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4), 장계향디미방길

 

여행일 : ‘21. 2. 20(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진보면과 영양군 석보면·입암면 일원

여행코스 : 고현지→지경리재→두들마을→옥계1리→옥계지→임도삼거리→입암면사무소(소요시간 : 18.02km/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네 번째 길인 ‘장계향디미방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첫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장계향이 지은 현존 최고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녀가 시집와서 자녀를 키우며 살았던 ‘두들마을’이 코스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 또한 이 코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두들마을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작가 이문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고현지(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296-10)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동청송·영양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방면으로 달리면 잠시 후 ‘시량2리(송이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이자 시점인 ‘고현지’는 넓이가 1만평 정도 되는 저수지로 주민들에게 낚시터로 사랑받는 곳이다. 차량으로 5분 거리에는 ‘야송 미술관’과 ‘신촌 약수터’가 있다고 한다.

▼ 외씨버선길의 네 번째 코스인 ‘장계향디미방길’은 청송의 고현지에서 출발해 영양의 선바위관광지에 이르는 길이 18.3km의 둘레길이다. 청송군과 영양군의 경계인 지경마을과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 살았던 ‘두들마을’. 그리고 입암면 소재지인 신구리를 지나는데,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임도와 농로가 대부분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걸어야할 트레일의 길이가 다소 부담을 준다. 원래의 종점인 ‘선바위관광지’에서 한참이나 못 미친 입석면사무소에서 종료했는데도 핸드폰의 앱에는 18㎞나 찍혀 있었다.

▼ 4길(장계향디미방길)을 설명해놓은 ‘구간안내도’는 마을안길(송이길)과 국도(34호선)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두들마을과 광산문학연구소, 음식디미방,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도를 싣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층모전석탑은 아예 외씨버선길에서 벗어나 있고, 나머지 장소들도 하나같이 두들마을에 포함된 명소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만큼 볼거리가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 고현지 아래, 서시천(西施川)에 걸린 ‘시량교(時良橋)’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보는 고현지의 수로는 아직도 한겨울인 듯 빙벽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 청송의 상징이랄 수 있는 사과밭을 지나자 소하천인 ‘진시골천’이 나타난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이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인삼밭이 자주 눈에 띄는 구간이다. 전에는 고추나 콩을 많이 심었지만 요즘은 인삼밭이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란다.

▼ 10분쯤 들어가면 진시골 입구(이정표 : 선바위관광지 17.5㎞/ 고현지 0.8㎞). 탐방로는 이곳에서 임도로 들어선다. 오른편으로 갈려나가는 길은 시량2리에 속한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인 ‘진시골’로 연결된다. 이름만 듣고도 ‘진씨’ 일가가 개척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마을이다.

▼ 임도를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고원지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이곳도 역시 사과밭이 대부분인데, 탐방로는 저 멀리로 보이는 ‘지경리재’ 고갯마루를 향해 뻗어나간다.

▼ 멋들어지게 지어놓은 흙집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비록 꿈으로 끝나버렸지만 나도 한때는 저런 집에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을 꾸려나갈 수 있는 손재주가 없어서 그 꿈을 접게 되었지만 그때 홍천에 사둔 땅은 내 자식들을 위해 아직까지 남겨두고 있다.

▼ 둠벙 수준의 작은 연못을 지나자 이정표(선바위관광지 16.5㎞/ 고현지 1.8㎞) 하나가 세워져 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쯤 되는 지점. 그러니까 지경리재에 조금 못 미치는 곳인데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 포스트이기도 하다. 외씨버선길의 완주를 인증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이정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이정표의 바로 위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지경리재’에 올라선다. 청송군과 영양군이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데 쉬어가라는 듯 벤치를 놓아두었다. 이정표(선바위관광지 16.5㎞/ 고현지 1.8㎞)는 물론이고 외씨버선길 알림판과 함께 지경리재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그만큼 중요한 포스트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완주 인증지점’을 왜 이곳이 아닌 요 아래에다 설치했는지 모르겠다.

▼ 고갯마루를 넘은 탐방로는 이제 영양 땅으로 들어선다. 마을 이름은 ‘지경리’. ‘지경’이란 땅의 경계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영해부와 진보현의 경계가 되는 땅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골짜기가 마치 구유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싯골’. 주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아홉 계곡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합해져 냇물을 이룬다고 하여 구수곡(九水谷)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 소똥 냄새 고약한 축사 옆을 스치듯 지나자 ‘구싯골 삼거리’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 즉 ‘원지길 삼거리’가 길손을 맞는다. 이정표(선바위관광지 14.8㎞/ 고현지 3.5㎞)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한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원지길’을 따른다. 이곳 ‘원지삼거리’에서 시작해 석보면 소재지에 있는 옛 원리교까지 이어지는 시멘트길이다.

▼ ‘에너지 전환·탈 원전·신재생 에너지’.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화두들이다. 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풍력·조력·태양광 발전’도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키워드라 하겠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인 태양광발전소가 이 지역에는 유난히도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길가에 묘지를 이장하라는 현수막까지 걸려있는 걸 보면 태양광발전소 건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 영양 땅에 들어섰지만 길가 풍경은 청송이나 다름없었다. 고추밭이나 인삼밭은 물론이고 사과과수원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곳 영양도 역시 사과의 본고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사과나무들은 하나같이 앙상한 모습이다. 6월이 돼야 열매가 생기고 10월께 수확한단다.

▼ 고개 하나를 더 넘자 ‘원리’의 널따란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화매천(花梅川)의 물길이 만들어낸 알찬 농경지이다. 그 뒤로는 독경산, 맹동산 등 낙동정맥의 마룻금에 놓인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냇가에 터를 잡은 ‘두들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조선시대 때 광제원(廣濟院)이 있던 ‘두들마을’은 ‘원리’ 또는 ‘원두들’로 불리기도 한다. '언덕에 원(院)이 있는 마을'에서 기인된 지명이다.

▼ 밭갈이가 한창인 농경지를 지나자 ‘원리교’가 나온다. 맹동산에서 발원한 화매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포도산 서편 아래를 흘러온 이 물길은 화매리 부근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향하고 석보면소재지인 두들마을을 지나 영양읍 흥구리 앞에서 반변천에 유입된다. 참고로 '화매'라는 지명은 물이 흘러 주위의 황무지를 적셔 주니 그 땅에 여러 풀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 두두룩하게 언덕진 땅에 걸터앉았다는 ‘두들마을’. 화매천(花梅川)은 그 언덕을 감싸며 흘러간다. 화매를 직역하면 ‘매화나무 꽃’이 된다. 하지만 하천은 매화꽃을 닮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화나무가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다. 이름값을 못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빈자리를 웃자란 갈대들이 메꿔주고 있었다. 갈대가 꽃을 피우는 늦가을에라도 찾는다면 또 하나의 ‘빼어난 구경거리를 만날 수도 있겠다.

▼ 다리를 건넌 다음 911번 지방도를 따라 잠시 걷자 ‘두들마을’이 나온다.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라고 한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후손들이 더해져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집성촌이 되었다. 석계의 고고한 인품을 이어받아선지 이 마을에서는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조선시대 퇴계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근세에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일제강점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 등의 독립운동가와 항일 시인인 이병각, 이병철 등이 모두 두들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현대의 소설가 이문열도 석계의 13세손이란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마을에 들어서니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꼼꼼히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광록정(廣麓亭)’이다. 1690년대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 1631-1698)이 부친인 석계 이시명의 유지에 따라 지은 정자로 만년에 한가로이 학문을 연구하며 머물던 집이다. 조선시대에 이 부근에 행인이 묵을 수 있는 광제원(廣濟院)이 있었고, 처음 세울 때는 초당이었기에 ‘광록초당(廣麓草堂)’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광록정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면 ‘세심대(洗心臺)’다. 이 언덕에 서면 건너편의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꿀밤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런 풍경화의 아랫자락 그러니까 언덕의 아래에는 ‘낙기대(樂飢臺)’가 있고, 언덕 위로 살짝 보이는 빗돌은 ‘안동 장씨’, 그러니까 여중군자로 칭송받은 장계향의 ‘유적비(遺蹟碑)’이다.

