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산(達摩山, 489m)

 

산행일 : ‘17. 4. 18()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과 북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황사주차장미황사달마산작은금샘삼거리대밭삼거리부도전미황사미황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달마산(達摩山)남도의 금강산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호남정맥의 바람재(노적봉)에서 분기(分岐)하는 땅끝기맥이 두륜산을 지난 후 땅끝마을 조금 못미처에서 용솟음치는데, 그 모양새가 금강산에 비견될 정도로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윗길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다소 위험하지만 대신에 조망(眺望)은 끝내준다.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타다가 아무 바위라도 올라설라치면 크고 작은 섬들이 동동 떠다니는 남녘의 다도해(多島海)가 거침없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바윗길을 오르내리는 스릴(thrill)에다 눈터지는 조망을 산행 내내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여러 점이나 지니고 있는 미황사라는 천년고찰(千年古刹)까지 덤으로 가슴에 품을 수 있다. 한마디로 누구나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산이 아닐까 싶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미황사주차장(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247)

서해안고속도로 죽림 J.C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일산교차로(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에서 13번 국도 해남완도방면으로 옮긴다. 해남읍을 거친 후 성매삼거리(해남군 현산면 초호리)에서 77번 지방도로 옮겨 땅끝방면으로 향하다가 가차삼거리(송지면 가차리 840-4)에서 미황사 이정표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미황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은 미황사의 일주문 앞에 조성되어 있는데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미황사로 오르는 일주문을 지나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액(扁額)이 보이지 않는다. ‘달마산 미황사라는 문패를 달고 있어야하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미황사까지는 긴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만만찮은 오름길이나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절을 위함이 아닌 산행을 위해 경내(境內)에 침입한 참이니 어찌 그런 불평까지 할 수 있겠는가.



3~4분쯤 올랐을까 현판이 없는 전각(殿閣) 하나가 나타난다. ‘사천왕을 모십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새로 지어 놓고 안에 안치할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시주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등산로는 이 전각의 왼편으로 열린다. 산행을 위해 경내를 침범하는 것이 못내 죄스러웠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을 방해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참 들머리의 동백나무 아래에 등산로 팻말과 함께 달마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는 걸 잊을 뻔 했다. 오늘의 나처럼 길이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는 한번쯤 살펴보고 난 뒤에 출발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절을 비껴서 들어서는 산길은 울창한 숲에 가려 어둑어둑하다. 그리고 묵묵한 절의 분위기를 닮은 듯 고요하다. 하지만 방금 손질을 해놓은 것처럼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이라고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전라남도 차원에서 정비를 해놓은 모양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이란 전라남도가 백두대간의 지맥을 잇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한편, 남도의 오랜 역사와 문화자원, 농어촌을 체험하며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남도 오백리 역사 숲길'의 해남구간( 59.8km)이다. 이 둘레길은 해남 땅끝에서 시작해서 강진, 영암, 화순, 곡성을 거쳐 구례의 지리산자락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500리에 이른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4분쯤 걸으면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헬기장0.6Km, 달마산 정상 1.1Km/ 대흥사20.3Km/ 미황사0.2Km)를 만나게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길과는 이곳에서 헤어진다. 그 길은 대흥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조금 지나면서 산길은 좁아진다. 하지만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절 뒷산에 위치한 승려들의 산책로일지니 잠시나마 그들을 닮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들에 참선하는 마음을 실어본다. 그렇게 9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달마산 정상0.8Km/ 문바위재0.7Km/ 미황사0.6Km)가 나타난다.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쪽은 주능선으로 바로 붙는 등산로인데 너덜이 많고 묵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코스를 선택할 경우 산행시간이 너무 짧아져 버리는 단점도 있다.



삼거리 바로 위에는 헬기장이 있다. 축대까지 쌓아가며 조성을 해놓았지만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았던지 웃자란 잡초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발걸음이 고도(高度)를 높여감에 따라 경사가 제법 가팔라진다. 그리고 오솔길이 사라지면서 바윗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너덜길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계단 형태로 늘어서면서 길도 조금씩 더 가팔라져 간다.



