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산(烽臺山, 284m)-금정산(金井山, 263.6m)

 

산 행 일 : ‘21. 11. 13(토)

소 재 지 :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산행코스 : 홍농119센터(한수원사택 버스정류장)→봉대정→봉대산→질마재→전망대→금정산→암릉→칠곡농공단지(소요시간 : 5.29km/ 2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300m에도 못 미치는 산들이니 산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막상 산행이 시작되면 그런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제로(0) 레벨에서 산행이 시작되는 탓에 오롯이 280m를 올라야할 뿐만 아니라 경사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더해진다. 하지만 산이 갖고 있는 장점은 그런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서해바다와 맞물린 아름다운 풍광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데, 특히 금정산에서 만나게 되는 암릉은 조망 산행의 백미라 하겠다. 계마항과 가마미해변으로도 모자라 위도까지 덧칠되면서 그 아름다움을 한껏 고조시킨다.

 

▼ 산행들머리는 ‘홍농 119안전센터’(영광군 홍농읍 홍농로 543)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내려와 15번 지방도를 타고 해리방면으로 내려오다 무장교차로(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796번 지방도로 옮겨 공음면소재지인 칠암리까지 온다. 이어서 국도 22호선으로 갈아타고 영광방면으로 내려오다 용대삼거리(고창군 상하면 용대리)에서 오른편 77번 국도로 다시 바꿔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군 홍농읍에 이르게 된다. 읍내의 홍농사거리(상하리)에서 우회전하면 산행들머리인 ‘119안전센터’가 코앞이다.

▼ 들머리는 홍농읍 상하리와 칠곡리, 성산리, 계마리 등 꽤 여러 곳에서 열린다. 하지만 119안전센터(상하리)에서 시작해 봉대산과 금정산을 거쳐 가마미해수욕장(계마리)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칠곡농공단지(칠곡리) 근처 하산지점까지 버스를 대준 산악회의 배려로 1km남짓 되는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다.

▼ 신축공사가 한창인 홍농119안전센터의 뒤. 도로 건너에 위치한 민가의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하다. 개가 두 마리나 지키고 있는 걸로 보아 남의 집 마당이 분명하니 말이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망설이지 않고 들어선다. 개도 짖는 게 아니라 오히려 꼬리까지 흔들며 길손을 맞는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랄까? 덕분에 따라나선 산악회의 이름처럼 ‘기분 좋은 산행’이 될 것 같다고 느꼈다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 길은 넓은데다 정비도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 두어 곳에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헷갈리기 딱 좋다. 우리 부부 역시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따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갈 지(之)’를 염두에 두고 길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는 오른편, 다음은 왼편 하면서 말이다.

▼ 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아니 ‘코에서 흙냄새가 날’ 정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언젠가 제천에 있는 떡갈봉을 함께 오르시던 이석암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이 산의 가파름을 빗대어 이르던 말씀이다. 오늘도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못하는 눈치시다. 문장력이 풍부하다보니 그 정도의 표현은 그저 흘러가는 글귀에 불과한 모양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무덤이 있는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벤치가 놓여있다. 턱에 차올랐을 숨이라도 잠시 골라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 잠시 후 내려선 ‘작은재’에는 운동기구 몇 점이 설치되어 있다. 첫 만남의 이정표(마당바위 헬기장↑ 0.42㎞/ 홍농초교 방면← 0.53㎞/ 한전 정문앞↓ 0.83㎞)는 이곳이 홍농초등학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임을 알려준다.

