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박물관(Egyptian Museum)‘

 

특징 : 이집트 5천 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고고학 박물관(The Egyptian Museum)으로 수집(12만 점)의 충실도는 세계의 어떤 박물관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고고학박물관은 19C 프랑스인 언어학자 샹폴리용(Jean-Franois Champollion, 1790-1832)‘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집트의 역사 및 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이집트 유물의 보존 조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34년 이집트 유물보호국의 설립을 시작으로, 1858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 오거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riette: 1821-1881)‘가 유물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지배자이던 사이드 파샤(Sa'id Pasha,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부왕)‘에게 부탁하여 1863 Bulaq 지역에 유물보관소(구 박물관)을 건립토록 했다. 현재의 건물은 케디브 아바스 헬미 2(Khedive Abbas Helmy)‘가 재위하던 1897년에 착공하여 19021115일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1,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박물관은 1층은 왕조 연대별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2층은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및 왕의 묘에서 발굴된 매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에 도착하자 붉은색으로 지어진 중세 유럽풍의 2층 건물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107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다는 이집트고고학박물관(The Egyptian Museum)이다. 출입문의 상단에는 파라오의 두상(頭像)을 부조(浮彫)해 넣었는데 이중 왕관을 쓴 모양새이다. ’·하 이집트를 아우르는 통일왕국의 파라오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파라오의 양편에는 왕비로 보이는 팔등신의 미녀들을 배치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오른쪽에는 쇠똥구리동판(銅版)이 박혀있었다. 쇠똥구리 즉 스카라베(scarab)‘는 고대 이집트에서 다산과 풍작,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똥을 굴리고 가는 쇠똥구리의 모습이 마치 태양이 지구를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태양신의 사자라 여기기도 했단다. 그래서 수호부적과 인장의 도안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의미를 담았지 않나 싶다. 참고로 이집트의 우주창조론에서는 쇠똥구리가 분구(糞球)를 돌리는 것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공()은 지구를, 쇠똥구리는 태양을 의미하며 6개의 다리에 있는 30마디(실제로 이 종은 20마디이지만 아주 가까운 근연종은 30마디를 소유함)는 매달의 30일을 나타낸다.

 

 

이곳도 역시 꼼꼼한 보안검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는 약과라 하겠다. 호텔에 들어갈 때는 물론이고 열차나 크루즈선박을 탈 때도 일일이 보안검색을 거쳐야 하는 등 이집트를 여행하는 내내 보안에서 시작해 보안에서 끝난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받았다. 하긴 그 덕분에 우리가 이집트라는 낯선 나라를 마음 편히 둘러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오랫동안 테러 위험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천정이 올려다 보인다. 돔으로 되어있다는 것 말고는 특이한 게 없는데도 카메라에 담은 걸 보면 천정을 찍는 게 이젠 습관이 되었나 보다.

 

 

이집트 전도(全圖)가 붙어 있는 안쪽 벽면은 가이드들의 근무처라도 되는 모양이다. 각자가 인솔하는 무리들을 대동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5000년이나 되는 이집트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는데 어찌 옛 지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1층의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와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Greco-Roman 시대의 유물이(정문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을 것이라면 2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더 낫다.

 

 

 

1층에는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의 상을 위시해 많은 석상과 석관들이 도열하고 있다. 고대 왕조로부터 그레코로만에 이르는 유물들인데, 관람자들은 멘카우라, 하쳅수트, 람세스, 투탕카멘 등 이집트의 역사 속 왕들을 유물로 만날 수 있다.

 

 

1층 중앙에는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 BC 1390~1353 재위)’티이(Ti)’여왕의 거대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하여 훗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Akhnaton)’을 낳았다.

 

 

서기 상(The scribe, 書記 像)‘이다. 무릎에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한 손에 붓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당시 상류층(세습)이던 서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란다. 사카라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데 5왕조(BC 2450년 무렵)에 이미 문자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란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쿠푸왕의 조각상이다. 상아로 만든 높이 7.5의 좌상인데 쿠푸왕의 유일한 상이라고 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좌상으로 인해 피라미드의 주인이 쿠푸인 것을 알게 되었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의 그 피라미드 말이다.

 

 

아래의 조각상은 사제(司祭)‘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사제는 모두 대머리였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가이드는 이 목상(木像)의 눈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초롱초롱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라호테프네페르트의 조각상이다. 기원 전 257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조금 색이 벗겨진 것 빼고는 완벽했다. 이것도 역시 눈이 포인트다. 유리알과 보석을 사용해서 만들었다는데 보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면 조각상의 동공이 따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참고로 당시에는 파라오가 아니면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라호테프왕자는 그의 부인을 사랑하여 몰래 만들었단다. 그래선지 무덤에는 조각의 뒷면이 무덤의 앞면을 향하도록 놓아두었더란다.

