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산(帝釋山, 563.3m)

 

산행일 : ‘16. 6. 4()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과 순천시 낙안면·별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동화사마을임도활공장제석산신선대남끝봉대치재전망대약수터태백산맥 문학관(산행시간 : 2시간 1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제석산은 600m에도 못 미치는 자그만 산이다. 거기다 보성의 오봉산이나 순천의 금전산 등 빼어난 암릉미를 자랑하는 주변의 명산들에 가려 입소문도 타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산에 들고나면 생각은 달라진다. 신선대 부근의 바윗길에서 느끼게 되는 짜릿한 스릴과 툭 터지는 조망은 다른 유명산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석산의 뛰어난 점은 아기자기한 암릉 뿐만이 아니다. 2시간여의 가뿐한 산행을 마치면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학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기다 점심 겸해서 찰지고 탱글탱글한 별미 꼬막정식까지 즐긴다면 건강과 문화에다 맛까지 한꺼번에 다 누리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산행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동화사 주차장(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순천-영암고속도로 순천만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를 타고 벌교방면으로 달리다가 사계절삼거리(순천시 별량면 구룡리)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군도(郡道 : 송산로)를 타고 힐사이드 C.C으로 들어가다 보면 동화사입구교차로(별량면 송기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동화사 주차장이 나온다.




산행에 나서기 전에 동화사(桐華寺)부터 들러보기로 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니 가슴에 담아 둘만한 뭔가를 갖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경내(境內)는 천왕문을 통해 연결된다. 천왕문의 처마에 매달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현판에 적힌 산의 이름이 낯설다. ‘제석산(帝釋山)’으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開雲山)’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아마 절의 창건에 얽힌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047(고려 문종 1) 의천(義天)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을 지나다가 동쪽 하늘에 상서(祥瑞)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산의 이름을 개운(開雲)이라 칭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桐華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01(선조 34) 신총(信聰)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630(인조 8) 계환(戒環)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과 지장전, 삼성각, 천왕문, 선당, 범종루, 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로 들어선다. 오래된 절답게 넓은 터에 전각들의 배치가 단아한 사찰이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인 대웅전이다. 정면 3,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다포계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은 보물 제831호인 삼층석탑(三層石塔)이다. 이 탑은 아래 부분인 기단(基壇)이 땅속에 거의 파묻힌 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각 부분의 표현이 약해지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동화사 옆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니 임도의 끄트머리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으니 농로(農路)라고 보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 나타난다.




길가에 휴경지(休耕地)가 많이 보인다. 그 풍경이 낯설어 보이는 건 그 위치가 마을 주변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게으르다고 해도 이런 농경지를 묵힐 농사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휴경지들 마다 동화사 주지의 명의로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임대차 계약이 만료되었으니 경작을 금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고발조치하겠다는 엄포까지 놓고 있다. 아까 동화사 입구에 붙어있던 차량 출입을 금하겠다.’는 현수막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산길은 마을을 벗어나기 바로 직전에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이정표가 없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길이 넓고 또렷하게 나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개운산 버섯체험 학습장입간판에서 50m 정도 전방이니 참조한다.



길을 가다보면 남도 삼백리길이라고 적힌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언젠가 순천판 둘레길을 조성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둘레길 조성사업이 이미 마무리 되었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첫 번째 구간인 남도 문화길이 분명하다. 팻말의 하단에 적혀있는 읍성 가는 길이 그 증거일 테고 말이다.



남도 삼백리길은 벌량 화포를 출발해서 동화사에 이르는 총 210km의 둘레길이다. 3개 노선 10개 코스로 나누어 있는데, 그중 순천만 갈대길’, ‘읍성 가는 길5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도 문화길(1구간)95km, ’과거 관문길‘, ’이순신 백의종군의 길3개 코스로 이루어진 한양 옛길(2구간)54km, 그리고 3구간인 생태 치유길천년불심의 길2개 코스 61km로 이루어져 있다.



산길은 임도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랗다. 주변 정리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길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사색을 즐기며 걷기에 딱 좋지 않나 싶다. ‘남도 삼백리길이 자연과 역사 자원을 있는 그대로 활용한 아름다운 옛길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잠시 후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은 산자락이 만들어내는 경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왔다갔다 갈()자를 그리면서 위로 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덕분인지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대신에 걸어야 할 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감수해야만 한다. 늘어나는 거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길가를 잘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산자락을 치고 오를 수 있도록 나있는 지름길로 들어서면 된다. 그렇게 진행하다보면 잠시 후 임도를 만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는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10분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왼편 임도가 더 넓고 또렷하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른편 임도도 널따랗기는 매한가지이다. 경사 또한 거의 없다. 그런 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임도가 끝나버린다. 그리고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더니 오솔길로 변한다. 경사도 상당히 가팔려졌다.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긴 다른 산들에서라면 이 정도 갖고는 가파르다고 할 수도 없을 테니, 부담스럽다는 게 차라리 이상한 일일 것이다.



