져나온다. 이어서 복숭아와 대봉감이 주류를 이루는 과수단지를 지난다.
▼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 가구회사의 명품 광고다. 그런데 과학은 침대뿐만이 아닌가보다. 길가 과수원의 대봉감이 하나같이 어른 키 높이로 자라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일손을 확 줄여줄 수 있으니 저게 바로 ‘과학 영농(科學 營農)’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는 토지면 일대를 남한의 ‘3대 길지’ 중 하나로 꼽았었다. 그래선지 잘 써진 묘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래 묘역도 그 가운데 하나. ‘左靑龍右白虎, 背山臨水’이니 아마추어인 내가 봐도 명당의 기본을 갖췄다. 그런데 뒤로 도로가 나면서 맥을 잘라버린 모양새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 이후부터 둘레길은 ‘등평들’의 농로를 따른다. 마을 뒤 산비탈에 형성된 논과 밭을 다니며 이용하는 길이다. 이때 토지면과 간전면의 산과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구례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그렇게 18분쯤 진행했을까 구례양로원 앞에서 또 하나의 쉼터를 만났다. 쉼터이니 사각의 정자는 기본. 거기에 지리산둘레길의 시설물인 벅수(오미 4.8㎞/ 송정 5.6㎞)와 구례구간(7개 구간, 86km)안내도, 그리고 ‘남도 이순신길’의 시설물(안내도, 이정표)까지 더했다.
▼ 벅수가 지시대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 ‘구례군 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백세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시설이다. 구례군에서 운영하는 이 요양원은 치매와 같은 중증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에게 다양한 복지혜택을 주고 있단다.
▼ 둘레길은 요양원을 옆에 끼고 돌아가 임도로 연결된다. 그런데 홀로 가는 것이 무료했던가 보다. 가다가 휘고, 휘었다가는 내리받이로 달리고, 다시 치고 오르는가 하면, 쉬엄쉬엄 평지로 늘어지며 장난치듯 십리 가까이의 길을 그렇게 간다.
▼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는다. 아니 가로수로 심은 단풍나무가 저렇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지루해 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길은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이 제격이겠지만 청초를 자랑하는 여름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18분쯤 걸었을까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 위에 ‘파고라’형의 정자가 들어앉았다. 파도리의 너른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조망의 명소다. 그 뒤의 국사봉과 계족산 능선, 그리고 백운산 자락까지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다.
▼ 평상에 걸터앉자 섬진강이 성큼 다가온다. 지리와 백운을 양 옆에 둔 섬진강은 늘 봐도 눈이 시리게 정겹다. 사성암을 품은 오산을 굽이돌아 섬진강이 흐르고, 구례읍 뒤로는 견두산-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렇다고 조망이 끝나지는 않는다. 쉼터에서 보던 풍경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참! ‘파도마을’ 앞 섬진강은 다슬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물속의 웅담’이라 불리는 다슬기는 간의 열과 눈의 충혈, 황달을 제거하고 이뇨작용을 촉진시켜 체내 독소를 배출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다슬기탕’의 주원료다.
▼ 10분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쉼터로 조성된 작은 공원이 반긴다. 이번에는 체육시설까지 갖췄다. 주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이곳까지 찾아와 몸을 푸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 부지런한 나무는 벌써부터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니 저건 사시사설 붉은 홍단풍이 분명하다. 봄단풍 혹은 노무라단풍으로도 불리며 정원수로 각광을 받는 품종 말이다. 그나저나 모든 잎새가 꽃으로 피어난다는 가을. 그 계절에 다시 찾아와보고 싶다. 그리고 ‘붉었도다 붉었도다 청산에 단풍이 붉었도다…’나 ‘시월 단풍 꽃밭이요 꽃밭 속에 동자가 놓여 꽃밭 속에 신선이 논다…’ 같은 단풍의 예찬론을 읊조리며 걸어보고 싶다. 그만큼 마음에 쏙 드는 둘레길이란 얘기다.