 

 

난장이 세네브(Seneb)와 그의 가족 상, 세네브는 기원전 2520년경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에서 고위 법원 관리로 일했던 난쟁이라고 한다. 그가 앉은 자리의 아래에는 자녀들을 새겨 넣었다. 그건 그렇고 고대 이집트의 유물로 발견된 조각품들 중에는 의외로 신체장애자들의 형상이 많다고 한다. 왕족 또는 귀족이었을 이들이 근친혼의 풍속을 갖고 있었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18왕조(BC 1570-1293)6번째 파라오였던 하셉수트 여왕(Hatshepsut)이다.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여성 파라오인 그녀는 투트모스 1(Thutmose I)’의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적출 왕자가 없을 경우 공주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고 공주의 남편이 파라오의 자리를 상속할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 법에 따라, 그녀는 투트모스 1세의 서자와 결혼했다. 남편 투트모스 2세조차 적출 공주 한명만 남긴 채 요절하자, 법에 따라 어린 서자가 투트모스 3로 즉위하였다. 핫셉수트는 처음에는 투트모스 3세의 섭정을 하다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정통 파라오로 등극하여 약 2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하셉수트는 파라오가 된 후부터 남성의 모습으로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그녀의 목상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턱수염을 달고 있었다.

 

 

 

 

 

파라오의 내장을 담았던 도자기(카노푸스), 미라를 만들면서 떼어낸 뇌나 내장을 담았던 항아리인데 대리석이나 상아를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나오는 석판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아크나톤(Akhenaten, 아멘호테프 4)‘가 아닐까 싶다. 룩소르신전을 지은 아멘호테프 3(Amenhotep )‘의 아들인 그가 이전까지 행해오던 다신 숭배(아몬, Amon)을 버리고 유일신인 태양신(아톤, Aton)을 섬기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으니 말이다. 수도인 룩소르를 버리는 천도(遷都)까지 단행한 그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전통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이상적 평화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다. ! 석판에 그려진 여성은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Nefertiti)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위 석판의 주인공인 아크나톤(Akhenaten)’이다. 18왕조의 9대 파라오였던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와 그의 제1왕비 티예(Tiye)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멘(Amen, 테베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커지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제어하려 했다. 그래서 다신교인 종래의 이집트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도입했다. 또한 아멘 숭배와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수도를 테베에서 오늘날의 알-아마르나 지역으로 옮기고 아케타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나 권력 축소에 불만인 신관들에 의해 종교개혁은 실패했고, 아크나톤이 죽은 뒤 아멘 신앙이 부활하였으며 수도도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반듯하니 잘 생긴 외모의 아크나톤(Akhenaten) 흉상이다. 하긴 그랬으니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는 네페르티티(역삼각형 모자를쓴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를 왕비로 삼지 않았겠는가. ! 아크나톤은 비정상적인 몸매로 표현되기도 한다. 파라오의 순수 혈통을 위해 근친결혼이 성행했었던 탓에 열성 유전자가 만들어졌고, 그로인해 여자 같은 몸매를 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4왕조의 4대 파라오인 카프레(Khafre)’의 좌상(坐像)이다. 2대 파라오인 쿠푸(Khufu)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기자 지역에 대형 피라미드를 쌓은 인물이기도 하다.

 

 

 

 

세트(Seth)’의 상이 아닐까 싶다. 혼돈의 신이자 악의 신인 그를 이집트인들은 땅돼지의 머리와 닮은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형인 오시리스를 살해해 나일강에 버리고 왕위에 올랐던 그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아래 사진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파라오의 관석(冠石, Capstone)이라고 한다.

 

 

나르메트 팔레트(Narmer Palette)‘는 작은 석판에 불과하지만 이집트 미술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르메르 상이집트 왕이 적의 머리채를 잡고 내리치는 형상으로 이집트의 통일 과정을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다. 호루스를 상징하는 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의 위에 앉아있는가 하면, 신성시하던 소()는 가장 위쪽에 새겨져 있다. 나일강 상류의 상이집트와 하류의 하이집트로 나뉘어 있던 초기 이집트는 BC 3100년 상이집트의 나이메르 왕에 의해 통일된다.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것은 연꽃과 흰색의 위로 긴 타원형의 파라오관이고,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것은 파피루스와 원통형으로 된 붉은색의 파라오관이다. 통일된 이후에는 빨강 하이집트 관속에 하얀 상이집트 관을 겹쳐서 썼다.

 

 

당시의 글과 그림이 적힌 파피루스도 전시되어 있다. 4천 년을 훌쩍 넘겼는데도 당시의 색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참고로 파피루스(papyrus)5000년 이전부터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이것을 종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700년 무렵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당시 이 파피루스를 지중해 연안 지역에까지 수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 역사에서 파피루스는 신성한 식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햇살 모양의 꽃이 태양신 아몬 레(Amon Re)를 상징하고, 삼각형의 속 모양이 영원성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이 파피루스는 성경에서 다섯 번 정도 언급된다. ‘Bible(성경)’이라는 단어나 종이를 나타내는 Paper도 파피루스에서 유래되었다.

