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산(謙菴山, 865m)
산행코스 : 구인사주차장→구인사→구봉팔문전망대→보발재→봉수대터→겸암산→온달산성→온달관광지(산행시간 : 4시간10분)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가곡면의 경계
산행일 : ‘14. 1. 19(일)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오늘 찾은 겸암산은 산세(山勢)는 크게 볼만한 것이 없다. 산이 높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으니 특별한 볼거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 이곳에는 온달산성이 있다. 온달산성은 우리가 깊이 배워야할 많은 것들을 알려주는 역사(歷史)의 현장이다. 먼저 온달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충(忠)이 그 첫째이며 온달이 그의 어머니에게 행한 효(孝)가 그 둘째, 그리고 바보 온달의 성공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바친 평강공주가 내조(內助)가 그 셋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온달이 명장으로 변하기 위한 자기혁신(自己革新) 등 어찌 그 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겠는가. 그보다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가 이곳 전투에서 패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승리(勝利)했고 그 승리가 계속되었더라면, 어쩌면 우리의 영토(領土)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최소한 요동반도까지는 미치고 있지 않을까? 자라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한번쯤은 들러 뭔가 하나쯤은 배워갔으면 좋겠다.
▼ 산행들머리는 구인사(救仁寺)주차장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 단양·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단양삼거리(단양읍 상진리)에서 우회전하여 59번 국도 영월방면으로 바꿔 달리면 향산삼거리(가곡면 향산리)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 ‘향산쉼터’ 휴게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향산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95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발고개에 올라서게 되고, 구렁이가 똬리를 틀듯이 구불대고 있는 고갯길을 내려가면 한국불교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 : 영춘면 백자리) 주차장이 나온다.
▼ 주차장에서 내려 **)구인사(救仁寺)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一柱門) 조금 못미처에 있는 공용터미널까지 셔틀버스가 다니지만 구인사 신도들만 무료탑승(無料搭乘)이 가능하단다. 버스기사에게 부탁을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용할 수야 있겠지만 그냥 절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본다. 일주문까지는 800m,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구인사(救仁寺)는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總本山)이다. 1945년 천태종의 중흥시조라는 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사찰이 자리 잡은 곳은 구봉팔문(九峰八門)의 연화지(蓮華地)로서 풍수설에서 말하는 이른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가히 하나의 종파가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뒤 천태종의 교세(敎勢)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구인사도 대가람(大伽藍)으로 발전하였다. 이 절에는 5층 높이에 900평 넓이의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 135평의 목조강당인 광명당(光明堂), 400평의 3층으로 된 총무원 건물과 30칸의 수도실인 판도암(辦道庵), 특별선원인 설선당(說禪堂) 등이 있으며, 불사(佛舍)와 침식용인 향적당(香寂堂) 등 편의시설까지 50여 채의 건물이 있다. 또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천태종단은 염불(念佛)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생활 속에 자비를 실현하는 생활·실천 불교를 지향하며, 주경야선(晝耕夜禪)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로 천태종(天台宗)은 594년 중국의 지자대사가 불교의 선(禪)과 교(敎)를 합하여 만든 종파로 지자대사가 머물던 천태산에서 이름을 따 천태종이라 부른다. 고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에 의해 우리나라의 천태종 역사가 시작되었다.
▼ 협곡(峽谷)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15분이면 일주문(一柱門)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건물이 천왕문(天王門)이다. 그런데 천왕상(天王像)은 보이지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청동 사천왕상’은 이층에다 안치해 놓은 모양이다. 확인해보는 것까지는 생략하고 곧장 발걸음을 옮긴다. 천왕문을 지나면 구인사의 안마당에 들어선 샘이 된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각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전각(殿閣)들이 하나 같이 고층(高層)들이다. 일반적으로 사찰(寺刹)들은 대부분 너른 터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구인사에는 평평한 곳이 없다. 절이 좁다란 협곡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을 위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육중한 5층 건물이 인광당이다. 승려와 신도 교육을 위한 시설이 모인 건물이다. 이어 종무소와 우체국 등이 자리한 장문당실을 지나면 5층 건물인 대법당에 이른다. 국내 최대 규모의 법당이란다. 대법당이 자리 잡은 곳은 상월원각 스님이 1946년 구봉팔문 연화지에 세운 삼간짜리 초암(草庵)이 있던 자리이다. 초가(草家)가 이런 대가람으로 변모했으니, 구인사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법당을 지나면 장독이 늘어선 관음전을 지나 향적당에 닿는다. 여러 좋은 향기가 모였다는 뜻의 향적당은 사찰의 부엌이다. 향적당부터 시작한 긴 계단길이 끝나는 지점에 6층 규모 광명전이 버티고 있다.
