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2코스(외포항 - 창후항)
여 행 일 : ‘26. 5. 23(토)
소 재 지 :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및 하점면 일원
여행코스 : 외포항→망양돈대→삼암돈대→황청항→황청저수지→황청1리→계룡돈대→망월돈대→창후항(거리/시간 : 10.9km, 실제는 13.76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평화의길)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 09 : 15. 외포리선착장(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김포한강로 및 48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강화읍으로 온다. ‘알미골사거리’에서 중앙로(삼산방면)로 옮겨 17km쯤 들어오면 ‘외포리(내가면)’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인천 102코스) 안내도는 강화파출소(인천해경) 앞에 세워져 있다.

▼ 강화도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는 10.9km의 여정. 길고 긴 ‘망월평야 방조제’를 걸으며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여러 ‘돈대’를 만나게 된다. 필자는 초반의 ‘국수산’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삼암돈대’를 추가로 만났다.

▼ 09 : 15. ‘수산물(젓갈)직판장’으로 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김장철이면 발품을 팔아 저렴한 비용으로 김장을 담그려는 아낙들로 붐비는 곳이다. 전국 추젓 생산량의 70%를 생산하는 강화도, 그 중심에 ‘외포리’가 있기 때문이다. 새우젓의 질은 물론이고 생산량 자체가 많아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나?

▼ 조선시대 ‘외포리’는 ‘정포(井浦)’로 불리었다. 동네 초입에 우물이 있어 우물 정(井)자, 포구 포(浦)자를 썼다. 강화는 섬이지만 배를 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바닷가는 물이 빠지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많았다. 배를 댈 수 있는 정포는 그래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정포보(井浦堡)'를 두어 바다를 경계하고 방비했던 이유이다. 그래선지 썰물 때인데도 부잔교(浮棧橋) 선착장에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 09 : 20. 수산시장의 끄트머리서 ‘해안서로’로 빠져나왔다. ‘교동도’ 방향으로 40m쯤 걷다가 ‘강화횟집’ 앞에서 다시 바닷가로 빠져나간다.

▼ 09 : 22. 바닷가에 이르면 북쪽으로 간다. 해안에 잇대어 데크 길을 내놓았다.

▼ 09 : 24. 망양돈대로 올라가는 입구. ‘삼별초항몽유허비’와 진돗개, 그리고 돌하르방 두 기가 세워져 있었다. 삼별초(三別抄)의 항몽(抗蒙) 전쟁이 강화도에서 시작되어 진도와 제주도로 이어졌으니, 이곳이 강화도, 제주도, 진도를 잇는 특별한 공간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여몽전쟁(麗蒙戰爭, 1231-1259)의 대미는 삼별초가 장식한다. 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하는 의미로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還都)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킨다. 삼별초의 리더 배중손은 왕족인 온(溫)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강화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 1천여 척의 배에 각종 군수물자와 가족을 싣고 ‘진도’로 향했다. 그리고 진도 다음으로 쫓겨 간 ‘제주도’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흩어졌다. 그러니 저 조형물들은 삼별초가 터를 잡았던 강화도와 진도 그리고 제주도를 상징한다고 보면 되겠다.

▼ 대몽항쟁의 주역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많은 이들은 이 빗돌처럼 침략자 몽골에 굽히지 않는 고려 무인의 기상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무신정권을 숙주로 하여 성장했고, 몽골과의 항쟁을 존재 이유로 삼았던 삼별초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참고로 삼별초는 1220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가 나라 안에 도둑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만든 야별초가 기원이다. 야별초의 숫자가 많아지자 1252년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했다. 1255년에는 몽골에 포로로 잡혀 갔다 도망 나온 이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했는데, 이 신의군에 좌·우별초를 더해 삼별초라 했다.

▼ ‘망양돈대’는 유허비 뒤편 산자락으로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가파른 돌계단이 기를 죽이지만 금방 끝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09 : 29. 망양돈대(望洋墩臺, 인천시기념물 제37호). ‘돈대’란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하다가, 적이 침략하면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쳤다. 강화도에는 이런 돈대가 53개가 있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가 기획하고 강화유수 윤이제가 실무를 총괄하여 48돈대가 완성되었고,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망양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은 48돈대 중 하나이다. 건평돈대·삼암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井浦堡)’에 속했다.

