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백산(頭伯山, 225m)
산 행 일 : ‘21. 9. 18(토)
소 재 지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산행코스 : 왕곡마을입구(장승)→두백산 등산안내판→전망대→두백산 정상(중계탑)→안부 삼거리→임도→왕곡마을(소요시간 : 마을투어 포함 3.15km/ 1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높이가 300m에도 못 미치니 산이랄 것도 없다. 거기다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등산로는 전국의 어느 유명산 못지않게 잘 정비되어 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산이 품고 있는 ’왕곡마을‘을 찾는 이들이 하도 많기 때문이다. 마을을 찾아온 여행객들이 산책삼아 오르는 산이 바로 ’두백산‘이다.
▼ 산행들머리는 왕곡마을 주차장(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22)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해 교동지하차도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이동한 다음,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타고 고성 방면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오봉리·왕곡마을 입구(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서 빠져나와 ‘송지호’ 방면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저잣거리를 지나 왕곡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 실질적인 들머리는 주차장에서 저잣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왕곡마을 투어를 포함시키는 산악회 대부분이 타고 온 버스를 고갯마루에 멈추고 회원들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 두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딱 두 곳이다. 둘 모두 왕곡마을에서 출발하는데, 하나는 마을에서 저잣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뒤 마지막 민가에서 시작된다. 구태여 하나를 덧붙인다면 오음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꼽을 수 있지만, 길이 거친데다 또렷하지도 않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
▼ 널찍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두백산 정상까지 840m) 및 두백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속으로 들어가자 울창한 대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대나무 터널을 지나는데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댓잎이 바람에 흔들려 서로 비벼대는 소리로, 들으면 들을수록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당송8대가인 소동파(蘇東坡)도 이런 맛에 대나무 숲길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소나무 숲. 이제 겨우 180m를 걸었을 뿐인데, 길가의 이정표는 벌써 두 번째이다. 이렇듯 두백산의 이정표는 촘촘히도 세워져 있다.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 길은 정비가 잘되어 있다. 널찍한 데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가파르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이 정도의 경사도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 산길은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가파른 경사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보려는 눈물겨운 투쟁이다.
▼ 몸을 비트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사가 더 심해지자 침목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제법 길다.
▼ 탐방로 곳곳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거리가 짧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거기다 야자매트와 나무계단을 놓았으니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 그 가파름의 대미는 침목계단이 장식한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파르다보니 계단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밧줄난간을 설치해 이에 의지해 오를 수 있도록 했다.
▼ 산행을 시작한지 28분, 정상에 오르기 바로 직전 철조망이 쳐진 시설물이 나타난다. 이 시설물의 왼쪽 공터가 두백산 제일의 조망처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벤치까지 놓아둔 걸 보면 쉬엄쉬엄 조망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정상을 통신시설에 빼앗긴 사람들은 이곳을 정상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고성 늘뫼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판이 이 시설물의 철망에 묶여있는 걸 보면 말이다. 뿐만 아니라 두백산의 안내판도 이곳에 세워놓았다.
▼ 두백산은 왕곡마을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오지중의 오지인 왕곡마을은 예로부터 오목한 분지형의 십승지지 요건에 해당된다고 알려져 왔다. 오음산(五音山)을 주산으로 오른쪽의 진방산(唇防山)과 제공산(濟孔山), 왼쪽의 두백산(頭伯山)과 공모산(拱帽山), 전면의 호근산(湖近山)이 마을을 빙 둘러싸며 길지중의 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두백산도 길지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 길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정상판을 배경삼아 기념사진 하나 남겨둔다.
▼ 분명 두백산의 안내판이건만 산은 맛보기. 대신 왕곡마을에 대해 적고 있다. 품고 있는 사연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왕곡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전통 한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수백 년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역사는 1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명인 함부열(咸傅說)이 간성(고성의 옛 지명)으로 낙향했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이 사는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50여 채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2001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 벤치 쪽으로 나가자 둘레가 6㎞나 된다는 송지호(松池湖)가, 그리고 그 뒤로는 에메랄드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송지호는 같은 자연 석호(潟湖)인 근처의 ‘화진포호’와는 달리 옛 시인묵객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한 은둔의 호수이다. 1748년 간성군수를 지냈던 김광우는 그 이유를 너무 많은 소나무에서 찾았다고 한다. 직접 쓴 ‘간성군읍지’에 호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나무가 많아서 옛 시인묵객들이 지나치기 일쑤였다고 적었다.