▼ 광명전 건물을 오른쪽으로 비켜 오르면 상월원각 스님을 모신 대조사전(大祖師殿)이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27m 높이에 3층 구조의 목조 건물인 대조사전은 구인사에서 가장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십이지신상이 늘어선 널따란 광장 앞에서면 누구나 한번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보통의 절집들은 가장 좋은 터에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앉히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구인사에는 가장 좋은 터에 대조사전을 앉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시 구인사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여간 구인사에는 대웅보전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 대조사전 오른쪽 솔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적멸궁(寂滅宮)으로 가는 길이다. 들머리에 있는 나무지팡이들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를 죽이지만 막상 들어서고 나면 그다지 힘이 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비록 시멘트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솔숲이 보내주는 상큼한 공기가 가슴속까지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탓에 힘들다는 생각이 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가끔은 호젓한 옛길까지 군데군데 끼어있어 걷는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지그재그로 된 계단을 20분쯤 오르면 적멸궁(寂滅宮)에 닿는다. 천태종 신자들의 주요한 참배 대상인 곳이다. 사찰에서 궁(宮)이란 보통 도량(道場)을 일컫는데, 구인사의 적멸궁에는 전각(殿閣)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묘(墓) 하나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창시자이자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1911∼1974)’의 묘란다. 삼척에서 태어난 그(속명 : 朴準東)는 중국과 서장(西藏)의 불교성지들을 순례한 뒤 귀국하여 1946년 정월에 소백산의 연화지(蓮華地)에 초암(草庵)을 짓고 정진하였다. 후에 그를 따르는 신도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자 회삼귀일(會三歸一), 원융삼제(圓融三諦)로써 국토통일의 이념을 삼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법화교지(法華敎旨)로써 생활불교의 지표로 삼아, 1967년 1월 24일에 천태종을 창종(創宗)하였다. 1974년 ‘죽고 사는 것이 본래 공적(空寂)’이라는 임종계(臨終偈)를 남기고 64세로 입적(入寂)하자 불교의 전통예식인 다비(茶毘)를 행하지 않고 구인사의 주봉인 이곳(수리봉)에 봉분을 만들어 안장한 것이다. 상월선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이 묘 자리를 잡아놓았다고 한다.
▼ 적멸궁 바로 뒤편에 전망대(展望臺) 하나가 있다. 바로 구봉팔문(九峰八門)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곳이다. 구봉팔문이란 봉우리 9개와 그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 8개를 법문에 비유해 부르는 이름이다. 소백산 국망봉이 북서쪽으로 뻗어내려 남한강을 만나기 직전, 봉우리 9개를 부챗살처럼 펼쳐놓는다. 신기한 것은 노적가리처럼 솟은 아홉 봉우리가 모두 비슷하게 생겼고, 특히 5봉인 덕평문봉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한자의 팔(八) 자 모형을 이룬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교에 입문한 한 불제자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쓴 곳이라 한다. 여기서 유래해 법월팔문(法月八門)으로도 부른다. 후세에 이 법문을 넘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 스님이라고 한다. 참고로 구인사는 4봉 뒤시랭이문봉과 5봉 덕평문봉 사이 연화지(蓮華地)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하게는 뒤시랭이문봉 앞의 영주봉(수리봉)이 두 팔 벌려 구인사가 선 협곡을 감싸 안은 형국이란다.