▼ 단풍나무도 꽃을 피우나보다. 맞다. ‘오매 불나부렀네’로 단풍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다소 생경스럽겠지만, 단풍나무도 4~5월에 꽃을 피워낸단다. 꽃말은 ‘사양, 은둔, 자제’. 잎새 아래서 숨은 듯 피어나는 꽃의 형태와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 단풍의 매력에 빠져 걷길 25분. ‘솔까끔’이라는 별장촌(벅수 : 오미 2.5㎞/ 송정 7.9㎞)을 지난다.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단지에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았다.
▼ ‘까끔’은 동산의 전남지방 사투리이다. 그러니 ‘솔+까끔 마을’은 소나무가 그득한 동산에 들어앉은 마을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조금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문수저수지의 높은 둑이 보이는가 싶더니 저수시 아래에다 터를 잡은 ‘내죽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하늘에 사는 선녀가 경치 좋은 이곳에 하강 하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구름 위에서 잃어버렸다고 전하며, 이 반지가 묻힌 곳에 터를 잡으면 부귀영화가 뒤따른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 내죽마을의 배후 산인 ‘왕시루봉’은 출입을 금한단다. 비법정탐방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나 같은 산꾼들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생태계 복원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지니 어쩌겠는가.
▼ 단풍으로 치장된 임도는 문수저수지(벅수 : 오미 1.7㎞/ 송정 8.7㎞)를 마주하면서 끝난다. 노고단은 형제봉능선과 왕시리봉능선을 만들고, 두 능선 사이에 문수골(덕은내)을 형성했다. 그 문수골 하류에 댐을 막았으니 곧 문수저수지이다. 참고로 구례는 물 부족을 고민하는 지역으로 알려진다. 한때 지리산 노고단에 있는 큰 바위의 방향을 조절해 전북 남원으로 갈 물을 구례로 이동시켰다가 지역간 '물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문수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쌓아올린 농업용 저수지이다. 썩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풍광만은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저수지 둑에는 샤스타데이지가 만개해 있었다. 미국의 육종학자 ‘루터 버뱅크’가 프랑스의 들국화와 동양의 섬국화를 교배하여 만든 개량종으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꽃말은 인내, 순진, 평화라고 한다.
▼ 문수저수지에서 크게 방향을 튼 둘레길은 ‘내죽마을(벅수 : 오미 0.8㎞/ 송정 9.6㎞)’로 내려선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울창하여 이를 상징하는 대(竹)와 문수천의 시냇물(내)를 따서 ‘대내’라 부른다는 마을이다. 오미동 뒷산의 대밭 골을 중심으로 안쪽에 있다 하여 ‘안대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내죽(內竹)’으로 개칭했단다.
▼ 마을회관 앞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1500년경 진주하씨와 김해김씨, 경주이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고, 후에 문화이씨, 진주정씨, 밀양손씨 등이 입촌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단다.
▼ 마을회관 옆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졌다. 목화를 재배하여 솜을 만들고, 물레로 실을 뽑아 베틀에서 무명베를 짜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내가 찍은 사진이 시원치 않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마을에는 한때 세상을 쩡쩡 울리던 ‘소망교회’가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교회 맞은편에 있는 ‘안곡수퍼’가 더 반갑다. 더위에 지친 몸이 뭔가 시원한 것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원한 캔 맥주 하나를 단숨에 비우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후식 삼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
▼ 마을 앞 수로에는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발 담그는 장소로 더 어울리겠다. 주민들이 이해만 해준다면 또 하나의 둘레길 명소가 되지 않을까?
▼ 정원수처럼 잘 정돈된 향나무들을 가로수삼아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 ‘하죽마을(벅수 : 오미 0.4㎞/ 송정 10.0㎞)’이 길손을 맞는다.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쉰다는 이 마을은 조선 영조 때 경주 출신의 이기명(李基鳴)이 이곳을 길지로 여겨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뒤에 경주최씨 등이 합류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후로도 풍수지리설의 길지를 찾아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단다.
▼ 하죽 마을의 수문장인 250년 된 보호수(서어나무)를 지나자 드디어 ‘오미마을’이다. 날머리를 코앞에 둔 지점. 오른편에 국가민속문화재(제8호)인 ‘운조루 고택(雲鳥樓 古宅)’이 있다.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1776)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조선 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의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참! 대문밖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란 나무통(진품은 유물관에 있다)이 놓여있었다. 베푸는 자의 마음이 담긴 뒤주인데 자세한 얘기는 뒤에 거론하겠다.