그러다 문득 길 왼편에 바위 하나가 툭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뭔가 색다른 게 있을까 해서 길옆으로 벗어나본다. 그러데 이게 웬 걸! 달마산 서쪽 자락의 품에 오롯이 담겨있는 미황사가 시선을 사로잡는 게 아닌가. 땅끝의 오지(奧地)에 들어앉은 사찰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덜퍼덕 주저앉아 풍광에 젖어보고 싶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는 길에는 이런 멋진 전망대를 두어 번 더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곳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시 위로 향한다. 너덜길은 언제부턴가 바윗길로 변해있다. 노약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곳곳에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힘이 부칠 경우 붙잡고 오르라는 모양이다. 그렇게 10분쯤 더 오르면 달마산의 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만이다. 너덜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케언(cairn, 돌탑)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를 형상화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달마봉(불썬봉)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완도의 숙승봉과 해남 북일면 좌일산에서 횃불을 이어받았단다. `불썬봉이란 이름이 붙게 된 연유이다. `불을 썼던(붙였던) 봉우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곳 봉수대는 산 아래 사람들이 극심한 가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정상표지석은 돌탑(石塔, cairn)보다 조금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그런데 달마산이 아니라 달마봉이란다. 옛날에는 불썬봉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달마산은 요 아래에 있는 관음봉에서 이곳을 거쳐 도솔봉에 이르는 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왕에 정상에 올랐으니 달마산에 대한 자료나 좀 살펴보자. 아쉬운 점은 현재 지명인 달마산(達馬山)이 옛 문헌인 `해동여지도`(해남)에는 달마산(達磨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달마산(達摩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한자가 각기 다르고, 달마대사의 달마(達摩)와도 다르다. 이에 대해 현재의 산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한자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는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자는 불썬봉을 불선(佛仙) 또는 불성(佛聖)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황사 스님들에게는 물론 달마봉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뾰족뾰족한 기암이 등줄기를 따라 줄지어 솟아올랐고, 그 너머로 둥글게 내보이는 푸른 다도해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완도가 전체 모습을 드러내고 소안도와 청산도가 그 뒤를 잇는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산중턱에 자리 잡은 미황사가 단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멀리 바다 건너에는 진도를 위시한 수많은 섬들이 널려있다. 사뭇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한 풍광(風光)이다. 너무 좋다보니 다른 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래서 부산일보의 취재기사를 옮겨본다. ‘어엿한 일망무제의 풍경이 사방에 펼쳐진다. 북쪽으로 두륜산의 멧부리가 이쪽으로 덤벼들 기세다. 동쪽으로 완도 상황봉이 우뚝하고 완도대교가 바다 가운데로 획을 긋는다. 서쪽으로 보이는 진도는 구름에 가려 어슴푸레하다. 남쪽 땅끝마을 일대에 햇살이 소복하다.’



바람재 방향 능선, 관음봉인지 아니면 농바우봉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도 역시 서슬 시퍼런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쪽으로 갈 경우 땅끝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시작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송촌마을로 연결된다.



이정표(도솔봉주차장5.9Km, 대밭삼거리 2.60Km/ 승촌14.1Km/ 미황사1.4Km)가 가리키고 있는 도솔봉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의 암릉은 도솔봉까지 약 8Km 구간에 걸쳐 그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이어서 산줄기는 땅끝(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 이르러 그 숨을 다한다. ! 정상에서 살짝 내려서면 양지바른 곳에 테라스(terrace)처럼 평지가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어대던 돌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는 따스한 쉼터를 만들어준다. 이 쉼터 이후부터는 바윗길이 이어지니 식사 및 휴식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달마산 정상에서 땅끝 방면으로 흘러가는 능선은 공룡의 등짝처럼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가파른 구간이 길게 이어지는 곳은 없지만 내리고 오르는 바위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게 커서 힘을 써야 하는 곳도 제법 많다. 바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정신없는 사이에 샛길로 잘못 들어서는 경우도 있으니 길의 흔적을 잘 쫓아 걸어야 한다. 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이어지므로 산행을 하는 방향의 정면에서 좌우로 30도 이상 꺾이는 곳은 거의 없다.



능선을 걷다보면 광활한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푸른 물결은 저 멀리에서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허물고, 푸른 빛깔도화지에 오밀조밀하게 박힌 섬들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는다. 한달음에 물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바다가 가깝다. 달마산은 바다와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을 만큼 알맞은 위치에서 몸을 키워왔던 모양이다.



