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逍遙山, 587m)

 

산행일 : ‘12. 5. 1(화)

소재지 :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동과 포천시 신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소요산역→매표소→자재암→하․중․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정상)→공주봉→옛절터→일주문→소요산역(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집사람과 둘이서

 

특징 : 소요산은 아기자기한 암릉이 잘 발달된 산이다.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는 애칭에 걸맞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으나, 최근 경원선 전철(電鐵)이 개통되고부터는 주말(週末)뿐만 아니라 주중에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전철의 종점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소요산 매표소

소요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동두천시에 있는 소요동까지 가야만 한다. 경원선 전철(동인천⇔소요산)의 종점(終點)이 소요산역이니 전철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와 3번 국도(國道)를 건넌 후, 오른편으로 잠깐 걷다가 왼편에 보이는 음식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 있어 산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와 만나게 된다.

 

 

소요산(자재암)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500m정도 들어가면 오른편에 주차장(駐車場)매표소가 보이고,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관리사무소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이 메인(main)도로로서 곧바로 자재암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 길로 들어서면 식당가를 들렀다가 다시 메인(main)도로와 만나게 된다. 음식점 주인들의 호객행위를 뒤로 하고 식당가를 통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표소(賣票所)’에 이르게 된다. 매표소에서 입장료 1천원을 내고 게이트(gate)를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매표소에서 10분쯤 걸으면 일주문이다. 소요산역에서 일주문까지는 25분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왼편에 쉼터가 보이고, 한전(韓電)에서 만들었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샘터가 보인다. 이후로는 물을 구하기 어려우니, 낭패(狼狽)를 보지 않으려면 여기서 물을 보충(補充)해야 한다. 여름산행에서 물은 곧 생명, 가능하면 물은 충분한 양을 준비하는 게 좋다. 수도꼭지를 틀자 시원스럽게 물이 쏟아지는데, 물의 색깔이 뿌옇다. 아마 샘에다 소독약을 넣은 모양인데, 그냥 마시기에는 뭔가 께름칙하여 그냥 돌아서버린다.

 

 

샘터를 지나면 왼편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원효대사가 폭포 오른쪽 석등에 앉아 고행수도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원효폭포(瀑布)이다. 비록 웅장(雄壯)하지도, 그렇다고 빼어나지도 않지만 나름대로 운치(韻致)는 있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서울 근교에서는 저만한 폭포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저 정도라면 배경(背景)으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다. 폭포의 오른편에는 깊지 않은 동혈(洞穴)이 보이고, 그 안에는 작은 돌부처가 모셔져 있다. 원효굴이란다.

 

 

 

원효폭포 앞의 속리교를 건너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 자연보호비 옆으로 난 계곡길을 따르면 의상대와 공주봉으로 가게 되고, 자재암은 왼편의 가파른 나무계단으로 올라서야 한다. 계단은 꽤나 높다. 그렇다고 헤아려볼 필요는 없다. 계단아래에 108계단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원효대사와 인연이 깊은 산, 그래서 불교의 백팔번뇌(百八煩惱)에서 모티브(motive)를 삼았나 보다. 그렇다면 얼마 후에 문(門)이 나타나겠지? 아니나 다를까 계단의 끝에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세워져 있고, 상단(上端)에 ‘해탈문(解脫門)’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해탈문 옆의 원효대(臺)는 가장자리에 철제(鐵製) 난간을 둘러 자그마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해탈문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 병풍처럼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오롯이 숨어있는 자재암이 나타난다. 비좁은 벼랑에 터를 잡고 있는 암자(庵子)의 모습이 이채롭다.

* 자재암(自在庵, 향토유적 제8호), 신라 무열왕 1년(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사찰의 이름은 자재암에서 소요사(고려 광종), 영원사(靈源寺, 고려 고종)을 거쳐 최종적으로 자재암(1907년)으로 굳어졌다. 문화재(文化財)로 보물 1211호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언해본’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나한전 등이 있으나 모두 1961년 이후에 세운 것들이다. 자재암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전설(傳說)이 전해 내려온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세속(世俗)의 인연을 맺은 뒤 수행(修行)의 일념으로 이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였다고 한다. 설법(說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親見)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청량폭포 방향에 각진 돌로 쌓아 놓은 벽면(壁面)이 보인다. 문 위에 ‘나한전(羅漢殿)’이라고 쓰여 있다. 옛날에는 굴의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을 받아먹는 재미로 드나들던 그저 평범한 동혈(洞穴)이었다. 그런데 자재암에서 입구를 돌로 쌓고 불전(佛殿)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한전의 왼편 급경사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면 선녀탕을 거쳐 나한대에 이르게 되고, 하백운대로 가려면 왼편의 계단으로 올라야 한다.(이정표 : 하백운대 0.6Km, 상백운대 1.0Km/ 선녀탕 0.65Km/ 자재암 50m)

