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11), ‘마루금 길

 

여행일 : ‘21. 7. 3(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물야면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일원

여행코스 : 상운사→늦은목이→선달산→회암봉→어래산→곰봉삼거리→김삿갓문학관(소요시간 : 15.4km/ 실제는 생달마을에서 남대리까지 12.96km를 5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한 번째 길인 ‘마루금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첫 구간으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지난다고 해서 ‘마루금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도 역시 보부상들이 물건을 팔러 다니면서 걸었던 길이다. 하지만 ‘늦은목이’부터는 옛길과 헤어져 1천 미터가 넘는 고산준령의 마루금을 따른다. 이는 줄곧 보부상과 연결시켜 온 ‘외씨버선길’의 콘셉트에 어긋나는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싶다. 11길을 조성한 영월군이 보부상과 연이 덜 닿았는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흐트러뜨려서야 되겠는가.

 

▼ 들머리는 생달마을 버스정류장(봉화군 물야면 서벽리 산 103-3)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을 타고 일단 풍기읍으로 들어온다. 이어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순흥면·단산면·부석면을 거쳐 물야면소재지(오록리)까지 온 다음, 이번에는 915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백두대간휴양림 방향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물야저수지의 상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생달마을에 이르게 된다. 생달마을은 선달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형세가 마치 두 개의 달과 같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처음에는 ‘쌍달’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생달’로 바뀌었단다.

▼ 11길(마루금길)은 봉화군의 ‘상운사’를 출발해 15.4km를 걸은 다음 영월의 ‘김삿갓문학관’에서 끝난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달마을(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생달마을에서 상운사로 올라가는 길(2.7km)의 폭이 좁아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생달마을에 세워놓은 이정표(약수탕길의 완주 인증시설이다)는 이곳에서 상운사까지의 거리를 2.7km로 적고 있다. 기존의 15.4km로도 모자라 2.7km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구간. 즉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준령들을 오르내려야만 하는 고달픈 구간인데 우린 이제 죽었다.

▼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선달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앉은 생달마을은 산수경관이 빼어나다고 소문난 곳이다. 그래선지 머물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주택들이 여럿 눈에 띈다. 심지어는 ‘정(亭)’자를 넣은 옥호(屋號)를 지었을 정도로 예쁜 집도 보였는데, 이런 집들은 대개 산장과 산방, 별장, 쉼터 등의 이름을 내걸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멋진 길을 만났다. 전국 어디를 가나 벚나무 일색인데, 이곳은 가로수로 단풍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 길가에 세워놓은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곳이 ‘신선골’이라는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선달산(仙達山)의 어원이 ‘신선이 놀던 곳’이라 했으니, 응당 물 맑은 이 골짜기까지 내려와 놀다갔지 않겠는가.

▼ 잠시 후 주목산장에 이른다. 맨 꼭대기에 있는 집이라선지 ‘주목산장’이란 이름표까지 매단 이정표(상운사 0.5㎞/ 백두대간후문 12.5㎞)가 세워져 있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산장의 사진을 게시한 이유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향한다. 상운사에 조금 못 미치는 곳인데, 10길(약수탕길)과 11길(마루금길)이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정표 옆에 세워놓은 구간안내도가 마루금길의 길이(15.4km)와 함께 구간 난이도를 ‘최상’으로 적고 있는 게 아닌가. 그만큼 힘든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에서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자 ‘상운사’가 얼굴을 내민다. 자그마한 불당 두어 채와 요사가 전부인 한국불교조계종 소속의 꼬맹이 산사이다. 하긴 세워진지 30년을 조금 더 넘겼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거기다 이곳까지 찾아와 불공을 드릴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 들머리로 되돌아와 오솔길로 들어선다. 시작부터 멋진 다리가 나타나는 등 볼거리가 제법 많은 길이다. 그건 그렇고 산은 온통 초록빛 세상이다. 연록을 자랑하던 봄날은 이미 지나가버린 모양이다.

▼ 오르막길에는 다듬지 않은 돌멩이들을 가지런히 쌓아 돌계단을 만들었다. 그 돌멩이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두터운 이끼가 돋아났다. 미끄러운 게 다소 부담스럽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우리 집사람처럼 엉덩방아를 찧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 잠시 후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난 낙엽송 숲이 길손을 맞는다. 아니 가까이 다가가보니 잣나무다. 그건 그렇고 늦은목이로 올라가는 탐방로는 완만하면서도 편했다. 하긴 해발 1,000m를 넘기며 힘자랑을 하던 주능선이 786m로 푹 들어간 곳이니 그럴만하겠다.

▼ 길은 한마디로 멋지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다리처럼 길을 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통나무를 세워가며 계단을 만들었다. 토사의 유출을 막아보려는 필사의 노력일 것이다.