▼ 시선을 오른편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설악산의 준봉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 이정표는 하산 지점을 숲길입구(840m)와 왕곡마을(1,400m)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렇듯 두백산의 모든 이정표는 양 방향만 지시한다. 산길이 외길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양쪽 길의 끝은 모두 왕곡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숲길입구에서 마을 주차장까지의 거리가 겨우 100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실제 정상은 강릉문화방송의 중계탑이 점령했다. 그래선지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조망도 터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쉴만한 공간도 없다. 산길은 이 시설물의 출망 울타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 항일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노래했건만 이곳 두백산 정상의 봄은 아직 멀었나보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알리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저 선답자들이 매달아놓고 간 표지기들만이 외로울 뿐...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올라왔던 반대 방향인 서쪽, 그러니까 이정표가 지시하던 ‘왕곡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 하산 길에는 건너편에 위치한 오음산(五音山)을 실컷 눈에 담으며 내려올 수 있다. 왕곡마을을 둘러싼 다섯 봉우리(호근산·제공산·배제산·두백산·골무산)의 주산인데, 옛날 신선들이 이 산과 산 아래에 위치한 선유담에서 오음육률(五音六律)을 즐겼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 내려가는 길도 역시 가파르다. 하지만 계단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 그렇게 15분쯤 내려왔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오음산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정상을 다녀오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길이 무척 거칠다는 산행대장의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얻어온 정보에 의하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인근 주민들이 자주 오르내린다고 했는데, 이는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 탐방로는 산뜻하게 정비되어 있다. 길가의 잔가지 제거는 물론이고 바닥의 잡초까지 깔끔하게 깎아놓았다. 추석을 맞아 조상 묘역의 벌초를 하는 김에 등산로까지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맞다. 이곳 두백산은 왕곡마을의 ‘전통 민속체험 축제’ 기간에는 ‘두백산 트레킹’이라는 별도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정도의 정비는 항상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내려오는 도중 울창한 숲 사이로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그리고 송지호와 동해바다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이정표(두백산 정상 1,400m)와 두백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진 날머리에 도착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을 민가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집 마당을 통과하기가 난감해 망설이는데 개까지 짖어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 구세주는 언제나 집사람이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배짱에 놀랐는지 짖어대던 개까지도 금방 꼬리를 내려버린다.
▼ 자 이젠 배우 김영철처럼 ‘동네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마을은 50여 가구가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기와집(31채)과 초가집(20채)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다 전선을 지중화한 덕분에 전봇대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그건 그렇고 동네는 모두 4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저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 너무 시끄럽지 않게 돌아보는 게 우선이다.
▼ 가장 먼저 들른 ‘함정균 가옥(咸丁均家屋,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은 부인의 택호가 아닌 주인장의 이름을 따랐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본채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떠올리게 만드는 '반시재(盤枾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정면 2칸에는 마루가 있고 그 뒤에 안방, 측면에 사랑방과 고방이 있는 영동 북부지방 주거의 전형적인 평면배치라고 한다. 본채의 좌측 부엌 앞에 외양간 지붕을 달아내었고, 본채 뒤쪽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으며, 마루 양측 끝에는 하부는 뒤주, 상부는 두 짝 여닫이문이 달린 벽장이 있다. 본채 우측에는 행랑채가 있다. 현재 ‘강릉 함씨’ 21대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주택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단다.
▼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큰상나말집’으로 2016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동주’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내 공직기간 내내 좌우명으로 삼았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를 노래한 윤동주의 성장 배경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집의 구조를 조금 더 살펴보자. ‘ㄱ’ 자형으로 지어진 본채는 부엌에 외양간을 덧댔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에 대비하여 기와지붕은 경사지게 하였고 집의 기단도 돌을 쌓아 높였다. 차가운 북서풍을 막으려고 집 뒤는 담으로 막았으나 햇볕 드는 앞쪽은 틔웠다. 이러한 형태를 조선 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 겹집 구조라고 한단다.
