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2구간(삼화실-대축)

 

여행일 : ‘22. 3. 19(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하동읍과 적량면, 악양면 일원

여행코스 : 서당마을(3.3km)→신촌마을(2.7km)→신촌재(1.9km)→먹점마을(1km)→먹점재(1.8km)→미점마을(2.7km)→대축마을(거리 및 시간 : 13.4㎞/ 실제는 13.49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2구간(삼화실-대축)을 걷는다. 16.7km에다 높다란 고개를 3개를 넘어야하는 험난한 여정이지만, 지난 번 13구간 때 12구간의 일부(삼화실-서당)를 추가시켰기 때문에 오늘은 나머지(서당-대축)만 걸으면 된다. 이 구간은 걷는 시기에 따라 난이도가 바뀐다고 보면 되겠다. 고개를 2개나 넘어야하는 고단한 일정이지만, 때를 잘 맞춰 봄날에라도 찾는다면 걷는 내내 만나게 되는 매화꽃의 향기에 취해 힘들다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서당 마을회관(하동군 적량면 우계리)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50km쯤 내려오면 하동읍이 나온다. 하동읍내 ‘GS-섬진주유소’ 앞 회전교차로에서 12시 방향 ‘경서대로’로 옮겨 ‘횡천(하동군)’방면으로 잠시 들어가다, 적량면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당마을에 이르게 된다.

▼ 12구간은 원래 삼화실(적량면)에서 대축마을(악양면)까지다. 거리가 16.7km나 되는데다 높다란 고개를 3개나 넘어야하는 탓에 난이도가 ‘상’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번 13구간 때 그 일부(삼화실↔서당, 3.3km)를 미리 걸었기 때문에 오늘은 13.4km만 걸었다. 덕분에 코스 난이도도 ‘중’ 정도로 낮추어졌다.

▼ 마을회관의 처마 밑 벅수(서당 0,2㎞/ 하동읍 6.8㎞)는 12구간에서 곁가지(초록색)인 13구간이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이제껏 보아오던 빨강색(진행방향)과 검정색(반대방향) 대신 빨강색과 초록색으로 되어있다. 역방향이 없다보니 검정색 표시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 벅수의 빨강색 화살표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괴목마을’로 올라가는 도로(군내버스가 다닌다)로, 길을 나서자마자 우계저수지의 높다란 제방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 도로를 따라 8분쯤 이어지던 길은 우계저수지의 둑길로 올라선다. 둑에는 갈대가 무성하다. 가을이 무르익을 때 찾으면 호수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멋진 풍광을 눈에 담을 수도 있겠다.

▼ 모자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센데도 저수지의 물은 잔잔하기만 하다. 그만큼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수지는 산골마을의 중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해주는 젓줄과도 같다. 저수지 아래 갓논(논의 크기가 '갓만큼 작다'는 뜻)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고개를 돌리자 그동안 지나온 마을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차오른다. 넓은 평원에 옹기종기 이웃한 갓논(다랑논)을 기반으로, 서당마을과 상우마을, 원우마을, 공월마을 등이 발아래로 쭉 펼쳐진다. 모두 우계리의 자연부락들이다.

▼ 반대편에 이른 둘레길은 이제 우계저수지를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그리고 12구간의 특징을 여과 없이 내보여 준다. 눈길 닿는 곳마다 매화꽃이 만발한 것이다.

▼ 다랑논 너머로 ‘괴목(槐木)’ 마을이 나타난다. 하늘색과 주홍빛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게 여간 멋스럽지 않다. ‘괴목’이란 동구 밖 ‘기목나무(귀목나무의 방언)’에서 유래된 지명인데, ‘기목정(기목+정자나무)’ 또는 ‘기먹징이’로 불리다가 한문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현재의 ‘괴목’으로 굳어졌다.

▼ 둘레길은 괴목마을을 들르지는 않는다. 초입(벅수 : 대축 11.8㎞/ 삼화실 4.9㎞)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내 산비탈로 들어붙는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선다는 얘기는 아니다. 밭의 가장자리와 산자락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매화꽃 천지다. 그렇다면 이번 구간도 역시 ‘탐매(探梅)’ 나들이가 되겠다. 옛 선비들이 이른 봄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탐매’라 했으니 말이다.