▼ 전망대에서 구봉팔문을 가슴에 품은 뒤에는 다시 적멸궁으로 돌아 나와야한다. 보발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적멸궁 입구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적멸궁에서의 하산은 다시 계단으로 시작된다. 다만 아까 올라올 때와 다른 점은 아까는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비해 이번에는 침목(枕木)계단으로 된 점이 다를 뿐이다. 계단은 이리저리 오고감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한꺼번에 고도를 낮출 수가 없음이 이유일 것이다.
▼ 적멸궁에서 4분쯤 내려오면 장의자까지 갖춘 안부 쉼터(이정표 :구인사/ 화장실; 적멸궁)에 이르게 된다.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 이곳은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보발재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임도(林道)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고, 능선을 따라 맞은편 산봉우리를 넘는 방법이 다른 하나이다. 아까 적멸궁으로 오를 때에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산길을 알려 주시던 곱상하게 생긴 보살님의 안내를 무시하고 능선으로 향한다. 명색이 주말마다 산을 찾을 정도로 산에 이골이 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정도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면 임도를 걷는 것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맞은편 산봉우리(655봉)에서는 시계(視界)가 시원스럽게 열린다. 구인사 뒤편의 구봉팔문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655봉에서의 하산길은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내리막길이 생각보다 가파르지만 안전시설이 전혀 없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면 모르겠지만 눈이라도 쌓여 있을 경우에는 아이젠(Eisen)이 꼭 필요한 구간이다. 655봉에서 15분 가까이 내려왔을까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이색적(異色的)인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네를 타고 있는 아낙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치마저고리의 격식을 갖춘 한복(韓服)을 있었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겠지만, 등산복을 입은 모습도 괜찮은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 오랜만에 보는 동양화(東洋畵)이기 때문일 것이다.
▼ 그네가 있는 곳에서 보발(寶發)고개는 2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능선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5분 이상 걸린다. 산길이 산비탈(斜面)을 따라 옆으로 길게 우회(迂廻)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발고개는 해발(海拔)이 540m, 비록 1천m 내외의 두문동재나 화방재 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해발이 꽤 높은 샘이다. 이곳이 강원도 같이 깊은 산골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말이다. 오늘 올라야할 겸암산의 높이는 865m, 300m남짓만 오르면 되니 오늘은 공짜산행을 하게 되는 샘이다. 보발재로 오르기 전에 꼭 들러야할 곳이 하나 있다. 구인사 방향에 있는 전망대(展望臺)이다. 이곳에 가면 전형적인 고갯길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이 한없이 구불대고 있는 고갯길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30분이 지났다.
▼ 보발재에서 산길은 ‘이정표(온달관광지 5.0Km) 뒤로 열린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낯선 빗돌(碑石)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보발재를 지나가는 도로 준공에 대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라고 한다. 당시 이 길은 3관구의 군인(軍人)들이 닦았던 모양이고, 그 책임자(사령관)가 김종구장군이었던 모양이다.
▼ 공덕비에서부터 급하기 시작된 가파른 오르막길은 200m쯤 후에 잠깐 완만(緩慢)해졌다가 다시 급경사(急傾斜)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봉수대(烽燧臺)터를 만나게 된다. 보발재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봉수대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후기(後記)가 아니라면 설마 이곳이 봉수대가 있었던 곳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 그저 자그만 돌들이 둥그렇게 놓여 있을 따름이다.
▼ 봉수대를 지나면서 길은 순해진다. 부드러운 흙길에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봉수대에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치고 오른 후부터는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잠시 웃자란 소나무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구간을 통과하고 나면 드디어 겸암산 정상이다. 널따란 분지도 그렇다고 뾰쪽한 봉우리도 아닌 겸암산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영춘 회전테마숲/ 회전 테마숲)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발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족하다.
