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대만 여행
여행일정 : ‘17. 12. 12(화) - 15(금)
여행국가 : 대만
여 행 지 : 타이페이(용산사, 고궁박물관, 101층 전망대, 스린야시장, 시먼당거리), 화련(태로각협곡, 칠성담 해변), 지우펀, 스펀, 야류 지질공원
여행 첫날 오후 : 타이페이 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
특징 :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은 중국의 5,000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타이페이의 명소이다. 이 박물원의 역사는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혁명이 청나라 정권을 전복시키고 마지막 황제 푸이가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자금성은 황제가 거처하는 공간이 아닌 박물관으로 계획된다. 이에 따라 청실선후위원회에서 자금성에 들어가 문물들을 조사·정리하였고, 1925년 10월 10일에 정식으로 고궁박물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자금성 안에 보관되고 있던 문물들은 역대 왕조의 궁중 소장품들을 물려받은 것으로 ’화하문화(華夏文化)‘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33년 만주 사변 및 중일 전쟁 등으로 박물원의 유물들이 안전에 위협을 받게 되자, 주요 보물들은 상자에 담겨져 중국 남방으로 옮겨진다. 상해, 안순, 낙산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남경에서 보호되던 유물들 60여 만 점은 일본이 세계 2차 대전 패퇴 후 안정을 찾는 듯하였으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내전(国共内戦)에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유물들을 함께 옮겨 간 것이 지금의 타이페이 고궁 박물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고궁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알려진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 그리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다. 크기는 비록 다른 박물관들에 비해 작지만, 소장한 문물의 양과 질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단다. 소장하고 있는 보물의 수량이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2배가 넘는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70만 점에 이르는 이 유물들은 3개월에서 6개월 단위로 교체해가면서 한 번에 약 15000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렇게 교체되는 것을 다 보려면 30년은 족히 걸릴 거란다. 물론 매번 교체할 때마다 모든 작품들을 교체하는 것은 아니고, 인기가 많은 몇몇 작품은 상설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 작품들을 특정한 테마(thema)에 따라 전시하고 있다.
▼ ‘고궁박물원’의 정문이다. 빗줄기가 제법 거세서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공개된 자료사진으로 대신해 본다. 정문의 상단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문장이 적혀있다.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사상인데,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공평하다’는 뜻으로 대만의 국부인 손문(孫文)선생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런 손문선생의 흔적들은 대만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빗줄기 때문에 송대와 명대의 전통 정원을 본떠 조성했다는 지선원과 지덕원, 후락원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중국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고궁박물원‘은 이곳 타이페이 말고도 다른 곳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북경의 있는 ’고궁박물원(紫禁城)‘이다. 그렇다면 고궁도 없는 이곳 타이페이의 박물원에 ’고궁(古宮)‘이란 이름을 갖다 붙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이 중국 북경의 고궁(古宮), 즉 자금성(紫禁城)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거기다 영토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국 5,000년의 역사를 잇는다는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함도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자금성을 본떠 지은 박물원 건물의 외관(外觀)에서도 그런 의도가 엿보인다. 지나가는 길에 세간에 떠도는 얘기 하나를 옮겨본다. <북경에는 박물이 없고, 타이페이에는 고궁이 없다.> 자금성의 유물들이 얼마나 빈약했으면 이런 얘기까지 떠돌겠는가. 물론 장제스가 대부분의 유물들을 몽땅 가져와버린 게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 본토를 휩쓸었던 ’문화대혁명‘에 의한 수난과 훼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손문선생의 흔적은 박물원 안에서도 만나게 된다. 지하 1층 매표소 옆에도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긴 이곳 고궁박물원이 처음 개장했을 때의 이름도 손문 선생의 호인 중산을 따서 ‘중산박물원’이라고 불렸다니 더 말해서 뭐하겠는가.
▼ 표를 구입했다고 해서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철저한 보안검색이 다음 차례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폭발물 등 위험 물품은 거론할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는 뒤로 매는 가방까지도 검색대를 피해가지 못한다. 가방을 둘러맬 경우 그 높이가 어린이들의 얼굴과 엇비슷해져서 자칫 잘못하다간 어린이들이 부상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단 플래시(flash)를 터뜨리는 행위는 금지된다.