 

 

 

자재암 뒤 갈림길에서 하백운대까지의 0.6Km구간이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힘든 코스이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 같은 가파른 ‘깔딱고개’. 연이어 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傾斜)가 급해 오르는데 애를 먹는다. 2~3번의 계단을 오르고 난 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巖壁)을 왼편으로 돌아 오르면 잘생긴 노송(老松)이 손님을 맞고 있는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상백운대와 나한대, 그리고 의상대와 공주봉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전망대는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등산로에서 오른편으로 30m정도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부터 하백운대까지는 경사가 거의 없는 밋밋한 능선이 이어진다.

 

 

 

 

 

하백운대부터는 능선길은 고속도로로 변한다. 경사(傾斜)도 심하지 않는데다가 흙길이라서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하백운대에서는 건너편 나한대와 의상대, 공주봉 등 앞으로 가야할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하백운대 이정표 : 중백운대 0.4Km/ 자재암 0.65Km)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와 장난치며 걷다보면 이내 중백운대이다. 중백운대는 오래된 소나무(老松)들의 천국이다. 절벽(絶壁) 난간에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를 산 아래 자재암을 향해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아무래도 못다 떨친 인연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중백운대 이정표 : 하백운대 0.37Km/ 중백운대 갈림길 0.29Km) 산책로처럼 생긴 흙길을 살살 걷노라면 나무들이 가슴에다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굴참나무, 신갈나무, 팥배나무... 그러나 나무가 틀린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은 ‘옥에 티’이다. 누가 매달아 놓았는지 고마운 일이지만,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달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백운대를 거쳐 상백운대까지도 비교적 완만(緩慢)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맞은편 능선을 내다 볼 수 있는 너럭바위들이 간간히 보이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 없이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간에 덕일봉 갈림길(이정표 : 덕일봉 0.7Km/ 중백운대 0.3Km/ 상백운대 0.Km3)과 선녀탕 갈림길(이정표 : 중백운 0.35Km/ 상백운 0.25Km/ 선녀탕 1.0Km)을 만나게 되나 이정표를 참고하면 길을 혼동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를 거쳐 상백운대까지가 소요산 계곡의 왼편 능선이다. 상백운대를 지나면 소문난 ‘칼바위 능선’이다. 500m에 이르는 칼바위 능선을 오르내리는 릿지(ridge)는 소요산의 백미(白眉)다. 칼바위는 형태가 날카롭기도 하지만, 생김생김 또한 기이(奇異)하게 생겨서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들은 어느새 낙낙장송(落落長松)으로 변해 제법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칼바위 능선’이라는 이름만 듣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바위가 크지도 않을뿐더러 암릉 또한 위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굳이 우회(迂廻)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다.

 

 

 

칼바위 능선이 끝나면 능선은 갑자기 급하게 아래로 뚝 떨어진다. 흙길이지만 길가에 쇠(鐵)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급하게 고도(高度)를 낮추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몸을 옆으로 세운 채로, 난간을 붙잡고 엉거주춤 내려가는 모습들이 재미있다. 선녀탕으로 내려가는 안부삼거리(이정표 : 칼바위 0.45Km/ 선녀탕입구 0.9Km/ 나한대 0.3Km)까지 내려오면 또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서면 드디어 나한대이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로 가려면 먼저 길지 않은 안전(安全)로프를 타고 내려서야 한다. 의상대로 가는 능선은 바윗길이라서 조망(眺望)이 잘 트인다. 진행방향에 널따랗게 펼쳐지는 의상봉의 자태(姿態)가 자못 빼어나다. 비록 바윗길이지만 곳곳에 계단을 잘 만들어 놓았으니 안전(安全)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깐 한눈을 팔면서 의상봉의 풍광(風光)을 즐겨보면 어떨까? 진달래와 산벚꽃 들이 봉우리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안부에서 다시 길게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소요산의 주봉(主峰)인 의상대이다. 순수한 바위봉우리인 정상의 한 가운데에, 검은 돌로 앙증스런 정상표지석을 만들어 놓았다. 정상에 오르면 바위봉우리의 특징대로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인다. 동두천 시가지(市街地)가 보이고 남쪽으로 도봉산과 북한산, 수락산 등 서울 북부의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까지는 1.1km, 일주문까지는 1km의 거리이다.

