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산(瑞雲山, 547.7m)

 

산행일 : ‘13. 6. 1(토)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과 금광면, 그리고 충북 진천군 백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룡사주차장→청룡사→은적암→서운산 정상→서봉→탕흉대→서운산성→좌성사→청룡사→바우덕이 사당→청룡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집사람과 둘이서

 

특징 : 바위가 거의 없고 비교적 부드러운 산세(山勢)에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산행 내내 이어진다. 거기다 높이까지도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족단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편이다. 고찰(古刹)인 청룡사와 석남사가 있어서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로 삼을 수 있고, 또한 남사당 거주지와 서운산성 등 역사적 흔적(痕迹)들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청룡사 주차장(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평택제천고속도로: 남안성 I.C에서 내려와 23번 지방도 천안 방향으로 달리면 미양농공단지와 가나안산업단지를 거쳐 상장교차로(交叉路 : 입장면 상장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34번 국도로 옮겨 약 6Km쯤 달리면 청룡저수지를 만나게 되는데, 만나는 지점에 있는 삼거리(현대 오일뱅크 앞)에서 좌회전하여 1Km남짓 들어가면 산행이 시작되는 청룡사 주차장이다. 주차장(2013년 6월부터 주차요금을 받은 다는 예고문이 붙어 있었다)을 빠져나와 청룡사 방향으로 향하면 금방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의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빗돌(碑石)이 하나 서있다. ‘청룡사사적비(靑龍寺事蹟碑 : 경기도유형문화재 124호)’라고 한다. 사적비란 본래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빗돌을 말한다. 이 빗돌은 청룡사의 중수(重修 : 1721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나옹이 절을 중창할 때의 일과, 그 뒤 조선 숙종 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을 중건(重建)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육안(肉眼)으로는 글자의 식별(識別)이 불가능했다. 이곳 삼거리에서 청룡사는 왼편으로 가야하고, 바우덕이 사당을 다녀오고 싶을 경우에는 오른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삼거리에서 청룡사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연결된다. 도로의 가에 ‘주차금지’라고 쓰인 안내판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사찰(寺刹)에 용무가 있어 찾아오는 차량들의 통행을 막지 말아달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도로의 한쪽 면은 이미 자동차들로 빽빽이 들어차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됐든 간에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심(人心)들을 보는 것 같아 입안이 씁쓸하다. 주차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200m 정도에 불과하다. 건강을 위해서 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 정도 거리를 걷지 않으려면 뭣 때문에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청룡사는 도로와 함께 흐르고 있는 계곡의 건너편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서운산의 산세(山勢)와 잘 어우러지는 청룡사(靑龍寺)는 고려 때 지어진 오래된 사찰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백 년은 족히 넘겼음직한 층층나무 한 그루가 절 앞에서 인왕상(仁王像)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사실 청룡사에는 절을 지킨다는 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없다. 절을 지킨다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청룡사에서는 천왕문이나 금강문 대신에 대웅전의 추녀 끝에 매달려 있다. 추녀 끝에다 금강역사상을 그려 넣은 것이다. 청룡사는 처음에는 대장암이라는 이름이었으나 나옹화상이 중창할 때, 상서로운 기운(瑞氣)의 구름(雲)을 타고 청룡이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는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고, 산의 이름 또한 서운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 청룡사(靑龍寺).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에 명본(明本)이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고 부르다가, 공민왕 13년인 1364년에 나옹이 크게 중창하고 이름을 청룡사로 개칭했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던 나옹이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배불뚝이 소나무와 허리를 뒤튼 소나무를 기둥으로 세운 대웅전이 보물 제824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밖에도 동종(銅鍾 : 보물 제11-4호)과 청룡사영산회괘불탱(靑龍寺靈山會掛佛幀 : 보물 제1257호), 청룡사감로탱(보물 제1302호), 청룡사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청룡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9호)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청룡사를 빠져나와 서운산으로 향한다. 절을 지나서도 길의 폭은 그다지 좁아지지 않는다. 비록 아스팔트포장에서 비포장(非鋪裝)으로 바뀌었지만 차량(車輛)이 통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이 길의 끄트머리에 은적암과 좌성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아무리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일지라도, 차량이 올라가지 못하는 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만큼 편함을 우선시하는 사회로 변한 것이다. 청룡사를 출발하고 한 5분쯤 걸었나 싶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좌성사로 가는 길이고, 은적암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들어서자마자 단풍나무 터널이 길손을 맞이한다. 청룡사에서 갈림길까지도 가로수는 단풍나무였다. 그러나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햇빛이 완벽하게 차단될 정도로 단풍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운산은 가을이 제격일 것 같네요.’ 집사람의 말에 문득 만산홍록(滿山紅綠)의 서운산을 그려본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만추(晩秋)의 서운산 자태는 한마디로 빼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가뿐만이 아니라 서운산 곳곳에는 그만큼 단풍나무가 많았다.