▼ 관람은 3층에서 시작해서 2층과 1층을 차례로 둘러보기로 한다. 오르내리는 불편을 최대한 줄여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물들이 3층에 몰려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시관은 1층에서 3층까지 총 3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은 특별전시관 및 장식품, 가구 전시장이 자리하고, 2층에는 서화, 동기, 도자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에는 동기, 청동기, 옥기, 법기,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개원 당시만 해도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시대별로 분류하여 전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이 학술적 가치가 있는 상고시대 유물들 보다는 화려하고 섬세하여 볼거리가 많은 후대 왕조의 유물들에만 관심을 갖자 아예 시대적인 구분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주(西周) 말기에 만들어졌다는 ‘모공정(毛公鼎)’이다. ‘정(鼎)’은 세발솥을 뜻하는데, 원래 고대에 고기를 삶는 냄비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 되었다. 모공정은 안쪽에 32행 497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명문 중 가장 길다고 한다. 또한 문장이 고아하고 서체도 뛰어나 국보로 칭송받는다. 내용은 주나라 왕이 이 그릇을 제작시킨 모공(毛公)에게, 강기(綱紀)의 숙정(肅正), 정치의 부흥을 명(命)한 것이 적혀 있는데, 그 시기는 선왕(宣王, 재위 B.C.827~B.C. 782) 무렵의 일로 추정된다. 아무튼 가이드의 칭찬이 가장 많았던 작품인데도 몰려드는 관람객들 때문에 사용할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아 자료사진을 올려봤다.
▼ 다음은 이곳 고궁박물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표 유물 가운데 하나인 취옥백채(翠玉白菜)이다. 실제 배추와 크기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어찌나 싱싱한지 어쩌다 손톱으로라도 건들면 자칫 물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 작품이 유명해진 것은 옥재(玉材)의 자연미와 정교한 조탁미를 겸비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문의 청백과 자손의 변영을 의미한다는 취옥백채는 황실의 혼수용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른 설도 있다. 옥의 푸른 부분이 번성이 아닌 청나라를 의미해서, 배추 위에 있는 여치가 배추의 푸른 잎을 갉아먹는 것이 청나라의 쇠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청나라에서 이 취옥백채를 만든 예술가를 수배했으나 그는 이미 외국으로 도피해버린 후였다고 전해진다.
▼ 취옥백채는 북경 고궁(자금성) 내의 영화궁에 있던 보물로써, 청 말기 광서제의 왕비인 근비의 혼수용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청대의 예술가가 한 덩어리의 옥을 교묘하게 조각하여 녹색 부분은 배추 잎으로, 백색 부분은 배추의 뿌리로 조각하였으며, 잎이 구부러져 말린 모습이나 배추의 근맥이 매우 현실적이다. 위쪽에는 두 마리의 여치가 기어 올라가고 있는데, 여치는 번식력이 좋은 곤충 중 하나로, 시경에도 여치가 다른 이들의 자손 번식을 축복한다는 시가 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자손 번영을 상징했었다. 여기에 가문의 청백을 상징하는 배추가 더해져 혼수로 자주 쓰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옥의 하얀 부분인 줄기의 투명함은 신부의 순결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 그 옆에는 육형석(肉形石)이 전시되어 있다. ‘홍샤오로우’ 혹은 ‘동파육형석’이라고도 불리는데, 홍샤오루우나 동파육은 모두 돼지고기로 만든 중국의 전통음식이다. 한국의 수육이나 족발과 비슷한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영락없는 고깃덩어리이다. 차가운 돌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젓가락으로 푹 찌르면 쑥 들어가면서 육즙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삶은 고깃덩어리를 연상시킨다. 비계살의 층이 분명하고, 살결이 또렷하며, 모공의 형태가 완연하여 이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설마 이게 딱딱한 돌덩어리일까 하는 의심이 들게 분명하다. 사실 이 육형석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란다. 일종의 불투명한 옥수인 마노석 위에 층층이 쌓인 무늬 결들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장인들이 매우 정교하게 가공해 낸 것이란다. 옥수 표면에는 아주 세밀한 구멍을 내어 실제 돼지의 피부와 같이 모공의 효과를 연출하였고, 최상층 부분에는 갈색으로 색을 입혀 간장에 절인 돼지 껍질의 느낌을 한층 더 살려냈다고 한다.
▼ 고궁박물원에서 전시하고 있는 모든 유물들의 앞에는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문물의 이름과 간략한 설명 등이 쓰여 있는 작은 팻말이 놓여있다. 이 작은 설명 팻말 위에는 문물의 명칭뿐만 아니라 문물의 일련번호와 함께 2개의 한자가 있는데, 이는 각각 문물의 출처와 분류 유형을 의미한단다.