▼ ‘세심대(洗心臺)’라는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의 시가 적힌 빗돌(탐방로 아래에는 ‘세심대’라 적힌 바위도 있었다)이 세워진 언덕을 내려오자 ‘백천한옥’이 나온다. ‘백천’이란 택호를 가진 부부가 살았던 모양인데, 두들마을의 고택 족보에는 들어있지 않으나 옛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한옥이다. 예전에 제법 살았던 집인 모양인데 현재는 민박으로 성업 중이란다.

▼ 백천한옥을 지나자마자 ‘낙기대(樂飢臺)’가 얼굴을 내민다. 인지천(仁志川) 가의 있는 바위벼랑으로 석계 이시명이 이름을 짓고, 그의 아들 항재 이숭일이 쓰고 새겼다. 무릇 선비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덕목으로 삼고 궁불실의(窮不失義)를 근본으로 실천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의 왼편 언덕위에는 세심대(洗心臺)가 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향하고픈 마음을 냇물로 씻어내기 위해 대자연을 감상하며 앉았던 바위란다.

▼ 두들마을의 볼거리들은 너나없이 아래처럼 안내판들을 갖고 있었다. 이곳 낙기대와 건너편의 세심대는 30여 리 전방의 촌락과 산야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밖에도 동대(東臺,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와 서대(西臺, 광록정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바위벽에 적혀있었다)가 더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하나같이 석계가 이름을 짓고 그의 아들 항재가 글을 쓰고 새겼다고 한다.

▼ 위와 같은 안내판만 있는 게 아니다. ‘음식디미방’이나 이문열·이병각 같이 약력 등 알릴 내용이 많을 때는 아예 벽보판(壁報板)처럼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 언덕 위에는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貞夫人安東張氏遺蹟碑)’가 세어져 있었다. 입향조(入鄕祖)인 이시명의 부인 ‘안동 장씨’, 즉 장계향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석계 부부는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들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고 전한다. 때문에 두들마을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고 수령 370년이 넘는 고목도 50여 그루나 된단다.

▼ 마을에는 ‘장계향 예절관’이 지어져 있었다. 한복 바르게 입기와 어른에게 절하는 법, 밥상머리 교육 등 장계향이 자녀들을 키우면서 했던 예절교육을 실제로 따라 해보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여중군자로 칭송받는 ‘장계향’은 여성이지만 소학과 사서오경, 십구사략(十九史略) 등의 학문을 두루 익혀 깊이가 있고 현명한 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성리학을 배움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여 구휼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자녀교육 또한 우리가 배워야할 그녀의 업적이다. 10명의 자녀들을 모두 훌륭하게 잘 키워냈는데, 특히 셋째 아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남인의 이론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갈암이 이조판서를 지냄에 따라 그의 어머니인 장계향에게도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 이문열이 세웠다는 ‘광산문학연구소’도 들어서 있었다. 문학강연과 문학토론회 등이 개최되며 작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문열은 2001년 두들마을에 자신의 집이자 사랑방인 '광산문학연구소'를 짓고 '광산문우(匡山文宇)'라 현판을 달았다. 경내에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으니 꽤 큰 규모라 하겠다. 하지만 2018년에 '광산문우'의 현판은 내려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녹동고가 광고신택(鹿洞古家 廣皐新宅)'이라는 새 현판이 걸렸다고 한다. 아무튼 이곳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직접적인 배경 장소이며,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문열의 현재 거처는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負岳文院)'이라고 한다.

▼ 광산문학연구소 옆에는 '두들책사랑'이라는 이름의 북카페가 있다. 두들마을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문학작품 전시실과 멀티미디어 자료실, 다양한 책이 비치된 휴게실로 꾸며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두들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문학인은 이문열 외에도 여중군자라 불리는 장계향이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인데, '음식을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의 이 책에는 그녀가 후손을 위해 남긴 146가지의 조리법이 담겨 있다.

▼ 경상북도 민속자료 91호인 ‘석계고택(石溪古宅)’은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1640년(인조 18)에 지은 유서 깊은 집이다. 그는 일찍이 생원에 올랐으나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머물며 일생을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고 한다. 그와 부인인 ‘안동 장씨(장계향)’가 살던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를 이자형으로 배치한 다음 토담으로 막아 허실감을 메운 뜰집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도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석천서당(石川書堂)’과 작가 이문열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석간고택(石澗古宅), 항일시인 이병각이 태어난 유우당(惟宇堂)을 포함해 전통가옥 30여 채가 들어서 있다.

▼ 항일 시인으로 알려진 이 마을 출신 이병각(李秉珏, 1910-1941) 시인의 ‘가을밤’을 새긴 시비(詩碑)도 눈에 띈다. 이병각은 1924년 서울의 중동학교 입학했으나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했는가 하면, 일본유학 중에는 검거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청년운동과 민중운동을 하는 한편, 1935년 이후부터 잡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후두결핵으로 죽어 작품 활동의 기간은 몇 년이 되지 않는다.

▼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포토죤 하나쯤 없겠는가. 마을 한가운데에 널따란 광장을 만들고 여러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을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 이젠 건너편으로 가볼 차례이다. 이정표는 그쪽에 ‘음식디미방 체험관’이 있음을 알려준다. 참! 아까 마을입구에서 만났던 안내도에는 주곡고택(做谷古宅)과 여중군자 장계향의 영정을 모신 ‘존안각(尊安閣)’도 그쪽에 있다고 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층의 누각을 비켜 오르니 ‘음식디미방 체험관’이 나온다. 코로나로 인해 운영을 중단하고 있으나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남긴 조리법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음식디미방’은 이 마을에 살던 대학자 석계 이시명의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安東 張氏)’가 반가의 음식을 정리해 펴낸 최초의 한글 ‘조리서’라고 한다. 자손들을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집필했다는 이 책은 조선 중후기 양반가의 식생활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전통음식 연구의 지침서이자 관계전문가들의 교본으로 알려진다. 또한 정확하고 다양한 어법과 철자로 되어있어 사전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단다. 참고로 그녀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마을에는 ‘두들’이라는 식당 겸 휴게소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현대식 건물이라서 어쩐지 어색하다. 그 옆에 있는 보건소지소도 역시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 분위기에 맞게 한옥으로 지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바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 35분쯤 마을을 둘러보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석보 119지역대’를 지나면 탐방로는 ‘옥계마을(玉溪里)’로 들어선다. ‘송하천변(松河川邊)의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 곳에 들어앉은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원래 ‘북계(北溪)’였다고 한다. 석보면의 북쪽 개울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 ‘옥계’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마을앞 개울인 ‘송하천’의 물이 옥처럼 맑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게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옥계교(玉溪橋)를 건넌 탐방로는 ‘920번 지방도’를 따른다. 비록 잠깐이지만 이 구간에서도 볼거리는 있다. 이곳 영양의 특산물인 ‘고추’를 형상화한 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 잠시 후 ‘옥계마을’에 이른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작은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참고로 옛날 이곳 옥계마을에는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진성현(眞城縣)에서 영양현과 영해부로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마(人馬)나 마차(馬車)가 머무르는 여관이 있었을 정도로 마을의 규모 컸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작은 산골마을에 불과하고, 역사의 흔적은 역두들·역마·역마을(驛村)이란 지명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 탐방로를 따라 걷다가 가슴 아픈 풍경을 만났다. 농군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을 배추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얼었다 풀리기를 반복하며 주저앉아가는 저 배추를 바라보는 농군은 또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싶다.

▼ 길가에 오미자로 여겨지는 경작지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오늘 내가 챙겨온 물도 오미자 엑기스를 희석시켜 왔기 때문이다. 단맛·짠맛·쓴맛·신맛·매운맛의 다섯 가지의 맛을 고루 갖추고 있지만 신맛이 가장 강한 탓에 이를 마시면 갈증이 제거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음료수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에 복용하면 더위와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시켜 준다니 트레킹 마니아에게 최적화되었다 할 수 있겠다.