 

 

 

갈림길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공들여 쌓은 돌탑 몇 개가 있는 작은 쉼터(이정표 : 은적암 0.4Km, 정상 1.3Km/ 청룡사 1.4Km)에 이르게 된다. 돌탑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돌이 많은 계곡 옆으로 길이 나있는 탓인지 몰라도 크고 작은 돌탑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다. 돌탑은 원래 민초(民草)들의 삶이다. 민초의 소박한 소원들이 하나 둘 쌓여 돌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돌탑들에는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깃들어 있을까? 이곳에 조금 못 미쳐서부터 길가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왼편에는 산자락, 그리고 오른편에 농경지(農耕地)를 끼고 걸었지만, 이제부터 산속 오름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주위의 나무들도 어느 샌가 참나무들로 바뀌어 있다. 쉼터에서 은적암까지는 10분 정도면 이르게 된다. 널따란 도로를 따라 오르던 길이 언젠가부터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왼편의 도로 외에도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는 것이다.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오른편 능선길을 이용한다. 산을 오르내리는 묘미(妙味)는 뭐니 뭐니 해도 오솔길이 제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좌성사 갈림길을 출발한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숲이 훤히 트이면서 은적암(隱寂庵)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은적(隱寂)이라는 어감(語感)과는 달리 이 부근에서 가장 밝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숨을 고르는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창건(創建)된 지 벌써 600년이 훌쩍 지나버린 은적암은 그 오랜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작고, 초라하다. 절 앞에 세워진 안내판이 아니라면 민가(民家)의 여염집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3칸(間)짜리 법당(法堂)은 요사(寮舍)를 겸하고 있는 모양이고, 산신각(山神閣)으로 보이는 작은 전각(殿閣) 한 채가 전부이다. 물론 단청(丹靑)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암자에는 소문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선수(仙水)라고 불리는 유명한 약수(藥水)이다. 안내판에 이성계도 물맛을 보고 감탄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물맛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물맛은 청량하면서도 달았다.

 

 

 

 

 

 

은적암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정상 900m/ 정상 930m/ 청룡사 1.8Km)로 나뉜다, 그러나 어디로 갈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정상에 올라가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은 욕심에 정상까지의 거리가 조금 더 먼 오른쪽 길을 택한다. 은적암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서운산의 특징인 ‘가족끼리 오르기에 좋은 산’의 이미지가 퇴색해질 정도는 아니다. 그저 걷는 속도를 조금만 늦춘다면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은적암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치고오르면 아까 은적암에서 헤어졌던 산길이 다시 합쳐지는 사거리(이정표 : 정상 0.6Km/ 좌성사 1.2Km/ 청룡사 1.8Km/ 은적암 0.4Km)에 이르게 된다. 사거리에서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적당하게 섞여있는 능선을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탕흉대 갈림길(이정표 : 정상 0.3Km/ 탕흉대 1.4Km. 은적암 0.6Km)’이고, 이어서 왼편에 정자(亭子)하나가 보인다. 조망(眺望)이 트이는 곳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올라가봐야 할 일이다. 정자에 올라서면 발아래 안성들판이 펼쳐진다. 그리고 안성들녘 뒤로는 칠장산 등 금북정맥이 야트막하면서도 기운차게 흐르고 있다.

 

 

 

 

 

 

 

 

정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헬기장에서 또 다시 조망(眺望)이 트인다. 안성들녘 대신에 이번에는 청룡호가 발아래에 깔려있고, 호수 뒤로는 난다 긴다 하는 중부 내륙의 명산(名山)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푸른 용(龍)이 승천했다는 영험(靈驗)한 호수로 알려진 청룡호가 작게 느껴지는 것이 의외이다. 논두렁 사이에 파놓은 방죽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듯 싶다.

 

 

 

헬기장에서 조금만 더 가면 ‘엽돈재 갈림길(이정표 : 정상 0.2Km/ 엽돈재 5.3Km/ 정자 0.2Km)’이다. 갈림길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길이 엽돈재로 가는 길인데, 휴식년제로 묶여 현재는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 엽돈재는 **금북정맥의 한 지점인데, 정맥을 답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난감한 구간일 듯 싶다. 이곳에서 만난 금북정맥은 서운산 정상 바로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1Km/ 배티고개, 석남사/ 청룡사 2.5Km)에서 이번에는 배티고개로 이어진다.