▼ 잠시 후 산자락을 벗어난 둘레길은 또 다시 농로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다랑논 사이를 헤집으며 신촌마을로 향한다.

▼ 마을표지석이 신촌마을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애향(愛鄕)’이라 적힌 빗돌도 보인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고사성어까지 덧붙인걸 보면 이 마을 출신 아무개가 성공해서 돌아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돌에 새겼을 정도로 마을에 큰 기여를 했고 말이다.

▼ 신촌마을(벅수 : 대축 10.5㎞/ 삼화실 6.2㎞)은 고지(해발 231m)가 꽤나 높다. 덕분에 우리가 걸어온 우계저수지며 논·밭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발아래로 펼쳐진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신촌마을로 들어선다. 적량면과 악양면 사이에 솟아오른 구재봉 아래 깊숙이 들어간 마을이다. 하지만 방앗간까지 있었을 정도로 산골치고는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한다.

▼ 삭막했을법한 마을 담벼락은 언제부턴가 꽃밭으로 변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도 담겨있었다.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 따뜻해서, 당신이 사랑스러워>

▼ ‘앗! 술 익는 마을이다’ 하지만 집사람을 아랑곳조차 않는다. 길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매실무덤(매실엑기스 짜고 난 찌꺼기)에서 나는 냄새인데 웬 호들갑이라며 말이다. 그렇다면 저 풍경은 생과 사의 공존으로 변한다. 무덤 옆의 매화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그게 더욱 탐스럽게 느껴짐은 둘 사이에서 윤회의 과정을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둘레길은 까마득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때 길가 다랑논이 눈길을 끈다. 지리산둘레길에서 흔하디흔한 게 다랑논이니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만은 돌로 쌓아올린 축대가 높아도 너무 높다. 저건 우리네 조상들이 흘린 땀의 흔적들이다.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던 시절, 우리네 어버이들은 돌멩이 하나하나 쌓아올려 다랑이 밭을 만들었고, 그 밭에서 나온 잡곡으로 겨우겨우 보릿고개를 넘겼다.

▼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뒷마당에 돌부처까지 들어 않은 것이 분명 사찰이다. 공터에 BMW까지 주차되어있는 걸로 보아 들어오는 시주도 만만찮은 모양이다.

▼ 남의 것에 욕심 내지 말자는 현수막은 이제 통과의례가 되어버렸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 내일 아침 밥상에 올리겠다며 집사람이 뜯고 있는 달래와 냉이도 저 금지품목에 해당될까?

▼ 길(임도)은 끊임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지리산 칠성봉에서 분기해 구재봉을 거쳐 분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하지만 경사가 심하지는 않다. ‘갈 지(之)’자, 그것도 큰 폭으로 써가면서 고도를 높여가는 덕분이다. 걸어야할 거리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건 단점이겠지만.

▼ 신촌마을을 통과한지 40분. 돌의자 몇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를 만났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신촌재’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곳이다. 해발이 474m나 되는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다가라는 모양이다.

▼ ‘앗! 호랑이굴’이다. 그러나 함께 걷던 둘레길 도반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긴 집사람까지도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하지만 신촌마을에는 ‘여수(여우의 방언)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러니 그 여우가 살던 굴일지 누가 알겠는가.

▼ 8분쯤 더 걸으면 ‘신촌재(해발 458m)’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만인데, 이곳은 신촌·괴목마을과 먹점마을을 잇는 고개이자 적량면과 하동읍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갯마루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간이화장실도 설치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은 또 지난번 13구간 때 만났던 ‘삼신지맥(三神枝脈)’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선지 벅수(빨강/녹색/검정) 말고도 이정표(먹점↑/ 구재봉→ 2.0㎞/ 분지봉← 0.5㎞/ 신촌↓)를 따로 세웠다. 참! 우회로를 이용하라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2020년의 산불 피해지의 벌목작업으로 인해 구재봉을 경유하는 곁가지길(녹색으로 표시한다)의 일부가 막혀있다는 것이다.

