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산(金屛山, 652m)

 

산 행 일 : ‘20. 8. 29()

소 재 지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과 동내면, 동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김유정역전원주택단지금병산 입구산신각약수터주능선정상김유정문학촌김유정역(소요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대룡산(899m)에서 이어져온 능선이 원창고개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일어난 봉우리로 높이가 7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지막한 산이다. 거기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보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은 전혀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그런데도 금병산을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단다. 이는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던,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고향 실레마을이 이곳 금병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193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토속어와 직설적으로 토해내는 비속어, 갖가지 비유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조사법 등 김유정 특유의 문체로 대변된다. 이런 점을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김유정의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과 이야기집, 체험방 등을 한데 묶어 김유정 문학촌을 조성했는가 하면 금병산 자락과 실레마을에는 열여섯 마당으로 나누어진 작가와 함께하는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개설했다. 그 덕분에 실레마을은 이야기가 복작대는 마을이 됐고 그 이야기들을 찾아 한 해에 수십만 명이 찾아온단다.

 

산행들머리는 김유정역’(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5)

기나긴 장마로 인해 실로 오랜만에 산을 찾았다. 거리는 조금 멀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춘천시 소재의 산이다. 산행이 시작되는 김유정역(金裕貞驛)‘까지는 경춘선 전철을 타고 오면 된다. ‘김유정역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신남역(新南驛)’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러다가 인근 마을에 김유정문학촌이 조성(2002)되면서 역의 이름도 김유정역으로 변경(2004)했다. 한국에서 역 이름이 인물 이름으로 지정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한옥으로 지어진 현재의 역사(驛舍)2010년 경춘선이 복선화되면서 새로 지어졌다. 대신 옛 역사는 현재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옛 역사(아래 사진)는 삼각형의 박공(朴工,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에서 양 옆면의 마구리 부분)을 지붕에 돌출시켜 정면 입구를 강조한, 일제 말의 전형적인 역사(驛舍)이다. 신남역(현 김유정역)은 아는 사람들이나 아는 간이역에 불과했다. 작고 한산하던 이 시골역은 1997년에 방영된 MBC 홈드라마 간이역이 인기를 끌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아내를 사별한 아버지와 13녀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며 겪는 갈등과 사랑,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과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 등을 담은 이 드라마가 이곳 신남역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금병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산봉우리가 통째로 구름 속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652m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산이 워낙 깊은데다 물기가 많은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 앞에서 레일바이크 주차장이 있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강촌역부터 옛 김유정역까지의 경춘선이 지금은 레일바이크 코스로 바뀌었는데, 탐방로는 ‘Rail Park’ 주차장 정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춘천은 역시 막국수와 닭갈비의 고장, 길가에는 꽤 많은 닭갈비집들이 들어서있다. 그중에는 소설 속 이름들을 인용한 식당들도 여럿 보인다. 우리가 눈여겨보는 메뉴는 숯불’, 닭갈비는 역시 일산화탄소에 쏘여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산행이 끝나고 나서 일이지만 나와 최군은 술안주로 삼은 숯불 닭갈비에 푹 빠졌었고, 추가로 시킨 막국수도 집사람의 입맛에 딱 맞았던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버렸다.

 

 

