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등산(人登山, 666.5m)-두알봉(445.5m)
산행일 : ‘13. 12. 29(일)
소재지 : 충북 충주시 동량면과 산척면의 경계
산행코스 : 탑평교→삼각점봉(271.4)→두알봉(445.5)→임도로 7부 능선까지 이동→인등산→임도 복귀→음양지마을(산행시간 : 4시간1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인등산은 부근의 천등산(天登山), 지등산(地登山)과 함께 삼등산으로 산꾼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밋밋한 흙산으로 이루어진 탓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거기다가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월악산 등 유명한 산들이 유난히도 많은 충주시에 위치한 탓이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는 산이다. 특히 두알봉은 도시락을 싸들고라도 오르는 것을 말리고 싶을 정도이다. 가시넝쿨과 잡목(雜木)에 찔리고, 긁히며 거기다가 싸대기까지 맞아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볼거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산행들머리는 탑평교 근처의 ‘남한강 횟집’(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64-12)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 태백방면으로 달리다가 산척사거리(산척면 송강리)에서 우회전하여 531번 지방도를 타고 충주호 방면으로 달리면 동량면소재지인 조동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조동리에 있는 탑평삼거리에서 532번 지방도로 우회전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게 탑평교(橋)이다.
▼ 탑평교를 건너면 왼편에 ‘남한강 횟집’이 보인다. 30년 동안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는 음식점으로 ‘보양어죽’과 ‘도리뱅뱅이’가 이집의 주요메뉴라고 한다. 횟집의 주차장에서 다시 탑평교 방향으로 되돌아 나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탑평교 바로 앞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뚝방길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다가 민가(民家)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 밭둑으로 들어서면 금방 산자락 아래에 이르게 된다.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 산자락에 들어서던 선두그룹이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들머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후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나뉘더니 따로따로 산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밭두렁과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의 오른편에서 들머리를 찾아보는 게 맞다. 오른편은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왼편은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접어 든 나는 손수 길을 만들어가면서 능선을 향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생을 사서한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5분 정도만 고생하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 능선으로 일단 올라서면 길의 흔적은 또렷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잡목(雜木)들이 온통 산길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길을 만들어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다. 원래의 등산로를 따라 가다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우회(迂廻)를 해야만 진행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만드는 길도 사납기는 매한가지이다. 능선은 한마디로 매력(魅力)이 없다. 바위 하나 없는 흙산이라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주변 상황들은 아예 걷는 것까지도 방해를 하고 있다. 위에는 가시나무가 심심찮게 섞여있는 잡목(雜木)들이 가로막고, 아래도 온통 가시넝쿨 천지다. 가시나무에 찔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다보면, 이번에는 잡목들의 공략이다. 사정없이 싸대기를 때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찔리고, 할퀴고, 얻어맞는 산행이 계속된다. 왜 이런 산을 찾았을까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어버린 걸 어떻게 하랴
▼ 이런 악조건인데도 능선에는 꽤나 많은 무덤들이 보인다. 여기 까지 올라왔을 후손들은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혹시 이런 곳에다 선산(先山)을 만든 조상들을 원망하지나 않았을까? 선입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라비틀어진 잡초(雜草)들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덤(墓)들은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이렇게 무덤이 많은 이유는 인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인등산에는 조선시대에 살았다는 황규라는 지관(地官)에 얽힌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가 꿈속에서 신선(神仙)과 만나 알게 된 명당(明堂)의 위치를 지도에 그려 놓았으나 세상에 알리기도 전에 죽어버린 탓에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그려 놓았다는 명당자리는 인등산에 있다는 용비등천혈(龍飛登天穴), 그리고 천등산 밑의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과 지등산 밑의 옥녀직금혈(玉女織錦穴)이다. 그 덕분에 난리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여기 인등산 자락에다 위태한 명줄을 의지했다고 한다.
▼ 작은 봉우리를 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면서 진행하다보면 제법 높다란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봉우리 위로 오르니 박건석선생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전국의 오지(奧地)산에 다니다보면 봉우리 이름 아래에 ‘서래야 박건석’이라고 쓰여 있는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를 자주 볼 수 있다. 바로 그 장본인인데, 오늘 산행은 그와 함께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두알봉 정상에 표시지를 부착하려고 오셨다고 한다. 70을 훌쩍 넘긴 고령(高齡)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산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선생의 열정(熱情)이 부럽다. 아니 그분의 열정을 나도 닮고 싶다. 이곳이 두알봉이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삼각점’은 보이지만 두알봉 같지는 않단다. 선두가 두알봉에 표시를 해놓고 가기로 했는데 아무런 표시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조금 후에 다시 만났을 때는 삼각점봉의 높이(271m)까지 일러주시며 두알봉이 아니었다고 알려주신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이 조금 못되었다.
▼ 삼각점봉에서 가파르게 잠깐 내려서면 과수원(果樹園)이 나온다. 산등성이에 들어앉은 과수원치고는 엄청나게 넓다. 나무들은 잘해봐야 심은 지 2~3년이나 되었을 듯, 상품용 수확으로는 아직 때가 이른 모양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말라비틀어져가는 사과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과수원을 지나는 길에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오른편에 덩치 큰 산들이 늘어서 있다. 아마 계명산과 지등산일 것이다.
▼ 과수원을 지나면 또 다시 능선으로 들어붙어야 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온통 가시덩굴로 뒤덮여있어 한걸음 옮기기조차 어려울 정도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투박한 바지를 입고 왔다는 점이다. 혹시 새 옷이라도 입고 왔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싶다. 보푸라기가 인 옷들은 졸지에 헌옷으로 변해버릴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신안군 자은면에 있는 두봉산에 올랐다가 이런 가시넝쿨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난 입고 갔던 바지를 얼마 입어보지도 못하고 버리고 말았다.
