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봉(三岩峰, 196.2m)-깃대봉(172m)-화봉산(155m)

 

산 행 일 : ‘22. 1. 16(일)

소 재 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산행코스 : 지도읍 재래시장↔지도향교(왕복)→읍사무소→화봉정→화봉산→바람풍재→진재→깃대봉→상암봉→정암선착장(소요시간 : 9.99km/ 3시간 2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도(智島, 신안군)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산들. 가장 높다는 삼암봉의 해발이 200m에도 못 미치니 산이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조망이 좋은 것도 아니다. 흙산이라서 내세울만한 볼거리도 없다. 그저 산이 거기 있었기에 찾아갔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등산로 하나는 잘 닦여져 있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을 놓았고, 바닥에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릴 염려까지도 없앴다. 그렇다고 해서 찾아가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르는 산봉우리의 숫자를 헤아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산행들머리는 지도읍 재래시장(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168-5)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서해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서해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해제반도를 지나 지도로 들어선다. 지도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시장(신안군 유일의 재래시장이란다)에 이르게 된다. 차에서 내리니 썰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11시가 넘었는데도 문을 연 가게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매 3·8일에 오일장이 선다더니 저 가게들도 장날만 문을 연다는 얘기일까? 시장의 역사가 67년.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도 읍민들의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풍경일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신안군청의 산행안내도는 들머리를 4곳으로 표시한다. 가장 애용되는 기점은 ‘지도읍사무소’와 ‘점암선착장’. 양 기점을 잇는 종주산행을 하다가 체력이 달릴 경우 봉동이나 용산동으로 탈출하면 된단다. 하지만 실제는 향교나 강정리 등 꽤 여러 곳에서도 산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이 나있었다.

▼ 산행을 나서기 전에 향교(鄕校)부터 들러봤다. 지도향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는 조선 고종 때인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만으로 구성된 ‘지도군’이 새로 생기면서 ‘1군1향교’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양사재(養士齋)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없는 게 특징이라는데, 문이 닫혀 있어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향교는 개교한지 백년이나 된 지도초등학교와 마주보고 있었다. 향교란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요즘의 초·중·고쯤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 풍경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 15분 만에 시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북쪽방향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읍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등 공공기관이 몰려있는 행정타운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 골목의 끝. 양지바른 언덕에는 지도읍사무소가 앉아있었다. 현재의 읍사무소는 수군 만호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왜구를 막기 위해 숙종 8년에 설치했다. 대한제국시기의 지도군청 자리기도 하다. 신안군의 전신 격으로 흑산면에서 고군산면까지 17개 면을 관할했었다.

▼ 읍사무소의 역사는 팽나무(보호수)와 함께 이어왔던 모양이다. 마당 한켠에서 그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는데, 나이가 360살도 더 된단다. 이곳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게 숙종 8년이라니 ‘개소 기념식수(開所 紀念植樹)’쯤 여기면 되지 않을까?

▼ 읍사무소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돌면 일심사가 나온다. 절간 앞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은선대(隱仙臺)와 관왕묘(關王廟)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은선대는 읍사무소 뒤의 소나무 숲. 임진·정유 왜란 때 파병되었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세워진 관왕묘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단다. 그저 일심사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보는 정도라나?

▼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일심사(一心寺)는 자그만 사찰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요사가 전부. 하지만 역사는 꽤 오래 된단다. 압해읍 금산사, 비금면 서산사와 함께 전통사찰(제83호)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절은 300여 년 전부터 관운장의 초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존재해왔단다. 1919년 위령사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법당 및 요사채가 중창되었으며, 현재의 일심사는 1953년에 개명된 이름이다(하지만 기록이 전무하여 창건연대나 규모 등을 확인할 길은 없단다). 그건 그렇고 이 절의 특징은 호국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도량이라는데 있다. 극락전에 한국전쟁 중에 전몰한 군인·경찰을 포함한 호국영령들의 540여 위패를 모시고 있다.

