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산(靑雨山, 619.3m)

 

산 행 일 : ‘21. 1. 16(토)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상면, 조종면의 경계

산행코스 : 덕현리(구정동 마을)→청우능선(남서릉)→정상→남릉(알바)→능선안부 복귀→청오사→덕현리 원점회귀(소요시간 :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방콕문화’가 이젠 우리 집까지 파고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질 않는데다 체육관까지도 문을 걸어 잠갔으니 방콕뿐. 따로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찾아낸 소일거리가 천변 걷기였다. 묵현천을 따라 걷다가 자전거도로를 만나면 이를 따르고, 그마저도 끝나면 도로변을 따른다. 하지만 매일 같은 코스를 걷다보니 이마저도 맥이 빠져 버린다. 그러던 차에 최 군(君)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말에 시간이 나니 산행이나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 나선 곳이 가평에 있는 ‘청우산’이다. 해발이 600m를 겨우 넘기는 이 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능선이 완만한데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위험한 곳이 일절 없다. 거기다 근교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코로나-19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요즘으로서는 가족 산행지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근교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걸을 수 있는 산행지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산행들머리는 ‘광성교회 수련원’(가평군 상면 덕현리 408-2)

‘국도 46호선’을 타고 가평·춘천 방면으로 달리다가 하천 IC(가평군 청평면 하천리)에서 현리·포천 방면 ‘국도 37호선’으로 옮긴다. 잠시 후 다원교차로(가평군 상면 덕현리)에서 옛 국도로 내려와 같은 방향(현리·포천)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성교회 수련원’이 나온다. 수련원 앞에서 우회전하여 덕현교를 건넌 다음. 청우산 등산안내도 앞의 공터에 차를 세우면 된다.

▼ 하지만 예정했던 곳에 차량을 세워둘 수 없었다.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가 폐석더미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사면 기둥 붉었타/석양 행객 시장타/네 절 인심 고약타’라는 김삿갓의 희작시(戱作詩)가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주차를 못하도록 누군가가 일부러 쌓아놓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니길 빌어본다. 김삿갓이 준비했었다는 ‘지옥 가기 딱 좋다’라는 구절이 뒤를 이어서야 되겠는가.

▼ 별수 없이 차량을 이용해 ‘구정동’ 마을까지 들어갔다. 그리고는 폐가의 진입로에다 파킹을 하고 들머리로 되돌아 나왔다. 다리(덕현교)에서 두어 곳의 유원지(겨울이어선지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었는데, 물가에 위치한 식당이라고 보면 되겠다)를 지나면 나타나는 ‘구정동’ 마을의 첫 번째 가옥 앞이다. 덕분에 우린 이곳 구정동 마을의 명물이라는 ‘느티나무’를 구경하지 못했다. 1720년에 식재된 보호수로 훌륭한 눈요깃감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들머리에는 이정표(→1코스 3.21㎞/ 2코스↑ 3.1㎞)와 함께 ‘청우산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청우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이곳에서 청우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 ‘1코스’이다. ‘2코스’의 출발지도 1코스와 같다. 역시 이곳을 출발해 청우능선을 거쳐 정상에 이른다. ‘3코스(2.75㎞)’는 ‘조가터’가 출발지이다. 조가터에서 청우능선으로 오른 다음부터는 2코스를 따른다. ‘4코스’는 녹수계곡에서 곧장 정상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정상까지 1.8㎞로 가장 짧은 거리이다. 참고로 안내도에 나타나지 않은 탐방로도 있다. 정상에서 북릉을 타고가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망배치마을로 연결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갈림길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민가의 담장을 따라 난 수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2코스 방향이다. 오늘 산행은 청우능선(2코스)를 따라 정상에 이른 다음 1코스를 이용해 출발지로 되돌아올 계획이다.

