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산(觀音山, 732.6m)
산행일 : ‘21. 1. 30(토)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과 이동면, 영중면, 영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파주골순두부→안마을→파주골→능선→관음골재→관음산→남릉→안부 삼거리→자연의 집(소요시간 : 약 9km/ 4시간 5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에 밀린 요즘은 개인 산행이 대세다. 그러니 서울 근교의 산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던 차에 최군의 전화를 또 받았다.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곳은 포천의 불무산. 하지만 바윗길이 많은데다 폭설까지 예보되어 있어 부랴부랴 인근에 있는 관음산으로 바꿨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위험요소가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찾는 사람들이 드물 게 뻔하다. 하지만 ‘언택트(un-contact)’가 일상화가 된 요즘으로서는 최상의 산행지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들머리에는 ‘파주골순두부’라는 소문난 맛집까지 있으니 가족 산행지로도 꼽힐만하다. 감염의 위험이 없는 곳에서 오순도순 산행을 즐긴 다음 맛있는 음식으로 뒷풀이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 산행들머리는 ‘파주골순두부’ 주차장(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135-8)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다가 ‘성동삼거리’에서 우회전 37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잠시 후 ‘파주골순두부촌’에 이른다. 타고 온 차량은 ‘원조파주골순두부’ 식당의 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그 덕분에 우린 저 식당에서 끼니(점심)를 때웠다. 하지만 메인 메뉴인 ‘순두부 정식(6,000원)’은 물론이고 서브 메뉴들까지 온통 두부요리 일색이라서 우리 같은 애주가들에게는 궁합이 맞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그나마 술안주에 가까운 ‘두부전골(8,000원/1인)’과 ‘두부파전(8,000원)’을 주문했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은 요리들이 익숙하진 않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긴 수많은 유명 연예인들이 흔적까지 남기고 갔을 정도이니 그 요리 솜씨가 어디 갔겠는가.
▼ 주차장에는 ‘파주골’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패주(敗走)골’. 왕건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던 궁예가 패해 달아났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영평천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어 산수경관이 뛰어난데다. 최근 순두부촌까지 형성되면서 포천시의 맛집이자 관광명소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단다.
▼ 식당(원조파주골순두부) 화장실의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안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인데,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슬비가든(버선전골 전문점)과 자작나무가든(국수카페) 등의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르면 된다.
▼ 길가에 ‘경주최공휘운붕공(慶州崔公諱雲鵬公) 판전의봉사주지파(判典儀奉事周之派)’라고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하단의 화살표는 그의 위패를 모시는 ‘봉산사(峰山祠)’이라는 사당이 파주골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5분쯤 걷자 ‘파주골(성동4리)’ 마을이 나온다. 아니 ‘안마을’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성동4리, 즉 파주골이 ‘안마을’과 ‘바깥마을’이라는 두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동리(城洞里)’라는 지명은 궁예(弓裔)가 건국한 태봉(泰封) 시절, 이곳에 성(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큰 재(山) 아래 있다고 해서 ‘잣골’이나 ‘잿골’ 또는 ‘백곡’이라고도 불리었단다.
▼ 마을 안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하도 작아서 다리라 할 것도 없는 모양새지만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시 말해 마을을 벗어난다고 보면 되겠다.
▼ 다리 앞에는 ‘관음산’의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등산코스를 1코스와 2코스로 나누고 둘을 합해 종주의 개념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보광초교와 산정캠프장, 낭유고개, 그리고 노곡리의 주유소에서도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고 표기했다.
▼ 개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난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걷자 ‘브니엘기도원’이 나온다. 홍릉교회의 수양관을 겸하는 곳인데 부속건물인 ‘벧엘성전’이 무척 이색적이다. 집회장소를 이층에 배치하고 아래층을 뻥 뚫어 길을 내놓은 것이다. 관음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살리려다 보니 저런 모양새가 되었지 않나 싶다.
▼ ‘벧엘성전’을 지나고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폐광지역의 산림복구공사를 위해 내놓은 도로가 아닐까 싶다.
▼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비탈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뚫려있었다. 앞에 철망 울타리를 쳐놓은 것이 폐광된 ‘흥진광산’의 갱구인 모양이다.
