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0코스(대명포구 - 곤릉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6. 5. 9(토)
소 재 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및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양도면 일원
여행코스 : 대명포구→초지대교→전등사 입구→온수리→이규보 묘역→곤릉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5km, 실제는 ‘러브독 반려동물훈련소’ 입구부터 역방향으로 17.12km를 4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평화의길)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 09 : 00. 곤릉 버스정류장(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인천-김포) 대곶 IC에서 내려와 356번·84번 지방도를 타고 강화도로 들어온다. ‘전등사입구교차로’에서 ‘강화남로(양도면방향 4km)’, ‘도장삼거리’에서 ‘고려왕릉로(강화읍방향)’로 옮겨 2km쯤 들어오면 ‘곤릉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인천 101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날머리인 ‘곤릉버스정류장’ 부근에 식당이 없어 역방향으로 진행했다.

▼ 강화도의 문화유산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16.5km의 여정. 섬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인 강화도를 헤집는 역사탐방 길로,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정신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초지진, 전등사, 성공회 온수성당, 이규보 묘역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09 : 16. 실제 출발지는 ‘러브독 반려동물훈련소’ 입구(지도의 ‘길직리’라고 적힌 지점 아래쪽 도로). 서해랑길 100코스는 지난 2022년에 걸었던 ‘강화나들길 3코스’와 대부분 겹친다. 그렇다고 다 빼버리면 거리가 너무 짧아지기에 이규보 선생의 묘역이 있는 구간만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 강화초대교회와 성공회 온수성당. 전등사, 초지진 등을 들려보려 한다.

▼ 간선도로인 ‘길직로’에서 갈려나가는 ‘장촌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진행방향 저 멀리 커다란 교회 첨탑이 보이면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길직리(吉稷里)’의 들녘.

▼ 요즘도 허수아비가 통하나? ‘유전의 법칙’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 날짐승들이 요즘은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당시 기사는 까치 종류는 가짜 총까지 알아본다고 했었다.

▼ 09 : 26. 농사준비로 분주한 들녘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강화초대교회(옛 길직교회)에 이른다. 감리교단 소속의 교회인데, 그보다 이곳은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으로 더 유명하다. 강화군은 3.1운동 당시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약 2만 4천여 명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운동 발상지 중 하나다. 그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논의된 곳이 이곳 ‘길직(피뫼)교회’인 것이다.

▼ 마당에는 옛 예배당 건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독립지사 유경근과 조종환 선생 등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강화 남부지역에서 ‘강화 3.1만세운동’을 시작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황도문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피뫼(길직)교회’ 담임목사 이진형과 장윤백·황도문·황유뷰·유봉진 선생 등이 이곳에서 회동하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18일 유봉진 대장을 필두로 강화읍 장터에서 2만 여명의 군중과 함께 강화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로 63명이 체포됐고, 43명이 제판에 회부돼 상당수가 옥고를 치른다. 이들 중 길상면 주민이 24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 09 : 32. 교회앞 버스정류장. 함께 걸어온 ‘장촌길’은 직진,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로 간다. 서해랑길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 ‘아이오나(Iona) 순례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한국 땅에 전한 선교사들의 믿음과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정이다. 성공회의 신앙이 한국 땅에 어떻게 심기고 자라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나 더. ‘Iona’는 아일랜드 12사도 중 대표적인 인물인 ‘콜룸바(Columba)’가 563년 경 스코틀랜드 연안의 ‘아이오나 섬’에 세운 수도원 이름이다. 이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전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 ‘장촌길’의 샛길인 ‘113번길’을 따라 ‘길정저수지’로 간다. 연록의 숲속을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 09 : 41. ‘길정저수지’ 버스정류장. 이곳에서 ‘서해랑길’과 만났다. 종점(곤릉버스정류정)에서 5.5km쯤 떨어진 곳이다. 핸드폰의 앱은 1.34km를 찍는다. 고로 오늘은 정규 코스에서 4.1km쯤 단축하는 셈이다.

