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산(達摩山, 489m)

 

산행일 : ‘17. 4. 18()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과 북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황사주차장미황사달마산작은금샘삼거리대밭삼거리부도전미황사미황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달마산(達摩山)남도의 금강산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호남정맥의 바람재(노적봉)에서 분기(分岐)하는 땅끝기맥이 두륜산을 지난 후 땅끝마을 조금 못미처에서 용솟음치는데, 그 모양새가 금강산에 비견될 정도로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윗길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다소 위험하지만 대신에 조망(眺望)은 끝내준다.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타다가 아무 바위라도 올라설라치면 크고 작은 섬들이 동동 떠다니는 남녘의 다도해(多島海)가 거침없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바윗길을 오르내리는 스릴(thrill)에다 눈터지는 조망을 산행 내내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여러 점이나 지니고 있는 미황사라는 천년고찰(千年古刹)까지 덤으로 가슴에 품을 수 있다. 한마디로 누구나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산이 아닐까 싶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미황사주차장(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247)

서해안고속도로 죽림 J.C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일산교차로(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에서 13번 국도 해남완도방면으로 옮긴다. 해남읍을 거친 후 성매삼거리(해남군 현산면 초호리)에서 77번 지방도로 옮겨 땅끝방면으로 향하다가 가차삼거리(송지면 가차리 840-4)에서 미황사 이정표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미황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은 미황사의 일주문 앞에 조성되어 있는데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미황사로 오르는 일주문을 지나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액(扁額)이 보이지 않는다. ‘달마산 미황사라는 문패를 달고 있어야하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미황사까지는 긴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만만찮은 오름길이나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절을 위함이 아닌 산행을 위해 경내(境內)에 침입한 참이니 어찌 그런 불평까지 할 수 있겠는가.



3~4분쯤 올랐을까 현판이 없는 전각(殿閣) 하나가 나타난다. ‘사천왕을 모십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새로 지어 놓고 안에 안치할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시주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등산로는 이 전각의 왼편으로 열린다. 산행을 위해 경내를 침범하는 것이 못내 죄스러웠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을 방해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참 들머리의 동백나무 아래에 등산로 팻말과 함께 달마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는 걸 잊을 뻔 했다. 오늘의 나처럼 길이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는 한번쯤 살펴보고 난 뒤에 출발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절을 비껴서 들어서는 산길은 울창한 숲에 가려 어둑어둑하다. 그리고 묵묵한 절의 분위기를 닮은 듯 고요하다. 하지만 방금 손질을 해놓은 것처럼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이라고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전라남도 차원에서 정비를 해놓은 모양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이란 전라남도가 백두대간의 지맥을 잇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한편, 남도의 오랜 역사와 문화자원, 농어촌을 체험하며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남도 오백리 역사 숲길'의 해남구간( 59.8km)이다. 이 둘레길은 해남 땅끝에서 시작해서 강진, 영암, 화순, 곡성을 거쳐 구례의 지리산자락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500리에 이른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4분쯤 걸으면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헬기장0.6Km, 달마산 정상 1.1Km/ 대흥사20.3Km/ 미황사0.2Km)를 만나게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과는 이곳에서 헤어진다. 그 길은 대흥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조금 지나면서 산길은 좁아진다. 하지만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절 뒷산에 위치한 승려들의 산책로일지니 잠시나마 그들을 닮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들에 참선하는 마음을 실어본다. 그렇게 9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달마산 정상0.8Km/ 문바위재0.7Km/ 미황사0.6Km)가 나타난다.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쪽은 주능선으로 바로 붙는 등산로인데 너덜이 많고 묵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코스를 선택할 경우 산행시간이 너무 짧아져 버리는 단점도 있다.



삼거리 바로 위에는 헬기장이 있다. 축대까지 쌓아가며 조성을 해놓았지만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았던지 웃자란 잡초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발걸음이 고도(高度)를 높여감에 따라 경사가 제법 가팔라진다. 그리고 오솔길이 사라지면서 바윗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너덜길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계단 형태로 늘어서면서 길도 조금씩 더 가팔라져 간다.



그러다 문득 길 왼편에 바위 하나가 툭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뭔가 색다른 게 있을까 해서 길옆으로 벗어나본다. 그러데 이게 웬 걸! 달마산 서쪽 자락의 품에 오롯이 담겨있는 미황사가 시선을 사로잡는 게 아닌가. 땅끝의 오지(奧地)에 들어앉은 사찰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덜퍼덕 주저앉아 풍광에 젖어보고 싶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는 길에는 이런 멋진 전망대를 두어 번 더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곳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시 위로 향한다. 너덜길은 언제부턴가 바윗길로 변해있다. 노약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곳곳에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힘이 부칠 경우 붙잡고 오르라는 모양이다. 그렇게 10분쯤 더 오르면 달마산의 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만이다. 너덜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케언(cairn, 돌탑)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를 형상화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달마봉(불썬봉)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완도의 숙승봉과 해남 북일면 좌일산에서 횃불을 이어받았단다. `불썬봉이란 이름이 붙게 된 연유이다. `불을 썼던(붙였던) 봉우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곳 봉수대는 산 아래 사람들이 극심한 가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정상표지석은 돌탑(石塔, cairn)보다 조금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그런데 달마산이 아니라 달마봉이란다. 옛날에는 불썬봉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달마산은 요 아래에 있는 관음봉에서 이곳을 거쳐 도솔봉에 이르는 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왕에 정상에 올랐으니 달마산에 대한 자료나 좀 살펴보자. 아쉬운 점은 현재 지명인 달마산(達馬山)이 옛 문헌인 `해동여지도`(해남)에는 달마산(達磨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달마산(達摩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한자가 각기 다르고, 달마대사의 달마(達摩)와도 다르다. 이에 대해 현재의 산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한자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는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자는 불썬봉을 불선(佛仙) 또는 불성(佛聖)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황사 스님들에게는 물론 달마봉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뾰족뾰족한 기암이 등줄기를 따라 줄지어 솟아올랐고, 그 너머로 둥글게 내보이는 푸른 다도해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완도가 전체 모습을 드러내고 소안도와 청산도가 그 뒤를 잇는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산중턱에 자리 잡은 미황사가 단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멀리 바다 건너에는 진도를 위시한 수많은 섬들이 널려있다. 사뭇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한 풍광(風光)이다. 너무 좋다보니 다른 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래서 부산일보의 취재기사를 옮겨본다. ‘어엿한 일망무제의 풍경이 사방에 펼쳐진다. 북쪽으로 두륜산의 멧부리가 이쪽으로 덤벼들 기세다. 동쪽으로 완도 상황봉이 우뚝하고 완도대교가 바다 가운데로 획을 긋는다. 서쪽으로 보이는 진도는 구름에 가려 어슴푸레하다. 남쪽 땅끝마을 일대에 햇살이 소복하다.’



바람재 방향 능선, 관음봉인지 아니면 농바우봉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도 역시 서슬 시퍼런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쪽으로 갈 경우 땅끝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시작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송촌마을로 연결된다.



이정표(도솔봉주차장5.9Km, 대밭삼거리 2.60Km/ 승촌14.1Km/ 미황사1.4Km)가 가리키고 있는 도솔봉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의 암릉은 도솔봉까지 약 8Km 구간에 걸쳐 그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이어서 산줄기는 땅끝(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 이르러 그 숨을 다한다. ! 정상에서 살짝 내려서면 양지바른 곳에 테라스(terrace)처럼 평지가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어대던 돌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는 따스한 쉼터를 만들어준다. 이 쉼터 이후부터는 바윗길이 이어지니 식사 및 휴식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달마산 정상에서 땅끝 방면으로 흘러가는 능선은 공룡의 등짝처럼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가파른 구간이 길게 이어지는 곳은 없지만 내리고 오르는 바위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게 커서 힘을 써야 하는 곳도 제법 많다. 바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정신없는 사이에 샛길로 잘못 들어서는 경우도 있으니 길의 흔적을 잘 쫓아 걸어야 한다. 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이어지므로 산행을 하는 방향의 정면에서 좌우로 30도 이상 꺾이는 곳은 거의 없다.



능선을 걷다보면 광활한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푸른 물결은 저 멀리에서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허물고, 푸른 빛깔도화지에 오밀조밀하게 박힌 섬들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는다. 한달음에 물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바다가 가깝다. 달마산은 바다와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을 만큼 알맞은 위치에서 몸을 키워왔던 모양이다.



뒤돌아본 달마산 정상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하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수려한 암봉, 그리고 눈만 들면 푸른 바다가 훤하다. 산자락의 숲은 그윽할 뿐 높지 않은 게 특징이다. 덕분에 기이하게 생긴 암봉들이 여과 없이 그 속살들을 보여준다. 내가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달마산은 산악미가 넘치는 산이다. 들쑥날쑥한 바위꼭대기에 올라섰다가 에돌았다가 다시 올라 서 기암절벽을 타고 가야한다. 어떤 곳은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내려야 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낭떠러지 위를 걸어야만 한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려 때 이곳 미황사에서 머물면서 무외스님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산행을 이어간다면 산행의 재미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upgrade) 될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얼마나 길었던지 중간에 방향을 틀고 나서야 아래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에는 밧줄을 이용해서 오르내렸을 것 같은데 만만찮은 코스였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게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주변의 경관에 도취해있는데 어찌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있겠는가.



계단을 내려서면 오래 묵은 이정표(도솔봉/ 불썬봉) 하나가 나타난다. 진행해야할 도솔봉은 왼편방향이란다. 하지만 오른편 오르막길에도 선답한 이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마치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멋진 산길이 열려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오른편으로 향한다.



바위와의 힘겨운 씨름을 치르고 난 뒤에야 위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막상 오르고 나니 암벽이 앞을 탁 막아버린다. 다시 내려갈 일이 심난한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내지르는 환호성이 들려온다. 다가가보니 집채만한 바위들이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에 작은 통로가 있다. 상체를 숙이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몸이 큰 사람은 거의 앉아서 걸어야할 정도로 좁고 불편한 문이지만, 달마산 기암괴석의 한 중앙을 관통하는 맛은 놓치기 아까운 묘미다. 굴은 반대편 산자락으로 길을 이어준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119구호지점표지판(2-7)’에 현 위치를 문바위 뒤편으로 적고 있는데, 이곳을 이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바위를 지나서도 크고 작은 오르내림은 반복된다. 이 또한 바윗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곳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달마산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놀래 킨다. 우선 등줄기를 따라 줄지어 솟아오른 기암괴봉(奇巖怪峰)들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하고, 그 기암괴봉을 요리조리 돌아서거나 빠져나가고 혹은 올라설 때마다 변화하는 풍광에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날카로운 암봉이 위압적인가 하면 바위를 끼고 돌아서는 사이 다도해가 풍경화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고, 또 한 모퉁이 돌아서면 전형적인 내륙 풍광으로 바뀐다.





산등성이를 따라 걷는다. 하늘 아래를 걷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달마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25분 남짓되면 삼거리(이정표 : 도솔봉주차장 5.4Km/ 미황사 1.0Km/ 달마산정상 0.5Km) 하나를 만난다. 이정표는 이곳을 작은 금샘삼거리이라고 적고 있다. 미황사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볼거리들로 넘치는 능선을 벌써부터 벗어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물맛이 좋다고 알려진 금샘을 찾아 주위를 서성거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금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바위벽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다는데 아무래도 속세(俗世)의 때를 탄 중생(衆生)들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단다. 바위와 바위틈 사이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있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작은금샘삼거리 근처에는 `꼭꼭 숨겨둔 비경들이 널려있다. 미황사에서 올려다볼 때 대웅전 뒤로 보이던 수석(壽石)을 닮은 거대한 바위들인데, 깎아놓은 것처럼 여러 개의 바위기둥이 솟구쳐 있다. 툭툭 솟아오른 바위기둥들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진다.



바위 사이로 길이 있다. 작은 바위들을 잡고 오른다. 길은 거칠다 못해 험하다. 몸을 비틀어서 올라야 하고, 다리를 쭉 뻗어서 내려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끔은 능선으로 난 길이 보이기도 한다. 길이 있으면 들어서야 하는 법, 몸을 비틀어 올라서니 눈앞이 열린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봄의 들녘이 펼쳐진다. 사월인데도 봄은 벌써 무르익었다.




바위들은 딱딱하면서도 무척 미끄럽다. 그리고 대개 하얀 색깔을 띠고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눈이 쌓여있는 것 같이 보이기 한다. 그게 다 규사의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석질 또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차돌(산돌)성분을 하고 있다. 실제로 바위를 오르내리다 보면 곳곳의 바위에서 작은 수정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석영이 주성분인 석질의 영향으로 금샘이 빛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추론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또한 그들은 금샘의 효능도 석질에서 찾고 있다. 규암 즉 석영이 많이 나오는 곳에서 게르마늄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 게르마늄이 물과 이온 교환을 통해 산소를 공급하면서 샘물의 신선도를 유지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작은금샘 삼거리’(달마봉주차장 5.3Km/ 미황사 1.1Km/ 달마산 정상 0.6Km)를 만난다.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참고로 `금샘은 말 그대로 금빛을 두른 채 반짝이는 신비의 샘이다. 작은금샘과 큰금샘이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는데, 석영의 주성분인 석질이 연출해내는 금빛은 보는 순간 환상에 젖을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윗길의 사나움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누그려졌다. 그렇다고 암릉의 모양새까지 볼품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까보다 조금 섬세해졌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바닥에 흙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바위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산길은 그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나있다. 바위를 에도를 때마다 시야가 열리면서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달마산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산처럼 나무숲속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해안경관을 보면서 걷는 다는 장점 말이다. 단조로운 산타기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고, 암릉 보행이지만 걸음을 빠르게 할 수도 있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암릉, 저 멀리 보이는 게 떡봉일 것이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건 도솔봉일 테고 말이다. 시선(視線)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이번에는 남녘의 다도해(多島海)가 눈에 들어온다. 미세먼지 탓에 조금 흐릿하긴 하지만 건너편 완도를 사이에 두고 강처럼 바다가 흐른다.



대밭삼거리 조금 못미처에서 또 다른 암봉이 멋진 경관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귀래봉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암봉은 바람에 실린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전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멋진 풍광이다.



그렇게 25분 쯤 진행하면 대밭삼거리’(이정표 : 도솔암 2.9Km/ 미황사 부도전 0.8Km/ 달마산 정상 1.2Km)에 이른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도솔암에 이를 수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세 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도솔암은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에 차곡차곡 돌을 쌓아올려 다진 터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작은 암자(庵子)이다. 도솔암은 의상대사가 미황사를 세우기 전에 수행정진하려 지었던 암자라 한다. 정유재란 당시 사라지고 2002년 오대산 월정사에 있던 법조 스님이 새로 지었단다. 원효대사와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했으며 서옹스님과 청화스님도 도솔암에서 참선정진을 했다고 하니 예사로운 터가 아닌 듯싶다. 아무튼 기암괴석으로 이어진 바위병풍의 꼭대기에 절묘하게 세워져 있는 데다 땅끝 일대와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추노,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의 드라마와 각종 광고 촬영의 배경이 됐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도 드라마, 영화 등의 장소 섭외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미황사로 내려가는 길은 두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랗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험상궂던 바위들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무척 편한 내리막길이라는 얘기이다. 그저 달마산의 암릉을 오르내리며 감탄해마지않았던 아름다운 경관들을 되새김질하며 내려가기에 딱 좋은 코스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서면 특이한 곳에 자리한 부도전(이정표 : 대밭삼거리 0.7Km/ 달마산 정상 2.3Km))에 이른다. 부도전()은 절의 입구에다 모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곳 미황사 부도전은 그런 곳이 아니다. 대웅전을 지나서 절 뒤쪽, 산길을 한참 들어간 곳에 그것도 수십 기의 부도를 한꺼번에 모셔놓았다. 본사급이 아닌 작은 말사에 32기의 탑과 부도가 있다는 것도 의외이다. 한때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사세가 컸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부도(浮屠)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또한 이들 부도에서는 게, 거북, 한쪽 발을 들고 서 있는 새, 방아찧는 토끼, 노루, () 등 다양한 문양(紋樣)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문짝을 그려놓은 것도 있다. 문짝은 문비형이라고 해서 하나의 을 연 고승의 부도탑에서 발견된다. 이 부도의 주인은 설봉당으로 서산대사의 4대 법손이란다. 초의선사의 그림 스승이었다는 나암 시연선사의 비에는 이슬람의 아라비아문자 같기도 한 용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부도전 옆에는 부도암(浮屠庵)이라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암자의 앞마당에는 거대한 비석(碑石) 하나가 버티고 있다. 얼마나 컸던지 우물처럼 깊게 파고 그 안에다 모셔놓았다. 미황사(美黃寺)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인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란다. 미황사가 725년에 한 배가 산 밑의 포구에 닿아 살펴보니 그 안에 화엄경 등의 경전과 불화가 들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의조화상이 소가 경전을 싣고 가다 눕는 두 곳에 각각 통교사와 미황사를 세우라는 꿈을 꿨고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미황사의 이름도 거기에서 연유하였음을 밝혔다. 이어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한 가섭마 등과 축법란의 사유와 송대 문인의 불교와의 관계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숙종 18(1692)에 민암(閔黯)이 짓고 낭선군(朗善君)이 썼다. 비의 상태가 마모가 심해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후면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전면의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글을 쓴 민암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를 이상하게 모셔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미황사로선 죽임까지 당한 중죄인 민암의 이름을 숨기고 싶었을 수도 있었겠기에 하는 말이다.



부도전 이후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널찍한 임도(이정표 : 미황사0.6Km/ 도솔암4Km/ 대밭삼거리0.8Km, 작은금샘 1.1Km)를 따른다. 이 길은 미황사 천년역사 길이다. 해남군에서 복원 해놓은 둘레길인 땅끝 천년 숲 옛길1구간으로 땅끝에서 미황사 부도전까지 이어지는데 달마산의 산중턱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길은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전파될 때 이 길을 통해 황소가 불상을 운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부와 아낙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던 이 길은 반세기전(半世紀前) 도로가 뚫리면서 잊혀졌다가 얼마 전 다시 정비되었다. 길은 대체로 완만하며, 편백나무 숲도 지나고, 너덜길도 지나가면서 이어진다. 대체로 볼거리는 많지 않으나 호젓해서 좋은 길이다. 불공을 드리러 오는 민초들이나 구도의 길을 찾는 스님들이 걷던 길이니 구태여 아름다울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곧 눈일지니...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난다. 부도암에서 기르는 듯한 개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서두르지 않고 우리 부부의 속도에 맞춰가며 말이다. 나물을 좋아하는 집사람이 길가에 앉아 쑥이라도 캘라치면 개 역시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길을 나서면 어김없이 앞에 나타나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미황사주차장(원점회귀)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미황사(美黃寺)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하지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주변 경관을 감상하느라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갈 수도 있으나 미황사에 들러보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이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에 있는 절이다. 서기 749년 의조 스님이 창건했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문화재로는 대웅보전(보물 제947)과 응진당(보물 제1183)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명부전과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세심당, 향적전 등이 절마당을 가운데 두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아무튼 절간 마당에 서면 수더분하게 생긴 대웅보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이 마치 병풍처럼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풍경이 흡사 한 폭의 수묵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달마산은 우뚝한 기암(奇巖)과 거대한 수석(壽石)들을 수없이 세워놓았다. 산과 가람의 어울림, 그리고 웅장한 조화가 편안하기만 하다.



미황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에 돌배 한척이 땅끝마을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려 살펴보려고 가까이 가면 번번이 멀어져갔는데, 의조스님이 기도를 올리자 돌배가 바닷가에 와서 닿았으며 배 위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날 밤 의조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와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으로서 경전(經典)과 부처님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聖像)을 봉인하라고 일렀다. 배에서 나온 소의 등에 경전을 싣자 소가 한 번 눕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걷다가 달마산 산골짜기에 이르러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소가 처음 누운 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영영 누운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의 ''는 소의 울음소리에서 따왔고, ''은 금인의 황금빛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미황사 창건설화는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南方傳來說)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자하루(紫霞樓) 계단을 내려서니 가지를 축 늘어뜨린 홍매화를 배경으로 서있는 달마대사가 중생(衆生)을 맞는다. 이곳 미황사는 달마대사와의 인연을 주장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렇다면 이곳 달마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거론해보자. 고려 때의 일이다. 중국의 사신이 해남 땅끝으로 오더니 산 하나를 가리켰다.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인가.’ 주민들은 `그렇다고 했다.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행하고 그 산을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만한 땅이다.’ 그렇다. 달마산 기슭에 자리한 미황사의 옛 기록들은 달마가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 땅끝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계시는 곳이라 소개하고 있고, 달마산이라는 이름 유래 또한 그러하다. 중국에 건너가 선종을 창시한 달마는 모함을 받고 죽음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달마가 죽은 지 3, 소문이 퍼진다. 부처의 몸이 되어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꿰어 차고 서천(인도)으로 갔다는... 달마가 인도로 갔다는 게 널리 알려진 달마 전설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달마가 이곳으로 온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달마가 정말 해남으로 왔을까?


