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3코스(창후항 – 강화 제석봉평화전망대)
여 행 일 : ‘26. 5. 30(토)
소 재 지 :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및 양사면 일원
여행코스 : 창후항→송산삼거리→양사파출소→별악봉→평화전망대(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3.25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평화의길)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 09 : 30. 창후항(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김포한강로 및 48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강화읍으로 온다. 계속해서 48번 국도를 타고가다 ‘이강교차로’에서 강화서로(외포리방면)로 옮겨 5km쯤 들어오면 ‘창후항’에 이른다. 서해랑길(인천 103코스) 안내도는 ‘창후어시장’ 앞에 세워져 있다.

▼ 강화도 북부해안선을 따라 동북쪽 코너(강화평화전망대)로 가는 서해랑길의 마지막 여정. 강화도의 북쪽 해안이 민통선 이북이라서 바닷가 대신 산릉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09 : 31. 바다횟집 옆으로 뚫린 ‘신작로(창후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09 : 32. 50m쯤 걷다 바다횟집을 지나자마자 샛길(창후로 옛길)로 들어간다.

▼ 09 : 34. 100m쯤 더 들어가면 ‘무태돈대(無殆墩臺,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3호)’를 만난다.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중 하나로, 창후선착장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흡사 담장을 겹으로 쌓아놓은 것처럼 길쭉하게 지어져 있다. 무태의 ‘태(殆)’자는 위태롭다는 뜻, 앞에 없을 ‘무(無)’자가 붙어 있으니 위험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이름은 중국의 어선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도 중국 배들은 떼를 지어 몰려와 서해를 헤집고 다녔고, 심지어는 해변 마을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잡아가기도 했단다. 오죽했으면 거칠 ‘황(荒)’자에 당나라 ‘당(唐)’자를 붙여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렀겠는가. 그런 황당선의 침입을 막아준다고 해서 ‘창후’라는 지명 대신 위험을 없애준다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 길쭉한 직사각형(44 x 20m)으로 생겼다. 둘레는 210m(높이 1.2-5.3m), 성안에는 해안을 향해 대포를 올려놓는 자리인 포좌(砲座)가 4곳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강화에는 5개의 진과 7개 보 그리고 54개 돈대가 있었다. 돈대들은 진과 보의 관할 아래 있었고, 하나의 돈대에 별장(장교) 2명과 군졸 3명이 돌아가며 수직을 했다.

▼ 경계초소답게 조망이 일품이다. 북쪽에는 ‘교동도’가 있다. 강화도와 석모도의 사이 수로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강화도의 서쪽에 돈대가 많이 배치되어있는 이유이다. 나루나 포구가 적의 상륙 지점으로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남쪽은 ‘창후선착장’이다. 교동도를 오가던 배를 타는 포구였고,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다리가 인화리 쪽에 놓인 다음부터는 한적한 포구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 계속해서 ‘창후로’를 탄다. 바닷가를 따라 1차선의 도로가 나있다. 이즈음 교동도와 화개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 09 : 40. 바닷가를 살짝 벗어나는가 싶더니 아까 헤어졌던 신작로와 다시 만난다.

▼ ‘OCASO’는 스페인어로 일몰, 노을을 뜻한다. coffee&bakery라니 가족단위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조형물이지 싶다.

▼ 09 : 44. 잠시지만 ‘신작로’를 따라왔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창후항’과 ‘월선포항(교동도)’을 잇는 뱃길이 끊기면서 지역 경제가 활력을 잃자 타개책으로 해안도로부터 뚫어놓은 모양이다. 아무튼 편의점 뒤, ‘더한옥 엘리야’ 앞에서 바닷가로 빠져나간다.

