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伽倻山, 497.3m) – 시루봉(400m)
산행일 : ‘17. 7. 30(일)
소재지 : 전남 광양시 옥곡면과 중군동․성황동․마동․광영동 일원
산행코스 : 장동2구 회관→불광사→군장이재→시루봉→가야산→입마춤 바위→적벽→중마동 중복도로 육교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산악회
특징 : 광양시청 뒤에 위치한 높이 497m의 나지막한 산으로 시내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광양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유이다. 조망 또한 뛰어난 편이다. 전체적으로 불 때에는 육산(肉山)이 분명한데도 꽤 여러 곳에 커다란 암릉들이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북쪽의 백운산(白雲山)과 그 위 지리산(地異山)이 보이는가 하면 올망졸망한 섬들을 새끼처럼 품고 있는 남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러나 그 정도를 갖고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오는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전국의 수많은 등산마니아들이 끊임없이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 산이 ’2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산을 빼먹고 지나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산행들머리는 장동2구 마을회관(광양시 옥곡면 장동리)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 옥곡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861번 지방도를 타면 눈 깜박할 사이에 옥곡천이 나온다. 이 옥곡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장동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좌회전하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바로 ’장동2구‘이다. 이 마을의 회관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불광사까지 도로가 나있긴 하지만 길이 좁아서 대형차량은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산행을 나서기 전에 이 마을이 자랑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먼저 둘러보기로 한다. 광양시에 소재하고 있는 9개의 정려(旌閭) 중 하나인 ’쌍효려비(雙孝閭碑)‘가 마을회관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려란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세운 정문(旌門)을 이르던 말이니 참조한다. 대여섯 걸음쯤 옮겼을까 ’쌍효문(雙孝門)‘이란 대문이 나타난다. 효자가 두 명이나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게 옳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서너 걸음만 더 옆으로 옮기면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정려(旌閭)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려의 뒤에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효자(孝子)․효부(孝婦)의 효행을 함께 기리는 ’쌍효려비(雙孝閭碑)‘이다. 즉 고종 29년(1892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릴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함께 받은 ’전주 유씨‘ 유계양(柳季養)과 숙부인(淑夫人)의 증직을 받은 해주 오씨(海州 吳氏)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이다. 1929년 손자 오위장(五衛將) 유채규(柳采圭)가 정려를 건립하였으며 그 이후 정각 및 주변을 보수∙정비하였다.
▼ 아쉽게도 비문(碑文)을 직접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정려의 뒤편에 지어진 정자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려의 전경(全景)이 환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면 ’불광사‘에서 내건 표지판을 따른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싶으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 된다. 400년도 더 묵었다고 해서 보호수로까지 지정(15-5-4-8)되어 있는 나무인데 느티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은 푸조나무(Mukutree)라고 한다. 푸조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나무로 남해안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데 그 모양새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참고로 전남 강진(35호)과 장흥(268호), 부산 수영공원(311호) 등 세 곳에서 있는 나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 ’광양시‘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마을은 시골냄새를 물씬 풍긴다. 집집마다 너른 텃밭을 갖고 있는가 하면 뜨락마다 감나무와 배, 사과나무 등의 과일나무들을 정원수(庭園樹) 삼아 빼곡히 심어놓았다. 담벼락을 넘어온 꽃사과와 석류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더운 삼복(三伏) 더위인데도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나보다. 하긴 가을의 들머리인 입추(立秋)가 10일도 채 남지 않았다.
▼ 마을 안길을 빠져나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오늘 걷게 될 능선이 나타난다.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운데에 두고 움푹하게 파여진 오른편 안부가 ’군장이재(군장치)‘이다. 왼편의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시루봉‘임은 물론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18분쯤 지나면 ’백련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한국불교 미타종‘이라는 종파 소속의 자그만 사찰인데,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건물 또한 우리가 늘 보아오던 그런 절집이 아니라 일반의 여염집에 더 가깝다.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미타종(彌陀宗)은 대한불교종단총연합회에 소속된 종단 중의 하나로 ’관무량수경‘과 ’무량수경‘ ’아미타경‘ ’열반경‘ ’화엄경‘ 등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함허 득통(涵虛得通)을 종조로 삼으며 총본산은 충북 단양의 봉암사에 두고 있다.