▼ 소나무 숲이 참으로 울창하다. 자기가 소나무인 것을 잠시 잊은 양, 마치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처럼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위를 향해 쭉쭉 뻗어 오르고 있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짙은 ‘소나무향’, 갑자기 묵직하던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솔향속에 묻어오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일 것이다. 식물들이 병원균(病原菌)이나 해충(害蟲), 곰팡이 등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이 바로 피톤치드이다. 사람들이 피톤치드를 마실 경우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와 소나무 등 상록활엽수이다. 그런데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이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오늘 산행은 몸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산행이 된다. 요즘의 트렌드(trend)인 힐링(healing)산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 겸암산의 정상표지석은 의외로 말뚝모양으로 되어 있다. 직사각형 오석(烏石) 만들어진 충청북도 고유의 디자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道) 차원에서는 관리할 가치가 없는 산이란 말인가? 하긴 아름다운 산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의외로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시야(視野)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조망이 트이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어 하산을 서두른다. 이왕에 정상에 올랐으면 정상에 얽힌 옛이야기 한 토막 정도는 되새겨보고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 겸암산은 겸암(謙菴) 유운룡(楡雲龍)과 인연이 있는 산이다. 그의 묘(墓)가 있었던 이곳 정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운룡은 조선중기(1539~1601)의 문신(文臣)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때의 명신이었던 유성룡의 형으로 알려진 그는 요 아래 남천리의 대어구에서 산수(山水)를 즐기다가 임종(臨終)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장(移葬)해갈 때까지 그는 이곳 겸암산의 정상에 묻혀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이산의 이름이 겸암산(謙庵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암산의 다른 이름인 계명산(鷄鳴山)은 어떠한 연유로 얻게 된 이름일까? 어쩌면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는 구인사주변 산릉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막상 정상표지석에는 향로봉(香爐峰)이라 적혀있다. 연유를 알 수 있거나, 추정이라도 해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닌 생뚱맞은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다.
▼ 하산은 북동릉을 따라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20m쯤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돌탑을 지나고, 참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능선이 두 가닥으로 나뉜다.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는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영춘면과 가곡면의 경계를 이루는 왼편 능선을 따를 경우에는 ‘남한강소수력발전소’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급경사(急傾斜)를 이루는 북동릉을 타고 얼마쯤 내려왔을까 반듯한 무덤이 있는 곳에서 길이 헷갈린다. 능선은 왼편으로 향하고 있는데 철망(鐵網)이 능선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철망 건너편에서 먼저 간 등산객들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차피 철망의 끄트머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하니 그냥 통과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철망의 아래에 보이는 틈새를 통과하면 산길은 거의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은 순하기 이를 데가 없다. 산길의 주변이 온통 소나무나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로 꽉 차있어서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산길이 너무나 폭신폭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능선에는 유난히도 잘 가꾸어진 무덤들이 많다. 구인사 스님들의 무덤이라고 들었는데, 화장을 좋아하지 않는 구인사스님들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맨 마지막무덤인 ‘광산 김씨’무덤을 지나면 그 아래에 능선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보인다. 정상에서 45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성재라 불리는 이도로는 1973년 보발재가 새로 나기 이전에 군간나루에서 구인사방면 최가동으로 주민들이 넘나들었던 고갯마루이다. 성재는 어디로갈까로 등산객들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절개지(切開地)를 기어오른 후에 능선을 따라 걸을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능선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걸어도 잠시 후에는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굳이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 능선을 따라 5분쯤 걸으면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갈림길에 이르면 거창한 이정표(온달산성 1.0Km/ 정자 60m/ 방터 900m)와 마주치게 된다. 나무기둥 네 개를 4각(四角)으로 세워놓고, 상부의 기둥 사이에다 가로로 나무막대기(木棒)을 끼워 넣은 다음 목봉에다 나무판자(木板) 이정표를 매달아 놓았다. 보기만 해도 꽤나 돈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다. 그러나 아까 지나온 겸암산 정상에서 보았듯이 충청도에서 제켜놓은 산치고는 너무 고급스런 이정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50m 정도만 더 걸으면 전망대를 겸한 정자(亭子)가 나타난다. 그러나 조망(眺望)은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남한강 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 전망대에서 조금만 더 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온달산성900m/ 온달성 800m/ 최가동 2km/ 팔각정자 200m)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직전하면 온달성(이정표 : 800m), 그리고 다른 온달산성(이정표 : 900m)은 왼편으로 가도록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산에는 온달성(城)과 온달산성(山城)이라는 두 개의 성(城)이 있단 말인가? 