▼ 이후부터는 철책을 따라간다. 북한을 앞에 두고 있는 지역답게 바닷가를 따라 철조망이 그것도 이중으로 쳐져있다. 군사시설에 대한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경고방송도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09 : 49. 북괴공작 안내원 서영철 구출지점. 북한의 남파간첩 호송안내원으로 활동하던 서영철이 도착한 지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989년 9월 17일, 서영철은 7시간 이상을 헤엄쳐 이곳 인화리 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해병 초소병에게 귀순 의사를 밝힌다. 빗돌에 ‘체포’ 대신 ‘구출’이라는 단어를 적은 이유이다.

▼ 길은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철책에서 조금 물러나서 길이 나있다. 계속해서 직진할 경우 교동도와 연결되는 ‘인화로’, 도로를 건너 조금 더 들어가면 ‘인화돈대(寅火墩臺)’도 만날 수 있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하나 더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내판 하나가 다인 공터라고 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군인들의 검문·검색이라는 절차도 싫었고 말이다.

▼ 09 : 54. 5분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수로를 왼쪽에 끼고 동쪽으로 이동한다.

▼ 수로 건너는 ‘인화리’ 야산. 교동대교 동단에 위치한 저 산의 어디쯤에 호랑이 눈에서 빛이 나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범 인(寅)’, ‘불 화(火)’자를 써서 ‘호랑이 마을(寅火里)’이 되었다. 정조 때인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은 ‘강화부지’에 ‘남쪽을 향한 바위가 호랑이 모양이어서 인화석진(寅火石津)이라 부른다’고 적었다.

▼ 오른쪽에는 별립산(別立山, 416m)이 있다. 강화도에 있는 다른 산들과 능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산이다. 바위가 적당히 섞여있는 아름다운 산이나, 군부대에 정상을 빼앗긴 서글픈 산이기도 하다.

▼ 09 : 58. 4분쯤 걷다가 수로를 건넜다.

▼ 이번에는 수로를 오른쪽에 끼고 간다. 좌우로는 간척평야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 ‘인화리’는 예로부터 어업이 번성한 동네였다. 하지만 1953년 휴전으로 해안가에 철책선이 쳐졌고 주민들은 더 이상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됐다. 그나마 이런 간척지가 있어 생업을 농업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 10 : 11.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인화마을(寅火里)’이 전면에 놓인다. 인화리는 어업으로 부를 누리던 동네였다. ‘다른 곳은 보리밥 먹어도 인화리 사람들은 쌀밥을 먹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한강 하구, 연평도, 예성강까지 가서 고기를 잡아 팔았다. 서울 마포나루에서 시선배(상선 또는 운반선)가 들어와 조기와 젓갈을 사갔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 부잣집까지 실어가기도 했단다.

▼ 인화로(이정표 : 종점까지 9.5km)로 올라서니 ‘물댄동산마을’이란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초목이 무성한 아름다운 동산에 주택단지라도 들어서 있나 보다. 아니면 ‘이사야(58장 11절)’의 생명과 열매, 풍요까지 가미한 신앙촌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 10 : 14. 송산삼거리. 왼쪽으로 나뉘는 샛길(서사길)로 빠져나간다.

▼ 이후부터는 ‘서사길’을 따라간다. 이곳 ‘양사면(兩寺面)’은 1914년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을 병합해서 만든 지명이라고 했다. 그중 ‘서사면’이 길 이름이 되었던 모양이다.

▼ 섬 일주 코스인 듯 도로 오른편에 ‘자전거길’이 나있다. 라이딩을 즐기며 아름다운 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멋진 코스라 하겠다.

▼ 10 : 20. 매제미고개. 이 고개를 기점으로 인화1리(송산마을)와 2리(전들)가 나뉘지 않나 싶다.

▼ 길은 이제 ‘교산리’를 향해 간다. 자전거길, 인도, 차도가 따로따로 만들어져 있는 걷기에 딱 좋은 길이 계속된다.

▼ ‘문응규 정려문’이 있다는데 그냥 통과했다. 문응규(文應奎)는 인조 때 무신으로 ‘이괄의 난’ 등 여러 변란을 진압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했는데, 1885년(고종 22)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 10 : 34. ‘교산리’로 들어서자 ‘짓절미정류장’이 반긴다.