▼ 임도의 끄트머리에서 이정표(관음산 정상 4.1㎞)를 만났다. 야미리(쇠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사거리)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입구이다. 참고로 고개 너머에 있는 야미리(夜味里)는 울창한 소나무 덕분에 밤이면 도둑들이 재미를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거는말·도내지·봉오골·서두물·쇠골·아랫배미·윗배미 등의 자연부락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쇠골’로 연결된다. 옛날 철(鐵)이 생산되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하지만 우린 반대편에 보이는 민가로 향했다. 그쪽에 또 하나의 등산로가 나있기 때문이다. 이 등산로는 북릉의 ‘안부 삼거리’로 연결된다. 지도에는 조금 전에 헤어졌던 코스와 ‘안부 삼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게끔 그려져 있었다.
▼ 민가를 지난 탐방로는 곧장 낙엽송이 울창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관음산 정상 4.0㎞)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파주골’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갈수기 탓인지 아니면 골짜기가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물기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건천(乾川)이다. 그래선지 개울을 가로지르는 데도 안전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폭우 때만 조심하면 되니 구태여 돈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골짜기를 따르다보니 비탈진 사면을 치고 오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 길의 형편은 썩 좋지가 않다. 다래나무 등 넝쿨식물들이 탐방로까지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기다 태풍 때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의 흔적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 그렇게 얼마쯤 올라갔을까 탐방로는 드디어 골짜기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시설물 하나를 만났다. 이정표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국가지점번호(다아 8131-0410) 표시목’이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2.6㎞.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이정표에 정상까지 4.0㎞로 적혀있었으니 벌써 1.4㎞를 걸어온 셈이다.
▼ 탐방로는 이후부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던 마지막 민가를 지난 지 35분 만에 능선(이정표 : 정상→/ 파주골↓)에 올라섰다. 일부 지도는 이곳을 ‘500m봉’으로 표기하고 있었으나 내가 보기엔 그저 능선의 안부일 따름이다. 참! 산행을 마치고 그 결과를 기록하다보니 이곳을 ‘광산골재’라 표기하고 있는 지도도 여럿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첫 이정표를 따라야 사거리인 ‘광산골재’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조금 더 걷자 이정표(관음산 정상 3.1㎞) 하나가 반긴다. 앗! 그런데 정상까지의 거리가 3.1㎞나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까 능선으로 오르는 도중에 만났던 국가지점번호판에는 정상까지의 거리를 2.6㎞로 적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참이나 걸었는데도 오히려 0.5㎞를 뒷걸음치는 꼴이 됐다. 하루라도 빨리 설치 기관인 포천시(국가지점표시목 설치)와 영중면사무소(능선의 이정표 설치)가 서로 협의해서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 탐방로는 이후부터 남쪽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이때 풍혈산과 관모봉이 위치한 오른쪽으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기 직전이라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 나뭇등걸의 기이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 수많은 버섯들이 마치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난 것이다. 저런 모양새 때문에 ‘운지버섯’이란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아무튼 저 버섯은 종양 저지율이 77.3%나 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관상용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만큼 흔한 버섯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3㎞나 되다보니 미리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었나 보다.
▼ 능선에 올라선지 23분 만에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정상↑/ 순두부체험관→/ 파주골↓)는 이곳이 순두부체험관에서 올라오는 길(2코스)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곳이 ‘관음골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 오른편 산자락에는 잣나무가 한가득이다. 그것도 무척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긴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인 가평이 바로 옆 고을이 아니겠는가.
▼ 15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1.9㎞나 남았단다. 이정표는 또 이곳이 5부 능선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껏 절반 밖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맑고 포근한 날씨로 변할 거라던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추워지는데 큰일이다.
▼ 길의 상태도 썩 좋지 않다. 수북이 쌓인 눈 때문에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야만 하는 곳도 만나게 된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은 한북정맥의 8지맥 가운데 하나인 ‘명성지맥(鳴聲枝脈)’이다. 한북정맥에 속한 광덕산에서 서쪽으로 새롭게 가지를 치고, 영평천과 한탄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50㎞의 산줄기로 각흘봉(838m)과 명성산(923m), 사향산(736m), 관음산(733m), 불무산(663m), 보장산(555m) 등의 유명산들을 품고 있다.