산행을 시작한지 7~8분쯤 되었을까 1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23세의 김유정이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와 세운 야학당(夜學堂)이 있던 자리이다. 설립 이듬해에는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해 간이학교로 인가받은 다음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주인이 바뀐 터는 지금 김유정 기적비가 남아 옛날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1978329일 기일을 맞아 건립됐는데 휘호는 소설가 김동리가 썼다고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살던 가옥들은 찾아보지 못했다. 이왕에 왔으니 소설 속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더 훑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준비된 여행자가 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몇 걸음만 더 걸으니 김유정 실레이야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위치는 증리(甑里)’, 금병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모양새가 마치 시루와 같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란다. ‘시루 증()’자를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김유정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마을 이름을 실레로 돌려놓았다.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가 실레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안내도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정표가 세워지지 않은 걸로 보아 잠시 후에 다시 합쳐질 것 같아서이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의 고향으로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가 된다. 내용도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다고 알려진다. 이를 바탕으로 금병산 자락과 실레마을에 내놓은 자락길김유정 실레이야길인데, 멀리서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단다. 참고로 실레이야기길은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과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점순이가 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등 재미난 이야기 열여섯 마당과 만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잠시 후 길이 또 다시 나뉜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았다. 무턱대고 오른편 금병 전원마을로 들어섰다가 마을안길에서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두 길이 합쳐진다는 주민분의 조언을 받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20,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금병산 등산로안내도와 국가지점표지판(라사 1929-7903)이 세워져 있었다. 금병산은 수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흙이 많은 육산이라서 걷기가 편해 사계절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특히 산골나그네길’, ‘만무방길’, ‘금따는 콩밭길’, ‘동백꽃길’, ‘봄봄길 등 김유정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산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산자락에 걸쳐놓은 통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이 길은 금병산의 등산로이지만 실레이야기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실레이야기길의 일부 구간이 폐쇄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는가 하면, 이정표(산신각 1.0, 살레이야기길 전망대 1.7/ 김유정역 1.0)도 이름표를 실레이야길로 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금병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3.6라는 것까지 빼먹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들머리에서 저수지로 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금병산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 만무방길로 보이는데, 두 길은 나중에 교차지점에서 다시 만나고 있었다.

 

 

탐방로는 울창한 잣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분위기로 보아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응칠이는 1935년에 발표된 만무방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만무방은 염치가 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일컫는다. 주인공인 응칠은 부채 때문에 파산을 선언하고 도박과 절도로 전전하며 아우인 응오의 동네로 와서 무위도식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가 닭을 잡아 생으로 뜯어먹으며 송이를 따던 곳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만무방은 김유정 문학 특유의 해학성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농촌의 착취 체제에 내재하는 모순을 겨냥한 작품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스며있다. 상큼한 내음에 기분까지 한껏 좋아진다. 거기다 길바닥에는 잣송이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꿩 먹고 알 먹는다는 속담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없다. 거기다 임도처럼 널찍하니 가족끼리 손을 잡고 한가롭게 걷기에 딱 좋겠다. ! 오는 도중에 오솔길 하나가 주능선으로 향해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 길은 '첫고개''두고개' '새고개'로 넘어가는 길목이며 '·''만무방'의 작품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임도처럼 널찍한 실레이야기길을 따랐다. 이왕에 금병산까지 왔는데 어찌 금병산 산신령님을 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길로 들어선지 15분 만에 금병산의 산신령을 모신다는 산신각(山神閣)’에 도착했다. 이곳 실레마을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산신각을 짓고 진병산(금병산의 옛 이름)의 영험한 산신령을 모셔왔다고 한다. 매년 오월 길일을 잡아 제사도 지내는데, 이때는 술 대신 감주를 젯술로 사용한단다. 산신령이 여신이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나라의 산신각 대부분이 남신을 모시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하다 하겠다. 그건 그렇고 산신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96년 산신각의 코앞에 고압송전탑이 생기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죽어나가는 등 변고가 잇따르자 한전과 협의하여 이곳에 새롭게 산신각을 지었단다.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로 되돌아갈까 하다가 계속해서 실레이야기길(열 번째 마당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이다)’을 타기로 했다. 잠시 후 주능선으로 오르는 또 다른 오솔길을 만나게 되는데 구태여 되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이 매달려 있긴 했지만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등산로를 차지해버려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만무방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에는 체육시설까지 만들어 놓았다. 스트레칭용 외에도 철봉까지, 설치된 운동기구도 다양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시설인지는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외지에서 온 탐방객들에게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이미 몸이 풀려있을 텐데 또 다시 운동기구에 매달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상의 높이가 65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인데도 주변 풍경은 깊은 산중을 연상시킨다. 원시의 숲을 떠올릴 정도로 숲이 울창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집사람과 논쟁이 시작됐다. 주제는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버섯의 식용 여부. 그리고 이 논쟁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종류도 다양한 버섯들이 길가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이 깊은데다 장마철 습기가 생육에 도움을 주었지 싶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계곡으로 들어선다. 개울 수준이지만 수량(水量)은 제법 많은 편이다. 거기다 맑고 차갑기까지 하다. 계곡이 긴데다 숲까지 울창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계곡의 이름은 '물골'. 김유정의 작품 '산골'''의 무대라고 한다. 골짜기 위쪽에 주인공 근식이의 집이 있었단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곡을 따른다. 계곡의 가장자리를 따르다가 또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덕분에 물길이 만들어놓은 작은 폭포와 소()를 여럿 만나게 된다. 눈요깃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금병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이라 하겠다.