▼ 서해랑길 100코스는 ‘강화나들길 3코스’와 대부분 겹친다.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 이후부터는 ‘해란길’을 따라간다. 도중에 있는 ‘해란마을’에서 이름을 빌려온 모양이다. 독립운동가인 조광원(노아) 성공회 신부가 자란 마을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따가 들를 ‘온수리성당’에서 살펴볼 수 있다.

▼ 파란 물빛의 ‘길정저수지’를 뜨락으로 삼은 마을. 저런 곳에서 산다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다. 필댐(fill dam) 방식의 길정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됐다. 요즘은 수상 태양광발전소를 설치 다목적으로 활용 중이다. 연간 142가구(가구당 월 350㎾h 기준)가 쓸 수 있는 600㎿h의 전력을 생산한다.

▼ 09 : 55. ‘강화학생체육관’은 강남중학교의 부속시설 중 하나인 모양이다.

▼ 10 : 01. 잠시 후 이른 ‘해란마을’. 몸집 큰 느티나무(보호수)가 절간의 사천왕처럼 든든하게 마을을 지켜준다. 이 지역은 ‘구리포’ 둑을 막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게’가 민물과 짠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자라는 물풀에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란(蟹卵)으로 부르다가 근래 ‘해란(海蘭)’으로 바뀌었단다. 예전에는 해랑당(海浪堂)이라는 당집이 있어 ‘해랑당’으로 불리기도 했다나?

▼ 온수리에 가까워지자 진행방향 저 멀리로 정족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년고찰 전등사(傳燈寺)가 들어앉은 명산이다.

▼ 10 : 05. 길을 나선지 50분 만에 온수리(溫水里, 길상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마니산과 전등사가 있는 강화 남쪽의 중심지로, 강화읍에 이어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다. 조금 뒤 들러보게 될 ‘성공회 온수리성당’ 말고도 9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양조장 건물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초입에 인지건강센터, 노인문화센터, 키즈 카페 등 주민복지 관련 공공시설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서 있었다.

▼ 10 : 08. 간선도로인 ‘마니산로’로 올라선다. 계속해서 시내로 들어감은 물론이다.

▼ 10 : 10. 길상면사무소(이정표 : 시점까지 9km).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한 ‘길상면’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주요 볼거리로 보물을 7점이나 보유한 전등사,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지방기념물인 이규보 선생의 묘, 사적 225호인 초지진, 지방 유형문화재인 온수리 성공회성당을 꼽을 수 있다.

▼ 면사무소 직전에서 우회전 ‘온수길52번길’로 빠져나간다.

▼ 10 : 12. 150m쯤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성공회 온수리성당’이 길손을 맞는다.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동서 절충식 목조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9칸의 본당과 1칸의 문루(종탑)로 이루어졌다. 왼쪽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성베드로성당’이다. 2004년에 새로 지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풍성하다고 알려진다.

▼ 종루(鍾樓). 문루란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을 의미한다. 거기에 종이 매달려있으니 ‘종루’다. 외삼문의 ‘솟을대문’ 형식으로 천정에 종이 매달려있다. 고단한 삶의 위로를 받고 싶은 이들은 저 종소리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을 마감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은 종소리를 듣고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처럼...