▼ 잠깐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턴 경사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왔을까 소나무 숲이 끝나가는 곳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라 몸체가 울퉁불퉁한 서어나무라는 게 특이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벤치 뒤 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위 위에 바위, 그것도 힘을 조금만 주어도 굴러가버릴 것 같은 바위가 한 폭의 멋진 정물화를 그려낸다.

▼ 내려오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 백운산이 놓여있다. 좌우로 펼쳐진 산자락이 긴 눈썹처럼 드넓게 펼쳐진다.

▼ 쉼터를 서어나무에 빼앗긴 한풀이일까? 잠시 후 잡티 하나 없는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심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 숲이 끝나면 둘레길은 ‘먹점마을’로 내려선다. 구재봉 중턱 해발 400m의 산골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섬진강 매실의 원조라고 한다. 마을을 뒤덮은 매화나무는 봄이면 황홀한 매화꽃으로 절경을 이루고, 초여름에는 열매를 맺어 고단한 농촌살림에 보탬을 준다. ‘효자나무’인 셈이다.

▼ 마을은 초입부터 매화나무가 빼곡하다. 그 시작은 ‘산골매실’. 이곳 먹점마을의 농가 대부분은 매실농장을 열고 있다. 그리고 최상품의 매실을 생산한다. 때깔 고운 매실은 향이 짙고 잡티 하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단다. 청정 고랭지의 주변 환경 덕에 병충해가 적고 친환경·유기농으로 재배되는 까닭이란다.

▼ 농원이 들어선 공간은 순백의 꽃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매화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는데, 그게 마음마저 잔잔한 일렁임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겨울의 끝자락에 꽃을 피운 저 매화는 4월부터 열매를 맺고 6월 중순께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간다.

▼ 매화나무 아래에 서자 향긋한 내음이 코를 찌른다. 그렇게 봄은 시작되나 보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다는 화가 김홍도는 그림을 팔아 만든 돈을 몽땅 써가며 매화나무를 샀고 그 아래서 매화음(梅花飮)을 외치며 술을 마셨다. 퇴계 이황은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만큼 옛 선비들은 매화를 좋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매화에 도취된 나 역시 행복하다.

▼ 지리산 자락에 넉넉하게 안긴 마을은 골짜기와 밭두렁으로도 부족했던지 마을 고샅길까지 온통 매화나무다. 백매화와 홍매화가 마치 금슬 좋은 부부처럼 행복해하며 마주보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게 또 축 늘어져있는 게 아닌가. 능수버들에 능수벚꽃은 들어봤어도 능수매화는 오늘 처음으로 봤다.

▼ 매화마을의 대미는 역시 ‘홍매화’가 장식한다. 하얀 매화 속 홍매화는 절세미인을 닮았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고귀한 인내가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웠나보다.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집사람이 홍매화 꽃 속에 자신의 얼굴을 넣는다. 그러자 집사람의 얼굴도 꽃이 된다. 꽃 중의 꽃이라고나 할까?

▼ 광양에 ‘청매실농원’이 있다면 섬진강을 사이에 둔 하동에는 ‘먹점마을’이 있다. ‘먹점(묵점)’은 그 옛날 검은 흙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섬진강을 등지고 지리산의 산기슭에 기대어 10호 남짓한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곳은 하동에서도 오지로 분류된다. 하지만 ‘지리산둘레길’이 트이고 난 뒤부터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나그네들이 마을안길을 지나다닌다.

▼ 마을로 들어서는가 싶던 둘레길이 갑자기 방향을 확 틀어버린다. 그리고는 또 다른 능선을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정표는 이 길이 구제봉(활공장)으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 양지바른 곳에서 폭죽처럼 피어난 꽃은 벌써부터 거센 바람에 꽃잎을 흩뿌리고 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하얀 꽃잎이 여간 멋스런 게 아니다. 그게 ‘서편제’의 한 장면을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서 끄집어냈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소나무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훤칠한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맞보고 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12구간의 명물은 물론 ‘문암송’이다 하지만 저 나무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겼다.