 

 

 

산신각을 출발한지 35분 만에 쉼터에 도착했다. 탐방로는 요 아래에서 개울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예고가 아닐까 싶다.

 

 

장의자 앞의 돌무더기에는 플라스틱 호스가 꽂혀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물도 흘러나온다. 두 손으로 받아 마셔보니 청량한 게 물맛까지 좋았다. 그냥 쉬어만 갈게 아니라 목까지 축이라는 배려용 약수터인 모양이다. 하지만 바가지 하나쯤 놓아두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불행이도 내 예감은 적중했다.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무방길을 통틀어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가파른 축에 끼지도 못할 테니까 말이다.

 

 

가팔라진 오르막길은 10분이 채 안되어 끝났다. 그리곤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삼거리에 데려다 놓는다. 이정표(금병산 정상1.32/ 금병산 정상1.0/ 저수지)가 세워져 있는데 양쪽 길이 모두 금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들머리에서 본 지도에는 이 길이 동백꽃길로 연결되는 금따는 콩밭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왼편에 표기된 거리표시는 얼토당토않게 된다. 고민 끝에 오른편으로 진행했던 이유이다.

 

 

이제 탐방로는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이어진다. 덕분에 경사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지능선을 만나면서는 약간 가팔라지기도 했다.

 

 

금따는 콩밭길을 따라 22분쯤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아니 지도에는 이곳을 사거리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표(금병산 정상/ 저수지/ 김유정역)는 세 방향뿐이다. 방향표시도 약간 헷갈린다. 저수지는 지나가지도 않는 방향(‘산골나그네길일 것이다)에다 저수지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은 김유정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부분이 완만한데다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놓는 등 오르내리는 이들을 배려한 덕분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원래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연리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연리지(또는 )의 고사(故事)는 후한 말(後漢 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나라 시인(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그는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연리목에 대한 애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헬기장이다. 시야가 열리는 곳에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네 명이나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한답시고 단체 트레킹까지 포기하고 개인 산행을 왔는데 일부러 이를 어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이곳은 조망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구름이 짙게 낀 오늘은 예외이지만, 날씨가 좋으면 북동쪽으로 대룡산이 보이고, 동으로는 응봉, 응봉에서 시계바늘 방향인 남동쪽 홍천 방면으로는 연엽산, 구절산, 성치산이 연이어 시야에 들어온다. 응봉과 구절산을 잇는 능선 너머로는 홍천 공작산도 시야에 와 닿는다.

 

 

두루뭉술한 모양새의 정상(이정표 : 김유정문학촌 3.81/ 원창고개 2,57/ 김유정역 4.35)은 전망대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낭만의 도시 춘천의 전망대라던 어느 기자의 말처럼 이곳 금병산의 가장 큰 장점인 빼어난 조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시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을 부각이라도 시키려는지 데크에는 조망도까지 세워놓았다. 사진으로 보는 춘천시가지는 펀치볼(인제군 해안분지)을 닮았을 정도로 둥그렇게 산이 에워싸고 있다. 그 분지의 북쪽을 소양강이 뚫고 지나간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방이 어둑해질 정도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다른 이의 글을 빌어 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북쪽으로 춘천시내 잼버리도로가, 봉의산, 의암호반, 용화산, 오봉산, 부용산 그리고 종류산이 또렷하다. 북동쪽 저 멀리 중앙고속도로 위로 금병산의 모산 대룡산이 자리하였다. 남동쪽에 연엽산, 구설산이 남쪽으로는 금확산, 쇠뿔봉산릉이 아련하고, 남서쪽에 좌방산, 종자산, 널미재, 장락산 그리고 저 멀리 용문산도 보인다. 서쪽엔 소주봉, 봉화산, 검봉이 머리를 내밀고 북서쪽에 삼악산이 보이는가 했더니 그 오른쪽에는 계관산, 북배산, 가덕산이 존재를 내밀고 화악산이 기운차게 일어섰다.>

 

 