▼ 안내판에 적혀있던 은선대는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1896년 지도군수로 부임한 오행록은 이곳을 ‘좋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지고, 깊이 우거진 풀에선 향기를 내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가를 읊조리게 하는 아담한 정취’가 풍긴다고 적었었다. 그가 말한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산책로를 내고 전망대를 만들어 읍민들의 휴식처를 조성했다.

▼ 전망대에 서면 지도읍(智島邑)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도읍의 역사는 꽤 복잡하다. 백제시대는 고록지현(古祿只縣), 통일신라시대 염해현(鹽海縣), 고려시대에는 임치현(臨淄縣)으로 바뀌며 영광군(靈光郡)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과 나주목에 속했다가 숙종 8년(1682년)에 지도진이 설치되었으며, 고종 33년(1896년) 지도진이 폐지되면서 ‘지도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지도군이 무안군으로 편입되면서 지도면으로 강등되었고, 1969년 신안군과 함께 분리되었으며 1980년 지도읍으로 승격했다.

▼ 산책로 주변의 동백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다음 해 4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지금이 1월이니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적기에 찾아온 셈이다.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 저 동백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해본다.

▼ 초현대식으로 지어놓은 저 쉼터는 무엇을 형상화했을까? 편의성에 스토리텔링까지 보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 공원을 빠져나와 산자락으로 붙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무르다 싶으면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림까지 없앴다.

▼ 심지어는 가로등까지 설치했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산책로를 초호화판으로 꾸며놓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노후 된 시설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작은 흠일 듯. 태양열 전기를 이용하는 전광판이 수명을 다했는데도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 산길이 곱다고 마냥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마주친다.

▼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산불감시초소가 올라앉은 봉우리(앱에 나타난 높이는 103m이다)에 올라섰다. 선답자들은 이곳을 ‘오봉산’이라 적고 있었다. 하지만 국립지리원 지도와 같은 공인된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명봉’이다. 그래선지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 산길은 오봉산을 지나자마자 아래로 뚝 떨어진다.

▼ 안부에 내려서니 삼거리다. 이정표(진재↑ 3.43㎞/ 지도초등학교← 0.28㎞/ 지도읍사무소↓ 0.78㎞)가 가리키는 지도초등학교는 아까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들렀던 지도향교의 옆. 향교를 둘러본 다음 곧장 산자락으로 붙었더라면 금방이었을 거리를 읍사무소까지 되돌아간 덕분에 한참이나 더 걸은 셈이 되었다.

▼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통나무계단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했을 정도로 상당히 가파르다. 호흡을 조절해가며 오르는데 후미대장 일행이 술상을 차려놓고 손짓을 보내오는 게 아닌가. 마침 배도 출출해진지라 체면불구하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여성 산우께서 싸주시는 톳 보쌈을 안주삼아 복분자주와 소주 네댓 잔 얻어 마실 수 있었다.

▼ 사진으로도 모자라 산행기록까지 해가는 나에게 과음은 금물. 불콰해진 얼굴로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서는데, 시야가 열리면서 주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송도와 사옥도, 연도 등 지도의 부속 섬들일 것이다.

