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찰산(尖察山, 485m)
여행일 : ‘17. 4. 29(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고군면과 의신면의 경계
산행코스 : 쌍계사→삼선암약수→첨찰산→헬기장→진도아리랑비→운림산방(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진도의 진산(鎭山)이자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정상에서의 조망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산세 또한 뛰어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개의 명품 볼거리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하나는 천연기념물(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는 ’쌍계사 상록수림(雙溪寺 常綠樹林)‘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종화(南宗畵)의 대가 소치(小癡) 허유(許鍊)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그 외에도 등산을 하는 길에 ’진도 아리랑비‘를 만나볼 수 있으며, 산의 서쪽 아래에는 진도지방에 전승되는 민속놀이인 ’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유명한 민속마을인 사천리가 있다. 또한 진도에서 가장 큰 수원지인 ’사천저수지‘도 첨찰산의 산자락에 위치한다. 다만 산행시간이 짧다는 게 흠일 수도 있으나, 이럴 경우에는 덕신산에서 학정봉으로 이어지는 맞은편 능선을 연계하면 되니 문제될 것도 없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찾아볼만한 산이다. 특히 가족들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다. 가볍게 산행을 끝낸 후 주변 관광지들을 둘러본다면 멋진 가족여행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산행들머리는 쌍계사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84)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목포대교를 건넌 후,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차례로 지난 뒤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지방도로 옮긴다. 이어서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18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까지 들어온다. 남동교차로(진도군 진도읍 남동리)에서 빠져나와 왕온로와 운림산방로를 차례로 타고 들어오면 잠시 후 쌍계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 일주문을 지나 쌍계사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오색의 연등(燃燈)이 줄을 지어 매달려 있다. 다음 주에 있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한 모양이다. 잠시 후 쌍계사 앞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첨찰산 정상↖ 3Km, 넓적바위 1.8Km/ 쌍계사↗)로 나뉜다.
▼ 쌍계사(雙溪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한데 구태여 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진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는 천년고찰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게 더 큰 이유이다.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쌍계사의 경내로 들어선다.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는 규모의 사찰이다. 아니 남녘의 끝자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사찰치고는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쌍계사란 절의 양편으로 두 개의 하천(溪)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진도의 쌍계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쌍계사로 분류되는 하동의 쌍계사와 논산의 쌍계사, 북한(함경북도 명간군)의 쌍계사 등도 같은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 쌍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857년(신라 문성왕 19) 도선(道詵)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 양옆으로 시냇물이 흘러서 쌍계사라 불렀다고 하며, 1648년(조선 인조 26) 의웅(義雄)이 중건하였다. 1677년(숙종 23) 대웅전을 세웠으며, 1695년에는 시왕전을 중건했다. 1880년 ’동사열전‘의 저자인 각안(覺岸:1820∼1896)이 머물며 동산(東山)·지순(知淳)과 함께 대법당과 시왕전·첨성각을 중수했고, 이후 1980년에는 도훈(道薰)이 해탈문을 세우고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해탈문,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국보급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으나 전라남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로 대웅전(제121호)과 목조삼존불좌상(제221호), 왕전목조지장보살상(제222호)이 있다.
▼ 쌍계사를 둘러봤으면 이젠 산행을 나설 차례이다. 산행은 절간의 왼편 숲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숲으로 들어서면 과연 이곳이 천연기념물로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바닥을 넓적한 자연석으로 깔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해외여행을 하면서 돌이 깔려 있는 옛 도시의 도로들을 보며 그들의 보존의식에 부러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여기서 그런 풍경을 보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삼선암골을 끼고 나있다. 이 골짜기와 이따가 하산하게 될 ’봉화골‘ 사이에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쌍계사 상록수림‘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진도군의 군목(郡木)인 후박나무와 도토리처럼 생겼는데 잣 맛이 나는 열매가 달리는 구실잣밤나무, 한약재로 쓰이는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생달나무, 붉가시나무 등 잎이 넓은 상록수가 다양하다.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마삭줄, 송악 같은 덩굴이 흔하고, 졸참나무와 자귀나무, 느릅나무, 소사나무 같은 활엽수까지 더해 푸름을 뽐낸다. 등산로 도입부는 상록수와 활엽수가 뒤섞였고, 올라갈수록 상록수가 많아져 그늘이 짙다.
