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1코스(곤릉버스정류장 - 외포리선착장)

 

여 행 일 : ‘26. 5. 14()

소 재 지 : 인천시 강화군 대곶면 및 내가면 일원

여행코스 : 곤릉버스정류장가릉정제두묘건평항외포항(거리/시간 : 14km, 실제는 능내리 마을회관부터 13.12km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평화의길)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09 : 30. 곤릉 버스정류장(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인천-김포) 대곶 IC에서 내려와 356·84번 지방도를 타고 강화도로 들어온다. ‘전등사입구교차로에서 강화남로(양도면방향 4km)’, ‘도장삼거리에서 고려왕릉로(강화읍방면)’로 옮겨 2km쯤 들어오면 곤릉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인천 101코스) 안내도는 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고려 왕릉들을 살펴보며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는 서글픈 진리를 곱씹게 되는 코스. 지난 2022년에 걸었던 강화나들길 3코스와 중복된 구간을 뺀 대신, 삶의 지표가 될 만한 분들의 묘 및 건평돈대를 추가해서 둘러보기로 했다.

 09 : 42. 실제 출발은 능안마을 버스정류장’. 첨부된 지도에서 능내리라고 적힌 지점인데, 4년 전 강화나들길 3코스를 이곳에서 시작했었다.

 능내리 마을회관 옆길(강화남로634번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회관은 큰나무라는 보호수(강화 80)가 지켜주고 있었다. 안내판은 옛날 이 마을을 지켜주던 느티나무의 증손자쯤 된다며 나이를 100살로 적고 있었다.

 09 : 44. 70m쯤 들어가면 삼거리. 이곳에서 서해랑길과 만난다. 순방향은 왼쪽이지만 역방향에 있는 가릉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강화나들길 때 살펴봤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고려 왕릉으로 대변되는 코스인데, 왕릉을 통째로 내팽개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09 : 45. 순방향 40m 지점에 보호수(강화 81)가 있다기에 잠시 다녀왔다. 수령이 200년쯤 되는 느티나무인데 특별히 내세울만한 얘깃거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탐방로는 능안마을을 관통한다. 진강산 자락에 들어앉은 능내(능안)는 능이 동네 안쪽에 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진강산 자락을 중심으로 산지가 많아 큰 동산’, 한양을 등지고 있다고 해서 역적산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09 : 52. 길을 나선지 10분 만에 소담하고 아늑한 가릉(嘉陵, 사적 제370)’에 닿는다. 가릉의 주인은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약선(金若先)의 딸이자, 무신정권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1235(고종 22) 원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궁에 들어왔고, 강화천도 초기인 1236년에 충렬왕을 낳고 1244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가 강화 천도기(1232-1270)라서 능이 이곳 강화에 있다.

 그런데 옛 모습(2022 4)과 많이 다르다. 봉분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의 석수(石獸)와 전면에서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석인상은 옛날과 같다. 하지만 전면을 장식하고 있던 석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될 텐데도 말이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가릉이란 시도 만날 수 있었다. ‘강화나들길이 고재형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니 그도 이곳을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2005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단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이 있게 한 시초란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능내리석실분(陵內里石室墳, 인천시 기념물 제28)이 얼굴을 내민다. 능으로 여겨지나 주인을 알 수 없어 이라는 호칭 대신 동내 이름에 석실분이란 접미사를 붙였다.

 국가급 문화재가 아니어선지 이곳은 울타리를 쳐놓지 않았다. 덕분에 가까이 가 볼 수 있었다. 고분은 4단으로 구획 되었고, 봉분과 석물이 양호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고려 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그것도 아래쪽에 위치한 가릉의 순경태후보다는 지체가 높은 인물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단다.

 석릉(碩陵, 사적 제369)’ 2022년에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 희종(재위 1204-1211) 석릉은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희종은 무신 세력이 정권을 잡고, 최충헌을 중심으로 전횡을 휘두르는 상황 속에서 왕위에 즉위해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왕이다. 하지만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와 영종도를 돌아다니다 고종 24(1237) 결국 유배지에서 죽었고 이곳에 안식처가 마련됐다. 하나 더. 패자의 설움인지 고려의 왕릉은 조선의 왕릉에 비교가 안 된다. 석축이 3단으로 남아있고, 나름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는 게 그나마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곤릉(坤陵, 사적 제371)’ 2022년 것을 올린다. 곤릉은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 ()씨의 능이다. 강종의 태자 시절, 1비인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李氏)가 아버지 이의방(李義方)이 살해된 뒤 폐출되자, 태자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고종(高宗)을 낳았으며 1239(고종 26)에 별세하였다. 곤릉은 왕릉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조선시대의 웬만한 정승 무덤보다도 못할 정도다. 가릉은 그나마 묘역이 넓어 왕릉으로서 최소한의 위엄이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초라한 봉분만 남아있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이 붕괴되고, 석축이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란다. 하나 더. 곤릉은 찾아가는 게 만만찮았다. ‘권능교회(양도면 길정리)’ 근처에서 고려왕릉로199번길로 들어가서도 길이 다시 나뉘는데, 안내판은 고사하고 이정표 하나 달려있지 않아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필자는 주민들에게 두 번이나 물어보고 나서야 찾아갈 수 있었다.

