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성산(甕城山, 572m)

 

산 행 일 : ‘21. 5. 18(화)

소 재 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산행코스 : 주차장→동복유격대→안성저수지→옹암바위→옹암삼거리→쌍문바위→백련암터→옹성산→옹성산성→쌍두봉→독재삼거리→상부주차장→주차장으로 원점회귀(소요시간 : 7.44km/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높이가 600m에도 못 미치니 분명 야산에 속한다. 하지만 옹성산은 기암괴석만으로도 명산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설 수 있다. 옹성산의 정상은 마치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항아리 옹(甕)’자에 ‘성 성(城)’자를 쓰는 이유이다. 옹성은 또 ‘철옹성(鐵甕城)’의 준말도 된다. 그래선지 이 산의 9부 능선에는 ‘전남 3대 산성’ 가운에 하나라는 철옹산성(鐵甕山城)이 축조되어 있었다. 덕분에 스릴 넘치는 암릉 산행과 함께 선인들이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호국정신까지 되새겨 볼 수 있다. 화순 적벽으로 유명한 동복호의 조망은 덤. 그러니 한번쯤은 꼭 들러보아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옹성산 주차장’(화순군 동복면 안성리 428-2)

호남고속도로 옥과 IC에서 내려와 국도 15호선 동복방면으로 내려오다 신선마을(동복면 안성리) 입구 조금 못 미쳐서 오른편으로 들어오면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승용차는 이보다 한참이나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상부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 옹성산의 들머리는 이곳 신성마을 외에도 독재(화순군 백아면 다곡리)에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열 중 아홉은 이곳 신성마을을 들·날머리로 삼는다.

▼ 군부대가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불멸의 유격혼’이라는 동복유격대의 표지석을 참조하면 되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이 부대는 곁눈질로 만족하고 그냥 지나치자.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

▼ 5분쯤 들어가면 안성저수지. 관개용 저수지로 보이는데 눈길을 끌만한 경관은 갖고 있지 못하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도 없었다.

▼ 오늘의 꽃은 ‘엉겅퀴’로 꼽아봤다. 거친 가시와 당찬 꽃송이가 옹성산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유격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닮았기 때문이다. 꽃말인 ‘경계’나 ‘위급’도 군인들을 연상시킨다. 거기다 가시가 달린 억센 이미지에다 짓밟히면서도 잘 자란다는 특성은 ‘민중의 삶’까지 떠올리게 만들지 않겠는가.

▼ 저수지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갈림길(오솔길)은 그냥 지나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두 번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주차장에서 10분쯤 되는 지점인데 초입에 이정표(옹성산←)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노약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도 그냥 지나치는 게 좋겠다.

▼ 널찍한 임도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사거리’이다. 왼편은 아까 그냥 지나쳤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올라오는 길.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고갯마루를 넘는 직진 길은 유격훈련장으로 연결될 것이다.

▼ 길은 또렷하다. 하지만 ‘군사시설 보호지역’이니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관할 부대장의 허가를 받으라는 경고판이 진입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렇다고 뻔히 아는 등산로를 포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고판 뒤로 보이는 ‘등산로’라고 적힌 팻말이 그 증거물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 거대한 암벽이 떡하니 앞을 막아선다. 옹성산을 에워싼 세 바위봉우리 중 하나인 '옹암(독아지 바위)'이다.

▼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에는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다. 붙잡고 오르라는 듯 쇠파이프로 난간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아까 노약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정규탐방로로 돌아가라고 권했던 이유이다.

▼ 설치된 밧줄에 의지해 바위 위에 올라서면 길은 더 고약해진다. 이젠 밧줄까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위태롭기는 하지만 왔다갔다 해가며 위로 오르는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다만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에 둘이 아닌 네 개의 발을 사용해야만 한다.

▼ 위로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풍경이 변해버린다. 서슬 시퍼런 암벽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가 지나왔던 ‘안성저수지’가 살짝 얼굴은 내민다.