▼ 돈대의 생긴 모양새는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30m(높이 300-340cm)로 54개 돈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바다로 향한 성벽에는 대포를 앉히기 위한 포대가 4개 있으며 성축의 윗부분에는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가 40개 있었는데 현재 원형을 살려서 복원해 놓았다. 하지만 무심한 세월은 ‘망양(望洋)’이란 이름까지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몸집을 부풀린 소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막혀버렸다.

▼ 09 : 34. 돈대 출입문 맞은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20m쯤 내려오면 ‘해안서로’를 다시 만난다. 도로변에 ‘약선건강연구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이후부터는 ‘해안서로’를 따라간다. ‘후포항’에서 ‘황청포구’까지 강화도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2차선의 해안 도로이다. 곳곳에서 다양한 ‘돈대’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길이기도 하다.

▼ 09 : 40. 강화유스호텔(이정표 : 종점까지 10km). ‘대한민국 구석구석’에는 현재도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안내하고 있지만, 외형만 봤을 때는 문을 닫아도 이미 오래 전에 닫은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유스호스텔 옆길을 통해 국수산 자락으로 올라간다.

▼ 필자는 계속해서 ‘해안서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국수산과 덕산 사이의 고개가 높지는 않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나 얘깃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해안서로는 ‘삼암돈대’로도 모자라 ‘횃불전망대’에 ‘황청포구’까지 들를 수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2021년에 타계한 요리연구가 ‘임지호’ 셰프를 연상시키는 브랜드가 눈에 띈다. 자연주의 식재료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요리를 만들어 선사하면서 ‘힐링셰프’로 유명세를 탔는데,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요리 기술과 지식을 얻어 ‘방랑식객’으로 불리게 되었다나? ‘산당’은 그가 일했던 청담동의 식당 이름이다. SBS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 ‘집사부일체’, ‘정글의 법칙’에도 출연해 독특한 요리를 선보이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 이번에는 ‘흑백요리사 2’에 출연했던 ‘장어박사’가 운영하는 숯불장어 식당이다. 셰프가 직접 구워주는 맛집으로, 명이나물이나 상추 등으로 싸 자신만의 최고 조합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 09 : 54. ‘허튼개’버스정류장. 외포리에 있는 자연부락인 모양인데, 마을 앞 선착장에 군함처럼 생긴 커다란 선박이 정박하고 있었다. 군사시설일지도 몰라 사진은 생략.

▼ 09 : 58. 표지판이 ‘삼암돈대’가 왼쪽에 있으니 잠시 들렀다가란다.

▼ 삼암돈대(三岩墩臺, 인천시 유형문화유산 제35호)는 숙종 때 강화유수 윤이제가 쌓은 48돈대 중 하나로 건평돈대·망양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井浦堡)’의 지휘를 받았다. 바다를 향해 약간 돌출한 능선의 정상부에 있는데, 육지 쪽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지만 해안 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 정 또는 직의 사각형이 보통인 다른 돈대들과는 달리 둥근 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둘레는 121m(높이 190-400cm), 바다 쪽으로 4개의 포대가 있다. 참! 삼암돈대는 미루지 돈대와 함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고 했다. 1995년에 돈대의 문 주변을 일부 보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원래 모습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성벽의 위쪽에 요철(凹凸) 형태의 여장이 없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 맞은편 산자락에는 ‘하늘샘물펜션’이 있었다. 지하 500m 암반에서 끌어올린 광천수에 아토피 치료에 효과적인 천연물질이 함유되어있다는 곳이다. 그래선지 표지석에까지 ‘아토피 개선’이란 문구를 적어 넣었다.

▼ 10 : 10. 이번에는 ‘해누리공원’이 맞는다. 횃불처럼 생긴 조형물에 이끌려 일단은 올라가보기로 했다. 강화군의 심벌마크인 횃불을 조형물로 만들어놓았으니 뭔가 얘깃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 ‘숭고한 희생 기억하겠습니다.’ 해누리공원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화군 출신 국가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는 추모공원이었다. 국가유공자 묘역 2천여 기와 일반군민 묘역 2천3백여 기가 모셔져 있단다.