▼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절간이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만다. 가야(伽倻)라는 지명의 근원은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찾는 게 옳을 것이다. '부처의 화원(花園)'이라는 의미인데, 부처님의 4대 성지≪탄생지인 ’룸비니(Lumbini)‘와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사라나트, Sarnath)‘, 열반지인 ’구시나가라(Kuśinagara)‘≫ 중 하나로 기원전 5세기에 석가모니가 이곳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부처는 열반하기 전 제자 아난다에게 사람들이 참배할 곳으로 위의 네 곳을 일러준다. 그렇게 귀한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이니 어찌 많은 절간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잠시 후 오른편에 ’가야산 불광사(伽耶山 佛光寺)‘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전각(殿閣)이 나타난다. 양 옆에 금강역사의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금강문(金剛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금강문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가람의 내부는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 경내로 들어서면 ’삼칸 겹집’으로 지어진 대웅전이 나타난다. 그 뒤편으로는 '삼성각(三聖閣)'이 보인다. 불광사(佛光寺)는 ‘대승불교 조계종(大乘佛敎 曹溪宗)’ 소속의 사찰이란다. 이 종단은 신라시대의 원효대사를 종조(宗祖)로 모신다며 2006년에 새로 발족했다는데, 종파에서 근본경전으로 의지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사찰들이 이 종단에 속해있는지 등 자세한 사항은 종단의 홈페이지에서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직 자리를 덜 잡은 탓일 것이다. 물론 국내 불교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한국불교종단총연합회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 불광사를 빠져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설 것을 명령하고 있다. 길이 나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또다시 열 걸음쯤 더 걸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또렷하게 난 오솔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산길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약수터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우물은 앙증맞게 생긴 지붕까지 얹어놓았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다. 거기다 운동기구 몇 점과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샘물은 말라버렸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물의 기능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하겠다.
▼ 아까보다는 훨씬 더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5분 남짓 더 오르면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삼거리인 ‘군장이재(군장치)’이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증산’으로 연결되는 길인데 이 코스 역시 등산객들의 이용이 잦은 모양이다.
▼ 능선에 올라섰다 싶으면 산길은 순해진다. 임도에 가깝게 산길의 폭이 넓어졌는가 하면 경사 또한 거의 없다. 거기다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오뉴월 염천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산책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멋진 산길이라는 얘기이다.
▼ 그렇게 잠시 걸으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난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시루봉이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 송전탑을 지나 얼마간 더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시루봉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하지만 시루봉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힘든 오르막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오른편으로 난 우회로(迂廻路)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두 길은 시루봉 너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면 드디어 시루봉 정상이다. 능선에 올라선지 20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이 지났다.
▼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송전탑(送電塔)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시루봉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식물이 일절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송전탑에 매달아놓은 ’국가지점번호표지판(라라 1838-6380)‘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그런 표식물이 있기는 하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한 기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 시루봉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산행들머리로 삼았던 장동마을과 그 근처에 있는 신금저수지가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다. 연무(煙霧)가 짙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 가야산으로 향한다. 아까 올라왔던 방향으로 몇 걸음 되돌아가 이번에는 왼편으로 접어들면 된다. 쉬울 것 같지만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생각 없이 돌탑이 있는 능선을 계속해서 따랐다가는 광양시 광영동으로 곧장 하산을 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내려서서 침목(枕木)계단과 데크계단을 연이어 지나면 ‘가야산 둘레길’과 ‘가야산 임도’ 등 여러 개의 길이 만나는 중요한 분기점(分岐點)인 ‘큰골재’에 이르게 된다. 울창한 숲 속에는 여러 개의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만큼 이곳을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가야산의 6부 등선을 연결하는 ’가야산 임도‘는 광양시 광영동 큰골약수터에서 불광사를 거쳐 골약동 군재마을로 연결되는 총 길이 7.69㎞의 임도를 말한다. 매년 4월 이곳에서 열리는 산악마라톤대회 때에는 중심코스가 되기도 한단다.