▼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연당부터 살펴본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의 원칙대로 네모 난 연못 가운데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해 연못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 연못은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즉 금환락지의 혈(穴)이라고 한다.
▼ 집은 ‘一’자형의 하인들 방(행랑채)과 ‘T’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안채의 보수공사(일부는 헐어내고 아예 새로 짓는단다)가 한창이어서 행랑채와 사랑채 외에는 살펴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타난다. 그런데 건물을 받친 기단이 꽤 높다. 하지만 마당이 넓은 탓에 보는 이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의 혼합. 즉 영남출신 유이주가 호남 땅에 터를 잡으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형식이란다.
▼ 사대부의 로망이 담긴 ‘누마루’의 난간에는 연꽃을 새겨 넣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이후 유학자에게 연꽃은 군자를 상징해왔다. 그래선지 이곳 운조루도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대나무·매화를 주변에 심어 그 의미가 누마루의 연꽃에서 하나가 되게 했단다. 지조 굳은 군자의 삶을 꿈꾸면서.
▼ 이번엔 운조루 남쪽 300m 지점에 위치한 ‘곡전재((穀田齋, 구례군향토문화유산 9호)’로 향했다. 1929년 승주군 황전면에 살던 7천석의 부호 박승림(朴勝林)이 명당을 찾기 위해 십여 년을 돌아다니다가, 옛 비기에 나오는 금환락지(金環落地)라 여겨지는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터의 기운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락지 모양의 담장을 높이 쌓았단다.
▼ 안으로 들자 ‘삼락당(三樂堂)’이라는 중간채. 오래된 농기구와 요즘 보기 어려운 옛 물건이 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어서 ‘一’자형의 안채가 나타난다. 1900년대 초 영호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란다. 1940년에 이교신(택호인 ‘穀田’은 그의 호이다)이 집을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그 후손으로 보이는 여인이 마루에서 빨래를 개키고 있었다.
▼ 현재 민박(고택체험)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는 대문 옆 사랑채와 중간채(삼락당), 동·서 행랑채, 안채로 구성돼 있다. 삼락당의 누각(춘해루)에서 돌아서면 세연이라는 이름의 연못과 함께 동·서 행랑채, 그리고 안채 마당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 가운데 서쪽 행랑채는 ‘자율 녹차방’으로 개방되어 있다한다. 주인장이 직접 키우고 집에서 덖어낸 전통방식 수제차라니 한번쯤 이용해봄직도 하다.
▼ 마지막으로 ‘운조루유물전시관’에 들렀다. 운조루에 소장되어 온 유물들이 여러 차례 도난당하자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새로 세웠는데, 할아버지와 손자가 100년 동안 썼다는 생활일기부터 운조루 현판, 생활민속품 등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 유물전시관의 가장 큰 볼거리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붙은 나무통이다. 쌀이 3가마쯤 들어가는 뒤주인데, ‘누구나 열 수 있다.’는 글귀대로 운조루의 주인은 마을의 배고픈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뒤주를 열어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단다. 1년 소출의 1/5에 해당하는 쌀 36가마를 그렇게 썼다니 ‘noblesse oblige’의 진정한 발로라 하겠다. 각종 민란·동학·여순사건·6.25 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 속에서도 운조루가 230여 년 동안 건재했던 이유란다.
▼ 전시관은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펼쳐놓았다. 100년 동안 쓴 생활일기부터 그들이 사용하던 생활민속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유물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그보다는 ‘noblesse oblige’을 실천한 그네들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중 하나가 운조루의 굴뚝이다. 가난한 이웃이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배고파할 것을 생각해 굴뚝을 툇마루 아래에 만들었다는...
▼ 날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五美亭)
오미마을은 한옥 체험(민박)을 위해 지어진 새로운 집이 여러 채 있어 하룻밤 묵어가기 안성맞춤이다. 그 마을의 어귀 정자나무 그늘아래에 자리한 오미정(五美亭)이 17구간과 18구간의 경계지점이다. 엠블럼과 벅수도 이곳에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완주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0.78km를 찍고 있으니 엄청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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