▼ 어렵게 올라선 바위의 위, 흙길로 변하는가 싶던 산길에 더 큰 바위가 불쑥 솟아올랐다. 하긴 옹성산이라는 이름까지 낳게 만든 장본인이 어디 그리 쉽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겠는가.

▼ 이번에도 역시 밧줄에 의지해서 오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밧줄에 매달려 용틀임을 해야만 한다. 개개의 바윗길들이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30분 만에 ‘옹암바위’의 정상에 올라섰다. ‘독아지 옹(甕)’자를 써서 ‘독아지봉(408m)’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둥그스레하게 생긴 이 둥근 봉우리로 인해 산 전체가 ‘옹성산’으로 불리는 것이다.

▼ 시야가 툭 트이는 절벽의 끄트머리로 다가가려는데 경고판 하나가 겁을 준다. 추락 위험이 있으니 등산객의 접근을 금한다나? 그렇다고 조망을 포기할 등산객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이곳에서는 화순의 또 다른 명산이 모후산은 물론이고, 백아산까지 조망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조금 전에 올라온 저점에는 또 다른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추락의 위험이 있으니 통행을 금한다는 것이다. 맞다. 모르고 올라왔으니 망정이지 이곳에서 내려가라고 하면 나 역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겠다. 그만큼 위태위태한 구간이었다는 얘기이다.

▼ 옹암을 지나면서 산길은 고도를 낮춘다. 그리고 300m가량 내려가다 옹암삼거리(이정표 : 옹성산성← 0.8㎞/ 주차장→ 0.7㎞/ 옹암바위↓ 0.3㎞)에서 왼쪽 임도를 따른다. 오른편은 상부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정상 0.9㎞/ 주차장 0.9㎞/ 임도는 표식이 없음)에서는 왼편 자드락길을 탄다.

▼ 옹성바위를 출발한지 15분. 잘 지어진 방갈로형의 산장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는 월봉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1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별장형의 주택 두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니 그마저도 빈집인 모양이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비워두었는지 마당도 웃자란 잡초로 가득하다.

▼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한 분지를 스치듯 지나치자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백련암터↖ 0.1㎞/ 옹성산성↗ 0.5㎞, 주차장 1.6㎞)로 나뉜다. 일단은 옹성산성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그쪽에 옹성산의 또 다른 명물인 ‘쌍문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쌍문바위만 보고 가도 옹성산에 오른 품삯을 건진다는 말도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50m쯤 더 올라갔을까 어른이 넉넉히 들락거릴 수 있는 크기의 구멍 두 개가 뚫린 ‘쌍문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거대한 바위에 쌍으로 뚫린 모양새가 영락없는 문(門)이다. 맞다. 인위로 만든 건 아니지만, 옛날 이곳은 외성 노릇을 하는 세 암봉에서 옹성산 중심부의 내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겸했다고 한다.

▼ 뻥 뚫린 구멍의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다. 그래선지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이도 있었다. 아득한 옛날 솜씨 좋은 석공이 ‘독아지 바위’를 빚은 뒤, 그 여새를 몰아 이곳에다 두 개의 바위 문을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 뒤쪽에서 바라본 ‘쌍문바위’. 고성 상족암과 남해 금산의 쌍홍문을 연상시키는 바위는 얼핏 누렇게 보이기도 한다. 오래된 이끼가 암벽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란다. 자연과 바람, 세월이 선물한 훈장인 셈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백련암터로 향한다. ‘암자터’로 가려면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야만 한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터널이다. 문득 ‘당장의 어려움에 좌절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저런 어둠의 터널을 두고 빛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과정이라고 했었다. 인생의 과정을 빌어 한 얘기겠지만 산길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 대나무 숲을 통과하면 물결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백련암이 있던 자리인데, 세상의 좋은 곳은 모두 절간이 들어앉았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샘만이 이곳이 암자 터였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암자라도 있었더라면 저 샘물을 관리했었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도 목이라도 축이고 갔을 텐데 아쉽다.