▼ 산길은 또 다시 힘겨운 오름짓을 시작한다. 우리 역시 그 가파름과의 버거운 싸움이 시작된다. 통나무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아무런 특징이 없는 두 번째 봉우리를 넘은 산길은 다시 한 번 오름길로 바뀐다. 하지만 아까 올랐던 두 번의 오름길에 비하면 거저먹기. 숨을 헐떡일 필요도 없이 세 번째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27분 만에 해맞이공원에 올라섰다. 이정표는 이곳을 ‘마당바위’라 적고 있는데, ‘헬기장’보다도 더 너른 공터에는 봉대정(烽臺亭)이라는 팔각정외에도 해맞이축제를 위한 제단과 희망과 상생의 우체통, 체육시설 등 잡다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읍민들이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아치형 대문은 ‘봉대산 해맞이공원’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맞다. 매년 정월 초하루면 이곳은 ‘해맞이 축제장’으로 변한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행사의 하나일 따름이지만, 읍민들에게는 한 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명까지도 ‘해맞이 공원’이 되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도 세워놓았다. <昨夜一宿靑天 足豆時生白髮’(어제 밤 푸른 하늘에서 지내고 한발 한발 내려오니 흰 머리카락이 돋는 것 같구나)>. 이따가 오르게 될 금정산 자락에 있는 금정암(金井庵, 1627년 보명선사가 창건한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삿갓이 그 경관에 감탄하며 읊었다는 싯귀(詩句)를 새겼다. 한때 고시생들의 요람이었다는 금정사는 현재 원자력발전소로 인해 통행이 제한되면서 폐찰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 해맞이공원이라는 이름답게 동쪽으로의 조망이 시원스럽다. 청보리로 유명한 공음면의 너른 들녘을 배경삼아 홍농읍 시가지가 나지막이 웅크리고 있다. 그런데 자그만 읍치고 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홍농읍에 터를 잡은 원자력발전소 덕분이 아닐까 싶다.

▼ 공원 아래 안부는 홍농읍사무소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봉대산 정상↑ 0.4㎞/ 읍사무소방면← 0.63㎞/ 작은재 ↓0.42㎞)이다.

▼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 이번에도 역시 가파르기 짝이 없다. 아니 나무계단까지 놓은 것이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 해맞이공원에서 8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35분 만에 ‘봉대산’ 정상에 올라섰다. 높이 284m(핸드폰의 앱은 278m)의 산봉우리는 반반하게 터가 닦여있다. 숫제 판석으로 좌대까지 만들었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몸짓이 아닐까 싶다. 맞다. 이곳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성종(981년)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 정상석은 이곳에 있었다는 봉수대(烽燧臺)를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 불꽃을 형상화 했다. 봉수라는 게 본디 불꽃으로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참고로 봉수대는 높은 산정에 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횟불, 낮에는 연기로 군사적 상황을 중앙으로 급히 전하던 일종의 원시 통신수단이다. 고려 의종(1149년) 때부터 제도화되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주변 풍광이 거칠 것 없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남쪽 방향은 조금 전에 올랐던 해맞이공원과 별반 달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방향까지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 신촌저수지가 놓여있는가 하면, 그 너머로는 계양산, 그리고 더 멀리로는 위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정상 건너편에서 암봉이 하나 솟아올랐다. 길은 이 봉우리를 비켜가지만 공음면과 법성포 방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이니 놓치지 말고 올라볼 일이다.

▼ 코앞에 있는 봉대산의 정상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주위 풍경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이 암봉을 지나면 이정표(가마미방면↑ 4.51㎞/ 칠곡삼거리← 1.27㎞/ 한전정문 0.8㎞↓)가 세워진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나온다.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가 만든 정상표지판은 이정표에 매달려 있었다. 진짜 정상에는 매달아놓을 만한 마땅한 지지대가 없었던 모양이다.

▼ ‘가마미 해수욕장’ 방면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내려가는 길도 역시 무척 가파르다. 오르내림이 모두 가파르니 가히 봉수대가 들어설만한 지형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 능선은 경수지맥(鏡水枝脈, 영산기맥의 구황산(서봉)에서 서북쪽으로 분기한 길이 35km의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라고 한다. 경수지맥이 장사산(고창군 상하면)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중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빚어 올린 봉우리가 봉대산과 금정산이란다. 이 산줄기는 홍농읍 칠곡리에서 그 맥을 서해에 넘겨준다.

▼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그래선지 요런 애교도 부려놓았다. 편한 길이니 돌아가란다. 그래봤자 ‘도나캐나’였지만 말이다.

▼ 바위지역에는 밧줄도 매어놓았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의 경사가 아닌데다, 바닥의 접촉면도 거칠어서 밧줄의 도움 없이도 내려서는데 지장이 없다.