월랑산(月朗山, 458m)-태청산(太淸山, 593.3m)-장암산(場岩山 481.5m)

 

산행일 : ‘16. 9. 10()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대마면·묘량면과 장성군 삼계면·삼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깃재바위봉월랑산몰치재태청산마치재장암산매봉재석전마을(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세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들은 있다. 장암산은 온전히 흙으로만 이루어진 구릉(丘陵)형의 산인데 비해, 월랑산과 태청산은 정상 어림이 바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태청산은 단단하면서도 모가 난 바위들이 널려있어 혹시 바위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할 정도이다. 모두가 육산이다 보니 태청산의 정상을 제외하고는 눈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다. 조망(眺望) 또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트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단 트이기만 하면 그 정도는 끝내준다. 겨우 태청산과 장암산에 불과하지만 이 두 곳에서의 조망은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얘기이다. 영광과 장성의 너른 들녘은 풍요로움이 넘치고 그 너머로 펼쳐지는 서해바다는 아득하기 짝이 없다. 특히 태청산에서 내려다보는 상무대는 의외의 볼거리로 작용한다. 웬만한 군사시설들은 사진촬영까지도 금지되는데 비해 이곳은 전망대까지 만들어 조망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산길이 곱다는 것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해서 걷는데 전혀 부담이 없다. 거기다 철쭉을 심고 각종 편의시설들을 짓는 등 공원(公園)에 가깝도록 가꾸어 놓았다. 가족 산행지로 추천하고 싶은 산이라는 얘기이다. 이때 등산로 정비가 일절 되어 있지 않은 월랑산은 제외시켜야 한다. 지맥(支脈)을 답사하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월랑산은 뺀 채로 산행계획을 짜는 게 좋을 듯 싶다.


 

산행들머리는 깃재(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여 23번 국도를 타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816번 지방도로 옮긴다. 잠시 후 장보사거리(영광군 대마면 원흥리)에서 좌회전하여 계속해서 816번 지방도를 탄다. 대마면 소재지(월산리)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성산리교차로(대마면 복평리)에서 오른편 734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깃재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깃재는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와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의 경계이자 군()의 경계선이 되는 셈이다.




산길은 깃재산장에서 삼계면 방향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필암서원이정표(홍길동생가지 2.5km/ 축령산휴양림 6.3km/ 필암서원 20.4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편은 고성산(古城山 546.7m)으로 가는 길이니 참조한다. 참고로 고갯마루에는 깃재산장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영산기맥(榮山岐脈)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면서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던 곳이다. 하지만 그런 낭만은 옛 추억 쯤으로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마당이 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기척까지 느낄 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문을 닫아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산기맥(榮山岐脈)이란 호남정맥의 내장산 새재 부근 (652m)에서 분기(分岐)하여 영산강의 북쪽 울타리 노릇을 하면서 이어지다가 목포 앞 바닷가인 다순금 마을에서 서해바다로 가라앉는 도상거리 약 159.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입암산과 방장산, 문수산, 구황산, 고산, 고성산, 월랑산, 태청산, 장암산, 칠봉산, 불갑산, 영태산, 곤봉산, 승달산, 국사봉, 유달산 등이 마루금을 이루는 주요 산들이다.



산길은 일단 또렷하다. 누군가 일부러 손질을 해놓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을 접고 만다. 웃자란 잡초와 가시넝쿨이 산길을 뒤덮고 있는 구간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10분 조금 못되어 송전탑(送電塔, 68)이 버티고 있는 첫 번째 봉우리를 오르고 난 뒤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능선의 좌우로 농가나 태양광발전소가 보이는 등 나지막한 동네 뒷산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부근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두 번째 만나는 송전탑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가에 줄기가 빨갛고 포도처럼 생긴 열매가 열린 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미국자리공(Phytolacca americana)’이다. 19506·25전쟁 때 미국에서 들어온 귀화 식물로서 열매와 뿌리에 독성을 지니고 있어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며, 동물이 열매를 따 먹으면 죽기도 한다. 들어오지 말았어야 할 것이 엉겁결에 묻혀 들어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뿌리를 탕으로 만들어 소화기나 신경계, 비뇨기 등의 질환을 다스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독성이 강하다고 하니 의사의 처방이 전제되어야 할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길은 사나와진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 거기다 넝쿨식물들까지 산길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그러다보니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곳도 생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의해서 살펴볼 경우 길의 흔적을 찾아낼 만큼은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등을 찾아가며 진행하면 된다. 물론 진행속도가 조금 늦어지는 것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30분쯤 진행하다보면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널려있는 작은 봉우리를 넘게 되고,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진 월랑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만이다. 월랑산(月朗山)달 월()’자에 밝을 랑()’자를 쓴다. ‘달빛이 밝다는 뜻이니 인근에서 가장 높게 솟아오른 산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가장 먼저 달빛이 비춰야 가장 밝게 보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 사연이 요 아래에 있는 월산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이어졌을 테고 말이다.



월랑산의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아래에서 볼 때에는 분명히 바위산으로 보였기에 때문이다. 아무튼 서너 명의 서있기도 버거울 정도로 비좁은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만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하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산봉우리의 이름과 함께 적어 놓은 코팅지도 보인다. 지맥(支脈)을 걸을 때 심심찮게 보이던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걷고 있는 이 길도 영산기맥(榮山岐脈)의 한 구간이다. 정상에서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버리는 이유이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가 없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곧바로 직진할 경우 남산리로 연결되는 하산코스, 태청산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초반부터 거칠기 짝이 없다. 경사(傾斜)가 심한데다 길의 흔적까지도 희미하다. 정보가 없이 내려섰을 경우 방향을 잘못 잡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딱 좋은 구간이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왔을까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광활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름대로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런 숲은 산행을 하는 동안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깃재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 6.3Km만 더 가면 축령산휴양림이 나온다는 이정표가 보였었다. 광활하기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곳인데 독립운동가 출신인 고() 임종국 선생이 조성한 숲이다. 그는 1956년부터 20년간 사재(私財)를 털어 596ha의 임야에 253만 그루의 편백나무와 삼나무만을 심고 가꿨다. 양잠 등으로 모은 상당한 재산도 모자라 빚까지 져가며 조림(造林)을 계속했다고 한다. 60년대 말의 혹독했던 가뭄 때에는 온 가족이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단다. 아무튼 그의 신념이 이곳까지 미쳤던 모양이다.



잠시 후 몰치재에 내려선다. 화산리(장성군 삼계면)와 남산리(영광군 대마면)를 잇는 고갯마루인데, 다음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들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서는 군감뫼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태청산3.3Km/ 추모공원0.9Km)를 만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월랑산은 지맥(支脈)을 하는 사람들이나 오르는 산이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임을 밝힌다. 참고로 왼편의 화산리에는 장성에코힐이라는 레저단지가 새로 생겼다. 편백나무 숲속에다 수영장과 눈썰매장, 캠핑장, 방갈로 등을 갖춘 가족단위 휴양시설인데 요즘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고개 오른편으로 길이 나있기에 다가가보니 널따란 임도와 연결된다. 초입에는 태청산 등산로 안내도와 이정표(태청봉 3.30Km, 태청산주차장 3.16Km/ 월산리 4.45Km)까지 세워 놓았다. 안내도를 보면 구태여 산길이 아니더라도 마룻금과 나란히 난 임도를 이용해서 태청산 정상에 오를 수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는 없다. 편한 길을 버리고 고된 능선길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이제부터 길은 더 없이 좋아진다. 널찍하고 정비까지 잘 되어 있다. 특히 편백나무 숲이 일품이다. 좌우에서 번갈아가며 편백나무 숲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에코힐이라는 레저단지까지 요 아래에 생겨났나 보다.



담소(談笑)를 나누면서 걸어도 좋을 만큼 널찍한 산길이 계속된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평지 수준으로 완만하다. 그리고 길가는 온통 편백나무 천지, 참나무 등의 잡목이나 일본이깔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도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편백나무 숲이 계속된다. 한마디로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산길이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정제된 산소를 듬뿍 마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숲길을 걷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은 편백나무 숲이라고 할 수 있다. 편백나무가 가장 많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내뿜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길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색(思索)을 시작하게 된다. 사색하기 싫은 사람들도 별 수 없다. 걷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사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 한동안 가슴을 짓눌러오던 고민 한 조각은 해결 된지 이미 오래이다.



사색을 즐기며 10분 정도를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태청봉2.6Km/ 산림도로0.1Km/ 군감뫼0.8Km)를 만나게 되고, 또 다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또 다른 갈림길, 몰치재에 이른다. 십자(十字) 안부인 이곳에는 이정표(태청봉1.91Km/ 몰치입구0.36Km/ 대화레저관광농원(장성 에코힐의 다른 이름이다)1.50Km/ 군감뫼1.39Km) 외에도 돌로 만든 벤치까지 놓아 쉼터의 기능을 겸하도록 했다. 편백나무 향기라도 맡으며 쉬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후로도 편백나무 숲은 계속된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산길이 가팔라진다. 그리고 곧이어 봉정사 갈림길’(이정표 : 태청산1.23Km/ 봉정사1.42Km/ 몰치0.58Km)을 만난다. 지도에 표기된 537.1m을 오르고 싶다면 이곳 삼거리에서 봉정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난 우회(迂廻)하기로 한다. 잠깐의 다리품만 팔면 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산의 사면을 따라 깔끔하게 데크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데크길이 끝나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태청봉 1.18Km/ 봉정사 1.39Km/ 몰치 0.63Km)를 만난다. 537.1m을 올랐을 경우 내려오게 되는 길인데, 육군보병학교에서 별도의 이정표를 하나 더 세워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또 다시 완만해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길가는 어른의 키만큼이나 자란 산죽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현재는 사용을 하고 있지 않은 듯 잡초들만 무성하다.



잠시 후 진행방향에 태청봉이 나타나는가 싶으면 사각의 정자가 길손을 맞는 너른 공터(이정표 : 태청봉0.28Km/ 산림도로0.78Km/ 몰치1.63Km)를 만난다. 이어서 또 다른 이정표(태청봉0.19Km/ 때깍바위0.04Km/ 몰치1.56Km), 오른편으로 샛길이 나뉘는 것은 조금 전과 같으나 명주실이 통과한다는 때깍바위를 표기해 놓은 걸로 보아 내려가는 길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짧은 거리이긴 하지만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리고 그 끝에는 헬기장이 있다. 이정표(태청봉 0.15Km/ 대화관광농원·봉정사)와 등산안내도까지 갖춘 이곳에서는 아시아 최대의 군사교육기관이라는 상무대가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그걸 보려고 지체할 필요는 없다. 조금 후 정상에 오르면 똑 같은 풍경을 더 넓고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데크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영광군에서 가장 높다는 태청산이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10분 만이다.



멀리서 봤을 때 흙산이었던 태청산이 정상에 이르자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 세를 맘껏 뽐내고 있다. 여러 개의 바위를 모아 만들어 놓은 듯한 정상에는 그런 특징을 살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커다란 정상석을 두 개나 세워 놓았다. 그 외에도 삼각점(고창 469, 2010재설)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태청산은 석태산(石太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산의 정상에 큰 바위들이 널려 있다고 해서란다.



정상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목적이 의외이다. 군사시설인 상무대(尙武臺)를 보다 잘 조망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군사시설이긴 하지만 교육기관이라서 통제장치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상무대는 광활하다. 아시아 최대의 군사교육기관다운 규모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무대만 조망되는 것은 아니다. 지평선을 닮은 장성과 영광의 너른 들녘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은 풍요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곳 민초(民草)들의 온순한 심성의 근원이다. 산들에 대한 조망도 뛰어나다. 영광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답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진행방향에는 장암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답게 손짓하고 있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이 산줄기를 이어온 월랑산과 고성산 너머로 방장산 내장산이 뚜렷하고, 뒤돌아보면 남쪽으로 장암산 너머로 불갑산이 달려간다. 서쪽으로는 영광의 시가지와 멀리 서해바다가 아련하다. ‘태청이란 산의 이름처럼 크고 광활한 조망이다.



기암괴석과 조망 등 구경거리가 많은 정상이지만 눈에 거슬리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절벽에 그려진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린 당사자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겨야 할 경관에 자기만의 표식을 한다는 것은 도리어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거리가 아닐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30m 정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이정표(마치1.28Km/ 산림도로0.94Km/ 태청봉0.03Km)가 가리키고 있는 마치쪽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이정표(마치 1.18Km/ 태청봉 0.13Km)를 만난다. 이곳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맞은편으로 곧장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난 희미한 길이 보이지만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삼거리를 만난다. 지자체에서 세운 이정표(마치 0.71Km/ 태청봉 0.60Km)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육군보병학교에서 세운 이정표를 보면 왼편으로 1.5Km쯤 떨어진 지점에 법당이 있단다. 아무래도 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설인 모양이다.



잠시 후 거대한 바위벼랑을 만난다. 산길이 벼랑을 피하고 있어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저 벼랑 중간에 제법 너른 공간이 있으니 잠시 쉬어가는 곳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조망도 트이는 편이고, 거기다 약간의 스릴까지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봉을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엄청나게 가팔라져 버린다. 곧장 내려설 수가 없어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는 것쯤이야 다른 곳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곳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안전로프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부여잡지 않고는 오르내리기가 부담스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7분쯤 내려서면 성황당 터가 있는 마치재에 내려서게 된다. 해발 350m인 마치재는 왼편(동쪽)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와 오른편(서쪽)에 영광군 대마면 삼효리를 있는 고갯마루이다. 태청산 정상에서 25분쯤 걸렸다. 이곳도 역시 지자체가 세운 이정표(작은마치0.60km/ 마치입구 0.33Km/ 태청봉1.31km) 외에 육군보병학교에서 세운 이정표가 하나 더 있다. 참고로 옛날 이 고갯마루는 영광군 대마면에서 장성군 삼서면으로 넘나들던 큰 고개였다. 시원스레 뚫린 도로들에 길을 내어주고 이제는 오가는 이가 적지만 산을 찾은 이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품을 내어준다.



마치채에서 작은마치재까지의 구간은 겨우 600m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구간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오르고 내리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산길이 정비되지 않아 걷기가 사나웠다는 얘기이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은 물론이고, 가시넝쿨들까지 능선을 가득 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디게 진행하는 데도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 까딱 방심하다간 싸대기까지 얻어맞기 일쑤이다.



그렇게 14분 정도 악전고투를 치른 후에야 작은마치재(이정표 : 장암산2.3Km, 월암리 사동 3.5Km/ 석전모정2.8Km/ 태청산1.9Km)에 내려선다. 또 다른 십자 안부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산행날머리인 석전마을에 이른다. 장암산까지의 산행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면 된다.



작은마치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기세는 사납지가 않다. 장암산까지의 거리가 2.3Km나 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나 보다. 산불이라도 났던 탓일까 이 구간은 커다란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햇볕을 가려주지 못한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고통스런 구간이 될 듯 싶다.



그렇게 25분 남짓 걸으면 4각으로 지어진 정자(亭子)와 송신용 안테나가 세워져 있는 구릉(丘陵)에 올라서게 된다. 구릉은 온통 철쭉들로 둘러싸여 있다. 일부러 조림한 것 같은데 봄철에라도 찾으면 분홍빛 꽃 잔치를 볼 수도 있겠다. 구릉 근처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영광군 묘량면 일대가 잘 내려다보인다.




이어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샘터삼거리(이정표 : 장암산0.2Km/ 숯가마샘터0.1Km, 월암리 사동 1.4Km/ 작은마치재2.1Km, 태청산 4.0Km)가 나온다. 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해오던 영산기맥(榮山岐脈)과 이별을 고하는 지점이다.



삼거리 주변은 벤치뿐만 아니라 테이블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리고 곳곳에 철쭉을 심는 등 공을 들여 가꾼 흔적들이 역력하다. 한마디로 산상공원(山上公園)에라도 올라선 느낌이다. 철쭉의 개화와 때를 맞춰 장암산철쭉등산대회가 열린다니 한번쯤 찾아볼 만도 하겠다.



장암산으로 향한다. 영산지맥과 헤어진 산길은 이제부터 장암지맥(場岩枝脈)을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장암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태청산에서 1시간 여,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 30분 만이다. 참고로 장암지맥이란 영산기맥의 장암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오동산(351.1m)과 우리봉(185m), 노인봉(255m). 수리봉(354.4m), 봉화령(373.8m)을 지나 영광군 배수읍 대신리에서 돔배섬과 구암천을 바라보며 서해바다로 빠져드는 도상거리 약 36.3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봉긋하니 솟아오른 정상은 구릉(丘陵)의 형태이다. 그 구릉의 한가운데에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정표(임도 종점 0.3Km, 석전모정 3.1Km/ 월암리 사동 1.6Km, 태청산 4.2Km, 석전모정 5.1Km)와 삼각점(고창311)도 보인다. 그리고 고전미가 팍팍 풍기는 2층짜리 팔각정까지 지어 놓았다. 거기다 산상(山上)을 덮고 있는 철쭉무리들까지 합치면 이건 숫제 공원(公園)이다. 마치 도심(都心)의 공원을 산 위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정상에 올라서면 커다란 바위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장암산(場岩山)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가로 세로 8~9m에 높이가 남쪽이 2m, 북쪽이 1m 안팎인 마당바위이다. '마당 장()' 자에 바위 암()’자를 쓰는 산의 이름을 낳게 한 바위답게 20~30명이 너끈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다. 이런 게 바로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산의 이름만 들어도 그 생김새를 그려낼 수 있는 그런 지혜 말이다. 아무튼 옆에서 보면 마치 물위를 떠가는 조각배를 닮은 이 마당바위에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오래전 장암산 기슭 아랫마을에 고관대작(高官大爵) 집 아들과 가난한 농부의 딸이 양가 몰래 사랑을 약속했는데 집안의 반대에 장암산으로 도망쳤다가 산신령이 알려준 대로 바위에서 3일을 진달래로 연명하며 견뎌낸 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 두세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였으나 산신령이 바위를 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로 커졌다는데, 선남선녀가 함께 바위 위에 앉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젊은이들이라면 한번쯤 올라가 볼만도 하겠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비록 바위산은 아니지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덕분에 사방팔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때문이다. 서쪽 아래론 묘량면의 평야지대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저 멀리 영광읍 너머로는 서해바다가 가물거린다. 북쪽으로는 대마면의 들판 너머로 고창군의 곡창지대가 탁 트인 조망을 뽐낸다. 해산물, 소금, , 나물 등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한 영광군은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도 불렸다. 이름처럼 쌀, 소금, 목화가 많았고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옥당고을또는 호불여 영광(戶不如 靈光)‘으로 지칭 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저렇게 너른 들녘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싶다. 한편 대마면 방면으로 마루금을 그으며 태청산과 월랑산으로 이어지는 북릉의 풍광도 일품이다. 남쪽으로 불갑산까지 내달리는 산릉이 첩첩산중을 이룬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석전모정 방향이다. 나선형(螺旋形)으로 만들어진 침목(枕木) 계단을 잠시 내려서면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임도종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패러글라이딩 이륙장, 석전모정 2.8Km/ 월암·영양·삼호 임도/ 장암산) 옆에는 장암산 철쭉공원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장암산 일원에서 인위적(人爲的)으로 조성해 놓은 철쭉무리들이 계속해서 보였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아직도 주위는 온통 철쭉무리이다. 그래 이 정도라면 철쭉공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철쭉보다는 진달래를 심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마당바위의 전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경관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의 위는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활공장이다. 풍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설 외에도 정자를 지어 놓았다. 바람의 방향이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장암산 활공장은 행글라이더들에게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하늘로 날아오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란다.



이륙장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도움닫기 후 점프하기 좋도록 산 사면을 따라 나무들을 베어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묘량면은 물론 멀리 법성면까지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 하늘을 날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오죽할까. 행글라이더들이 선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산을 이어간다. 잠시 후 편백나무 숲을 만난다. 아니 삼나무 일지도 모르겠다이 숲은 금방이면 끝나버린다. 그리고는 또 다시 굴참나무들이 능선을 차지해 버린다. 아무튼 이런 산길을 10분 조금 넘게 걷다보면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0분 조금 못되어 임도에 내려선다. 매봉재(이정표 : 석전모정1.5Km/ 묘량 월암·영양리/ 장암산1.6Km)이다. 차량 2대가 교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따란 비포장 임도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이정표가 가리키는 석전모정 방향의 오솔길을 탄다. 그리고 2분 후에는 성석삼거리(이정표 : 석전모정1.3Km/ 상석·석전모정0.8Km/ 장암산1.8Km)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더라도 산행날머리인 석전모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린 왼편으로 향한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산길을 구태여 길게 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내려선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을 타다보면 5분이 채 되지 않아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산죽(山竹) 숲을 만나게 되고, 산죽 사이로 난 오솔길을 빠져나오면 전주 이씨문중의 묘역(墓域)이다.