▼ 과수원을 지나서도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여럿 만들어 낸다. 그리고 봉우리에 올라설 때마다 ‘혹시 두알봉이 아닐까’라는 기대가 뒤따른다.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진행방향에 이보다 조금 더 높은 봉우리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렇게 실망을 계속하다보면 왼편이 날카로운 벼랑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맞은편 봉우리 위에 앞서가던 일행 몇 명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드디어 두알봉에 이른 것이다.
▼ 두알봉에는 조금 전에 나를 앞질렀던 박건석선생이 준비해온 정상표시지를 매달고 있다. 그 아래에 또 다른 정상표시지가 매달려 있고, 다른 나뭇가지에도 이곳이 두알봉임을 알리는 리본들이 여럿 보인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만일 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곳이 두알봉 정상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만큼 두알봉 정상은 이곳이 정상이라고 느낄만한 특징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 그리고 삼각점봉에서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 두알봉에서 인등산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자칫 구를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오늘 같이 눈이 쌓여있는 날에는 더욱 안전에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10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다시 5분 남짓 걸으면 임도(林道)가 나온다. 어쩌면 요 아래 대모천마을(동량면 조동리)에서 시작되어 인등산의 7부 능선을 거쳐 장재로 연결되는 임도일 것이다.
▼ 첫 번째 임도에서 다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두 번째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 인등산이다. 응당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야할 텐데도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는 임도를 따르라 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 관할관청(管轄官廳)인 동량면사무소에서 매달아놓은 ‘등산로 안내리본’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20분 정도를 의미 없이 더 걸어야만 했고, 거기다가 등산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해프닝도 겪어야만 했다. 등산객들은 대부분 올라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일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정상으로 올라갔던 코스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임도를 따라 7부 능선까지 오르는 데는 25분 정도가 걸린다.
▼ 7부 능선쯤에 있는 고갯마루에 이르면 왼편 산자락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리본 하나가 보인다. 동량면사무소에서 붙여 놓은 ‘등산로 안내 리본’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서 가시넝쿨들과 싸우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선두그룹이 내려오고 있다. 임도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인등산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다. 길을 잘못 들었었음을 알게 된 우리 일행들 모두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길이라도 좋았더라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았으련만 가시넝쿨로 포위된 능선은 한 발짝 옮기는 것도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등산로도 정비해 놓지 않은 채로 등산객들을 인도한 동량면사무소의 행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 가시넝쿨을 지나서도 산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희미한 산길의 흔적을 찾아 20분 정도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나고, 또 다시 5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인등산 정상이다.
▼ 헬기장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장재 1.8Km), 그리고 삼각점이 있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또 다른 정상표지판에는 ‘인재의 숲, 인등산’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 정상판의 상단에 ‘SK’의 로고(logo)가 또렷하다. 이 산이 SK의 개인소유라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인등산은 북쪽에 천등산(807m)이 있고 남쪽에 지등산(535m)이 있어 차례로 천(天)·지(地)·인(人)의 3재(三才)를 나타낸다. 세 산의 흐름이 태극무늬와 같다고 해서, 천지인사상에 입각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 세 산을 한데 묶어 삼등산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때부터 삼등산 아래에 피난하면 안전하다는 말이 돌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근에 정착마을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훌륭한 편이다. 북으로 마주보는 천등산이 제법 웅장하고, 천등산 오른쪽 뒤로는 구학산, 주론산이 보인다. 동으로는 충주호 건너편의 마미산과 면위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지등산 뒤로 충주 계명산이 멀리 월악산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 정상을 둘러보고 다시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로 되돌아 나온다. 올라가는 데는 25분 정도가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15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고갯마루에서는 장재, 그러니까 아까 올라왔던 방향과는 반대로 진행하면 된다. 임도를 따라 100m쯤 내려가다가 임도가 왼편으로 급하게 휘는 지점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날머리를 음양지마을로 정했기 때문이다.
▼ 능선으로 올라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바위봉우리이다. 산길은 바위봉우리를 넘어가도록 되어 있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봉우리가 높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는 바위마다 넘지를 않고 우회(迂廻)를 하도록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 바위봉을 지나면 산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이 밋밋하게 이어진다. 능선의 나무들은 대부분 참나무들, 가끔 노송(老松)군락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산길은 급경사(急傾斜)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 가끔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리막길이 길게 계속된다. 임도를 출발하고 30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개짓는 소리가 들린다. 나뭇잎 하나 없는 빈가지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아래가 내려다보이지만 민가(民家)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민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 삼등산이 난(亂)을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라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임도를 출발하고 40분 가까이 되면 임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산자락의 끝이 벼랑으로 되어있어서 내려갈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내려섰지만 벼랑이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되돌아 올라가기가 싫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끝내는 나뒹굴고야 말았다. 다행이 흙 벼랑이라서 다치지는 않았다. 잠시 쉬면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나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 산행날머리는 음양지마을의 충주호관광농원(동량면 손동리 551)
임도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내려오면 음양지마을이 나오고 곧이어 532번 지방도에 이르게 된다. 피곤했던 산행이 종료되는 것이다. 도로변에 ‘문순공 수암 권상하선생 묘(文純公 遂菴 權尙夏先生 墓)’라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는 보인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알려진 권상하(1641~1721)의 묘가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이이, 송시열의 기호학파를 계승한 그의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송시열과 그가 맹목적으로 숭배했던 명나라에 대한 사모(思慕) 때문이다. 그 증거는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에 가면 찾아볼 수 있다.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향(祭享)하는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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