▼ 이 구간에서는 법성포 방향의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서해바다를 가로지르는 영광대교는 물론이고, 고창군에서 흘러내려온 구암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영광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백제불교최초도래지는 저 하천 너머에 있을 것이다.

▼ 가파른 오르내림만 계속되는 건 아니다. 아래처럼 순한 산길도 걷게 된다. 참!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산은 텅 비어있었다. 산행을 끝마칠 때까지 우리 일행 말고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도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지역협력을 중요시하는 한수원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나 싶다.

▼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비탈이 아예 곧추서버렸다. 그것도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다. 하지만 나무계단을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그 계단이 길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뿐...

▼ 길고 긴 계단을 오르는 일은 고달프다. 대신 눈은 즐거워진다. 조금 전에 넘어온 봉대산 줄기에 더해, 이번에는 고창 지역의 너른 들녘과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수많은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 계단이 놓인 봉우리를 넘자 ‘질마재’에 내려선다. 칠곡리와 계마리를 잇는 고갯마루인데, 이정표(가마미↑ 3.4㎞/ 한빛원전→ 2.0㎞/ 칠암폭포← 0,7㎞/ 봉대산정상↓ 1.1㎞)와 등산로안내도 말고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이정표는 왼쪽에 금정산이 자랑하는 명소 가운데 하나인 ‘칠암폭포’가 있음을 알려준다. 홍문동천(虹門洞天 : 무지개 문이 하늘에 닿는다)과 옥쇄주분쇄락상신(玉砕珠噴灑落爽神 : 물줄기가 옥구슬 가루를 흩뿌리듯 떨어지니 마음마저 시원하다)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폭포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요즘 같은 갈수기에는 폭포의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질마재를 기점으로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까의 그 가파름은 많이 누그러졌다. 대신 바윗길에 가까울 정도로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봉대산에서 금정산까지 산봉우리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산등성이를 넘으면 또 새로운 등성이가 나타나니 말이다.

▼ 봉우리 위로 올라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금정산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그 오른편에는 한빛원전이 들어앉았다. 그렇다면 저 바위절벽 어디쯤에 산의 이름을 낳게 한 ‘금샘’이 있을 것이다.

▼ 지난 일요일(7일)은 입동(立冬).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길가의 단풍나무가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에서 김응룡 감독이 내뱉었던 탄식을 회상해 낸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인생무상 아니 목생무상(木生無常)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칠암폭포 갈림길(이정표 : 가마미↑ 3.0㎞/ 칠암폭포 및 저수지← 1.4㎞/ 질마재↓ 0.5㎞)를 만났으나 망설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길. 길가 바위마다 송악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다른 나무들처럼 하늘로 뻗을 수 있는 조상의 음덕을 입지 못하고,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이다 보니 저런 모양새로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 또 다시 나타난 가파른 내리막길. 이번에는 길기까지 하다. 그만큼의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을 걱정하며 툴툴거리는데, 함께 걷던 일행이 그 이유를 알려준다. ‘봉대산’과 ‘금정산’이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지만 별개의 산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은 내려가도 너무 내려간다.

▼ 가파른 내리막길의 끝에는 ‘엑기재(어느 분의 후기에서 따왔는데 옳은지는 모르겠다)’가 있었다. 한빛원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금정산↑ 0.5㎞/ 한빛원전→ 0.65㎞/ 봉대산↓ 3.9㎞)이다. 질마재에서 이곳까지는 23분이 걸렸다.

▼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 ‘비탈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꽤 오래 계속된다. 그 가파름과 버거운 싸움을 치러야만 하는 우리로선 죽을 맛인 구간이다. 의지할 수 있는 밧줄난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가파른 경사는 ‘갈 지(之)’자 걸음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끝내는 나무계단을 이용해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맞다. 산은 산이다. 작거나 낮다고 깔보면 고생한다. 더구나 바닷가의 산들은 더 그러하다.