산행날머리는 석전마을의 모정(茅亭)

묘역에서부터는 농로(農路)를 따른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석전마을이 자리한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정류장 옆에는 모정이 있다. 마을주민들이 여름철의 무더위를 피하며 휴식하기 좋은 곳에 세운 정자로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먹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소요된 시간으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참고로 석전(石田)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 이곳에 돌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독밭이라고 불렸는데 마을이 형성된 후 한자로 음이 바뀌면서 석전(石田)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해주 오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집사람과 본관(本貫)까지 같아 더욱 친밀감이 드는 마을이다.


제석산(帝釋山, 563.3m)

 

산행일 : ‘16. 6. 4()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과 순천시 낙안면·별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동화사마을임도활공장제석산신선대남끝봉대치재전망대약수터태백산맥 문학관(산행시간 : 2시간 1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제석산은 600m에도 못 미치는 자그만 산이다. 거기다 보성의 오봉산이나 순천의 금전산 등 빼어난 암릉미를 자랑하는 주변의 명산들에 가려 입소문도 타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산에 들고나면 생각은 달라진다. 신선대 부근의 바윗길에서 느끼게 되는 짜릿한 스릴과 툭 터지는 조망은 다른 유명산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석산의 뛰어난 점은 아기자기한 암릉 뿐만이 아니다. 2시간여의 가뿐한 산행을 마치면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학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기다 점심 겸해서 찰지고 탱글탱글한 별미 꼬막정식까지 즐긴다면 건강과 문화에다 맛까지 한꺼번에 다 누리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산행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동화사 주차장(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순천-영암고속도로 순천만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를 타고 벌교방면으로 달리다가 사계절삼거리(순천시 별량면 구룡리)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군도(郡道 : 송산로)를 타고 힐사이드 C.C으로 들어가다 보면 동화사입구교차로(별량면 송기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동화사 주차장이 나온다.




산행에 나서기 전에 동화사(桐華寺)부터 들러보기로 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니 가슴에 담아 둘만한 뭔가를 갖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경내(境內)는 천왕문을 통해 연결된다. 천왕문의 처마에 매달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현판에 적힌 산의 이름이 낯설다. ‘제석산(帝釋山)’으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開雲山)’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아마 절의 창건에 얽힌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047(고려 문종 1) 의천(義天)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을 지나다가 동쪽 하늘에 상서(祥瑞)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산의 이름을 개운(開雲)이라 칭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桐華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01(선조 34) 신총(信聰)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630(인조 8) 계환(戒環)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과 지장전, 삼성각, 천왕문, 선당, 범종루, 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로 들어선다. 오래된 절답게 넓은 터에 전각들의 배치가 단아한 사찰이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인 대웅전이다. 정면 3,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다포계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은 보물 제831호인 삼층석탑(三層石塔)이다. 이 탑은 아래 부분인 기단(基壇)이 땅속에 거의 파묻힌 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각 부분의 표현이 약해지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동화사 옆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니 임도의 끄트머리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으니 농로(農路)라고 보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 나타난다.




길가에 휴경지(休耕地)가 많이 보인다. 그 풍경이 낯설어 보이는 건 그 위치가 마을 주변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게으르다고 해도 이런 농경지를 묵힐 농사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휴경지들 마다 동화사 주지의 명의로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임대차 계약이 만료되었으니 경작을 금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고발조치하겠다는 엄포까지 놓고 있다. 아까 동화사 입구에 붙어있던 차량 출입을 금하겠다.’는 현수막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산길은 마을을 벗어나기 바로 직전에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이정표가 없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길이 넓고 또렷하게 나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개운산 버섯체험 학습장입간판에서 50m 정도 전방이니 참조한다.



길을 가다보면 남도 삼백리길이라고 적힌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언젠가 순천판 둘레길을 조성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둘레길 조성사업이 이미 마무리 되었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첫 번째 구간인 남도 문화길이 분명하다. 팻말의 하단에 적혀있는 읍성 가는 길이 그 증거일 테고 말이다.



남도 삼백리길은 벌량 화포를 출발해서 동화사에 이르는 총 210km의 둘레길이다. 3개 노선 10개 코스로 나누어 있는데, 그중 순천만 갈대길’, ‘읍성 가는 길5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도 문화길(1구간)95km, ’과거 관문길‘, ’이순신 백의종군의 길3개 코스로 이루어진 한양 옛길(2구간)54km, 그리고 3구간인 생태 치유길천년불심의 길2개 코스 61km로 이루어져 있다.



산길은 임도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랗다. 주변 정리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길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사색을 즐기며 걷기에 딱 좋지 않나 싶다. ‘남도 삼백리길이 자연과 역사 자원을 있는 그대로 활용한 아름다운 옛길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잠시 후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은 산자락이 만들어내는 경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왔다갔다 갈()자를 그리면서 위로 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덕분인지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대신에 걸어야 할 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감수해야만 한다. 늘어나는 거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길가를 잘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산자락을 치고 오를 수 있도록 나있는 지름길로 들어서면 된다. 그렇게 진행하다보면 잠시 후 임도를 만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는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10분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왼편 임도가 더 넓고 또렷하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른편 임도도 널따랗기는 매한가지이다. 경사 또한 거의 없다. 그런 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임도가 끝나버린다. 그리고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더니 오솔길로 변한다. 경사도 상당히 가팔려졌다.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긴 다른 산들에서라면 이 정도 갖고는 가파르다고 할 수도 없을 테니, 부담스럽다는 게 차라리 이상한 일일 것이다.



8분 후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헬기장에 올라선다. 한쪽 귀퉁이에 풍향을 알려주는 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활공장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이륙할 경우 큰 어려움 없이 낙양읍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읍성의 안에 있는 잔디밭이나 읍성 주차장에 착륙할 수가 있어 상공에서 바라보는 경관과 착륙장소의 편의성 때문에 패러글라이더(paraglider)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헬기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벌교읍에서부터 기다랗게 늘어진 벌교천과 물이 빠진 거대한 뻘 너머로 득량만, 여자만(汝自灣), 순천만까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거센 빗줄기는 조망에 대한 열망을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린다. 바람까지 거센 탓에 오래 머물 수도 없어 그냥 지나쳐버린다.



풍향주머니의 맞은 편 귀퉁이에는 정상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정상석에 표기된 이름이 제석산이다. 이곳은 제석산의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 곳에나 정상석을 세우는 행위는 옳지 않을 듯 싶다.



정상으로 향한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으로 연결되는 오르막길이다.



그렇게 7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제석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났다. 제석(帝釋)이란 산의 이름은 불가(佛家)의 용어 제석천(帝釋天)’에서 온 명칭이다. 제석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며 사천왕(四天王)을 통솔한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심리와 깊이 연관돼 있으며 이산에 이러한 이름을 지어준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서너 개가 들어앉아 있다. 정상표지석은 그중 하나의 위에 놓여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만 일대의 다도해풍광이 멋지게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행운이 없나보다. 사방이 짙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늘어진 빗줄기에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제석산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르면 우령재와 오봉산을 거쳐 금전산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능선을 가득 메운 잡목들 때문에 길이 거칠다고 하니 주의할 일이다. 왼편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태백산맥문학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잠시 후 바윗길이 시작된다. 위험하지는 않는 바윗길이다. 뒤돌아보니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암릉이 불쑥 튀어 나온다. 방금 지나왔던 제석산 정상부근의 암릉이다.




산행을 이어간다. 바윗길이 네 발로 기어야만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거칠어졌다. 빗길만 아니라면 서서 내려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만사는 불여튼튼이다.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이때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 한줄기가 지나가는 가 싶더니 구름까지 한 웅큼 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구름 뒤에 숨어 있던 신선대가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제석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경관이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저런 풍경화는 비온 뒤끝이 아니면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는가 보다. 산행 내내 비가 내려 불만스러웠는데, 그 비가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신선대 아래에 이른다. 정상에서 10분 거리이다. 신선대는 봉우리 전체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다. 때문에 신선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암봉에 서면 낙안벌과 벌교읍 일대의 거대한 분지(盆地)를 이룬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금전산이 손에 잡힐 듯 눈앞으로 달려온단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암봉으로 오르는 것을 사양한다는 얘기이다. 진입금지팻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비에 젖은 바위들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한걸음 내딛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목숨만이야 하겠는가.




산길은 암봉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비록 바위를 끼고 도나 위험하지는 않은 길이다. 만일 비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저 암릉을 타고 내려왔을 게 뻔하다. 높이가 20m쯤 되는 절벽이라고는 하지만 밧줄이 매어져 있다니 집사람 정도의 경험이라면 충분히 내려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선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한참 더 계속된다. 하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다. 그렇게 5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소나무 두어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는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누군가 남끝봉이라고 적었던 봉우리인 모양이다.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있는 봉우리 위로 올라가본다. 이곳도 역시 조망이 좋을 듯 싶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남끝봉을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후부터는 보드라운 흙길이 이어진다.



8분 후, 안부사거리인 대치재(이정표 : 벌교2.7Km/ 별량 대치마을/ 낙안 구기마을/ 제석산 정상0.9Km)에 내려선다.



대치재를 지나자 오르막 구간이 다시 시작된다. 맞은편 산봉우리를 넘으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길을 따를 필요까지는 없다. 오른편으로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봉우리 뒤편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나게 됨은 물론이다.



8분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벤치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한 곳이다. 이정표는 없지만 왼편으로 나뉘는 길을 무시하고 곧장 능선을 따른다.



7~8분 후 나타나는 언덕을 넘으면 산길은 산중턱을 에돌며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벌교시가지와 그 앞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잠시 후 전망데크가 나타난다. 방금 전부터 나타나던 풍경을 진득하니 감상하다가 내려가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여유를 갖고 조망을 즐겨보자. 발아래에 벌교시가지는 물론이고 벌교와 별량을 아우르는 너른 들녘이 카펫처럼 평평하게 펼쳐진다. 그 뒤의 벌교 앞바다와 여자만은 경계를 두지 않은 채로 망망대해(茫茫大海)와 연결된다. 한마디로 멋진 풍경이다. 만일 날씨라도 받쳐준다면 한 폭의 멋진 산수화가 그려질게 틀림없다.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약수터(이정표 : 벌교 버스터미널 1.7Km/ 제석산 정상 2.4Km)가 나타난다. 돌까지 쌓아 제법 그럴싸한 외관을 갖추어 놓았지만 냉큼 마시기에는 좀 꺼림칙하다. 물이 넘치지를 못하고 그대로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반듯하게 잘 가꾸어 놓은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약수터에서 4분 정도의 거리이다. 묘역에는 운동기구들을 설치해 놓았다. 조금만 더 치장을 한다면 체육공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태백산맥 문학관0,7Km/ 봉림1.8Km, 홍교 2.4Km/ 제석산 정상2.0Km)로 나뉜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왼쪽 방향이다. 하지만 보물 제304호인 벌교홍교(筏橋虹橋 : 3m 높이의 홍예(虹霓) 3칸을 연결해 놓은 27m 길이의 돌다리)라도 보고 싶다면 곧바로 직진해야 한다.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 번은 들러보는 게 좋을 것도 같다.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았다고 해서 홍예교(虹霓橋) 또는 무지개다리라고도 불리는 홍교(虹橋)의 구조형식을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보물 400)와 함께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하산 길은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약간 가파른 곳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은 평평할 뿐만 아니라 널찍하기까지 하다. 중간에 홍교 갈림길’(이정표 : 태백산맥문학관0.4Km/ 홍교1.9Km. 제석산 정상3.1Km)내리천 삼거리(이정표 : 태백산맥 문학관0.2Km, 벌교 버스터미널 0.7Km/ 제석산 정상3.4Km) 등의 갈림길도 만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만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태백산맥문학관(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묘역을 통과한 지 15분쯤 지나면 잘 지어진 기와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소재가 되었던 집들이다. 산행은 이곳(이정표 : 제석산 정상 3.6Km)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10분이 걸렸다. 비로 인해 중간에서 쉬지를 못했으니 온전히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된다.



현부자네 집이란다.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이 집과 제각(祭閣)은 원래 박씨 문중의 소유인데 그 건축양식이 보통의 한옥(韓屋)들과 다른 게 특징이란다. 대문과 안채 등 전체적으로는 전통 한옥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곳곳에다 일본식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흥미로운 건물로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새끼무당 소화와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그려진다.




현부자네 집아래에는 조그마하고 예쁜 기와집인 소화네 집이 있다. 부엌 하나에 방이 셋인데, 부엌과 붙은 방이 안방이고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은 그 옆방이란다. 1988년 무렵 태풍에 무너졌던 것을 2008년 보성군에서 복원해 놓았다.



현부자네 집의 오른편에는 대한불교천태종 소속의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있다. 역사가 짧을뿐더러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절이다. 하지만 잠깐 들러볼만한 이유는 있다. 물맛이 제법 뛰어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보성군청에서 수질(水質)까지 보증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목이라도 축여볼 일이다.



소화네 집을 지나면 반듯하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길손을 맞는다. 20081121일에 문을 연 태백산맥문학관이다. 이 건물은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시대정신인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북향으로 지어졌으며, 1, 2층의 전시실과 전망대(5)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문학관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해서 6년 만에 완결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이란 장으로 구성되고, 1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623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북 카페와 작가가 직접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작가의 방을 만들어 타 문학관과 차별을 두고 있다.



문학관을 빠져나와 벌교 시내로 들어선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한다. 조선 숙종 14(1718)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이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다 원목을 엮어 뗏목다리를 놓았었다는 것이다. 이 뗏목다리가 있던 자리에 다시 놓은 다리가 지금의 홍교(虹橋)이다. 1728(영조 4)에 전라남도 지방의 대홍수로 이 다리가 무너지자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석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시내에는 꼬막 요릿집들이 즐비하다. 하긴 수산물 지리적 표시전국 1호가 벌교꼬막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청정갯벌에서 잡아 올린 벌교꼬막은 천혜의 여자만 일대에서 생산되는데,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온 이후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헤모글로빈이 많이 함유돼 노약자나 산모들에게 좋고 어린이 성장발육촉진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가에는 벌교꼬막 문화산업특구 지정이라는 현수막도 걸려있다. 전국 꼬막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았나 보다.



가지산(迦智山, 511m)

 

산행일 : ‘15. 4. 6()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장평면과 유치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보림사 주차장학생의집 입구원당암소나무산림욕장가지산상봉망원석팔각정비자림산림욕장보림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가지산은 500m를 겨우 넘기는 아주 자그만 산이다. 그러나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산세(山勢)만은 여느 큰 산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대한불교 선종(禪宗)의 종찰(宗刹)로 대접받는 보림사(寶林寺)를 품고 있는 것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다. 명산(名山)과 명찰(名刹)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지산은 분명 흙산이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정상 어림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규모가 제법 크다. 따라서 부드러운 산길을 산책삼아 쉬엄쉬엄 오르다가, 정상 근처에서는 짜릿한 손맛과 더불어 조망까지 즐길 수가 있다.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 하산 길에는 보림사에 들러 국내에서 네 번째로 많다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둘러보는 재미까지도 있다. 가족나들이 겸해서 찾아도 좋을 거라는 얘기이다. 이 정도의 산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 찾아온다고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보림사주차장(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광주 제2순환도로(호남고속도로 문흥 J.C에서 연결된다) 지원교차로(광주시 동구 용산동)에서 빠져나와 22번 국도와 29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이양면소재지인 오류리까지 온다. 이어서 83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장흥방면으로 달리다가 경림교차로(장흥군 장평면 봉림리)에서 820번 지방도로 옮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유치교차로(장흥군 유치면 용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림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차에서 내리면 일주문이 시선을 끈다. 흔히 접할 수 없는 화려하고 장중한 외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작(包作)이 여러 겹 중첩되어 화려하고 장중한 일주문 정면에는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안쪽에 걸린 선종대가람이라 적힌 현판은 보림사의 역사적 위상을 한마디로 대변해 준다. 현판 구석에는 옹정(雍正) 4, 즉 영조 2(1726)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다. 일주문 또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를 오른편에 끼고 난 820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가로수로 심어진 단풍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다. 벚꽃나무 가로수에 비판적이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요즘 가로수의 대세(大勢)는 벚꽃나무이다. 오나가나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벚꽃나무 천지이다.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를 모르겠다.’며 탄식하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만날 수 있으니 두말하면 무얼 하겠는가.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많다. 벚꽃이 비록 일본의 국화(國花)이긴 하지만 그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일본 벚나무의 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왕벚나무를 가져가서 개량해서 그네들의 국화를 만들었고, 실제 우리가 아름답다며 사방에 심고 있는 벚나무들이 왕벚나무가 아닌 그네들이 개량해 놓은 종자라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왕에 그런 항변을 하고 싶다면 우리네 손으로 개량한 품종을 더 널리 심고 난 뒤에 했으면 좋겠다.



잠시 후 소나무산림욕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고(이정표 : 약수터0.2Km, 학생의 집 0.6Km/ 소나무산림욕장0.8Km/ 보림사0.3Km), 또 다시 그만큼 걸으면 약수터가 나타난다. 빼어나다고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물맛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다.



5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편은 장흥 학생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삼거리 오른편에 커다란 빗돌(碑石) 하나가 보인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이 고장 인사들의 투혼을 기리는 인동초민주동지기념비란다. 그들의 명단(名單)’비를 세우는 취지문을 적은 검은 빗돌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빗돌의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난 길이 하나 나타난다. 가지산 정상으로 가려면 이 길을 따라야 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약수터0.5Km, 소나무 산림욕장 0.7Km, 가지산 정상 1.3Km/ 보림사0.8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로 들어선다. 포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임도(林道)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넓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부담없이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10분 남짓 후 원당암 갈림길’(이정표 : 소나무 산림욕장0.5Km, 가지산 정상 1.1Km/ 원당암0.1Km/ 보림사1.0Km)을 만난다.



원당암으로 향한다. 이정표에다 등산로가 아니라고 표시해 놓았지만 어떻게 생긴 암자(庵子)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 잠시 걸으니 원당암이 나타난다. 전통과 현대가 합쳐진 괴상한 외형을 가진 건물이다. 윗부분은 전통적인 사찰의 지붕이 분명한데, 사방을 둘러싼 벽면은 온통 인조목(人造木)과 유리창들로 둘러싸여 있다. 내심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기를 바랐던 내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순간이다.



삼거리로 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어른의 허리춤에나 찰 정도로 자란 산죽(山竹) 숲 사이로 나있다. 경사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만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잠시 후 약수터 갈림길’(이정표 : 소나무 산림욕장0.2Km, 가지산 정상 0.8Km/ 약수터25m/ 학생의 집0.7Km)을 만난다.



몇 걸음 들어서니 약수터가 나온다.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물이 넘쳐흐르고 있어 마시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가팔라진 산길을 잠시 오르면 의미 없는 이정표(가지산 정상 0.7Km/ 보림사 1.3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소나무산림욕장(이정표 : 가지산 정상 0.6Km/ 약수터 0.2Km, 학생의 집 0.7Km/ 비자림 산림욕장 0.9Km, 보림사 1.1Km)이 나타난다. 줄사다리와 철봉 등 운동기구와 벤치, 평상 등을 갖춘 쉼터로 조성해 놓은 공간이다. 이곳에 수령이 많은 소나무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소나무 산림욕장이라 이름을 붙였나 보다.



욕장에는 소나무에서 품어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질병과 신경안정, 그리고 피로회복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홍보판까지 세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배려까지 해두었다. 참고로 산림욕(山林浴)이란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향내와 살균성 물질(피톤치드)이 가득한 신선한 공기를 심호흡하며 심신을 건강케 하는 자연요법이다. 어떻게든 건강을 챙겨보려는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특히나 각광을 받고 있는 방법이다.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이용해서 정신안정과 피로회복, 그리고 여유와 낭만이 있는 산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최적화시켜 놓은 장소가 바로 산림욕장이다.



산림욕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비좁아 진다. 그리고 경사 또한 제법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알맞게 가파르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이정표(가지산 정상 0.4Km/ 소나무 산림욕장 0.2Km)가 세워진 곳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14분 후 전망이 트이는 바위에 이른다. 물론 산림욕장에서부터 소요된 시간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방향으로 볼 때 국사봉과 석교산, 광덕산 등일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암릉으로 볼 정도는 아니지만 바위가 널린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한 그루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암봉에 올라서게 된다. 탐진강을 막아 만들었다는 유치호()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주봉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암봉을 내려서서 흙길을 걷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바윗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상석이 있는 주봉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오르는 것을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고도(高度)를 높일수록 넓어져가는 유치호와 주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주봉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겨우 2.1Km, 그것도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산길을 오르는데 그렇게 걸렸으니 얼마나 서서히 올라왔는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하여간 정상은 봉우리의 위가 높게 솟아오른 형상이라서 너른 공간은 없다. 하지만 10여명 정도 앉을 자리는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라도 함께 있을 경우엔 서로간의 양보는 필수이다. 장소가 협소한 탓에 누군가 인증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할 경우엔 자칫 방해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암봉들의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상봉 방향이다. 세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 개에다 정상석이 있는 이곳 주봉, 그리고 조금 전에 지나왔던 암봉을 합치면 다섯 개가 된다. 어느 글에선가 가지산이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그 외에도 제암산과 천관산, 억불산, 수인산 등 주변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무등산과 조계산, 월출산 등 남도에서 내노라는 산들까지 시야에 잡힌다고 하지만 말하는 산들이 어느 것인지는 구분을 못하겠다. 산에 대한 내 앎이 아직도 초보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 방향의 첫 번째 암봉 옆으로 장평면의 들녘이 펼쳐진다.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생각보다는 너른 들녘이다. 고개를 조금 더 오른편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유치호가 나타난다. 그 넓이가 아까보다 조금 더 넓어졌다.


