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가 살았다는 남원 운봉마을
뒤로 산 하나가 웅장하게 서있으니 이름하여 바래봉...
지리산 서북 능선에 자리잡은 1165m 높이의 밋밋한 봉우리랍니다.

 

스님들 밥그릇(바리때)을 엎어놓은 형세라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그 질박, 검소해야 할 '절집 밥그릇'이
어떤 부잣집 꽃병보다 화려하게 변해버린다는 얘기에 도대체 어느 정도?..

 

진분홍빛 철쭉이 아우성을 치며 온 산을 불태운다 하니
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산, 한번쯤은 올라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남원IC에서 운봉을 지나온 버스가 멈춰 섰으니 여기가 국립종축장?
아니 목장입구라 들었는데 웬 초등학교 앞에서 멈춰 서서는 무조건 걸으라네요.
산은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햇볕가릴 그늘 한점 없는 비포장 일색...
태생이 등산길이 아니라 목장 작업도로라서 멋이라곤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다 못해 지름길이라도 있으련만 트럭 두 대쯤 비켜갈 만큼 널찍한 신작로뿐입니다.
거기에 사람들 북새통에 속도를 내고 싶어도 앞사람 어깨에 걸려 힘이 드는군요.
상큼한 공기에 달콤한 향기를 찾아 온 바래봉엔 온통 시끄러움과 먼지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산행과 곱기로는 세상 으뜸인 산행길
두 극단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내 사전 정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아! 준비해둔 감탄의 저편에서 찾아야 할 쩔쭉의 무리는 그 어디에도 없답니다.

 

지루함이 극에 달할 무렵 거대한 철쭉밭...
그러나 이미 시들어버린 꽃술엔 한숨으로 답할 수 밖에 없답니다.

 

완만한 경사면에 붉은 철쭉이 마지막 생을 태우고 있습니다.
옳거니 성질급한 산사람들 밭으로 들어가 기념사진 찍기에 바쁘군요.
아직 군락지엔 도착도 안했는데...
내려오는 어느 등산객의 눈웃음 속에서 "망우리와 무학대사" 전설을 떠올리며 실소를 짓습니다.

 

행여 "어리석은 무학"의 의미를 알아낼까
오기와 끈기로 한참의 땡볕을 더 버텨보지만
도무지 다른 산보다 조금도 나을게 없는 못난이 산일 따름입니다.

 

그래도 참자.
이를 악물고 도달한 앞이 탁 트인 두갈래길에서 청파님과 바래봉으로 향해봅니다.
밋밋한 정상이 무에 볼게 있겠습니까만
두 번은 오고싶지 않은 철쭉놀이에 이왕이면 정상을 밟아두고 싶은 산사나이의 맘에서지요

 

오른쪽 정령치쪽 능선으로 또 꾸역꾸역 올라서 봅니다.
철쭉의 무더기들이 점점 커지고... 또 붉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워메~  산불 나부렀네, 산불~!"
그래~ 거기엔 온통 타오르는 산만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뭄에 좋은 나무들은 목장 염소들이 홀랑 잡아먹고,
'꿀을 따던 벌이 기절할 정도'로 독성이 강한 철쭉만 살아남았다나요?
푸른 초원과 철쭉군락...
그야말로 산청화욕연(山靑花欲然)입니다.

 

봉우리하나를 진분홍 철쭉으로 덮어버렸나 하면
초원 가운데 오롯이 난 오솔길...
양옆에 둥그렇게 철쭉 무리를 심어놨군요. 모두가 염소 작품이랍니다.
아까부터 부지런한 동행은 하나라도 더 추억을 선물하고파 열심히 셔터를 눌러댑니다.

 

철쭉 꽃길이 모두 30만평이랍니다.
말이 30만평이지 눈앞에 펼쳐진 꽃길 끝은 구름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게 바로 "자연이 만든 미학이 인위를 이기는, 천상화원"이 아닐까요?

 

백두대간 철쭉은 바래봉에서 피어올라
서쪽으로 노고단,
동쪽 천왕봉으로 퍼지고
덕유산으로 소백산으로 태백산, 정선 두위봉으로 북상한답니다.

 

철쭉이 지는 곳에 불쑥 여름이 찾아오고,
꽃불로 뜨겁던 강산이 녹음 짙은 숲으로 서늘한 계절이 됩니다.

 

그럼 또 다시 "입은 채로 퐁당"거리는 계곡산행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우나안의 多不有時이니 잠금장치가 없어 그냥 열립니다.
그러나 여기는 열린세상 열린마음... 다 벗고 노는 곳인데 무에 두렵겠습니까.
단지 산사람의 예의상 답례를 해 줄 따름이지요.

 

조금 후 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속도가 빨라진게 급하나 보지요?

 

아직 산행에 대한 정리가 덜되었는데....

 

그러나 더 이상 버티다간 불상사가 생길까봐 상념의 나래를 그만 접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못 버틴 밖의 분 실수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