▼ 고진감래(苦盡甘來)랄까?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시야가 툭 터지는 바위지대가 나오면서 환상적인 조망이 펼쳐진다. 법성포 방향의 풍경이 성큼 다가오는데, 서해바다에 둘러싸인 ‘숲쟁이 꽃동산’이 또렷하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를 품고 있는 산이다. 이곳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눈의 호사를 실컷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아니 점심 대용으로 준비해간 막걸리로 목을 축이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9분쯤 더 걷자 널찍한 헬기장이 나온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이 금정산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았다. 그저 김문암씨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금정산(金井山)이란 지명은 요 아래 천연동굴에 있다는 ‘옹달샘’에서 따온 이름이지 싶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에 태양이 비치면 금빛이 된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 했는데, 아무리 퍼내도 금빛을 띠고 있어 부금(浮金)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옛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마미 근처에 살던 노인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동굴 속에서 옹달샘을 발견하고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잠에서 깬 노인이 배를 만지자 금이 나오더란다. 그런데 욕심 많은 아들 내외가 더 많은 금을 얻고자 할아버지의 배를 무리하게 누르자 금은 나오지 않고 할아버지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노인이 시주한 돈으로 동굴 앞에 세운 절이 ‘금정암(지금은 폐찰 상태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지근거리에 있는 ‘선창금 갈림길’(이정표 : 가마미 1.4㎞/ 선창금 1.67㎞)을 지나 가마미해변으로 내려가는 이 길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이다. 길지는 않지만 바윗길을 타는 덕분에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과 함께 스릴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약간의 모험심만 투자하면 스릴은 최고조에 이른다. 위도에 더해 해상풍력발전기까지 덤으로 담아보는 눈의 호사는 넉넉한 보너스다.

▼ 이제 주변경관도 살펴보자. 왼편에는 ‘108번뇌’를 상징하는 영광대교의 108m짜리 주탑(主塔)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그 오른편으로 뻗어나간 길은 그 유명한 ‘백수해안도로’다. 교통의 기능보다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해안절벽, 광활한 갯벌, 해질녘 낙조 등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입소문을 탔다.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어 2011년엔 ‘대한민국 자연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해 명실상부 영광을 대표하는 드라이브 명소가 됐다.

▼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보자. 발아래로는 ‘계마항’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서해바다를 평풍처럼 두른 풍경이 마치 원색의 물감으로 완성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그 오른편에는 모래미해변이 서해바다와 맞물려 있다. ‘가마미(駕馬尾)’는 1627년 보명선사(조선 인조 때 금정암을 창건했다는 중)가 말이 해변을 향해 오는 형국이라 하여 마래(馬來)라 부른데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말의 꼬리가 피어나는 모양, 또는 금정산의 지형이 마치 멍에를 쓴 말의 꼬리처럼 생겼다는 설이 떠돌면서 가마미(멍에 駕, 말 馬, 꼬리 尾)가 되었다.

▼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육산을 걷게 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는 순한 길이다.

▼ 그렇다고 조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 암릉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하산지점에 가까워지면서는 ㈜TKS의 영광조선소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도크와 마당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문을 닫은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경영난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지방기업의 아픈 현실이랄까?

▼ 금정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28분. 칠곡농공단지 근처 도로(842번 지방도, 가마미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다른 이들이 날머리로 삼는 가마미해수욕장은 오른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대덕산이라는 또 하나의 산을 올라야하는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한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2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이 찍은 거리는 5.29km. 산행 내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음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 산악회의 일정은 산을 하나 더 오르란다. 법성포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대덕산(大德山, 240.7m)’이다. 와탄천의 물돌이 길에 물이 차오르면 ‘구수마을’ 앞 들녘이 완전한 섬처럼 보이는데, 추수라도 앞둘라치면 이 들녘이 황금색으로 빛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단호했다. 더 이상의 산행을 거부한다며 대신 영광의 별미나 맛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완주를 하신 ‘참매’님의 사진을 빌려다 써본다.

▼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 여유시간을 사용해야만 하니 어쩌겠는가. 일단은 ‘백제불교 도래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맥주로 목도 축일 겸해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도래지까지 가는 택시를 불러 달랬는데, 등산복 차림의 우리 부부를 본 주인장께서 지역에서는 산책코스라며 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따라가는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도로변에는 건어물시장도 들어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보따리 챙겨도 좋을 듯.