 

 

잘생긴 스핑크스도 여러 점 진시되어 있다.

 

 

호루스 신과 어린 람세스 2라고 한다. 자신이 호루스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다.

 

 

 

새로운 문명을 만났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집사람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자유스러움에 푹 빠져 나이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어린 람세스 2세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천진난만하게 따라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2층 전시실에는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되었다는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영국의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캐너번 경의 후원을 받아 6년의 노력 끝에 18왕조의 파라오인 투탕카멘(Tutankhamen)’의 왕묘(王墓)를 발견했다. 그는 도굴이 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이 무덤에서 3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한다. '파라오의 영원한 휴식을 방해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의 저주를 받는다'는 속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때 발견된 유물들 일부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아래 사진은 자료사진을 빌려왔다)

 

 

투탕카멘8살에 즉위해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한 단명(短命)의 파라오였다. 어린 나이였던 탓에 사제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간 불운한 임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물들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차, 목관, 황금관, 황금 마스크, 알라바스타 항아리, 침대, 의자, 우산 등 전시되어 있는 유물 하나하나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참고로 아래 사진은 파라오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존재인 카(Ka)의 조소상이다. 머리에는 가발과 두건을 쓰고, 이마에는 코브라 장식을 했다. 어깨를 덮어 가슴까지 내려오는 상의를 걸치고, 쉔디트로 알려진 스커트를 입었다. 양손에는 곤봉과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엄지발가락 사이로 줄을 꿰는 샌들을 신었다. 키가 192로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편인데 피부는 검고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은 황금색이다. 검은 색은 오시리스와 관련이 있고, 황금색은 파라오와 관련이 있단다.

 

 

투탕카멘의 옥좌란다. 등받이에 투탕카문 부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 팔걸이 부분에는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투탕카문의 카르투쉬가 새겨져 있고, 그 앞으로 사자의 머리가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리의 아랫부분은 사자의 다리를 모방했다. 전체적으로 황금색이며, 필요한 곳에 갈색, 하늘색, 파란색을 사용했다. 의자 앞에는 발판이 놓여있다. 화려함이나 정교함에서 이 보다 훌륭한 의자를 또 있을까 싶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체를 담은 옥으로 만든 용기와 그 용기를 감싸고 있는 닫집이다. 옥으로 만든 용기는 내부에 다시 네 개의 용기를 넣었는데, 그곳에 투탕카멘의 몸에서 나온 간장, 허파, , 내장을 넣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이시스, 네프티스, 네이트, 셀케트 네 신이 지킨다. 이들 용기는 다시 닫집 안에 넣어지게 되며, 이 닫집은 호루스의 딸로 알려진 네 여신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넣는 관 집도 네 개나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폭과 길이 그리고 높이가 148×290×190에서 328×508×275까지 커진다. 이들은 6두께의 오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문이 있고, 외부에 부조 형식으로 그림과 문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관 집의 내부 벽에는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나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투탕카문의 미라와 황금마스크를 감싸는 관도 두 개가 있다. 이들 관은 나무에 보석과 유리로 외부를 치장했다.

 

 

당시의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유적지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들이니 당연히 미니어처(miniature)이다.

 

 

파라오가 사용하던 놀이기구도 보인다. 가이드는 장기와 유사한 서양의 놀이기구인 체스(chess)의 원조라고 했다.

 

 

검은 색 자칼 모습의 아누비스(Anubis)죽음의 신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으로 여겼다. 때로는 자칼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몸매로 나타나 오시리스 앞에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역할을 한다.

 

 

미라도 전시되어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가 최근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62호 묘로 되돌아갔다던데, 관람객들을 위한 대용품으로 전시해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에는 미라를 넣었던 목관과 석관을 중심으로 기타 유물들이 널따랗게 전시되어 있었다. 파라오들의 미라’ 11구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추가 요금을 내야만 입장이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이 박물관은 약 12만 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많다면 많겠기만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임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유물들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유물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부터 시작해 영국, 프랑스 등 해외 각국으로 약탈돼 나갔다.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은 그렇게 확보한 이집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들이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비석과 잘린 오벨리스크들이 마당에 널려있다. 건물 앞으로 나오니 십여 개의 좌상(坐像)도 보였다. 이 박물관을 만드는데 기여한 인물들일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epilogue),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은 썩 편하지 않았다. 진열되어 있는 모든 유물들이 하나같이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한 것들이지만 어느 것 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언제 발굴된 것인지, 고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도대체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시대별로 모아 놓고 해석은 관람객이 알아서 하라는 모양이다. 그러니 가이드의 뒤만 쫄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다고 해도 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설명을 일일이 기억해 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대충대충 흘려들으며 나 혼자 아이 서핑(eye surfing)’을 해버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