▼ ‘횃불전망대’가 돋보인다. 강화도에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참성단(塹星壇)이 있고, 지금도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하고 있으니 횃불은 강화도를 대표하는 ‘blue-chip’인 셈이다. 하나 더. 횃불은 세 갈래의 물줄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강화도로 흘러오는 세 개의 강, 곧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을 뜻한단다. 과거, 바다와 강은 길이었고 한강과 닿아있는 강화도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 전망대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해명산에서 낙가산을 거쳐 상주산으로 이어지는 석모도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본섬과 마주보는가 하면, 두 섬을 잇는 ‘석모대교’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교동도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 반대편은 국수산(國壽山, 193m)이다. 동으로 진강산(鎭江山)과 서로 교동도 화개산(華盖山)을 연결하는 ‘망산봉수’가 저 능선에 있다. 54개 돈대 중 하나인 ‘석각돈대(石角墩臺)’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단석 등 돈대의 흔적만 남아있다고 해서 일부러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 10 : 21. ‘해안서로’로 내려가는 길. 닭의 벼슬처럼 화려하게 피어난 ‘금계국’ 무리가 작별인사를 보낸다.

▼ ‘해안서로’를 따라 다시 길을 이어간다. 그런데 ‘태산교’란 대체 뭘 하는 곳일까? 큰 산과 높은 봉우리처럼 묵직하고 굳센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泰山喬嶽)?

▼ 관광입도(觀光立島), 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강화군의 노력도 심심찮게 엿볼 수 있었다. 서해바다를 마주보는 비탈에 ‘노을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 10 : 28. 황청포구 입구. 2차선인 ‘해안서로’가 끝나고 또 다른 2차선의 ‘황청포구로’에 시작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을 만나려면 황청포구로를 따라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린 ‘황청포구’에 잠시 들렀다가기로 했다.

▼ 10 : 30. 황청포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주차장이 넓고 화장실이 깨끗해 차박이나 차크닉에 적합한 공간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주차장 한켠에 두어 동의 텐트가 쳐져 있을 따름이다.

▼ 이곳도 낙조를 유명한 모양이다. 숨겨진 사진 명소라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 선착장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강화군의 행정선으로 여겨지는 선박 두어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응급환자 긴급 이송과 여객선이 운항되지 않는 지역의 교통편의 제공 등 도서지역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는 장비다.

▼ 민간용 선착장은 낚시꾼들 차지다. 어선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 횟집은 물론이고 작은 카페까지 보였지만 포구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주어진 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걷기 여행자들에게 여유는 사치였기 때문이다. 포구 뒤쪽으로 난 골목길(황청포구로462번길)을 이용해 메인도로(황청포구로)로 나왔다.

▼ 10 : 36. ‘황청포구로’로 올라섰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황청2리 마을회관’이 얼굴을 내민다. 버스정류장이 이 마을의 옛 이름이 ‘국촌’이었음을 알려준다.

▼ 10 : 38. 마을회관 앞에서 ‘황청포구로443번길’로 빠져나왔다.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섰지만 ‘황청저수지’로 올라가는 ‘농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 소만(小滿)이 이틀 전이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모내기 준비로 눈코 뜰 새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새들은 노출되는 먹이를 주어먹느라 정신이 없다.

▼ 10 : 46. ‘황청저수지’ 아래서 서해랑길과 만났다.

▼ 황청저수지. 울창한 숲속에 들어선 탓인지 그윽한 풍경을 보여준다. 수량이 풍부한데다 물까지 맑아 붕어와 동자개 등 청정 어족이 많이 서식한단다. 그래선지 빙 둘러 좌대를 만들고 낚시터로 꾸며놓았다. 가족이 머물기 좋은 방갈로와 민박 형태의 콘도도 함께 운영하고 있단다.

▼ ‘국수산’ 자락에는 ‘예수의 성모, 관상수도원’이 있었다. ‘볼 관(觀)’에 ‘생각할 상(想)’자를 썼으니 속세에 얽히지 않고 오직 고독과 침묵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꺼이 보속하며 하느님께만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회란 얘기일 것이다. 약간은 폐쇄된 느낌? 아무튼 서해랑길은 ‘국수산(오른쪽)’과 덕산(왼쪽) 사이의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온다.

▼ 황청2리 들녘. ‘석모수로’ 너머에서는 ‘낙가산’이 불쑥 솟아오른다. 오른쪽에는 ‘상주산’이 있다.

