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修理山, 475m)

 

산행일 : ‘11. 7. 17(일)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와 군포시, 안산시의 경계

산행코스 : 성결대학교→관모봉→수리산(태을봉)→바위능선→고개사거리→병목안유원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산과 하늘

 

특징 : 산본이나 군포시에서 보면 독수리를 닮았다고 해서 수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편리한 교통망 때문에(전철 산본역, 수리산역, 대야미역, 안양역, 금정역, 명학역 등에서 내려 도보로 20여분 정도면 등산로에 닿는다.) 군포·안양·안산뿐 아니라 인근 수도권 주민들로부터도 각광 받고 있다. 맑은 날 산 정상에 오르면 서해 인천 송도신도시와 수원시가지까지 볼 수 있다. 수리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아 어린이들이나 여성들에게도 큰 부담이 없다. 또한 산행 초입부터 송림이 울창해 상쾌한 느낌을 준다. 울울창창한 숲길을 걷기 때문에 자외선 노출이 우려되어 야외활동을 꺼리는 여성들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의 성결대학교 정문

지하철 1호선 명학역 1번 출구를 나와 육교를 건너면 ‘명학공원’이 나온다. 공원을 지난 후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성결대학교를 향해 걷다가, 대학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또 하나의 게이트(후문)가 보인다. 후문의 경비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함께 걷고 있는 회원들은 모두 7명, 사당역에서 만난 다우악과 블루엔젤, 그리고 명학역에 내리니 코스모스 모녀와 진철이, 종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결대학교 정문 오른편으로 난 소로를 따라 들어서면 우선 시멘트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을 올라 조그만 개울을 건너면 ‘봉수정 약수터(명상의 숲)’이다. 진철이가 약수터 앞의 정자(亭子)에 막걸리를 펼쳐 놓는다. 아마 배낭의 무게를 줄여보려는 얄팍한 계략(?)인 모양이다. 아니면 가뜩이나 약한 다리품을 막걸리 기운을 빌어 극복해보려는 의도일지도... 이때 폴스카이로부터 전화, 성결대학교 근처에 와 있단다. 그럼 오늘 산행인원은 8명이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 같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걷기에는 최적(最適)의 인원일 것이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면 제일먼저 침엽수림이 산꾼들을 맞이한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자태가 자못 의젓하다. 걷는 도중 ‘명상의 숲’이라고 적힌 팻말을 자주 만나게 된다. 침엽수들이 넘치도록 보내주는 피톤치드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서서히 걸으며 충분히 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서서히 걷다보면 응당 사색은 따라올 것이니까 말이다. 도심생활에서 찌든, 폐부속의 찌꺼기까지 씻어내 주려는 듯, 피톤치드를 듬뿍 머금은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상큼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가슴 밑바닥까지 서늘해진다. 그러고 난 후에 서서히 걷기 시작한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등산로 왼편이 시원스레 트이고 있다. 붉은 빛 나는 차돌바위가 만들어낸 천연(天然)의 전망대(展望臺)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왼편에 삼성산과 관악산, 그리고 오른편으로 청계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산 아래에는 안양, 과천, 의왕시에 꽉 들어찬 아파트들이 마치 성냥갑같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비온 뒤끝의 프리미엄(premium)으로 염곡동의 유통단지까지도 보이고 있다.

 

 

 

등산로에는 침엽수에서 떨어진 솔잎들이 두텁게 내려 앉아있다.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 폭신폭신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런 호사도 잠시, 등산로는 이내 급경사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관모봉까지 가파른 오름길의 연속이다. 다행이 경사가 급한 곳에는 로프와 철제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오름길에서 30분 정도 다리품을 팔다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갑자기 고와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관모봉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관모봉 정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오늘은 제헌절, 국경일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휘날리고 있었겠지만... 관모봉(冠帽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에는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외곽순환도로가 또렷하고, 그 뒤로는 모락산, 청계산, 광교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헌걸차다.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관악산과 삼성산도 한눈에 잡힌다.

