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셋째 날 : 소금 호수(Tuz Golu)와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특징 : 소금호수 투즈괼(Tuz Golu) : 터키의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에 아크사레이(Aksaray)와의 중간 지점에 소금호수(Salt Lake)가 있다. 바다와 같은 인상을 주는 이 호수는 넓이가 충청남북도보다도 더 넓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와 연결되지도 않은 이 내륙의 호수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단다. 그것도 터키 국내소비량의 64%를 생산 한단다.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네브셰히르와 니데(Niğde) 사이에 난 도로상에 있으며 주도(州都)인 네브셰히르에서 29km 떨어져 있다. 터키의 많은 지하도시 가운데 가장 큰 이곳은 1960년 닭을 쫒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지하도시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여개나 된단다. BC 8~7세기에 프리지아인()이 처음으로 세웠으며 이후 로마제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온 초기 기독교인들이 숨어들었고, 7세기부터는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살았다. 예배당과 학교 교실, 식당, 침실, 부엌, 마구간, 창고, 와인·식용유 저장고 등 다양한 생활시설이 갖춰져 공동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각층은 독립적으로 구별되며 긴 터널을 통해 다른 지하도시들과 연결된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소금호수라는 투즈괼(Tuz Golu)‘이다. 널따란 주차장은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를 한 세트로 묶어서 1(EUR)를 내란다. 그럼 외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TL(터키 리라)로 거슬러준다. 거슬러주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소금사막을 만난다는 부푼 기대가 까짓 거스름돈 정도야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지난번 중남이 여행 때 유우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을 들러보지 못했던 걸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그런데 이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유우니사막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니 얼마나 흥분되는 일이겠는가.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내려 허름한 간이매점들 사이를 지나기만 하면 된다. 간이매점에서는 호수에서 생산된 소금을 이용해서 만든 비누와 화장품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호기심이라도 생긴다면 하나쯤 팔아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소금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들을 설명하는 광고판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투즈 괼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엄청나게 많은 새의 무리를 찍은 사진도 포함되어 있는데 터키어로만 설명이 되어 있어서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빠질 리가 없다. 그것도 무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니 말이다. ’Maras Dondurmasi‘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염소젖으로 만든 Turkish 아이스크림일 것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시야가 툭 터진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넓이가 1,500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한다. 그런데 물 대신에 하얀 소금이 수북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먼 옛날 이곳은 바다였으나 지각변동으로 인해 호수로 변했다고 한다. 그 이후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호수가 마르면서 바닥에 소금 결정체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소금호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우기(雨期)가 되면 이곳은 다시 물로 채워진단다.

 

 

호수에는 수많은 소금 제조공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허름한 간이매점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허허벌판 같은 소금밭뿐이다. 그나저나 이곳 투즈괼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터키 국내 생산량의 64% 정도를 차지하는데,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항아리를 만드는데 사용된단다. 먼 길을 이동하며 물건을 팔러 다니던 대상(隊商)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소지하고 다니던 항아리이다. 이곳 투즈괼에서 생산된 소금과 진흙을 알맞게 조절해서 만든 항아리는 아무리 더워도 물이 얼음물처럼 차고 변질되지 않는다고 해서 최상의 제품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소금항아리 200개를 만들려면 소금 10kg이 드는데 이때 소금의 양이 많으면 뜨거운 오븐이나 화덕 속에서 쉽게 깨지고 또 적게 넣으면 물이 미지근해진단다.

 

 

 

 

 

 

바닥을 파보면 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건기가 아닌 때에는 여느 호수들처럼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물이 염분이 많은 탓에 햇빛이 강한 봄과 여름에는 증발되면서 소금밭이 되고, 비가 오는 가을과 겨울에는 호수로 변하는 것이다.

 

 

 

 

 

 

우기에는 드넓은 수평선도 볼 수도 있단다. 하지만 지금 같은 건기에는 사방이 온통 소금밭뿐이다. 그래도 꼭 수평선을 보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보자. 저 멀리 아득하게나마 수평선이 보일 것이다.

 

 