▼ 왼편으로는 국도 37호선이 지난다. 경상남도 거창군(거창읍)에서 경기도 파주시(문산읍)에 이르는 총 연장 399.2㎞의 일반 국도이다. 내륙 산간지역을 관통하는 전형적인 계곡·산악형 드라이브 코스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으나 확포장을 거친 지금은 고속도로나 다름없어졌다.

▼ 수로가 끝나면서 산길은 능선으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너른 편이다. 오가는 사람이 서로 비켜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다 한적하기까지 하니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멍 때리기 딱 좋은 길이다. 가끔가다 만나게 되는 잣나무 숲의 상쾌한 공기는 덤이라 하겠다.

▼ 키 작은 잡목 사이로 난 산길을 따라 걷길 10분 남짓. 능선이 온통 잣나무 일색으로 바뀌어 있다.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인 가평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단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높은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기 때문이란다. 가평 잣의 자랑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탄수화물이 타 산지 잣보다 많고 지방산중 리놀레산(Linoleic acid)과 아라키논산(Arachidonic acid)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혈압을 내리고 피부를 아름답게 하며, 호두나 땅콩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 저 나무에서 채취한 잣은 ‘막걸리’로 승화되기도 한다. 트림이나 숙취가 없고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는 ‘가평 잣막걸리’가 저 열매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잔에 따르면 표면이 옥빛으로 반짝인다고 해서 '옥지주'라고도 불리던 술인데, 조선시대에는 임금님의 수라상에까지 오를 정도로 귀한 술이었다. 잣막걸리와 함께 최근 슬로푸드로 각광받고 있는 잣 요리가 잣국수와 잣죽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잣나무 숲속에서 사거리를 만났다. 왼편은 3코스의 시점인 조가터에서 올라오는 길. 하지만 3코스는 조금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길이 나뉘는 안부에는 이정표(정상↑ 2.32㎞/ 조가터← 630m/ 뒷골→ 450m/ 등산로 입구↓ 780m) 외에도 식탁용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가 넘치도록 만들어지는 곳이니 힐링까지 하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안부에서 시작되는 오르막길은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벌목을 끝낸 산자락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명품 유원지로 알려진 녹수계곡(綠水溪谷)을 눈에 담을 수도 있으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녹수계곡은 명지산과 청계산, 그리고 귀목봉에서 발원한 조종천((朝宗川) 가운데 청우산과 녹수봉 사이의 계곡을 이르는 지명이다. 곧게 흐르던 물줄기가 이 지역에 이르러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붙여놓은 것이다. 가평요와 조종암에서 시작해 망배치와 간성터를 지나 조가터에 이르는 유원지형의 계곡인데 거리는 3km쯤 된다.

▼ 발아래로 임초리와 행현리 일대가 펼쳐지는가 하면. 그 뒤로는 깃대봉과 운두산을 잇는 능선이 길게 늘어섰다.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축령산이 눈에 들어온다. 두 산줄기의 사이에는 가평의 또 다른 명물인 ‘아침고요수목원’이 들어서있을 것이다.

▼ 잣나무 숲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 숲길을 걷고 있자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아무리 걸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 그 까닭은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잣나무가 자연의 명의인 셈이다.

▼ 가끔은 요렇게 잘생긴 바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두꺼비를 닮은 것 같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 안부에서 30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정상↑ 1.7㎞/ 조가터← 1.4㎞/ 광성교회↓ 1.8㎞)을 만났다. 왼편은 ‘조가터’에서 올라오는 ‘3코스’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가터(曺哥垈)란 조씨(曺氏)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조가 댁’ 동네로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집성촌으로서의 흔적은 사라지고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한다. 지명의 끝에 ‘터’라는 토씨가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참! 마을의 형상이 조개를 닮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해 두자.