▼ 교산리(橋山里)에는 다리목, 덕고개, 뒷절미 등의 자연 부락이 있다고 했다. 마을 뒤에 절이 있었다는 ‘뒷절미’가 언제부턴가 ‘짓절미’로 바뀌었나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서사학습체험장’이다. 1998년 폐교된 서사분교(양사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체험학습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생태 및 역사, 문화 체험을 통해 감수성을 기르는 학습장이란다.

▼ 10 : 39. 강화읍으로 나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 서해랑길은 계속해서 ‘서사길(평화전망대 방면)’을 따라간다.

▼ 10 : 43. ‘윗말’에는 ‘주민대피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 급수시설, 식당·주방, 자가발전기, 방송시설, 방폭문, 위생시설, 샤워시설, 창고 등 각종 편익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 강화도의 경우 철책 부근에도 민간인이 사는 동네가 있다. 농사를 짓는 논밭도 철책과 붙어 있고 차가 다니는 도로도 철책을 따라 나있다. 하지만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민간인통제선’으로 묶어놓았고,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주민대피시설 앞은 ‘샛마을 체육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서너 점의 운동기구를 예쁜 꽃밭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 공원에는 금계국, 샤스타데이지 등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개양귀비’가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 선조들은 하찮거나 본류가 아닌 것에 ‘개(犬)’를 붙여왔다. 그런데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개’ 대신 ‘꽃’을 붙여 ‘꽃양귀비’라고 부르기까지 했겠는가.

▼ 교산2리 ‘샛말’이 아닐까 싶다. 다리목과 말모루 사이에 있는 자연 부락이다.

▼ 10 : 48. 교산2리 마을회관. 원래 이름은 ‘교항동(橋項洞)’인데 1914년 ‘증산동(甑山洞)’을 합해 교산리(橋山里)가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역사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지는 ‘고인돌’이 별립산 북쪽 구릉지에서 11기나 발견되었다.

▼ 어르신들의 자가용. 2인승에 짐칸까지 있다. 좌우측 깜빡이까지 있으니 안전도 걱정할 게 없겠다.

▼ 샛말 구간은 도로변을 꽃밭으로 꾸며놓았다. 금계국과 샤스타데이지, 개양귀비 등 다양한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 ‘교산상회’ 버스정류장. 시원한 맥주로 목이라도 축일까했으나 마트는커녕 점포가 들어설 공간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 10 : 53. ‘교향교’ 서단에서 ‘다리목’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뉜다. 서해랑길은 물론 다리를 건넌다. 그나저나 ‘교향교’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교산리의 옛 이름인 ‘교항동(橋項洞)’에서 따왔다면 ‘교항교’가 옳은데 다리 동판에 ‘교향’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참고로 ‘교항교’ 아래로는 ‘교산천(橋山川)’이 흐른다. 교산리에서 발원하여 같은 양사면인 북성리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교정천(橋頂川)’이라 불리기도 한다.

▼ 다리 건너에서 길이 다시 나뉜다. 오른쪽은 증산마을, 1914년 교항동에 병합된 ‘증산동(甑山洞)’이다. 서해랑길은 계속해서 서사길(양사면사무소방면)을 따라간다.

▼ 10 : 54 – 11 : 04.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의 강화교산교회. 1888년 내한, 1892년 제물포구역 책임자로 부임한 존스 선교사는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1893년(고종 30) 강화에 들어와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 세례를 주고, 시루미공동체 전도인 이명숙을 통해 교산교회를 세웠다.

▼ 감리회의 선교활동은 지난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입도가 신미양요를 일으킨 오랑캐라며 거부당했고, 이승환의 모친에 대한 첫 세례도 선상에서 몰래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게 ‘복음의 겨자씨’가 되어 극렬히 반대하던 김상임(1846-1902)은 전도사가 되어 강화 복음화의 초석이 된다. 이후 1896년 홍의교회를 태동시켰고, 강화 전 지역으로 복음의 물줄기가 퍼져 1906년까지 26개 교회가 설립됐다.