 09 : 58. ‘가릉으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까 왔던 서해랑길을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강화나들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두 길이 멀지않은 곳에서 다시 합쳐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릉의 전면, 왼쪽 모서리에 강화나들길 4코스의 시점임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이후부터는 숲길을 걷는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임도가 나있다.

 10 : 02. 길은 진강산을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올라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산자락을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갈림길인데도 이정표는 없었다. 대신 이런 팻말이 방향을 알려준다. 헷갈리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100m쯤 알바를 하다가 앱을 확인하고 나서야 되돌아올 수 있었다.

 탐방로는 다시 능안마을로 들어간다.

 10 : 10.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그런데 느티나무가 눈에 익어도 많이 익다. 아까 두 번째로 만났던 보호수(강화 81)’를 다시 만난 것이다. 50m쯤 되는 거리를 가릉에 다녀오느라 1.4km나 더 걸은 셈이다.

 탐방로는 이제 마을길(강화남로634번길)을 따라 북진한다. 이어서 진강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보면 진강산이 우뚝하다. 해발 443m로 강화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10 : 15. 폐 목장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임도마저 벗어나버린다. 강화나들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10 : 21. 하동정씨 선산. 길이 헷갈리는 곳이다. 탐방로는 왼쪽으로 가는데, 직진 길이 훨씬 더 또렷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100m남짓 더 걷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게 길을 헷갈리게 만든 범인이다. 1.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갈멜산기도원 2.62km로 적어놓았기에 직진이 지름길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길이 너무 산속으로 파고들기에 앱을 확인해봤고, 그때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 줄 알고 되돌아 나왔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니 작은 내림과 큰 오름으로 고도를 높여가며 해발 109m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숲에서 보내오는 피톤치드 덕분일 것이다.

 가끔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목욕까지는 몰라도 탁욕이나 세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진강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횡단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정목이 방향을 알려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지만 시야가 열릴 때도 있었다. 양도면의 소재지인 하일리가 아닐까 싶다.

 임도처럼 길이 또렷한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뜸해선지 거미줄이 끊임없이 공격해온다. 스냅사진 모델노릇을 하느라 앞서가는 집사람이 쉴 새 없이 양산을 휘젓는 이유이다.

 10 : 46. 고도를 낮추어가던 산길이 갈멜산 금식기도원 앞에 데려다놓는다. 서해랑길은 기도원(‘정원성산교회라는 현판도 붙어 있었다)의 경내를 지나간다.

 탐방로가 기도원 정문(해발 35m) 앞에서 다시 산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초입에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오솔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고도를 10m쯤 높인 다음부터는 큰 오르내림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기상청은 5월 중순인데도 30도가 넘는 폭염이 예상된다고 했다. 하지만 울창한 숲속은 바람까지도 시원했다. 거기다 산길도 산책로 수준이다. 숫제 피서를 하고 있는 셈이다.

 10 : 52. 정제두 묘역(인천시기념물 제56).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양명학의 체계를 완성해 강화학파의 태두로 불린다. 소론 명문가의 후손인 정제두는 과거 급제 후 우찬성, 원자보양관 등 요직을 역임했지만 사회 혼란을 통탄해 학문 연구에 전념한 인물이다. 묘역은 정제두와 그 부친 정상징(鄭尙徵)’이 함께 모셔져있었다. 그런데 부모의 묘가 자식보다 아래에 써진 게 특이했다. 그래서일까? 정상징의 묘비 방향을 옆으로 90도쯤 비틀어 놓았다.

 1709, ‘정제두는 요 아래 하곡마을에 자리 잡는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숙종 때로, 정권유지를 위해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정치상황과 경직된 학문 풍토를 비판하며 선산이 있는 강화도에 들어와 살았다. 그리고는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대신 현실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연구했다. 그러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고, 학맥이 세를 불려가며 강화학파가 형성된다. 이긍익(연려실기술), 이면백(해동돈사), 이건창(당의통략) 등이 대표적인 학자로 꼽힌다.