뒤돌아본 달마산 정상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하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수려한 암봉, 그리고 눈만 들면 푸른 바다가 훤하다. 산자락의 숲은 그윽할 뿐 높지 않은 게 특징이다. 덕분에 기이하게 생긴 암봉들이 여과 없이 그 속살들을 보여준다. 내가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달마산은 산악미가 넘치는 산이다. 들쑥날쑥한 바위꼭대기에 올라섰다가 에돌았다가 다시 올라 서 기암절벽을 타고 가야한다. 어떤 곳은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내려야 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낭떠러지 위를 걸어야만 한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려 때 이곳 미황사에서 머물면서 무외스님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산행을 이어간다면 산행의 재미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upgrade) 될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얼마나 길었던지 중간에 방향을 틀고 나서야 아래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에는 밧줄을 이용해서 오르내렸을 것 같은데 만만찮은 코스였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게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주변의 경관에 도취해있는데 어찌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있겠는가.



계단을 내려서면 오래 묵은 이정표(도솔봉/ 불썬봉) 하나가 나타난다. 진행해야할 도솔봉은 왼편방향이란다. 하지만 오른편 오르막길에도 선답한 이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마치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멋진 산길이 열려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오른편으로 향한다.



바위와의 힘겨운 씨름을 치르고 난 뒤에야 위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막상 오르고 나니 암벽이 앞을 탁 막아버린다. 다시 내려갈 일이 심난한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내지르는 환호성이 들려온다. 다가가보니 집채만한 바위들이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에 작은 통로가 있다. 상체를 숙이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몸이 큰 사람은 거의 앉아서 걸어야할 정도로 좁고 불편한 문이지만, 달마산 기암괴석의 한 중앙을 관통하는 맛은 놓치기 아까운 묘미다. 굴은 반대편 산자락으로 길을 이어준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119구호지점표지판(2-7)’에 현 위치를 문바위 뒤편으로 적고 있는데, 이곳을 이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바위를 지나서도 크고 작은 오르내림은 반복된다. 이 또한 바윗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곳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달마산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놀래 킨다. 우선 등줄기를 따라 줄지어 솟아오른 기암괴봉(奇巖怪峰)들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하고, 그 기암괴봉을 요리조리 돌아서거나 빠져나가고 혹은 올라설 때마다 변화하는 풍광에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날카로운 암봉이 위압적인가 하면 바위를 끼고 돌아서는 사이 다도해가 풍경화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고, 또 한 모퉁이 돌아서면 전형적인 내륙 풍광으로 바뀐다.





산등성이를 따라 걷는다. 하늘 아래를 걷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달마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25분 남짓되면 삼거리(이정표 : 도솔봉주차장 5.4Km/ 미황사 1.0Km/ 달마산정상 0.5Km) 하나를 만난다. 이정표는 이곳을 작은 금샘삼거리이라고 적고 있다. 미황사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볼거리들로 넘치는 능선을 벌써부터 벗어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물맛이 좋다고 알려진 금샘을 찾아 주위를 서성거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금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바위벽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다는데 아무래도 속세(俗世)의 때를 탄 중생(衆生)들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단다. 바위와 바위틈 사이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있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작은금샘삼거리 근처에는 `꼭꼭 숨겨둔 비경들이 널려있다. 미황사에서 올려다볼 때 대웅전 뒤로 보이던 수석(壽石)을 닮은 거대한 바위들인데, 깎아놓은 것처럼 여러 개의 바위기둥이 솟구쳐 있다. 툭툭 솟아오른 바위기둥들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진다.



바위 사이로 길이 있다. 작은 바위들을 잡고 오른다. 길은 거칠다 못해 험하다. 몸을 비틀어서 올라야 하고, 다리를 쭉 뻗어서 내려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끔은 능선으로 난 길이 보이기도 한다. 길이 있으면 들어서야 하는 법, 몸을 비틀어 올라서니 눈앞이 열린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봄의 들녘이 펼쳐진다. 사월인데도 봄은 벌써 무르익었다.