다음 목적지인 데린구유로 향한다. 지하 동굴로 유명한 곳이다. 차창 밖으로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고도(高度)1000m를 훌쩍 넘기는 중부 아나톨리아지역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창밖 풍경이 확 바뀐다. 멀리 병풍처럼 절벽이 둘러쳐진 아래에 마을 들이 보는가 하면, 구멍이 뻥뻥 뚫린 커다란 암괴(巖塊)가 도로변에 가깝게 솟아있다. 먼 옛날 이곳에서 일어났다던 화산활동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버스는 어느덧 데린구유(Derinkuyu)에 도착한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인데 이정표에는 마을 이름과 함께 지하도시(Underground City)라는 이곳의 특징을 적어 놓았다. 그만큼 유명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데린구유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이 유적은 기원전 히타이트(Hittite)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특히 6세기경, 로마와 이슬람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땅 속으로 파고들면서 규모가 커진 피난처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창 많을 때는 1만여 명이 거주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현재 극히 일부만이 공개되고 있는데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환기구(換氣口, ventilating hole)이다. 데린구유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5년 닭 한 마리가 작은 구멍에 빠져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닭을 찾느라, 부근의 땅을 파 보다 지하도시를 발견했다고 한다. 당시 닭이 빠졌다는 구멍이 이곳일 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데린쿠유 지하도시에는 모두 52개가 넘는 공기환풍구가 있는데, 가장 상층부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공기구멍이 있어서 모든 층에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환기구 근처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젠 굴속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이때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나 허리가 아픈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가이드의 경고음이 들린다. 하지만 이에 응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 하긴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희귀한 구경거리를 포기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이곳 사람들은 깨어 있었다. 그 안에서 결혼과 출산 등 인간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인 집회와 세례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굴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주거의 기능을 모두 갖춘 하나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쟁이나 재해를 피해 얼마간 동굴에 숨어살 수는 있다. 그러나 SF도 아니고 어떻게 수천 명이 도시를 이루며 그것도 수많은 세대를 이어오며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었을까.

 

 

아래 사진은 데린쿠유(Derinkuyu)’의 단면도이다. 거대한 바위지대에 지하 20층까지 방을 냈다고 하는데 현재는 지하 8층까지만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갖고도 거대한 지하도시(Underground City)이다. 한때 이곳에는 1만여 명이나 살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도시의 1, 2층에는 주로 성경학교와 수도원, 부엌, 저장고, 침실, 응접실, 와인창고, 식당 등이 자리 잡았고, 무기저장고와 은신처, 각종 터널들은 3, 4층에 배치했다. 마지막 층에는 특별히 견딜 수 있게 우물, 숨겨진 무기, 교회, 회의실, 고해성사실, 무덤, 환풍구가 있다.

 

 

굴은 구불구불 이어지다 가파르게 떨어진다. 곳곳에 안내 등이 켜져 있지만 굴속이 어두워 발걸음 떼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거기다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몸을 웅크리고 걸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허리를 숙이면서 예의를 차려야만 하는 곳도 있다. 외부침입에 대비해서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아무리 많은 적이 침입하더라도 일대일로 저항할 수 있을 테니 한번 해볼 만 했겠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입이 딱 벌어진다. 신기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원시 히타이트(Hittite)’인들이 만들었다면 BC 8~7세기경일 텐데, 어떻게 이런 동굴을 축성할 생각을 했을까? 전문가들은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지하로 굴을 파고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주민들은 더 넓은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옆으로 혹은 지하로 더 많은 시설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해 결국에는 하나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개방되어 있는 시설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지하 8층 가운데 지하 1층이 선사시대인 히타이트인들이 저장고로 삼았던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종족들이 숨어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했단다.

 

 

 

 

지하도시에는 지상에서 필요한 시설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방이나 부엌 외양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간은 물론이고 학교나 세례 제의를 위한 집회시설,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긴 죄수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을 가두어 놓은 흔적도 있어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외에도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 저장소, 환기시설, 매장공간도 보인다. 이쯤에서 화장실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화장실을 따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일을 보고,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단다. 몽골 유목민들이 가축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듯 재활용했던 모양이다.(아래 사진은 신학교의 강의실로 여겨지는 장소이다. 긴 암반 두 개로 책상을 만들어 놓았다.)

 

 

 

 

 

 

 

 

 

 

 

 

 

 

출입구가 있는 복도에는 돌문을 만들어두었다. 급습을 당했을 때는 지하로 내려와 볼트를 풀어 문을 닫음으로써 긴급대피 했단다. 이 돌문의 가운데에는 지렛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안에서는 쉽게 열고 닫을 수 있지만 외부에서는 이 돌의 무게 때문에 문을 열기가 불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에필로그(epilogue),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동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데린쿠유처럼 평지에서 아래로 파내려간 지하도시, 바위산을 옆에서 뚫어 만든 괴레메 동굴주거지,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지은 동굴교회 등이다. 이러한 동굴들은 상당 부분 침략과 도피의 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인간이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수렵 채취기인 4000년 이전으로 보인다. 이곳 지형이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석기나 뼈조각 등 단순한 도구로도 쉽게 파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추위와 맹수를 피하기 위한 동굴을 이곳에다 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처음에는 지평면 근처에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겠지만 이후 광야로 쫒겨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 완성된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연결통로를 확장하여 주변에 있는 지하도시와 소통하기도 했단다. 물론 이들이 수백 년간 계속 땅속에서만 산 것은 아니다.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려면 지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동굴 안에 웬만한 주거기능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적의 위협이 없는 평시에는 지상으로 나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면서 지하도시에 식량을 공급한 것이다. 저장 공간에서 발견된 밀이나 포도주 그리고 교역을 통해 얻은 직물 그릇 제의도구는 지상과 지하생활을 병행하던 이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도 그렇지 그 긴 세월을 지하에서 버텨냈는지는 의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