새를 닮은 바위도 보인다. 언젠가 가은산에서 이와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그 바위의 이름이 새바위였었다.




중간에 있는 작은 암봉을 지나, 또 다시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상봉의 앞에 있는 암봉(아래 사진은 상봉에서 바라본 전위봉의 풍경이다)이 기다린다. 이곳 역시 조망이 좋다. 특히 주봉 방향의 능선이 눈길을 끈다. 반대편에 있는 상봉 역시 볼만하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것이 별 탈 없이 오를 수 있을지 걱정까지 하게 만든다.





상봉으로 향한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를라치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위험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치고 오를 수는 있겠다. 다만 약간의 모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는지 산길은 벼랑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상봉에 올라선다. 아래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밋밋한 바위봉우리이다. 때문에 조망(眺望)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래서 주봉이 이곳보다 더 낮은데도 불구하고 정상으로 삼았나 보다. 상봉의 정상은 텅 비어있다. 이곳이 상봉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음은 물론이다.



대신 조망만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아까 주봉에서 바라보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주봉보다 고도(高度)가 놓아진 탓인지 그 범위가 더욱 넓어진 듯하다.



하산은 주봉 근처에서 시작된다. 상봉에서 주봉으로 되돌아가다보면 주봉 바로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들머리에 꽤나 많은 리본들이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산 길은 조금 가파르긴 해도 내려서는데 부담이 없는 순한 내리막길이다. 정상에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왔을까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전망대0.4Km, 보림사 1.1Km/ 소나무 삼림욕장0.7Km/ 가지산 정상0.5Km)로 나뉜다. 오른편은 아까 정상으로 올라갈 때 지났던 소나무 산림욕장으로 연결된다.



소나무 산림욕장갈림길을 지나면 적벽돌로 담을 두른 묘역(墓域)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5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멋진 바위를 만난다.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운 선돌, 즉 입석(立石)이다. 이 바위는 유치호()가 담수(湛水)되면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고향땅을 내려다보며 시름겨워했다고 해서 망향석으로도 불린다. 또한 옛날 근처에 은거하고 있던 스님들이 수양(修養)을 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선돌 아래는 바위벼랑이다. 그 덕분에 수인산과 사자산, 억불산 등이 잘 조망된다. ‘망원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멀리까지 잘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선돌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약수터(이정표 : 약수터0.5Km, 보림사/ 전망대0.1Km, 보림사 0.8Km/ 가지산 정상1.0Km)가 나온다. 하지만 우물은 메말라 있다. 관리가 안 되고 있어서 설사 물이 나온다고 해도 마실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보림사에 이를 수가 있다. 각자 들르고 싶은 곳을 정한 다음 방향을 잡으면 그만이다.



오른편 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무엇이 보일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탈을 잠시 오르면 등성이 턱에 전망대가 있다. 반듯하게 잘 지어진 팔각정이다. 국사봉과 뭇 산들이 잘 조망되는 곳에다 자리를 잡았다.



정자(亭子)에 오르면 천년고찰 보림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기록에 의하면 보조국사 체징이 입적(入寂)할 당시 이곳 보림사에는 800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절의 규모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수식어(修飾語)로만 여겼는데 사실이었던가 보다. 저리도 넓은 터에 자리 잡은 걸 보면 말이다. 사실 보림사가 중심이 됐던 가지산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선문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국사도 가지산문의 문도(門徒)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에 이르면서 가지산문 외의 다른 선문들은 모두 쇠퇴했다고 한다. 그때 가지산문 출신의 태고국사에 의해 구산선문이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조계종 모태(母胎)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림사를 선문(禪門)의 종찰(宗刹)이자 조계종의 모태라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약수터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비자림 산림욕장0.5Km, 보림사 0.6Km/ 보림사0.8Km/ 전망대0.3Km, 가지산 정상 1.0Km)을 만난다. 비자림산림욕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비자림산림욕장0.3Km/ 보림사0.4Km/ 가지산 정상1.1Km, 전망대 0.5Km)에서도 역시 비자림산림욕장 방향이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비자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아예 숲으로 변해버린다. 제법 굵은 것이 다들 50~60년은 너끈히 묵었을 것 같다(안내판에는 70~400년생이라고 적혀있다). ‘비자림(榧子林) 산림욕장에 이른 것이다. 비자나무는 제주도와 전남, 경남 등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난대성의 상록 침엽교목으로 표고 150~700m에서 주로 분포한다. 그 열매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며 특히 식용유를 얻기도 하는 등 사람에게 유용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비자림은 산림청과 ()생명의숲국민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주관한 10(209)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비자림은 군락으로 자생하는 비자나무와 물푸레, 노각나무가 상층림을 형성하고 하층에는 장흥 전통 `청태전'의 원료인 녹차가 비자와 함께 숲을 형성하고 있다.



산림욕장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벤치들을 여러 개 놓아두었다. 비자나무는 특유의 향기를 배출한다. 맡는 사람의 심신을 맑게 해주는 향기이다. 그 속에는 질병예방과 신경안정은 물론, 피로회복에 까지 효험이 있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까지 듬뿍 들어있다. 편하게 드러누워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실컷 마시고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산림욕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뭔가가 눈에 들어온다. 비자나무들이 각자의 번호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상단에 로고(logo)와 함께 장흥군이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장흥군에서 보호림(保護林)으로 관리하고 있나 보다.



비자나무 숲을 빠져나오는 길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장흥 청태전을 소개하는 홍보판이다. 청태전은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전통차 중 하나로서 전차(煎茶), 돈차(錢茶), 곶차(串茶), 단차(團茶), 떡차(餠茶)라고도 불린다. ‘세종실록지리지고려시대 19개의 다소(茶所) 중 장흥에만 13개소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장흥 전역에는 차나무들이 자생(自生)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까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그 차나무들이 바로 야생 녹차였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보림사

청태전안내판을 보았다 싶으면 곧이어 천년고찰 보림사(寶林寺)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이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1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하지만 최대한으로 느릿느릿 걸은 결과임을 감안해야 한다. 제대로 걸었을 경우 2시간30분이면 충분했지 않나 싶다. 하여튼 보림사는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 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 측면4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겉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860년경 헌안왕(憲安王 : 신라)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 804~880)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체징은 이곳에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로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열었다. 759년에 원표대덕(元大德表)이 세웠던 가지산사가 있던 자리이다. 880년 체징이 입적한 후에 헌강왕이 절의 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는데, 체징이 입적할 당시 무려 800여 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大刹)이었다고 한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三寶林)’으로 통하기도 한다. 참고로 보림사(寶林寺)는 대한불교의 선종(禪宗) 종찰(宗刹)로 대접받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말 가지산문이었던 태고국사에 의해 선문들이 통합되었다고 해서 조계종의 모태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보림(寶林)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보물의 숲'이기도 하다. 현재 국보 2, 보물 8, 유형문화재 15점이 있다. 불국사, 화엄사, 부석사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다. 이왕에 보림사에 왔으니 모두 다 둘러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는 대웅전의 오른쪽 위편에 있는 보조선사 탑비(普照禪師塔碑 : 보물 제158)보조선사 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 보물 제157)‘이다. ’보조선사 창성탑비로도 불리는 탑비는 보조선사가 입적한 지 4년 후인 헌강왕 10(884)에 세워진 부도비(浮屠碑)이다. 전체 높이는 3.46m이고 돌거북과 비신, 비석머리(이수)가 다 온전히 남아 있는데 9세기 말 석비 양식의 전형을 보이는 뛰어난 유물이다. 비석머리는 가운데에 가지산 보조선사 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가 적혔고, 비신에는 보조선사의 행장이 적혀 있다. 보조선사는 애장왕 5(804)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났는데, 성은 김씨였고 그의 집안은 지방의 명문이었다. 어려서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했으며 흥덕왕 2(827) 24세 때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현재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 터가 남아 있는 가야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보조선사 탑비의 위편에는 보조선사 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 보물 제157)’이 있다. 가지산문을 개산한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浮屠)이다. 보조선사가 입적한 후, 옆에 있는 부도비와 함께 헌강왕 10(884)에 세워졌다. 높이 4.1m의 팔각원당형 부도인데, 팔각 지대석 윗면에 아주 얕은 각형 굄을 한 단 새긴 후 그 위에 상··하대석과 몸돌, 지붕돌과 상륜부가 차례로 세워졌다. 그중 몸돌은 유난히 크고 넓다. 팔각의 각 면마다 우주가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기둥머리가 새겨져서 목조 건물의 짜임을 본뜨고 있다.



이번에는 원형대로 복원(52)되었다는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각(殿閣)의 앞에 국보 제44호인 보림사 삼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및 석등(石燈)이 있기 때문이다. 석탑은 두 기가 동서로 마주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석등이 한 기, 그리고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두 탑과 석등은 상륜부를 포함한 부재를 거의 다 갖추고 있는데,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나 석등 가운데 이처럼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두 탑 모두 신라 경문왕 10(870)에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졌으며, 두 탑 가운데 동탑의 높이는 5.9m, 서탑은 5.4m이며 구조는 똑같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상하 두 단의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3층 몸돌이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동탑에는 5, 서탑에는 3), 보개가 다 갖춰져 있고 다만 수연과 찰주 및 거기에 꽂히는 용차와 보주가 빠져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건립 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고 또한 원래의 모습을 거의 온전히 갖추고 있는 보림사 삼층석탑은 다른 석탑들의 건립 년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며 당시 석탑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석등 또한 석탑과 같은 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석등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석등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장식이 많이 된 예라고 한다. 높이는 3.12m이며 전체적으로 몸매가 단정하고 아담한 인상을 준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문을 열어본다. 선문 종찰 보림사의 주불(主佛)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 국보 제117)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조선사가 주석하던 당시부터 있던 불상이며 높이가 2.74m나 되는데 한국전쟁 때 이전의 대적광전은 불타 없어졌으나 이 불상은 무사했다고 한다. 좌대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만이 남아 있지만 신라 하대에 많이 조성된 철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명문(불상의 왼쪽 팔꿈치 위쪽에 860여 자에 이르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을 통해 조성 년대(헌안왕 2, 858)를 확실히 알 수 있어서 9세기 이래 지방의 선종 사찰에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데 기준이 된다고 한다.



대적광전 맞은편에 있는 사천왕문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역시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어느 절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외관을 지녔다. 하지만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만은 결코 범상하지가 않다. 중종34(1539)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다른 절들의 사천왕상은 보통 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魔鬼)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보물 제12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문까지 둘러봤다면 이젠 동부도 차례이다. 동부도는 일주문을 나선 후에야 만날 수 있다. 일단 절간을 빠져나온 뒤 820번 지방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왼편 산자락에 부도 6기가 있다. 그중 맨 위쪽에 있는 것이 보림사 동부도(東浮屠)’이며 보물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3.6m이며 팔각원당형 양식의 기본을 따랐고 상륜부를 포함한 모든 부분이 온전하게 남은 고려 시대 부도이다. 이 부도는 형태와 구조가 깔끔하고 세련되었으나 조각 수법은 입체감이 없고 섬약하다. 전체적으로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서 몸체가 가늘어 보이며 특히 중대석과 지붕돌이 좁으므로 그런 느낌이 더욱 강조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부도의 형식을 이어받으면서도 고려의 특징이 가미된 예로서 고려 시대 부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에필로그(epilogue), 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부처님 말씀과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5) 중심에서 개인의 참선과 깨달음, 성불을 중시하는 선종(9) 중심으로 큰 틀에서의 변화를 겪는다. 보림사는 바로 그 선종의 9개 산문(山門) 가운데 최초 문파인 가지산파의 중심이 된 절이다. 이런 절에 들렀으니 어찌 창건에 얽힌 설화 하나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 하버드대학의 연경도서관에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라는 책자가 있다. 조선 초기(初期) 세조 3(1457)에서 10(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여기에 보림사의 창건설화가 적혀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元大德表)이 인도의 보림사와 중국의 보림사를 거치며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데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더란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龍沼, 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는 메운 후에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보림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구전설화는 주인공을 보조국사로 삼고 있는데 그 내용도 조금 더 극적으로 변한다. 보조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나라 안 곳곳을 살피던 중에 가지산에 와보니 좋은 절터가 있는데 큰 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었다. 보조선사는 궁리 끝에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숯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흙짐과 숯짐을 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못은 메워졌다. 보조선사는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 쫓겨난 두 용은 서로 하늘에 오르려고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어 용소가 생겼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계당산(桂堂山, 580.2m)

 

산행일 : ‘16. 5. 1()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복내면과 화순군 이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복내우체국복내교회능선철쭉군락지헬기장계당산임도능선쌍봉사(산행시간 :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계당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전국의 웬만한 산들을 다 누볐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그 무언가가 없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세울 게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계당산을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늘어났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만큼 이 산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른 볼거리를 갖고 있다.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 ‘쌍봉사(雙峰寺)’이다. 사실 계당산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쌍봉사를 모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다졌다는 철감선사가 창건했고, 그와 관련된 다수의 국보급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절이 그만큼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쌍봉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는 사람들로 넘친다. 그러나 그들은 절만 둘러보고 갈 뿐 계당산은 오르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던 계당산이 요즘 들어 부쩍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로운 철쭉 산행지로 뜨고 있다는 것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점과 비록 광활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화사하게 핀 철쭉무리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한번쯤은 나들이 삼아 찾아볼만한 산임에 분명하다. 다만 햇볕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코스의 특징 때문에 봄철이 아닐 경우에는 산행이 고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


 

산행들머리는 복내면사무소(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호남고속도로 주암 I.C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타고 보성방면으로 달리면 15번 국도가 합쳐졌다 다시 나뉘는 곡천삼거리(순천시 송광면 봉산라)와 용암삼거리(보성군 문덕면 용암리)를 지나 복내면의 소재지인 복내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복내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우회전을 하면 저만큼에 우체국이 보인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우체국을 왼편에 끼고 난 길로 들어서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입구에 선돌(立石)마을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또한 계당산 등산안내도도 보인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살펴보고 갈 일이다. 계당산 정상까지는 5.9Km, 짧지 않은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갈림길이 많은 것으로 보아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골목 끝에 있는 복내교회를 지나면 11시 방향으로 콘크리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곧이어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숲길)5.4Km/ 소씨제각 삼거리1.3Km, 계당산 정상 5.3Km/ 복내면사무소0.2Km)을 만난다. 오른편은 소씨제각을 거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왼편으로 향한다. 조금 더 돌기는 해도 숲길을 걷는 게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4.98Km/ 복내면사무소0.52Km)을 만난다. 포장길과 헤어져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비록 포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임도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다.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편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만난다. 아무래도 오늘은 행복한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처음부터 편백나무 숲길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바로 편백나무(Phytoncide)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백나무 숲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뒤이어 배턴 터치((baton touch)를 하는 나무 역시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진 소나무이니까 말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물론 고도(高度)도 높여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른편으로 크게 휘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산길은 소나무 숲속으로 나있다. 그리고 점점 더 깊어져 간다. 코끝을 간질여오던 향기가 점점 더 짙어져 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소나무 숲길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참나무 숲길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산길은 구불구불, 이런 길은 느릿느릿 걸어야만 제격이다. 연녹색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길가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누군가 그랬다. ‘이른 봄의 연록(軟綠)은 꽃보다 아름답다.’. 이런 산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가끔은 산자락이 훤해지기도 한다. 요즘의 대세인 편백나무를 심으려고 벌목(伐木)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조망이 잘 터진다. 이름 모를 산들이 늘어서 있는 왼편 산자락 아래에는 계산마을(복내면)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동네 앞 들녘이 산골치고는 제법 넓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복내면 소재지인 복내리이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비봉산일 것이다. 그 왼편이 산들은 장채산과 두봉산일 거고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굵은 쇠기둥 위에 세운 안테나 보인다. 그리고 곧이어 갈림길이 없는 이정표(계당산 정상 4.4Km/ 복내면사무소 1.2Km)를 만난다. 잠시 후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은 느낌의 산길이 계속된다.



바람이 시원한 소나무 숲속 그늘을 걷는다. 중간에 흔적이 희미하긴 하지만 갈림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치고 볼 일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없는 보드라운 흙길이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이정표(계당산 정상 3.2Km/ 복내면사무소 2.8Km)를 만난다. 이번에도 역시 갈림길은 없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정표들의 거리표기가 들쑥날쑥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등산로에 심혈을 기울인 보성군청의 노고를 감안해서 그냥 넘기기로 한다.



5~6분쯤 더 걸으면 임도(이정표 : 계당산 정상3.0Km/ 소씨제각 삼거리1.0Km/ 복내면사무소2.5Km)를 만난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갈려나갔던 소씨제각을 경유하는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임도를 따른다. 넓고 평탄한 길이다. 4분쯤 후 내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2.7Km/ 내동마을0.8Km/ 복내면사무소2.3Km)을 만난다.



잠시 후 잘 가꾸어진 파주 염씨묘역(墓域)이 나오고 산길은 묘역의 왼쪽 뒤로 올라간다. 그리고 9분 후에는 또 다른 내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2.1Km/ 내동마을1.5Km/ 복내면사무소3.4Km)을 만난다.




이런 길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걷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연다. 크게 숨을 들이킨다. 세상의 모든 청량한 것들이 모두 다 들어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은 웰빙(well-being), 아니 힐링 (Healing)산행이다. 요즘의 화두(話頭)가 힐링인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치유하자(Heal the World)’고 노래한 이후, 힐링은 주위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힐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을 구속했던 빠름을 버리고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첫 단추 아닐까 싶다. 문득 너무 빨리 달리면 경치만 놓치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놓치게 된다.’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귀가 아닐까 싶다.


5분쯤 더 걸었을까 벤치 두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쉬었다가기로 한다. 정상어림에는 쉼터가 없을 거라는 섣부른 예단(豫斷) 때문이다. 하여간 준비해 온 막걸리로 피로를 풀어본다. 하긴 산길이 하도 편하다보니 지친 기색들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오고가는 정담 속에 술잔을 돌리다보니 20분 이상이나 흘러버렸다.



쉼터 부근에서 화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1.5Km/ 화정마을1.8Km/ 복내면사무소4.0Km)을 저금(分家의 전라도 방언) 내보내고 산행을 이어간다.



이후부터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산들에 비하면 가파르다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할 정도로 밋밋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완만한 구간이 곳곳에 섞여있기까지 하다.



능선이 고도(高度)를 높여갈수록 철쭉은 점차 그 개체수를 늘려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주변이 온통 철쭉으로 가득 차버렸다. 산길은 철쭉들 사이로 나있다. 이제 막 꽃 몽오리를 열고 있는 철쭉들에게 눈을 맞추면서 2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오른쪽 북사면(北斜面)에 광대하게 펼쳐진 철쭉군락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철쭉은 상당히 너른 평원 위에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덕분에 주변에는 햇볕을 가려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직사광선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그랬다. “진달래가 봄의 전령이라면 철쭉은 봄의 정점에서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다.”. 햇살이 이렇게 따갑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오월 초하루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이렇게 무더운 걸 보면 올해는 철이 이른 게 분명한 모양이다. 아무튼 철쭉의 유혹은 무엇보다도 강렬하다. 완전한 개화(開花)까지는 아직은 며칠 더 기다려야하지만 이 정도의 선홍빛 아름다움만으로도 나그네를 유혹하기엔 별 무리가 없다.



신라시대의 향가(鄕歌) 중에 헌화가(獻花歌)가 있다. ‘붉디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 한다면/ 저 꽃을 바치겠나이다.’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꽃을 탐내는 수로부인(신라 선덕왕 때 순정공의 처)에게 신비한 노인이 꽃을 바치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꽃이 철쭉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아리따운 귀부인까지 반했겠는가. 그 아름다움을 쫓아 두리번거려 보지만 아직은 조금 덜 여물었다. 아쉽게도 만개를 하려면 2~3일은 더 있어야할 것 같다. 문화행사인 철쭉제례를 55일에 열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점을 감안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철쭉은 5월 초부터 남녘에서 피기 시작한 다음 북상해 5월 말6월 초에 전국 산하를 붉게 물들인다.



군락지의 한가운데에는 벤치를 놓여 두었다. 따가운 뙤약볕에 누가 앉을까마는 등산객을 챙기는 마음만은 고맙기 짝이 없다. 벤치의 뒤에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2개의 바위가 버티고 있다. 마치 보초라도 되는 양 의젓하기만 하다. 바위에 올라서면 조계산과 모후산, 북쪽의 무등산이 아련하다.