▼ 이를 자랑하듯 영화의 한 컷이 처마 밑에 걸렸다. 영화를 감독한 이준익 감독은 이 마을의 집성촌과 주거 형태가 북간도와 비슷하여 이곳을 골랐다고 한다.
▼ ‘큰 백촌집’이다. 200년 전 백촌에 살던 ‘경주 김씨’ 집안의 며느리(능선 구씨)가 자녀들과 함께 북방식 가옥인 이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다 70년대 중반 도시로 이주해 지금은 비어있다. 그건 그렇고 기와가 볏짚으로 바뀌었을 뿐 이 집도 앞에서 본 가옥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ㄱ’ 자형으로 부엌에 외양간을 붙었다. 이렇듯 한 지붕 아래 방·고방·마루·부엌·외양간이 통으로 들어간 형태를 사람들은 ‘양통집’이라 부른다.
▼ 다음은 ‘작은 백촌집’이다. 백촌에 설던 김태선 씨가 이사하여 살던 집으로 1945년 공현진의 폐가(기와집)에서 가져온 목재를 재활용하여 지은 집이다. 큰백촌집의 김태곤과는 형제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마을의 집 이름은 함정균가옥을 빼고는 ○○가옥이나 ○○고택이라 하지 않고 안주인의 고향이나 이사 온 마을을 따서 지었다. 성천집, 큰상나말집,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석문집, 한고개집, 이런 식이다.
▼ ‘성천집’은 집의 구조가 약간 달랐다. 북방식 가옥의 특징이랄 수 있는 ‘ㄱ’자가 아니라 ‘ㅡ’자형인 것이다. 집집마다 갖고 있는 외양간이 이 집만 없었기 때문이다. 가옥의 이름은 집 주인인 함일홍의 부인 택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성천’에서 시집왔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작은 상나말집’과 ‘석문집’, ‘한고개집’ 등이 더 있었지만 지면이 부족하여 생략하겠다. 참! 마을에는 민박집도 여럿 들어서 있었다. 주말마다 열린다는 뻥튀기, 떡메치기, 그네타기, 널뛰기 등의 체험도 해볼 겸해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겠다.
▼ 진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지붕만큼 올린 굴뚝도 왕곡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아래 사진처럼 굴뚝이 담의 한 부분을 이뤄 담인지 굴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가 하면, 따로 떨어져 있는 원통형의 굴뚝도 있다. 또 어떤 집은 꽃담 쌓듯 몸에 화려한 장식을 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굴뚝들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풍경이지만 열악한 기후가 만들어낸 지혜라고 한다. 열을 잘 전달시키기 위해 굴뚝을 높이 쌓는 대신, 굴뚝 위에 항아리를 올림으로써 열을 오래 머물게 하는 동시에 불티까지 가두어둔다는 것이다.
▼ 우리네 주변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 ‘작두 샘’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전기가 없던 시절 많은 집에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게 한걸음 더 발전한 것이 ‘작두 샘’이다.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 있는 파이프의 상부에 저 펌프를 설치하고, 펌프 안에 물 한바가지를 부은 다음 작두질하듯 움직여 물을 끌어 올리는 방식이다. 지금은 박물관이나 체험학습장에서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 왕곡마을에서 그 귀한 풍경을 만난 것이다.
▼ 옛 마을이라고 해서 옛 이야기로만 끝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던지 마을 앞 텃밭에 ‘녹차’를 기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저게 또 하나의 얘깃거리로 풍성해지지 않겠는가.
▼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작은 상자 하나를 든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왕곡마을 한과’인데, 집사람도 사이드 메뉴로 내놓는 수정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하나를 샀다. 전통한과기능보유자가 만들었으니 어찌 맛이 없겠느냐며 말이다. 맞다. 홍보용 사진 속에서 ‘동네 한 바퀴(KBS-1TV)’의 김영철이 이집 주인장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게 그 증거라 하겠다. 이밖에도 KBS-2TV의 생생정보통과 JTBC의 ‘바라던 바다’ 등 다수의 방송에서 이 집만의 맛이 소개되었다고 한다.