▼ 겨울 산행은 보약이라고 했다. 그것도 잣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은은한 솔향이 코끝을 휘감는다. 솔향은 소나무에서만 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말처럼 소나무와 잣나무는 닮은 점이 참 많다. 하지만 다른 점 역시 많다. 잣나무 숲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나무와 비슷해 보이던 잣나무의 차이점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의 껍질이 적갈색, 흑색인 것과 달리 잣나무는 회갈색, 회백색을 띠었다. 껍질도 크게 갈라지지 않는 편이다. 어른 주먹만 한 열매도 크게 차이가 난다. 솔방울에 비하면 잣송이가 4~5배나 더 크다.

▼ 돌탑도 눈에 띈다. 산행에 나선 이들이 나름대로의 바램을 담아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맨 위의 돌멩이 몇 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었으면 저리도 오묘하게 쌓아올렸을까 싶다.

▼ 어설프지만 이런 바윗길을 오르기도 한다. 다른 산이라면 너덜로 칠 규모지만 바위가 하도 귀하다보니 이마저 시선을 끈다.

▼ 앞서가던 최군이 뭔가를 가리킨다. 다가가보니 ‘영지버섯’이 아닌가. 중국의 본 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 산삼에 비견되는 영약으로 소개했을 정도로 신령한 버섯이다. 종암 저지율이 77.8%나 되는 대표적인 항암 약초이기도 하다. 활엽수의 뿌리 부분이나 그루터기에서 자라는데, 이곳이 참나무 군락지이다 보니 생육조건에 딱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보다 ‘아카시아재목버섯’을 훨씬 더 많이 채취했다. 장수버섯이라고도 불리는 이 버섯도 종암저지율이 44.2%나 된다고 한다.

▼ 3코스와의 접점을 통과한지 25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정상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금과 똑 같은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상은 그 너머.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에 있다는 얘기이다.

▼ 이후로도 잣나무 숲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덕을 지녀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는 나무.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그대로를 받고 부족함을 말하지 않는다는 나무이다. 숲길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잣송이는 숲의 전령들이 길을 찾느라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을 연상시킨다. 그 잣송이들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다. 잣나무는 2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기다림의 나무다. 그러니 사람이건 다람쥐건 급하게 서두른다고 잣을 얻을 수는 없다. 귀한 잣을 얻기 위해서는 꽃이 피고도 꼬박 1년을 넘겨 다음 해 가을이 되어야 잣을 수확할 수 있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의 이름은 ‘청우’이다. 문득 청우산의 본래 이름이 ‘청우산(靑牛山)’이었다는 게 생각난다. 도가(道家)의 창시자인 노자(老子)가 서역(西域)으로 갈 때 탔던 수레를 끌었다는 소가 곧 ‘청우(靑牛)’이니 그렇다면 신선(神仙)이 되기를 갈망하던 어느 선비가 이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의미로 잘 쓰이고 있는 도교(道敎)에서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도가란 우리 인간이 자연의 명령에 따르며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 사상을 가리킨다.

▼ 최군이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릿찌를 하는 듯한 폼을 잡는다. 바위가 드물다보니 볼거리는 물론이고 즐길거리까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내 넋두리를 들었나보다.

▼ 3코스 접점을 통과한지 55분 만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청우산↑ 0.15㎞/ 육천유원지← 1.66㎞/ 덕현↓ 2.20㎞)를 만난다. 왼편은 육천유원지에서 올라오는 길. 그러니까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안내도의 ‘4코스’이다. 이정표 옆에는 돌탑도 보였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올려놓은 돌멩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돌탑의 모양새를 갖춘 모양이다.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올려놓은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품고서 말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눈꽃잔치가 시작된다.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상고대(霧氷) 잔치이다. 상고대란 안개 등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영하(零下)의 기온으로 인해 나뭇가지 등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저지대에서 보이는 설화 즉 내리는 눈이 나뭇가지에 쌓여 언 눈꽃과는 달리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눈요깃감이다. 그런데도 600미터를 겨우 넘기는 나지막한 산에서 이런 상고를 만났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며 걸음을 멈춘다.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맞다. 능선은 온통 황홀한 아름다움만 가득하다. 하긴 이런 곳에 어찌 부정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 나뭇가지에 매달린 미세한 얼음조각들은 가히 환상 그 자체이다.