▼ 이곳이 산행의 분기점(分岐點)임을 알려주는 안내도도 내걸었다. 현재 위치의 해발이 363m임을 알려주면서 가야산 정상까지는 758m를 더 가야한다고 적고 있다. 광명동약수터는 509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단다. 산행에 도움이 되는 시설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지도를 반쪽만 그려 놓았고, 거리까지 표기해놓은 광명동약수터는 어디에 있는지 표기조차 하지 않았다.
▼ 가야산 정상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길게 놓인 통나무계단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시작 지점(이정표 : 장수쉼터← 1.22Km/ 가람쉼터→ 0.63Km)에서 ’가야산 둘레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직진하면 기야산 정상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궁도장과 쉼터를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오른편은 물론 가람쉼터로 연결된다. 참고로 ’가야산 둘레길‘이란 가야산 정상을 중심으로 3~5부 능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생태, 역사, 문화자원을 연결해 놓은 광양판 ’올레길‘이라고 보면 된다.
▼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는 플라스틱 재질의 통나무계단을 오르면 산길을 울퉁불퉁한 너덜길로 변한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오르는 게 수월해보이지는 않지만 양쪽 가에 설치해놓은 목제난간의 힘을 조금 빈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고생해가며 능선에 오르면 평탄부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가야산 정상 120m/ 큰골샘터 860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한석농원으로 연결된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안테나 시설이 눈에 띈다. 방송사의 중계탑은 정상에 있는 걸로 알고 있기에 의아해서 다가가보니 경찰서에서 ’통제구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을 걸어놓았다. 보안시설인 모양이다.
▼ 조금 더 걷자 가야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방송사(MBC)의 송신탑이 들어서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철탑들이 흉물스럽지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경남 합천(1,430m)과 충남 예산(678m), 그리고 전남의 광양(497m)․나주(191m) 등 네 개나 된다. 이중 나주의 가야산을 제외하고는 100대 명산(가야)과 200대 명산(예산과 광양)에 포함되어 있으니 ’가야(伽倻)‘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가야산(伽倻山)'이 본디 인도의 불교성지인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에 위치한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산이기 때문이다.
▼ 제법 너른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표지석 외에도 삼각점(광양 305, 1996재설)과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특히 정상석의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에 걸려있는 자그만 벽시계가 눈길을 끈다. 벤치에 앉아 느긋이 쉬다가 시간에 맞춰 내려가라는 배려용인 모양이다. 참고로 가야산은 가요산(歌謠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광양)에 ‘가요산(歌謠山)은 증산(甑山) 남쪽 5리에 있다.’고 하여 처음 등장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동여비고(東輿備考)’, ‘호남지도(湖南地圖)’, ‘청구도(靑邱圖)’ 또한 같은 이름이다. 현재의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건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읍지(邑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가야산(伽倻山)은 증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 동쪽 3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지승(地乘)’, ‘광여도(廣輿圖)’ 등도 이를 따른다. 이로보아 가요산이라 불리던 것이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혼용되다가 근래에 가야산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연무(煙霧)가 짙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다른 사람의 글로서나마 대신해본다. <정상에 서면 북쪽 백운산(白雲山:1,217m)과 그 위 지리산(地異山:1,915m)이 보이고, 올망졸망한 섬들을 새끼 품은 봉황처럼 동서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남해의 청정해역으로 날아드는 장엄함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글도 있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백운산에서 치달려 내려오는 호남정맥의 마지막 줄기와, 그 오른쪽으로 지리산 능선과, 광양제철소 너머로 남해도가, 남쪽으로 여수의 영취산과, 서쪽으로는 길게 늘어져 있는 여수반도가 조망된다.>
▼ 적벽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길의 바로 오른편 방향이다. 직진을 할 경우에는 ’작은가야산‘으로 가게 되니 주의하자. 100m 남짓 내려가면 삼거리(이정표 : 적벽↑ 530m/ 동백쉼터← 720m, 제1주차장 1,320m/ 가야산 정상↓ 130m)를 만나게 되고, 적벽방향으로 직진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두 번째 갈림길(이정표 : 적벽←/ 금광블루빌↑ 1,720m, 한석농원 1,410m/ 가야산 정상↓ 160m)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가야할 방향은 왼편인데 곧장 진행해버리면 가야산의 명물인 ’입마춤바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금광블루빌 방향으로 200m쯤 더 내려가야만 한다.