▼ 이번에는 포도밭이다. 당도를 높이려는 듯 과목을 비닐하우스로 씌워놓은 것이 전문가 수준의 농사꾼 작품이다. 거기다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넓기까지 하니 와이너리(winery)만 더한다면 외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될 수도 있겠다. 그래야 나 같은 애주가들이 한번쯤 더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 포도밭을 지나자마자 ‘옥계지’이다. ‘너브랑골’의 상류에 제방을 쌓아 만든 저수지인데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준비해간 간식을 먹기에 딱 좋은 둑을 갖고 있었다. 참!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하나 있다. 저수지 곁에 세워놓은 이정표(선바위관광지 8.8㎞/ 고현지 9.5㎞)가 완주 인증사진 촬영지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두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 탐방로는 저수지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개울가를 따른다. 임도가 잘 나있기 때문에 걷는 데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 저수지에서 300m쯤 더 가면 만나게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솔길로 변한 탐방로가 이곳에서 임도와 헤어지기 때문이다. 코너에 이정표(선바위관광지 8.5㎞/ 고현지 9.8㎞)가 세워져 있으나 갑자기 방향을 틀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쳐버릴 우려가 있어 거론해 보았다.

▼ 오솔길로 변한 탐방로는 이제 숲이 울창한 계곡의 안으로 파고든다. 쓰러진 거목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원시의 숲이다. 이 구간은 또 서너 번에 걸쳐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장마철에는 통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얘기이다.

▼ 그렇게 15분 남짓 걸었을까 산길이 갑자기 위로 향한다. 그것도 통나무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지막 어림에서는 ‘갈 지(之)’ 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일 수 있었을 정도이다.

▼ 숨이 턱이 차오를 즈음에야 임도에 올라섰다. 석보면과 입암면 사이에 있는 산자락들을 헤집으며 내놓은 15.5㎞ 길이의 임도이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입암면의 신구리와 노달리, 양항리로 연결되는 임도이다. 반면에 오른편은 옥계2리로 내려가는 길이니 참조한다.

▼ 양항리 방향으로 들어섰다싶으면 곧이어 ‘임도삼거리’가 나온다. 병원이 흔하지 않던 시절, 옥계마을 등 입암면 사람들이 여름에 땀띠가 나거나 몸이 아플 때 체질개선에 도움을 주는 양항약수를 먹기 위해 넘나들었다는 고갯마루이다. 이정표(선바위관광지 7.1㎞/ 고현지 11.2㎞)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고개를 넘으면 약수로 유명한 양항마을이 나온다.

▼ 탐방로를 겸하는 신구리 방향의 임도는 고갯마루를 넘지 않고 왼편으로 향한다. 길이가 5㎞쯤 되는 이 임도는 까마득한 벼랑을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8~9부쯤 되는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구간의 최대 단점은 너무 지루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앉아서 쉴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트레킹 마니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간이라 하겠다.

▼ 임도는 삼거리를 하나 더 지난다. 노달리로 내려가는 임도인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방향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이지만 거르지 않고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임도를 따라 1시간쯤 더 걷자 입암면의 너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월산 동쪽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S’자 형태로 굽이치는 경치 빼어난 곳이다.

▼ 산비탈에 놓아둔 벌통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민을 떠났는지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할 벌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생방송에선가 빈 벌통을 이용해 떠돌이 벌떼를 유인한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 임도를 내려서면 입암면의 소재지인 ‘신구리(新邱里)’이다. 중종반정 이후 김해김씨 김세보(金世輔)가 마을을 열었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김세보의 자는 고우(故佑), 호는 부용재로 세조 14년인 1468년에 태어났다. 성종 15년인 1484년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청요직을 거쳐 벼슬이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재직 중 연산군에게 여러 번 간언하였던 그는 결국 벼슬을 버리고 영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일월산에 숨어 살며 농사짓고 소치고 나무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그가 높은 벼슬을 한 선비임을 몰랐을 만큼 철저한 은거였다. 때문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유배되는 동안에도 그는 화를 면했단다.

▼ 마을에 내려서자 150년이나 묵었다는 회화나무가 반긴다. 아니 회화나무에 매달려있는 외씨버선 모양의 이정표가 더 눈길을 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기암정(沂巖亭)’이다. 조선 영조(순조 때라는 설도 있다) 때 사람인 기암(沂巖) 김종환(金鍾煥)이 지은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초가집 형태였으나 고종 26년(1889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종환은 일찍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어진 스승과 벗을 찾아 세상을 주유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한가롭게 살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후배들에게는 배움을 권장했단다.

▼ 날머리는 입암면사무소(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481-3)

지역주민들의 숨결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입암면사무소. 오늘의 여정이 마무리 되는 곳이다. 너무 긴 3길(18.3㎞)과 반면에 너무 짧은 4길(11.5㎞)을 알맞게 조정하기 위해 이곳에서 트레킹을 마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 못다 한 거리는 다음에 추가하겠다는 얘기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8.02㎞,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면사무소로 가다가 멋진 가로등은 만났다. 이곳 영양을 한마디로 압축시킬 수 있는 ‘반딧불이’와 ‘고추’를 모티브로 삼은 발상이 참 신선해 보인다. 그런 그렇고 이곳 신구리에서는 본인의 여정을 생각해 선택구간인 ‘산해리 오층 모전석탑’을 다녀올 수 있다. 국보 187호로 지정된 탑으로 영양이 가진 최고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지만 다녀오는데 왕복 1시간이 소요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외씨버선길(3), 김주영 객주길

 

여행일 : ‘21. 2. 6(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파천면과 진보면 일원

여행코스 : 신기리 느티나무→감곡저수지→수정사→마묻골저수지→너븐삼거리→동천지→각산저수지→월전리→고현지(소요시간 : 15.6km, 실제는 17.31km/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오늘은 그 세 번째 구간인 ‘김주영 객주길’을 걷는다. 대하소설 ‘객주’를 지은 김주영이 이곳 진보면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그의 이름과 대표작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러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섯 개나 되는 저수지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얘깃거리까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길은 객주의 주인공인 수많은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넘나들었을 터. 그들이 남겼을 수많은 애환을 상상해보며 걷는 다면 오래오래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

 

▼ 들머리는 신기리 느티나무(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659)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다 ‘신기1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신기옹정길’을 따르면 잠시 후 들머리인 신기리에 이르게 된다. 시점은 1660년경 ‘인동 장씨’의 입향 시조가 심었다는 느티나무이다. 360년을 묵었다는 얘기이니 느티나무 치고는 젊은 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제192호)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나무가 품은 내력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시조가 심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되어 정월 대보름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동네 제사를 지내왔다니 말이다. 나무의 아래와 윗가지에서 동시에 잎이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다.

▼ 외씨버선길의 세 번째 구간인 ‘김주영 객주길’은 파천면 신기리(느티나무)에서 시작해 진보면 고현리(고현지)에서 끝난다. 구간 전체가 산길과 임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특징이랄 수 있는데, 중간에 감곡저수지와 수정사, 마묻골저수지, 너븐삼거리, 동천지. 각산저수지 등의 주요 포스트를 지나게 된다. 하지만 ‘김주영 객주길’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객주문학관’과 ‘진보장터’는 다리품을 한참이나 더 팔아야만 만나볼 수 있다. 도상 거리는 15.6㎞. 그러나 실제거리는 17㎞를 훌쩍 넘겨버린다.

▼ 구간 안내도는 느티나무 옆에 세워져 있다. ‘2길’인 ‘슬로시티길(소헌공원→신기리 느티나무, 10.5㎞)’과 ‘3길’인 ‘김주영 객주길(신기리느티나무→고현지, 16.6㎞)’의 지도를 그려 넣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주산지와 유사한 풍경을 연출하는 감곡저수지를 비롯한 뛰어난 풍광에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더해지는 길이란다. 그 오른편에는 신기리의 느티나무와 함께 수정사와 객주문학관 그리고 고현지의 사진을 게시했다. 구간을 대표적할 수 있는 볼거리란 얘기일 것이다.