▼ 상고대 잔치에 심신을 내맡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청우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15평 남짓의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가평군 특유의 말뚝 모양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뭔가를 매달았음직한 깃대도 보인다. 하지만 길 찾기에 도움이 되는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하산 길을 잘못 들어섰고, 그로 인해 위험천만한 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청우산의 본래 이름은 ‘청우산(靑牛山)’이었다. 푸른 소가 서있는 듯한 지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다가 ‘소 우(牛)’ 자가 ‘비 우(雨)’ 자로 변음 되면서 지금의 청우산(靑雨山)이 되었다 한다.

▼ 정상에는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었다. 건설부에서 세웠다는데 자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였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데다 유일하게 트인 서북쪽마저도 연무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는 서쪽으로 축령산과 서리산 능선이 북으로는 운악산, 청계산, 명지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 수리봉 방향의 능선을 따라 10m쯤 걷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하산을 시작한다. 앞장서고 있는 최군이 찾아낸 산길이다. 그러나 내 머리는 ‘아니올시다!’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온다. 능선이 아예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은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최씨 고집이 어디로 가겠는가. 지도까지 보여주며 고집을 부린다. 아무튼 우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찾았어야 했는데 우린 정상을 지나친 지점에서 들머리를 찾았던 것이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킨다. 산악회의 리본이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군의 편에 서버린다. 하지만 나는 끝내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정규 등산로인데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 능선은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팔라져 버렸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듯 발로 스피드를 조절해가면서 말이다.

▼ 그런 악전고투를 한 시간이나 치른 뒤에야 우린 계곡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생이 끝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수리재’ 마을로 흘러가는 계곡에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마을까지 간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차량이 파킹되어 있는 ‘구정동’ 마을까지 되돌아오려면 택시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그에 따른 시간이나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 우리가 내린 결론은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 즉 정규등산로(1코스)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쉬운 결정은 물론 아니다. 집사람의 체력이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라가야할 능선은 보면 볼수록 가파르지 않는가.

▼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고 적힌 푯말이 보인다. 그래선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별로 없다. 어쩌면 저 시설물을 세운 군인들이 잡목이나 넝쿨식물들을 제거했는지도 모르겠다.

▼ 한참을 오르는데 또 다른 상황이 우릴 맞는다. 능선이 자꾸만 정상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능선을 옆으로 째가며 오르기로 했다. 넝쿨식물로 뒤덮인 계곡을 지나게 됨은 물론이다. 긁히고, 찔리고, 싸대기를 얻어맞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은 아래로 지나가는 것까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정도이다. 그래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 길을 개척해가며 오르기를 30분. 드디어 1코스 등산로가 나있는 능선에 올라섰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대충 500m 남짓. 20분이면 내려설 수 있는 거리를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90분이 걸렸다. 고생을 사서 한 셈이다.

▼ 잠시 후 능선안부(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2.61㎞/ 청우산 정상↓ 600m)에 내려선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계곡을 향해 가파르게 내려선다.

