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6), 조지훈 문학길
여행일 : ‘21. 3. 20(토)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영양읍 및 일월면 일원
여행코스 : 영양전통시장→삼지 수변공원→연지저수지→망운정→금촌산길→곡강교→영양향교→이곡교→조지훈문학관(소요시간 : 13.7km/ 실제로는 14㎞를 4시간 걸려)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여섯 번째 길인 ‘조지훈 문학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세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으로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한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문학이 구간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로 시작되는 승무(僧舞)의 작가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주실마을’에서 구간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아름다운 그의 시(詩)들 만큼이나 빼어난 경관들을 눈에 담으며 걷게 된다. 반변천의 곡류단절지인 ‘삼지리’ 일대와 곡강 팔경의 으뜸인 ‘척금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바 있는 주실마을의 ‘비보(裨補) 숲’ 등이 대표적인 볼거리이다.
▼ 들머리는 영양전통시장(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288-3)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동청송·영양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전삼거리(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우회전 31번 국도로 옮겨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양에 이른다. 양평교차로에서 국도를 빠져나와 중앙로를 따라 들어가다 ‘농협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트레킹이 시작되는 영양전통시장이 바로 코앞이다.
▼ 외씨버선길의 여섯 번째 코스인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읍(전통시장)에서 출발해 같은 영양 땅인 주실마을(일월면)에 이르는 길이 13.7km의 둘레길이다. 반변천의 곡류단절지로 풍경이 수려한 삼지리 일대와 반변천이 빚어낸 바위절벽 지대인 곡강마을, 일월면소재지인 도계리 등을 지나게 되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승무를 지은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란 주실마을은 그런 멋진 트레킹의 대미(大尾)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 외씨버선길 트레커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영양객주 앞에 위치한 영양전통시장은 1918년 5월 4일에 개장한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시장이다. 아직도 매 4일과 9일에 장이 열리고 있으며 이때는 62개 점포가 일제히 문을 연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연 상점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장날이 아니어선지 아니면 코로나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친 탓인지는 모르겠다.
▼ 전통시장 조형물 앞에서 영양경찰서가 있는 방향(동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일월산 약초 건강원’이란 간판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산이 ‘일원산’이며, 또한 그 일월산에는 귀한 약초가 많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저 상점에서는 그런 약초들로 엑기스를 만들어 파는 모양이다.
▼ 영양중앙초등학교에 이어 담벼락에다 신사임당과 조지훈을 그려 넣은 영양교육지원청을 스치듯 지나자 탐방로는 2차선 도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오솔길로 변해 산속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분 만인데, 들머리에 외씨버선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길가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상촌 신흠(象村 申欽)의 ‘야언(野言)’이라는 시에 나오는 문장이다. 옛 선비들은 봄이 되면 매화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이를 ‘탐매(探梅)’라고 하는데, 추운 계절에 피어나는 매화꽃을 보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타협하거나 굽히지 않겠노라 스스로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오늘 공짜로 탐매를 한 셈이 됐다. 비록 빗길이지만 춘분(春分)의 봄나들이가 가져다 준 행운이라 하겠다.
▼ 잠시 후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급의 노거수(老巨樹) 아래에 벤치를 놓고, 외씨버선길의 알림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이제부터 걷게 될 ‘삼지리(三池里)’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한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인데, ‘삼지’라는 지명은 원댕이못(元塘池)과 탑밑못(塔底池), 바대못(坡大池) 등 세 연못에서 비롯됐다. 이밖에도 마을의 주요 볼거리들을 꼼꼼히도 설명해 놓았다.