▼ 잠시 후 멋진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크기도 거대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거기다 광양시가지와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조망까지도 빼어나다. 한마디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는 얘기이다. 암릉은 철제계단을 만들어 아래로 내려가도록 했다.
▼ ’입마춤바위‘는 계단의 아래에 있다. 하지만 그 생김새는 실망에 가깝다. 각도를 바꾸어가며 살펴봐도 ’입마춤‘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문득 작년엔가 베트남의 하롱베이에 갔을 때 만났던 ’키스바위‘가 생각난다. 그땐 살포시 입을 맞추고 있는 형상이 확실하게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 ’입마춤바위‘ 부근에는 정자(亭子)를 지어놓았다. 모처럼 만나는 절경이니 쉬었다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말이다. 광양시가지는 물론이고 작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마냥 바다 위를 떠다니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건너편 산자락도 눈에 들어온다. 바위지대로 보이는 곳에는 꽤 많은 케언(cairn)을 쌓아 놓았다. 어쩌면 아까 ’큰골재‘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가람쉼터‘가 아닐까 싶다. 조망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가야산의 또 다른 명소 말이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적벽 이정표를 따른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이다. 숲길 사이로 넓은 반석길이 나타난다. 반석길 오른쪽 터진목으로 광양시의 서쪽 아파트촌 너머로 봉화산, 구봉산 자락이 조망된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거대한 암릉을 만난다. 호남의 전문 클라이머(climber)들이 암벽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적벽‘이란다. 적벽(赤壁)은 본래 중국 고대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인해 알려진 지명이다. 후베이성(湖北省) 푸치현(蒲圻縣) 서북부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위치하는데 208년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 명이 조조에 대항하여, 수륙 양쪽에서 조조의 20만 명 대군과 싸워 화공으로 대승을 거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어떤 사연을 갖고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 중국의 적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강변에 웅장하게 솟아 있어 지세가 험준하다’고 하는데 이곳의 지형도 그렇게 험준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 벼랑의 상단에는 케른(cairn)이 세워져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1999년 캉첸중가(8586m) 등반 중 사망한 고(故) 한도규 대원(한울산악회)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 누군가는 적벽에서의 조망을 가야산 제일경이라 추켜세웠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시원스러운 조망이 펼쳐진다. 연무(煙霧)로 인해 희미하긴 하지만 광양시가지는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광양만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연무 때문에 광양만의 명물이라는 ’이순신대교‘는 어디쯤에 있는지 분간이 안 된다. 아쉬운 일이다. 참고로 광양만은 예로부터 영·호남간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과 명나라 수군의 연합함대가 왜적을 무찌르던 전승지역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다른 이의 글을 빌려본다.<왼편으로는 광양제철소와 남해도가, 정면 아래쪽으로 광양시가, 묘도 너머로, 여수반도의 영취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 암릉에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좌우로 방향을 트는 중간쯤에 이르자 서벽과 동벽이 위치한 방향을 알려주는 자그만 이정표가 바위에 붙어있어 이곳이 유명한 자연 암장(巖場·巖壁場)임을 실감케 한다. 적벽은 호남지역 전문 클라이머들의 암벽 훈련장으로 알려진다. 가야암장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동벽과 중앙벽, 적벽, 서벽 등 여러 암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루트도 여러 개가 개척되어 있다고 한다.