▼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벤치도 그 가운데 하나.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하긴 10년도 더 전에 이미 전국단위 ‘섬 등산대회’까지 열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 산경표를 따르는 산꾼들은 이 능선을 ‘봉대지맥(峰台枝脈)’이라 부른다. 영산기맥(榮山岐脈)의 감방산(258.9m) 남쪽 3.9km 지점(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의 서쪽 작은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현경면·해제면을 지나면서 봉대산·검무산·이성산·대월산 등을 일군 다음 지도(智島) 앞에서 그 숨을 다하는 36.3km의 산줄기이다. 그런데 지도가 제방으로 연결되면서 지도의 산줄기(제방→정암선착장) 16km를 봉대지맥에 포함시킨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도톰하게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포토존’ 안내판을 세워놓았을 정도로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정상에는 ‘화봉정(花峰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서너 개의 벤치를 놓아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을 쉬엄쉬엄 가슴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 안내판 앞에 서자 시야가 툭 터진다. 그리고 신안의 자랑거리인 수많은 섬들과. 그 섬들을 둘러싼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걸 배경삼아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하련만 아쉽게도 집사람이 없으니 어이할꼬. 한시라도 빨리 집사람의 무릎이 좋아지길 빌어본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 갯벌의 넓이는 378㎢. 우리나라 갯벌의 15%을 차지하며 이 가운데 144㎢는 신안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나저나 남도의 맛은 곧 바다와 갯벌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신안의 갯벌은 천연 미네랄이 풍부하다. ‘캐나다 동부해안·미국 동부해안·유럽 북해연안·아마존강 유역’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 북쪽으로도 시야가 열린다. 그런데 이게 섬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널따란 들녘이 아니겠는가. 맞다. 누군가는 목포시 보다 2배(79.39㎢)나 넓은 면적이 지도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4,500여명의 주민들은 그 너른 땅에서 논밭을 일구고 김 양식, 천일염을 생산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단다. 특히 드넓은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게르마늄 쌀은 최상의 품질을 자랑한단다.

▼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무인 산불감시탑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봉긋하니 솟아오른 게 제법 봉우리다워 보인다. 삼각점((임자 426)도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능선에 걸터앉은 ‘무명봉’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공인 지도에서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화봉산(또는 꽃봉산)’이란 이름은 신안군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붙여놓았지 않나 싶다.

▼ ‘화봉산’이란 지명은 ‘등산로 안내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조감도(鳥瞰圖)에 주요 지점의 위치를 표시한 다음 지명을 적어놓았다.

▼ 낯익은 표지기들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만산회’. 세상의 산이란 산은 모두 올라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 옆에는 얼마 전 ‘1만 개의 산’을 오른 기념이라며 타월까지 건네주시던 신상호씨의 표지기도 매달려있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을 올라보겠다는 허총무님의 표지기도 오늘부로 그 옆에서 펄럭인다.

▼ 이후로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산길이 이어질 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가끔가다 나타나는 바위들과 나뭇가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지도의 산하가 볼거리라면 모를까.

▼ 5일 후면 대한(大寒). 옛날,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이면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는 소리가 골목골목을 누볐었다. 하지만 산골 출신인 나로서는 망개떡에 대한 추억이 더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 망개나무가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금방 영근 것처럼 싱싱한 채로이다. 팥을 달여 만든 팥소와 멥쌀로 빚은 떡을 살짝 감싸던 싱싱한 잎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 꽃봉산에서 13분. 산길이 왼편으로 급하게 휘더니 능선을 벗어난다. 감정리1구와 장동리를 잇는 임도를 확장하면서 능선을 끊어버린 탓이다. 이로 인해 등산로 일부가 변경되었으나 표지판으로 안내를 하고 있어 길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는 이정표(삼암봉 3.43㎞/ 감정리 0.7㎞/ 지도읍사무소 3.0㎞)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산길은 왼쪽(감정리1구 방향)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열린다. 이어서 동백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새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 이후의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심하지는 않으니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아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면 될 일이고 말이다.

▼ 산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송악(常春藤) 군락을 만나게 된다. 굵직한 나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바위들까지 송악으로 한껏 치장을 하고 있다. 이곳 지도 아니 신안군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맞다. 송악은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늘푸른 덩굴나무다. 그러니 남녘땅 신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암봉을 연상시키는 봉우리도 만날 수 있었다. 바위 사이로 난 길엔 밧줄난간까지 설치해가며 멋을 더했다.

▼ 조금 더 걷자 말라비틀어진 잡초로 뒤덮인 분지가 나타난다. 등산안내도는 이곳을 ‘3개리 분기점’으로 적고 있었다. 감정리와 광정리, 봉리가 이곳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어 내려선 안부에도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바람풍재’란다. ‘바람 풍(風)’자로도 모자란 듯 ‘바람’을 하나 더 붙여놓았다. 하지만 바람은 다른 곳보다 오히려 더 잠잠하다. 후박나무와 소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아늑하기까지 하다. 능선을 횡단하는 길도 나있지 않으니 ‘바람풍재’라는 지명에 걸맞지 않는 상황이랄까?