▼ 그렇게 22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구호지점표시목(다아 8298-0417)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정상까지의 거리가 적혀있지 않았다. 참! 왼쪽으로 나있는 산길도 눈에 띄었다. 꽤 많은 리본들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산정호수 방면의 ‘산정캠프장’이나 ‘우물목’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일 것이다.
▼ 드디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이어서 하루 앞도 못 내다보는 기상청을 향한 욕설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되돌아 내려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마침맞게 설화까지도 우릴 유혹한다. 내친김에 정상까지 올라보기로 한 이유이다.
▼ 설화(雪花), 즉 눈꽃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는 현상을 말한다. 두리뭉실하게 쌓이면 한낱 눈송이일 따름이지만 이게 상고대처럼 아름답다보니 ‘꽃(花)’이란 토씨 하나를 더 달았다. 참고로 상고대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변한 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었다는 의미에서 ‘수상’ 혹은 ‘나무서리’라고도 하고 ‘서리꽃’으로 부르기도 한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신시설도 눈에 띄었다. 소요 전력은 태양전지판에서 얻어다 쓰는 모양인데 용도는 알 수 없었다.
▼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은 명성지맥의 일부이다. 이 지맥은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곳곳에서 군부대나 군사시설들이 일반인들의 통행을 막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곳 관음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흘러간 옛 얘기로 남았지만 그 흔적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능선을 따라 길게 교통호가 파여 있는가 하면 거의 모든 봉우리마다 벙커가 지어져 있다.
▼ 능선에 올라선지 1시간 35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10평 남짓 되는 정상에는 왕수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 외에도 이정표(수입리/ 관음골)와 삼각점(갈말 25)이 설치되어 있다. 이 봉우리의 또 다른 이름은 ‘망무봉’이었다고 한다. 옛날 궁예가 올라가 적정을 살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주변의 나무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기는 했어도 옛 얘기가 실감날 정도로 사방이 막힘이 없다. 하지만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오늘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북쪽의 명성산과 사향산은 물론이고, 남쪽의 운악산과 금주산. 그밖에도 명지산과 청계산, 금주산, 왕방산 등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이정표에는 나타나있지 않으나 이곳 정상에서 낭유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관음산이란 지명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이 산마루에 바랑을 벗어 놓고 갔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년대 초 발간. 보물 제1591호)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발간),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년경 발간) 등에 ‘영평현 동쪽(또는 북쪽)’에 있다고 나와 있을 정도니 오래 전부터 그리 불리어왔다고 볼 수 있겠다.
▼ 추위와 눈보라에 떠밀려 하산을 서두른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수입리’ 방향의 남쪽 능선이다. 하산길은 불길하게도 엉덩이 썰매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후로도 꽤 여러 곳에서 이런 상황들과 맞닥뜨렸다. 보통 때라면 이까짓 바윗길쯤이야 우습게 여기겠지만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으니 어쩌겠는가.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순백의 눈꽃으로 빛나는 겨울왕국’. 이런 표현을 스스럼없이 쓰는 산들은 의외로 많다. 설악산, 태백산,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 이들은 또 하나같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고대와 설경을 뽐내는 곳이라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압도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라면 꼭 그런 산을 찾을 필요가 없을 듯 싶다. 보라! 눈꽃으로 치장된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들이 내세우는 풍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눈보라나 한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눈보라는 나뭇가지 위까지 소담스럽게 쌓아올렸고, 계속되던 한파는 그걸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그게 바로 눈 속에서 피어난 꽃, ‘눈꽃’이다.
▼ 하산길은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겨울 풍경을 일러 ‘죽은 나무도 꽃을 피운다.’고 했다. 별천지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표현 또한 이상향을 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왕에 만났으니 더 이상이 없을 것 같은 완벽한 눈꽃 세상을 만끽해 보자.
▼ 산길은 서둘지 않고 고도를 낮추어간다. 작은 오름과 긴 내림이 반복되기 때문에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완만한 산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오른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순두부체험관’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일 것이다. 참! 최군은 하산 코스로 이 루트를 주장했지만 내가 고집을 세워 계속해서 능선을 탔다.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을 정도로 등산로를 내팽개치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정표는 딱 한곳에서만 보았을 따름이다.