▼ 암릉을 벗어나자 곧이어 ’가야산 둘레길(이정표 : 시민쉼터← 0.45Km/ 입마춤바위→ 0.63Km)‘을 또 다시 만난다. 그러고 보면 아까 들렀던 입마춤바위에서 이곳으로 곧장 오는 방법도 있었던 모양이다.
▼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엄청나게 가팔라졌다고 하는 게 옳겠다. 곧장 아래로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를 쓰고 나서야 고도(高度)를 낮출 수 있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산길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길 양쪽에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오르내리는데 부담을 줄이도록 배려를 했다. 그렇게 7~8분 정도를 고생하면 길은 잠시 완만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탑골과 굴개재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사거리(이정표 : 제1주차장↑ 0.77Km/ 굴개재→ 0.11Km/ 탑골← 0.32Km/ 둘레길(적벽)↓)를 만난다.
▼ 산길은 사거리를 지나서도 여전히 가파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약해졌다. 내려서는데 별 부담이 없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가면 육교(陸橋)가 나온다. 가야산과 도심(都心)을 잇는 가교(架橋)이다.
▼ 육교에 내려서기 직전, 좌우로 길이 나뉘는 곳에 ’가야산 둘레길‘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야산 둘레길‘은 가야산의 정상을 가운데다 놓고 3~5부 능선 곳곳의 명소들을 연결한다. 총 4.8Km의 구간에 흩어져 있는 적벽과 입마춤바위, 가람쉼터, 큰골재, 장수쉼터, 어깨골, 시민쉼터 등 7개 포인트를 모두 돌려면 대략 한 시간 반쯤 걸린단다. 대나무와 송림 숲길 등을 따라 걷게 되는데 곳곳에서 기암괴석과 돌탑 등 눈요기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양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중마동 중복도로 육교주차장(광양시 마동 1063)
육교를 건너선 후에는 오른편으로 내려서서 중복도로를 따른다. 걷는 내내 광양시가지의 고층건물들이 조망되는 멋진 길이다. 길 아래에 있는 중마고등학교는 조용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방학 동안에는 자율학습이 없나보다. 그렇게 5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반듯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 에필로그(epilogue), ‘광양 오미(五味)’라는 말이 있다. 광양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다섯 가지의 음식을 말한다. 쇠고기를 구리 석쇠에 놓아 참숯불에 구워먹는 재래식 고기구이인 ‘광양숯불구이’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붕장어구이’와 망덕포구의 ’전어구이’, ‘섬진강 재첩국’, ‘토종닭숯불구이’ 등이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먹어보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만 맛을 보기로 한다. 우선 주차장 근처의 식당가로 향한다. 주어진 시간이 짧은 탓에 근처에서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숯불구이’ 음식점만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마저도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게 아닌가. 별수 없이 ‘섬진강 다슬기 식당(061-791-6500, 010-2645-9100)’의 문을 두드린다. 다슬기나 재첩이나 그게 그것일 것 같아서이다.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들어선 식당에서 난 훈훈한 남도의 인심을 만날 수 있었다. 다슬기국을 주문한 일행과는 달리 준비해 간 도시락을 반찬 삼아 마시겠다며 술만 주문했는데도 따뜻한 국물이 필요할 것이라며 다슬기 국물을 한 그릇 가득히 내놓는 것이 아닌가. ‘다슬기’의 은은한 향이 배인 구수한 국물에 곁들였던 소주 탓이 아니라 그네들이 보여준 훈훈한 인심에 취해버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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