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아스완(Aswan), 미완성 오벨리스크

 

특징 : 사람들에게 아스완은 그저 세계문화유산인 아부심벨(Abu Simbel)‘을 보고 룩소르(Luxor)‘로 가는 나일 크루즈를 탑승하는 관문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나일강을 유람하는 나일강 크루즈가 대부분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완도 파라오시대 때부터 이집트 남쪽의 국경도시로서의 기능을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절 인근 나일강 동쪽에 스웬(고대 이집트어로 '定期市'라는 뜻)이라는 고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어 시에네와 아랍어 아스완이 이로부터 유래되었단다. 그 이후 로마·터키·영국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에도 국경초소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재의 아스완은 행정중심지이자 동계휴양지이며, 수단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상업 중심지이다. 또한 공업도시로서 구리 및 제철공업단지, 화학비료공장, 시멘트 공장, 제당공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화강암과 대리석을 캐는 채석장들도 있다.

 

다음 행선지인 아스완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자역(El Giza station)’으로 가야만 한다. 카이로의 중심역인 람세스역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기자역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야간열차가 기자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30분 먼저 역에 도착했다. 열차의 출발시간이 들쭉날쭉해서 미리 도착하지 않을 경우 열차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경고성 멘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기가 만만찮았는데 역사 안에 휴게소가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차의 연착시간까지 합하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는데, 휴게소 아니었으면 플랫폼(platform)에서 고역을 치렀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온통 지린내로 진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열차들이 하나같이 싸자마자 밖으로 배출되어버리는 화장실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란다.

 

 

 

 

스무디(smoothie) 한 잔씩을 시켜놓고 한 시간 가량을 버티다가 1.8짜리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나오니 우리를 태우고 갈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침대가 있는 야간열차라고 해서 ‘Wagon lit sleeper(침대차)’라고 불리는데 이곳 이집트에서는 상급으로 쳐주는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열차는 창가로 복도를 내고 반대편에 21실의 객실을 배치했다. 화차마다 한 명씩의 차장이 배정되어 있어 저녁과 아침 식사 등 호텔과 다름없는 서비스를 제공 받게 된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차장에게 컵라면에 부을 온수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게 되는데 이때 매너 팁을 주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객실은 여행용 트렁크 두 개를 넣으니 발 뻗을 공간이 없어져버릴 정도로 좁았다. 평소에는 소파 하나만 덜렁 놓여 있으나 벽면에 붙어있는 조립식 테이블을 펴면 식사도 가능하다. 각 객실에는 세면대도 있었다. 하지만 물의 공급이 원활치 않아 급할 경우에는 미리 준비해온 생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차장이 돌아다니면서 소파 등받이 뒤에 숨겨져 있던 침대를 끄집어 내준다. 이때 상부에도 별도의 침대가 펴진다. 이래서 21실의 객실이 되는 것이다. ! 화장실 얘기를 빼먹을 뻔했다. 화차 별로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게 되는데,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싸자마자 바닥으로 쏟아지게 되어 있는데도 수세식이라서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언제 열차에서 내려야 할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카이로-아스완 철도의 남쪽 종착역이 바로 아스완(Aswan)‘이었기 때문이다. 역을 빠져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우릴 아스완 댐Aswan dam)‘까지 데려다 준다. 아스완댐은 나일강의 범람을 막고 관개를 통한 안정적 농경을 위해 쌓은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 석틀 방파제) 댐이다. 그로인해 막대한 전력도 생산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댐은 1902년에 영국 기술진이 만든 로우 댐(low‘dam)과 나세르의 지도하에 이집트 정부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70년에 완공한 하이 댐(high dam)‘으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가운데 하이 댐을 찾았다. 참고로 이 댐이 만들어짐으로 해서 얻는 물은 이집트와 수단이 3:1 비율로 공평하게 나누어간다고 한다.

 

 

아스완댐에 대한 첫 느낌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아스완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고 말이다.

 

 

준공 비(竣工碑)‘라고 한다. 아랍어로 쓰인 탓에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아스완 댐을 쌓아올린 대역사의 기록들이 적혀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일강은 이집트와 수단, 에디오피아 등 주변국들 사이에 분쟁의 장으로 변해있다.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에디오피아가 나도 한 번 잘 살아보겠다며 댐을 지으면서 시작된 물 분쟁인 나일강 분쟁이다. 위쪽 물을 잠글 경우 아래쪽이 메마를 것은 당연지사. 아프리카에서 나름 힘 좀 쓰는 이집트가 이를 우려해 반대하니 미국까지 껴들게 된 이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댐의 상부(남쪽)나세르호(Lake Nasser)‘이다. 1960년대에 착공해 1971년에 준공된 아스완 하이 댐으로 나일강 물이 모아지면서 생긴 인공호수(길이 550/ 면적 5,250/ 깊이 25.2m)이다. 담수량이 1,640(소양호의 60)에 이르는 나세르호의 물을 하류로 방출하여 관개함으로써 324,000의 경지가 늘어났고, 283,400의 범람지를 영구 관개지로 개조시켰다. 또한 호수에는 식용 물고기도 기른다고 한다. 참고로 이 거대한 호수는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그래서 이집트에 속한 호수의 북쪽 2/3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1956~70)‘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 호라 부르며, 수단에 속한 남쪽 1/3누비아 호(Lake Nubia)‘라 부른다.