▼ ‘시골원’이란 의미 모를 가판에 이끌려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매화나무 그늘 아래 터를 잡고 준비해온 막걸리에 매화 꽃잎을 띄웠다. 이왕에 온 매화꽃 마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잔을 입에 대니 막걸리의 시금털털한 맛은 사라지고 대신 달달하고 향기로운 매화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었다는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의 금준미주는 이런 술을 일렀을지도 모르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먹점마을’에서는 25분). ‘먹점재(벅수 : 대축 4.8㎞/ 삼화실 12.1㎞)’에 올라섰다. 먹점마을과 미동마을을 잇는 고개이자 하동읍과 악양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갯마루는 구재봉의 행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미동마을로 내려가는 임도도 역시 경사가 거의 없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는 것도 ‘신촌재’와 대동소이하다.

▼ 하지만 이곳은 ‘시크릿 가든’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을 막아버렸다. 출입(임산물채취) 금지 팻말로도 부족했던지 군대에서나 볼법한 윤형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쳐놓았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바로 섬진강이다.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이라고도 불리는 섬진강의 모래톱이 하얀 맨살을 드러낸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거기에 새하얀 매화꽃 가득한 마을이 보태지며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강 건너 광양 땅도 아른거린다.

▼ 미동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지리산과 백운산을 굽이돌면서 흘러가는 섬진강이 성큼 다가온다. 타원형을 이루는 강줄기는 강가에 삼각주 형태의 모래밭을 만들었고, 모래는 강물과 다정한 벗이 돼준다.

▼ 조금 더 내려오자 벌거벗은 민둥산이 얼굴을 내민다. 그 아래는 잘라낸 목재가 한 가득이다. 아까 신촌재에서 만났던 현수막이 거론하던 ‘벌목 작업장’이다. 2020년에 발생했던 산불 피해지를 정리한다는 것이다. 참! 저 작업장으로 인해 둘레길이 또 다시 막힌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설치예술에 가깝게 생긴 저 바람개비는 무슨 용도일까?

▼ 먹점재에서 25분. 미동마을로 내려가던 둘레길이 갑자기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오르막길로 변해 산자락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린 벅수(대축 2.8㎞/ 삼화실 13.9㎞)의 방향표시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미동마을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목작업이 한창이어서 둘레길을 고집할 경우 자칫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단다.

▼ 이젠 진행방향 저 아래에 섬진강을 깔아놓고 걷게 된다. 이때 눈앞에 펼쳐진 풍광이 여간 멋스런 게 아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랑이논과 야트막한 돌담, 거기에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도 마냥 정겹다.

▼ 10분쯤 걸었을까 산중턱, 그것도 비탈에 들어앉은 ‘미동마을’에 이른다. 법정마을인 ‘미점리(美店里)’의 자연부락(미동·미서·개치) 중 하나로,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특히 오늘처럼 매화꽃으로 치장되었을 때가 가장 빼어나단다. ‘미동(美東)’이란 미점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길은 이제 섬진강을 향해 치닫는다. 길가는 아직도 매화꽃 천지다. 누군가는 하동의 매화를 화려하지 않다고 했었다. 이곳의 매화나무는 매실을 수확하기 위해 전지를 하는 탓에, 키가 작은데다 나무 사이의 간격까지 넓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눈높이에 맞춰 매화꽃을 즐길 수 있으니 나로서는 더 좋아보였다.

▼ 우리나라 매화꽃은 섬진강을 사이에 둔 광양과 하동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매화를 즐기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고 한다. 광양의 매화꽃이 화려한 비단과 같다면 하동의 매화는 목화솜처럼 보드랍고 수수하단다.

▼ 20분 남짓 더 내려가자 청동기시대(BC 5000년)에 이미 촌락이 형성되었다는 ‘개치(開峙)’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국가 형성기인 변한(弁韓) 때(BC 108년)는 이미 대외연락의 중요한 지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저 마을은 또 오랜 역사만큼이나 큰 시장이 열리던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래 전 폐장되었지만 신라시대에 범포(帆浦),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개치장’으로 불리던 큰 시장이 2일과 7일에 열렸다고 한다.

▼ 잠시 후 길은 19번 국도의 ‘악양교차로’로 내려선다. 얼마 전까지 악양루(마을표지석 뒤편 언덕에 있었으나 현재는 동정호로 이전했다)가 있었던 곳이다.