▼ 본당인 ‘성 안드레성당(유형문화재 52호)’도 역시 전통 한옥이다. 1906년에 지은 이 건물은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교회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서양 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과 저항감을 없애려고 일부러 한옥으로 지었다고 한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 외형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내부 공간은 유럽의 교회 건축양식을 사용해 동서의 조합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현관에는 ‘길상신명전시관’을 만들고 달마띠까와 영대 등을 전시해놓았다.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도 성당의 오랜 역사를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사제관(유형문화재 제 41호). ‘ㄷ’자형 한옥 건물로 우리나라에 부임한 영국인 신부가 한국의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해왔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주거공간이다. 하나 더. 성당이나 신부 등 용어가 비슷해서인지 성공회를 가톨릭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혼을 원하는 영국 왕 ‘헨리 8세’가 이를 반대하는 로마 교황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 세운 교회가 ‘성공회’이다. 그러니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 이곳에서도 독립유공자의 기념물을 만날 수 있었다. ‘조광원 노아신부 독립운동 기념비’와 ‘김여수마태 독립운동순국비’이다. 1931년 사제서품을 받은 조광원 신부(1897-1972)는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과 함께 박용만이 설립한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여수 마태’는 독립운동가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22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이다. 1991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삼종(三鐘) 길. 종은 하루를 기준으로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에 친단다. 이때 드리는 기도가 삼종기도(Angelus)이다. 그러니 ‘삼종길’이란 삼종을 치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2023년 온수리성당 선교 125년을 맞아 새롭게 열렸다나?

▼ 10 : 27. 탐방로는 이제 온수리 시가지를 통과한다. 온수리의 속살을 살짝 엿본다고나 할까? 강화읍이 강화도 북쪽의 중심축이라면 온수리는 남쪽의 중심지이다.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라는 얘기다. 하지만 강화도 자체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아선지 한가로운 시골 읍내의 풍경을 보여준다.

▼ 10 : 32 – 10 : 43. 예스런 멋이 퐁퐁 풍기는 간판들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금풍양조장(金豊釀造場)’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에 지었다는 낡은 목조건물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931년 건립된 건물은 2022년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로 등재되기도 했다. 전국에 있는 양조장 중에서는 두 번째인데, 낡은 건물 안에는 지금도 술을 빚는 냄새가 가득하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지금의 아들까지 3대가 대를 이어 이곳에서 정성스레 술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 기다란 목조건물 중앙에는 박공지붕의 주출입구가 도드라져 운치가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한 신식 처마라고나 할까? 낡은 시멘트 계단참에도 무수한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판매장에서는 시음(試飮)도 가능했다. 금풍양조 막걸리는 ‘3無의 원칙’으로 빚는다고 했다. 강화도에서 생산된 무농약 친환경 쌀을 이용해 일체 감미료는 넣지 않는다. 또한 쓰레기를 줄이는 제로웨이스트에 앞장서고 있단다. 금풍양조와 금학탁주 블랙·그린·골드 등 네 가지가 생산되는데, 그린과 골드로 맛을 본 뒤에 금풍양조 두 병을 챙겨왔다. 트레킹 중에 마셨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늘 마셔오던 ‘지평막걸리’에 익숙해져서인지는 몰라도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탄산을 덜어내고 크리미한 질감을 더해 금풍양조만의 맛을 탄생시켰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안쪽에는 금풍양조장 백년 역사를 전시장으로 꾸며놓았다. 1층은 과거 누룩을 띄우던 ‘국실’인데 예약자에 한해 개방하고 있었다. 목조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시간은 훌쩍 1930년으로 바뀐다. 100년 된 커다란 술항아리와 술 재료를 놓아두었던 판자, 국실로 재료를 내려 보내던 바닥의 통로 등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이야깃거리가 넘실댄다.

▼ 10 : 43. 맨 안쪽 ‘풍다방’에서는 막걸리 빚기도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밥에 누룩을 섞어 만든 막걸리는 직접 걸러 가져갈 수 있단다. 하지만 시간에 제약을 받는 걷기 여행자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삼랑성길’을 따라 다시 길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양조장과 맞닿아있는 ‘길상초등학교’. 그 담벼락 아래 아코디언 연주자와 어린이들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 10 : 47. 길상초등학교. 교문에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동판인물화 아래 ‘그리운 금강산’ 노랫말과 약력을 적어놓았다. 선생은 이곳 길상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인천 창영초등학교로 전학했단다.