▼ 우물 옆에는 향을 피운 향로와 촛대 등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기도터를 관리했던지 삽이며 청소 도구도 보였다. 그만큼 이곳의 풍수가 좋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동복팔경(同福八景) 가운데 하나가 옹성효종(甕城曉鍾). 즉 옹성산에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 암자터를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왔다. 그런데 이정표(옹성산 정상↖ 1.0㎞/ 정상↗ 0.4㎞/ 쌍문바위↓ 0.1㎞)가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만든다. 둘 모두 정상으로 가는데 길이만 서로 따를 뿐인 것이다. 집사람의 눈초리가 오른쪽으로 향하는데도 난 왼편을 고집했다. 산행 거리가 짧은데다 마치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했기 때문이다. 이왕에 왔으니 하나라도 더 봐야 하지 않겠는가.

▼ 8분쯤 더 걸어 능선에 올라서자 이정표(옹성산 정상→ 0.5㎞/ 창랑길↑/창랑길←. 전망좋은 곳/ 쌍문바위↓ 0.6㎞)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뜬금없이 ‘창랑길’이란 지명이 툭 튀어나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이다. 이곳 옹성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설치한 시기가 서로 다른 이정표들이 혼재되어 있어, 지명이나 거리 등의 표기가 제멋대로인 것이다. 새로운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옛 시설물들을 제거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아무튼 창랑길로 들어섰다. 하단에 ‘전망 좋은 곳’이라는 부제까지 달아놓았는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정표는 우릴 속이지 않았다. 50m쯤 들어가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광주시민의 식수원인 ‘동복호’가 널따랗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산허리까지 올라온 동복호의 호안선이 빚어내는 유연한 굴곡이 그윽하다. 조망처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풍광이니 쉬엄쉬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났다. 길가에 써놓은 무덤 끝으로 다가가자 동복호가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줌을 당겨보자 정자 하나가 클로즈업 된다. 동복호가 만들어지면서 고향을 잃고, 선산에 가지 못하는 수몰민들이 매년 모여서 시제를 모신다는 ‘망향정’이다. 저곳은 또 적벽을 대표하는 ‘노루목적벽’을 가장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요 아래 바위절벽이 ‘노루목적벽’이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널따란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옹성산’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곳이 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일 따름이지 옹성(甕城)이란 지명을 낳게 한 명소, 즉 옹기바위(甕岩)와 철옹성(鐵甕山城)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정상에는 ‘2등 삼각점’과 함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해발고도가 572m로 적혀있다. 국제신문에서는 573.5m, 네이버지도는 574m, 거기다 앱이 깔린 내 핸드폰은 600m를 찍고 있다. 그러니 높이가 조금 틀린다고 해서 무슨 문제이겠는가.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숲이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무등산이 있는 북쪽 방향이 살짝 열릴 따름인데 짙은 안개가 그마저도 가려버렸다.

▼ 하산을 시작한다. 옹성산성, 그러니까 조금 전 올라왔던 반대방향의 능선을 탄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간다. 중간에 시야가 잠깐 열리기도 하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구간이다. 참! 정상 바로 아래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정표 : 옹성산성↑ 0.8㎞/ 주차장→ 1.6㎞/ 백련암터↓)이 나뉘기도 했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15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그런데 이정표(옹암바위↑ 1.1㎞, 주차장 1.7㎞/ 주차장→ 1.5㎞/ 옹성산 정상↓ 0.8㎞)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게 아닌가. 옹암바위는 분명 오른편으로 가야 하는데도 곧장 직진하라는 것이다. 직진하면 철옹산성과 쌍두봉이 나오는데도 말이다.

▼ 탐방로는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를 지난다. 자연이 빚어놓은 성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바위절벽을 에둘러 올라서면 사람이 작은 돌을 꼼꼼하게 쌓아올린 철옹산성(전남기념물 제195호)을 만난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힘을 합쳐 쌓아올린 성이 바로 철옹산성(鐵甕山城)이다.