8분 후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헬기장에 올라선다. 한쪽 귀퉁이에 풍향을 알려주는 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활공장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이륙할 경우 큰 어려움 없이 낙양읍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읍성의 안에 있는 잔디밭이나 읍성 주차장에 착륙할 수가 있어 상공에서 바라보는 경관과 착륙장소의 편의성 때문에 패러글라이더(paraglider)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헬기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벌교읍에서부터 기다랗게 늘어진 벌교천과 물이 빠진 거대한 뻘 너머로 득량만, 여자만(汝自灣), 순천만까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거센 빗줄기는 조망에 대한 열망을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린다. 바람까지 거센 탓에 오래 머물 수도 없어 그냥 지나쳐버린다.



풍향주머니의 맞은 편 귀퉁이에는 정상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정상석에 표기된 이름이 제석산이다. 이곳은 제석산의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 곳에나 정상석을 세우는 행위는 옳지 않을 듯 싶다.



정상으로 향한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으로 연결되는 오르막길이다.



그렇게 7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제석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났다. 제석(帝釋)이란 산의 이름은 불가(佛家)의 용어 제석천(帝釋天)’에서 온 명칭이다. 제석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며 사천왕(四天王)을 통솔한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심리와 깊이 연관돼 있으며 이산에 이러한 이름을 지어준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서너 개가 들어앉아 있다. 정상표지석은 그중 하나의 위에 놓여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만 일대의 다도해풍광이 멋지게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행운이 없나보다. 사방이 짙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늘어진 빗줄기에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제석산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르면 우령재와 오봉산을 거쳐 금전산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능선을 가득 메운 잡목들 때문에 길이 거칠다고 하니 주의할 일이다. 왼편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태백산맥문학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잠시 후 바윗길이 시작된다. 위험하지는 않는 바윗길이다. 뒤돌아보니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암릉이 불쑥 튀어 나온다. 방금 지나왔던 제석산 정상부근의 암릉이다.




산행을 이어간다. 바윗길이 네 발로 기어야만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거칠어졌다. 빗길만 아니라면 서서 내려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만사는 불여튼튼이다.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이때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 한줄기가 지나가는 가 싶더니 구름까지 한 웅큼 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구름 뒤에 숨어 있던 신선대가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제석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경관이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저런 풍경화는 비온 뒤끝이 아니면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는가 보다. 산행 내내 비가 내려 불만스러웠는데, 그 비가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신선대 아래에 이른다. 정상에서 10분 거리이다. 신선대는 봉우리 전체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다. 때문에 신선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암봉에 서면 낙안벌과 벌교읍 일대의 거대한 분지(盆地)를 이룬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금전산이 손에 잡힐 듯 눈앞으로 달려온단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암봉으로 오르는 것을 사양한다는 얘기이다. 진입금지팻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비에 젖은 바위들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한걸음 내딛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목숨만이야 하겠는가.




산길은 암봉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비록 바위를 끼고 도나 위험하지는 않은 길이다. 만일 비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저 암릉을 타고 내려왔을 게 뻔하다. 높이가 20m쯤 되는 절벽이라고는 하지만 밧줄이 매어져 있다니 집사람 정도의 경험이라면 충분히 내려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선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한참 더 계속된다. 하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다. 그렇게 5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소나무 두어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는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누군가 남끝봉이라고 적었던 봉우리인 모양이다.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있는 봉우리 위로 올라가본다. 이곳도 역시 조망이 좋을 듯 싶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남끝봉을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후부터는 보드라운 흙길이 이어진다.



8분 후, 안부사거리인 대치재(이정표 : 벌교2.7Km/ 별량 대치마을/ 낙안 구기마을/ 제석산 정상0.9Km)에 내려선다.



대치재를 지나자 오르막 구간이 다시 시작된다. 맞은편 산봉우리를 넘으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길을 따를 필요까지는 없다. 오른편으로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봉우리 뒤편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나게 됨은 물론이다.



8분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벤치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한 곳이다. 이정표는 없지만 왼편으로 나뉘는 길을 무시하고 곧장 능선을 따른다.