사실 계당산의 철쭉은 내놓고 자랑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래봉이나 황매산 등은 차지하고라도 이 부근에 있는 일림산이나 사자산보다도 그 규모(3만여)가 한참이나 왜소하다. 그리고 화사함 또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인파에 묻혀 자기 의지에 관계없이 밀고 밀리는 실랑이를 해야만 하는 유명산들에 비해 호젓한 나만의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나를 더한다면 전국 각지의 철쭉들이 연분홍색을 띠는 데 비해 이곳은 진한 선홍빛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군락지를 빠져나오면 몇 개의 벤치가 놓여있는 널따란 분지(盆地)를 만난다. ‘헬기장(헬기장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계당산 정상0.4Km/ 개기재/ 복내면사무소5.1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곁에 있는 또 다른 이정표(계당산 정상0.4Km/ 개기재(호남정맥구간)2.8Km/ 복내면사무소5.1Km)에 개기재 옆에다 호남정맥구간이라고 부기(附記)를 해놓았다. 그러고 보니 호남정맥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개기재에서 계당산과 봉화산, 군치산, 봉미산을 거쳐 곰치(웅재)에 이르는 제16구간이 말이다. 참고로 호남정맥(湖南正脈)이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주요 산으로는 경각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호남지역의 명산들을 거의 다 품고 있다.




잠시 후 의외의 풍경을 만난다. 굵직한 노송(老松)들이 늘어선 소나무 숲이 나타난 것이다. 여느 철쭉 군락지들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만나왔던 철쭉 군락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한결같았다. 광활한 초원 위에 고만고만한 철쭉들만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 그늘을 가릴만한 나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이라도 축이면서 쉬었다가기 딱 좋은 장소이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늘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요 아래 그늘에서 준비해온 막걸리를 모두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걷고 있는 나그네를 따라 철쭉들이 보조를 맞추고 있다. 철쭉은 사랑의 즐거움이란 꽃말을 가진 예쁜 꽃이다. ‘멀리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입술같다고 표현되고, 길 가던 나그네의 걸음을 자꾸 멈추게 했다는 의미로 척촉(躑躅)’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꽃모양이 비슷하지만,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오는 것이 진달래고 잎과 꽃이 같이 피는 것이 철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침목(枕木)을 깔아 만든 계단을 오르면 널따란 구릉(丘陵)이 나타난다. 그중에 가장 높은 곳을 계당산 정상으로 보면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이 지났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뺐으니 순수하게 걸었던 시간으로 보면 된다.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판독 불가), 그리고 두 개의 이정표(#1 : 쌍봉사3.3Km/ 노동/ 복내면사무소5.5Km, #2 : 쌍봉사 3.3Km/ 개기재 3.2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정상석 뒤편에 계당산의 유래를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판이 하나 보이지만 계양산 정상이라는 글씨를 빼놓고는 모두 다 지워져버린 흉측한 몰골로 방치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계당산(桂棠山)의 원래 이름은 중조산(中條山)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의 기록이나 지도에는 중조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계당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야(視野)가 사방으로 탁트인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주암호 방향의 조계산을 위시해서 모후산과 천봉산, 화학산 그리고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등이 차례대로 펼쳐지는 걸 볼 수 있다. 천봉산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무등산이 아닐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쌍봉사 방향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호남정맥(왼편의 노동방향)과도 헤어짐은 물론이다. 내려가는 길 역시 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내리막 능선에 산길 또한 널찍하면서도 또렷하다. 화순쪽 방향은 길이 닦여있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이다. 달리진 점도 있기는 하다. 올라올 때는 소나무 숲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수한 참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중간에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살짝 올라섰던 산길은 이내 원래의 순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20분 조금 못되어 임도에 내려선다. 그리고 이곳부터 얼마간은 임도를 따른다. 쌍봉사가 위치한 왼편의 화순방향임은 물론이다. 널찍한 임도는 편하다. 대신 나쁜 점도 있다. 햇볕을 가려줄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자칫 여름철에라도 찾았을 경우 소름끼치는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도는 20분 정도 계속된다. 중간에 희미한 오솔길이 보이기도 하지만 무시하고 곧장 임도를 따른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다가 임도를 버리고 오른편 능선을 탄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들머리에 상당히 많은 산악회 리본들이 매달려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상당히 거칠어진다. 길의 흔적이 희미할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나무들까지 가로막고 있다. 한마디로 애를 먹으며 진행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 탓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가다 나타나는 산악회의 리본들만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특히 난감한 구간이 나타날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국제신문의 리본들은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면 쌍봉사로 연결되는 843번 지방도에 내려서게 된다. 그리고 쌍봉사가 있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편 길가에 편백나무가 도열해 있는 멋진 길이다. 내려오는 길, 왼편 산자락에 절간을 닮은 한옥(韓屋)이 그림같이 앉아있다. 표지석을 보니 이불제(耳佛齋)’란다. ‘솔바람에 귀()를 씻고 부처()의 경지를 맛보고 싶은 집()’, 그렇다면 암자가 들려준 이야기의 저자 정찬주선생이 머물고 있는 집이 분명하다. 그의 저서 몇 권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한번 들러볼까 하다가 그의 청정을 깨뜨릴까 두려워 발길을 돌리고 만다. 잠시 후 쌍봉사에서 만날 그의 흔적(漢詩를 우리나라 말로 옮김)들로 대체하기로 하면서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쌍봉사 주차장

도로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저만큼에 천년고찰(千年古刹) 쌍봉사(雙峰寺)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주차장이 쌍봉사의 일주문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10분이 걸렸다. 산행 도중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오늘 걸었던 거리는 총 8.8Km이다. 결과적으로 시간당 3Km를 걸은 셈이니 얼마만큼 산행이 수월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하기 전에 먼저 쌍봉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런데 일주문(一柱門)의 현판이 조금 특이하다. ‘0000라고 써진 게 보통인데 이곳은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이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어쩌면 절의 이름보다는 간직하고 있는 절의 역사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앞의 쌍봉(雙峰)은 이 절을 창건했다는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분명하고, 뒤이어 나오는 사자문(獅子門)이란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열었다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확실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쌍봉사(雙峰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경문왕 때 중국에서 돌아온(문성왕 9, 847)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창건(주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했다. 이후 그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고, 창건주의 도호(道號)를 따 사찰 이름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절의 앞과 뒤에 봉우리가 두 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중건(1628: 인조 6)과 중창(현종 8년과 경종 4)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와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부도비(탑비)‘가 있다. 그 밖에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堂宇)들이 있으니 참조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대웅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四天王)에 놀라 냉큼 통과해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잠시 멈춰 서서 천왕문의 양 기둥이 만들어내는 네모 안에 대웅전을 넣어보기 바란다. 사진전에 출품해도 될 만큼 멋진 풍경이 나타날 것이다. 특히 부처님 오신 날을 코앞에 둔 오늘 같은 날에는 화려한 연등들까지 더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쌍봉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물은 누가 뭐래도 12m 높이의 대웅전이다. 보물(163)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1984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失火)로 건물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2년 수리할 당시의 기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란다. 하여간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전각이 아니라 탑이라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기에 불타버린 것이 더욱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감돌아 난 오솔길을 따라 어느 정도 비탈을 올라가면 트인 곳이 나온다. 거기에 통일신라시대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시대에 걸쳐 첫손에 꼽히는 철감선사의 부도()와 부도비(탑비)가 있다. 철감선사과 관련된 유물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짚고 넘어가 보자. 쌍봉사의 창건에 관한 얘기이다. 동리산 태안사에 있는 혜철(慧澈, 785~861 惠哲이라고도 씀)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무주(지금의 광주) 관내의 쌍봉사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는 쌍봉사가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쌍봉사를 창건했다는 얘기와는 맞지가 않는다. 결국 철감선사가 주석(駐錫)하던 시기에 절의 사세(寺勢)가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의 부도비(탑비)’는 옆에 있는 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기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작이 분명하다. 부도비는 이수의 네 면에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 용의 형상을 현란하게 새겼다. 앞면 가운데에 쌍봉산철감선사탑비명(雙峯山澈鑒禪師塔碑銘)이라는 전액이 두 줄로 새겨져 있다. 윗부분에 불꽃 모양의 귀꽃 세 개를 세웠는데 맨 오른쪽 한 개는 없어졌다.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은 우리 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가받으며, 868(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석조 부도의 기본 양식인 팔각 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대석이 1, 중대석과 상대석이 1, 몸돌이 1, 지붕돌이 1매로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지붕돌 위에는 동그란 찰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 수법에서는 목조 건축 양식을 본뜨고 있어서 그 무렵 건축 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57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나오려는데 오행시(五行詩)가 적힌 시판(詩板)이 보인다.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라는 시가 적혀있는데 초의선사가 최초로 썼던 작품이란다. 조선 후기의 대선사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가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대흥사와 백련사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곳 쌍봉사에서도 한때 참선을 했던 모양이다. 이유 없이 절간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유인 모양이다.


황장산(黃獐山, 942.1m)-촛대봉(721.5m)

 

여행일 : ‘16. 4. 7()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과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

산행코스 : 화개장터삼거리삼각점봉촛대바위촛대봉새끼미재황장산안부모암골쌍계사 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색다른 볼거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거기다 몇 곳을 제외하고는 조망까지도 별로이다. 그런데도 이 산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단 하나가 아닐까 싶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의 5Km 구간, ‘쌍계사 벚꽃 10리 길로 알려진 이 길에서의 꽃놀이를 겸해서이다. 대부분의 산악회들이 벚꽃이 활짝 피는 3월 말에서 4월 중순 사이에 황장산의 산행계획을 잡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지리의 주능선인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不無長嶝, 1,446m) 능선에 딸려있는 황장산과 촛대봉은 순하기 짝이 없다. 보드라운 황톳길은 걷기에 딱 좋고,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봉()과 봉 사이의 골은 깊지가 않다.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 숲, 솔향을 듬뿍 마시며 걷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벚꽃놀이를 할 수 있는 꽃길로 내려서는 게 여의치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길을 사유지(私有地)라는 이유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에 네 절 인심 고약타라는 문구(文句)가 나온다. 그런데 산행 내내 그 문구가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지명인 '부산(富山)’, 즉 지금의 화개 땅에서 꼭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굴어야만 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화개삼거리(하동군 화개면 탐리)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 I.C를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구례·남원 방면으로 달리다가 구례읍과 마산면의 경계인 서시천()을 건너자마자 교차로에서 내려와 하동방향의 19번 국도로 바꿔 타면 버스는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 화개면의 소재지인 탑리에 이른다. 가수 조영남이 부른 유행가 화개장터로 유명한 곳이다.




화개삼거리에서 쌍계사방향으로 40m쯤 떨어진 곳에서 산길이 열린다. ‘화개 철물·건재수앤수 스킨케어사이의 공터 안쪽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보이고, 숲의 한가운데로 나무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르는 이의 기부터 죽이고 보려는 듯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황장산은 1m에도 못 미치는 산이다. 하지만 들머리의 표고(標高)100m도 안되다 보니 고산(高山)으로 알려진 다른 산들보다도 더 높이 올라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이렇게 가파를 수밖에 없었나 보다.



5분쯤 올랐을까 저만큼에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난다. 가파른 오르막에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망대에 오르면 화개면 일대가 발아래에 펼쳐진다.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가 시원함을 더해주고, 그 위에 놓인 아치(arch)형의 남도대교영호남의 화합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대변이라도 하려는 양 아름답기 짝이 없다. 다리의 왼편에 보이는 건물들은 새로 지었다는 화개장터일 것이다.



산길은 편안하다. 가끔은 가파른 곳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은 완만한 능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토종의 소나무들이 울창한 능선은 가끔 갈림길을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정표는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왼편은 구례군이고, 오른편은 화개면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고 산행을 이어가면 될 일이다.



10분 남짓 진행하면 제법 널찍하게 터를 잡은 묘역(墓域)을 지나고, 다시 10분쯤 더 걸으면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짧은 구간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제법 많은 구간이다.




바위지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숨을 고른다. 이제부터 경사가 많이 누그러진다. 그리고 시작부터 함께했던 소나무 숲이 한결 더 울창해진다. 그에 따라 코끝을 스치는 솔향 또한 더욱 짙어진다. 내딛는 발걸음의 속도를 뚝 떨어뜨린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연다. 호흡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늘려본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이런 걸 두고 웰빙(well-being)산행, 아니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쯤 지나면 구례군에서 세운 이정표(황장산4.9Km/ 기촌마을1.9Km/ 법하마을1.2Km)가 보초를 서고 있는 작은재에 이른다. ‘나지막한 고갯마루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는 하동군에서 세운 이정표(황장산/ 구례/ 법하마을/ 화개장터)가 하나 더 있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한다. 이정표의 생명은 지명과 방향, 그리고 거리의 표시인데, 그중에서 거리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의 아래에다 지도(地圖)를 그려 놓았지만 현재위치가 표기되지 않아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든 시설물이니 이왕이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촛대봉으로 향한다. 산길의 풍경은 여전하다. 토종 소나무 숲은 여전히 울창하고, 그 아래에는 진달래들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오르막길의 경사가 아까보다 조금 가팔라졌지만 힘들 정도는 아니다. 하나 아쉬운 점은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가 안 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오늘 산행은 조망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20분 후, 의미 없는 이정표(황장산 4.0Km/ 작은재 0.9Km)를 지났다싶으면 5분 후에는 삼각점(경남 464)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각점봉위에 올라서게 된다. 누군가 삼각점표지판 위에다 ‘583.4m’라고 봉우리의 높이를 표시해 놓았다. 삼각점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진행방향에는 황장산이 있고, 시선을 왼편으로 돌리면 왕시루봉과 문바우등 그리고 그 오른쪽 뒤로 노고단, 돼지평전, 반야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안개가 짙은 탓에 조금만 떨어져도 형상을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망을 포기하고 산행을 이어간다. 앞을 가로막는 봉우리를 피해 우회로(迂廻路)를 만들 줄 아는 마음씨 고운 길이다. 7분 후, ‘삼신마을 갈림길’(이정표 : 황장산3.4Km/ 삼신마을/ 작은재1.5Km)을 만난다. 이정표를 따르면 되니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황장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갈수록 안개가 짙어지더니 이젠 십여 미터만 떨어져도 사물의 형상을 구분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길가 풍경만 둘러보며 산행을 이어갈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막의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거기다 붉게 피어난 진달래꽃 무리들이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12분 후, 돌담으로 둘러싸인 특이한 무덤을 지나니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촛대봉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촛대바위이다. 일부 화개 사람들은 남근석(男根石)이라고도 부른단다. 하지만 일부 지도에는 올빼미바위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촛대바위를 지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계속해서 가파르지만은 않다. 가파르다가도 완만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내리막길도 나타난다. 그러면서 산길은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능선이 고도를 높여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 간다. 조금만 떨어져도 사물의 형상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기암괴석들이 그저 그렇고 그런 바위들로 변해버리는 안타까운 여정이 계속된다.




촛대바위에서 20분 남짓 더 걸으면 촛대봉 정상에 선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오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황장산 1.9Km, 농평마을 6.6Km/ 둘레길(작은재) 3.0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례군에서 세운 것들이다. 하동군에서 세운 또 다른 이정표도 보인다. 산행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정표이다.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인 정상은 시야(視野)가 좋지 않은 편이다. 하긴 오늘 같이 안개가 짙게 낀 날에는 시야가 트인다고 해도 별 볼일 없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 촛대봉은 봉래봉 또는 삼각봉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촛대봉 정상에서 삼신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국제신문 산행팀이 하산했던 코스이다. 하지만 우린 황장산으로 향한다. 촛대봉을 뒤로하고 신우대숲 사이로 난 산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면 10분이 조금 못되어 새끼미재에 이르게 된다. 새끼미는 고양이를 일컫는 하동지방의 방언으로 이곳에 고양이 형상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바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바위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



새끼미재는 하동군에서 세운 이정표(황장산/ 촛대봉)가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작은 팻말형의 이정표가 더 눈길을 끈다. 누가 세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의 지명을 새끼미재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길은 양쪽으로 나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은 조동마을, 오른편은 용강마을로 연결된다. 조동마을에 비해 용강마을 방향의 길이 훨씬 더 뚜렷하지만 출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사유지이므로 출입을 하지 말라고 적힌 종이가 비닐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새끼미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급격히 가팔라진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구간일 것이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바위 벼랑 위에 만들어진 데크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같은 날에 전망대는 있으나 마나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물도 잘 알아볼 수 없는데 어찌 멀리 있는 풍경까지 기대 할 수 있겠는가. 전망대의 방향으로 보아 지나온 촛대봉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삼신봉과 시루봉, 형제봉 등 인근의 높은 산들이 조망될 것 같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온통 안개만이 자욱할 뿐이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아까보다는 정도가 좀 덜하지만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촛대봉과 황장산의 고도차이가 200m가 넘는데 이를 극복하느라 서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12분 후, ‘중기능선 삼거리’(이정표 : 황장산 1.4Km, 평도삼거리 2.7Km/ 천왕사 3.1Km)를 만난다. 왼편은 조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천왕사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중기능선 삼거리를 지난 산길은 그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8분 후에는 이정표(황장산 0.7Km/ 작은재 4.2Km)가 보초를 서고 있는 887m봉에다 올려놓는다.



이후부터 산길은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우선 오르막만을 고집하던 산길이 오르내림으로 바뀐다. 그리고 엉성하긴 하지만 밧줄난간까지 설치된 바윗길도 나타난다. 거기다 산죽(山竹) 숲도 빼놓을 수 없다. 어른의 허리높이 정도로 자란 신우대들이 펼치는 푸르른 세상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6분 정도를 진행하면 전위봉을 만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황장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촛대봉에서 정확히 1시간,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40분이 조금 더 지났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황장산 정상은 구례군에서 만든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평도삼거리 1.3Km, 농평마을 4.7Km/ 남도대교 8.2Km), 그리고 삼각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황장산(黃獐山)은 그 근원을 노루()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인근 반야봉의 아래에 노루목이란 지명이 있다. 반야봉에서 불무장등으로 뻗어 내린 산세(山勢)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듯한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노루목의 노루와 황장산의 노루 ()’자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 이유로 불무장등(不無長嶝, 1,446m) 능선에 위치한 황장산의 뿌리가 반야봉이라는 것을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하동문화원에서 발행한 하동군 지명지(河東郡 地名誌)’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황장산의 한문 표기가 잘못되어, 지금은 누른 노루라는 황장산(黃獐山)’으로 쓰고 있으나 원래의 지명은 정상(고개)까지 멀고도 먼 산이라는 뜻인 항장산(項長山)’이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지리산 방향에 조망안내도까지 세워 놓았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다른 이의 글로써 대신해 본다. “지리산 자락에 발을 담근 황장산의 또 다른 면모가 펼쳐진다. 지리산은 서쪽 왕시루봉으로부터 북쪽 노고단, 반야봉을 지나 동쪽의 영신봉으로 주능선을 이어간다.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은 삼신봉을 지나 시루봉과 형제봉을 세우더니 섬진강을 만나 그제야 숨을 죽인다.” 안내도에 천왕봉까지의 능선을 모두 그려놓은 걸로 보아 지리산 능선 전체가 다 시야에 잡히지 않을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석 뒤, 그러니까 이정표의 평도삼거리·농평마을 방향이다. 좁다란 진달래 터널을 빠져나간다.



잠시 후 로프에 의지해서 바윗길을 짧게 내려섰다가 맞은편의 작은 바위봉 하나를 넘으면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5분 정도 후에는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하산코스로 예정된 모암골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하지만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산나물 불법채취 금지라는 현수막까지 걸어 놓았다.



철조망을 피해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산나물만 채취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잠시 후 개인사유지이니 돌아가라는 표지판을 만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처지는 선두대장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는 모암골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생김새까지도 범상치 않은 바위이다. 지금 내려가는 골짜기의 이름이 모암골인데, 혹시 이 바위의 이름이 모암이 아닐까 하여 카메라에 담아본다.



산길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앞서간 일행들이 지나가며 새로 만들어 놓은 듯도 싶다. 그러다보니 진행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내려가는 길이 사나운데,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지시지조차 찾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 살펴보면 산악회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눈에 띌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작은 개울이 나타난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줄기가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쉽게 건너지 못할 정도로까지 물살이 거세져 버린다.



조금 반반하다 싶어 나아가다보면 계곡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아니다 싶어 다시 계곡으로 돌아오면 바윗길로 변하면서 길은 다시 험해진다. 거기다 흔들거리는 바위를 건너뛰며 계곡을 가로지르기까지 해야 하니 시간은 한없이 지체된다.



푸른 이끼들이 점령하고 있는 계곡은 별천지(別天地)이다. 언젠가 KBS-TV의 촬영팀과 함께 둘러봤던 삼척의 이끼폭포만큼은 아니어도 일반인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외진 곳에 위치한 덕분에 아직까지도 때를 덜 탔기 때문일 것이다.