바위들은 딱딱하면서도 무척 미끄럽다. 그리고 대개 하얀 색깔을 띠고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눈이 쌓여있는 것 같이 보이기 한다. 그게 다 규사의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석질 또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차돌(산돌)성분을 하고 있다. 실제로 바위를 오르내리다 보면 곳곳의 바위에서 작은 수정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석영이 주성분인 석질의 영향으로 금샘이 빛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추론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또한 그들은 금샘의 효능도 석질에서 찾고 있다. 규암 즉 석영이 많이 나오는 곳에서 게르마늄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 게르마늄이 물과 이온 교환을 통해 산소를 공급하면서 샘물의 신선도를 유지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작은금샘 삼거리’(달마봉주차장 5.3Km/ 미황사 1.1Km/ 달마산 정상 0.6Km)를 만난다.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참고로 `금샘은 말 그대로 금빛을 두른 채 반짝이는 신비의 샘이다. 작은금샘과 큰금샘이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는데, 석영의 주성분인 석질이 연출해내는 금빛은 보는 순간 환상에 젖을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윗길의 사나움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누그려졌다. 그렇다고 암릉의 모양새까지 볼품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까보다 조금 섬세해졌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바닥에 흙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바위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산길은 그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나있다. 바위를 에도를 때마다 시야가 열리면서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달마산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산처럼 나무숲속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해안경관을 보면서 걷는 다는 장점 말이다. 단조로운 산타기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고, 암릉 보행이지만 걸음을 빠르게 할 수도 있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암릉, 저 멀리 보이는 게 떡봉일 것이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건 도솔봉일 테고 말이다. 시선(視線)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이번에는 남녘의 다도해(多島海)가 눈에 들어온다. 미세먼지 탓에 조금 흐릿하긴 하지만 건너편 완도를 사이에 두고 강처럼 바다가 흐른다.



대밭삼거리 조금 못미처에서 또 다른 암봉이 멋진 경관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귀래봉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암봉은 바람에 실린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전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멋진 풍광이다.



그렇게 25분 쯤 진행하면 대밭삼거리’(이정표 : 도솔암 2.9Km/ 미황사 부도전 0.8Km/ 달마산 정상 1.2Km)에 이른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도솔암에 이를 수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세 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도솔암은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에 차곡차곡 돌을 쌓아올려 다진 터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작은 암자(庵子)이다. 도솔암은 의상대사가 미황사를 세우기 전에 수행정진하려 지었던 암자라 한다. 정유재란 당시 사라지고 2002년 오대산 월정사에 있던 법조 스님이 새로 지었단다. 원효대사와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했으며 서옹스님과 청화스님도 도솔암에서 참선정진을 했다고 하니 예사로운 터가 아닌 듯싶다. 아무튼 기암괴석으로 이어진 바위병풍의 꼭대기에 절묘하게 세워져 있는 데다 땅끝 일대와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추노,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의 드라마와 각종 광고 촬영의 배경이 됐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도 드라마, 영화 등의 장소 섭외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미황사로 내려가는 길은 두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랗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험상궂던 바위들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무척 편한 내리막길이라는 얘기이다. 그저 달마산의 암릉을 오르내리며 감탄해마지않았던 아름다운 경관들을 되새김질하며 내려가기에 딱 좋은 코스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서면 특이한 곳에 자리한 부도전(이정표 : 대밭삼거리 0.7Km/ 달마산 정상 2.3Km))에 이른다. 부도전()은 절의 입구에다 모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곳 미황사 부도전은 그런 곳이 아니다. 대웅전을 지나서 절 뒤쪽, 산길을 한참 들어간 곳에 그것도 수십 기의 부도를 한꺼번에 모셔놓았다. 본사급이 아닌 작은 말사에 32기의 탑과 부도가 있다는 것도 의외이다. 한때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사세가 컸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부도(浮屠)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또한 이들 부도에서는 게, 거북, 한쪽 발을 들고 서 있는 새, 방아찧는 토끼, 노루, () 등 다양한 문양(紋樣)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문짝을 그려놓은 것도 있다. 문짝은 문비형이라고 해서 하나의 을 연 고승의 부도탑에서 발견된다. 이 부도의 주인은 설봉당으로 서산대사의 4대 법손이란다. 초의선사의 그림 스승이었다는 나암 시연선사의 비에는 이슬람의 아라비아문자 같기도 한 용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부도전 옆에는 부도암(浮屠庵)이라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암자의 앞마당에는 거대한 비석(碑石) 하나가 버티고 있다. 얼마나 컸던지 우물처럼 깊게 파고 그 안에다 모셔놓았다. 미황사(美黃寺)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인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란다. 미황사가 725년에 한 배가 산 밑의 포구에 닿아 살펴보니 그 안에 화엄경 등의 경전과 불화가 들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의조화상이 소가 경전을 싣고 가다 눕는 두 곳에 각각 통교사와 미황사를 세우라는 꿈을 꿨고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미황사의 이름도 거기에서 연유하였음을 밝혔다. 이어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한 가섭마 등과 축법란의 사유와 송대 문인의 불교와의 관계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숙종 18(1692)에 민암(閔黯)이 짓고 낭선군(朗善君)이 썼다. 비의 상태가 마모가 심해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후면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전면의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글을 쓴 민암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를 이상하게 모셔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미황사로선 죽임까지 당한 중죄인 민암의 이름을 숨기고 싶었을 수도 있었겠기에 하는 말이다.