▼ 산에서 내려오자 삼지연꽃테마단지(이정표 : 지훈문학관 12.3㎞/ 영양전통시장 1.4㎞)가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에는 정자는 물론이고 영양지역 전통의 물레방앗간까지 만들어 쉬면서 눈요기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도 옛 멋이 물씬 풍기는 다리와 꽃 터널, 그리고 담양만큼 크지는 않지만 메타스퀘어길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췄다. 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삼지(三池)라는 이곳 지명을 낳게 한 3개의 연못 가운데 하나인 '항지(項池)'가 나온다. 못이 '새의 목처럼 길게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파대지(坡大池)' 또는 '바대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못의 형태가 마치 베틀의 바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공원의 주인장은 누가 뭐래도 ‘파크 골프장’이 아닐까 싶다. ‘공원에서 즐기는 골프’인 파크골프(park golf)는 골프와 게이트볼을 접목시킨 개념의 신종 스포츠로 골프채와 게이트볼채를 섞어놓은 것 같은 스틱으로 직경 6㎝의 플라스틱 공을 맞춰 홀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골프보다 비용부담이 적고, 공을 맞추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인기를 끌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 예스런 멋이 물씬 풍기는 나무다리도 두 개나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왕에 놓았으니 사후관리도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 ‘아기탄생 기념나무’라는 문구가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세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깊은 바다처럼, 높은 하늘처럼, 드넓은 우주처럼’이라는 엄마아빠의 마음을 가득 담았다. 영양군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지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전반적인 출산장려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이라고 한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31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삼지2리’가 손짓한다. 삼지(三池)라는 마을 이름은 간지(澗池)와 연지(蓮池), 항지(項池)라는 세 개의 연못이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오랜 옛날 이곳에는 반변천이 돌아 흘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큰 홍수로 인해 옥산의 산맥이 끊어지면서 물길이 바뀌었고, 그 곳에 전형적인 우각호가 형성되자 주민들이 저수지를 만들었단다. 기름진 땅이 만들어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마을의 풍요로움은 '사슴이 은혜를 갚기 위해 산맥을 잘라놓았다'는 전설까지 만들어 냈다.
▼ 마을 입구(이정표 : 지훈문학관 11.2㎞/ 영양전통시장 2.5㎞)에서 자라고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됐을 법한 노송(老松) 무리도 마을의 풍경을 풍요롭게 해주는 한 요인이 됐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그늘에서 연꽃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쉼터가 되고, 거기다 낚시를 드리우는 재미까지 더해준단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 소나무 둑방길의 오른편에는 '연지(蓮池)'가 터를 잡았다. '간지'와 '항지' 사이에 있는 연못으로 못에 연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혈사'라는 절 밑에 있다 하여 '영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 절에서 세운 3층 모전석탑 아래 있다고 해서 '탑밑못(塔底池)'이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저 연못은 토종 연꽃인 법수홍련으로 유명하다. 키는 작지만 많은 꽃을 피우고 강한 향기를 지녔다. 지금이야 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지만 누군가는 연꽃이 핀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꽃잎은 하늘과 맞닿게는 홍색이었다가 땅을 향하여 백색으로 바림하고, 커다란 잎은 우산을 활짝 편 듯하다.’ 참! 나머지 하나인 '간지(澗池, 원당에 있다고 해서 元塘池로도 불린다)'는 하원리 앞에 있다. 못이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단다.
▼ 삼지(三池) 일대는 현재 수변공원(水邊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항지(파대지)와 연지(탑밑못), 간지(원당지) 등 3개의 연못을 활용해 37㏊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원당지는 자연 그대로의 휴양공간, 연지는 '삼지연꽃체험장', 그리고 파대지는 '영양고추연테마공원'이다. 아름다운 연꽃을 가까이서 보고 즐길 수 있도록 3㎞ 길이의 데크 탐방로와 차를 마시며 연꽃의 운치를 감상할 수 있는 카페와 체험관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 마을 뒤 언덕으로 150m쯤 오른 탐방로는 도로와 헤어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거리표시가 없는 이정표는 이곳을 ‘노루목재’라 적고 있었다.
▼ 조붓한 산길은 흙과 돌무더기를 밟으며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하지만 고갯마루의 높이가 낮아서인지 서둘러 고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숲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원시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지난 해 여름의 폭우 때 넘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아름드리 거목들을 정리하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띈다. 특별히 볼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산길이 계속된다.
▼ 그렇게 15분쯤 올라서자 ‘노루목재’ 정상이다. 노루목재는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수비면 및 일월면 사람들이 영양읍으로 나가던 주요통로였다. 외씨버선길 트레커들의 차지가 된 지금은 그네들을 위한 외씨버선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쉼터용 평상도 놓아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험상궂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길이 비탈진 사면을 헤집으며 나있는데다 비좁기까지 해서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걸음을 옮기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토끼비리’라며 엄살까지 떠는 일행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25분을 써가며 노루목재를 넘자 ‘논두들’마을이다. 여기서 ‘두들’이란 ‘언덕 위’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니 언덕 위에 있는 논배미라는 의미일 것이다. 마을은 반변천변의 논 가운데에 자리 잡았을 테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주의할 것이 두 가지나 된다. 첫 번째는 이정표(지훈문학관 10㎞/ 영양전통시장 3.7㎞)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두라는 것이다. 나중에 외씨버선길을 완주했다는 증명이 되니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이정표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꼭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지름길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변천을 우회하고 있는 정규코스보다 1.5㎞를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변천변의 기암절벽과 망운정이라는 역사 유적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선지 외씨버선길의 또 다른 지도는 정규탐방로를 ‘우회로’로 표기하고 있었다.