▼ 아래 사진들은 가이드가 집중적으로 설명을 해주던 전시물들이다. 아쉽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얼마 되지 않아 글로 옮기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 여행지부터는 녹음기라도 들고 다녀야 할 모양이다. 내 나이 이미 예순 하고도 다섯, 이미 경노우대의 대열에 들어섰다. 많은 걸 머릿속에 넣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나이라는 얘기이다.
▼ 아래 전시품은 옥벽사(玉僻邪)와 옥양(玉羊)이다. 벽사는 용(龍)의 아홉 번째 아들로 사자의 몸통과 봉황의 날개, 용의 얼굴, 그리고 기린의 꼬리를 갖고 있는 전설의 동물이다. 이 벽사는 옥황상제가 매우 아끼던 동물 중 하나였는데 총애를 한 몸에 받다보니 교만해져서, 아무 곳에나 배설을 하고 다니다 옥황상제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후로 항문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만물(萬物)을 삼키고도 밖으로 배출을 하지 않는단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를 않으니 재물(財物)을 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귀물을 이재(理財)에 밝은 중국인들이 가만 놓아둘 리가 없다. 숭배의 대상이 된지 이미 오래라는 얘기이다. 그건 그렇고 이 동물은 액막이와 행운을 가져다주는 역할도 해주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집 모퉁이에 벽사를 세워두는 풍습이 있단다.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기념품으로 소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참고로 이 작품은 한나라 때 청백옥을 깎아 만들었으며 가슴에는 황제가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 청나라 진조장(陳祖章)이 조각했다는 ‘감람핵주(橄欖核舟)’도 눈에 띈다. 청대의 옹정제 때 궁정장인(宮廷匠人)이었던 진조장이라는 사람이 높이 1.6cm에 길이가 2.4cm에 불과한 천연의 작은 올리브 씨앗을 통으로 활용하여 조각한 작은 배(船)이다. 상아나 과일의 씨앗에 조각하는 것이 특기였던 진조장은 올리브 씨앗의 절반은 그대로 살려 배의 아래 부분을 만들고, 그 위쪽은 다시 안으로 파 내려가 배의 내부 및 문양들과 그 안에 타고 있는 탑승객들을 조각했다. 설치해둔 현미경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배 안에는 소동파(蘇東坡)를 비롯한 쌀알 크기의 인물 8명은 물론 여닫이 창문과 탁자, 의자, 심지어 탁자 위의 잔과 접시까지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이 작은 배의 바닥에 있다고 한다. 무려 3백 57자(字)에 달하는 소동파의 ‘후적벽부(後赤壁賦)’ 전문(全文)과 함께 진조장의 서관 및 제작일자까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배와 사람의 윤곽이야 어느 정도 보이지만, 아래의 적벽부는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정교해서, 왜 그가 당대 최고의 장인으로 손 꼽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단다.
▼ 4대 전시품 중의 하나라는 ‘옥병풍(玉屛風)’이다. 비취(翡翠)와 오목(烏木)으로 만들어진 이 ‘팔폭병풍(八幅屛風)’은 청나라 서태후가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각 비취에는 섬세한 문양과 함께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는데, 특이하게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반면에, 안에서는 바깥쪽의 동정을 살펴볼 수가 있단다. 또한 더운 여름에 이 병풍을 통해서 바람이 들어오면 공기가 차가와진다고 한다. 빛의 색도 조각문양에 따라 달리 들어온단다. 병풍 앞에 선 가이드가 이 병풍에는 한국의 재벌 ‘이병철’씨와 얽힌 일화가 있다고 전한다. 그가 이 병풍에 흥미를 느껴 값을 물어본 일이 있는데, 이때 박물원장이 돈은 필요 없고 제주도 땅과 바꿀 수는 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냥 웃자고 만들어낸 얘기겠지만 얼마나 고귀한 유물인지를 방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 상아로 조각된 청나라 중기의 작품 ‘사층투화제식합(四層透花提食盒)’이다. 상아로 만든 4단 찬합인데, 뚜껑의 무늬 장식에는 인물과 동물, 새, 초목, 집, 정자, 배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종이보다도 더 얇고 투명하며 정교하고 우아하게 장식된 이 상아 조각품이 정말로 음식물을 담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 조형만큼은 찬합으로서의 실용성을 구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청나라 말기 극도로 사치스러웠던 서태후가 이화원으로 나들이 갈 때 딤섬 등 음식물을 담아갔다는 설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찬합의 배경이 되는 상아 부분을 매우 얇은 빗살 모양으로 조각함으로써 통풍이 잘되어 찬합 안 쪽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한 노력도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18세기 유럽인들은 이 상아 도시락을 처음 보고 환상적인 동방의 낙원이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손잡이 부분에는 8명의 신선(八仙)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장수와 길조를 상징한단다.