▼ 길을 나서려는데 시작부터 난감한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길이 둘이나 되는 것이다. 요즘 트레커들이야 너나없이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둘 가운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사과나무 밭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신기천(新基川)’ 건너에서 ‘감곡 전통마을 숲’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선조들이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으로 마을의 서쪽 입구를 가리는 비보림(裨補林)이자 외부의 불길한 경관적 요소를 차단하여 강한 기운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염승림(厭勝林)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주민들은 아직도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제(堂祭)를 지내오고 있단다.

▼ 700평 조금 못되는 공간에는 느티나무와 시무나무, 이팝나무, 소나무 등 19종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단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호수’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소나무라 하겠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게 나이도 260년이나 묵었단다.

▼ 숲에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목화송이를 단 패랭이에다 등짐, 거기다 지팡이까지 짚었으니 틀림없는 ‘보부상(褓負商)’이다. 오늘 걷게 되는 ‘김주영 객주길’이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더니 이를 형상화 했나 보다.

▼ 탐방로는 이제 ‘신기천(新基川)’가의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외씨버선길의 안내판이 세워진 ‘감곡마을(신기2리)’ 앞을 지난다. 옛날 이곳에 절(가람)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오래 전부터 제지마을로 알려져 온 곳이기도 하다. 참닥나무가 많고 물이 맑아서 신라시대부터 한지 생산을 생업으로 해왔다는 것이다. 한지 수요의 급감으로 인해 지금은 비록 옛날 이야기로만 남았으나 말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감곡마을까지는 20분이 걸렸다.

▼ 도로를 따르던 탐방로는 ‘감곡저수지’ 아래서 숲속으로 파고든다. 감곡마을에서 20분 거리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저수지의 둑으로 빠져나온다. 이 저수지는 ‘리틀 주산지’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주산지(注山池)의 명성에 눌려 입소문을 타지는 않았지만 주산지의 상징이랄 수 있는 왕버들 수십 그루가 이곳에서도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왕버들은 매년 10~20cm씩 자라나며 주로 습지나 냇가에서 자라고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살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하지만 주산지의 풍경은 만나볼 수 없었다. 갈수기(渴水期)이어선지 버드나무 군락지가 온통 뭍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못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버들피리를 불며 지친 다리를 잠시 풀고 있었을 보부상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아쉬움을 달래볼 따름이다.

▼ 저수지를 벗어난 탐방로는 산자락(이정표 : 고현지 13㎞/ 신기리 느티나무 2.6㎞)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자 탐방로는 콧노래라도 부르며 걷기에 딱 좋은 산길로 변한다. 솔가리 수북한 황톳길이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한데다, 한껏 들이키는 숨결에는 솔향까지 가득하니 어찌 콧노래 한가락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이 끝나자 낮은 야산에 아주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깎아낸 것처럼 반반한 경작지가 흡사 고원(高原)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새참이라도 먹으려는지 가장자리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 이곳에서 ‘양심 장독대’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다. 항아리에 생수병을 가득 넣어놓고 목마른 탐방객들이 한 병씩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그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것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생수를 챙기는 게 일상이 된 우리 부부에게는 불필요했지만, 외씨버선길 운영진들에게 글을 빌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길옆으로 시야가 넓게 트이니 가슴도 열린다. 그나저나 이 일대는 고랭지채소밭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름에라도 올라치면 강릉 안반데기의 배추밭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 감곡저수지를 출발한지 30분. 작은 개울을 지나자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고현지 12.5㎞/ 신기리 느티나무 4.1㎞)와 함께 세워놓은 ‘황성옛터’에 대한 안내판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황성옛터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가요의 작사자인 왕평(이응호)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단다.

▼ 삼거리에는 수정사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었다. 문에 걸린 편액(扁額)의 ‘남각산 수정사(南角山 水淨寺)’라는 문구는 남각산에 위치한 수정사라는 뜻일 것이다. 절간 사람들은 배후산인 비봉산을 ‘남각산’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탐방로는 일주문 앞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나옹선사가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절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득한 숲길을 잠시 걷자 개울가에 자리 잡은 수정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보장왕(1352~1374) 때 나옹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수정사’란 이름은 계곡물이 수정처럼 맑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각은 대웅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73호)과 산신각, 요사가 전부다. 화려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전성기 때는 파천면과 인근 진보면 일대의 많은 토지를 소유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단다.

▼ 절집 입구에는 또 다른 ‘황성옛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황성옛터는 청송 출신의 ‘왕평(이응호)’이 작사하여 1928년에 발표된 노래로,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금지곡 지정에도 크게 히트하였고 이후에도 고복수·남인수 등이 다시 부르기도 했다. 악극단 활동을 하던 이응호가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무대에서 쓰러져 숨지자 그의 아버지가 스님으로 있던 이곳 수정사 입구의 산기슭에 안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탐방로는 비봉산 자락을 향해 급경사를 오른다. 이정표(비봉산 정상 2.3㎞)는 이곳이 비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외씨버선길이 등산로의 일부를 빌려 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비봉산(飛鳳山)’이란 지명은 산세가 봉황이 나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능선(이정표 : 비봉산 정상 2.0㎞/ 수정사 0.3㎞)에 오른 등산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탐방로는 고개를 넘어버린다. 그리고 임도를 건넌 다음 작은 계곡으로 내려선다. 이 길은 국도가 없던 시절 진보로 가는 유일한 우마차 길이었다고 한다. ‘객주길’. 이름 그대로 옛날 보부상들이 청송읍에서 진보장으로 넘어가던 길이다. 지금은 비록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따라 다니지만 옛날에는 이 길을 통해 물산과 사람이 오갔다고 한다. 때문에 비봉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이 길은 한 많고 사연 많은 길이기도 했다. 그런 길이 청송이 낳은 김주영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가의 고향이 오롯이 대하소설 ‘객주’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계곡에는 ‘마묻골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었다. 저수지의 이름은 ‘마묻골’이란 지명에서 따왔다. 옛날 어느 장수가 타고 가던 말이 다쳐 쓰러지자 이 계곡에 묻고 갔다고 해서 ‘마묻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이 길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적들이 황급히 달아나던 통로이기도 하고 피란민들의 고생길이기도 했다. 또한 진보로 가는 주요 통행로로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되면서 잊혀져오다가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외씨버선길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곡을 따른다. 계곡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물이 귀해서인지는 몰라도 물기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건천(乾川)이다. 그래선지 길은 계곡과 하나가 된 곳이 많다. 굴곡이 깊은 곳에는 다리를 놓기도 했으니 폭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게 뻔하다. 길은 또 산골짜기 깊숙이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그리고는 이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계곡이 끝나고 이어서 고개 하나를 더 넘자 ‘너븐 삼거리’이다. 수정사에서 30분쯤 되는 지점인데 널찍한 삼거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 이곳의 명칭은 삼거리이나 사실은 사거리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객주문학관 연결로 및 비봉산 등산로가 양쪽으로 나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고현지 10.9㎞) 외에도 김주영 작가의 ‘객주’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선택구간인 ‘객주 문학관’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지난 2014년에 문을 연 문학관에는 김주영 작가의 육필 원고와 개인 수집품, 그리고 조선 후기 보부상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1.7㎞라는 거리가 만만치만은 않다. 1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니 일정을 고려해서 다녀와야만 한다.

▼ 안내판은 김주영 작가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1939년 이곳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지독스럽게 가난한 시골에서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부딪혔다고 한다. 하룻밤을 자고나면 그날의 잠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떠돌이가 되었단다. 그리고 유년시절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면서도 강인한 삶을 대하소설 ‘객주’에다 풀어 놓았다는 내용이다.

▼ 이곳은 비봉산(飛鳳山, 671m)을 올라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외씨버선길과는 다른 이정표(비봉산 정상 2.2㎞/ 샘터 0.8㎞, 메산 정상 0.7㎞)와 함께 비봉산의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지도는 수정사 앞을 출발해 비봉산의 정상을 정복한 다음 이곳으로 내려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니 이따가 들르게 될 월전리로도 연결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외씨버선길을 잠시 내려놓고 비봉산 등산을 즐길 수도 있겠다는 얘기이다.