계곡은 숫제 물의 나라이다. 크고 작은 바위들을 넘거나 에돌면서 수많은 폭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디선가 눈에 익었던 풍경이다. 그렇다. 2년쯤 전에 들렀던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에서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보았던 것 같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크로아티아의 영광'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가지고 있는 플리트비체국립공원은 호수(湖水)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윗 호수의 물이 아래 호수로 흘러내리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폭포들이 더 경이롭게 보였었다. 사실 이곳의 물줄기들은 그 규모가 훨씬 작고 폭포들의 숫자 또한 플리트비체국립공원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럼에도 그때의 광경이 연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부에서 내려선지 50분 정도가 지나면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언제쯤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외딴 움막 한 채를 만나게 된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면 산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할 때나 이용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이곳까지 내려오는 동안 거미줄처럼 널려있던 고로쇠 채취용 호스 등을 보관하는 자재(資材) 창고일 것이고 말이다.



움막을 지나면서 산길은 또렷해진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굵어진 물줄기가 사람의 통행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15분쯤 내려갔을까 계곡이 철조망으로 막혀있다. ‘개인사유지이니 무단출입할 경우 고발조치하겠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까지 내걸려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유지의 경계선을 따라 설치된 금()줄을 따라 길이 나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오른편으로 향한다. 그리고 사면으로 난 산길을 따라 언덕 두어 개를 넘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만큼 아래에 차밭이 보인다. 전에 가보았던 보성의 차밭에는 비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너른 규모이다. 이곳 쌍계사 인근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한 신선(神仙)들이 즐겼다는 녹차, 즉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으로 만든다는 죽로작설차(竹露雀舌茶)의 원산지이라고 했는데 맞는 얘기인 모양이다. 그러니 저 정도의 차밭이 있는 게 당연할 테고 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곳을 부산(富山)’으로 적고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해서이다. 해동의 문장 고운 최치원선생이 신선으로 돌아가기 전 말년(末年)을 지냈고,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成佛)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먹고 살 걱정 없이 작설차나 마시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신선이나 부처의 삶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 부근 쌍계사 아래 장죽전(長竹田)에는 차의 시배지(始培地)가 있다. 828년 신라 흥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던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다 이곳에 심은 것이 국내 차 역사의 효시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 인근에는 수령 천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도기념물 제264)도 있다. 이 나무에서 딴 녹차 100g은 지금도 2000만 원을 호가한다니 믿고 말고는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산행날머리는 쌍계사주차장(화개면 용강리)

차밭을 지나면 용강리, 산골치고는 꽤나 큰 마을이다. 골목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다원(茶園)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띈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차밭들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그리고 잠시 후 쌍계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10분이 걸렸다. 거의 쉬지 않고, 거기다 속도까지도 줄이지 않은 채로 걸었는데도 5시간을 넘겼으니 생각보다 산행거리가 길었던가 보다. 참고로 이곳에서 화개장터까지의 5길은 쌍계사 벚꽃 10리 길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이 길은 길바닥에 흩날리는 꽃잎들과 화심(花心)에서 꿀을 핥아내는 벌들의 분주함, 그리고 꽃 길 옆 개천에서 노니는 은어 떼의 한가함이 어우러지며 춘색(春色)을 다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이곳의 풍광이 빼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악회(산두레)에서 없는 길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이곳으로 하산지점을 잡은 이유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꽃이 져버린 벚나무들은 붉은 속 내장을 흉물스럽게 내보이고 있을 따름이다. 벚나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흉한 몰골이다. 어제 내린 봄비의 양이 계절에 맞지 않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부르는 혼례길목이란 길의 이름은 그 목적을 다한 셈이다. 벚꽃 아래에서 혼담을 나누어야 백년해로(百年偕老)를 기약할 수 있는데, 그 꽃이 다 저버렸으니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하산 코스로 잡았던 모암골은 오랜만에 만난 절경이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협곡이 비록 거대하지는 않지만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브러진 계곡에는 물의 양도 많았다. 그리고 그 물줄기들은 계곡의 바위들을 넘거나 에돌아 내리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폭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이 생각났다고 하면 믿을는지 모르겠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에 꼽힐 정도로 절경이라는 플리트비체국립공원은 호수(湖水)로 유명하다. 하지만 난 호수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폭포들이 더 좋았었다. 사실 모암골의 물줄기들은 그 규모가 훨씬 작고 폭포들의 숫자 또한 플리트비체국립공원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럼에도 그때의 광경이 연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절경을 그냥 방치하지 말 것을 소관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 정중하게 권해본다. 등산로 등을 조금만 정비한다면 하동에는 또 하나의 멋진 휴식처가 탄생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토지 소유자들과의 협의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중상봉(490m)-계족산(鷄足山, 705m)

 

산행일 : ‘16. 4. 2()

소재지 : 전남 구례군 간전면과 문척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간전농공단지(이정표)병풍바위갈림길중상봉계족산삼각점봉광대바위삼선재국시봉 왕복화약고삼산교(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그럼 일찍 귀가할 수 있겠네?’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지우(知友)의 목소리가 무척 밝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산행계획 때문에 포기할 뻔 했던 술자리가 다시 살아난 것이 꽤나 반가웠던 모양이다. 꽤나 산에 이력이 붙었다는 그조차도 계족산을 그저 황톳길로 유명한 대전(대덕구)의 산으로 알았을 정도(계족산은 이 외에도 영월과 순천에 하나씩 더 있다)였다. 그만큼 구례의 계족산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섬진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의 위명에 눌려 세간에 알릴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빼어난 산세는 어느 유명산에 비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난 바윗길은 스릴을 느끼기에 딱 좋고, 곳곳에다 멋진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윗길이 아닌 구간은 폭신폭신 한 것이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거기다 입소문을 덜 탄 탓에 한적하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시간이 날 때 한번쯤 더 찾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간전농공단지 옆 도로변(구례군 간전면 간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를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구례·남원 방면으로 달리다가 구례읍과 마산면의 경계인 서시천()을 건너자마자 교차로에서 내려와 하동방향의 19번 국도로 바꿔 타면 버스는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 토지면사무소를 지나 동방천삼거리(토지면 파도리)에 이른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간전교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면 간전면의 소재지인 간문리이다. 이곳 대평마을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농공단지가 끝나자마자 산행들머리가 나온다. 하지만 우리를 태운 버스는 다른 코스를 이용했다. 벚꽃놀이를 나온 행락 차량들이 꽉 들어찬 19번 국도를 타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번 국도로 들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구례읍시가지로 들어선 다음 문척교차로(구례읍 봉서리)에서 좌회전 861번 지방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 것이다. 섬진강을 끼고 내려오기는 19번 국도와 마찬가지. 다만 이번에는 섬진강을 왼편에 끼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가 들머리에 이정표(계족산 3.3Km, 계족산 7.7Km)와 계족산등산로가 그려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행방향 산자락으로 향하는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왼편에 간전농공단지의 건물들이 보이니 참조한다. 잠시 후 과수원 안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뒤돌아보면 영호남을 경계 짓는 섬진강 강줄기가 나타난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길의 양편을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꽃길이 포위하고 있는 형세이다. 섬진강이 자랑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 뒤로는 왕시루봉과 형제봉, 그리고 노고간 등 지리산 줄기가 거대하게 펼쳐진다.



산행을 시작하고 10분쯤 지나면 능선갈림길(이정표 : 계족산 2.6Km/ 간전농공단지 0.7Km)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농로가 끝나면서 등산로는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거기다 무덥기까지 하다. 진달래가 활짝 핀 오솔길을 걷고 있건만 날씨는 벌써 초여름에 가까울 정도로 무더워져버린 것이다. 길바닥에 널브러지듯이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0분 조금 못되면 병풍바위 삼거리’(이정표 : 계족산2.1Km/ 증평마을2.4Km/ 간전농공단지1.2Km)를 만난다. 왼편 증평마을로 가는 길에 병풍바위가 있단다. 하지만 입구에 위험구간이니 낙석이나 미끄럼을 주의하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병풍바위 구간을 경유해서 중심봉으로 올라갈 수 있음에도 산악회의 진행방향 표시지가 오른편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병풍바위 방향으로 들어서고 본다. 뭔가 색다른 풍경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이 경고판이 예고하고 있는 위험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가지 않았다. 추락방지용 철망을 따라 4~5분 정도를 나아가봤지만 뚜렷한 볼거리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창한 잡목(雜木)들에 가려버린 바위벼랑은 그저 그렇고 그런 정도의 눈요깃거리에 불과했다.



그나마 왼편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위안을 삼는다. 농공단지를 품은 간전 들녘은 새로운 생명들이 만들어 내는 푸르른 세상이고, 섬진강으로 향하는 길가는 온통 하얀색 천지이다. 길 양편에 늘어선 벚나무들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4분 정도 가파르게 올라서면 화정갈림길’(이정표 : 계족산1.9Km/ 간전농공단지1.4Km),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이 화정마을로 연결되는 모양이지만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제부터 산길은 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능선만 따르게 되니 굳이 길 찾기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마침 진달래꽃까지 무리지어 피어있어 조금은 여유로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7분 후,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병풍바위의 위인 모양이다. 바위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백운산 자락 능선이 확연히 드러나고, 들머리였던 간전면 소재지 일대도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섬진강과 지리산 왕시루봉도 가깝게 다가온다.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완만했다가 가팔라지기를 반복하는 오르막길이다. 이 구간도 역시 진달래들이 활짝 피어있으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는 없겠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면 중상봉 정상이다.



중상봉의 정상은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능선 상에 약간 튀어나온 지점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 때문인지 정상표지석도 세워놓지 않았다. 만일 중상봉(495m)’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계족산1.1Km/ 중평마을1.5Km/ 간전농공단지2.2Km) 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계족산으로 향한다. 밋밋한 능선길이다. 아래로 내려간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 전에 올랐던 중상봉이 산봉우리가 아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잠시 후 광산 김씨를 배우자로 둔 가문의 묘역(墓域)을 지나게 되고, 7분 후에는 이정표(계족산0.8km/ 화정마을4.0km/ 간전농공단지2.5km)가 보초를 서고 있는 화정재(480m)에 내려서게 된다.




산길은 화정재를 지나면서 가팔라진다. 하지만 그 정도가 미미해서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6분 정도를 오르면 멋들어지게 생긴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위 위로 오르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간전면의 청보리밭이 눈길을 붙잡고,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백운산 자락이 또렷하다.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허리를 곧추세우기 시작한 산길은 언제부턴가 힘이 들 정도로 가팔라져버렸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주변의 바위들이 눈요깃거리까지 만들어주니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다.



그렇게 20분 남짓 오르면 드디어 무인산불감시탑이 보초를 서고 있는 계족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남짓 걸렸다. 계족산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그저 계족산 정상(703m)'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삼산리4.4Km/ 간전농공단지3.3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짙은 연무(煙霧)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저 다른 이의 글로써 이를 대신해 본다. “정상에서는 서쪽의 구례읍 방면 들판과 동쪽의 백운산 자락 국사봉과 밥봉 등이 눈에 들어오고, 북쪽의 지리산 능선도 훤하다. 가깝게는 노고단에서 멀게는 천왕봉까지 지리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참고로 계족(鷄足)닭의 발을 한자로 적은 낱말이다. 그렇다면 계족산이란 이름은 사방으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의 생김새가 흡사 닭의 다리를 빼다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지 않나 싶다. 언제나 봐도 우리네 선조들은 위대하다. 산줄기의 생김새는 하늘에서나 볼 수 있는 법인데 비행기를 타지 않고서도 그런 산세를 감지해낼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삼산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10분 조금 못되어 안부를 만난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이는 계족산 정상보다 더 높은 봉우리를 만나게 될 거라는 예고일 것이다.



입소문을 덜 탄 탓에 산길은 아직 때가 묻지 않았다. 하지만 길은 국립공원에 못지않을 정도로 반듯하게 잘 나있다. 거기다 부지런한 지자체(구례군)는 곳곳마다 이정표까지 세워 놓았다. 마음 놓고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마침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산길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연무 때문에 조망은 트이지 않지만 다른 볼거리가 눈길을 끈다. 그중의 하나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이다. 뭔가를 기어오르는 거북이의 형상을 쏙 빼다 닮았다.



또 다른 하나는 노송(老松)들이다. 하나의 기둥에서 자라난 여러 개의 가지들이 하나 같이 휘휘 늘어져 있다. 그것도 모두가 한 방향으로 향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흔들바위 모양의 자그마한 바위가 도드라져 보이는 '730m이다. 삼각점(하동 309, 1985 재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삼각점봉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시야(視野)가 탁 트이는 이 봉우리는 계족산 정상보다 25m가 더 높다고 한다. 내려온 것보다 올라온 높이가 더 높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인가 보다.




연무에 가로막힌 조망을 포기하고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작은 봉우리 하나를 더 넘으면 진행방향에 서슬이 시퍼런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산길은 이 봉우리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잠시 아래로 내려서서 봉우리를 우회한 후 밧줄을 이용해 반대편 능선 위로 오르게 되는 것이다.



반대편 능선에서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암봉의 위로 올라보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데미안(Demian)’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는 이 문장을 발상의 전환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에 따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니 어찌 작은 모험을 피할 수 있겠는가. 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런 내 모험은 헛되지 않았다. 계족산의 백미(白眉)인 광대바위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버릴 수가 없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곳이 천 길 단애(斷崖)의 위라는 것까지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암봉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는 연무를 원망하며 다른 이의 글로서 위안을 삼아본다. “남동쪽으로 갈미봉과 월출봉 도솔봉 백운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와 주변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모습으로 펼쳐지고 진행 방향 다음 봉우리인 광대바위 전망대도 드러난다.”




조심조심 바윗길을 내려오니 광대바위 이정표(삼산리마을3.4km/ 계족산1.0km, 간전농공단지 4.3km)가 반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올랐던 암봉이 광대바위였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조금 전의 암봉에 비하면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가파른 바윗길을 내려선다. 순탄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법 스릴을 느끼게 해주는 구간이다. 하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안전로프까지 매달려 있어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바윗길을 내려섰다가 다시 짧게 오르면 이번에는 광대바위 전망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삼산리마을3.2km/ 계족산1.2km, 광대바위 0.2km)가 반긴다. 이곳이 광대바위 능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여간 이곳에서는 직각으로 깎아지른 절벽의 위용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금정리(문척면) 방향으로 뻗어나간 능선도 나름대로 볼만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전망대에서서 내려가는 길, 길가에 늘어선 진달래 무리들이 연분홍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유난히도 붉다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다른 산들에서 보아오던 진달래꽃들보다 상당히 더 붉다. 어느 봄날 산에서 만난 꽃 잔치, 그 아름다움에 겨워 유행가 한 자락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



10분쯤 내려섰을까 도드라진 바위가 나타난다. 조망이 트이는 바위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무심코 계속해서 능선을 따를 경우 중산리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왼편 산비탈을 따라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난 산길은 꽤나 험하다. 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들을 요리조리 잘 피하고 있지만 비탈의 경사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가파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을 왔다갔다 갈지()자로 만들어 경사를 죽여 놓았고, 거기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으니 조심해서 붙잡고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전망대를 나선지 25분쯤 지나면 삼신재이다. 이정표(매재마을입구5.1km/ 삼산리마을2.8km/ 계족산1.6km, 간전농공단지 4.9km)에는 삼산리능선 삼거리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하산 길은 왼편이지만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국시봉에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능선을 7분 정도 오르면 국시봉 정상(이정표 : 매제마을 입구4.6Km/ 계족산2.1K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국시봉 정상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정상의 한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는 중산리로 연결되는 능선이, 그리고 그 너머에는 오산(등주리봉)의 산줄기가 잘 조망된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이 구간도 역시 무척 가파른 편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수월한 탓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두텁게 쌓인 낙엽으로 인해 미끄러운 편이니 엉덩방아를 찟지 않도록 주의만 하면 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면 임도(林道)를 만난다. 이정표(삼산리마을 2.2km/ 계족산2.2km, 광대바위 1.2km)에는 안골능선 갈림길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는 꽤나 꼬불꼬불하게 나있다. 산자락의 경사가 가파른 탓일 게다.



임도를 따르다가 올려다본 광대바위 능선, 우람한 바위절벽이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만든다.


산행날머리는 삼산교() 옆 정자(간전면 삼산리)

임도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임도삼거리'(이정표 : 삼산리 1.8Km/ 계족산 2.6km, 광대바위 1.6km)를 만나고 이어서 10분쯤 더 걸으면 화약저장고가 나온다. 그리고 13분쯤 후에는 저만큼에 삼산마을이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조금 쉬었지만 잠깐이기 때문에 감안을 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다리 아래에서 땀을 씻고 정자에 걸터앉아 하산 주를 마신다. 감로주(甘露酒)가 따로 없다. 아름다움에 푹 빠졌던 산행이 그 원인이지 싶다.



부용산(芙蓉山, 609m)

 

산행일 : ‘16. 2. 27()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용산면과 관산읍, 칠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운주마을삼밭골능선수리봉부용산부용사운주저수지운주마을(산행시간 : 3시간 15)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장흥에 있는 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천관산을 떠올린다. 그리고 제암산과 사자산, 일림산이 뒤를 잇는다. 그 외에도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억불산과 천년고찰 보림사를 품은 가지산, 그리고 산성(山城)을 끼고 도는 수인산 등 괜찮은 산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장흥의 3대 명산으로 부용산을 꼽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고 한다. 바윗길을 품은 산세(山勢)나 조망(眺望)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기다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투쟁지라는 역사적 의미까지 지니고 있으니 어찌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부용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하지만 주능선 삼거리에서 수리봉을 거쳐 부용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바위를 잡아야만 오를 수 있는 바윗길은 아니지만 조망만큼은 시원시원하다. 동쪽에는 용산면의 풍요로운 들녘, 그 너머로 철쭉으로 유명한 제암산과 사자산, 일림산을 품은 호남정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만덕산과 주작산, 두륜산, 달마산이 손짓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억새로 유명한 천관산, 북쪽은 편백나무 숲 휴양림이 있는 억불산이 고개를 내민다. 결과적으로 한번쯤 더 찾아도 좋을 만큼 괜찮은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운주마을(장흥군 용산면 운주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장흥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관산방면으로 내려오면 잠시 후 용산면(장흥군)의 소재지인 접정리가 나온다. 이곳 용산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운주마을에 이르게 된다. 구름이 산마루에 걸려서 머무는 날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란다. 참고로 산행들머리인 용산면의 원래 이름은 장흥의 남쪽이라고 해서 남면 또는 남상, 남하면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36년에 부용산에서 이름을 따와 용산면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만큼 부용산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마을에 이르면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오백년 가까이 묵은 당산나무로 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해놓았다. 나무 앞에 제단(祭壇)이 만들어져 있고, 입구에 금()줄까지 쳐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 주민들이 신성(神聖)시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행 후에 만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약 150년 전부터 매년 음력 115일이면 이 나무 아래에서 별신제(別神祭)를 지낸단다. 제사를 잘 지내면 마을 주민은 물론 외지에 나간 사람들까지 무병·무탈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마을의 수호수(守護樹)인 셈이다.




체험장 옆으로 난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등산안내도외에도 산촌생태마을 조성 안내판약다산 생체 체험공원 안내판등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내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운주마을은 생태체험마을이다. 마을 주변 산에다 표고버섯과 산약초, 산채류 등을 재배하는 한편, 마을 방문객을 위한 주요 진입로를 정비하고 산약초 재배단지를 활용한 산약초 축제 등을 열고 있다. 이런 활동이 인정을 받아 산림청 주관으로 실시한 2009산촌생태마을 평가에서 우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체험장 앞에는 디딜방아가 만들어져 있다. 아마 이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해오던 방아를 옮겨놓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옆에 둥그런 구() 위에다 곤충 두 마리를 얹어놓은 조형물이 보인다. ‘쇠똥구리란다. 쇠똥구리란 본디 쇠똥을 뭉쳐서 굴리는 곤충이다. 그렇다면 둥그런 구는 쇠똥일 것이다.



마을 안길을 지나면 저만큼에 운주저수지가 나타난다. 길은 저수지 조금 못미처에서 둘로 나뉜다. 하지만 어디로 가더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으니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부용사를 거쳐 정상에 이르게 되고, 수리봉을 먼저 거치고 싶다면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된다. 다만 갈림길에 세워진 이정표(등산로, 오도재1.8Km/ 부용사·용샘, 부용산 정상1.7Km)에 현혹되지 않는 주의는 필요하다. 뜬금없이 오도재를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길로 들어서더라도 오도재를 갈 수는 있다. 주능선삼거리까지 오른 뒤에 왼편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산의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다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겠는가. 그래서 뜬금없다는 표현을 썼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는 입구 양쪽에 대나무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금()줄을 쳐놓았다.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앞에도 금줄이 쳐져 있었던 것을 보면 마을에서 제사(祭祀)라도 지냈는가 보다. 아무튼 대나무 이파리가 아직까지도 싱싱한 것을 보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정월 대보름관련 행사였지 않나 싶다.