(**)금북정맥(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안성의 칠장산(七長山)에서 금북·한남으로 갈라진다. 칠장산(七長山)에서 시작된 금북정맥의 산세는 태안반도 지령산(知靈山)에서 산세를 끝내는데 그 길이가 약 240㎞에 이른다. 주요 산으로는 성거산(聖居山), 광덕산(廣德山), 오서산, 수덕산, 가야산, 팔봉산 등이 있다. 참고로 산줄기가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므로 금북정맥이라 한 것인데 북서쪽 안성천·삽교천을 아우르고,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사면을 따라 흐르는 물이 바로 금강이므로 금강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옛 산맥 이름이다.

 

 

 

 

 

배티고개 갈림길에서 정상까지는 쉼터로 조성(造成)되어 있다. 울창한 참나무 숲으로 뒤덮인 길가에는 곳곳에 벤치와 식탁(食卓)들을 설치해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는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막걸리를 파는 사람들이다. 서운산 정상도 역시 막걸리를 잔술로 파는 상인들이 지키고 있다. 서운산의 정상은 좀 싱겁다는 느낌이다. 웬만한 산들의 정상은 정상 부근에서 변화를 주고 난 다음에 정상에 이르게 한다. 즉 깔딱 고개나 험준한 바윗길 등의 난관을 거치고 난 후에야 정상에 올라서게 만드는데, 이곳 서운산은 엽돈재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밋밋한 분지(盆地)로 이어지다가, 어느 한 지점을 정상이라고 정해버린 느낌인 것이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서운산 정상은 나무 데크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데크의 한쪽은 기괴(奇怪)한 바위들과 제멋대로 생긴 노송(老松)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쪽 면에 나무 데크로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정상표지판은 앉을자리의 뒤편에다 세워 놓았다. 어쩌면 앉은 채로 정상정복 인증사진(認證寫眞)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산이 아닐까 싶다. 전망대의 난간에 서면 거침없이 시야(視野)가 트인다. 안성시의 너른 들녘이 펼쳐지는데, 어른거리는 가스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저 난간에 세워진 경관 안내판을 보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멀리 충북 진천 쪽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아까 지나왔던 ‘탕흉대(蕩胸臺)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탕흉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등산로 주변은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는데, 길은 산책로처럼 여유롭다. 탕흉대 갈림길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청룡사 갈림길(이정표 : 탕흉대 0.9Km/ 청룡사 2.2Km/ 정상 0.6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자그마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서봉(542.8m)이다. 서봉 정상은 삼각점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다가 조망(眺望) 또한 좋지 않다. 정상에서 청룡사로 내려가는 길은 크게 보아 두 개의 코스가 있다. 정상에서 은적암을 거쳐 곧장 청룡사로 내려가는 코스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좌성사를 거쳐 청룡사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이 둘 중에서 난 좌성사를 거치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좌성사를 거치는 코스가 거리도 더 멀뿐만 아니라, 걷기만 해도 건강에 좋다는 소나무 숲길을 실컷 거닐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늘어선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마치 군무(群舞)를 추는 것 같다. 하나같이 기괴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몸을 비비 꼬꼬 있는 광경(光景)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소나무숲길은 탕흉대로 가는 길 외에도 좌성사 내려가는 길, 그리고 좌성사에서 청룡사로 내려가는 능선에서도 계속된다.

 

 

 

 