▼ 이후로는 소나무 숲길을 따른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예뻤다. 커다란 소나무가 보드라운 흙길 양 옆으로 늘어서 적당한 그늘을 내줬고 나무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청송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청송은 전체 면적의 82%가 임야인데 그중에서도 소나무가 가장 많다니 말이다. 청송(靑松)이라는 지명에 ‘소나무 송(松)’ 자까지 붙였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참! 가는 도중 ‘옹기도막’이라고 적힌 소나무(이정표 : 고현지 9.6㎞)도 눈에 띄었다. 무형문화재인 옹기장 이무남 선생이 이 근처에서 옹기를 빚어 구워내고 있다더니 이를 이르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진안리(진보면)는 옹기용 점토가 풍부하고 질이 좋아 예부터 옹기굴이 많았다고 한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매산’의 정상이다. 진보면 소재지의 정면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봉우리인데 꼭대기에다 각종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벤치까지 놓아 주민들의 쉼터로 꾸며놓았다. 주민들의 놀이터답게 빈 가지 사이로 진보시가지가 내다보인다. 진보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오지다. 그 옛날 바깥세상을 이어준 것은 하루에 한 번 다니던 버스(진보~안동)가 전부였다고 한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엔 그마저도 없었단다. 그러니 5일마다 서던 장날은 명절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각지에서 온 장사꾼들은 시장 구석구석에 가져온 물건들을 진열했을 테고, 해가 중천에 올 즈음이면 새벽녘 안개를 뚫고 집을 나선 산골 사람들까지 합쳐서 장터는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이다. 김주영은 자신이 어린 시절 보고 느꼈던 진보 오일장의 풍경을 토대로 조선 후기 보부상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소설 ‘객주’를 썼다고 한다.

▼ 반대편으로 놓인 계단을 내려서는데 건강을 다지려는 듯 주민 둘이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게 보인다. 옛날에는 생계의 수단으로 땔나무를 해다 팔기 위해 힘들게 오르내렸던 길을 말이다.

▼ 탐방로는 잠시 후 낙엽송 숲으로 들어선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진보면 소재지가 내다보인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에서 청송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환승지로 이용하는 고을이다. 영양과 영덕으로 가는 버스가 진보를 거치기 때문에 차편이 곱절 많기 때문이다.

▼ 길은 매산에서 동천동으로 내려간다. 산길이라기보다는 오솔길에 가까운데 도중에 두 곳에서 갈림길(이정표 1 : 비봉산 정상→/ 매산 정상↓, 이정표 2 : 동천지↑ 0.5㎞/ 지장사← 0.27㎞/ 쉼터→ 0.14㎞/ 매산 정상↓ 0.26㎞)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시야가 한꺼번에 열리면서 ‘동천지’에 내려선다.

▼ ‘동천지’는 자그만 저수지이다. 하지만 아까 감곡저수지에서 아쉬워했던 그 풍경을 이곳에서 만났다. ‘주산지(注山池)’의 상징인 ‘왕버들’로 여겨지는 나무들이 건너편 둑 아래서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녹음 짙은 여름철이나 단풍철에라도 찾아온다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 동천지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산속으로 파고든다. 계단을 놓지 않고는 길을 내지 못할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다. 그마저도 직선으로 놓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위로 향한다.

▼ 길고 긴 계단을 따라 능선에 오르면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잣나무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나무지만 잣의 집산지인 경기도가 아닌 경상도 지방에서 만나니 색다른 느낌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임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고현지로 8.9㎞/ 신기리 느티나무 7.7㎞)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도에는 이곳의 지명을 ‘비봉산 갈림길’로 표기하고 있었다. 맞은편으로 난 산길이 비봉산 정상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비봉산 줄기를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는 것 또한 ‘김주영 객주길’의 특징이다. 개중에 경사가 무척 심한 구간도 있다. 그러니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봇짐이며 머릿짐을 지고 산을 넘었을 보부상들을 생각하며 걷는다면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 숲을 빠져나오자 대만 고스라니 남은 고추밭이 나타난다. ‘김주영 객주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마을 풍경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야산을 개간해 사과나 고추, 인삼을 기르고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담배 농사가 흥했다는데 기후가 바뀐 탓에 요즘은 인삼밭이 더 많다고 한다.

▼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던 길이니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짐 보따리를 이고 진 보부상들이 뻔질나게 다니던 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김새로 보아 그들이 쌓아올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간절한 염원을 품은 돌멩이들이 하나하나 쌓였으니 이만하면 신앙의 대상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 걷는 도중 야생동물 포획 틀도 만날 수 있었다. 멧돼지나 고라니 등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보통이 아니라던 기사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 동천지를 지난 지 38분 만에 ‘각산저수지’를 만났다. 감곡이나 마묻골, 동천지 등에 비하면 규모가 큰 편이나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저수지일 따름이다. 아니 수면 위에서 놀고 있던 철새 때가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각산리(角山里)’ 풍경이다. 마을 지형이 동쪽은 탕건봉(岩巾峰)으로 각형(角形)을 이루고, 남쪽은 비봉산(飛鳳山), 북쪽은 북방산(北方山)으로 싸여 있는 산세의 형곡과 탕건봉(탄근봉이라고도 함)의 특별한 형세의 모양을 따서 각산(角山)이라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각산리로 내려가던 탐방로가 아스팔트도로를 만나는가 싶더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문득 허기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한참이나 지났다. 하지만 요기를 할 만한 식당이나 편의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3시간을 걸어오는 동안 그런 편의시설을 일절 만나지 못했다. 맞다. ‘김주영 객주길’은 작은 마을길이나 산길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식당이 없으므로 출발하기 전에 이에 대한 준비가 필수이다. 그 옛날 보부상들이 봇짐 속에 먹거리를 챙겨 넣고 출발했듯이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보부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걸으면 조금 더 재미있는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농경지가 사방으로 널린 고원지대를 지난다. 고춧대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널따란 밭이 나오는가 하면, 검은 천을 겹겹이 두른 인삼밭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하나 같이 소박한 인생과 맞닿은 풍경이다. 때문에 이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100여 년 전에는 전국을 떠돌던 장돌뱅이의 한 많은 삶이, 그리고 지금은 야산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각산저수지를 지나면서부터는 심심찮게 수로(水路)를 만날 수 있었다. 도로가를 따라 물길을 내놓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머리 위를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길가에서 ‘한전진보변전소’가 나타났고, 또 스치듯 지나갔다. 참! 펑퍼짐한 길의 여유로움 탓인지 문득 ‘객주’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자 새벽녘 나귀 세 마리를 끌고 길을 헤쳐 나가는 ‘천봉삼’ 일행이 또렷이 그려진다. 그리고 어설픈 짚신을 신은 보부상들이 숨을 할딱대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 각산저수지를 지난 지 30분쯤 되자 국도 34호선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탐방로는 ‘월전리(月田里)’로 들어선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마을이다. 만월(滿月)이 되면 곧 반월(半月)로 기울어지므로, 이곳에 마을이 들어설 경우 마을이 쇠퇴한다는 이야기에 따라 마을 가운데를 농경지로 이용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이다. 치안센터와 교회, 주유소가 들어서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고을이기도 하다.

▼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두 그루의 ‘비술나무’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가 굵기(지름 144㎝/ 둘레 452㎝)까지 해서 그저 어마어마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나이도 네 갑자나 넘겼단다. 보호수로까지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느릅나무과’인 비술나무는 함경북도 방언이라고 한다. 개느릅이나 떡느릅나무로도 불리는데, 한자로는 야유(野楡), 즉 야생 느릅나무란다. ‘참느릅’과 구별되는 느릅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가지와 잎, 꽃, 속껍질은 약재에 쓰고 어린잎은 없이 살던 시절 국으로 끓여먹기도 했단다. 거기다 목재를 건축재나 가구재, 선재 등으로 사용했다니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나무라 하겠다.

▼ 월전리를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구릉(丘陵)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펑퍼짐한 능선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포장길을 따른다. 이때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요 아래에 있는 ‘시릿골’ 마을의 당목(堂木)이 마을 뒤 언덕에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둘러쳐져 있다는 흙벽돌 담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동제(洞祭)까지 지낸다는 그 소나무는 확실히 아니다. 다만 하도 잘 생겨서 당목으로까지 거론해 봤다.