 

 

 

 

 

의상대에서 잠깐 가파르게 내려선 산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고 있다. 능선이 휘고 있는 것이다. 능선(稜線)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만, 길은 바위의 위가 아닌, 능선 왼편의 바위벼랑 아래로 나있다. 능선을 만들어내고 있는 바위가 거칠 뿐만 아니라, 가슴에 담아둘만한 눈요깃거리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산길은 구태여 바윗길을 고집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바위능선이 끝나면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이정표 : 샘터 0.6Km/ 공주봉 0.45Km/ 의상대 0.75Km). 오른쪽은 곧장 ‘옛 절터’로 내려서는 길이며,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공주봉이 나온다. 공주봉으로 오르는 능선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얼마나 가파른지 그냥 일직선으로 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좌우(左右)로 오고 감을 반복(反復)하면서 위로 오르게 하고 있을 정도이다. 길가에 설치해 놓은 철(鐵)난간의 도움을 받아보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바윗길답게 오르는 길 곳곳에는 빼어난 전망대(展望臺)가 여럿 있다.

 

 

 

공주봉 정상은 넓은 분지(盆地)이다. 바윗길을 돌아 정상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바위봉우리를 연상했겠지만, 의외에도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남(南)쪽은 수직(垂直)의 바위벼랑이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난간에 설치해 놓은 목책(木柵) 앞에 서면, 동두천 시가지가 발밑에 깔려있는 것이 보인다. 그 맨 앞에 미제2사단(Camp Casey)이 있다. 내가 3년 동안 카투사(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로 근무하면서 미군(美軍)들과 같이 생활했던 곳이다. 난 신체(身體)의 생김새는 물론 언어(言語)와 문화(文化) 등 모든 것이 다른 그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많은 부분에서 좌절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국군의 계급은 병장에 불과했지만, 미군 계통에서의 내 계급은 상사(上士, First Sergeant)로서 본부중대에 배속된 카투사들을 인솔하는 책임자로 근무했었다. 따라서 난 많은 시간들을 카투사들의 권리를 대변하는데 할애(割愛)했었고, 좌절의 상처는 하나하나 가슴에 딱지(상처에서 피, 진물 따위가 나와 말라붙어 생긴 껍질)로 쌓여만 갔었다.

 

 

 

정상의 서쪽 부분에 정성들여 조성(造成)해 놓은 철쭉꽃밭 사이를 지나면 ‘옛 절터’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보인다. ‘하산 코스를 잘 고른 것 같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흙길에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한 하산길은 무척 순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오른쪽에 있는 백운대와 의상대가 잘 보이는 전망대(展望臺)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최악(最惡)으로 변해버린다(전망대 이정표 : 공주봉 0.35Km/ 구절터 0.58Km). 너덜길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엄청나게 가파르기까지 하다. 길가에 설치해 놓은 안전 지지대(支持臺)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내려설 수가 없을 정도이다.

 

 

 

 

30분 정도를 쩔쩔대며 내려서다보면 의상대아래 안부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다(이정표 : 일주문 0.4Km/ 공주봉 1.0Km/ 샘터 0.4Km). 삼거리 근처에 정성들여 쌓은 듯한 돌탑 2기(基)가 보이고, 그 뒤에서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본격적인 하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소요산 주차장(원점회기)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너른 공터가 보인다. ‘옛 절터’이다. 절터는 잔디로 잘 가꾸어 놓았고, 주변에는 벤치 등 쉼터를 깔끔하게 조성해 놓았다. 절터에서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 지나갔던 원효폭포 옆 삼거리 까지는 제법 운치(韻致)가 있는 계곡을 따라 길이 나있다. 계곡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산에 찾아왔지만 산은 오르지 않고,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무덥다는 얘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