▼ 전시관에는 몽골텐트인 게르(ger)도 설치되어 있다. 게르의 안에는 가재도구는 물론이고 벽에다 ‘칭기즈칸(Genghis Khan)’의 초상화까지 걸어놓았다. 북방의 몽고족 또한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밖에도 3층에는 청동기와 동기 유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갑골문자나 상형문자가 적혀 있을 정도로 하나 같이 오래된 문화재들이다. 그 하나하나가 능히 국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 아래 그릇의 안에도 꽤나 많은 숫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쓰인 글씨의 탁본(拓本)과 그 내용을 뒤편에 게시해 놓았지만 그걸 일일이 읽어볼 시간은 없다. 아니 읽어봤자 이해도 못할 게 뻔하다.
▼ 이 전시물들은 대부분 북경의 ‘고궁박물원’과 남경의 ‘중앙박물관 주비처’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북경 고궁박물원은 당시 자금성 내의 궁중 소장품들이고, 1933년 설립된 남경 중앙박물관 주비처는 청대의 각 이궁에 소장되어 있던 문물들을 모은 것들이다. 대만으로 옮겨져 왔을 때의 수량은 총 60여만 점, 그 후로 구매와 기증 등으로 2006년에는 소장품의 수량이 약 69만점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문물의 출처가 서로 다르고 그 종류 역시 방대한 까닭에 고궁박물원에서는 문물 일련번호로 문물의 출처와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문물 일련번호의 첫 글자를 보면 ‘고(故)’, ‘중(中)’, ‘증(贈)‘, ’구(購)‘ 등 4가지 글자가 있는데, 이는 순서대로 각각 북경 고궁박물원, 남경 중앙박물관 주비처, 외부 인사의 기증, 구매 등을 뜻한다. 문물 일련번호의 두 번째 글자에서는 문물의 분류 유형을 표시하는데, 서예작품을 의미하는 ‘서(書)’, 청동기의 ‘동(銅)’, 선본 도서의 ‘선(善)’, 자금성 무영전본도서의 ‘전(殿)’, 문구류의 ‘문(文)’, 불경의 ‘불(佛)’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문물의 설명 팻말 아래 부분에 ‘고동(故銅)’이라고 쓰여 있는 문물이 있다면, 이는 본래 북경 고궁 박물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청동기 문물이라고 단번에 그 출처와 분류를 알 수 있다.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아닐까 싶다.
▼ 2층으로 내려오면 온통 도자기 일색이다. 백자에서 청자에 이르기까지 명품 도자기들이 빽빽하니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고려청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청자도 보인다. 가이드의 부연설명도 있었으니 아마 사실이었을 게다. 가슴이 뿌듯해져 온다. 오래 전 현직에 있을 때 독일의 ‘쿠텐베르크박물관(Johannes Gutenberg Museum)’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를 마중 나왔던 박물관장이 자기네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솔직한 고백을 해주어서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에는 못 미치지만 어디 이런 일이 흔하겠는가.
▼ 아래 사진은 정요백자(定窯白磁) ‘어린이 모양 베개’이다. 이 어린이 모양 베개는 일상 생활용품으로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활달하고 건강하게 생긴 귀여운 아이가 저고리와 바지, 테두리가 있는 꽃무늬의 긴 조끼를 입고 비단 깔개 위에 누워 두 다리를 뒤로 교차하고 엎드려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사랑스럽다. 이 베개를 베고 자면 이렇게 귀엽게 생긴 옥동자를 낳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사용했지 않나 싶다. 참고로 ‘정요(定窯)’는 중국 송대의 대표적인 백자요(白磁窯)로서 주요 산지인 허베이(河北)성의 바오딩(保定)시 취양(曲陽)현 일대가 당송시절 정저우(定州) 관할이었기 때문에 정요백자라고 불렀다. 당나라 말기에 시작되어 송대에는 상아와 같은 크림색 백자를 구워 궁중에서 사용하였다. 참고로 최근(2015년) 정요백자 가운데 ‘미인침(美人枕)’이라는 작품 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마카오에서 거행된 공예품 경매에서 ‘미인침’이 3억2천만 위안(563억원)에 낙찰됐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작품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회전식 꽃병도 보인다.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발이 4개짜리 용 조각이 화려하다.
