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금)-29(토)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박)→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사카라(Saqqara)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
특징 : ① 이집트(Vietnam) :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해진 나일 강 유역에 일찍부터 도시 국가를 형성하며 살았다. 농토를 확대하기 위해 시작된 강력한 공동체는 기원전 3000년경 여러 도시 국가들을 통합한 통일 왕국을 만들어 냈으며, 폐쇄적인 입지조건 덕분에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에 정복되기까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과 후기 왕조 시대로 구분된다. 고왕국 시대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달한 시기로 파라오가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반면 중왕국 시대에는 파라오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기원전 1600년경 힉소스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다가 신왕국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는데, ’람세스 2세‘ 때는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며 지중해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7세기 이후 이슬람 문화권에 편입되었다가 18세기부터는 프랑스·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왕국을 세웠으나 1952년 7월 쿠데타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② 사카라(Saqqara) : 수도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4km쯤 떨어진 나일강 좌안(左岸)에 위치한다. 기자(Giza)·아부시르(Abusir)·다수르(Dahshur) 등과 함께 이집트 고(古)왕국시대의 피라미드 소재지로 유명하며 1979년에는 한꺼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제3왕조(BC 2650경~2575경)의 2번째 왕이었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각뿔 모양이 아니라 직육면체 모양을 여러 층으로 쌓아올렸는데 이게 이집트 피라미드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이곳에서는 이집트 역사의 초기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진흙벽돌 무덤(마스타바)들이 발견되었다. 분묘 안에서 발견된 저장 단지에는 제1왕조 왕들의 이름이 씌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왕들은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 묻혔기 때문에 이 무덤들은 당시 고위 관리들의 것으로 추정된다.
▼ 이집트 여행은 사카라로부터 시작됐다. 카이로에서 20㎞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도심을 통과했는데도 악명 높은 카이로의 교통체증을 겪지 않고도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슬람의 공휴일이 금요일과 토요일인데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라서 그렇단다. 공휴일에 도심이 텅 비는 것은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 차에서 내리면 피라미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많이 어색하다. 사진으로 접해오던 사각뿔 모양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저 피라미드의 주인은 이집트 제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조세르(Djoser, BC 2668-2649 재위)‘이다. 또한 저 피라미드는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이자 최초로 바위를 사용한 피라미드이기도 하다. 참고로 ’조세르‘는 왕권과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시나이반도와 누비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고대 이집트왕조의 기틀을 닦고 국력을 튼튼히 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석조 건축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사카라 남부에서 찾아낸 제19왕조 시대의 한 비문에 조세르를 ‘돌을 연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행한 사람은 ‘이모텝(임호테프’이라는 재상이었다. 임호테프의 의미는 ‘가득 차서 오는 자’인데 ‘하 이집트 왕의 상서, 상 이집트 왕 바로 아래의 수석, 대왕궁의 행정관, 세습 귀족,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은 조각가요, 돌 항아리 제작자’라고 기록된 초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로 보아 이모텝은 고왕국 시대의 천재 재상이자 불멸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겠다.
▼ 피라미드 묘역으로 들어가는 탐방로는 장제전(mortuary temple)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왕들을 예배하고 죽은 왕들에게 바칠 물건과 음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고왕국(BC 2575경~2130경)과 중왕국(BC 1938~1600경)의 장제전은 보통 피라미드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기둥이 늘어선 개방된 정원, 창고, 5개의 가늘고 긴 사당, 위장문과 제단이 설치된 예배실이 있었단다. 예배실 안에서 사제는 매일 장례의식을 거행하고, 죽은 왕의 카(ka : 수호영)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왕국 시대(BC 1539~1075)가 되면서 왕들은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묻혔으나, 근처에 독립된 장제전을 무덤과 분리해 짓는 일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 밖에서는 건물의 거대한 외벽처럼 밋밋하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열주(列柱)들이 늘어선 회랑(回廊)이 나온다. 한때 우람한 기둥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신전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높이 6.6m의 기둥 20개만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이런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는 점이 ’조세르 피라미드’의 특징이라고 한다. 다른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여러 부속 건축물들이 포함된 복합단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묘역은 이후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 기둥을 살펴보면 세로로 줄무늬가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석재를 쓰기 전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나무 묶음을 건물의 기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풍조는 석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사진처럼 파피루스 묶음 형태의 돌기둥 무늬로 응용되었다. 이런 무늬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등 도리아식(Doric Order) 기둥에서도 발견된다. 이집트의 건축기술이 그리스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일 것이다.