처음 본 사람들은 헷갈리겠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온달성까지의 거리가 긴 것은 우회로(迂廻路)이고 가까운 것은 능선길이기 때문이다. 두 길은 얼마 안 있어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단양군청에게 바라고 싶은 것 하나, 이정표에다 괄호를 하고 그 안에다 능선길과, 우회로를 표기해 주면 어떨까 싶다. 이왕에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이정표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 두 번째 갈림길에서 13분, 그러니까 임도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드디어 **)온달산성이 나타난다. 온달산성의 성벽(城壁)을 보면, 우리가 늘 보아오던 여타 다른 산성들과 다른 점이 보인다. 대부분의 산성들은 커다란 직사각형의 돌들을 정형적으로 쌓아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곳 온달산성은 구들장 같이 납작한 돌들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그저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꼭 시골마을의 담벼락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온달산성(溫達山城 : 사적 제264호), 남한강변에 위치한 해발 427m의 성산에 축성(築城)된 길이 97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들을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며, 동·남·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지고 있으며, 성내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土器)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로 온달산성이 소재한 이곳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땅이 비옥(肥沃)한 한강 유역을 누가 지배하느냐가 패권(覇權)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變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 온달산성이 처음으로 선을 뵈는 곳은 산성(山城)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때문에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왼편의 성벽(城壁) 아래로는 남한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줄기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소백산의 산릉(山稜)들이 하늘에 마루 금을 그리고, 국망봉에 내려온 산줄기는 부챗살을 펼치듯 구봉팔문(九峰八門)을 빚어놓고 있다. 네 번째 봉우리인 뒤시랭이문봉 아래에는 아까 다녀온 구인사가 숨어있을 것이다.
▼ 구문팔봉의 조망(眺望)을 즐기고 난 후에는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북문(?)을 지나자마자 또 다시 통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먼저 말굽형으로 축조된 산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는 남한강과 영춘면 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그리고 영월의 태화산은 강 너머에 우뚝하다. 옛날에 지휘대(指揮臺)가 있었다면 아마 이곳이었을 것이다. ‘올 테면 와봐라!’ 쩌렁쩌렁 울리는 온달 장군의 기개 넘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온달산성은 작기 때문에 조망을 즐기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구경은 금방 끝이 난다. 남문을 빠져나와 조금만 더 내려가면 산비탈에 걸터앉은 정자(亭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자에 올라서면 금방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정자가 자리 잡기에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남한강(南漢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수태극(水太極)을 그리며 휘돌아가는 자태(姿態)가 참 아름답다. 강 주변의 산들은 그 강물에 몸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있다.
▼ 산행날머리는 온달관광지주차장
정자에서의 하산길은 나무계단으로 이어진다. 오늘 산행은 계단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끝없이 계단을 오르게 만들더니, 마치 산행을 마치는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이 또 다시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중간에 온달관광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조망대를 지나면 성황당(城隍堂)에 닿는다. 성황당 바로 아래가 **)온달관광지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연개소문 촬영세트장’이다. 그러나 관광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入場料 : 5천원)를 내야만 한다. 입장료를 내면 촬영세트장과 온달동굴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산행마감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관람을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보이는 촬영세트장의 규모(規模)는 예상외로 크다. 하긴 그동안 이곳에서 SBS드라마 <연개소문>과 MBC드라마 <태왕사신기>, 최근 KBS의<바람의 나라>와 <천추태후>까지 드라마 대작들이 연이어 촬영(撮影)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당시의 고구려가 과연 저만한 위용(威容)의 건축물들을 축조(築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의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人口數)는 약 800만호(戶 : 고구려인 약 100~135만 + 말갈인 600~700만)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나라였고, 국력(國力)은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 비견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세트장은 한때 일본인 아낙내들이 진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태왕사신기>에 출연하고 있는 배용준을 구경하기 위한 행렬이었다. 당시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던 ‘욘사마’의 위력을 감안해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온달관광지를 왼편에 끼고 돌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관광지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성곽을 둘러본 시간까지 합해도 30분뿐이 채 안 걸렸다.
(**)온달관광지는 고구려의 명장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한 온달전시관을 비롯해 온달산성, 온달동굴, 그리고 드라마세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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