▼ 통통한 여인상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인다. 당현종의 후궁이었던 양귀비의 상(像)이란다. 그런데 모양이 좀 이상하다. 양귀비라면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명이며 중국 미인을 대표하는 여자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눈앞에 서있는 여자는 통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 또한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당시 미인의 기준이 그랬단다. 하얀 피부에 부드럽게 풍만한 몸의 곡선, 쌍꺼풀 없이 찢어진 작은 눈이었다는 것이다. 당나라를 망하게 만든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였다지만, 요즘이었다면 시집도 못가고 늙어 죽기에 딱 맞을 것 같다.
▼ 청나라 건륭제 때의 도자기인 ’분채백록존(粉彩百鹿尊)‘이다. 말 그대로 백(百) 마리의 사슴들이 소나무 숲 사이에서 뛰노는 모습을 그려 넣은 도자기이다. 아무튼 이 그림은 청나라 황실의 수렵활동을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1681년 강희황제는 하북성의 북쪽에 수렵장을 만들고 매년 가을마다 왕공대신들과 팔기군을 이끌고 가 사냥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사냥이지만 실제로는 군사훈련으로 보면 된다. 이 수렵활동은 가경제까지 계속되다가 도광제 때 폐지되었다. 그때의 광경을 건륭제 때 도자기에 응용한 것이다.
▼ 1층으로 향한다. 올라올 때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것과는 달이 이번에는 계단을 이용한다.
▼ 1층에는 금 공예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1층의 최고 명물은 단연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이다. ‘상아다층구(象牙多曾球)’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18세기 청나라 때의 작품인데, 3대에 걸쳐 백 년 동안이나 상아를 가공하여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진상품을 처음으로 본 황제가 이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솜씨라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청대 후기에는 황실에서도 서양의 예술품들이 선호되어 황궁 소속의 공방에 있던 장인(匠人)들이 민간으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민간으로 흘러 들어온 장인들은 본인의 기술을 이용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 일부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높은 난이도(難易度)의 신기술을 창조하는 한편, 이를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상아로 만든 노리개 역시 이러한 노력과 기술의 집약체가 아닐까 싶다.
▼ 구경 11.7cm 의 구(球) 안에 총 17개의 구가 들어있으며, 각 층의 구는 서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회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각 층마다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서로를 관통하는 12개의 구멍이 나있단다.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당시의 기술력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데, 작은 구부터 만든 후 접착제 등을 사용하여 큰 구를 그 위에 덮어 씌워 붙인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통 상아를 바깥쪽에서부터 조각해 들어가서 안쪽에다 무려 17개나 되는 상아 구를 만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개의 구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따로 회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단다.
▼ 옛날 궁중에서 사용하던 집기들을 진열해 놓았는가 하면 황제들의 집무실을 재현해 놓기도 했다.
♧ 에필로그(epilogue), 회남자(淮南子) ’인생훈(人生訓)‘에 ’새용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나온다. ’변방 늙은이의 말로 인해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기도 한다‘는 뜻으로 ’길흉화복의 변화가 잦은 것‘을 비유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궁박물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들에 딱 어울리는 얘기일 것 같아서 적어봤다. 사연은 이렇다. 모택동의 군사들에게 턱 밑에까지 쫒기는 와중에도 장제스(蔣介石)는 어렵게 가지고 온 보물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보물을 옮겨야할 수송선이 턱없이 부족했던 장제스는 피난민들을 수송한다는 핑계로 미군의 군함과 상선 등을 빌린 후, 실제로는 보물을 싣고 직속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넘어 갔단다. 모택동 군대가 미국의 배를 공격하기 어려웠을 테니 안전을 확실히 보장 받았던 셈이다. 아무튼 중국 공산당과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국민당의 행위가 매우 부당하고 비겁하다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있었기에 중국의 국보급 보물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 만일 이 보물들이 중국 본토에 남겨졌더라면 대륙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을 피해가지는 못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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