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수) - 24(일)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 9.21(목)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 9.22(금)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 9.23(토)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셋째 날 : 델리(Delhi)의 꾸뜹 미나르 유적군(Qutb Minar and its Monuments)
특징 : ① 델리(Delhi ) : 야무나 강의 평원에 발달한 델리는 인도의 수도(首都)이자 인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예로부터 인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온 이곳은 펀자브 지방과 갠지스강 유역 교통의 중심지로 수많은 왕조가 이곳에서 흥망을 거듭했다. 외부에서 온 침략자가 풍요로운 힌두스탄 평원으로의 진출을 위해 발판으로 삼았던 곳이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영국이 ‘인도지배’의 본거지로 삼았던 땅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립을 쟁취한 곳도 여기였다. 영국 지배에 대항해 대반란을 일으킨 애국자들과 조국의 무력해방을 목표로 한 ‘찬드라보스(Subhas Chandra Bose)‘의 국민군(자유 인도군)이 격렬한 투쟁 끝에 쟁취한 미래를 꿈꾸는 도시이다. 델리는 크게 무굴제국 시기에 형성된 구시가 ‘올드 델리(Old Delhi)’와 1911년 영국령 신도시 지구로 건설된 ‘뉴델리(New Delhi)’로 나뉜다. 이중 ‘올드 델리’는 역사 속에서 일곱 번이나 새로이 건설됐는데, 지금의 올드델리는 건축광이기도 했던 무굴황제 샤자한(Shah Jahan)의 창조적인 욕망에 의해 생긴 7번째 성벽도시로 유명하다. 때문에 이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꾸뜹미나르 유적군’과 ‘후마윤 무덤(Humayun's Tomb)’, ‘붉은 성(Redfort)’ 등 볼거리가 많다. 반면에 빈부의 차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물질문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전통적인 '인도 혼' 이 들쑤셔져 있는 모습도 거침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따라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색채와 내음, 그리고 웅성거림을 전신으로 느껴보며 시간의 공존을 음미해보는 것도 델리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② 꾸뜹 미나르 유적군(Qutb Minar and its Monuments) : ‘꾸뜹 미나르(Qutb Minar)’는 꾸뜹(Qutb)과 미나르(Minar)가 합쳐진 단어로, 술탄(sultan)이였던 꾸뜹은 ‘꾸뜹 웃딘 에이백(Qutab uddin aibak : 1150~1210)’을 말하고, 미나르는 첨탑(尖塔)을 뜻하는 미나렛의 인도식 표현이다. 그러므로 꾸뜹 미나르는 꾸툽이 세운 첨탑이라는 뜻이다. 뉴델리에서 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교외의 넓은 평야에 우뚝 솟아있는데, 현재까지 델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유적군이자 델리 최고의 볼거리로 꼽힌다. 꾸뜹미나르 유적군은 노예왕조의 술탄이었던 꾸뜹 웃딘 에이백(Qutab-ud-din Aibak)이 힌두교도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승전을 기념하며 세웠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힌두교와 자인교 사원을 파괴한 뒤 세운 이슬람 사원과 첨탑 등이 남아 있다. 여러 명의 왕이 100여 년에 걸쳐 건설하는 동안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부속 시설이 하나씩 늘어났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델리로 이동 중에 경쾌한 리듬의 음악소리가 들리기에 내다봤더니 요란하게 치장을 한 트럭의 뒤를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서 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인도의 전통 축제인 ‘디왈리(Diwali)’에 맞춰 순례(巡禮)를 드리러 가는 길이란다. 인근에 있는 사원으로 가는데 보통 4~5Km쯤 되지만, 어떤 때는 10Km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걷기만 해도 힘들 일을 춤까지 추어가면서 간다는 것은 그 자체를 즐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도인들의 극진한 믿음을 느껴볼 수 있는 행렬이었다.