▼ 옹성산은 깎아지른 듯한 옹암과 쌍두봉이 버티고 있는 산이다. 그 뒤쪽으로 철벽같은 자연암벽을 이용한 산성을 쌓았으니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다는 이 성의 이름 역시 ‘철옹산성’. 길이 5,400m(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3,874척이라 했는데 이를 미터로 환산하면 1,223m이다)로 담양의 금성산성, 장성의 입암산성과 함께 전남 3대 산성의 하나로 꼽힌다. 참고로 철옹산성은 옹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해발 275~550m 일대에 분포하고, 축조방식은 부분적으로 약간씩 다르다.

▼ 원형이 남아있는 성벽을 지나면 널찍한 암반지대다. 길고 크다고 해서 ‘장대(長臺)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병사들이 보초를 서는 ‘파수대(초소)’를 두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 그만큼 시야가 툭 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벤치 몇 개를 놓아둔 쉼터로 변해있다. 그리고 파수를 보던 병사들 대신에 등산객 몇이 느긋하게 조망을 즐긴다.

▼ 이곳은 확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독아지 바위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가 하면, 그 너머 멀리에서는 모후산이 우뚝 솟았다. 참! ‘국제신문’은 이 바위 뒤쪽에 있는 암벽을 타고 돌아가면 옹달샘이 나온다고 했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들머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이 살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龍沼). 깊이가 2m에 이르며 사계절 내내 항상 맑은 물이 가득 차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성의 중심부쯤 되는 곳에서 만난 정체모를 바윗돌. ‘이 뭐꼬’라는 스님들이 즐겨 사용하는 화두가 떠오를 정도로 그 용도가 궁금하다. 이곳이 산성이었으니 군사들의 훈련 용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이 고을 현감을 지낸 뒤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한 황진장군이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기도 했다니 말이다.

▼ 조금 더 걸어 내려오니 대나무가 울창한 널따란 분지가 나타난다. 세월이 많이 흘렀겠지만 사람이 살았던 듯 돌배나무와 은행나무, 뽕나무 등 민가의 주위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산성의 역할이 마감되면서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았나 싶다. 청옹산성의 내부가 계곡을 포함해 수량이 풍부한데다 활동공간도 넓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람이 살기에 이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 길은 야트막한 산허리를 돌고 돌아 쌍두봉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능선안부에서 삼거리(이정표 : 주차장→ 1.1㎞/ 옹성산성↓ 0.6㎞, 옹성산 정상 1.4㎞)를 만났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능선 위로도 길이 나있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쌍두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 옹성산의 중심축이랄 수 있는 ‘쌍두봉’을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정표에서 빼버린 길인데도 능선 위로 난 길은 의외로 또렷했다. 철옹산성의 외성노릇을 했을 정도로 서슬 시퍼런 바위봉우리이지만 길이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에 담아둘만한 풍경은 없었다. 그저 뒤돌아볼라치면 쌍두봉의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큼지막하게 다가온다는 것 뿐.

▼ 4분쯤 지나 도착한 쌍두봉(507m)의 정상은 텅 비어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을 계속한다. 거대한 바위사이 굴곡진 틈. 즉 협곡을 연상시키는 산골짜기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긴 계단이 놓여있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놓았을 정도라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구간은 무지막지한 경사에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암벽 때문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오르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암벽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 계단은 내려서는데 만 10분이나 걸렸다. 이어서 3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주차장↗ 0.8㎞/ 북면 다곡리↖ 1.0㎞/ 옹성산성↓ 0.9㎞)가 나타난다. 왼편은 옹성산의 유이(唯二)한 등산로인 ‘독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임도처럼 넓어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탐방로를 따라 10분쯤 더 내려서자 민가(느낌으로 봐서는 절간으로 보였다)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상부 주차장에 이른다. 승용차를 이용했을 경우 들·날머리가 되는 곳이다. 그래선지 등산안내도와 이정표(동복유격대↑ 1.2㎞/ 옹성산 정상→ 2.3㎞/ 옹성산 정상↓ 2.5㎞)는 물론이고, 철옹산성의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유격대 앞 주차장까지는 이제 1.2km를 남겨 놓았다. 15분 정도만 더 걸으면 된다는 얘기이다.