부도전 이후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널찍한 임도(이정표 : 미황사0.6Km/ 도솔암4Km/ 대밭삼거리0.8Km, 작은금샘 1.1Km)를 따른다. 이 길은 미황사 천년역사 길이다. 해남군에서 복원 해놓은 둘레길인 땅끝 천년 숲 옛길1구간으로 땅끝에서 미황사 부도전까지 이어지는데 달마산의 산중턱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길은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전파될 때 이 길을 통해 황소가 불상을 운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부와 아낙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던 이 길은 반세기전(半世紀前) 도로가 뚫리면서 잊혀졌다가 얼마 전 다시 정비되었다. 길은 대체로 완만하며, 편백나무 숲도 지나고, 너덜길도 지나가면서 이어진다. 대체로 볼거리는 많지 않으나 호젓해서 좋은 길이다. 불공을 드리러 오는 민초들이나 구도의 길을 찾는 스님들이 걷던 길이니 구태여 아름다울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곧 눈일지니...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난다. 부도암에서 기르는 듯한 개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서두르지 않고 우리 부부의 속도에 맞춰가며 말이다. 나물을 좋아하는 집사람이 길가에 앉아 쑥이라도 캘라치면 개 역시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길을 나서면 어김없이 앞에 나타나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미황사주차장(원점회귀)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미황사(美黃寺)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하지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주변 경관을 감상하느라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갈 수도 있으나 미황사에 들러보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이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에 있는 절이다. 서기 749년 의조 스님이 창건했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문화재로는 대웅보전(보물 제947)과 응진당(보물 제1183)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명부전과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세심당, 향적전 등이 절마당을 가운데 두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아무튼 절간 마당에 서면 수더분하게 생긴 대웅보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이 마치 병풍처럼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풍경이 흡사 한 폭의 수묵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달마산은 우뚝한 기암(奇巖)과 거대한 수석(壽石)들을 수없이 세워놓았다. 산과 가람의 어울림, 그리고 웅장한 조화가 편안하기만 하다.



미황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에 돌배 한척이 땅끝마을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려 살펴보려고 가까이 가면 번번이 멀어져갔는데, 의조스님이 기도를 올리자 돌배가 바닷가에 와서 닿았으며 배 위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날 밤 의조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와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으로서 경전(經典)과 부처님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聖像)을 봉인하라고 일렀다. 배에서 나온 소의 등에 경전을 싣자 소가 한 번 눕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걷다가 달마산 산골짜기에 이르러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소가 처음 누운 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영영 누운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의 ''는 소의 울음소리에서 따왔고, ''은 금인의 황금빛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미황사 창건설화는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南方傳來說)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자하루(紫霞樓) 계단을 내려서니 가지를 축 늘어뜨린 홍매화를 배경으로 서있는 달마대사가 중생(衆生)을 맞는다. 이곳 미황사는 달마대사와의 인연을 주장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렇다면 이곳 달마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거론해보자. 고려 때의 일이다. 중국의 사신이 해남 땅끝으로 오더니 산 하나를 가리켰다.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인가.’ 주민들은 `그렇다고 했다.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행하고 그 산을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만한 땅이다.’ 그렇다. 달마산 기슭에 자리한 미황사의 옛 기록들은 달마가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 땅끝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계시는 곳이라 소개하고 있고, 달마산이라는 이름 유래 또한 그러하다. 중국에 건너가 선종을 창시한 달마는 모함을 받고 죽음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달마가 죽은 지 3, 소문이 퍼진다. 부처의 몸이 되어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꿰어 차고 서천(인도)으로 갔다는... 달마가 인도로 갔다는 게 널리 알려진 달마 전설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달마가 이곳으로 온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달마가 정말 해남으로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