▼ 델리에서의 첫 여정은 인도 최대의 탑이라는 ‘꾸뜹 미나르 유적군(Qutb Minar and its Monuments)’에서 시작된다. 12세기 델리의 마지막 힌두왕국을 무너뜨린 정복자 ‘꾸뜹 웃딘 에이백(Qutab uddin aibak)’이 세운 73미터 높이의 승전탑 '꾸뜹 미나르(Qutab Minar)'가 있는 뉴델리 최고의 관광지다. 유적군은 시내에서 좀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지하철(옐로우 라인)을 이용할 수가 있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 팀은 전용버스를 이용해 유적지의 코앞까지 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개방시간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다소 헷갈릴 수도 있겠으나 인도의 여행지들은 대부분 이렇게 구체적인 시간을 정해놓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로 만든 작은 건물들 몇 동(棟)이 보인다. 무덤 또는 작은 사원(寺院)들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꾸뜹 미나르 유적군’에 포함된 유적(遺跡)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유적군(遺跡群)에는 저런 유물들로 가득 차 있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꾸뜹 미나르(Qutab Minar)’ 외에도 볼만한 유적들이 여럿 있다. 약 27m 높이의 미완성 탑인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이라는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ul-Islam Mosque)', ‘쿠와트울 이슬람 사원’에서 봉사했던 성자를 추모하며 1537년 지어진 ‘이만 자민의 무덤(Tomb of Iman Zamin)’, 꾸뜹미나르의 아치형 정문에 해당하는 ‘알라이 다르와자(Alai Darwaza)’, ‘알라 웃딘의 학교(Ala-ud-din’s Madrasa)‘, 꾸뜹미나르의 2층과 3층을 건설한 왕인 ’일투미시의 무덤(Tomb of Illtutmish)‘ 등이 자리한다.
▼ 조금 더 들어가자 원형의 단(壇)이 하나 나타난다. 젊은이들 몇이 위에 올라가 있기에 나도 따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풍광이 바닥에서 바라볼 때 보다는 훨씬 더 또렷하게 나타난다.
▼ 건너편에 짓다가 만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가 보인다. 이것 역시 승전탑(勝戰塔)의 하나이자 모스크의 첨탑이란다. ‘알라이 미나르’는 ‘알라우딘 킬지(Alauddin Khilji)’가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를 두 배로 확장시킨 후, 그에 걸맞는 미나르를 세우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꾸뜹 미나르’보다 두 배가 높은 첨탑(尖塔, Minar)을 세우려는 의도로 1층 24.5m를 완성했다. 그러나 1316년 알라우딘이 죽으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 후 누구에 의해서도 더 이상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완(未完)의 거탑(巨塔)인 셈이다.
▼ 반대편에는 ‘꾸뜹 미나르(Qutab Minar)’가 보인다. 유적 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로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 1206~1290년)’ 때 세워진 거대한 첨탑(尖塔)이다. ‘꾸뜹 미나르’는 터키계 이슬람교도 꾸뜹 웃딘 에이백(Qutb-ud-din Aibak, 1206~1210년)이 1193년 인도 북부를 점령한 뒤, 이슬람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건립했다. 궁정 노예 출신이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아프가니스탄 고르 왕조의 술탄 무하마드(Muhammad)의 무장이 된 그는 주군의 암살 소식을 듣자, 스스로를 술탄으로 선언하고 독립왕조를 세웠다. 참고로 ‘맘루크 왕조’는 보통 ‘노예 왕조’라 부르며 ‘Slave Dynasty’라고도 쓴다. 맘루크(Mamluk)는 아랍어로 ‘백인 노예’라는 뜻으로, 아이바크와 후계자 대부분이 투르크족 노예출신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250~1517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던 맘루크 왕조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의 왕조는 ‘카이로의 맘루크 왕조’라 칭하기도 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쟁포로로 끌려 온 노예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통해 정예부대로 육성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 ‘꾸뜹 미나르(Qutab Minar)’로 가는 길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이라는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ul-Islam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사원이 있던 자리에는 27개의 힌두사원이 있었는데 ‘꾸뜹 웃딘 에어백(Qutab uddin aibak)‘이 27개의 힌두사원을 모두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이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 간의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모스크는 현재 정면에 세웠던 석조 아치 벽과 안뜰의 회랑 등 일부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 1192년에 세워진 인도 최초의 모스크인 ‘꾸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는 유적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가로 43m에 세로가 32.4m인 회랑(回廊)형의 사각형 건축으로, 가운데에 중정 형식의 안뜰이 있고, 사각형 회랑에 기도실이 만들어져 있다. 회랑은 바깥으로 벽이 있고, 그 안쪽으로 세 줄의 석주(石柱)가 이어져 있다. 회랑에 세워진 석주들은 파괴된 27개 힌두교 사원의 것을 재활용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슬람 문양과 힌두의 전통문양이 석여있는 게 가끔 눈에 띈다.
▼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의 안은 널따란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광장은 멋진 기둥들이 둘러싸고 있다. 모스크의 기둥, 천장. 하나하나 조각과 장식이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돌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 사원의 중정에 서면 ‘꾸뜹 미나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너무 커서 사진 찍기조차 힘들다. 바닥에 눕다시피 해야만 탑 전체를 한꺼번에 카메라에 잡을 수 있다. 하긴 꼭대기 까지 올려다보려면 목이 아플 지경인데 오죽하겠는가.