▼ 지훈문학관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자 아래 사진과 같은 삼거리가 나온다. 위에서 얘기한 갈림길이다. 곧장 직진하는 정규 코스는 상원교를 건넌 다음 상원3리(무드리 마을)를 거쳐 지름길과 또 다시 만나는 ‘곡강마을’로 되돌아 나오게 되어있고, 왼편으로 나뉘는 지름길은 반변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넌 다음 망운정과 곡강마을을 지나서 다시 정규코스와 합류된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왼편 지름길을 선택할 것을 강력 추천한다.
▼ 수월농원(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 강가로 내려서자 물 건너에 거대한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반변천의 물길이 깎아놓은 바위절벽인데 벼랑 아래는 맑은 물이 넘실거린다. 사진에서 보았던 ‘척금대(滌襟臺)’와 닮아 카메라에 담았으나 진짜 척금대는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단다. 그건 그렇고 척금대라는 지명은 1692년(숙종18년) 현감 정석교(鄭錫僑)가 같은 장소에서 시회(詩會)를 열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첩첩 곧게 솟은 바위벽이 ‘비단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하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옛 추억을 돋게 한다는 ‘징검다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작년 여름 물난리 때 떠내려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임시방편으로 자갈을 두둑이 쌓아놓아 건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이 부근에 몰려있다는 곡강팔경(曲江八景)이라는 자연경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위에서 말한 척금대(滌襟臺)를 위시해서 절벽위에 솟아 있는 여기봉(女妓峰), 강가에 둘러 있는 병풍암(屛風巖), 반달모양의 산봉우리 반월산(半月山), 배나무가 많은 이수곡(梨樹谷), 오동나무가 많은 동네 동만곡(桐晩谷), 약수가 샘솟는 약수천(藥水川), 백이숙제를 상징하는 지석암(砥石巖) 등이 여기에 속한단다.
▼ 반변천을 건넌 탐방로는 이제 천변을 따른다. 곡강팔경 가운데 하나인 여기봉(女妓峰)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가 잘 생긴, 거기다 엄청나게 오래묵기까지 한 느티나무가 보이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느티나무를 지나자 대지(臺地) 위에 높직이 자리한 망운정(望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9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으로 조홍복(趙弘復)이 1826년 선조의 묘소 옆에 터를 잡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1807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나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였을 뿐 출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구휼하며 후진을 기르는데 힘썼고, 만년에는 선영 근처에 망운정을 짓고 선조들의 무덤을 지키며 책으로 양식을 대신했다고 전해진다.
▼ 망운정을 지나자 ‘곡강마을(曲江里)’이 얼굴을 내민다. 반변천 물길이 흥림산(興霖山) 줄기의 굳은 암벽을 뚫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며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니, 후세 사람들이 그 생김새를 보고 이 일대를 ‘굽은갱이’ 또는 ‘곡강(曲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을은 반월형으로 툭 튀어나간 곳에 터를 잡았다.
▼ 마을 벗어나려는데 ‘이락당(二樂堂)’ 편액을 단 건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낡고 쇄락했지만 뭔가 내력을 품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고택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영양문화원에서 발간한 ‘고은향토(제2호, 古隱은 신라 초기의 영양 지명)’에서 이곳 곡강에 입향(入鄕)한 성씨 중에 ‘봉화 금씨(奉化 琴氏)’가 있고, 그 자손 중에 ‘이락당 금결(二樂堂 琴潔)’이 있다고 했는데 그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나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까지 오른 인물이다.