▼ 마을 중앙에는 마을회관(경로당)이 들어앉았다. 이 회관을 중심으로 식당과 카페, 마을장터 등의 편의시설과 놀이시설(그네)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작년에 들렀을 때 눈여겨보았던 포토죤은 사라지고 없었다. 실사(實寫) 출력한 전통가옥에다 ‘옛 것 그대로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부언(附言)까지 달아 인생샷 하나쯤 건져볼 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카페 ‘화인당’이다. 카페이니 본업인 Coffee와 Tea는 기본, 그 가운데 추억의 다방 커피가 눈길을 끈다. 손님이 설탕과 크림을 배합해가며 직접 타먹는 것을 얘기하는 걸까? 그밖에도 물과 청량음료에 맥주까지, 심지어는 컵라면과 과자까지 판단다. 이건 숫제 마트. 그것도 국민지원금의 사용도 불가능한 대형마트 수준이라 하겠다.
▼ 회관 앞에 마련된 ‘마을장터’에 이르자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시킨다. 농산물 판매점인줄 알았는데 요깃거리까지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메뉴판은 아예 주막집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 발걸음을 이끌었던 냄새는 막걸리와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지져대는 메밀전에서 흘러나왔던 모양이고 말이다.
▼ 그네나 널뛰기 같은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전통체험장’도 핫 플레이스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 마을 입구로 나가면 ‘정미소’가 나온다. 이곳도 역시 ‘동주’의 촬영지이다. 이 영화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던 어둠의 시대에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의 빛나던 청춘을 담았다. 두 주인공의 아지트였던 정미소는 동주가 홀로 앉아 시집을 읽기도 하고 그들의 잡지를 만들기도 했던 곳이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라는 몽규의 말이 동주의 가슴에 비수같이 꽂혔던 곳이기도 하다.
▼ 안에는 지금도 사용하는 듯한 도정기(搗精機)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도 여럿 게시해 놓았다. 참고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주’는 5억 원이라는 순수 제작비가 말해주듯 저예산 독립영화이다. 중급영화의 제작비가 40억~50억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1,176,468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1천만 관객이 수두룩한 요즘이니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손익분기점이 27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대형 상업영화들과의 무한경쟁 속에서 말이다.
▼ 마을에는 효자각(孝子閣)이 둘이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정에서 정문까지 내려진 ‘함희석(咸熙錫)’의 효자비를 모신다. 효자 함희석은 부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고 전해진다. 집안에 큰불이 나 부모가 큰 화상을 입었을 때도 지성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등 효성을 다했단다.
▼ 다른 하나는 ‘양근함씨 4세효자각(揚根咸氏 四世孝子閣)’이다.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지낸 함성욱은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인흥’과 ‘인홍’, 손자 ‘덕우’, 증손 ‘희용’까지 줄줄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부친에게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를 안 조정에서 이들에게 조봉대부와 통정대부, 가선대부 등의 칭호를 내려주고, 비를 건립하여 이를 기리도록 했다.
▼ 마을을 빠져나오데 빨갛게 익은 감이 갈 길 바쁜 나그네를 배웅해준다. 감나무는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고, 그늘을 주고, 오래 살고, 단풍이 아름답고, 낙엽은 거름에 좋고, 열매는 맛이 좋아 ‘칠덕수(七德樹)’다. 효자각을 두 개나 갖고 있는 마을에 어울리는 나무요 열매라 하겠다.
▼ 산행을 마친 뒤에는 ‘가진항’으로 이동했다. 포항과 함께 ‘물회’의 양대 산맥이라는 산행대장의 멘트가 꼭 아니어도 뱃가죽이 등에 들어붙을 정도로 배가 출출해져 있으니 최상의 일정이라 하겠다. 기본(일반회+해삼+멍게)에 소라를 추가시키니 1인당 2만원, 밥 대신 나온 국수사리를 말아가며 먹다보니 소주를 2병이나 마셔버렸다. 소주 안주가 될 정도로 양이 충분했던 모양이다. 바다향이 물씬 묻어나는 맛 또한 기대에 부응했다.
▼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느긋하게 먹고 마셨지만 시간은 30분 가까이나 남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방파제로 나가보니 예상했던 대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애가 눈앞에 펼쳐진다. 영화 ‘군함도’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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