▼ 유적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유적군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누가 뭐래도 ‘꾸뜹 미나르’이다. 그래서 전체를 아우르는 ‘쿠뜹 미나르 유적군 (Qutb Minar and its Monuments)’의 맨 앞에다 ‘꾸뜹 미나르’를 놓아두었을 것이다. 아무튼 74.5m의 높고 좁은 탑 안에, 그것도 약 800년 전에, 심지어 사람의 힘만으로 쌓아올리고 그 안에 계단 통로까지 만들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술력인가
▼ 모스크의 뜰에는 높이 7.2m에 무게가 10톤인 쇠기둥(鐵柱)이 하나 서 있다. 무게가 6.5t 정도 나가는 이 기둥은 굽타 왕조의 ‘찬드라 굽타 2세(Candra Gupta II, 375~413년)’에 의해 402년경 만들어졌다. 원래는 ‘비슈누 사원’ 안에 세워져있었으나 10세기경 사원을 신축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아무튼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은 유적이라면서 이 쇠기둥을 오파츠(OOPATTS : Out of Place Artifacts,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 설명이 불가능한, 그 시대에 존재할 수 없던, 존재해선 안 되는. 불가사의한 유물을 지칭하는 말이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들어진지 1500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녹슬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철의 순도(純度)가 무려 99.9%에 달하는데, 그 당시 과학기술은 물론, 현대의 첨단 기술로도 주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어떤 학자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아직까지 미제(未濟)로 남아있단다.
▼ 그런 불가사의가 속설(俗說) 하나를 만들어 냈다. 기둥에 깍지를 끼우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앞에 서있는 쇠기둥은 지금 울타리로 막혀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려는데 누군가가 넌지시 귀띔을 해준다. 10달러만 내면 울타리를 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전해 보지는 못했다. 경찰관이 눈을 감아준다고 했지만 자칫 나라 망신을 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 쇠기둥의 아랫부분에는 산스크리트어(梵語)로 새겨진 6행의 명문(銘文)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위대한 왕 찬드라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비쉬누신의 고귀한 철주를 비쉬누파다 언덕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인도의 사방에 있는 적을 물리치는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방갈(Bangal)국과의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으며, 신두강(River Sindhu) 하구에서 발리카스(Vahlikas)를 정벌했다. 또한 용맹함을 떨쳐 남쪽 대양을 평정했다. 그는 대단한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숲을 불태우듯이 적들을 완전하게 섬멸했다고 한다. 찬드라는 그가 이룬 행동, 그의 명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이 세상 최고의 통수권자로 남을 것이라고도 했다. 찬드라라는 그의 이름은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그의 용모 때문에 붙여졌다. 그리고 비쉬누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신앙처럼 확고하다. 그래서 비쉬누 신전을 세우고 그 안에 이 쇠기둥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 일투트미쉬(Shams-ud-din Iltutmish, 1210~1236년) 왕의 무덤이 있는 쪽으로 향한다. 널따란 터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많은 건물들이 널려있다. ‘꾸툽딘 아이박(Qutbuddin Aibak: 1150~1210)’이 ‘꾸뜹 미나르’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대 통치자들이 추가시킨 유적들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 이젠 유적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꾸뜹 미나르(Qutab Minar)’를 살펴볼 차례이다. 인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꾸뜹 미나르’는 웅장하고도 독특한 건축 양식이 압권이다. 높이 72.5m, 지름 15m의 원통형 탑은 1층부터 3층까지 사암, 4층과 5층은 대리석과 사암으로 지어졌다. 둥근 탑의 아래 지름은 14.32m로 넓은 편이나, 윗지름은 2.75m로 많이 좁아진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이 탑은 1층은 힌두 양식, 2층과 3층은 이슬람 양식으로 설계됐다. 힌두와 이슬람 양식의 융합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 ‘꾸뜹 미나르(Qutb Minar)’는 ‘꾸뜹 웃딘 에어백(Qutbuddin Aibak: 1150~1210)’이 세운 첨탑이란 뜻이다. 꾸뜹 웃딘은 1192년 구리드(Ghuurid) 왕조(879~1215)의 원정대장으로 북인도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 세력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꾸와트 울 이슬람(Quwwat-ul Islam: 이슬람의 힘) 모스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93년 꾸뜹 미나르가 만들어졌다. 꾸와트 울 이슬람 모스크와 꾸뜹 미나르는 그곳에 있던 27개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모스크와 미나르는 지금까지 인도에 남아있는 최초의 이슬람 문화유산이다. 꾸뜹 웃딘 에어백은 1199년 델리지역의 왕(Sultan)이 되었고, 1206년 맘룩(Mamluk) 왕조(1206~1290)를 열어 그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박의 사위인 일투트미쉬(Iltutmish)가 1210년부터 1236년까지 통치하면서 2층짜리 꾸뜹 미나르 탑에 3층을 더해 5층짜리 탑으로 완성했다.