▼ 원점회귀를 위해 구정동 방향으로 내려서는 산자락엔 잣나무 대신 낙엽송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 구간은 또 칡과 다래 등의 넝쿨식물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 산길이 거칠다보니 예절교육은 기본이다. 쓰러진 나무 아래를 통과하는데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지나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라는 연리지(連理枝)를 빼다 닮았다. 연리지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연리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연리지(枝 또는 木)의 고사(故事)는 후한 말(後漢 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 위의 나무가 아가페(agapē)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면 아래 사진의 나무는 ‘에로스(erōs)’ 사랑의 실체라 할 수 있겠다. 상대방의 몸뚱이를 양 다리로 칭칭 감고 있는 게 얼마나 열정적인가. 참고로 연리지를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한 첫 번째 인물은 당(唐)나라 시인 백락천(白樂天)이었다. 그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으면서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듯한 나무도 보인다. 하나의 뿌리에서 엄청나게 많은 줄기들이 돋아난 것이다. 저 정도의 출산율이라면 최근의 화두인 ‘저출산’이 어디 문제나 되겠는가. 인구 감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정부의 홍보용 자료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참! 저런 나무는 고흥의 마복산(馬伏山, 539m)에서도 본 일이 있었다. ‘반송(盤松)’으로 분류되는 소나무로 한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려나온다고 해서 만지송(萬枝松)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 길가. 특히 계곡은 온통 다래넝쿨로 뒤덮여 있다. 이를 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올 봄에 다시 찾아오자는 것이다. 연하기 짝이 없는 다래 순이 욕심난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 잠시 후 자그마한 계곡을 건넌다. 요 아래 구정동 마을의 상수원이지만 이름은 없다. 크고 작은 바위가 널려있는 것이 계곡으로서의 풍모를 갖추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누울 자리를 보고 자리를 뻗으랬다고 가평에서 이 정도로는 계곡에 끼이지도 못한다. 가평은 등산안내도에 표시된 산만 해도 52개소나 된다. 산이 많으니 계곡이 많고 계곡이 많으니 하천도 많아 산과 계곡과 하천과 강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고장이니 어련하겠는가.

▼ 계곡을 벗어나자 ‘더빌라 2호점’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1.74㎞/ 더빌라 2호점← 2㎞/ 청우산 정상↓ 1.47㎞)이 나오고, 이후부터 탐방로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에는 뒷골 갈림길(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1.57㎞/ 뒷골← 1.05㎞/ 청우산 정상↓ 1.64㎞)을 지나기도 하는데 오른편에 조성된 단풍나무 숲이 장난이 아니다. 범위까지 넓으니 가을철에는 울긋불긋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 임도를 따라 20분쯤 내려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청오사(靑悟寺)가 나타난다. 인터넷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던 절인지라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일단은 들어가 보기로 한다. ‘푸를 청(靑)’에 ‘깨달을 오(悟)’자를 쓰고 있는 절이니 작은 깨달음이라도 하나 얻어 갈지 누가 알겠는가.

▼ 대웅전과 칠성각, 종각, 요사채, 차방(茶室)으로 이루어진 전각들은 하나같이 세간의 여염집을 닮았다. 단청이 들어간 멋진 전각들을 지을만한 교세를 아직 갖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이 절은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청우당 무공(靑雨堂 無空)‘이라는 스님의 부도에서 그가 창건했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따름이다.

▼ 절의 이름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을 여럿 얻어올 수 있었다. 가슴에 와 닿는 글귀들을 곳곳에 붙여놓아 읽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내가 평생 추구해 온 내용도 보이기에 옮겨 본다.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려 하지 말고 부모가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살아가라’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 절간을 빠져나오는 중생에게 불이문(不二門)이 배웅을 한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또한,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여기를 지나면 금당(金堂)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난 지금 불국토, 즉 부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세계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 청오사를 빠져나오면 길은 이제 널따란 신작로로 변한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는 완만한 임도가 덕현리(구정동)까지 이어진다. 참! 산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청우산은 ‘푸를 청(靑)’자를 쓴다. 사시사철 푸른 잣나무로 둘러싸인 데서 연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푸름이 겨울이면 더욱 짙어진단다. 하얀 종이 위에 푸른 잣나무를 그려놓았다고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엊그제 폭설이 내렸던 터라 그런 절경을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으려니 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청우산에는 눈이 아예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구정동마을(원점회귀)

‘더빌라2호점’ 갈림길(이정표 : 등산로 입구↑ 630m/ 더빌라2호점← 3.55㎞/ 청우산 정상↓ 2.58㎞)을 지나고 이어서 잘 지어진 전원주택 몇 채를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아침에 출발했던 구정동 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5시간 1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하산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1시간 이상을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