▼ 1893년 어느 가을밤, 교산리 앞바다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배 위에서의 세례 의식이 펼쳐졌다. 달빛에 의지해 선상 세례를 베푼 이는 초기 한국 감리교의 대표 선교사 중 한 명인 존스(G.H. Jones, 1867-1919)였다. 세례의 주인공은 그 동네 출신 이승환의 모친. 기독교계에서는 이 선상 세례를 ‘강화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란 의미를 부여한다.

▼ 기독교선교역사관. 창립 120주년 기념을 맞아 교산교회의 옛 건물(1953년 건립)을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 안에는 존스 선교사와 이승환 권사, 김상임 전도사의 얼굴을 새긴 부조가 세워져 있다. 60평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각종 조형물과 옛 문헌, 사진자료를 통해 120년의 역사를 충실히 설명해준다.

▼ 매달 2천여 명이 순례객들이 방문해 게시된 자료들을 통해 초대교회 신앙의 발자취를 배우고 간단다.

▼ 11 : 06. 다시 길을 이어간다. 서사길(양사면사무소 방면)을 따라 100m쯤 걷다가 오른쪽 샛길로 들어간다.

▼ 잠시지만 전형적인 산골 마을길을 걷는다.

▼ 11 : 11.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또 다시 들녘이다.

▼ 21일이 소만(小滿)이었으니 아직은 모내기를 준비하는 시기다. 하지만 부지런한 농부들은 모내기를 이미 끝마쳐버렸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으니 올해는 풍년이 들 것이 분명하다.

▼ ‘전망대로1366번길’이란 이름까지 얻은 마을길은 이제 양사면 행정타운을 바라보며 간다.

▼ 가장 모범적인 이정목. 시·종점까지의 거리는 물론이고 화장실이나 상수도 등 편의시설 위치까지 표시해 놓았다.

▼ 11 : 16. 양사파출소 앞에서 ‘전망대로’로 올라섰다. ‘신봉사거리’에서 ‘송해삼거리’까지 강화도 북부지역을 한 바퀴 돌아오는 2차선 도로다. 북쪽 끄트머리에 ‘제석봉 평화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보다.

▼ 11 : 19. 전망대로(신봉삼거리 방면)를 따라 150m쯤 걷다가 왼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간다. 직진하면 ‘덕고개’를 넘어 ‘덕하리’로 간다.

▼ ‘성덕산 등산로입구’ 이정표가 있으면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등산로의 주요 지점이 온통 바위로 도배된 특이한 이정표이다.

▼ 탐방로는 골목길을 훑으며 올라간다. 버스정류장은 이곳을 ‘덕음마을’로 적고 있었다. ‘덕고개’ 아래 응달에 터를 잡았다는 의미이지 싶다.

▼ 이즈음 ‘양사면사무소’가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 11 : 21. 마지막 민가를 오른쪽에 끼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초입에 ‘등산로’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길은 시작부터 가팔랐다. 아니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피톤치드를 넘치도록 보내주니 오히려 힘이 날 정도다.

▼ 11 : 30 – 43. 주능선으로 여겨지는 지점. 이정표가 ‘의용소방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고 알려준다. 참! 앞서가던 80대 중반의 선배님이 쉬고 계시기에 필자 부부도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기로 했다. 그리고 간식 삼아 챙겨온 막걸리 잔을 나누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 주능선에 올라섰지만 산길은 가파른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는 대신 호흡은 길고 크게 늘려본다. 그러자 향긋한 솔내음이 코끝을 스쳐가며 온몸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켜 준다.