▼ 10 : 51. 잠시 후 간선도로인 ‘전등사로(84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전등사교차로’인데 화단에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 서해랑길은 오른쪽에 있는 ‘전등사’를 제켜놓은 채로 곧장 ‘전등사로’를 따라간다. 그렇다고 천년고찰 ‘전등사’를 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전등사’쪽으로 방향을 트니 ‘삼랑성역사문화축제’를 알리는 입간판이 반긴다. 작년 10월에 끝난 행사이니 치울 때가 지나도 한참이나 더 지났다.

▼ 11 : 00.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팔랐다. 동문까지 400m 구간에서 고도를 55m나 올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올라가자 동문 앞 상가에 이른다. 사하촌(寺下村)이라고나 할까?

▼ 필자가 걸어온 삭막한 차도 말고도 녹음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이곳으로 올 수도 있다. 대신 길고 긴 저 나무계단에서의 힘겨운 투쟁은 감수해야만 한다.

▼ 11 : 03. 정족산성(鼎足山城, 사적 제130호) 동문. ‘전등사’는 일주문 대신 정족산성의 사대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간다. 절간을 둘러싸고 있는 정족산성은 ‘삼랑성(三郞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군 왕검이 세 아들(부루, 부소, 부여)에게 봉우리 하나씩 성을 쌓게 해서 산성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아직까지는 삼국시대에 축성되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개보수됐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 성벽은 거친 할석이다. 안쪽도 할석으로 채웠다. 성벽사이엔 쐐기돌을 박았다. 참고로 정족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계곡을 둘러싼 능선에 산성을 쌓아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이다.

▼ 홍예문인 동문 안으로 들어가면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가 있다. 흔히 ‘양헌수 승전비’라 부르는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다. 병인양요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인 천주교 사제들이 순교한 병인박해가 원인이었다.

▼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 어른의 허리통 두셋을 합친 것보다도 더 굵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수백 년 동안 제자리에서 전등사와 이 땅의 개국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온 나무들이다. 다양한 자세로 뒤틀려있는 소나무들도 상당 수 눈에 띈다. 강화 앞바다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으로부터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 600년 이상 묵었다는 두 그루 은행나무는 전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조선시대 과도한 공물 요구 속에서 승려들이 기도를 올린 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지금도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품은 탓인지 연말연시 ‘소원지’를 붙이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고 한다. 작은 소망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대웅전’으로 올라가기 전 ‘무설전(無說殿)’을 만났다. 그런데 전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땅속으로 파고든 모양새이다.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선뜻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여느 천년고찰에서는 보기 힘든 현대적 기법이라 하겠다. 하얀색 청동 부처님이 특이한 법당에는 ‘그림이 있는 법당, 서운갤러리’란 부언처럼 현대화가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 11 : 11.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대조루(對潮樓)’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누각이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누구라도 대웅보전에 들어서기 전 겸손함부터 깨달으라는 모양이다.

▼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보물 제178호)이 당당한 자태를 자랑한다. 1921년에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의 당초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그러다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가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傳燈寺)’라 불려오고 있다. ‘불법을 전하는(傳燈)’ 사찰이란 뜻이다. 1605, 1614년의 화재로 전소(全燒)되었고, 1621년 제 모습을 찾은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철종(보물 제393호)·묘법연화경 목판(보물 제1908로)‘ 등 국보급 문화재를 7점이나 보유하고 있다.

▼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다른 보물이 두 점이나 더 있다.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1785호)’을 주불로 모시고, 망자의 죄업을 드러낸다는 거울 ‘명경대(보물 제2293호)’를 좌우에 배치했다.

▼ 대웅보전 처마 밑 네 귀퉁이에서 지붕을 떠받치는 익살스런 표정의 ‘나부상’은 놓치지 말아야 할 이야깃거리다. 전등사를 짓는데 참여한 도편수가 주모와 사랑에 빠졌는데, 절을 다 짓고 나니 주모가 자신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더란다. 화가 잔뜩 난 도편수가 나부상을 통해 주모를 벌하고 속죄를 염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 석가모니의 전생 중 원숭이 왕 시절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설이 더 사실에 가깝다.