▼ 10 : 53. 마을길(황청포구로403번길)을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황청1리’가 맞는다.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남쪽과 동쪽으로 덕산과 국수산이 엄마 품처럼 다가오고 서쪽으로 석모도와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어 아름다운 서해 낙조를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사진은 농업회사법인 ‘강화드림’)

▼ 오랜만에 정미소를 만났다. 기억속의 우리 동네 정미소도 저런 모습이었다. 양철지붕으로도 모자라 벽면가지 양철로 댄. 거기에 교회도 아닌 것이 첨탑까지 달고서.

▼ 황청1리 마을회관. 덕산의 서쪽 산자락에 들어앉은 자연부락으로 ‘용두레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2007년엔가 ‘무한도전’의 장기 프로젝트가 촬영되면서 유명해졌다. 논을 가는 것부터 모내기, 추수까지 모두 멤버들이 직접 했었다. 촬영 중 각종 대결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17년이 지난 2024년에는 유재석과 ‘놀면 뭐하니’ 팀이 다시 찾아왔었다나?

▼ 10 : 57. ‘황청포구로(이정표 : 종점까지 7.5km)’를 횡단한다. 버스정류장이 요 어디쯤에 ‘중촌마을’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까 황청2리에서 ‘국촌’을 만났고, 다음 정거장은 ‘수촌’이란다. 시골 아니랄까봐 하나같이 ‘시골 촌(村)’자를 달았다.

▼ 도로변에는 마을을 상장하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용두레’는 아랫논에서 윗논으로 물을 퍼 올리는 재래식 양수시설이다. 용두레마을은 아직도 들녘 가득히 울려 퍼지는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용두레질 노래 가락에 맞춰 물을 푸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단다.

▼ 용두레마을은 농어촌체험·휴양마을이다. 두레질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으며 그밖에도 경운기 타고 마을 돌아보기, 갯벌 체험하기 등 다양한 체험거리도 준비돼 있단다.

▼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로 나간다. 야산의 아랫도리를 감싸듯 농로가 나있다.

▼ 11 : 02. 잠시 후, 이정표(종점까지 7km)가 들녘을 횡단하란다. 황청리는 들이 넓어 농사일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물이 귀해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많았단다. 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만든 것이 ‘용두레’.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준 것은 모두 함께 모여 일하며 부르던 농요(용두레질 노래)였다. ‘어이야 용두레~ 물올라 간다.’하며 1년 농사짓는 과정을 노래로 부르는 선창자에게 화답하다보면 어느새 논에 물이차곤 했다나?

▼ 11 : 08. 농로 끝에서 방조제 위로 올라간다.

▼ 목마른 농토를 적셔오던 수로는 배수갑문에 막혀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그 둑에 그림처럼 고운 집이 걸터앉았다. ‘바다정원 오션뷰’라는 펜션이란다.

▼ 방조제 둑길의 초입. ‘강화나들길’ 문주가 세워져 있다. 참! 16코스(서해황금들녘길)는 서해랑길 102코스와 일치한다고 했다. 그런데 코스 길이가 서해랑길보다 2.6km나 더 긴 이유는 뭘까?

▼ ‘강화나들길’은 강화가 자랑하는 걷기 길이다. 그래선지 벤치와 안내판 등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덕분에 간식을 나누며 15분 정도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이후부터는 방조제를 걷는다. 오른쪽으로는 ‘황청1리’, 즉 ‘용두레마을’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고달픈 노동을 구수한 노랫가락으로 푸는 무형문화재 ‘용두레’의 본고장 이다.

▼ 바다 건너는 석모도의 상주산(上主山, 264m). 아니 송가도의 ‘상주산’이라고 해야 하나? 조선 숙종 때 간척사업으로 석모도의 일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가도(松家島)’였으니 말이다. 당시 매음도(煤音島)도 함께 석모도가 되었다.

▼ 11 : 15. 멀어만 보이던 계룡돈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해안선 방어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여행자의 쉼터이자,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 계룡돈대(鷄龍墩臺, 인천시기념물 제22호). 강화 53돈대의 하나로 망월평야 남서 방향의 독립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지의 좌우 기저부를 보축하여 평탄하게 한 다음 일정한 높이로 석벽을 구축했다. 망월돈대와 함께 진무영(鎭撫營) 직할의 영문(營門) 관할 아래 있었다고 한다.

▼ 가장 큰 특징은 강화 돈대 중 유일하게 동남쪽 외벽 좌측 모퉁이에서 어영군(御營軍) 명문(康熙一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御營)이 발견된 점이다. 청나라 연호인 ‘강희 18년’은 숙종 5년으로 강화도에 돈대를 설치한 해이다. 1679년에 경상도 군위에서 올라온 어영군이 쌓았다는 얘기가 된다.