▼ 장제전의 돌기둥 사이에는 수십 개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 이집트를 구성하던 43개 부족의 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행사 때 찾아온 각 부족의 사신들은 자신의 부족에 해당하는 방에서 머물렀단다.
▼ 장제전을 지나면 엄청나게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오늘의 주인공인 ‘조세르 파라오(재위 : BC 2668-2649)의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다. 조세르(Djoser)는 그의 출생명으로 후일 ‘성스러운 몸’이라는 뜻의 ‘네체리케트(Netjierichet)’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스식 이름인 ‘토스르토스’로도 불린다니 기억해 두자. 아무튼 선왕인 사나크테의 동생인 조세르는 19년을 통치하였으며, 그 기간에 저 계단피라미드와 같은 대규모건설공사를 여럿 시행했단다.
▼ 왼편에 보이는 계단부터 올라가고 본다. 아무래도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 피라미드의 제 모습이 나타날 것 같아서다. 전체적인 윤곽을 먼저 살펴본 다음 피라미드로 다가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 주어진 자유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 그런 내 예산은 적중했다. 조금 전에 바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또렷이 보이는 것이다.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는 모두 여섯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네 개였는데 공사 중에 두 개를 추가시켰다고 한다. ‘조세르 파라오(재위 : BC 2668-2649)’가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래 산 것이 설계변경의 이유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으나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덕분에 높이가 62m에 이르는 현재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된 것은 분명하다. 기초부도 동서길이 125m에 남북길가 109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 저 피라미드의 북쪽 입구에서 조세르의 거대한 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세르의 모습은 석상이 소장된 ‘카이로박물관’에 가야 살펴볼 수 있는데 파라오가 쓰는 무거운 가발을 머리에 쓰고 턱에도 파라오 특유의 턱 장식이 붙어 있는 등 이집트 파라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단다. 하지만 원래의 석상에 박혀있던 갖가지 보석은 도굴꾼들이 파내갔다고 한다. 덕분에 눈 부분이 움푹 들어가면서 더욱더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한다지만 말이다.
▼ 안내판에는 이곳을 ‘Step pyramid’로 적고 있었다. 최초의 피라미드이자 최초로 바위를 사용했다면서 계단 모양으로 쌓아올린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맞다. 이집트인들이 접대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의자인 마스타바(Mastaba)의 구조를 확대한 것이 ’조세르 피라미드‘이다. 정육면체 블록들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계단 피라미드 구조를 완성했다. 그 사이사이를 메꾸면 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 즉 기자에 있는 ’대피라미드‘ 모양으로 변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피라미드의 반대편에는 메마른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파헤쳐지거나 뭔가를 복원하고 있는 현장이 곳곳에 널려있다. 맞다. 이곳은 이집트의 광대 한 고대 매장지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Memphis)의 묘지 역할을 했었다. 이곳에 있는 5·6왕조 시대의 피라미드나 왕비·재상들의 마스타바(Mastaba)에서는 비문과 조각물 등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부근의 멤피스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들과 함께 고대 이집트유적·유물의 보고로 평가된다. 그러니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황무지를 보다가 문득 조세르가 이집트에 찾아왔던 극심한 가뭄을 해결했다는 어느 기록을 떠올려본다. 7년의 기나긴 가뭄에 시달리던 조세르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상이었던 ‘임호테프’의 자문을 받아 나일강의 남쪽 끝 엘리판티네 섬에 ‘크눔(Khnum)’ 신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자 비가 쏟아지면서 막혔던 나일강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아래 사진에서 산등성이처럼 보이는 곳, 그러니까 조세르 피라미드 앞쪽으로 100여m를 걸어가면 제5왕조 마지막 파라오의 무덤인 ’우나스 피라미드(Pyramid of Unas)‘가 나온다. 최초의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가 발견됐다고 해서 고고학계의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피라미드다. 이곳에 있는 ’피라미드 텍스트(아래 두 번째 사진)‘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종교적 주문(呪文)을 담은 문자다.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야 만나게 되는 이 텍스트는 청색과 녹색 물감으로 그린 상형 문자다. 모두 228개 주문으로 이뤄진 텍스트에는 이집트인의 내세관과 파라오에 대한 축복, 신과 파라오를 결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내부에선 발견되지 않은 것이어서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단다. 