 묘역 아래(이정표 : 종점까지 8km) 강화남로가 지나간다. 문화재 가꾸기 사업이라도 벌였는지 주차장은 물론이고,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예쁜 꽃밭을 만들어놓았다.

 10 : 56. 이후부터는 강화남로를 따라간다. 도로 오른편에 백색 선을 그어 인도를 구분해놓았다. 하지만 안전은 여행자의 몫이다. 길가에 꼭 붙어서 지나가라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11 : 00. ‘하오고개를 넘어가는데, ‘김취려 묘라는 안내판이 발길을 붙든다. 250m만 들어가면 고려의 명장 김취려 장군의 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묘역으로 가는 길은 또렷했다.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고, 실제 바퀴자국도 나있었다. 중간에 길이 나뉘기도 하지만 널찍한 길을 선택하면 된다.

 11 : 07. 김취려 장군의 묘(인천시 문화유산자료). 자그마한 봉분에 상석과 망주석이 전부인 묘역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인천시에서 세운 안내판마저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겠다. !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역을 정비하면서 세운 듯한 빗돌은 논외로 쳤다.

 김취려(金就礪, 1172-1234)는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1216-1219)을 격퇴하고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른다. 천도와 함께 강화에 옮겨 살다가 1234(고종 21), 6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후 위열(威烈)의 시호를 받았고, 고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11 : 13. ‘강화남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진강산의 서쪽 산줄기에 있는 하우고개를 넘는다. 하일리와 삼흥리를 잇는 높은 고개로 남쪽 골에 하곡 정제두가 우거했다 하여 하곡현이라 부르다가 하우고개로 변했다고 한다.

 11 : 17. 고개를 넘자마자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섬의 중앙으로 향하는 대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되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건평로155번길을 따라간다. 야산의 아랫도리를 따라 1차선의 도로가 나있다.

 화장실도 이 정도면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책임자를 두고 관리하는지 내부도 무척 깨끗했다. 매년 한 달 가까이를 해외여행에 사용해오고 있는 필자는 우리나라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자부감에 빠진다. 이렇게 완벽한 편의시설을 갖춘 나라에서 살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11 : 19. 하우약수터는 이제 옛 얘기로만 남았다. 수질검사도 못할 정도로 수질이 고갈됐다며 사용을 금지한다는 안내문까지 붙여놓았다. 할 일 없어진 수도꼭지도 빼버렸음은 물론이다.

 고재형(高在亨) 심도기행(沁都記行)’  하일동(霞逸洞)’이 적힌 시판도 걸려있었다. 두 정승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이 있어 강화도의 제일구(第一區)’로 불린다나? 하지만 여기는 하일리가 아닌 삼흥리(三興里)’이다.

 11 : 27. 물이 콸콸 쏟아질 날이 하시라도 빨리 돌아오길 기대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자 시야가 뻥 뚫리면서 서해바다가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탐방로는 바닷가로 가지 않는다.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들녘을 횡단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른다.

 강화도는 돈 깨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나보다. 유럽, 그것도 지중해 연안에서나 볼 법한 별장형의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언덕을 넘으면 건평리이다. ‘심도기행(沁都記行)’을 쓴 고재형이 건평동(乾坪洞)’이란 시에서 건평(마른들)이란 지명과는 달리 물이 많다고 읊었던 마을이다. 둑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 대기 좋다나?

 11 : 35. 건평리 다목적회관. 건평리(乾坪里) 마른들 또는 건들로 불리던 동네다. 조선시대 간척으로 너른 들판을 얻었는데, 수로(水路)가 낮아 논에 물 대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마른 논이 많다고 해서 동네 이름이 마른들(건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양지마을(건평리)을 관통한다. 이때 건평교회의 첨탑이 눈에 들어오는데, 길 찾기의 주요 포인트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11 : 41. 건평교회 앞.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이제껏 함께 해온 서해랑길과 강화나들길이 헤어지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곧장 직진하는데 반해 강화나들길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건창 묘라고 적힌 이정목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일단은 왼쪽으로 들어간다. 50m쯤 걷다가 언덕을 오르면 이건창의 묘(인천시기념물 제29)가 나타난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할아버지 이시원 문하에서 글을 배워 18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문장가들과 교우하였으며 충청우도·경기도 암행어사, 예문관제학, 함흥부안핵사 등을 지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반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명미당집, 당의통략 등이 있다.