▼ 곡강마을을 나선 탐방로는 이제 지방도로를 따른다. 마을을 뒤에 세우고 100m 조금 넘게 걷자 ‘금촌산길 입구’이다. 곡강리 산길이라고도 불리는 2㎞의 이 구간은 수비면 사람들이 영양읍으로 장보러 다니던 삶의 길이자 학생들이 통학하던 산길이었다. 참고로 논두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이정표(지훈문학관 7.4㎞/ 영양전통시장 6.3㎞)와 함께 세워놓은 6길 안내도는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뉨을 알려준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 6길의 시점인 영양전통시장으로 되돌아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종점인 지훈문학관으로 가려면 산속으로 파고드는 오솔길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참!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은 곡강(曲江)에 대한 사연도 적고 있었다. 굽은 강이란 뜻의 곡강은 마을 생김새가 돛단배 모양이라 하여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배의 밑바닥을 파면 배가 파선되기 때문이란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되는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수북하기 쌓인 솔가리로 인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그런 오르막길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 내려가는 길. 이번에는 낙엽송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올랐다. 이 구간도 역시 그윽한 솔 내음이 코끝을 스쳐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솔향까지 더해진 탓인지 어느덧 마음까지도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 내려오는 도중에 ‘양심장독대’를 만났다. 항아리 안에 식수가 들어있으니 필요할 경우 한 사람이 한 개씩만 가져가란다. 양심껏 가져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물을 나누어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식수의 온도를 일정하게 해주는 배려까지 했다.
▼ 정상에서 출발한지 15분. 곡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마을 이름은 알 수 없었다)에 내려섰다. 반변천 물길이 빚어놓은 너른 들녘을 앞마당 삼고 있는 풍경이 마을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짐작케 해준다.
▼ 길가 산수유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매화나무와 함께 새봄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전령사(傳令使)이다. 참! 아까 금촌산길에서는 또 다른 봄의 전령사인 ‘생강나무꽃’을 만나기도 했다. 샛노란 꽃의 생김새가 비슷한 산수유와 흔히들 혼동하는 꽃이다.
▼ 마을에서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이어서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곡강교(曲江橋)’를 건넌다. 다리를 새로 놓고 있어 조금 어수선한 풍경이었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을 보고 무사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곡강교에서 도계리 입구까지의 300m쯤 되는 구간은 조금 묘하게 길을 냈다. 씽씽 신나게 달리는 차량들을 피하려고 도로의 가드레일 바깥에다 따로 보행로를 만든 것이다. 바닥을 야자매트로 까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길의 폭이 좁은데다 바닥도 고르지 않아 자칫 발이라도 헛디딜 경우 7~8미터 아래의 반변천으로 추락할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신 반변천변의 풍경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반변천과 장군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근처에 토사가 쌓이면서 천연의 갈대밭을 널따랗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인생으로 치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 금촌산길을 빠져나온 지 20분 만에 일월면 소재지인 ‘도계리(道溪里)’에 닿았다. 1600년 무렵 어느 농부가 둔덕 위에 농토를 일구어 살면서부터 ‘뒷두들’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좌우에 하천이 흐르고 이 하천을 따라 도로가 개설된 마을이라 하여 ‘도계동’이 되었단다. 현재는 면사무소와 지서, 초등학교, 우체국, 농협 등이 들어선 일월면의 행정 중심지다.
▼ 일월삼거리(이정표 : 지훈문학관 4.7㎞/ 영양전통시장 9㎞)에서 우회전해 일월면사무소 앞을 지나면 향교길 입구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영양향교(英陽鄕校, 경북 문화재자료 75호)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영양에 그런 향교가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9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는 아니었다. 동부리(영양읍)의 여기봉 아래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과 잦은 병란으로 사라지자 조선 숙종 때 이곳에다 새로 설치했단다. 현재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 서재, 신문(내삼문) 등이 남아있으며, 매년 춘추로 대성전에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이정표(지훈문학관 4.1㎞/ 영양전통시장 9.6㎞)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조동홍 가옥(趙東興 家屋, 경북 문화재자료 491호)’이 나온다. 한양 조씨 18세손인 조관빈(趙觀賓 1699-1756)이 1719년에 건립한 가옥인데, 1899년의 중건을 거친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조종호(趙宗鎬 1904-1987)가 1977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향교를 나선지 13분. 탐방로는 ‘이곡마을’에 이른다. 도계리 속한 자연부락으로 원래 이름은 ‘배골’. 마을 입구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하지만 그 배나무는 현재 찾아볼 수 없다.