▼ 대웅전 앞. 경내는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화려하고 분주한 모습이었다.

▼ 대웅보전과 함께 1621년에 지어진 ‘약사전(藥師殿)’도 보물이다. 400년 동안 조금씩 기울어져왔다고 해서 한국의 ‘피사 사탑(斜塔)’으로 불리기도 한다. 옆에 있는 ‘명부전’은 아예 보물을 품어버렸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786호)’로 불리는 31구의 불상을 모신다.

▼ 철종(鐵鐘)도 눈여겨 봐야할 보물이다. 중국 허난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건너온 것으로, 해방 후 인천항의 군기창에 버려진 주인 없는 범종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청동이 아닌 무쇠로 만들어졌다나? 때문에 깨질 위험이 있어 타종도 하지 않는다. 타종은 대조전 옆에 있는 다른 종으로 한다.

▼ 적묵당(寂黙堂)은 종무소와 스님들의 처소로 사용된다고 했다. 맞은편에는 템플스테이를 위한 전각도 있었다.

▼ 11 : 24. 이젠 ‘사고(史庫)’를 찾아볼 차례이다. 요사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난 길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터(址)로 가는 길이다.

▼ 200m쯤 올라갔을까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얼굴을 내민다. 사고가 복원된 것은 1999년.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아 있던 터에 다시 지었다. 대조루에 걸려 있던 ‘장사각(藏史閣)’ 현판도 이때 옮겨 단다. 하지만 건물만 우뚝 서 있을 뿐 실록은 이곳에 없단다. 실록을 곁눈질조차 못하는 나그네의 아쉬움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적송 숲에 둘러싸인 전등사와 강화 앞바다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춘추관·충주·성주·전주) 중 전주사고분만 유일하게 남았다. 이걸 바탕으로 4부를 제작 춘추관·묘향산·오대산·태백산에 봉안하고, 전주사고본은 마니산으로 옮겼다. 이후 이괄의 난 등으로 피해를 입자 강화와 묘향산의 실록을 각각 정족산과 적상산으로 옮겨, 조선후기 사고는 춘추관을 비롯 태백산·정족산·적상산·오대산에 자리하게 된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의 운명은 조선의 근현대사처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춘추관사고본은 1811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고,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뒤 오대산사고본은 일본으로 반출, 적상산사고본은 한국전쟁 중 분실됐다. 정족산사고본은 1910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1 : 34. 내려오는 길. ‘정족산성진지’ 안내판에 이끌려 조금 더 올라가자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고려가 강화도에 도읍을 옮긴 뒤, 삼랑성 안에 지었다는 ‘가궐(假闕)’ 터로 알려지는 곳이다.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뒤 지금의 강화읍에 개성을 본떠 궁궐을 지은 것도 모자라 곳곳에 별궁(別宮), 이궁(離宮), 가궐을 세웠다. 별궁만 해도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嵒宮), 진암궁(辰嵒宮), 제포궁(梯浦宮) 등이 있었고 흥왕리에는 이궁을, 삼랑성과 신니동에는 가궐을 각각 지었다. 도망쳐온 놈들이 놀 궁리부터 먼저 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었다. 오죽했으면 오랑캐가 살육을 자행하던 육지로 도망갈 궁리까지 했었겠는가.

▼ 지대가 높은 탓인지 전등사의 전모가 드러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약사전, 향로전, 명부전, 범종각 등 많은 전각들이 들어섰는데, 한눈에 봐도 크고 오래된 사찰이다. 화려함보다는 단아함이 돋보이는 건축물들은 오랜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 전등사가 단순한 사찰을 넘어 역사적 공간임을 보여준다.