▼ 아래 사진의 고개를 넘기 직전. 왼편으로 길 하나가 갈려나갔다. ‘시릿골’ 마을로 연결되는 길인데 다음이나 네이버에 올라온 ‘외씨버선길’ 지도는 모두 이 길로 들어서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눈에 익은 이정표가 보이지 않으니 섣불리 들어설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를 무시하고 곧장 직진했던 이유이다.

▼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의 결정은 옳았다. 300m쯤 더 나아간 곳에서 눈에 익은 이정표(고현지← 2.2㎞/ 신기동 느티나무↓ 13.4㎞)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길이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는 지시를 하고 있었다.

▼ 덕분에 우린 예정에 없던 저수지 하나를 더 만났다. 둑에 세워놓은 ‘물놀이 금지’ 경고판에 이름도 적어놓지 않았을 정도로 자그마한 저수지이나 네이버 지도에는 ‘시릿골지’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또 저수지?’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고현지까지 합칠 경우 모두 여섯 개나 되는 저수지를 만났으니 말이다. 이곳 진보면이 깊은 산골인데도 불구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경작지가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저수지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시릿골’ 마을이 나타난다. 시량리(時良里)의 자연마을(이밖에도 샘재·송이골·진시골·엄거너미 등이 있다)이다. 참고로 ‘시량’이란 지명은 과거 시랑(侍郞) 벼슬을 했던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마을의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랑이란 벼슬이 신라 및 고려(전기)에 있었던 관직이었으니 말이다.

▼ 탐방로는 마을 안길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자마자 마을을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조금 전 우리가 내려왔던 곳이 아닌 또 다른 구릉 위로 올라가더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있는 ‘고현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해준다.

▼ 고현지로 내려가는 길은 ‘청송 사과’의 참맛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사과나무들이 그동안 보아왔던 과목(果木)들보다 엄청나게 굵어진 것이다. 맛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청송사과의 산 증인이 아닐까 싶다.

▼ 날머리는 고현지(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296-10)

사과밭 사이로 내려서니 시량리의 또 다른 자연마을인 송이골에 이른다. 이어서 마을 안길을 통과하자 고현지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외씨버선길의 구간 안내도는 마을안길(송이길)과 국도(34호선)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함께 걸은 일행의 앱에 찍힌 거리는 17.31km. 구간 대부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외씨버선길의 세 번째 길인 ‘김주영 객주길’이 종료되는 ‘고현지’는 넓이가 1만평 정도 되는 저수지로 주민들에게 낚시터로 사랑받는 곳이다. 차량으로 5분 거리에는 ‘야송 미술관’과 ‘신촌 약수터’가 있다고 한다.(아래 사진은 함께 걸었던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다 썼다)

 

외씨버선길 1코스

 

여행일 : ‘20. 11. 7(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과 청송읍 일원

여행코스 : 장난끼공화국→월외탐방지원센터→달기폭포→너구마을→금은광이삼거리→용연폭포→주방계곡→대전사→상의탐방지원센터(소요시간 : 15.8㎞/ 3시간4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길의 첫 번째 코스인 ‘주왕산.달기약수길’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따라 걷는 길이기도 하다. 청송 일대가 제주도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세계지질공원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암과 폭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산 주왕산의 비경을 걷고, 달기약수탕의 톡 쏘는 물맛도 볼 수 있으며, 운봉관 등 청송읍 일대의 역사적 발자취를 함께 할 수 있다. 외씨버선길의 15개 구간(13개 코스, 2개 연결구간) 가운데 가장 볼거리가 많은 구간이라 하겠다.

 

▼ 들머리는 청송 장난끼공화국 입구(청송읍 월외리 442-1)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면으로 1㎞쯤 내려오다 ‘청송1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중앙로를 옮겨 청송읍내를 통과한 다음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달기약수탕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청송 장난끼 공화국’의 입구인 ‘월외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이곳은 레포츠 마니아들에게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낙동정맥 트레일’과 ‘태행산 산악자전거(MTB) 코스’가 이곳에서 교차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외씨버선길까지 이곳을 통과하니 명실상부한 교통 요지가 아니겠는가.

▼ ‘외씨버선 길’은 호랑이 형상을 한 한반도에서 등뼈에 해당하는 영월·봉화·영양·청송을 잇는 총 길이 280㎞의 숲길이다. 북쪽인 영월부터 남쪽 청송까지 이어진 길의 모양새가 ‘외씨버선’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68)의 '승무'도 이름을 짓는데 일조했다. 외씨버선길이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의 ‘주실마을’을 지나는데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승무’에 ‘외씨보선’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외씨’는 ‘오이씨’의 준말이고 ‘보선’은 ‘버선’의 경북 방언이다. 오이씨처럼 갸름하고 맵시가 있는 버선이란 뜻이다. 지도를 보고 버선을 연상한 상상력이 놀랍고, 시에서 길 이름을 받은 감수성 또한 부럽다. 길도 이름처럼 맵시가 있다니 직접 걸으면서 느껴볼 일이다.

▼ ‘외씨버선길 1코스(주왕산·달기약수탕길)’의 시점은 원래 ‘주왕산국립공원 상의지구 탐방안내센터’이다. 주왕계곡을 거슬러 올라 주왕산의 주능선(금은광이삼거리, 해발 725m)을 넘은 다음, 월외지구 탐방안내세터와 달기약수를 거쳐 청송읍의 ‘소헌공원’에 이르는 18.5㎞ 길이의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청송 장난끼공화국’에서 출발해 역방향으로 걸었다. 주왕산을 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5㎞라는 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4㎞ 정도 되는 미답 구간은 다음 2코스에 덧붙이면 되니 이 또한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 버스에서 내리면 ‘완주 인증, 사진촬영 지점’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설치되어 있다. ‘외씨버선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스탬프를 찍어가며 걷는 다른 ‘둘레길’들과는 달리, 이곳은 스탬프를 통합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지점에 설치해놓은 이런 표지목(매 코스 2개)을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은 다음, 객주(안내센터, 지자체마다 1개씩)에 들러 사진 대조 후 일괄적으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 구간 완주를 마치면 소정의 기념품이 지급된단다.

▼ ‘주왕산 월외지구 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380년이나 묵었다는 ‘월외리(月外里)’의 느티나무(보호수) 아래를 지나는데 오른편으로 ‘장난끼공화국’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들러보지는 못했다. 주왕산을 넘어야한다는 힘겨운 일정이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트레킹이 시작되는 ‘월외마을’은 대둔산(905m)과 태행산(太行山, 933.1m)에 둘러싸인 산골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월외(月外)’란 ‘달의 바깥’. 즉 월명산(현재는 720m봉으로 더 익숙하다)의 밖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 ‘월외마을’에서도 가슴 아픈 농촌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공가(空家)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주인 떠난 빈 집을 따야 할 시기를 놓친 감들만이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 승용차도 교행(交行)이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10분 남짓 걷자 ‘월외 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주왕산국립공원에 설치된 네 곳의 탐방지원센터(상의지구, 절골지구, 갓바위지구) 가운데 하나로 너구마을과 금은광이삼거리를 거쳐 주왕산의 장군봉을 오를 때 이곳을 출발지로 삼는다. 이밖에 태행산을 따로 오를 때도 이곳이 출발지가 된다.

▼ 탐방지원센터 앞. 이곳이 ‘외씨버선길’의 1길(주왕산·달기약수탕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사뿐사뿐 빠져드는 4色 매력’이라는 부제를 덧대어 세워져있었다. 1길의 시점(주왕산국립공원)과 종점(소헌공원)을 연결시키는 코스가 그려진 지도에는 친절하게도 사진을 찍어두어야 할 완주인증 지점까지 표시했다. 또 하나. 외씨버선길에서 별도로 만든 ‘구호지점 표시목’도 눈길을 끌었다.

▼ 너구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수확을 끝내지 못한 고추밭이 두어 곳 보였다. 서리를 맞아 시들어버린 붉은 고추가 서러운데, 집사람의 얘기로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란다. 새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도 보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일손이 딸린다더니 그 여파가 아닐까 싶다.