▼ 길가에 작은 옹달샘 하나가 나타났다. 지붕까지 씌워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인데, 이게 내성천(乃城川)의 발원지라고 한다. 이곳에서 발원해 봉화군과 영주시, 예천군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길이 109.5㎞의 하천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젖줄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30분. 옹달샘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늦은목이’다. ‘느슨한 고개’라는 의미를 지녔다는데 옛날 이곳을 넘나들었을 보부상들이 지어낸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해발 786m의 고갯마루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긴 우리가 걷고 있는 ‘외씨버선길’ 외에도 ‘백두대간’, 거기다 ‘소백산 자락길’까지 겹쳤으니 오죽하겠는가.

▼ ‘늦은목이’는 마구령에서 선달산을 지나 박달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한 고개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선달산까지는 백두대간을 밟는 셈이다. 참!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山經)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쯤은 알고 지나가자. 이러한 산경개념은 신경준의 ‘산경표’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반영되어 있다.

▼ 이곳은 또 ‘소백산 자락길’의 9자락인 ‘방물길(생달마을↔남대리 주막거리)’이 지나기도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지고 넘나들던 길이라고 해서 ‘방물길’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얻었다. 참고로 ‘소백산 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길이 143km(360리)의 둘레길이다. 모두 열 두 자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3개 도(경북·충북·강원)의 4개 시·군(영주·봉화·단양·영월)을 지난다.

▼ 선달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까지 1.8km를 오르며 400m도 넘는 고도차를 극복하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무척 힘든 코스라는 얘기이다. 이런 구간은 나올 듯 나올 듯 정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 고비 오르면 저만치에 있고, 또 올라도 정상은 저만치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 누군가는 이 구간을 ‘오르막’만 있다고 했다. 선달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더 가파름과 덜 가파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맞다. 그의 말대로 산길은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는 구간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그건 그렇고 정오를 넘기자 오뉴월 무더위가 고산준령의 산줄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름까지 더해져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러니 가끔 빽빽한 숲 사이로 실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걸음이 자꾸만 더뎌지는 이유이다.

▼ 숲이 울창해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멋진 소나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저 나무를 쏙 빼다 닮은 소나무를 자은도의 분계해변에서는 ‘여인송(女人松)’이라 부르고 있었다.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아낙내의 전설까지 지닌 소나무인데, 여인이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저렇게 생겼었다.

▼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는 저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 아래를 지나가는 나그네는 저렇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린다. 그래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오늘은 오후부터 소나기가 내린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비가 내릴 기미는 없고, 다만 안개가 가득 차있어 시야가 좁을 뿐이다. 그래도 길이 또렷한데다 예상보다 표지기도 많이 매달려 있어 진행하는데 문제가 없다.

▼ 뿌연 안개 속에 잠긴 울창한 숲길을 걷노라면 꼭 미로 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또한 가파른 오르막길이 겹치다보니 이마의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정표(김삿갓문학관← 13.7㎞/ 상운사↓ 2.9㎞) 하나가 나타나면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한다. 오를 만큼 올랐으니 이젠 백두대간 마루금을 벗어나 북쪽. 그러니까 어래산과 곰봉으로 연결되는 지능을 타라는 모양이다.

▼ 이정표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백두대간을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50m쯤 더 걷자 드디어 선달산(先達山, 1,236m) 정상이다. 늦은목이에서 1시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10분이 지났다. 도(경북·강원)의 경계이자 3군(영월·봉화·영주)이 만나는 너른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백두대간의 가치와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영주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이다. 참고로 선달산은 한자로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먼저 올라야 한다’는 뜻의 ‘先達山’으로 쓰기도 한단다.

▼ 직진으로 뻗어나간 대간길을 버리고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왼편으로 90도쯤 꺾인 능선. 즉 어래산과 곰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른다. 키 작은 잡목에 묻힌 탐방로가 희미하지만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능선은 예상외로 부드럽다. 아까 선달산을 오를 때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비단길이라고 해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런 곳에서는 콧노래라도 부르며 걸어야 제멋. 하지만 하늘이 점점 찌푸려지고 있으니 우리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나리꽃이 꽤 많이 눈에 띈다. 7~8월에 꽃을 피운다고 했으니 제철에 꽃망울을 연 셈이다.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어느 처녀의 전설을 간직한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말도 ‘순결’, ‘깨끗한 마음’이다.

▼ 화전(火田)을 일구어도 될성부른 너른 분지도 만난다. 맞다. 저렇듯 초본식물이 많이 분포된 지형이라면 식수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 흔하지는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한 바위도 만날 수 있었다. 털복숭이 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머리를 길게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능선은 원시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 대부분이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다. 그래 1천 미터도 넘는 이런 고산준령까지 찾아와서 식생을 헤치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정상표지판이 걸려있는 봉우리 하나를 만났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밋밋한 봉우리인데 ‘준·희’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해발고도(1134.6m)를 적은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도 이곳을 지나갔던 모양이다.