▼ 11 : 48. ‘성덕산’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었다. 그러니 ‘선녀바위’는 귀하신 몸이다. 선녀가 마을에 사는 잘생기고 듬직한 청년에 반해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옥황상제가 이를 알고 선녀와 총각, 아이까지 모두를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는 설화까지 얻었다. 선녀가 해산의 고통을 참기위해 옷자락을 끌고 다녔던 흔적이 고스란히 바위에 남아있단다. 스토리텔링을 해놓은 모양인데 바위의 생김새가 스토리를 연상시키지 못해 아쉽다. 거기다 바위로 변한 시기와 해산 시기의 선후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 선녀바위를 지나면서 바위의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

▼ 길이 험해져서일까? 안전을 기원하는 소망들이 모여 작은 돌탑까지 쌓아올렸다.

▼ 11 : 53. ‘삼각점’이 눈에 띈다. 보통 산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시설물이기에 이곳이 ‘성덕산’의 정상인줄 알았다. 하지만 고도계가 176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 가야하는 모양이다.

▼ 11 : 56. 이번에는 ‘장군바위’가 등장한다. 성덕산 기슭에 살던 구척 장사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앉았다 일어서기만해도 바위에 흔적이 생기더란다. 당시 장사가 두드리면서 파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 12 : 00. 육산(肉山)으로 되돌아간 보드라운 흙길을 따라 잠시 걷자 ‘성덕산(215m)’ 정상이다. 산봉우리라기보다 능선 상의 한 지점이라고 하는 게 옳을 듯. 지자체에서 세워놓은 정상표지목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

▼ 주말 나들이를 트레킹으로 옮긴지 6년 여. 산은 경기도나 충청권의 나지막한 산들을 트레킹 일정이 없을 때나 올랐을 따름이다. 특히 지난 6개월 동안은 제대로 된 산봉우리는 곁눈질도 못해봤다. 그래서일까? 앞서가던 집사람이 냉큼 포즈부터 잡고 본다. 오랜만에 만난 ‘정상표시목’이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 12 : 04. 몇 걸은 더 걷자 이번에는 ‘육각정’이 맞는다. 50평쯤 됨직한 공터에 정자를 짓고 운동기구 몇 점을 설치했다. 쉼터를 겸한 체육공원이라고나 할까?

▼ 12 : 06. 잠시 후, 이번에는 ‘두꺼비’를 쏙 빼다 닮은 바위를 만난다. 생설미 쪽 태미산 자락에 살던 금슬 좋은 두꺼비부부가 ‘벼락봉’에 올랐다가 지쳐서 죽어 바위로 변했단다.

▼ 12 : 13. 북성리 갈림길(이정표 : 별악봉↑/ 북성리←/ 성덕산↓).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산길은 성덕산으로 올라올 때보다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길은 널찍했고,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쉬엄쉬엄 걸어보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놓은 재치 만점의 쉼터. 코페르니쿠스처럼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지는 않더라도, 자연석을 탁자로 둔갑시켜 여행객들을 맞게 할 수는 있다.

▼ 12 : 21. 저담산 갈림길(이정표 : 별악봉→/ 저담산←/ 성덕산↓). 공동묘지 느낌이 드는 곳인데, 왼쪽으로 가면 ‘저담산(167m)’이 나온단다. 삼각점이 있고 별악봉과 평화전망대가 조망된다지만 왕복 500m나 된다기에 다녀오지는 않았다.

▼ 12 : 26. 이번에는 사거리다. 이정표가 동서로 흐르는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북녘 땅을 마주보는 곳에 북성2리, 반대편(남쪽)에는 덕하2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 능선길 걷기는 이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된다.

▼ 12 : 29.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저 정도라면 스토리텔링하기 딱 좋을 텐데 왜 놓쳤는지 모르겠다.

▼ 산길이 점차 가팔라진다. 그것도 모자라 바위까지 빈도를 높여간다.