▼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약수터가 나온다. 너구마을로 가는 도중 청송 사람들이 물을 떠간다는 일명 ‘산삼 썩은 약수’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시지 말라는 경고문과 함께 부적합 판정을 받은 ‘수질검사 성적서’가 붙어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친 이유이다. 아쉽지만 탈이 날지도 모르는데 어쩌겠는가.

▼ 고개를 들면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드러난다. 첫서리가 내린지도 이미 오래니 초겨울의 삭막함까지도 이젠 눈에 익어갈 때다. 그런 풍경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길 아래로 흘러가는 괘천(掛川)이 내다보인다. 태행산과 대둔산, 금은광이 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러 곳에서 합쳐지면서 흘러 내려 월막의 끝자락에서 용전천으로 유입된다.

▼ 늦가을 정취에 푹 빠져 걷고 있는데 길 아래 ‘괘천(掛川)’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눈에 띈다. 안내판은 이곳을 ‘노루용추 계곡’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노루용추’란 계곡의 초입에 있는 작은 폭포 아래에 형성된 폭호(瀑壺 : 계속적인 물의 낙하가 만들어놓은 폭포 아래의 물웅덩이)를 이르는 지명이라면서 말이다. 전망대로 내려서니 앙증맞은 폭포 하나가 거대한 암벽 사이에 들어앉았다. 그 아래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웅덩이가 ‘노루용추’라는 얘기일 것이다. 노루용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용이 살다 떠난 못을 어여쁜 노루가 슬그머니 샘터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 주왕산과 가까워질수록 응회암층은 점점 두꺼워진다. 응회암은 고온의 화산재가 쌓여 식으면서 만들어진다. 냉각으로 인해 수축되고 용접한 듯 단단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체적이 줄고 수직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를 이룬다. 주상절리는 쉽게 풍화되지는 않지만 절리를 따라 무너져 내려 가파른 단애(斷崖)를 만든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다.

▼ 그 절정은 ‘청송8경’ 가운데 하나인 ‘달기폭포’다. 월외리의 지명을 따 ‘월외폭포’라고도 부르는데, 물줄기가 11m 높이에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갈수기라선지 폭이 좁은데다 수량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폭포 아래의 용소(龍沼)는 제법 깊어 보인다.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도 전해지지만, 폭포 옆으로 무지개다리를 놓이면서 많이 얕아졌다고 한다. 참고로 달기폭포는 주왕산 응회암의 수직절리에 의한 절벽이 침식되어 형성된 폭포라고 한다. 아래에는 큼직한 암석들이 뒹굴고 있다. 언뜻언뜻 육각기둥 형상의 암괴들도 보이는데, 수직 절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란다.

▼ 길을 가다보면 작은 폭포와 소(沼), 담(潭)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너구동으로 이어지는 이 골짜기는 ‘월외계곡’. 월외마을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 골짜기를 태행산과 금은광이 등지에서 시작된 괘천(掛川)이 흘러가면서 수많은 폭포와 소, 담을 만들어놓는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이면 ‘너구마을’에 이른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열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그러나 이 마을도 세월의 부침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때 50여 가구나 되던 마을이 다섯 가구로 줄었다가 최근에야 이주해온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너구’란 지명은 4개의 산줄기와 4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명당이라 ‘네 귀퉁이가 만나는 땅’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니 혹시라도 ‘너구리’를 떠올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 너구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주왕산으로 들어가는 인원을 체크하는 계수기(計數器)가 ‘금은광이길 탐방로’라는 문패를 단 대문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외에도 이정표(금은광이삼거리 3.6㎞/ 월외탐방지원센터 3.4㎞)와 해발까지 적어 넣은 구조지점 표시목(주왕 01-22), ‘주왕산국립공원 안내도’ 등이 세워져 있었다.

▼ 탐방로는 이제 주왕산을 향해 산속으로 파고든다. 날머리인 ‘상의 탐방지원센터’를 가기 위해서는 주왕산의 주능선을 넘어야 한다. 그러니 도로를 따르던 탐방로가 갑자기 등산 모드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적응해야지 어쩌겠는가.

▼ 산속으로 들어섰는데도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한 임도가 당분간 계속된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저 주변에 펼쳐지는 단풍잔치를 맘껏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 그렇게 걷기를 25분, 사람이 살았음직한 마을 터(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1.8㎞/ 월외탐방지원센터 5.2㎞)가 나오는가 싶더니 탐방로는 이내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그리고는 ‘금은광이 삼거리’로 향하는 산 중턱의 오솔길을 따른다. 좁지만 길은 분명하고 옛사람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고난(苦難)한 삶의 수단이었을 이 길이, 오늘 나에게는 삶을 여유삼아 걷는 길이 된다. 그렇다면 내 후손들은 어떨까. 십중팔구는 나와 같은 여유로움으로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 그런 여유로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7분쯤 지나는 지점(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1.5㎞/ 월외탐방지원센터 5.5㎞)에 이르자 갑자기 가팔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아마 경사(傾斜)가 50~60도는 넉넉할 것 같다. 혹자는 이런 지독한 가파름을 일러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내겐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얼마나 경사가 심했으면 흙냄새가 코로 스며들 정도로 코가 땅에 닿게 허리를 굽혔겠는가?

▼ 지독한 가파름에 지쳐갈 즈음 한줄기 빛처럼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그냥 나무계단이 아니다. 지그재그로 ‘갈 지(之)’자를 쓰면서 위로 향하는데, 그 생김새가 예술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것이다.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포토죤으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 위에서 내려다본 나무계단이다. 400개도 넘는다는 이 계단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하긴 18분이나 되는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을 버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초주검이 되어서야 능선(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0.7㎞/ 월외탐방지원센터 6.3㎞)에 올라섰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다. 그렇다고 수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낭떠러지에 가까운 산비탈이라서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비좁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닥에는 참나무류의 낙엽까지 수북하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구간이다.

▼ 조심조심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드디어 ‘금은광이 삼거리’. 해발 725m의 고갯마루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지명은 비록 ‘금은광이 삼거리’이지만 왼쪽에 있는 ‘금은광이봉(812m)’보다는 ‘장군봉(686.8m)’과 백련암을 거쳐 상의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오른쪽 능선이 주등산로이기 때문이다. 이정표(용연폭포 1.6㎞/ 장군봉 3.0㎞/ 월외탐방지원센터 7.0㎞)와 함께 ‘등산로 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 이곳의 이정표도 ‘외씨버선길’의 완주 인증 사진촬영 표지목을 겸하고 있었다. 하나 더. ‘금은광이’란 지명은 옛날 금을 캐던 광산이 이 부근에 있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이젠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하지만 길의 형편은 썩 좋지 않다. 급경사인데다 바닥에 잔자갈이 많아 미끄러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여름 태풍 때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길까지 막고 있었다.

▼ 산길이 험하다는 건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나보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도 ‘위험등급 구간’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4개 등급(관심·주의·위험·매우 위험)으로 나뉘는 취약구간 가운데 두 번째이나 주왕산에서는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히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탐방로는 계곡을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심심찮게 개울을 가로지른다. 장마철이면 저 개울은 물이 불어 잠길 것이고, 탐방로는 막힐 게 뻔하다. ‘외씨버선길’이란 명품 트레일(trail)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 금은광이삼거리를 출발한지 40분 만에 ‘가메봉 갈림길’(이정표 : 대전사→ 3.5㎞/ 내원마을 터← 0.7㎞/ 금은광이 삼거리↓ 1.8㎞)에 내려선다. 왼편에는 지금은 이주해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한때 ‘전기 없는 마을’로 이름났던 내원동이 있다. ‘전기 없는 하룻밤’의 낭만을 위해 등산객이며 여행자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참! 8년 전인가 두 번째로 이곳을 찾아왔을 때 적었던 글이 보이기에 함께 올려본다. <'내원마을을 아시나요?‘ 다들 생경스러운 표정이지만 ’그럼 전기 없는 마을은 들어 보셨나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요즘 세상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원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희귀성 때문인지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다들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말았다. 도심의 번잡함에 지친 사람들이 동경하던 그런 쉼터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젠가 난 이곳을 찾았었고, 난 쉼터로 변한 분교(分校)에 들어가 난쟁이 의자에 걸터앉아, 방아취에 동동주 한잔 들이키며 인생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여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 탐방로는 이제 평지나 다름없다. 평탄한 흙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가자 용연폭포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 계곡으로 내려서자 저만큼에 나무테크로 만든 예쁘장한 전망대가 보이고, 전망대에 올라서면 ‘용연폭포(龍淵瀑布, 또는 제3폭포)’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폭포 중간의 물이 돈 흔적과 절벽 안으로 깎인 3개의 구멍도 바라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물에 깎이었으면 저런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이 경이로까지 발전하는 순간이다. 참! 용연폭포는 ‘쌍용추폭포’로 불리기도 한단다. 마침 갈수기라서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두 줄기로 떨어지는 폭포의 생김새 때문에 얻게 된 이름이란다. 또 하나. 이곳은 오랫동안 ‘제3폭포’라는 단순한 이름으로만 불려왔었다. 그러다가 옛 이름 찾아주기에 나선 청송군청이 주왕산지(周王山志) 등 문헌을 참고해서 제1폭포는 ‘용추(龍湫)’, 그리고 제2, 제3폭포에는 ‘절구’와 ‘용연(龍淵)’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 주왕산의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용연폭포는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관광객들을 배려한 전망대도 아래와 위, 2개를 설치해 놓았다.