▼ 11 : 45. 남문. 정족산성은 5개 봉우리를 타고 넘는 포곡식 산성이다. 지형이 가장 낮은 남쪽계곡에 산성의 정문을 냈고, 성문 중 유일하게 홍예위에 누각 ‘종해루(宗海樓)’도 세웠다.

▼ 11 : 54. 남문 밖에도 식당가 들어서 있었다. 식당가와 주차장을 차례로 지나 ‘전등사로’로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전등사로(김포방면)’를 따라간다.

▼ 12 : 00. 장흥교차로. 도로표지판은 마니산 자락에 있는 천년고찰 ’정수사‘로 연결되는 ’보리고개로‘가 이곳에서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 ‘전등사로(84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도로 오른쪽 아래 차량통행이 가능한 소로가 따로 나있다.

▼ 진행방향 저만큼에 강화에서 가장 높은 ‘길상산(吉祥山, 336m)’이 놓여있다. 능선에 걸터앉은 ‘회전전망대’도 눈에 들어온다. 케이블카로 회전전망대까지 올라간 다음 무동력 바퀴썰매인 ‘루지’를 타고 내려오는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12 : 08. 길상교차로. ‘강화 씨사이드리조트’로 들어가는 길이 이곳에서 나뉜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중력만을 이용해 트랙을 내려오는 무동력 바퀴썰매인데, 동양 최대 규모의 길이를 자랑한단다.

▼ 탐방로는 계속해서 ‘전등사로’를 따라간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지만, 도로변을 장식하고 있는 잘 생긴 메타세쿼이아 행렬이 그나마 위로를 해준다. 덕분에 그늘 아래서 아까 산 막걸리를 마시다 갈 수 있었다(12 : 13 – 12 : 26).

▼ 12 : 31. ‘초지현1교차로’에는 ‘길상 가족낚시터’가 있었다. 낚시가 처음인 초보나 어린이들도 부담 없이 낚시할 수 있다며 유혹을 보내온다. 겨울철에는 ‘빙어축제’까지 열린다나?

▼ 이름 그대로 가족이 함께 낚시를 즐기기 딱 좋게 꾸며놓았다. 저수지를 잔디밭으로 빙 둘러놓았는가하면 안전을 고려해 의자도 좌대에 고정시켰다. 휴식 공간과 먹거리존, 포토존 등도 마련되어 있단다. 그래서일까? 주인장으로 보이는 분이 낚시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잠시 쉬어가라고 권해온다.

▼ 12 : 39. 초지현2교차로. 이곳에서도 ‘강화 씨사이드리조트’로 들어갈 수 있다. 아니 도로표지판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이곳이 주 진입로인 모양이다.

▼ ‘전등사로’를 따라가는 여정은 꽤 오래 지속된다. 도로변을 장식하고 있는 메타세쿼이아의 아름다움까지 없었더라면 무척 지루했을 것 같다.

▼ 오른쪽으로 초지리·장흥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곳에서 생산되는 ‘강화 나들미’는 강화도의 해풍과 풍부한 일조량 속에서 재배돼 미질이 우수하고 밥맛이 뛰어나다고 알려진다.

▼ 가도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길이 지겨워질 무렵 진행방향 저만큼에 ‘초지리’가 떠오른다.

▼ 13 : 07. ‘초지교차로’ 부근에는 상가가 밀집해 있었다. 인삼센터를 위시해 음식점, 숙박업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초지광장. 고운 잔디밭을 마당으로 삼은 야외무대도 눈에 띈다. 인근 황산도와 연계해 해변 위락휴양단지라도 꾸며놓았나 보다.

▼ 서해랑길은 곧장 ‘초지대교’로 올라간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기에 ‘초지진’에 다녀오기로 했다.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했을 정도로 커다란 진지였다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안동로’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된다.