▼ 능선은 양쪽 모두가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비탈지다. 아니 왼쪽은 가까운 게 아니라 아예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덕분에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깔끔하게 단장된 ‘축구장’이 내다보인다. 관음산 자락에 들어선다던 ‘축구마을’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는 국제 규격의 축구장을 중심으로 빌라형 주택과 식당, 카페 등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공사가 마무리 되었나보다.
▼ 길의 상황은 썩 좋지가 않다. 갈수록 경사가 가팔라지는데다 바닥이 너덜로 되어있어 발을 내딛기가 편치 않은 것이다. 거기다 미끄럽기까지 하니 최악이라 하겠다. 수북이 쌓인 낙엽만 해도 미끄럽기 짝이 없는데, 거기다 눈까지 더했으니 아예 죽을 맛이다.
▼ 그렇게 20분쯤 진행하자 이정표(수입리/ 정상) 하나가 반긴다. 하산 길에 만나본 유일한 이정표이지만 길 찾기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근처에서 길이 하나 나뉘는데도 이정표에는 표기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갈리는 길이 조금 더 또렷한데도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탔다. 이 또한 내 고집 탓이다. 아니 지난번 청우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자초하게 만들었던 최군의 기가 많이 꺾여있던 덕분이기도 하다. 참! 이곳에서 떠올랐던 궁금증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오른편으로 나뉘는 길이 어느 지도에서 보았던 ‘산내지’로 내려가는 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선을 따라 걷자는 내 주장은 옳은 선택이 된다. 다만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안부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
▼ 아무튼 내 고집은 우릴 고생만 잔뜩 시키고 말았다. 능선을 따라 15분 넘게 진행하다가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능선이 점점 가팔라지더니 종내는 절벽에 가깝게 되어버렸으니 어찌 발길을 되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까지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안부(아래 사진)에서 오른편으로 또렷하게 산길이 나있었다는 점이다.
▼ 주능선을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은 아직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작고 완만한 오름과 가파른데다 긴 내림이 반복되지만 어떤 곳에서는 제법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기도 한다.
▼ 그렇게 올라선 첫 번째 봉우리에서 돌탑을 만났다. 모양새야 비록 삐뚤빼뚤하지만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되는 장삼이사의 기념물이라 하겠다. 산행에 나선 이들이 나름대로의 염원을 가득 담아 쌓아 올렸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안부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기괴한 모양의 바위도 보인다. 어느 영화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슈퍼히어로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이다.
▼ 하나둘 보이던 바위가 언제부턴가 아예 바윗길로 변해버렸다.
▼ 덕분에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도 가끔 눈에 띈다. 거기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푸름까지 더하면서 산길은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관음산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구간이라 하겠다.
▼ 바위가 많다보니 조망까지 시원스럽다. 일동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남녘지방의 평야지대가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 돌탑봉에서 20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군의 시설물들이 널려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타이어나 벙커, 교통호, 군사시설 보호구역 푯말 등은 관음산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하겠다. 맞다. 이곳 관음산은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남북이 대치하던 접경 지역이었다. 귓가에 포성(砲聲)이 들려오는 걸 보면 현재의 남북경계선인 휴전선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모양이다.
▼ 이 능선은 소나무 숲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바위가 이미 없어진데다 가파름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까지 쌓여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으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기에 딱 좋은 곳이다.
▼ 두어 곳에서 노곡리(蘆谷里)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을 나누어보내자 무덤 몇 기가 연거푸 눈에 들어온다. 동네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노곡리는 ‘갈월’ 또는 ‘노곡’이라고도 불리는데, 갈대(蘆)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 땅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날머리는 자연의 집(포천시 이동면 노곡리 1244-1)
잠시 후 날머리인 자연의 집 근처에 내려섰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밭의 경계선을 따라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의 침범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겠지만 나 같은 등산객에게는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산비탈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끝내는 울타리를 넘고 말았다. 그나저나 오늘 산행은 5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10분이 포함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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