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안가져가도 괜찮아요. 친구들이 준비해 온거 같이 나누어 먹으면 되니까요"
평소 우리집 애들의 나들이 때에 하는 말이다.
요즘 부쩍 가을을 타는지 만사가 싫었고, 그냥 의미없는 외로움에 빠지다보니 애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아침에 밥 챙겨주는 것까지 얽매임으로 생각되고... 모든게 귀찮아져 애들에게 신경질 부리는 일까지 잦았던것 같다.
오늘은 그동안의 미안함도 해소시킬겸 애들과 함께 볼링 몇게임 한뒤 모처럼 외식까지 하려 했는데 둘째가 친구들과 야외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야외에 갈때에 필수가 김밥인데도 김밥을 말줄 모르기에 나도모르게 둘째에게 짜증을 부리게 되고, 도시락이 필요없다는 둘째의 어른스러움에 더 마음이 아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나들이 따위는 왜하는냐고 야단치는건 부족함이 많은 아빠의 투정이 아닐까?
일반 도시락이라도 가지고 가겠다는 둘째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들이를 승낙하고, 일주일분 부식거리도 살겸 삼부자가 양제동 하나로마트에 들른후 돌아오는 길에 저녁은 피자로 해결....
다섯시에 일어나 둘째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는데, 큰애가 자기것도 싸 달랜다. 오늘 태권도 관원들 데리고 승단심사에 가는데 소풍기분좀 내겠다나?
도시락 하나엔 밥만, 나머지 하나에 반찬을 담으니 공간이 넓어 꽤 들어간다.
김치는 비닐로 싸고, 고기산적, 동그랑땡, 쏘쎄지는 두개씩 넣은 다음 위에다 케찹을 뿌리고, 단무지, 멸치볶음은 조금, 계란후라이 하나, 오이는 몇 조각 넣은 다음 고추장을 살짝 뿌려주고....
내가 생각해도 이정도면 훌륭한 나들이 도시락이 아닐까 한다. 몇번을 애들에게 보이며 자랑한 다음 포장을 해 주었다.
거기다 어제 사온 밤고구마와 밤을 쪄서 넣고, 후식으로 사과 두개, 사이다캔 2개에, 며칠전 주유소에서 받은 생수 두개를 챙기게 한 후, 용돈 2만원.....
싱글벙글하며 힘차게 현관을 나가는 둘째의 뒷모습이 너무 너무 보기 좋고, 모처럼 부모노릇한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조금 후 큰놈이 부르는 소리에 현관으로 나가니 자기도 용돈달라며 손을 벌린다.
기분 좋은 김에 2만원을 주니 얼마만에 받아보는 용돈이냐며 입으로 여러번을 쪽쪽거리며 집을 나선다. 사실 큰애 아르바이트 시작한 후로는 용돈 한푼 주어본 일이 없었다.
다들 집을 나간 후의 집안에 적막이 찾아든다.
또 다시 찾아온 외로움을 피해보려 창문있는대로 다 열어 제키고 대청소를 시작한다. 현관까지 열면 좋겠으나 팬티만 입고 청소를 하기에 조금은 덥지만 참을 수 밖에 없다.
땀 뻘뻘 흘리며 청소마치고 찬물로 샤워하니 외로움이 어디로 도망갔나 보다.
지금은 오디오에 클레식 CD올려 놓고 나른한 휴식 중...애들 반대로 파출부 부르려던게 수포로 돌아가 원망을 제법 했더랬는데, 오늘 보니 애들 의견에 따른게 잘된거 아닌가 한다. 잠깐이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아빠! 아침식사 거르지 마세요"
이른 세벽 기숙사에 들어간 있는 둘째로부터의 전화입니다.
벌써 아빠를 챙길 정도로 저렇게 훌쩍커버렸나봅니다.
사무실에 출근해 언젠가 써 두었던 글을 찾아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도 어른스러웠던 아이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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