▼ 배골마을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개울을 건너자마자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양쪽 방향 모두에 외씨버선길의 리본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양 연결구간(6-1)’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는 게 원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지훈문학관 방향을 고수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까짓 연결구간이야 다음 번 트레킹 때 고민하면 되지 않겠는가.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탐방로는 우릴 이곡교(梨谷橋)로 인도한다. 이곳 역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먼저 이정표(지훈문학관 3㎞/ 영양전통시장 10.7㎞)를 배경으로 사진부터 찍어두자. 6길의 완주를 인증하는 2개의 이정표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그런 다음에는 옆의 ‘외씨버선길 안내지도’도 한번쯤 살펴보자. 6길의 시점인 ‘영양전통시장’과 함께 적어놓은 ‘영양연결길’이 눈에 띌 것이다. 이곳이 ‘영양연결길’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도도 6길 및 7길과 함께 ‘영양연결길’을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그 위·아래에다 6길과 영양연결길의 지도를 따로 그려 넣었다.
▼ 탐방로는 다리(이곡교)를 건너지 않는다. 오른편 제방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군천(壯軍川)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8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수로(水路)에서는 안내판을 기웃거려본다. 행여 수로의 내력이라도 적어놓았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아까 보았던 ‘조동홍 가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참고로 장군천은 '주계천' 또는 '매화천'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영조 때 이 지역 출신인 오삼달 선생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난 뒤 장군으로 추대되면서 '장군천'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 이후부터는 판자를 깔아놓은 수로의 위를 걷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하천가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위험하다 싶은 곳도 나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그마저 부족했던지 어떤 곳에는 밧줄까지 매어놓았다. 노거수 아래 만들어놓은 쉼터도 보인다. 한마디로 정성들여 가꾼 산길이라 하겠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사방이 온통 갈대로 뒤덮여 있다. 둑은 물론이고 하천까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갈대로 가득하다. 늦가을 갈대가 꽃이라도 피운다면 또 하나의 멋진 풍경화가 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그 갈대밭 끄트머리에서 우린 트레킹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지훈문학관 700m/ 영양전통시장 13㎞)를 만났다. 근처에는 영양연결길 시점이 ‘이곡교’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6길 완주 후 영양연결길을 이어가려면 이곡교로 되돌아가란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데크로드로 올라선다. 개울 건너는 느티나무가 울창한 ‘시인의 숲’이다. 원래는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 불렀는데, 숲속에 조지훈과 20살에 요절한 그의 형 조동진의 시비(詩碑)가 세워지면서 ‘시인의 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과 함께 바람을 막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는 이 숲은 2008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 감천마을에서 북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실마을’은 조선 중종 14년(1519)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일파를 척살한 기묘사화를 피해 ‘한양 조씨(漢陽 趙氏)’ 일가가 정착한 마을이다.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답게 그의 생가(호은종택)와 문학관, 시비(詩碑)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는가 하면, 옥천종택과 월록서당, 만곡정사 등이 볕 좋은 산자락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 이곡교에서 3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시간 30분 만에 ‘주실마을’에 도착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월록서당(月麓書堂, 경북 유형문화제 172호)’.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을 지녔다. 일제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조지훈은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운 다음 이곳에서 한학과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월록서당은 주곡리 한양조씨와 도곡리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힘을 모아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그리고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단다.
▼ 두 번째 만남은 ‘조지훈 문학관(芝薰文學館)’이다. 조지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지어졌다. 현판은 지훈의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조지훈이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자세한 상황은 류혜숙 작가의 표현을 빌어본다. <책 읽던 소년은 9세 때부터 글을 썼고, 그의 형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지는 청록시절 '문장'지에 추천을 받았던 20대, 고문, 절필, 그리고 광복. 문학 소년은 문학청년으로 커져 있다. 곧이어 전쟁의 시편들, 산문과 학술연구들, 추상같은 비평과 선언들이 있다. 커다란 벽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그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그의 유품들도 남아 있다.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벽에 그 생의 조각들이 100여 장의 사진으로 걸려 있다.>
▼ 문학관의 앞 광장은 야외공연장으로 꾸며졌다. ‘문인의 고장 영양’이라는 문구가 적힌 벽면이 눈길을 끈다. 청록파 시인이자 수필가. 한국학연구가였던 조지훈의 약력과 함께 그의 대표시인 ‘승무(僧舞)’를 적어 넣었다. 광장에는 쉼터용의 정자 말고도 ‘지훈 뜨락’과 승무관 같은 정체 모를 건물들도 들어서 있었다.