하지만 난 ’우나스 피라미드‘를 가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거기다 가이드로부터도 그런 정보를 듣지 못했으니 어찌 가볼 수 있었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공부를 좀 해두었어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못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 언덕에는 십여 마리의 낙타와 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기로 했다. 가끔 떨어져서 부상을 입는 사고가 생긴다는 가이드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관광지 근처에서 서성이는 전통복장의 현지인들도 조심하라고 했다. 친한 척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찍자고 하는데, 응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돈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경고를 무시한 일행 가운데 몇 명은 눈을 뻔히 뜨고도 10불 씩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 저 멀리 아까 들어왔던 장제전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왼편에 보이는 건물로 가볼 차례이다.
▼ 위에서 얘기한 장제전의 왼편에 이르니 반쯤 복원된 ’세드(Sed) 신전‘이 있다. 파라오가 내세에 위대한 신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기원하던 신성한 장소로 직선과 곡선 형태의 암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인 '세드 축제(Sed Festival)'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 신전을 받치던 돌기둥 세 개만 남아 당시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 이곳에서 열리던 ’헤브-세드 축제(Heb-Sed festival)‘는 BC 3000년 무렵 이집트 제1왕조를 창건한 메네스(Menes)가 시작했다. 파라오의 재위를 기념해 3년 마다 열었는데, 의식을 통해 왕국의 통일을 재차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발견된 수많은 부조물과 그림들, 그리고 이곳 헤브세드 축제 유적지를 통해 축제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왕은 먼저 여러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 뒤 왕관을 썼다. 처음에는 상이집트의 흰색 왕관을 쓰고 다음에는 하이집트의 붉은색 왕관을 썼다. 마지막으로 왕은 동물의 꼬리가 뒤에 달린 짧은 치마를 입고 4번에 걸쳐 의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호루스 신과 세스 신을 경배하는 신전으로 갔다.
▼ 피라미드 주변은 대체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피라미드와 함께 복합단지를 이루던 부속건물들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상태로 마무리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2%, 아니 20%는 부족해 보였다. 이렇게 무너져 내린 건물터들은 이곳 말고도 여럿 눈에 띄었는데, ’조세르 피라미드‘만이 갖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 피라미드만 달랑 있는 게 아니라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벼락 안에 장제전과 신전을 비롯한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들어있는 일종의 ‘피라미드 콤플렉스(Complex, 복합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 왼편은 흔적만 남아있다시피 한 신전의 담벼락이다. 피라미드는 높이가 10m쯤 되는 요철부가 있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이 담벼락에는 13개의 가짜 문과 남쪽 끝자락에 1개의 진짜 문이 있었는데,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장제전이 진짜 문이란다. 현재도 유일한 출입문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 모퉁이를 도는데 현지인이 손짓을 한다. 그리고 발목만 남아있는 석조상을 가리키며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의 석상이 있었던 자리라고 일러준다. 그리고는 안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거부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무엇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 이번에는 피라미드로 가까이 다가가 본다. 피라미드는 하도 높아서 끝이 안보일 정도이다. 높이 60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144m)에는 못 미치지만 이전 파라오의 묘에 비해선 압도적인 크기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는 세계 건축역사의 한 장을 이루는 인류 최초의 피라미드식 석조건축물이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피라미드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원형에 가깝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 피라미드는 네모진 돌들을 쌓아올렸다. 당시의 건축술은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모텝이 처음으로 석재(石材)를 사용했단다. 태양열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석재는 너무 덥기 때문에 주거시설의 재료로는 부적합하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석재를 사용한 것은 왕가(王家)와 마찬가지로 영원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 겨우 첫 번째 단, 그것도 중간쯤까지 올라갔을 뿐인데 까마득하게 높아 보인다.