산길은 굴피나무와 굴참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길이다. 거기다 가끔 조릿대가 보이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철쭉이 군락(群落)을 이루기도 한다. 길은 온통 부드러운 흙길인데, 걷는 속도를 떨어뜨리며 주위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물어가는 봄날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교태(嬌態)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서봉을 지나면 좌성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두 곳(이정표 #1 : 탕흉대 0.4Km/ 좌성사 1.0Km/ 정상 1.0Km, 이정표 #2 : 탕흉대 0.1Km/ 좌성사 0.2Km/ 정상 1.4Km)을 지나게 된다. 제멋대로 자란 노송(老松)들 천지인 구간을 지나면, 이번에는 온통 참나무들이 능선을 독차지하고 있다. 산길은 능선안부에서 잠깐 고도(高度)를 낮추었다가 다시 위로 향하면서 뽈록하니 봉우리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바로 탕흉대(蕩胸臺)이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탕흉대(蕩胸臺)는 ‘가슴을 씻어내는 곳’이라는 의미로 예로부터 시원스런 조망(眺望)터를 이르는 지명(地名)이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탕흉대의 조망은 뛰어나다. 탕흉대에 올라서면 안성의 너른 들녘이 발아래에 펼쳐지는데,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안성과 평택은 물론 천안까지도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탕흉대의 한 복판에 있는 바위에 탕흉대(蕩胸臺)라고 쓰인 글씨가 아직까지도 선명한데, 탕흉(蕩胸)이란 ‘가슴이 시원하다’, ‘가슴이 후련하다’ 혹은 ‘가슴속 답답함을 쓸어버린다.’는 뜻이며, 대(臺)란 ‘높고 평평한 곳’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좌성사로 내려가는 길은 탕흉대에서 나뉜다(이정표 : 좌성사 0.3Km/ 정상 1.7Km). 경사(傾斜)가 별로 없는 산길을 따라 100m 조금 넘게 내려오면 왼편에 정자(서운정) 하나가 보이고, 석조여래입상(향토유적 제43호)은 그 옆에 보이는 암벽(巖壁)의 아래에 있다. 여래입상 바로 아래에는 ‘서운산성(山城)’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장이었던 홍계남 장군이 방어전을 펼쳤다는 서운산성의 지휘본부인 장대(將臺)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흙으로 쌓은 서운산성은 성 안에서 나온 유물의 연대 측정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築造)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발 535m에서 460m까지 골짜기처럼 비탈진 사면(斜面)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쌓았다고 하지만 세월이 흐른 탓에 산성(山城)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저 산성터임을 알려주는 입간판을 보고 이곳이 옛 산성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이정표 : 좌성사 0.2Km/ 정상 1.3Km)

 

 

 

 

 

 

 

산성터에서 200m 정도를 더 내려오면 좌성사이다. 좌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창건연대는 100년이 채 안 되는 기도도량인데, 누가 지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래도 창건에 따른 설화(說話) 한 토막 정도는 가지고 있다. 어느 할머니가 기존의 약천암 자리에서 정성들여 불공을 드린 후에 손녀의 불치병이 낫자 그 보답으로 이 사찰(寺刹)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성인이 앉을만한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좌성사는 비록 자그마한 절이지만 이름에 걸맞게 조망(眺望)은 그만이다. 이렇게 한적하면서도 조망이 뛰어나니 성인이 자리를 잡을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좌성사를 빠져나와 차량이 다니는 임도(林道)를 따라 100m쯤 걸으면 오른편 능선으로 산길이 열린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들이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꽤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 않는 길이다. 능선을 가득 메운 소나무 숲길은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넘쳐나서 좋고, 울창한 참나무 숲길은 싱그러운 나뭇잎이 향긋해서 좋다. 거기다가 발바닥의 감촉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산길이 바위나 돌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 흙길로 이루어진 것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산길을 따라 30분 가까이 걷다보면, 산길은 갑자기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서는데 힘들 정도는 아니다. 바닥이 흙길이라서 무릎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다. 20분 가까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청룡사가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청룡사이다. 청룡사에 가까워지자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한다. 사찰 주위가 온통 음식점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보물을 5점이나 가지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니 집단시설지구를 만들어 음식점들을 한군데로 모았으면 어떨까 싶다.

 

 

 

청룡사 초입, 사적비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부도밭을 지나면 바우덕이를 기리는 사당(祠堂)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남사당패들이 살았다는 불당골이다. 남사당패들은 겨울이면 대처에서 돌아와 불당골에 머물면서 절의 허드렛일을 거들어주고 밥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남사당패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여성 꼭두쇠이다. 바우덕이라는 이름은 바위틈에서 주운 아이라서 그리 불렀다는 설과, 이름이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서 그리 불렀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꼭두쇠는 남사당패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인데, 남사당패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들로 이루어진 패거리에서 여자의 몸으로 꼭두쇠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일 것이다. 거기다 그녀의 나이가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녀의 용모나 기예(技藝)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아깝게도 그녀는 전국을 유랑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청룡사 근처에 묻혔다.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바우덕이 사당은 한마디로 귀엽다는 느낌이다. 사당 옆에는 상모를 벗어 손에 쥐고 팔을 늘어뜨린 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아담한 바우덕이 동상이 서 있다. 청룡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무대가 되기도 했고, 특히 조선 후기 남자 사당(藝人)으로 이루어져 남사당패라 불리는 유랑(流浪) 예인(藝人) 집단이 겨울이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남사당패는 겨울이면 이 곳 청룡사에 둥지를 틀고 기예(技藝)를 연마하고, 봄이 되면 청룡사에서 발급해 준 패를 들고 안성 장터를 중심으로 전국을 떠돌며 민중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