통나무계단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주민들이 삼밭골이라 부르는 능선이다. 잠시 후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비록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땀께나 쏟아야만 하는 코스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거리는 길지가 않다. 6~7분 정도가 지나면 산길은 그 기세를 뚝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기세를 죽였다고 해서 오르막길이 아주 없어져버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긴 완경사(緩傾斜)와 짧은 급경사(急傾斜)가 번갈아가며 나타날 따름이다. 길가는 온통 참나무 천지, 간혹 소사나무들도 섞여 있다. 그런데 그 참나무들이 소사나무를 닮았다. 남해안의 산들 대부분, 아니 이곳 부용산의 주능선만 해도 소나나무가 주인노릇을 한다. 소사나무에 빌붙어서 살다보니 생김새까지 닮아버렸나 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면 비석까지 갖춘 수원 백씨무덤이 나온다.




무덤을 지나자마자 산죽(山竹)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울창하긴 하지만 어른의 허리춤에나 닿을 정도로 키가 작아 시야를 가로막지는 않는다. 이런 풍경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부용산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산이 온통 산죽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이는 약다산(藥多山)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은 아닌 것 같다. 약다산이란 산에 약초(藥草)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저렇게 산죽들이 많은 곳에서는 약초가 자라날 것 같아 보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무덤을 지나서도 산길의 풍경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소사나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밀도(密度)를 높여가고, 산길의 경사 또한 점차 가팔라져 간다는 점이 달라졌을 따름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면 주능선삼거리(이정표 : 부용산 정상1.9Km, 부용사 2.8Km/ 오두재(임도)0.7Km, 관산 성산계곡/ 운주마을1.8Km)에 올라서게 된다.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용산 정상방향이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중간에 수리봉을 거치게 되니 참조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산길은 평탄해진다.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능선을 따르다보면 가끔 거대한 바위들을 만나기도 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바위까지는 접근할 수가 없다. 빽빽하게 들어찬 잡목(雜木)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행정기관에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위 주변의 잡목들을 조금만 제거했더라면 등산객들이 좋아하는 멋진 전망대가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14분쯤 걸으면 무인산불감시탑이 나온다.




산불감시탑을 지나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비록 거대한 암벽(巖壁)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바위를 딛고 넘는 등 나름대로 풍치가 있는 암릉이다. 그리고 석다산(石多山)이란 이름이 왜 붙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구간이다. 길가에는 철쭉과 진달래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꽃이라도 활짝 핀다면 바위와 어우러져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를 만들어낼 게 분명하다.



게다다 바윗길을 걸으며 즐기는 조망 또한 만만찮을 게 분명하다. 오늘은 연무(煙霧)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지만 주변의 명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암만과 다도해의 풍경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단다.




수리봉 근처는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 베틀바위도 있다. 동학농민혁명 때 아녀자들이 바위 아래에서 베를 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부용산은 동학농민혁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산이다. 1897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봉준 장군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었던 이방언이란 장군이 있었다. 그와 그를 따르던 장흥 사람들이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마지막 보루로 삼아 끝까지 항전하다 일본군과 관군에 전멸당한 한이 서린 역사를 안고 있는 산이 바로 부용산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바윗길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수리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 만이다. 비좁기 짝이 없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정상석이 없는 곳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정상표지판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형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봉우리라는 것이 그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산행에 이력이 붙은 산꾼들이 아니라면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게 분명하다.



수리봉에서 내려선다.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결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주변의 나무들에 의지해가면서 조심조심 내려선다.



안부로 내려섰던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능선은 언제부턴가 소사나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수리봉을 내려선지 10분쯤 지나면 다시 바윗길이 시작된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암반 위에 자리를 잡는다. 시야가 막힘없이 터지는 곳이다. 나도 집사람 곁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준비해온 주전부리를 꺼내놓는다. 막걸리 한잔 걸쭉하게 들이키는데 한줄기 바람이 볼을 간질이며 지나간다. 보드라운 바람결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렇게나 추웠던 엊그제의 추위도 찾아오는 계절만큼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허나 아쉬운 점도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다를 향해 고개 숙인 나지막한 산야(山野)들이 짙은 연무(煙霧) 속에 갇혀 버렸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아까 쉴 때에는 왼편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겼는데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 운주마을과 운주저수지가 또렷하고,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그 뒤편에는 용산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바윗길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굳이 붙잡지 않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바윗길이니 위험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시선을 자유로이 돌릴 수 있는 여유까지 생김은 물론이다. 좌우로 펼쳐지는 시원스런 조망을 실컷 즐길 수 있는 구간이란 얘기이다. 비록 오늘은 그게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능선에서 만난 기암(奇巖), 매의 머리를 쏙 빼다 닮았다. 만일 수리봉의 전체 모양이 매의 형상을 닮지 않았다면 이 바위에서 그 이름의 원천을 삼아도 되겠다.



바윗길이 끝났다 싶으면 산길은 보드라운 흙길로 변한다. 이후부터는 육산이 갖는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부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수리봉을 내려선지 30분 만이다. 참고로 부용산(芙蓉山)은 연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가에서는 부용화를 불교를 상징하는 귀한 꽃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풍수(風水) 전문가들은 부용산을 연화부수형의 명산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밖에도 부용산은 약초가 많다 하여 약다(藥多), 부처가 솟을 산이라 하여 불용(佛聳), 돌이 많아 석다(石多)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널따란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장흥 25. 1990 재설), 그리고 이정표(부용산 0.9Km, 용산 운주 2.0Km/ 오두재 2.5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은 또한 쉼터로 이용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한쪽 귀퉁이에 놓아둔 평상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등산객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이 모든 여유가 짧은 산행코스 덕분이 아닐까 싶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예외이다. 아직까지도 연무가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앞서 다녀간 사람들의 글로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천관산과 제암산이 바로 이웃하고 억불산이 어깨를 스친다. 동쪽으로는 득량만, 서쪽으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일단 올라가보면 남도의 끝자락에 이런 명산도 있었는가.’라고 감탄했다던 그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다. 장구목재 방향이다. 잠시 후 주능선삼거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장구목재를 거쳐 괴바우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다. 그런데 진입제한이라는 경고판이 통행을 막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민들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집사람의 투정으로 괴바우산을 가지 않기로 한 이상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이곳에서 곧바로 하산하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부용사라는 산사(山寺)까지 덤으로 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장구목이란 장구의 목처럼 움푹 파인 모양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장사 이맹(李孟)이 이곳에서 활을 쏘아 왜적을 죽여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산죽(山竹) 숲 사이로 난 하산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길을 잘 닦아놓아서 내려서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갈림길에서 5~6분쯤 내려오면 이정표(부용사 0.7Km/부용산 정상 0.1Km)가 보이고, 이어서 저만큼에 샘 하나가 나타난다. 안내판까지 갖추고 있는 용샘이다. 예로부터 부용산의 석간수(石間水)는 만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 석간수는 골짜기마다 쉼 없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 석간수 중의 하나가 바로 용샘이 아닐까? 그렇다면 두 말할 것 없이 마시고 봐야 할 것이다. 마침 표주박까지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이 썩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용샘은 넘치지 않고 고여 있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 법이다. 집사람이 마시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병자(病者)들이 이 용샘의 물을 마시면 병이 나았단다. 그리고 아주 심한 가뭄을 빼고는 물이 마르지 않는단다. 수량(水量)이 풍부하다는 안내판의 글귀가 맞는다면 등산로를 정비할 때 물길을 조금 터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약효가 좋다는 물을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없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이곳 용샘은 가뭄이 심할 때 주민들이 개를 잡아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곳이란다. 왜 하필이면 개였을까? 농담이지만 몸보신을 겸한 제사였을지도 모르겠다. 무더운 여름철에 개를 잡아 몸보신을 하는 게 풍습이던 시절도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살아있는 개의 목을 친 다음 피를 용샘의 바위벽에 발랐단다. 그러면 용()이 지저분한 개의 피를 씻어버리기 위해 비를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서운함을 달래며 부용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반반하던 산길은 잠시 후 가파르게 변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게끔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발길이 편하면 주변 풍광이 눈에 잘 들어오는 법이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수리봉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여성의 젖가슴을 닮았다. 산의 이름으로 보아 독수리를 닮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조금 더 눈에 힘을 주면서 바라본다. 맞다. 매의 부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용샘에서 부용사까지는 제법 먼 편이다. 하지만 가끔가다 터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내려가다 보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내려가면 부용사(이정표 : 용산 운주마을 1.2Km/ 부용산 정상 0.8Km)에 이르게 된다. 일반 여염집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부용사는 절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절간 앞 고목(古木) 아래에 모셔진 돌부처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절간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늘상 보아오던 단청이 화려한 절간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소속의 사찰이다. 고려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를 증명할 문헌(文獻)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말 동학혁명 때 전소(全燒)되었다고 했는데, 근래에 새로 지었나 보다.



이곳 부용사는 용산벌에서 피어오르는 운무(雲霧)와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민들이 자식들의 성공을 비는 기도처로도 유명하단다. 절에서 내려오는 길에 지나가는 차량을 4대나 만날 수 있었다. 자그마한 사찰 치고는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눈여겨 봐둘 것도 없어 하산을 서두른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까 용샘에서 못 마신 약수를 꼭 마셔보라는 것이다. 마침 절에서 부용산 약다수(藥多水)’라는 약수터를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 아까의 용샘과는 달리 쏟아지는 물줄기까지 시원스럽다. 마음 놓고 마셔도 된다는 얘기이다. 물맛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여간 달고 시원한 게 아니다. 산행을 하며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가셔버릴 정도다.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진다. 남아있던 물통을 비워버리고 새로 채워 넣느라 분주하다.



부용사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싫다면 숲속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임도를 따랐다. 산죽사이로 난 숲길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도를 걷다 만난 눈요깃거리, 탱글탱글하게 영근 명감나무 열매가 예쁘고,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는 돌장승은 귀엽기까지 하다. 거기다 길은 편백나무 숲을 가르기도 한다. 이곳 장흥은 광활한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 영향이 이곳까지 미친 모양이다.




부용사에서 20분쯤 걸었을까 왼편에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난다. 농업용 저수지인 운주저수지이다. 하지만 저수지는 거의 유원지 수준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정자와 산책로, 거기다 음수대(飮水臺)와 운동기구까지 골고루 갖추었다. 갈수록 빈집이 들어나고 있다는 농촌이다. 그런 시골을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는 멋진 삶터로 만들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장흥은 역시 따뜻한 남쪽 나라이다. 그 증거라도 보여주려는 양 샛노란 민들레꽃이 활짝 피어났다. 경칩(驚蟄)이 되려면 며칠이 더 남았는데 이곳 남쪽 나라에는 이미 봄이 활짝 무르익었다.


산행날머리는 운주마을(원점회귀)

저수지 둑 아래로 내려서면 곧이어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삼거리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저만큼에 운주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15분이 걸린 셈이다. 물론 쉬엄쉬엄 걸었던 결과이다.

 

봉두산(鳳頭山, 753.7m)

 

산행일 : ‘15. 11. 3()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죽곡면과 월등면 그리고 순천시 황전면의 경계

산행코스 : 조태일문학관 주차장능파각봉서암성기암외사리재농곡갈림길봉두산북봉계곡전원주택절재태안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국제신문에서는 봉두산을 소개하면서 산이 아름다운 태안사에 가려 있다고 했다. 해당 글은 가야산 해인사나 조계산 송광사 등 5대 총림을 예로 들면서 명산(名山)에 대찰(大刹)은 필연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안타까운 예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산세를 지닌 봉두산이 태안사라는 유래 깊은 명찰 때문에 철저히 가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봉두산의 산세는 뛰어나지 않았다. 천년고찰인 태안사를 빼 놓으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보통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국제신문 산행팀이 걸었던 코스를 따랐다. 북봉을 답사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무런 특징이나 볼거리가 없는 북봉을 다녀오는데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의 산길은 험악하기만 했고,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국제신문의 리본을 찾아가며 진행했지만 계곡에서부터는 리본조차 보이지 않아 결국에는 알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산행을 마칠 수는 있었지만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은 코스였다.

 

산행들머리는 태안사 주차장(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괴목삼거리(순천시 황전면 괴목리)에서 오른편 840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월등면(순천시)의 소재지인 대평리에 이르면 면사무소 앞에서 857번 지방도가 갈리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840번 지방도를 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태안사갈림길(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서 우회전하여 잠시 들어가면 산행이 시작되는 조태일문학관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물론 이곳까지 그냥 들어오지는 못했다. 매표소에서 1인당 1,500원씩을 막무가내로 걷어갔기 때문이다. 태안사가 위치한 골짜기가 몽땅 태안사의 소유인 모양이다. 그냥 산행만 할 거라고 해도 끝까지 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분하기 짝이없지만 그나마 다른 절에 비해 입장료가 싼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널따란 주차장의 한켠에 마치 전원주택처럼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趙泰一詩文學記念館)’이다. 현실의식이 강해 민중시인 혹은 저항시인으로도 분류되는 조태일(1941-1999)‘ 시인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그는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때 절에서 나오게 되었단다. 그 후 임종을 맞아 시인에게 고향을 찾으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조태일은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삼십 년 만에 태안사를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만들어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태안사는 시인의 시작임과 동시에 끝이 되는 셈이다. 기념관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기념관은 고인의 유물전시 및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5,859의 부지에, 건축면적 419.49, 연면적 558.83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조태일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된 조태일시문학기념관과 그가 수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등 희귀본에서 최근 작품까지 3,000여점의 시집이 전시된 시집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참고로 시인 이윤하(건축사사무소 노둣돌 대표)의 설계로 지어진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제1회 대한민국 목조건축 대전에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들어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커다란 봉두산 등산안내도곡성군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면 산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등산안내도를 잘 보아 둘 것을 권한다. 그리고 안내도에 표기된 대로 봉두산 정상에서 하산을 하는 코스선택을 권한다. 고생문이 훤한 다른 봉우리로의 연계산행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이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길은 산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한가로운 숲길의 연속이다. 그 숲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한층 더 돋보인다. 잠시 후 일주문이 나온다. 그런데 흔히 보아오던 ‘0000가 아니라 그냥 동리산문(桐裏山門)’이라고만 적혀있다. 낯설지만 금방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렇다. 이곳 태안사가 바로 신라시대 구산선문(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행이 연 희양산문(봉암산문), 도의가 연 가지산문(북악), 홍척이 연 실상산문(남악), 현목이 연 봉림산문(혜목산문), 무염이 연 성주산문(숭암산문), 도윤이 연 사자산문, 범일이 연 사굴산문, 이염이 연 수미산문, 그리고 혜철이 연 동리산문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선맥의 가지는 후세들이 편의상 분류한 것일 뿐 근본은 같다는 학설이 요즘 대두하고 있다.

 

 

길은 계곡을 따라 나있다. 차가 지나다닐 때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옛길이다. 하지만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감어린 길이다. 아기자기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숲이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중간 중간에 정심교, 반야교, 해탈교 등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다리를 놓아 그 풍치(風致)를 한결 더 돋보이게 했다.

 

 

 

붉게 물든 단풍에 취해 걷는다. 이런 길은 최대한 서서히, 그리고 마음에 여유를 갖고 걸어야 옳다. 쉽게 말해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걷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그래도 다 못 넣은 부분은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다.

 

 

 

태안사로 이어지는 진입로는 1.5, 산행을 시작한지 대략 25분 정도가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고색창연한 누각(樓閣)이 하나 나타난다. 다리 역할을 겸하고 있는 전각(殿閣)인 능파각(凌波閣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이다. 누각 아래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숲이 울창하고, 바위에 낀 이끼가 정겨움을 준다. 능파각은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마침 난간에다 자리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잠시 쉬었다 가보자.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리겠지만, 지금 같은 만추(晩秋)엔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은 금강문(金剛門)으로 누각(樓閣)을 겸한 일종의 다리인 것이 특징이다. ‘능파(凌波)’란 계곡의 물굽이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는 의미. 그 아름다움을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에 비유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단다. 참고로 이 건물은 신라 문성왕 12(850)에 혜철선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고려 태조 24(941)에는 윤다(允多)가 중수하였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1767)에 복원하였다.

 

 

능파각을 건너면 아름드리 전나무와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숲길이 길손을 맞는다. 이 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일주문, 그리고 오른편은 봉서암과 성기암으로 가는 길이다. 가운데로 난 길은 봉두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일 것이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암자(庵子)가 하나 나타난다. 봉서암(鳳西庵)이란다. 승방으로 보이는 건물이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보면 참선(參禪)을 위해 지어진 암자인 모양이다. 태안사는 시작부터 선종(禪宗) 사찰의 중심이었다. 그런 풍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참선을 위해 만든 부속암자가 무려 아홉 곳에 이르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나머지 여덟 곳의 암자는 천불전, 성귀암, 봉천암, 가은암, 명적암, 삼일암, 보현암, 계현암, 야은정사이다.

 

 

 

봉서암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성기암으로 향한다.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으나 삭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울창한 숲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옛길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왼편으로 난 오솔길(이정표 : 외사리재 0.3Km) 하나가 보인다. 외사리재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향해 오르는 우()는 범하지 말자. 오른편에 있는 성기암이란 암자가 제법 볼만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옛길을 따르면 몇 발짝 걷지 않아 성기암(聖祈庵)에 이른다. 작은 산중 암자인 성기암도 역시 참선(參禪)이 주업인 모양이다. 산신각처럼 생긴 작은 법당인 성공전(聖供殿)보다 승방이 훨씬 더 큰 것을 보면 말이다. 법당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라도 세워 놓은 것 같이 서있다. ‘이 암자에 성기(性器)가 많아요?’ 함께 걷던 집사람이 넌지시 물어온다. 설마 집사람이 저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야 아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성기를 닮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바위이다. 그러고 보니 성기라는 요상한 낱말이 들어간 암자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바위까지도 요상하게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성공전(聖供殿)이란 성인(聖人)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뜻이다. 성기암(聖祈庵)도 역시 성인에게 기원한다.’는 의미를 지녔음이 당연하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와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등산로는 통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는 등 정비까지 잘 되어있다.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능선 안부인 외사리재이다. 이정표(이정표 : 정상2Km/ 헬기장0.3Km/ 태안사0.7Km)에는 삼거리로 표시되어 있지만 외사리재는 사거리이다. 오른편은 원달재(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고개를 넘을 경우에는 순천시 월등면 월룡리가 나온다. 봉두산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하지만 정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있다. 곁에 세워진 또 다른 이정표를 이용해 원달재 방향이 폐쇄되어 있음을 알리고, 월룡리로 넘어가는 길은 아예 표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달재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또렷한 편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으로 향한다.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본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즐거움이 있어 사람들은 가을 산을 찾는가 보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팻말 하나가 보인다. ‘119 구호지점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은 위치번호와 지명, 그리고 해발고도까지 적어 놓아 등산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너무 믿어서도 안 될 일이다. ‘길가 큰바위라는 지명을 보고 큰바위를 찾아 한참을 헤매었기에 하는 말이다. ‘큰바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얻었으니 뭔가 볼만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찾아봤지만 큰바위는 커녕 작은바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은 삼거리, 표지판 덕분에 왼편으로 난 거친 산길을 한참이나 내려갔다 돌아오는 번거로움을 겼었던 것이다.

 

 

오늘도 우린 예()를 배운다. 자연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산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란 말이 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데 知者樂水(지자요수)‘와 함께 붙어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智慧)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은 역()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질게 되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로워 진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게 익숙해질 때 어질 인()‘은 완성되지 않겠는가.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길이 편하다보니 움직이는 시선(視線)까지도 편안해진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액자(額子)를 만들어 간다. 그것도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있는 살아있는 액자이다. 만추(晩秋)의 가을 풍경화 속에서는 푸름과 붉음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푸름을 자랑하는 산죽(山竹) 숲 위에서 끝물의 단풍이 막바지의 아름다움을 처연하게 펼쳐낸다.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 능선을 따라 길게 쳐진 철조망이 보인다. 태안사에서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길이 없으니 들어오지 마라는 안내판이다. 태안사로 내려가는 길이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걷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죽(山竹) 길의 연속이다. 아직도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네모로 각진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난다. 외사리재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119 구호지점표지판큰바위(해발 560m)’라고 적었는데 역사책에서 보아오던 광대토대왕비를 쏙 빼다 닮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유심히 살펴본다. 누군가가 불심(佛心)’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한자로 쓴 문장(文章)도 보인다. 바위 면이 고르지 않아 판독은 불가능했지만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했다.

 

 

큰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해발 620m 지점에서 너른 무덤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외동골삼거리(이정표 : 봉두산 정상0.4Km/ 농곡(괴목)4.8Km/ 화지마을5.6Km)이다. 오른편은 괴목마을(순천시 황전면)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큰바위에서 이곳 삼거리까지는 16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으로 향한다. 태안사 방면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시야(視野)가 열리는 넓적바위(해발 715m)'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봉두산에서 가장 빼어난 조망처가 이곳에 있으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정규 등산로에서 약간 빗겨나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전망대에 서면 남동쪽, 그러니까 순천시 황전면 방향으로 시야가 열린다. 저 멀리 순천-완주간 고속도로가 보이고, 순천 쪽 들머리인 봉성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과 광산으로 파헤쳐진 흉물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이루는 연봉들일 것이다.