정상석은 데크 전망대의 아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다. 금병산의 원래 이름은 진병산(陳兵山)’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이곳에 진을 쳤는가 하면, 일제 침략기 때는 의병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진을 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러다가 김유정이 소설에서 금병산(金屛山)’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지명이 바뀌었단다. 가을이면 그 산기슭이 황금빛 병풍을 둘러친 듯 아름답다면서 말이다

 

 

 

이제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나있는 이 길은 동백꽃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백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동백(冬柏)이 아니고, 봄이면 잎이 나오기 전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이른다. 김유정이 그의 작품에서 생강나무 꽃을 강원도 사투리인 동백꽃으로 풀어놓으면서 등산로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는 생강나무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백나무는 씨알조차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타는 길은 원창고개로 내려서는 봄봄길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동백꽃길구간은 그나마 볼거리가 있었다. 노송이 군락을 이루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거대하진 않지만 북사면이 절벽을 이룬 바위지대도 나온다. 최군의 말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서쪽 삼악산이 보인다고 했다. 북으로는 실낱처럼 이어지는 46번 국도와 춘천 시내 일부도 보인단다. 하지만 구름에 쌓여있어 눈짐작으로만 헤아려볼 수 있었다. 아무튼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을 장소였다. 또한 금병산 제일의 포토죤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산길은 경사가 꽤 가팔랐다. 아니 내려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이 가팔랐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이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통나무계단을 놓거나 밧줄난간을 매어놓았으니 이를 의지하면 된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서자 쉼터를 겸하고 있는 삼거리(이정표 : 김유정 문학촌2.21/ 1리 저수지/ 금병산 정상1.6)가 나온다. 곧장 직진하면 산행을 시작하면서 거론했던 저수지를 거쳐 김유정역으로 가게 되고, 김유정문학촌으로 연결되는 동백꽃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서 이어진다. 이정표의 지도에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금따는 콩밭길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점선이다. 핵심 등산로는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부쩍 완만해진 잣나무 숲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자 운동기구 몇 점과 함께 쉼터용 정자가 지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김유정 문학의 현장이라고 적힌 빗돌이 유독 눈길을 끈다.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이 김유정 작가가 산책하며 작품을 구상하던 실레마을 이야기길이라는 것이다. 농민들의 곤궁한 삶을 향토적 해학으로 소설화했던 김유정이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봄봄, 동백꽃 등 주옥같은 소설 30여 점을 남겼다는 내용도 함께 적고 있었다.

 

 

책처럼 생긴 안내판도 보인다. 작가와 함께하는 실레이야기길의 첫 번째 마당,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병장수라고도 불리는 들병이는 병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들병이들이 인제, 홍천으로 넘나드는 이 산길을 통해서 마을로 들어와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이야기가 쌓였고, 김유정은 그 이야기들을 해학적인 표현을 곁들여가며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안해, 소낙비, 솟 등의 작품에다 풀어놓았다.

 

 

쉼터를 지났다싶으면 시야가 열리면서 실레마을(증리)’이 눈에 들어온다. 산행이 대충 끝났다는 얘기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책과 인쇄 박물관이 길손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총 3층 규모의 전시실을 둘러보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배우고, 고서부터 근현대 문학, 신문, 잡지, 교과서를 아우르는 폭넓은 장르의 책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각종 기계의 시연과 함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누군가는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각각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만든 인쇄공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꿈꿔왔던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박물관은 그런 영혼이 깃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박물관을 지나 마을안길로 들어선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가 생을 마감했던 고향이다. 그리니 금병산은 고향 뒷산이 된다. 이 둘은 모두 1930년대 주옥같은 소설을 남긴 김유정의 작품 소재가 된다. 잣나무 숲 뒤쪽은 동백꽃의 실존 배경이고, 마을 한가운데 잣나무 숲 속에는 봄봄의 실존인물인 봉필이 영감집이 있다. 김유정의 간이학교 금병의숙과 김유정이 꼬다리찌개로 술을 마시던 주막터도 있다. 이렇듯 점순이와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실레마을이다. 춘천시에서는 이런 사연들을 주워 모아 열여섯 마당의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만들었고, 금병산 산길은 김유정의 소설 제목으로 이름을 삼아 한발 한발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데크로드 등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김유정 문학촌이 나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30분 만이다. 이곳은 2002년에 문을 연 김유정 유적지문학진흥법에 따라 등록된 강원도 최초의 문학관이기도 하다. 4,528의 부지 위에 김유정 생가와 기념전시관, 디딜방아간, 외양간, 휴게정 등이 들어서 있다. 문학촌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2천원, 김유정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길 건너에 따로 지어놓은 김유정 이야기집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는데 문학관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쉽지만 코로나19 때문이라니 어쩌겠는가.