▼ 하지만 아래 전망대에서는 폭포의 전모가 다 보이지 않는다. 윗 폭포는 가려지고 아래쪽의 와폭(臥瀑)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도 물의 양이 적어 볼품이 없다. 그저 폭포 아래 옥빛 물을 찰랑찰랑 담고 있는 널찍한 소(沼)의 풍광만이 일품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준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후리메기 삼거리’로 가면 저만큼에 다리 하나가 보인다. 절구폭포(또는 제2폭포)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이정표 : 절구폭포 0.2㎞/ 용추폭포 0.8km/ 용연폭포 0.4km).

▼ 동굴을 지나듯이 좁은 길을 200m가량 들어가니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계곡 안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수려한 모습의 제2폭포가 선을 보이는 것이다. 폭포의 앞에 숲을 이루고 있는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염원이 돌맹이 숫자만큼이나 쌓였을 게고, 그 바람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절구폭포는 앞쪽만 긴 절벽이고 나머지는 모두 숲인데, 절벽 위에서 맑은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중간 호박처럼 파인 곳에 일단 쉬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그 모양새가 유명한 조각가의 창작품 같이 오묘하며 여성스러운 미를 지녔다고 해서 ‘절구폭포’라 했단다. 물에 손을 담가본다. 서늘하다. 망설임 없이 주저앉아 세수부터 하고 본다.

▼ 절구폭포를 빠져나오자 단풍이 붉게 물든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다른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아니 단풍나무의 붉음도 마지막 열정을 불사른데 대한 보상이요 훈장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른 나무들처럼 발아래에 깔리면서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바스락~ 바스락~

▼ 그렇게 얼마간 걸어 내려오면 암벽이 문설주처럼 서있는 협곡이 나타난다. 사이가 좁아지는 기암절벽 틈으로 들어서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용추폭포(龍湫瀑布, 또는 제1폭포)에 다다른 것이다.

▼ 암석의 기반이 세로로 솟아오르며 만들어낸 빈 공간에, 오랜 세월 동안 물이 흐른 흔적들이 보인다. 흐르던 물이 어디를 후려쳤고, 어디는 감싸고돌았는지 잘 다듬어진 절벽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 폭포주변의 기암절벽들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래로 난 탐방로는 많은 탐방객들로 혼잡스럽다. 그만큼 이곳의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지만 주방계곡의 풍광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만큼 계곡이 웅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니까...

▼ 용추폭포는 선녀들의 목욕탕처럼 생긴 선녀탕과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구룡소를 돌아 떨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상당히 많이 작아 보이지만, 어떠랴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한 것을... 계곡을 흐르는 물은 티 없이 맑고 투명하다. 누가 파란 물감을 풀어놓았을까? 진하게 파랗다.

▼ 용추폭포를 빠져나오면 건너편에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보인다.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벽은 계곡방향으로 수직의 단애(斷崖)를 만들어 내고 있다. 청학과 백학이 다정하게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에 청학과 백학이 쌍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각없는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청학이 며칠을 두고 울다가 이곳을 떠나갔다 하여 새집 소(巢)자를 붙여 학소대(鶴巢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 생김새가 마치 떡을 찌는 시루같이 생겼다 해서 ‘시루봉’이다. 어떤 이는 거인의 얼굴을 닮았다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겨울철에 한 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공부하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루봉에 안개가 끼면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단다.

▼ 길가 곳곳에는 작은 쉼터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계곡을 침범해가며 공간을 만들고 벤치를 놓은 게 여간 소담스럽지가 않다. 책장을 펼쳐놓은 것 같은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소중한 정보이니 책처럼 정성들여 읽으라는 모양이다. 이렇듯 모든 편의시설은 탐방객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 조금 더 내려오면 이번엔 ‘급수대(汲水臺)’이다. 김주원(金周元)이 절벽 꼭대기에 거주하면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마셨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강릉 김씨’의 시조로 그의 아들인 김헌창이 웅천주(현재의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신라의 9주 가운데 5개 주의 호응을 얻어내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 구암(龜巖) 각자(刻字)도 카메라에 담아봤다. 거북이를 닮은 바위에 새겨진 ‘주방동천 문림천석(周房洞天 文林泉石)’이란 글씨로 ‘빼어난 산수의 주왕산과 물과 돌은 문림랑의 것’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여기서 문림은 고려시대 ‘문림랑위위시승’ 벼슬을 지낸 ‘청송 심씨’의 시조 심홍부. 이곳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청송 심씨’의 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석이라고 보면 되겠다.

▼ 주방계곡을 빠져나오는 길. 쓰러질 듯 덮칠 듯 치솟은 기암절벽과 괴석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한반도의 지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놓고 보면 주왕산은 자궁(子宮)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폭포들과 주변의 협곡은 여성의 깊은 속살이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계곡을 벗어나고 있는 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난 월외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면서 흘린 땀과 함께 헛된 마음을 비웠고, 산길을 거닐면서 바라본 하늘에서 찾아낸 새로운 메시지로, 비워놓았던 공간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내 삶이, 잎새(잎사귀의 方言)에 이는 바람에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되기를 빌면서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온다.

▼ 용추폭포를 통과하고 30분 만에 ‘대전사(大典寺)’에 도착했다. 대전사는 별로 크지 않은 사찰이다. 그래서 전각(殿閣)들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그 규모도 생각보다 왜소하다. 그러나 그 왜소함 때문에 대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기암과 대전사가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irony)가 아닐까? 참고로 이 절은 신라 문무왕 때(672년)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전하나, 고려 태조 때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지금의 전각들은 조선 중기에 실화로 전소된 뒤 중창된 건물들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한 후, 신라로 도망 와서 이곳에 숨었단다. 결국 신라에 의해 토벌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산의 이름이 되었고, 주왕(周王)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은 사찰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절간에는 ‘소원성취 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의 둘레에는 소원을 담은 나무판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게 영 개운치가 않으니 문제다. 일본에서 보던 에마(繪馬). 즉 일본인들이 신사나 절에 기원하거나, 그 기원이 이루어져 이에 대한 사례를 할 때 봉납하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자와 너무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살며시 아무도 보지 않은 가운데 돌맹이 하나 던져보려다 그만두어버린 이유이다.

▼ 산행날머리는 대전사 앞 주차장(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295)

대전사에서 상의지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난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인근 아낙들이 자리를 잡고 좌판 위에 청송의 특산품인 사과와 대추 등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물론 길가에 늘어선 식당의 아주머니들도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길가에서 빈대떡을 부지런히 뒤집고 있다. ‘맛있으니 잠깐 쉬었다가세요’ 호객하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다보면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오늘 트레킹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는 13.48㎞. 산 하나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참고로 상의마을의 상의는 원래 '삼의'(三宜)로 주왕이 마 장군과 세 번 싸우고 나서 모두 이겼다는 의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