 

 

전망대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거기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능선으로 연결된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태안사2.5Km/ 봉성마을5.4Km/ 화지마을6.0Km, 농곡(괴목)마을 5.2Km)는 물론이고 삼각점(구례305, 1985재설)과 구호지점표지판까지 갖추고 있다. 갖추어야할 것은 다 갖춘 셈이다. 참고로 봉두산(鳳頭山)은 봉황의 머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봉두산의 옛 이름은 동리산(桐裏山)이었다. 태안사를 품은 주변 산세가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오동나무 동()' 자를 써 '동리산(桐裏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태안사 일주문 현판이 '동리산 태안사'로 적혀 있는 것을 그 증거로 보면 된다. 산 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두 이름에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가 곧 오동나무이니 동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봉황의 머리즉 봉두산으로 부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들머리에서 봉두산 정상까지는 2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전망대와 거의 비슷하게 터진다. 다만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북봉을 볼 수 있고, 잡목에 가려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른 방향의 산들도 내다보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나저나 주변은 온통 산들의 천지이다. 순천쪽 황학리의 작은 들판을 제외하고는 사방을 둘러 온통 산뿐이다.

 

 

하산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절재를 거쳐 곧장 태안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곧장 능선을 탈 경우 북봉을 거쳐 태안사로 내려가거나 상한봉으로 연계산행을 할 수 있다. 북봉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봉성마을 방향이다. 북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길가에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붙잡고 내려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오른편으로 또렷하게 난 길이 하나 나뉜다. 지도에 봉선갈림길로 표기되어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길로 내려갈 경우 월산리(순천시 황전면)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편은 상한봉(526m)으로 연결되는 능선길이다. 바닥에 청산수산악회에서 깔아 놓은 진행방향표시지가 보인다. 북봉에 다녀오라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상한봉과 연계산행을 했었던 모양이다.

 

 

상한봉 갈림길에서 몇 걸음만 더 내디디면 북봉 정상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봉두산 정상에서 북봉까지는 15분이 조금 더 걸렸다.

 

 

북봉에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길은 흔적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다가 잠시 후 폐()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그 흔적마저도 아예 사라져 버린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엄청나게 가팔라져 길을 찾을 여유조차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제신문에서 매달아 놓은 노란색 리본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없었더라면 길 찾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파르고 험한, 거기다 수북이 쌓인 낙엽 때문에 미끄럽기까지 한 내리막길과의 싸움은 버겁기만 하다. 악전고투(惡戰苦鬪)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싸움은 지겨울 정도로 오래오래 이어진다.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이 다 되어서야 계곡에 내려서게 되면서 그 힘겨운 싸움이 드디어 끝을 맺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내려선 계곡은 한마디로 곱다. 붉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차라리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을이 사그라져가는 아쉬움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을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만 해도 행복에 겨운데 이런 아름다운 풍경까지 보태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계곡을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공터가 나타난다. 아마 누군가가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부지를 조성한 모양이다. 공터부터는 임도로 연결된다. 이 공터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그냥 임도를 따를 경우 상한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매달려있는 '사유지이니 철대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 뒤로 진행해야 옳다. 그러나 우린 임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우()를 범해버렸다. 산악회의 리본이 보이지 않아 절재로 향하는 들머리를 찾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신문의 리본도 아까 계곡으로 내려서기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는 국제신문 산악회가 걸었던 코스에서 이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얼마 후 전원주택 몇 채가 나타난다. 길을 묻기 위해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주말에만 머무르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그리곤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공터의 조금 아래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가끔 일반 산악회의 리본이 보이지만 길의 흔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상한마을에서 절재로 연결되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길이 희미한 걸 보면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서 드리는 힌트(hint) 하나. 길의 흔적이 사라질 경우에는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절재에 이를 수는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해발 535m의 절재(이정표 : 태안사1.3Km/ 봉두산1.1Km. 상한1.0Km)에 오른다. 계곡에 내려선지 30분이나 지난 것을 보면 얼마만큼 헤맸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왼편은 봉두산 정상에서 곧장 내려오는 길이다. 이 길을 따랐더라면 쉽게 내려왔을 길을 산행거리를 조금 더 늘려보려다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코스를 걸으면서 말이다.

 

절재에서부터는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단풍이 붉게 물든 아름다운 산길이다. 하지만 간혹 돌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망설일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해서이다.

 

 

거의 뛰다시피 15분 정도를 걸으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119의 구호지점표지판에 등산로입구(해발 381m)'로 표기된 지점이다. 내려서는 곳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음 행선지로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임도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천년고찰인 태안사(泰安寺 : 도문화재 자료 23)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인 742년 법명이 알려지지 않은 신승(神僧) 셋이서 절터를 잡고 대안사(大安寺)라 하면서 개산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태안사가 한국 불가를 크게 선양한 계기는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혜철선사가 847(문성왕 9)이 절에 주석하면서 동리산문을 열때 부터였다. 고려 태조 때에는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던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堂宇)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寺勢)가 축소되었다. 6·25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을 근래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보전·만세루(萬歲樓해회당(海會堂선원(禪院능파각(凌波閣일주문 등이 있다.

 

 

 

태안사에는 몇 점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혜철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의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과 윤다의 부도인 보물 제274호의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그리고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廣慈大師碑), 보물 제956호인 대바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천순명동종(天順銘銅鐘) 등이다.

 

 

태안사의 일주문이다. 그런데 산의 이름을 봉두산(鳳頭山)’이 아닌 동리산(桐裏山)’이라고 적고 있다. 그만큼 구산선문(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안사는 최남선(崔南善)과 인연이 있다. 1925년 이곳을 찾은 그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한 곳이 바로 태안사이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태안사주차장

일주문과 방생못 안에 세워진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구경하며 태안사를 빠져나오면 충의문(忠義門)’이란 현판을 단 시설이 보인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이란다. 1950.6.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남침하자 한정일 경찰서장과 300여명의 곡성경찰은 이곳 봉두산 기슭에 있는 태안사 경내에다 작전 지휘본부를 차렸다. 이후 매복 작전으로 순천에 주둔했던 북한군 제603기갑연대를 압록교 부근에서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북한군의 태안사 작전지휘본부 기습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경찰관 48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시설이라는 것이다. 또한 매년 86일에는 전남지방경찰청 주관으로 이곳에서 위령제(慰靈祭)’를 열고 있다고 한다. 산행은 충혼탑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종료된다.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 지나갔던 능파각의 바로 앞이기도 하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과 길이 헷갈려 지체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봉황산(鳳凰山, 460.3m)-금오산(金鰲山, 323m)

 

산행일 : ‘15. 7. 25()

소재지 : 전남 여수시 돌산읍(突山島)

산행코스 : 작곡재수죽산봉화산봉양고개갈미봉봉황산율림치금오산금오봉향일암임포마을(산행시간: 4시간1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호남정맥이 지나는 백운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여수지맥(麗水枝脈)은 여수반도를 지나서도 여맥(餘脈)이 이어진다. 그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길게 이어져 돌산도, 금오도 등의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인지 돌산도(突山島)에는 400m 내외의 산들이 즐비하다. 오죽했으면 섬의 이름까지도 산((()를 합하여 만들어 냈겠는가. 돌산 최초의 군지(郡誌)여산지(廬山志)’에서는 그 여덟() 개의 산을 천왕산과 두산, 대미산, 소미산, 천마산, 수죽산, 봉황산, 금오산 등으로 꼽고 있다. 아무튼 이 산들은 대부분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고 있어 편안한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게다가 산을 오르면 어느 방향으로도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금오산 자락에 자리 잡은 향일암에서 선현들의 자취를 느껴보다가, 귀경 길에 이 고장의 특산품인 돌산 갓김치라도 한 단지 사가지고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봉양고개(돌산읍 금봉리 산181)

남해고속국도 순천 I.C에서 내려와 여수 방면 국도 17번을 따른다. 여수가 종점이던 17번 국도는 현재 돌산읍(여수시) 소재지인 군내리까지 연장되어 있다. 돌산도로 들어선 국도는 종점에 이르기 바로 전에 섬의 등줄기라 할 수 있는 산릉(山稜)을 두 번에 걸쳐 가로지르는데 이중 두 번째 고갯마루가 바로 봉양고개이다. 원래는 작곡재에서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었으나 무더위와 습기(濕氣)가 많은 점을 감안해서 코스를 조금 줄여 봉양고개를 산행 들머리로 삼았다. 봉양고개는 두루뭉술해서 어디가 고갯마루인지 구분이 힘들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봉양마을 진입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을 찾으면 된다.

 

 

 

산행은 버스정류장의 맞은편으로 난 임도(林道)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돌산종주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그러니까 들머리에서 10m쯤 거리에 있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림길에 돌산종주 등산코스이정목(수죽산 1.9Km)이 세워져 있으나 왼편으로 약간 비켜나 있는데다가 웃자란 잡초에 가려 그것마저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잘 못 들어선 임도의 풍경이다. 저만큼 앞서 가던 집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도 얼굴표정은 의외로 밝다. 어쩌면 울창하게 우거진 주변의 편백나무 숲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건강에 좋다는 편백나무 숲은 일부러라도 찾아가는 곳이니 말이다.

 

 

약간 밋밋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12분 정도 걸으면 널따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마치 공을 들여 가꾼 잔디광장(廣場)’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디가 곱게 잘 자라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임도가 보인다. 임도는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이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임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잔디광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10분 정도를 계속해서 올라야하니 그 거리 또한 제법 긴 편이다. 이어서 평평해진 길을 따라 6분쯤 더 걸으면 갈미봉 정상이다. 갈미봉은 산봉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어느 산꾼들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마저 없었더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갈미봉을 지난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점차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작은 오르내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임도라도 만날라치면 그 다음의 어김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임도는 갈미봉에서 12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만난다.

 

 

임도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거리까지 제법 길다. 한마디로 힘이 든다는 얘기이다. 길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힘내세요!’라고 쓰인 코팅지가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봉황산을 오르는 구간은 이보다 훨씬 더 심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힘겨운 오르막길은 19분이나 계속되다가 묘()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에 올라서고 나서야 끝이 난다. 지도에 401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401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조심스럽게 5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른 임도를 만난다. 이어서 5분 정도를 임도를 따르다가 다시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과의 힘겨운 싸움은 10분 남짓 계속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에 있다. 물론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무인산불감시탑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전망대를 겸한 봉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돌산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답지 않게 봉황산의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하긴 전형적인 육산(肉山)에서 볼거리를 찾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망이라도 트인다는 점이다. 만일 여수시에서 전망대를 만들어 놓지 않았더라면 주변의 잡목(雜木)들이 이마저도 훼방을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봉황산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과 119의 구호지점표시목에서 어렴풋이나마 이곳이 정상임을 눈치 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끔 산행을 같이 하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꺼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참고로 봉황산(鳳凰山)은 이름 그대로 '봉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봉황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툭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다. 먼저 진행방향으로는 희미하지만 금오산이 조망된다. 구름에 가린 탓이다. 그리고 금오산의 왼편 그러니까 전면(前面)에는 넓디넓은 남해바다고 끝없이 펼쳐지는데, 그 뒤에 흐릿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남해도 일 것이다. 비록 눈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그 중간쯤에는 움푹 파여 들어간 앵강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잔잔하기만 한 앵강만의 가운데에는 노도가 돛단배마냥 떠다닐 것이고 말이다. 노도는 조선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당쟁에 휩쓸려 귀양살이를 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서포는 3년 남짓한 노도 유배생활 중에 한글소설인 구운몽사씨남정기등을 집필하고 눈을 감았다.

 

 

봉황산 정상에서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시 임도를 만난다. 그리고 10분 가까이를 임도를 따라 걷게 된다. 그러다가 이정표(율림치 2.5Km/ 봉황산 1Km)가 보이면 임도를 벗어나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야 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394m봉을 오른다. 이곳에서부터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바닥에 깔려있어 만족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조망을 허락을 허락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전망바위에 서면 봉황산 등 지나온 능선과 바다가 조망되지만 사진은 일부러 뺐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또 다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394m봉을 오르내리는 데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눈요기가 시작된다. 공깃돌을 닮은 바위(어떤 사람들은 흔들바위라고 적었다)와 손가락을 닮은 바위 등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망바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바위에 올라서면 바닷가에 자리 잡은 율림리와 그 건너편에 있는 밤섬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그러나 경사가 만만치 않아 쉽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전망바위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이어서 율림치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금오산이 건너편에 또렷하다.

 

 

 

산불감시초소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율림치이다. 율림치는 봉황산에서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중 가장 낮은 안부인데, 율림리 사람들이 읍소재지인 금성리로 넘어 다니던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에는 널따란 주차장 외에도 정자(亭子)와 식당까지 갖추고 있어 쉼터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주차장의 남쪽 끝에 있는 금오산의 들머리에는 국립공원 안내도와 금지사항을 적은 안내판 등 다도해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시설물들이 몇 개 세워져 있다. 여기서부터 국립공원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고단한 싸움이 시작된다. 금오산으로 오르는 능선은 아까 지나온 401m봉이나 봉황산만큼 가파르지는 않다. 거기다 첫 번째 봉우리는 정상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길바닥은 아까에 비해 훨씬 더 거칠다. 아까는 흙으로 이루어졌던데 반해 이번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어 걷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한 것이다. 거기다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탓에 떨어진 체력도 문제가 된다. 이럴 경우에는 그저 서서히 걷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정상이다. 거리에 비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오른 탓일 것이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금오산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그저 여수1동산악회에서 세운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재질(材質)의 말뚝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조망도 거의 트이지 않는다. 참고로 금오산이란 이름은 향일암(向日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광종 때 윤필대사가 산의 바위들이 마치 거북의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원통암(圓通庵)에서 금오암(金鰲庵)이라고 바꾸었고, 그로 인해 산 이름도 금오산이라고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금오산은 이곳이 아니라 금오봉을 이르는 말로 보인다. 아무런 특징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한 이런 곳에다 그런 거창한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울릴 것 같지가 않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망이 좋지 않은 정상을 탓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조망 좋은 곳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올망졸망한 돌산도의 남쪽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화태도와 대·소횡간도, 나발도, ·소두라도, 개도 등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왼편으로 열리기도 한다. 아까 봉황산 능선을 걸으면서 보았던 율림리와 그 건너편에 있는 밤섬이 또 다시 나타난다.

 

 

곳곳에서 조망을 즐기다보면 커다란 바위봉우리인 317m봉에 올라서게 된다. 317m봉은 금오산에서 조망이 가장 넓게 트이는 전망대 같은 곳으로 북으로는 금오산의 모산인 봉황산이 하늘금을 이루고, 동쪽에는 앞서 나타났던 풍경들이 각도만 바꿔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백야도, 횡간도, 화태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멀리 고흥반도의 팔영산도 보인다지만 오늘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317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또 다시 내리막길을 만든다. 비록 경사(傾斜)가 가파르지만 나무계단을 놓는 등 안전시설을 잘 갖추었다. 국립공원을 걷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317m봉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금오봉 정상 350m/ 임포주차장 1.2Km)가 나온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금오봉이나 향일암을 거치지 않고 곧장 임포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물론 주능선을 타야겠지만 만약 체력이 다했다면 이곳에서 탈출하면 된다. 사실 오늘 산행을 함께한 일행들 중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늘 산행이 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금오봉의 최단거리 산행코스는 임포마을에서 이 갈림길로 올라와 금오봉에 오른 뒤 향일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손으로 붙잡고 올라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금오봉 정상이자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특별히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멋지지도 않은 바위덩어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정상에는 자그마한 사각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난 정상석이다. 이곳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상어림의 바위들은 하나같이 쩍쩍 갈라진 문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의 등껍질을 닮았다. 이것을 보고 윤필대사가 요 아래에 있는 향일암의 이름을 원통암에서 '자라 오()'자를 붙여 금오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산 이름도 금오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금오봉 정상에서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호리병처럼 육지를 향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개도와 금오도, 횡간도, 화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그 속에 풍덩풍덩 빠져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이미 눈에 익숙해져버린 풍경들이다. 그렇다면 진행방향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이루어진 암릉이 바다를 향해 내리뻗었고 그 끄트머리에 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반도 모양으로 바다로 파고든 꼬리 양쪽으로 짙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오후의 햇살에 녹아든 산과 바다가 한 폭의 잘 그린 풍경화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금오봉에서 내려가는 약 400m의 구간, 바위사이를 이어주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전국의 어느 명산에도 손색이 없는 절경이 이어지는 것이다. 앞마당처럼 널찍하거나 기둥처럼 서있는 바위들이 아래편의 풍경과 잘 어울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도 보인다. 거기다 시선이라도 잠깐 옮기면 이번에는 눈터지는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아까 정상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다시 한 번 그림처럼 펼쳐진다. 눈의 호사(豪奢)는 암릉이 끝나고서야 끝을 맺는다.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숲 속 기와지붕이 눈길을 끈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좁디좁은 바위틈으로 들어서자 향일암(向日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천연의 바위굴(石門) 두 곳을 지나면 곧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거북의 목 뒤에 위치했다는 향일암의 원래 이름은 원통암(圓通庵)이었다. 그래선지 이곳의 본전(本殿)은 대웅전이 아니고 원통보전이다. 무려 5kg이나 나가는 금으로 단장해 금오암과 영구암이란 옛 이름에 황금사찰이란 이름까지 얹게 했던 원통보전은 소실(燒失) 이전 빛나던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지만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풍광은 그 어느 보석 못지않게 빛나고 있다.

 

 

원통보전 주변의 바위들 위에는 작은 돌들이 포개져 있다. 동전들도 보인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들이리라. 그러나 보다 더 큰 공덕을 쌓고 싶은 사람들은 대웅전 뒤로 올라간다. 그곳에 일명 흔들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마치 경전(經典)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이다. 그래선지 이 바위를 한 번 흔들 경우 경전을 사경(寫經)한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흔들어 볼 일이다.

 

 

향일암(向日庵 : 전남문화재자료 제40)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백제 의자왕 19(659)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돌산군지인 여산지 참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원통암(圓通庵)이었다. 신라의 고승이 백제의 영토였을 남도의 끝자락에 사찰을 세우게 된 연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쉽게 말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하여튼 이 절은 고려 광종(958) 때 윤필(輪弼)대사가 중창한 뒤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改稱)하였으며, 현재의 이름인 향일암(向日庵)’은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남해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日出)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해서 해를 향하는 암자(庵子)’라는 의미로 새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내(境內)는 대웅전(원통보전)과 관음전, 용왕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종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1986년에 새로 지었는데, 이중 대웅전과 종각, 종무실은 2009년 말에 전소(全燒) 되었던 것을 20125월에 복원하였다. 이 외에도 책륙암(冊六庵)이나 영구암(靈龜庵) 등의 이름을 얻게 된 사연들이 있으나 그냥 생략하겠다.

 

 

대웅전 뒤편으로 숨은 듯 비좁은 바위 길을 따라가면 바다를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관음전이 있다. 향일암에서도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한 이 전각은 깎아지른 거대한 암벽 아래 있는 원효스님이 수도하던 터에 지은 것이라 한다. 동백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관음전 옆으로는 수월관음보살과 무릎 꿇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향일암은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4해수관음기도도량 (海水觀音祈禱道場)’으로 꼽힌다. 당연히 영험이 있을지니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꼭 뭔가를 빌지 않아도 좋다. 그냥 관음전 앞에서 남해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금오열도가 수묵화 같은 풍광으로 그려져 있고 발아래로는 한일()자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향일암에서의 고요함은 일주문(一柱門)을 벗어나면서 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향일암이 한적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암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부처님의 감화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하지는 않았다는 얘기이다. 그 조용함이 일주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란스러움에 묻혀버렸다는 얘기이다. 산중 사찰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불이문(不二門)’을 만날 수 있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뜻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절에서는 보통 본당으로 들어가는 곳에 세운다. 이 문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디 하나이니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일주문(一柱門)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는 가람에 들기 전에 세속(世俗)의 번뇌를 불법(佛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주문을 일러 불법(佛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선이라고 했다. 이를 증명해주려고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중생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나타난 모양이다. 이곳 돌산도는 갓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갓김치라는 별미를 만들어 냈다. 그 갓김치를 진열해 놓은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리고 손님을 부르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맛이라도 보라는 얘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우리 부부는 갓김치를 샀다. 그것도 고들빼기김치와 파김치까지 골고루 말이다. 이 또한 부대끼며 살아가는 참맛이 아니겠는가.

 

 

산행날머리는 향일암주차장

산행을 다 마쳤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갓김치를 파는 아주머니와 농담 몇 마디 나누다 동동주까지 얻어 마시는 즐거움도 맛본다. 물론 공짜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재래시장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이 한숨으로 변해버린 것은 채 한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형버스 주차장은 이곳에서도 1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지쳐버린 다리는 맨몸으로 걷는 것만도 힘겨운데, 무려 5에 가까운 김치까지 들고 20분 이상을 걸어서야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2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15분과 향일암을 둘러보는데 걸린 15분을 감안하더라도 4시간50분이나 걸린 셈이다. 이는 무더위로 인해 속도가 많이 처진 탓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