▼ 긴 네모꼴(30×20) 화강암 성곽으로 둘레는 108m(높이 2-5m)쯤 된다고 한다.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은 파손되어 토성만 남아 있었는데, 현재는 복원되어 걷기 여행자들을 맞아 준다.

▼ 돈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바다 건너 ‘석모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라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맞다. 오른쪽은 원래 ‘송가도’였다. 조선 숙종 때의 간척사업으로 석모도로 연결되면서 중간에 드넓은 ‘송가평야’가 만들어졌다. 두 섬의 사이가 바다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 시선을 조금 옮기면 교동도와 함께 드넓은 벌판이 펼쳐진다. 원래의 강화도는 지금처럼 평야가 넓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 말엽까지 바다를 메워 땅을 넓히는 간척을 해서 지금의 강화도가 되었단다.

▼ 계속해서 방조제를 따라간다. 석모수로와 구하리 들녘을 양옆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 둑은 아카시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개화시기를 맞아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길게 늘어진 하얀 꽃들을 매달았다. 바람을 타고 퍼지는 달콤한 꽃향기가 5월의 맑은 공기를 가득 채워준다.

▼ 바닷가라서 ‘갯메꽃’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이 ‘갯’자를 떼어내란다. 짠바람 맞고 모래 뒤집어쓰면서도 매일 아침 다시 꽃망울을 여는 강인한 꽃이라며.

▼ 방조제가 길어서인지 이렇게 직각에 가깝게 굽은 곳도 나온다.

▼ 바다도 포구도 세월 따라 변했다. 삼별초가 출항했던 ‘구하리’ 앞 바다는 간척을 해서 드넓은 들판이 되었다. 그리고 삼별초가 떠난 지 400여 년 뒤에 계룡돈대와 망월돈대를 쌓았다. 몽골보다도 더 넓고 강해진 세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 12 : 02. 내가천(內可川) 하구역에 가로막힌 제방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천’은 내가면 고천리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하점면 망월리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 12 : 10. 배수갑문에서 ‘내가천’을 건넜다. 서해랑길의 중요 포인트인지 이정목(종점까지 4km)과 이정표(종점까지 3.8km)를 갑문 양쪽에 세워놓았다.

▼ ‘내가천’을 건너 ‘망월리’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고 싶었는지 망월리(望月里)의 역사와 유래를 담은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하도 낡아서 읽을 수조차 없었지만.

▼ 12 : 15. 모퉁이를 돌아서자 ‘망월돈대(望月墩臺, 인천시문화재자료 제11호)’가 맞는다.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중 하나로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는 영문에 소속되어 있었다.

▼ 직사각형(38×18m) 구조로 둘레가 124m, 높이는 2.5m이다. 돈대의 중간 중간에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 말고도 대포가 놓여있었을 법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참! 두산백과는 윗부분에 여장(女墻, 성가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 지대가 낮은 갯가에 위치하고 있으나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경계의 대상인 석모수로. 건너에는 ‘상주산(上主山, 264m)’이 있다. 옹골찬 바위산이 웅크린 사자처럼 압도적으로 솟아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같은 섬에 있는 해명산(海明山, 327m)이나 낙가산(洛迦山, 267m)보다 낮은데도 더 우람해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산 이름에 ‘주인 주(主)’자를 썼을 것이고 말이다.

▼ 반대편에는 ‘망월평야’가 펼쳐진다. 고려 후기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을 통해 얻은 평야로 강화도의 단일평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망월리’ 역시 간척평야에 들어선 마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도 깊단다. ‘망월(望月)’이란 지명은 마을이 벌판 한가운데 있다 보니 달을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된다는 데서 유래됐단다.

▼ 계속해서 방조제를 탄다. 왼쪽은 ‘석모수로’, 즉 석모도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바다가 따라온다. ‘S’자 모양으로 크게 굽어진 이 물길은 조선시대 삼남(경상·전라·충청)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 중 하나였다. 강화 동·남쪽 해안에 비해 수심이 깊어 썰물 때에도 배를 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길은 교동도 앞에서 양서(황해·평안) 해로와 합쳐져 서울의 양화나루까지 이어진다.