▼ 도로변의 마을표지석은 ‘개치’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미점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 개치마을은 악양의 소상팔경 중 원포귀범(遠浦歸帆)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이는 마을에서 열리던 오일장을 상징하는 말로 멀리서 돛단배가 돌아오는 먼 포구라는 뜻이란다. 그 배가 가득 싣고 온 다른 지역의 산물을 받아서 도부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이다.

▼ 이후부턴 차도인 ‘악양동로’를 따른다. 교통량이 제법 많지만 둘레길이 아니라선지 보행로를 따로 만들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니 오가는 차량을 잘 살펴가며 걸을 일이다. 참! 벚꽃 개화시기(3.26-4.17)의 번잡함이 엿보이는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간이정류소인데, 개치와 악양 정류소에서는 이 기간 동안 승차가 불가능하단다.

▼ ‘알프스 아니에요. 지리산이에요’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하동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하동 알프스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일 것이다. 형제봉에 산악열차와 케이블카, 모노레일 등 3종 세트와 함께 5성급 관광호텔에 미술관까지 건설한다는 계획인데, 스위스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 본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구태여 막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 ‘악양삼거리’에는 악양동천(岳陽洞天)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평사리를 비롯해 악양면의 대부분은 산남강북(山南江北)의 지형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이런 지형을 동천(洞天)이라 불렀으니, 악양동천(岳陽洞天)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 부지런을 조금 떨면 아래 사진처럼 예쁜 대나무 숲길도 걸어볼 수 있다. 울창한 대숲은 한낮인데도 해를 삼켜버렸다.

▼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미서(美西)’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고 날머리인 대축마을로 향한다.

▼ 대축마을로 향하다보면 감나무 밭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악양면을 대표하는 대봉감일 것이다. 하동 생산량의 80% 이상이 이곳 악양면에서 난다니 말이다. 매년 ‘대봉감축제’까지 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 악양천 너머에는 형제봉(성제봉) 능선이 헌걸차게 솟아올랐다. 줌으로 당겨보면 신선대의 출렁다리까지 눈에 들어온다.

▼ 개치마을에서 25분. 드디어 대축마을에 도착했다. 임금님 진상품으로 잘 알려진 하동 대봉감의 주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질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제배에 가장 좋은 토질과 환경을 지녔다고 해서 이곳에 감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또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문암송(文岩松)으로도 유명하다.

▼ 마을을 자랑은 표지석 하나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 옆에 작을 빗돌을 세우고 마을의 내력을 적었다. 마을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변한시대 이곳에 락노국(樂奴國)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목 악양현 소속의 ‘둔위(屯危)’로 향교(鄕校)가 있었고, 1633년에는 ‘축촌(丑村)’이란 기록으로도 나타난단다.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축(大丑, 큰 둔이)과 소축(小丑, 작은 둔이)을 합쳐 축지리(丑只里)가 되었다.

▼ 날머리는 대축마을(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100m쯤 더 걸어 마을로 들어서자 커다란 당산나무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49km. 집사람의 불편한 다리를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원부춘 8.5㎞←대축→삼화실 16.7㎞)는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놓았다. 아무튼 불편한 무릎 때문에 시작부터 힘들어하던 집사람이 오늘도 끝까지 함께 했다. 천만 번의 윤회를 거치더라도 그녀 곁에 머물고 싶다는 내 의지가 그녀의 가슴에까지 닿았음일까? 말로는 표현을 않지만 그녀는 부창부수(夫唱婦隨)를 가훈처럼 여기며 항상 내 곁을 지켜준다.

▼ 대축마을의 랜드마크인 ‘문암송(文岩松, 천연기념물 제491호)’은 가보지 못했다. 길이 막힌 둘레길 대신 다른 코스를 이용했던 탓에, 이 소나무를 900m나 우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진까지 포기할 수야 없는 노릇.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께 양해를 구하고 빌려다 올려본다. 참고로 ‘문암송’이란 거대한 너럭바위 사이를 꿰뚫고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600년의 세월을 괴석과 함께하며 저 멀리 섬진강과 드넓은 악양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