 

 

 

댐의 아래는 기존의 나일강이다. 저런 강에다 높이 111m에 길이가 3,830m나 되는 거대한 둑(dam)을 쌓아 나세르호를 만든 것이다. 아무튼 댐의 완성되면서 나일강변은 더 많은 경작지가 만들어졌다. 다모작이 가능해짐으로써 이집트 농업생산량을 200% 이상 증가시켰는가 하면, 댐에서 생산된 전력은 이집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왼편 언덕에는 우정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연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연꽃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스완댐의 건설 당시 러시아(당시는 소비에트 연방)가 기술과 비용을 지원한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란다. 1964년의 1차댐 준공식에 낫세르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는 아스완 하이댐을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댐의 하부에는 발전소가 들어앉았다. 수문을 열면 댐에 갇혀있던 물이 낮은 곳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이 원리를 이용한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 댐은 8개의 주 터널과 24개의 지 터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발전터빈도 24개라니 지 터널마다 한 개씩의 발전터널을 배치했나 보다. 발전용량도 210나 된단다. 준공 당시 이집트 발전량의 50%를 생산했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대충 이해가 될 것이다.

 

 

아스완 하이댐 관람을 마친 일행의 다음 코스는 아스완 외곽에 있는 화강암 채석장이다. 이곳에 미완성 오벨리스크라는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만들다 만 오벨리스크가 채석장 한가운데에 버려진 듯 드러누워 있단다. 참고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이 이집트 최대의 화강암 채석장이었고, 나일강이 가까워서 무거운 오벨리스크를 배에 실어 나르기가 편했기 때문이란다.

 

 

 

채석장이어선지 주변은 황량하기 짝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온통 바위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곳도 역시 입장권(EGP 80-5,600)을 산 다음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맨 꼭대기에는 초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채석장과 미완성 유적을 한데 묶어 야외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고고학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얼마쯤 올랐을까 누워있는 거대한 돌기둥이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보고자 했던 미완성 오벨리스크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3500년 전, 하트셉수트 여왕의 명으로 제작되었는데, 저 오벨리스크가 만약 완성되었더라면 높이 42m에 무게가 1,200ton이나 되는 지상 최대의 오벨리스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화강암을 자르다 균열이 생긴 탓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룩소르 카르낙 신전의 하트셉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가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기록되고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반대편에서 봐야만 그 규모나 생김새가 제대로 파악된다. 오벨리스크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네모나고 거대한 돌기둥을 말한다.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데 기둥면에 상형 문자로 왕의 공적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가 새겨지지 않았다. 거기다 기둥의 상부도 잘려지듯 금이 나가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스완 채석장의 오벨리스크는 제작이 포기됨에 따라 바닥 부분이 여전히 기반암과 이어져 있는 상태다. 비록 누워있지만 누워 있는 자체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준다. 그저 크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 어떤 기이함이라 할까. 참고로 오벨리스크는 그리스어로 바늘이라는 뜻이다. 끝으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오벨리스크는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대부분 200톤이 넘는 규모였다. 이런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문장 등을 새겼는데, 태양의 신 라(Ra) 또는 파라오의 수호신 호루스(Horus)가 등장하기도 한다.

 

 

 

오벨리스크를 조망하라고 만들어놓은 전망대 옆의 커다란 바위 위에는 돌맹이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강도가 강한 검은색 돌로 화강암의 표면을 마찰함으로써 저렇게 매끄러운 오벨리스크를 만들 수 있었단다.

 

 

 

오벨리스크를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고 난 일행들은 아까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이번에는 아예 바위언덕을 넘어버린다.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는 채석장의 전모를 통째로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부근의 채석장들은 고대 이집트의 많은 기념물 건축에 사용된 화강암을 공급했으며, 지금도 채석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고개를 넘어가다 자원공학과 출신인 형우군과 석재 채취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천공기 같은 장비가 없던 당시에 어떻게 저리 반듯반듯하게 바위를 잘라낼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현장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작은 구멍들이 일렬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도 같은 방법이었단다. 손바닥 크기의 돌로 거대한 바위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구멍에 쐐기(나무막대)를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바위가 원하는 대로 금이 간다는 것이다.