▼ 13 : 15 - 13 : 25. 초지돈대.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해안가 돌출부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인 ‘돈대(墩臺)’ 53개가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하나의 섬 둘레를 성채가 별자리처럼 아우른다고나 할까? 그중 하나가 ‘초지돈대’이다. 지금은 비록 조그맣게 보존된 옹성이 전부지만, 1860년대 중반 이후 이양선의 출몰과 함께 초지진은 열강과의 공방전으로 포연이 걷힐 겨를이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일본 군함 운요호의 불법 침입 때도 첫 포성이 울린 곳이 초지돈대다.

▼ ‘돈대’는 외세 침입에 맞선 최일선 군사 방어 기지의 역할을 했다. 그래선지 안에다 ‘홍이포’를 전시해 놓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은 조선 정부가 강화의 진과 보에 설치했던 무기로 당시만 해도 최첨단이었다.

▼ 최일선 군사 방어기지답게 조망이 거침없다. 무인등대가 지키는 ‘초지선착장’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염하 건너편에는 100코스의 시점인 ‘대명포구’가 있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초지대교’가 성큼 다가온다.

▼ 13 : 33. ‘초지교차로’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초지대교’로 올라간다. 가장자리에 선을 그어 차도 인도를 구분하고 있으나 안전은 걷기 여행자들 몫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난간으로 변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나저나 초지대교는 ‘아치형’으로 분류된다. 다리 중간까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는 얘기다. 참고로 ‘초지대교’는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1.2km 길이의 연륙교이다. 폭 17.6m의 다리 위로 4차선의 도로가 지나간다.

▼ 다리의 특징답게 조망이 시원스럽다. 방금 다녀온 초지돈대와 초지선착장 등 강화도의 동쪽 해안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 염하강(鹽河江) 너머 강화도는 분명 섬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강원도 풍경이다. 크고 작은 산들이 섬 곳곳에서 솟아오른다.

▼ 오른쪽에는 서해랑길 100코스의 시점인 ‘대명포구’가 있다. 경기둘레길을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명’이란 지명은 항구 뒤쪽에서 뻗은 산줄기가 커다란 ‘대망(이무기)’처럼 바다를 향해 굽이졌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대명’으로 바뀌었단다.

▼ 다리 후반부는 내리막길이다. 참! 다리를 걷는 도중 킥보드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예닐곱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 빼고는 모두 외국인들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도 이젠 다민족·다문화 국가로 변했나 보다.

▼ 13 : 53. 다리를 건너면 ‘대명항교차로’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교차로까지 가지 않고 바닷가를 따라간다. 군인들이 쳐놓은 철조망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 호동천 배수갑문. ‘약암리’를 걸어온 서해랑길은 호동천을 건너 ‘대명리’로 들어간다.

▼ 14 : 02. 대명항수산물타운 앞 삼거리. 이정표(대명포구 0.7km/ 곤릉버스정류장 15.8km)가 선착장 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지난 99코스 때 둘러봤기에 그냥 직진하기로 했다.

▼ ‘대명항1로’의 샛길(92번길)을 따라간다. 길가에 횟집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 함상공원을 지나가는데 담벼락에 기대어 시장이 서있었다. 상설인지 오일장인지, 아니면 주말시장인지는 몰라도 지역 특산품보다는 외지에서 온 상품이 대부분이었다. 집사람이 미나리 한 단만 주워든 이유일 것이다.

▼ 14 : 09. 시장 끄트머리, 평화누리길 입구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7.12km를 4시간 40분에 걸었다.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거리가 많이 늘어났고, 발걸음도 함께 느려졌던 모양이다.

▼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영화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1996)’가 있습니다. 큰 성공을 이룬 주인공 맥과이어는 스포츠 에이전트 매니저였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그가 헤어졌던 ‘도로시’에게 찾아가 사랑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톰 크루즈의 입을 통해 내 마음을 전해봅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도 집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회사는 빛나는 밤이었어요. 하지만 나의 가슴은 왠지 텅 비어 있었어요.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고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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