▼ 피라미드를 벗어나려는데 꽤나 먼 곳에 서있던 또 다른 현지인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그곳에도 볼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가가니 석실 안으로 나를 이끌면서 손짓발짓을 총 동원해가며 설명을 해준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말이다. 눈만 멀뚱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아예 벽면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짚어주기까지 한다. 사진이라도 찍어두라는 모양이다. 그래 당신도 수고료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소이다.
▼ 피라미드의 앞마당은 엄청나게 넓었다.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이 까만 점으로 보일 정도다. 고왕국 시대에는 저 마당에서 ’왕위갱신제(Heb Sed Jubilee)‘라고 불리는 세트축제(Sed festival)가 벌어졌다. 이 축제는 나일강의 범람이 끝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의 첫달, 첫날에 열렸다고 한다. 파라오는 이때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통치를 해왔고, 앞으로도 통치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사를 거행했다. 상·하 이집트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체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로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나타내는 두 개의 반월형 표적 사이를 오가며 달렸단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피라미드를 쌓은 ’이모텝(임호테프)‘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보자. ’이모텝‘하면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 ’미이라‘에서 나오는 탐욕스러운 신관을 연상할 것이다. 저주와 분노를 불처럼 터뜨리던 그 ’이모텝(임호테프)‘ 말이다. 하지만 ’이모텝‘은 ’조세르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공사를 맡아서 진행한 재상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었던 피라미드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에 힘입어 완성됐다고 한다. 그는 신관이자 천문학자이며 서기 등의 다양한 칭호로도 불리었다. 그만큼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던지 '건축의 신'이나 '창조의 신 프타의 아들'로 기록될 정도였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는 의학의 신으로까지 모셔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할리우드 영화는 마치 악의 화신인 것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서구적 상술이 만들어낸 허구라 하겠다.
▼ 이틀 밤을 머물렀던 ’람세스 힐튼 호텔(Ramses Hilton Hotel)‘
카이로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있는 36층짜리 초고층 호텔로 뛰어난 접근성으로 인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객실의 청결도나 편의시설의 종류, 제공되는 서비스 등 호텔의 수준도 뛰어나다. 4성급 호텔이나 다른 나라의 5성급 호텔로 보면 되겠다. 일회용품 제공도 완벽했다. 비누나 샴푸는 물론이고 치약과 칫솔까지 제공된다. 면도기 빼놓고는 모두 다 비치되어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방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 따로 돈을 내야한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긴 공짜가 없는 게 이집트 여행의 특징이니 어찌 공짜 와이파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 이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조망이 아닐까 싶다. 36층의 초고층 건물답게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층건물이 가득한 시내 중심가는 물론이고 나일강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만 도시 전체가 뿌옇게 보이는 점은 아쉬웠다. 지금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시기가 아니니 미세먼지가 아닐까 싶다.
♧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 나라의 ‘창조신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에 태양신인 라(Ra)가 딸 마아트(Maat)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이집트를 세우고 다스렸다고 한다. 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는 지혜의 신인 토트(Thoth)왕과 결혼하여 아들 '오시리스', '세트'와 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는다. 이들은 성장하여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한다. 그리하여 오시리스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는다. 세트는 형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데, 오시리스 사이즈에 맞는 관을 만들고, 누구든지 관에 들어가 사이즈가 맞는 사람에게 관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관을 닫고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기적의 힘으로 남편을 지하 세계에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낳는다. 호루스는 자라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되찾아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오시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어 영생을 심판하는 신이 되었고, 이시스는 사랑과 여신으로 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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