▼ ‘꾸뜹 미나르’는 3층까지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고, 4층과 5층은 절반 정도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 중간의 외벽(外壁)에는 코란의 구절들이 적혀 있다. 아라베스크 문양과 코란의 서체가 무척 정교하다. 이 문자들을 통해 이 탑이 14/15세기에 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미나르(Minar)’의 하단에 문(門)이 하나 보인다. 내부에 만들어져 있는 통로로 들어가는 문이다. 내부에는 층마다 델리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발코니가 있고, 나선형 계단 379개가 정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막혀있다. 1982년까지만 해도 내부의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나 낙사와 압사 등 인명 사고가 빈발하여 지금은 입장을 금지하고 있단다.
▼ 어쩌다보니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ul-Islam Mosque)'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꾸뜹 미나르’ 유적군이 생각보다 작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사원의 내부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기하학적이고 다채로운 문양과 패턴이다. 하나하나 손으로 조각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 앞서가던 가이드가 멈춰서더니 열강(熱講)을 시작한다. 기둥의 위, 천정과 닿는 곳을 눈여겨보라는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니 이슬람 사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에로틱(erotic) 상(像)들이 새겨져 있다. 사원을 지으면서 힌두교와 자이교 사원에서 약탈한 자재들을 사용한 흔적이란다.
▼ 아치형으로 생긴 돌문을 통해 ‘꾸뜹 미나르’를 내다봤다. ‘빛나는 탑’이라는 뜻의 ‘꾸뜹 미나르’는 73m 높이에 5층 구조로 유적지 내 모스크의 미너렛(Minaret. 아잔(예배시간 공지)에 사용된 탑) 역할을 했다. 건립은 ‘꾸뜹 웃딘 에어백(Qutbuddin Aibak: 1150~1210)’이 왕조를 세우기 전인 1199년에 시작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1층에서 중단됐다가,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일투트미쉬(Shams-ud-din Iltutmish, 1210~1236년)가 3개 층을 더해 완성시켰다. 그러나 맨 위층이 후일 벼락으로 부서지고 이를 투갈라크 왕조(Tughlaq Dynasty, 1320~1413년)의 술탄 피루즈 샤 투글루크(Firuz Shah Tughluq, 1351~1388년)가 다시 두 개 층으로 분리 개조 후 대리석으로 장식해 복원시킴으로써 지금의 5층 구조를 갖추게 됐다.
▼ 모스크의 정문인 ‘알라이 다르와자 문(Alai-Darwaza Gate)’은 ‘꾸뜹 미나르’의 뒤편, 그러니까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의 남쪽에 위치한다.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 중의 하나로 알려지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1311년 킬지(Khilji)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알라우딘 킬지(Alauddin Khilji)’에 의해 세워졌다. 이 건물은 터키의 장인들을 초빙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돔과 아치의 형태, 조각 등이 이슬람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 ‘알라이 다르와자 문(Alai-Darwaza Gate)’ 옆에는 이슬람교의 성자(聖者) ‘이맘 자민(Imam Zamin)‘의 영묘(靈廟)가 있다. 투르키스탄(Turkistan) 출신의 성자였는데 1539년에 임종을 맞아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 외에도 유적군에는 꾸뜹의 사위인 일투투미쉬(Iltutumish)의 무덤, 알라 우드 딘의 무덤 등이 있다.
▼ ‘꾸뜹 미나르’ 주변은 ‘꾸뜹 단지(Qutb Complex)’로 불린다. 그리고 마을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지역이 될 때에는 ‘메라울리(Mehrauli) 고고학 공원’이 된다. 메라울리는 1193년 꾸뜹 웃딘 에어백에 의해 델리 왕궁으로 만들어졌고, 13세기에는 작은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메라울리는 모스크와 궁전, 왕과 성인의 무덤 등이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도시의 중심이 올드 델리로 옮겨간 무굴제국 시대에는 왕족의 사냥터와 휴식공원으로 이용되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19세기에는 영국의 관리와 장교 등 상류층 사람들이 주말별장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 과수원과 연못, 수렵장 등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 ‘꾸뜹 미나르’에서 빠져나오는 길, 왼편에 작은 피라미드가 보인다. 자연석으로 보이는 돌들을 각이 지게 쌓아올린 형상인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생김새는 고구려의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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