7~8분 후 나타나는 언덕을 넘으면 산길은 산중턱을 에돌며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벌교시가지와 그 앞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잠시 후 전망데크가 나타난다. 방금 전부터 나타나던 풍경을 진득하니 감상하다가 내려가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여유를 갖고 조망을 즐겨보자. 발아래에 벌교시가지는 물론이고 벌교와 별량을 아우르는 너른 들녘이 카펫처럼 평평하게 펼쳐진다. 그 뒤의 벌교 앞바다와 여자만은 경계를 두지 않은 채로 망망대해(茫茫大海)와 연결된다. 한마디로 멋진 풍경이다. 만일 날씨라도 받쳐준다면 한 폭의 멋진 산수화가 그려질게 틀림없다.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약수터(이정표 : 벌교 버스터미널 1.7Km/ 제석산 정상 2.4Km)가 나타난다. 돌까지 쌓아 제법 그럴싸한 외관을 갖추어 놓았지만 냉큼 마시기에는 좀 꺼림칙하다. 물이 넘치지를 못하고 그대로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반듯하게 잘 가꾸어 놓은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약수터에서 4분 정도의 거리이다. 묘역에는 운동기구들을 설치해 놓았다. 조금만 더 치장을 한다면 체육공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태백산맥 문학관0,7Km/ 봉림1.8Km, 홍교 2.4Km/ 제석산 정상2.0Km)로 나뉜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왼쪽 방향이다. 하지만 보물 제304호인 벌교홍교(筏橋虹橋 : 3m 높이의 홍예(虹霓) 3칸을 연결해 놓은 27m 길이의 돌다리)라도 보고 싶다면 곧바로 직진해야 한다.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 번은 들러보는 게 좋을 것도 같다.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았다고 해서 홍예교(虹霓橋) 또는 무지개다리라고도 불리는 홍교(虹橋)의 구조형식을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보물 400)와 함께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하산 길은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약간 가파른 곳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은 평평할 뿐만 아니라 널찍하기까지 하다. 중간에 홍교 갈림길’(이정표 : 태백산맥문학관0.4Km/ 홍교1.9Km. 제석산 정상3.1Km)내리천 삼거리(이정표 : 태백산맥 문학관0.2Km, 벌교 버스터미널 0.7Km/ 제석산 정상3.4Km) 등의 갈림길도 만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만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태백산맥문학관(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묘역을 통과한 지 15분쯤 지나면 잘 지어진 기와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소재가 되었던 집들이다. 산행은 이곳(이정표 : 제석산 정상 3.6Km)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10분이 걸렸다. 비로 인해 중간에서 쉬지를 못했으니 온전히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된다.



현부자네 집이란다.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이 집과 제각(祭閣)은 원래 박씨 문중의 소유인데 그 건축양식이 보통의 한옥(韓屋)들과 다른 게 특징이란다. 대문과 안채 등 전체적으로는 전통 한옥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곳곳에다 일본식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흥미로운 건물로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새끼무당 소화와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그려진다.




현부자네 집아래에는 조그마하고 예쁜 기와집인 소화네 집이 있다. 부엌 하나에 방이 셋인데, 부엌과 붙은 방이 안방이고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은 그 옆방이란다. 1988년 무렵 태풍에 무너졌던 것을 2008년 보성군에서 복원해 놓았다.



현부자네 집의 오른편에는 대한불교천태종 소속의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있다. 역사가 짧을뿐더러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절이다. 하지만 잠깐 들러볼만한 이유는 있다. 물맛이 제법 뛰어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보성군청에서 수질(水質)까지 보증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목이라도 축여볼 일이다.



소화네 집을 지나면 반듯하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길손을 맞는다. 20081121일에 문을 연 태백산맥문학관이다. 이 건물은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시대정신인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북향으로 지어졌으며, 1, 2층의 전시실과 전망대(5)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문학관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해서 6년 만에 완결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이란 장으로 구성되고, 1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623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북 카페와 작가가 직접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작가의 방을 만들어 타 문학관과 차별을 두고 있다.



문학관을 빠져나와 벌교 시내로 들어선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한다. 조선 숙종 14(1718)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이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다 원목을 엮어 뗏목다리를 놓았었다는 것이다. 이 뗏목다리가 있던 자리에 다시 놓은 다리가 지금의 홍교(虹橋)이다. 1728(영조 4)에 전라남도 지방의 대홍수로 이 다리가 무너지자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석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시내에는 꼬막 요릿집들이 즐비하다. 하긴 수산물 지리적 표시전국 1호가 벌교꼬막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청정갯벌에서 잡아 올린 벌교꼬막은 천혜의 여자만 일대에서 생산되는데,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온 이후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헤모글로빈이 많이 함유돼 노약자나 산모들에게 좋고 어린이 성장발육촉진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가에는 벌교꼬막 문화산업특구 지정이라는 현수막도 걸려있다. 전국 꼬막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