▼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시 공원(詩 公園)’이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걷다가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지훈시공원’이라는 표지석을 만났다면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 정자의 뒤로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그 길섶에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영상(影像), 지옥기(地獄記), 종소리, 산방(山房) 등 조지훈이 지은 주옥같은 시들이다. 이곳에는 모두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시인의 동상도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 나무다리를 건너자 청동으로 제작된 임금님이 앉아있고 그 좌우에는 정일품(正一品)과 종구품(從九品)의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고뇌에 빠져있는 임금의 앞 청동판에는 봉황수(鳳凰愁)라는 조지훈의 산문시가 적혀있었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고전적 소재를 통해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조지훈의 동상 옆에도 시비들이 배치됐다. 하지만 이 시비들은 시에다 청동조각상까지 더했다. 파초우(芭蕉雨)와 낙화(洛花)라는 시가 한결 더 감칠맛 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 조지훈의 동상 앞에 섰으니 멋을 알고 술을 즐겼다는 그의 ‘음주론’도 한번 살펴보자. 애주가였던 그는 바둑의 급수체계와 비슷한 ‘주도유단론(酒道有段論)’을 써서 술꾼의 등급을 불주(不酒), 외주(畏酒), 민주(憫酒), 은주(隱酒), 상주(商酒), 색주(色酒), 수주(睡酒), 반주(飯酒), 학주(學酒), 애주(愛酒), 기주(嗜酒), 탐주(耽酒), 폭주(暴酒), 장주(長酒), 석주(惜酒), 낙주(樂酒), 관주(關酒), 폐주(廢酒, 涅槃酒) 등 18단계로 분류했다. 애주가들에게 음주의 이론적인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자칭 타칭 애주가들의 수준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에 속할 수 있을까? 에라 그게 무슨 소용인가. 어느 술친구가 주졸(酒卒)과 주사(酒士), 주걸(酒傑), 주장(酒將), 주선(酒仙), 주신(酒神) 등 6단계로 분류하면서 나는 주선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 이에 만족하면 되지 않겠는가.
▼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승무(僧舞)를 빼놓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의 시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박사(薄紗) 고깔에 감춘 여승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을 고이 접은 채로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북 기념물 78호)’은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산봉우리가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터를 잡은 명당이란다. 192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이 집의 중앙 가장 좋은 방에서 시인 조지훈이 태어났다고 한다. 본명은 동탁(東卓), 3남1녀 중 2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조승기와 지훈의 조부인 조인석 등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분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단다.
▼ 몸채는 앞면 7칸에 옆면이 7칸인 ‘ㅁ’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다.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구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입향조(入鄕祖)인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정형(廷珩)이 인조 때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때 일부가 불탔으나 1963년 복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 조지훈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본가는 생가의 뒤편에 있었다. 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 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단다. 대문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수필 '방우산장가(1953년 신천지 기고)'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라고 했다. 이곳과 서울 성북동 자택은 물론 자신이 기거했던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는 것이다.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 조성복(趙星復)이 지었다는 학파헌(鶴坡軒)도 만날 수 있었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하긴 정약용이 학파헌의 현판까지 써주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 ‘낙화(落花)’는 아예 액자 모양의 조형물로 만들어버렸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되는 이 시는 떨어지는 꽃을 보며 느끼는 삶의 비애감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한 조지훈의 대표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감성이 여린 나로서는 ‘승무’보다도 훨씬 더 곁에 두고자 했던 주옥같은 구절들이기도 하다. 하나 더. 이 시는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한 정치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졌다. 박지원 국정원장이 2003년 구속될 때 자신의 심경을 이 시를 인용해 표현했다.
▼ 개울 너머로 보이는 정자는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가 지었다는 ‘만곡정사(晩谷精舍, 경북 문화재자료 341호)’이다. 만곡정사의 현판 역시 78세의 노구로 이곳 주실마을을 찾아 왔던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 트레킹 날머리는 주실마을 주차장
마을을 둘러보는데 30분이나 걸렸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 고개를 돌려보니 주실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은 문필봉(文筆峰)을 바라보는 곳에 터를 잡았다. 풍수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실마을의 조씨 가문은 홍패(대과급제증서)가 4장, 백패(소과급제증서)도 9장에 불과한데도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겼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4명의 박사를 배출하는 등 문인·학자를 많이 배출했단다. 그건 그렇고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4㎞. 불편한 다리로 쩔뚝거리며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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