 

 

 

태을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산길이 아니라 마치 산책로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정비가 잘 되어있다는 얘기이다. 깔끔한 흙길이 3m도 넘게 잘 닦여있고, 길가에는 20~30년생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간혹 조림을 한 듯 단풍나무도 심심찮게 무리를 지어 있다.

 

 

관모봉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첫 봉우리는 수리산 최고봉인 태을봉(太乙峰)이다. 군포시의 진산인 태을봉은 최고봉임에도 불구하고 조망은 시원찮다. 그러나 실망은 금물, 정상에서 200m 정도 더 진행하면 조망테크가 설치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눈을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조망테크에 서면 군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시화호까지 눈에 들어온다.

 

 

 

태을봉에서 슬기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수리산에서 가장 스릴이 있는 구간이다. 노란바위를 중심으로 암릉구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그 정도조차도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우회로를 택하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일행들을 우회시키고 암릉위로 올라선다. 젊은 블루엔젤은 언제 올라왔는지 이미 저만큼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암릉을 걷다보면 왼편으로 산본시가지(市街地)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암릉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잡는다. 태을봉 어림에서 둘러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은, 위험구간인 암릉구간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점심에 곁들이는 반주(飯酒)이지만 ‘산과 하늘’의 반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칡술, 더덕술에 막걸리와 소주, 얼린 맥주까지, 아니나 다를까 배낭에서 나오는 술들은 다양하기도 하다. 폴스카이가 가져온 ‘복분자주(覆盆子酒)’는 그의 부인이 내게 전하라고 보내준 것인데도, 블루엔젤이 욕심을 내고 있다. 아서라! 젊은이들에게는 큰 약효가 없는 술이느니라...

 

 

암릉구간이 끝나는 지점인 안부 사거리에서 오른편 ‘제2 만남의 광장’으로 내려선다. 오늘 같이 무더운 날에는 체력소모가 많기 때문에, 오래 걷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 쉽기 때문이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이내 산길은 고와진다. 산의 허리를 감으며 이어지는 등산로는 경사가 완만할뿐더러, 길 주변에 울울창창하게 늘어선 침엽수들로 인해 상쾌하기 그지없다. 오늘 새벽까지 내린 비 탓일까?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짙은 소나무 향이 진하다.

 

 

 

소나무에서 내품는 피톤치드향이 마음에 든다면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우거진 소나무들이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만남의 광장에는 운동기구 외에도 나무 의자들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특히 오른편 개울에는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니 잠깐 쭈그리고 앉아 탁족(濯足)이라도 해볼 일이다. 역시 부지런한 코스모스님 모녀, 어느새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진철이와 다우악도 냇가로 내려서서 신발을 벗고 있다.

 

 

 

 

만남의 광장을 지나면서 길은 등산로라기보다 차라리 산책로에 가까울 정도로 넓고 고르게 잘 닦여있다. 길가에는 나무 해설판도 심심찮게 매달려 있고, 공들여 쌓은 돌탑들도 보인다. 산을 내려서면 병목안유원지, 계곡을 따라 형성된 유원지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산행 날머리는 병목안유원지

최경환 성지를 지나 조금 더 내려선 후 음식점으로 들어선다. 전에 몇 번인가 들러본 적이 있다는 진철이가 추천하는 집이다. 음식점은 계곡을 끼고 양 옆으로 평상을 만들어 놓고 손님을 맞는데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다우악 말로는 이곳보다 더 큰 음식점들이 많다고 하지만, 난 이보다 더 큰 음식점은 본 일이 없다. 옻닭과 닭백숙을 안주삼아 소주... 우린 얼큰하게 취한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 최경환 성지(안양 제5경) : 안양 9동 ‘담배촌’에 조성된 천주교의 순례지. 최경환(1805~1839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의 아버지로 담배촌에 정착해 천주 신앙을 전파하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