 

 

채석장을 내려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카펫과 스카프을 위주로 각종 조각품 등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놓고 있었는데 품질이 성에 차지 않아 그냥 통과해버렸다. 서재에 놓아둘 정도의 품질을 찾고 있었기에 이런 방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아스완의 일정 가운데는 펠루카 체험이 있다. ‘펠루카란 삼각형의 돛을 달고 바람의 힘을 이용해 움직이는 전통 돛단배를 말한다. 나일강은 강물이 흐르는 방향과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반대라서 돛단배인 펠루카가 수월히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일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던 이집트인들은 펠루카로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그 펠루카가 요즘은 나일강을 따라 유람하고픈 여행자들에게 낭만을 선사해 준다.

 

 

 

펠루카 투어는 짧게는 서너 시간부터 12일 동안 진행되는 것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고 협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흥정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라면 머무르고 있는 숙소 주인의 소개를 받는 것이 좋단다. 펠루카 체험을 크루즈 투어에 포함시켜 흥정할 수도 있다니 기억해 두자.

 

 

 

우리는 해질 무렵에 맞춰 펠루카를 탔다. 그리곤 일몰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강을 오르내렸다. 패키지여행이라는 특수한 여건에서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의외의 여유였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집트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으로 펠루카 체험을 꼽기도 한다. 느긋하게 강을 따라 흘러가면서 강변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집트인들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비록 그네들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강변의 풍경에서 어깨너머로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펠루카 체험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야 끝난다. 해가 떨어지자 강 건너에 있는 귀족들의 묘역에 조명이 켜지면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낮에는 그저 황금색 모래산에 불과했는데 밤이 되자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콤옴보와 에드푸를 거쳐 룩소르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타고 갈 ‘M/S Semiramis I’호다. 이제부터 나일강 크루즈(Nile River Cruise)가 시작되는 것이다. 저 배에서 23일 동안 머무를 테니 우리의 집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아니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배에서 하게 되니 우리 집이 분명하다. 하지만 웰컴 홈!’처럼 다정한 인사를 건네 오는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게 해 번거로웠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탑승한 배는 리버 크루즈이기 때문에 모든 시설을 콤팩트하게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지중해나 카리브해를 떠다니는 대형 오션 크루즈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1층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2층과 3층은 객실, 갑판 위에는 작은 수영장이 만들어져 있다. 모든 식사는 배 안의 레스토랑에서 제공된다. 음식은 중동과 서양요리가 주로 나오지만 동양인에게도 잘 맞는다.

 

 

갑판에는 작은 수영장과 썬 베드, 푹신한 소파 등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서 사용하지 못했지만 여름철에는 또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겠다. 이번엔 다른 시설들도 살펴보자. 트윈 베드(twin bed)가 놓인 객실은 널찍하고 따뜻했으며, 욕실의 온수도 풍족하게 쓸 수 있었다. 특히 레스토랑 말고도 스테이지가 딸린 라운지 바(Lounge bar)’를 갖고 있어서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제격이었다. 또 하나 질 좋은 기념품코너가 있다는 것도 장점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품질이 성에 차지 않아 고민하던 투탕카멘의 두상을 이곳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말이다. 집사람은 잠옷 삼아 입겠다면서 이집트 전통 의상을 하나 챙겼다.

 

 

크루즈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조망이라 하겠다. 크루즈는 갑판뿐만 아니라 방에서도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커튼만 제키면 나일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배가 달리는 내내 풍경화, 그것도 잘 그린 그림들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참고로 나일강은 탄자니아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해 지중해까지 그 길이가 6650나 된다. 나일을 이집트 사람들은 닐이라고 부르는데, 위대한 강 또는 큰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발원한 백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수에서 시작하는 청나일이 수단의 하루툼에서 합류한 다음 이집트의 아부심벨로 흘러 들어온다. 아부심벨을 지난 나일강은 아스완 하이댐에 의해 만들어진 낫세르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아스완을 지나 룩소르, 아슈트를 지나 카이로에 이르게 된다. 카이로는 나일삼각주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도시로, 여기서 나일강은 다시 동서로 갈라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로제타(Rosetta)로 빠져 나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다미에타(Damietta)로 빠져 나간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가 바라본 나일강의 가치는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강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농경민들에게 강을 다스리는 `치수는 삶의 기본이었다. 나일강변에 수로를 만들어 해마다 범람하는 강물을 순하게 땅으로 끌어들였다. 이집트(Egypt)라는 국명(國名)`오래된 도시를 뜻하는 `아이귀프토스라는 말에서 나왔지만, 정작 그들은 `홍수의 나라로 부르거나 `검은 땅의 나라라고 불렀다. 나일강을 따라 건설된 이집트 문명에 기후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이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일강 없는 이집트는 `앙꼬없는 찐빵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집트의 역사, 이집트의 신화, 이집트의 문화는 모두 나일강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엑소더스`홍해의 기적이니 하는 히브리의 신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역시 나일강의 산물이었다. `모세라는 말은 `물에서 건진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이집트 파라오들이 많이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의 눈물이 만든 영웅이었던 것이다.

 

 

 

나일강은 크루즈의 천국이라 할만하다. 항구마다 수많은 크루즈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항해 중인 크루즈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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