▼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도로변의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집사람의 말마따나 다리의 모양새가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단다. 그런 굴비를 마다할 집사람이 아니다. 쪼르르 달려가더니 포즈부터 잡고 보는데, 조형물에 담긴 ‘자린고비’라는 뜻을 그녀는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 30분 가까이 걸었을까 산꼭대기에 걸터앉은 석불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는 중국에서나 볼 법한 탑(사실은 도래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이 세워져 있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 도착한 것이다. 저곳은 법성포라는 고을 이름의 근원이기도 하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마라난타 스님을 의미한다. 성인으로 평가받는 마라난타 스님이 불교를 들여온 곳이라는 뜻이다.

▼ 2006년에 문을 연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는 높이 23.7m의 사면불상과 부용루, 탑원, 만다라광장, 상징문, 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도래지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간다라 양식의 건축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다. 맞다. 이곳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뜻이다. 그 옛날 파키스탄의 간다라에서 출발한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신장 위구르의 쿠처·돈황과 장안·남경을 거쳐 당시 백제 땅인 지금의 법성포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지자체에서 놓칠 리가 있겠는가. 간다라 양식의 건축물을 짓고 불교 유물들을 전시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 ‘탑원(塔園)’은 간다라 지역에 남아있는 ‘탁트히바히 사원’의 주탑원을 본떴다고 한다.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의 대표적인 사원 양식이라는데, 중앙의 스투파(stupa·불사리 탑)를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작은 굴(감실형의 불당)이 빙 둘러 있는 형식이다. 그래선지 감실 내부에는 불상과 작은 탑들이 들어있었다.

▼ ‘간다라유물관’은 황토색 벽돌로 지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지붕 위에 원형 기둥을 얹었다. 드럼 모양의 찰주(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가 튀어나온 형상이다. 현지조사 등을 거쳐 재현한 간다라 지역(현 파키스탄 페샤와르 일대)의 전통 건축양식이란다. 간다라 지역은 기원 전후 헬레니즘과 융합해 불교 미술을 꽃 피운 고장이다.

▼ 안으로 들어가면 백제불교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영상과 자료들을 통해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가 언제 어떻게 법성포에 오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간다라 양식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

▼ 파키스탄 현지에서 들여왔다는 2~5세기 부조와 불상 등 진품 147점도 전시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대사관의 협력을 얻어 건너온 진귀한 것들이라는데, 이를 통해 스와트, 페샤와르, 탁실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 불교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특히 깊은 눈과 날카롭고 긴 코, 얇은 입술과 갸름한 얼굴 등 서구적인 용모로 조각된 불상들은 1~3세기경 인도 불교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이 합쳐진 간다라 미술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가장 높은 곳은 ‘사면대불(四面大佛)’이 차지했다. 암석에 동굴을 파서 만든 석굴사원 형식이다. 그 아래 전각은 ‘부용루’. 벽면에 석가모니의 출생에서 고행까지의 전 과정을 23개의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해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사면대불상까지는 108번뇌를 하나하나 녹이며 올라가라고 백팔계단으로 놓았다는데 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대신 10m 높이의 돌기둥(石柱)과 설법도(設法圖) 부조 등을 꼼꼼히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 바닷가에는 널따란 데크 광장을 조성했다. 배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아 마라난타가 배에서 내렸다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간다라 지역의 스와트(Swat)를 출발한 스님은 길기트와 훈자를 거쳐 중국 신장지역인 쿠차, 장안, 항저우(杭州)에 다다른다. 그리고 배를 타고서 법성포(法聖浦)에 도착하니, 그때가 백제 침류왕 원년인 서기 384년이다.

▼ 모처럼 찾은 영광이니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이는 굴비를 어찌 맛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가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현지사정을 가장 잘 아는 택시기사 분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법성토우’라는 식당을 찾았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돌솥굴비(1만원)와 녹차보리굴비(1만5천원)를 주문했는데,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담백하게 간이 된 맛 또한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밑반찬으로 나온 젓갈에 반한 집사람은 아래층의 특산품 매장에 들러 곱창김(2만8천원/속)과 젓갈(병당 만원)까지 푸짐하게 챙겨들고 나왔다. 덕분에 내 지갑은 홀쭉해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