 이건창은 5세 때 문장을 구사했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15세에 과거에 급제해 조선왕조 최연소자로 기록된다. 너무 어려서 4년 뒤에야 홍문관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단다. 하지만 그런 명성과는 달리 눈에 들어오는 묘역은 초라해도 너무 초라했다. 여염집 묘만도 못한 크기에 특별한 장식은커녕 석조물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제멋대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만이 그의 올곧은 품성을 칭송하고 있었다.

 묘 뒤편에 해넘이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화나들길 4코스 해가 지는 마을 길로 불리기도 한다. 갯골을 채우는 물길과 서해 섬 사이로 스며들어가는 해를 보며 걸어야 제격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1 : 46. 건평교회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건평로173번길을 따라가다 윗건들마을(맞는지는 모르겠다)’에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11 : 53. 건평항. 배를 타고 육지로 오가던 시절 건평항은 물자로 넘쳐났더란다. 한강 하구를 지나 마포나루까지 가는 배가 출항했고 인천에서 연백으로 오가는 배도 건평항을 경유했다나? 물자와 재화가 들고나니 주재소가 들어섰고 금융조합에 노동조합까지 있었단다. 지금은 비록 어즈버 태평연월이지만.

 여객선이 발길을 끊은 빈 선착장에는 꼬맹이 어선 서너 척이 한가하게 쉬고 있을 따름이다. 그처럼 번화했던 영광을 뒤로 한 채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하다.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여행객들이 오가는 길에 들르는지 어판장과 신선한 생선회를 파는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11 : 54. 건평항을 빠져나오면 양지삼거리’. 이정표가 종점인 강화파출소까지 3.5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 ‘건평돈대로 가려면 저 삼거리에서 오른쪽 건평로로 가라고 했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는 왼쪽(건평로182번길)으로 들어가라고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해안서로를 따라가다 노고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건평항 바로 옆에 작은 녹지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귀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난 천상병(千祥炳, 1930-1993) 1945년에 귀국 마산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 살림을 시작한 그는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질 못하고 가까운 강화도를 드나들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평나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끄적인 것을 동행한 고향 친구 박재삼(시인)에게 건네주었는데, 이게 귀천이란 작품으로 공원의 이름이 되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천 시인의 어깨에 새 한 마리가 걸터앉았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고 시대와 불화를 겪은 천 시인이 새가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단다. 천상병은 간고한 생애를 살다간 시인으로 알려진다. 시에서까지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썼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는 구차함이나 원한 혹은 분노의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세속적인 욕심의 흐림이 없이 삶의 어둠과 밝음을 보여준다나? 동상이 활짝 웃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도 눈에 띈다. 두 사람 모두 강화도 출신이란다. ‘그리운 금강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곡 중 하나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벌대총 안내판. 바닥에는 발자국 모양의 흔적도 있다. 벌대총(伐大驄)은 이름 그대로 큰 나라를 치는 말이다. 북벌을 추진한 효종이 가장 아끼던 명마로 강화도 진강목장에서 길렀다. 강화와 김포 사이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건널 정도로 뛰어나 효종이 홀딱 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왕의 행차를 돕고 강화로 돌아오다 양천(현재 양천구) 범머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북벌에 쓰이지도 못한 채이다. 효종 역시 북벌의 꿈을 펼치지 못했다. 참고로 벌대총의 발자국이 찍힌 ()바위는 진강산 정상에 있다.

 벤치에 어린왕자가 앉아있다. 뜬금없는 시추에이션이지만 왕자님 옆에 앉아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공주님이 된 기분으로 말이다.

 12 : 19. 15분 정도의 휴식까지 취한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해안서로를 따라 외포리항으로 가는 길이다. 이 구간은 아름다운 서해 낙조를 감상하며 걷는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로 알려진다. 하지만 단체로 서해랑길을 걷는 여행자들로서는 낙조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마니산에서 장곶돈대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석모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둘 사이에 있어야할 동만도와 서만도가 연무에 가려 가늠조차 되지 않음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12 : 23. 조망을 즐기며 300m쯤 걷자 건평돈대로 올라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리는 표식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초입의 이동식단속 안내판이나 반대편의 해오름펜션 입간판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겠다.

 길은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실제로 돈대 보수공사를 위해 차량들이 지나다녔는지 바퀴자국이 또렷했다. 길가에는 민가도 들어서 있었다. 서해바다를 뜨락으로 삼은 기막힌 입지다.

 12 : 27 : 200m쯤 올라가면 삼거리. 오른쪽은 아까 양지삼거리에서 건평로로 갔을 경우 이용하게 되는 길이다.