 

 

담장 너머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자 모양의 초가집이지만 산골마을 치고는 그 규모가 제법 크다. 거기다 디딜방아와 외양간까지 별채로 두었을 정도라면 인근에서 부잣집이란 소릴 충분히 들었을 것 같다. 생가 옆에는 기와집 한 채가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다. 김유정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김유정기념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척 눈에 거슬린다. 생가보다도 훨씬 크게 지은 것도 문제인데, 거기다 생가에 바싹 붙여놓아 주인공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저 안에는 족보, 호적등초본, 학적부를 비롯하여 31편의 소설과 수필 서간문 등이 발표된 각종 문학지와 잡지의 영인본, 김유정이 참여해 활동했던 '구인회' 동인 및 그가 사랑했던 여인 판소리 명창 박록주에 관한 자료, 김유정을 테마로 한 작품, 김유정 연구 책 논문 등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생가 건너편은 민속마을처럼 꾸며 놓았다. 사무실과 세미나실이 들어있는 관리동을 중심으로 김유정 이야기집과 네 동의 민속공예체험방, 야외공연장, 이야기 쉼터, 매점&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생가와 기념관에 이 건물들을 더해 김유정 문학촌이라 하는가 보다. 마을 앞에 심어놓은 수크렁(Pennisetum alopecuroides)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란테가 지은 폭풍의 언덕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웃자란 수크렁이 바람 따라 춤을 추며 물결무늬를 만들어내는 게 흔한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연보와 함께 1936년에 발표된 동백꽃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농촌을 배경으로 마름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풋풋한 애정을 해학적으로 그려 낸 작품으로, 토속어와 향토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서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평가 받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은 동백나무의 붉은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는 세상에는 없는 노란 동백꽃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에서는 생강나무를 두고 동백나무라 부른다. 당시 생강나무는 지금과 달리 영양이 좋지 않은 탓에 가지가 축 처져서 그늘을 만들기에 좋았다고 한다. 소설 속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라는 표현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밖에도 봄봄에 대한 내용도 곁눈질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봄봄, 동백꽃 등 김유정의 작품에 나오는 줄거리를 형상화한 조형물들도 여럿 보인다. 아래 사진은 ()’의 마지막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다. 들병이와 바람이 나서 집안 재산목록 1호인 솥단지를 훔쳐온 근식이와 솥을 찾으러 달려온 아내, 그리고 아기를 업은 들병이와 근식이가 가져온 솥과 맷돌, 함지박, 보따리를 지게에 진 들병이의 남편을 실감나게 형상화했다. 참고로 1935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단편소설 깨숙이라는 들병이가 등장한다. 일제 식민지 후기의 들병이들은 시골 주막을 돌아다니며 술과 함께 몸까지 팔아 가족(남편, 아기)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에필로그(epilogue) : 춘천시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의 어릴 적 아명은 멱설이었다고 한다. 멱서리란 짚으로 날을 촘촘하게 걸어서 볏섬 크기로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하는데, 그 멱서리 속에 곡식을 그득 담듯 재산을 많이 모으라는 뜻이었다. 어린 멱설은 일곱 살과 아홉 살에 연이어 부모를 여의었지만 열두 살 되던 해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때가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1930년대 문학의 축복이라 불리는 김유정은 30년도 채 못 채운 29의 나이에 3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3명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하나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사랑했던 여인은 어머니, 하지만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그 슬픔을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다 잘 그려 넣었다. 그리고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 첫사랑 박녹주(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를 만났다. 하지만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그런 고향을 배경으로 '봄봄', '',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12편의 작품이 탄생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랑한 박봉주(시인 박용철의 동생으로 평론가였던 김환태와 결혼했다)도 끝내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극한 가난과 질병,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특유의 웃음과 해학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 속에서 웃음뿐만 아니라 애잔한 그의 삶 또한 느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