▼ 능선은 소사나무가 주류이다. 그렇다고 따뜻한 남쪽나라에 어찌 상록수가 없겠는가. 곳곳에서 동백나무나 후박나무로 가득 찬 숲을 만날 수 있다.

▼ 평지나 다름없던 산길이 갑자기 고도를 낮춘다. 그 길을 내려오다 문득 ‘큰산’을 다녀오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깔아놓지 않았단다)를 맹신하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허총무님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던 봉우리가 큰산으로 가는 들머리였다는 걸 산행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나 할까?

▼ 감정리 갈림길(임도)에서 30분. 또 다른 임도인 ‘진재’에 내려섰다. 감정리(왼편)과 봉동(오른편)을 잇는 시멘트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 감정리 방향으로는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장성이나 장흥, 남해와 같은 유명한 편백나무 숲에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코끝을 스쳐가는 향만으로도 이제까지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 진재를 지나면서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제법 가파르지만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힘들다면 밧줄난간에 의지해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다.

▼ 오르막길과의 힘겨룸이 끝나면 산길은 또 다시 고와진다. 이 구간의 특징은 커다란 바위가 제법 많다는 점이다. 덕분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봉동의 들녘과 바다가 빼곰이 얼굴을 내민다.

▼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내리면 깃대봉이다. 이곳에도 등산안내도가 함께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깃대봉에도 정상석은 없다. 대신 정상표지판(깃대봉, 해발 172m)을 세워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형편없다. 빽빽이 들어 찬 잡목들이 시야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양달치봉’으로 가는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잡목으로도 모자라 가시넝쿨까지 훼방을 놓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 깃대봉을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계속하고, 소사나무 사이로 감정리(좌)와 봉동(우)의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참! 사진이 어설퍼서 올리지는 않았지만 ‘두류산(169.7m)’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조선유학의 마지막 성지라는 두류단(頭流壇)이 있다는 곳이다. 1914년 호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항로·기정진·김평묵을 모시고 ‘삼현단’이라 부르다가 최익현과 김평묵의 제자이자 지도 출신인 나유영까지 추가해 모시고 있단다.

▼ 송악의 천국답게 조형미까지 갖추었다. 송악은 다른 나무들처럼 하늘로 뻗을 수 있는 조상의 음덕을 입지 못했다.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이다 보니 저런 모양새로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 깃대봉을 내려선지 20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보면 오늘의 주인공인 ‘삼암봉’을 만나게 된다. 삼암봉의 정상은 그저 평범한 암봉(岩峰)일 따름이다. 기반암 위에 돌출된 바위가 고작인데 그마저도 흙으로 덮여있어 바위봉우리란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 그나마 정상표지판(삼암봉, 해발 196.2m)이 세워져 있어 그 아쉬움을 조금은 메꾸어준다. 참! 삼암봉 정상 어림에서 ‘안산(115.1m)’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함께 산행을 한 유명 산꾼들(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의지의 한국인들이다)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희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하산을 하려는데 숙주 못지않은 모양새를 갖춘 기생식물이 눈에 띈다. 나뭇가지처럼 옆으로 날개를 펴고 있는 게 이색적이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 잠시 후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났다.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봉동 일대의 들녘과 바다. 그리고 파도에 밀려다니는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선답자들은 낙월도와 송이도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미세먼지 탓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 봉동 들녘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바다에는 대·소 포작도와 어의도, 신풍도 등 지도의 부속 섬들이 떠있다. 그 사이에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염전이 들어섰다. 잘 알다시피 이곳 신안군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다. 척박한 땅에 염전이 일구어지고 나서 섬사람들의 생활은 넉넉해졌다고 한다. 하긴 칼슘과 칼륨, 마그네슘 등 미네랄이 풍부한 우리나라 고유의 천일염을 그 어디서 대체할 수 있겠는가.