 건평돈대는 서해랑길은 물론이고 강화나들길까지 비켜지나간다. 때문에 돈대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길이 널찍하게 나있어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12 : 30. 150m쯤 더 올라갔을까 노고산(104.9m)’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뉘고 있었다. 건평돈대는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돈대의 위치를 모르는 필자는 노고산의 중턱 어림에 있겠다싶어 오솔길을 올라가기로 했다.

 길은 무척 가팔랐다. 헐떡거리며 100m 남짓 올랐을까 무덤이 나오고, 이후부터는 길이 사라져버렸다. 60m쯤 더 올라가니 능선, 잡목 때문에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어 되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12 : 43. 임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직진한다. 그리고 100m 전방에서 건평돈대(인천시기념물 제38)’를 만났다. 목표물을 옆에 두고 13분이나 헤맨 셈이다. 각설하고 건평돈대는 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강화도에 설치한 53개소 돈대 중 하나다. 정포보 소속으로 조운 감시와 국토방위 임무를 겸했다.

 둘레가 121m인 돈대는 가로로 긴 사각형이다. 바다 쪽으로 향한 성벽에는 포대 구멍을 뚫어놓았다. 조선시대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포가 고개를 내밀던 구멍일 것이다. 불랑기포는 16세기 유럽에서 전해진 서양식 화포의 한 종류이다. 대포의 포문(砲門)으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통 화포와 달리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을 하는 최첨단 무기였다.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불랑기포는 모두 12문인데, 그중 하나가 이곳 건평돈대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돈대에 오르면 석모도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바다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잠깐이지만 그 옛날 수직을 서던 병졸들의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12 : 53. ‘해안서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이어간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구간은 조망 명소다. 낮에는 찬란한 햇빛이 어우러진 바다 전망, 저녁에는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할 수 있어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13 : 07. 이정표가 종점까지 1.5km 남았음을 알려준다. 이곳도 길 찾기의 포인트 중 하나다. 도로 건너에 장지포비석군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너면 삼흥천(三興川)’ 배수갑문이다. 양도면 삼흥리 진강산과 덕정산에서 발원하여 양도면 건평리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삼흥천의 하구역에서 강물을 바다로 내보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장지포비석군이 맞는다. 강화유수 오재소 (1739-1811) 및 중군 노상추(1746-1829)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기와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지내다 병인양요 때 자결한 이시원(17900-1866)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을 기리는 불망비 1, 국회의원시절 강화지역 방조제 개축에 공헌한 윤일상(1908-1975)의 공적을 기리며 세운 송덕비 1기를 모아놓았다.

 13 : 11. 다시 길을 이어나간다. 계속해서 해안서로를 따라감은 물론이다.

 이즈음 멀게만 여겨지던 외포리항이 성큼 다가온다.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도 눈에 들어온다. 강화나들길 11코스(석모도 바람길)는 저 섬을 누비고 다닌다.

 바닷가를 따라 대하양식장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 이곳은 처음부터 양식장을 목적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나보다.

 나물은 산에서만 뜯는 게 아닌가 보다. 바닷가 아낙들이 갯벌에서 해초를 뜯고 있었다.

 13 : 26. 이번에는 강화 함상공원이다. 해군본부로부터 무상 대여한 퇴역함정 마산함을 활용해 조성한 체험형 관광시설로, 함정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한 채 군함에서의 일상과 각종 전투 장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13 : 34. ‘외포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외포리(外浦里)는 서해와 접해 있는 반농반어촌 마을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주민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앞 석모도에 유서 깊은 보문사가 있기도 하지만 꽃게, 새우젓, 송어, 장어, 숭어 등 서해안의 명물 어류가 많이 잡히기 때문이다.

 외포리에는 주문도, 볼음도 등 강화의 부속 섬들을 출입하기 위한 여객터미널이 있다.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수산물직판장까지 들어서 있었다. 주인장의 어선을 상호로 각각 내건 내부에는 새우젓과 낙지젓, 오징어젓 등 윤기가 돌아 보기만 해도 신선함이 느껴지는 젓갈을 잔뜩 진열해놓았다. 꽃게나 새우, 반건조 생선들도 색이 곱고 질감이 살아 있다. 젓갈을 설명하던 주인장은 해산물과 젓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는 현장설명까지 해주고 있었다.

 서해랑길(강화 102코스) 안내도는 강화파출소(인천해양경찰서) 앞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13.12km 3시간 50분에 걸었다. 상당 부분이 산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살펴볼 게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결혼합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했고, 집사람이 나에게 영원한 행복을 안겨주고 삶을 변화시켜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집사람 탓이 아닌데도 결혼을 잘못했나?’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이란 습관과 같다고 했습니다. 막연한 행복을 꿈꾸기 이전에 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결혼 생활에도 행복이 뒤따라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