▼ 12 : 37. 가장 큰 장애는 철계단이다. 허리를 곧추 세운 계단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놓여있다. ‘산이포 2010.3.15.’라는 글씨가 계단 아래 적혀있는가 하면, 계단이 놓이기 전 등산로로 사용했음직한 산길 흔적도 눈에 띈다.

▼ 12 : 40. 계단의 끝에는 멋진 자연 전망대가 있었다. 암릉의 끝이라서 시야가 뻥 뚫린다.

▼ 북쪽. 드넓은 들녘에는 ‘북성리(北省里)’가 들어앉았다. 바다 건너는 황해북도 개풍군,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네 땅이다. 참! 구등곶돈대(龜登串墩臺)와 작성돈대(鵲城墩臺)가 북성리 해안을 지킨다고 했으나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반대편에는 ‘봉천산(奉天山, 291m)’이 있다. 발아래는 덕하리 들녘, 봉천산과 ‘성덕산’ 사이에 비집고 들어섰는데도 제법 넓다.

▼ 12 : 42 – 12 : 51.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정자가 반긴다. 가보지는 못하지만 바라보기라도 실컷 하라는 듯 별악봉의 암릉 위에 쉼터를 겸한 정자를 지어놓았다. 덕분에 10분 정도 푹 쉬면서 조망을 즐길 수 있었다. 참! 이정표는 이곳을 ‘별악봉(別岳峰)’으로 적고 있었다. 높이는 167.3m, 벼락바우 또는 벼락바우산으로도 불린다.

▼ 발아래는 ‘북성리’ 들녘. 그 너머로 희뿌옇게 염하(鹽河)가 흘러간다. 강 건너에도 들이 보이고 굼실굼실 산이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 작은 마을들이 들어섰다. 강폭은 고작 2km, 마음먹고 걸으면 30분, 뜀박질해서 가면 10분이면 너끈히 갈 수 있는 곳인데도 60년이 넘도록 ‘금단의 땅’으로 묶여있다. ‘황해도 개풍군’,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이웃 마을이고, 언젠가는 가게 될 우리네 땅이다.

▼ 12 : 56. 철곶 갈림길(이정표 : 평화전망대↑/ 북성2리←/ 철산리(철곶)→). 하산을 시작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낮추어간다.

▼ 13 : 06. 언제부턴가 길이 임도처럼 넓어졌다. 바닥에는 자동차 바퀴자국까지 나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가면 군부대가 나온단다.

▼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개복숭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해주최씨 문중의 산을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 13 : 17.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면 시야가 툭 트이면서 ‘철산리(鐵山里)’ 들판이 드넓게 펼쳐진다.

▼ 13 : 19. 철산교회 앞에서 ‘전망대로’로 내려섰다. 이어서 전망대로를 따라 평화전망대로 간다.

▼ 13 : 28. ‘강화 평화전망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 안내도는 ‘남북 1.8평화센터’ 앞 소형차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13.25km를 3시간 40분에 걸었다. 1/3 정도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평화통일의 기원을 담았다. 1-3층에 전시관과 전망대, 통일염원소 등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참! 입장료로 2,500원을 받고 있었다. 연중무휴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단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 건너편 삼달리(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까지는 2.3km에 불과하다고 했다.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런데도 망원경까지 비치해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택, 마을회관, 학교, 선전용 위장마을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 평화전망대에서 ‘서해랑길’ 1,800km(109개 코스)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2022년 4월 23일에 땅끝마을을 출발해 5개 광역에 26개 기초지자체를 4년 넘게 걸어왔다. 때로는 썰물로 바닥을 훤히 드러내는 개펄을 따라 걷고, 때로는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을 따라 걸어왔다. 그러다 가끔은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앞에서 쉬기도 했다. 걸어오는 동안에는 내륙 깊숙이 발달한 만과 육지화 된 섬, 광활한 개펄, 인간의 삶에 풍요를 내어준 바다를 실컷 눈에 담아봤다. 여정을 끝내는 지금, 머리로도 모자라 온 몸으로 희열을 만끽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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