▼ 출발지로 내려가는 길. 군계일학처럼 우뚝 솟은 옹성암봉이 다시 등장한다. 암벽에 타포니 현상이라고 하는 포탄 맞은 듯한 모습을 뒤로하고 안성저수지를 거쳐 동복유격대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1시 40분. 산행을 시작한지 2시 40분 만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7.44km를 찍고 있었다.

▼ 귀경길에 두어 곳의 적벽을 둘러봤다. 천리 길 머나먼 옹성산까지 찾아왔으니 이왕이면 이 산이 만들어내고 있는 비경까지 함께 둘러보라는 산악회의 배려일 것이다. 먼저 찾은 곳은 ‘창랑적벽(滄浪赤壁)’. 길이 날듯이 상승하는 천변에 제법 으리으리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 전망대에 오르면 푸르름이 가득한 천변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창랑적벽(滄浪赤壁)이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냇물은 창랑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이 맑다는 뜻이다. 이 창랑천의 물길이 오랜 세월 깎아 만든 태고의 절벽이 바로 창랑적벽이다. 창랑 말고도 물염(勿染), 장항(獐項, 노루목), 보산(寶山)이라는 또 다른 적벽을 만들었으니 이들을 ‘화순적벽(和順赤壁)’이라 통칭한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 동복에 유배되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7)가 ‘적벽’이라 부르면서 시작된 이름인데, 소동파가 선유하며 노래했던 중국의 적벽에서 빌려왔단다.

▼ 창랑적벽에서 크게 한 굽이를 더 돌면 ‘물염적벽(勿染赤壁)’이다. 길 따라 올라서면 널따란 광장과 함께 수많은 빗돌들이 길손을 반긴다. 물염정전승기, 물염정삼현선생사적비 등 물염정과 관련된 빗돌들은 물론이고, ‘금성 나씨’의 홍보용 빗돌들도 여럿이다. 아니 나씨들 것이 더 우람하다. 물염정(勿染亭)을 세운 송정순이 외손인 나주나씨(羅州 羅氏) 무송(茂松)과 무춘(茂春) 형제에게 정자를 물려주었다고 하더니 그들이 주인노릇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의 건물주들은 조물주의 위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가장 높은 곳은 물염정(勿染亭,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2호)이 차지했다. 호남 8대 정자 중 으뜸으로 꼽는 정자이다. ‘물염’은 조선 중종과 명종조에 성균관전적 및 구례·풍기군수를 지낸 송정순(宋庭筍, 1521~1619)의 호로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몇 번의 관직생활 뒤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정자 내부에는 수십 개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창주(滄洲) 나무송(羅茂松)이 지은 원운(原韻)을 비롯해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매천(梅泉) 황현(黃玹) 등 수많은 객들이 정자와 적벽을 찬하여 남긴 시문들이다.

▼ 정자 아래쪽에는 김삿갓이라 불린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의 시비와 동상이 있다. 삿갓을 눌러쓰고 세상의 ‘염(染)’을 경계한 난고 김병연이 생을 마친 곳이 동복 땅이다. 이곳을 자주 찾아왔던 그는 ‘장유적벽(將遊赤壁) 탄유객무주(歎有客無酒)’라 하여 적벽에서 노닐다 술이 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 물염정에서 내다보는 물염적벽은 우거진 식물들에 뒤덮여 청벽(靑壁)이다. 하지만 이젠 다가갈 수 없는 금역(禁域)이 되었다. 1985년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접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0년만인 지난 2014년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고, 그 덕분에 우린 이렇게 멀리서나마 적벽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그건 그렇고 20대 중반 무렵 유람삼아 이곳 적벽(‘노루목’이었을 게다)을 찾았었다. 당시는 나룻배를 타고 적벽 가까이로 다가가 까마득한 벼랑을 올려다 볼 수도 있었다. 그게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결에 배 맡기고 탁주에 취하여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너른 백사장에서는 모래찜질이나 천렵도 가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