▼ 조그만 공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강태공들 차지다. ‘할 일이 없어 라면이나 끓여먹으렵니다.’ 입질이 전혀 없다는 넋두리를 듣는가 싶은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다른 강태공은 남들 다 나누어주고 빈 망태로 돌아간다는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 망월돈대부터 무태돈대까지 이어지는 제방(堤方)은 ‘만리장성’으로 불린다고 했다. 1232년(고종19)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해안방어를 위해 쌓았는데, 옛 사람들에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으면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싶다. 그런데 한국 간척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이 방조제의 일부가 해일 때문에 소실되었던가 보다. 1998년도의 일인데 그로 인해 바다로 돌출된 저런 돌무더기(groin)들이 생겨났다나? 바다로 뻗어나간 모습이 흡사 갈빗살처럼 생겼다고 해서 ‘갈빗살방조제’란 별명까지 얻었고 말이다.

▼ 12 : 28. 또 다른 강화나들길 문주. 시점(서해랑길은 종점)인 ‘창후선착장’까지 2.6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이런 문주는 1.2km를 남겨놓은 지점에도 있었다.

▼ 쉼터를 겸한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 둑길이 조금 휘는가싶더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교동대교’가 나타난다.

▼ 철새는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농군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침략자일 것이다. 들녘을 오가며 쉼 없이 ‘훠어이~’를 외쳐대고 있는 저 농부의 마음처럼 말이다. 저런 정성들이 모여 명품 ‘강화 섬쌀’이 생산되고, 맛이 뛰어나다는 것을 밥맛 아는 사람은 다 안다.

▼ 강화도는 대한민국 최북단이다. 다음 주말, 북녘 땅을 마주보는 ‘제석봉 평화전망대’에서 103코스를 마지막으로 서해랑길의 대장정도 끝난다. 미확인 폭발물(목함지뢰)을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 ‘강화 간척지’ 개발의 역사를 담은 안내판도 눈에 띈다.

▼ 12 : 41. 바닷가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별립산(別立山, 416m)’을 마주보며 간다. 강화도에 있는 산릉에서 떨어져, 별도로 솟아올랐다는 산이다.

▼ 초여름을 알리는 찔레꽃이 한창이다. 둑길에 찔레꽃이 만개해 발걸음마다 은은한 향을 선사해준다. 간식거리 삼아 연한 찔레순을 따겠다며 다가가던 집사람이 포즈부터 잡고 본다. 순백의 꽃잎과 향긋한 향에 취했나보다.

▼ 12 : 52. 민가가 보이는가 싶더니 둑인지 평지인지 모르게 변해버렸다.

▼ 12 : 56. 삼거천(三巨川) 배수갑문. 고려산에서 발원 삼거리·신삼리·망월리 들녘을 적셔온 삼거천은 이곳에서 황해바다로 유입된다. 하나 더. ‘삼거천’은 별립산의 남쪽, 봉천산 남서쪽 그리고 고려산의 북서쪽 들녘을 담당하는 물길이다. 갯벌 매립 전 삼거천의 일부는 갯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갯벌을 매립해 만들어진 망월평야의 농수로이자 하천인 셈이다.

▼ 이후부터는 ‘창후로’를 따라간다.

▼ 13 : 02. ‘창후항(倉後港)’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강화 103코스) 안내도는 어시장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13.76km를 3시간 40분에 걸었다. 볼거리가 많아서인지 시간당 4km도 못 걸었다.

▼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는 ‘그곳을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힘들다고 회피할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행복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함께 걸으며 세상 무엇보다 빛나는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서해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갈 수 없는 땅, 건너지 못하는 바다 그리고 분단의 아픔. 서해랑길 103코스(창후항-강화평화전망대) (0) | 2026.06.08 |
|---|---|
| 회한의 고려 왕릉이 전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 서해랑길 101코스(곤릉버스정류장-외포항) (0) | 2026.05.25 |
|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로 들어가는 첫 여정. 서해랑길 100코스(대명포구-곤릉버스정류장) (1) | 2026.05.18 |
| 풍요의 대명포구, 찾아가는 산길은 많이도 고달프더라. 서해랑길 99코스(가현산 입구-대명포구) (1) | 2026.05.11 |
| 좁은 바다 물목을 올라가며 인천·시흥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다. 서해랑길 93코스(배곧한울공원-남동체육관) (1) | 2026.05.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