▼ 조금 더 걷자 규모가 제법 큰 바위지대가 나타났다. 이곳 삼암봉(三岩峰)은 ‘바위가 셋’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했다. 이 일대의 바위가 ‘삼암’이란 지명을 만들어냈지 않았나 싶다.

▼ 길은 집채만 한 바위들 사이로 나있다. 이때 마주치는 바위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기괴하게 생긴 조형미에 송악의 푸름이 더해지면서 자못 빼어난 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아니 가끔은 제법 긴 오름도 있다. 하지만 보드라운 흙길이어선지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소사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바다풍경이 그런 느낌들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 삼암봉 정상에서 25분. 쉼 없이 오르내리는 능선이 지겨워질 즈음 임도에 내려섰다. 이정표는 날머리인 점암마을는 아직도 1km나 더 남았음을 알려준다. 참! 그러고 보니 그렇게나 많다던 ‘춘란(春蘭)’을 산행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유명한 자생지라서 ‘한국 춘란 전시회’까지 열었다고 했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채취꾼들이 휩쓸어가 버린 것일까?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흙길이 아닌 바닥이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심심찮게 조망되는 임자도 방향의 풍경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 바다 건너는 튤립축제로 유명한 ‘임자도’이다. 그 사이의 바다는 드넓은 갯벌. 물이 빠져야 제멋을 내는 곳이다. 이곳 지도, 아니 신안군의 갯벌은 지난해 초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홈페이지에까지 소개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갯벌이다. ‘한국 갯벌은 아주 생산적인 에코시스템’이라며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에 생존하는 미생물들이 해양을 정화하여 많은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하긴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이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람사르습지 등의 명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 임도를 따라 8분쯤 걸었을까 2차선 도로인 ‘봉리길’이 나온다.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읍사무소처럼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이곳이 공식적인 날머리인모양이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점암선착장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걸어야만 한다.

▼ 선착장으로 가는 길. 임자도(엄밀히는 임자도의 부속섬인 수도이다)와 지도를 잇는 ‘임자2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길이 1,135m의 장대 사장교로 임자1대교(길이 750m)와 함께 저 다리가 놓이면서 30분이나 걸리던 뱃길이 3분(승용차로)으로 단축됐다고 한다. 덕분에 섬 주민들은 물론이고 튤립축제나 대광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단다.

▼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가 ‘일(一)’자로 길게 누워있다. 수평선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나직막한 구릉이 길게 펼쳐지는 것이다. 수십, 아니 수백만 년 전 융기 또는 침하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 아닐까 싶다.

▼ 날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잠시 후 24번 국도의 교각 아래에 이르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내려가면 임자도로 들어가는 배들이 드나들던 점암선착장이다. 오늘 산행이 끝난 것이다. 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 민박집, 매점까지 들어선 게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 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인근 공사장의 인부로 보이는 사람들 두엇이 식사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아무튼 오늘은 향교를 다녀온 것을 포함하여 3시간 25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9.99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만만찮은 오르내림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맞은편의 농협여객선터미널은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임자대교가 개통되면서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 뱃길과 관련된 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에필로그(epilogue). 산행을 마치고 지도의 자랑거리인 젓갈타운에 들러볼까 하다가 하도 추워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니 송도항으로 찾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표류여행가이자 표해시말(漂海始末, 정약전 著)의 주인공인 ‘문순득(文順得:1777-1847)’을 만나보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모두 둘러보겠다는 꿈을 갖고 국내·외 여행을 해오고 있는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비록 표류가 가져다 준 여행이었다지만 유구국(流球國 : 現 오끼나와)과 여송(呂宋 : 현 필리핀), 광저우(廣州), 마카오, 그리고 베이징(北京)을 거쳐 3년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를 나는 늘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표해시말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제자였던 이강희가 2년(1918~1919)동안 우이도에 머물면서 저술한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실리면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