▼ 산릉은 초본식물들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었다. 또한 70년대 식재했다는 낙엽송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풍광도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산길이 사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 걸을수록 평온해진다면서 말이다. 단순한 걸음의 반복이 평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바빠지기만 했다. 3시에 비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으려면 그 전에 산행을 마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 헬기장처럼 널찍한 안부에 내려섰다. 이정표(김삿갓문학관 11.3㎞/ 상운사 5.3㎞)까지 세워져 있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친다.

▼ 한 발은 강원도에 또 다른 발은 경상도에 걸치고 있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다고 가파른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아래 사진처럼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 부담은 없다.

▼ 다른 생명을 품은 바위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양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면서 말이다. 조그만 난관에도 곧잘 좌절해버리는 인간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 선달산에서 내려선지 1시간 만에 회암봉에 올라선다. 특별할 게 없는 밋밋한 봉우리에 정상석은 보이지 않고 그저 삼각점(예미 463)만 외롭다. 울창한 참나무 숲에 둘러싸여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 최남준씨도 그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1136.9m’라고 적은 팻말을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한 이도 있었나 보다. 누군가가 ‘회암봉(1137m)’이라 프린팅 된 비닐을 나무기둥에 묶어놓았다.

▼ 이제 회암령으로 내려갈 차례이다. 잠시 후 완만하게 이어지던 탐방로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 협곡을 연상시키는 바위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 이게 여간 날이 서있는 게 아니다. 통나무계단으로도 모자라 밧줄까지 매어놓았다면, 그 가파름을 대충 이해할지 모르겠다.

▼ 이후로도 밧줄 구간은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난다. 이렇듯 회암봉과 회암령 사이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무릇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내림의 길을 모두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평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암령을 지나면서 다시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예쁜 바위봉우리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 회암봉에서 내려선지 45분. 회암봉과 어래산 사이의 안부인 회암령에 내려섰다. 그런데 선두를 치고나갔던 이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너무 지났으니 이곳에서 탈출하란다. 앞으로는 된비알의 연속이라면서 말이다. 맞다. 된비알은 1km를 걷는데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 평지라면 달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그런 된비알이 앞으로도 9.1km나 남았으니 어찌 탈출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고갯마루에는 고맙게도 안심장독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만나왔던 장독대는 모두 땅속에 묻혀있었는데, 이곳은 지상에 노출시켜놓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이런 산중. 그것도 1000m가 넘는 산등성이에 물을 비치해 놓았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건 그렇고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집사람이 반색을 하며 생수 한 병을 꺼내든다. 마침 물이 떨어져가던 때라면서. 내게는 이 물을 다시 채워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참! 이정표(김삿갓 문학관 9.1㎞/ 상운사 7.5㎞) 얘기를 깜빡 잊을 뻔했다. 11길(마루금길)에 설치된 2곳의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설치된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11길(마루금길)을 지나갔음이 인정된다.

▼ 산 아래 ‘남대리’를 향해 하산을 시작한다. 산길은 울창한 잣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 숲에는 수령이 10년도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가득했다. 군락도 꽤 너른 편이다. 그 숲길을 걷자니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아니 마루금을 오르내리며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기에 바닥까지 폭신폭신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아버렸나 보다. 언제부턴가 길의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신 인적이 끊긴 원시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길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남대리로 내려가는 길은 외씨버선길의 정규탐방로는 아니다. 하지만 ‘마루금길’과 동일하게 외씨버선길 특유의 표지기(리본)를 촘촘히 매달아놓아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11길(마루금길)이 하도 힘들다보니 중간에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에 관리처(4개 지자체와 사단법인 경북북부연구원이 함께 조성·관리·운영한다)가 회암령에서 내려오는 탈출로를 내면서 이들이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도록 정규 탐방로와 동일하게 리본을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 회암령에서 남대리까지 2.5km쯤 되는 산길은 대부분 골짜기를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차례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으나 골짜기가 제법 넓어서 장마철에는 통행이 제약을 받을 수도 있겠다.

▼ 트레킹 날머리는 남대리 송내마을(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286)

그렇게 얼마를 내려오자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길은 어느덧 93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회암령에서 내려선지 1시간 만이다. 패잔병으로 전락한 우리 부부를 원래의 날머리인 ’김삿갓문학관‘까지 실어다 줄 산악회버스는 남대리경로당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5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2.96km. 거리에 비해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그만큼 힘이 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본래의 날머리에는 김삿갓문학관이 들어서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방랑자였던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강원도의 시책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에 개관했으며 김병연과 관련된 서책과 기증자료 등으로 총 3개의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김삿갓 발자취를 쫒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 선생의 김삿갓 연구 자료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광장에는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그가 썼다는 시도 눈에 띈다. 참고로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호는 난고(蘭皐).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 스스로 여겨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자손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당시 조선 후기 양반들이 짓던 한시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던 천재시인이기도 하다.

▼ 10여 개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기에 다가가보니 대부분 알만한 시인들이다. 아니 신달자. 유안진, 나태주, 오탁번 등등 이미 유명세를 탄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선지 눈에 익은 싯구도 몇 눈에 띈다. ‘김삿갓문학상’ 수상자들의 시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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