▼ 이곳 쌍계사의 상록수림은 무려 18만8천 평에 달한다. 상록수림의 50-70%를 차지하고 있는 구실잣밤나무를 비롯하여 동백나무와 참가시나무, 참식나무 등 상록활엽수림이 온 산에 가득해 있다.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는 햇빛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숲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5월부터 6월초까지는 쌍계사 계곡을 중심으로 구실잣밤나무 꽃이 만발해 온 산이 금색물결을 이룬다. 또한 이 숲은 희귀조인 팔색조가 서식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 산길은 ’삼선암골‘을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그러다보니 산길은 자연스레 가파른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나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비탈 쪽에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25분쯤 되면 ‘삼선암 약수터’(이정표 : 정상 1.3Km)가 나온다. 특별한 맛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여행자의 목마름을 단번에 해갈해 주는 석간수(石間水)가 바로 그것이다.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샘은 수량이 풍부한 듯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봄 가뭄으로 인해 주변 계곡이 말라있는 것을 감안할 때 지하수(地下水)인 모양이다. 먼저 물맛을 보고난 집사람이 바가지를 내민다. 의외로 물맛이 좋단다. 그녀의 말마따나 물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이런 게 바로 감로수(甘露水)가 아닐까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인 도리천에 있다는 달콤하고 신령스런 액체인 ‘감로’ 말이다. 이 액체는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있고 죽은 이는 부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사주(不死酒)로도 일컬어진다. 때로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 약수터 바로 위에서 산죽(山竹) 숲을 만난다. 이곳이 혹시 ‘삼선암’의 터인지도 모르겠다. 약수터의 이름이 ‘삼선암’인데도 불구하도 주변에서 절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굵은 산죽들은 대개 절간 주위에서 무리지어 자라기에 그런 추정을 해보았다.
▼ 숲의 곳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노라면 어느덧 땀이 식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물소리까지 들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지만 봄 가뭄이 한창이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더위를 잊고 세상 근심도 잊을 수 있는 힐링(healing) 숲이 따로 없다.
▼ 계곡은 너른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물이라도 흐른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겠다. 푸름으로 물든 숲과 너른 암반, 그리고 그 위를 흐르는 옥수(玉水)가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아까 쌍계사 앞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넓적바위‘가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외에는 그런 지명을 붙일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약수터에서 10분쯤 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정표(이정표 : 점찰산 정상← 0.8Km/ 쌍계사↓ 2.0Km)는 정상을 왼편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직진(直進) 방향의 길도 또렷하다. 산악회에서 나눠준 지도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쯤에서 둘로 나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진으로 난 길은 정상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는 길일 것이다. 이정표는 조금 더 쉽게 오를 수 있는 우회(迂迴)의 길로 진행하도록 지시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숲은 여전히 짙다. 10m가 훌쩍 넘는 상록수가 하늘을 덮고 그 아래 작은 나무들까지 잎사귀를 보태니, 그늘이 깊고 짙고 두텁다. 누군가 첨찰산의 상록수림이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 아름다운 녹색 숲길에서 마음껏 심호흡하며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 중턱에 닿는다. 언제부턴가 산길은 계곡을 벗어나 있다. 그리고 경사도 함께 가팔라졌다. 뿐만 아니다. 숲의 나무들도 상록수림에서 낙엽수림으로 바뀌어있다. 그중에는 남쪽의 해안(海岸)에서 흔하게 만나는 소사나무가 많다.
▼ 약수터에서 출발한지 25분쯤 되었을까 쉼터가 나타난다.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를 놓았는데 ’등산안내도‘외에도 이정표(첨찰산 정상↑ 0.7Km/ 수리봉← 2Km, 공설운동장 5.8Km/ 넓적바위↓ 0.5Km, 쌍계사 2.3Km)가 세워져 있다. 쉼터의 왼편으로 시멘트포장 임도가 나았다. 기상대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저 도로를 따를 경우 수월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하지만 0.5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는 지체(遲滯)는 감수해야만 한다.
▼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밧줄난간을 만들어두었고, 그보다 더 가파른 곳에는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또한 곳곳에 간이 쉼터도 조성해 놓았다. 의자 등 쉼터의 시설물들은 태풍 피해를 본 편백나무를 재활용한 것이란다.
▼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 깔려있는 진도읍의 시가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남쪽 바다의 다도해(多島海)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지금은 비록 미세먼지로 인해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저 바다에는 주지도와 양덕도, 혈도, 송도, 광대도, 저도, 작도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싣고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참! 사천저수지와 삼막봉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 조금 더 진행하면 이번에는 전망바위가 나온다. 그리고 반대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조금 희미하긴 하지만 상마도와 중마도, 하마도, 안도, 죽도 등이 시야에 잡힌다. 첨찰산 정상과 반대편 봉우리에 있는 기상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치고 오르면 정상 바로 직전에서 산허리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혹시 ’첨찰산성(尖察山城)‘일지도 모르겠다. 봉수대가 있는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해발 460m 고지와 남쪽 420m 고지를 연결했다는 포곡식(包谷式) 산성(山城) 말이다. 이 성은 1500년도 더 된 백제 때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때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왜인들이 수시로 침범해서 남해안 일대를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따라서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다 관방처(關防處)로서 산성을 축성했다는 것이다. 길이가 1.5㎞쯤 되는 성벽은 현재 완전히 도괴된 상태이다. 다만 유구(遺構)의 성격으로 보아 협축법에 의해 쌓은 석축성으로 판단된다. 석재는 30×50㎝의 판석형 막돌을 사용하였고 갈대숲을 이룬 성내에는 여러 개의 절터와 와편 등이 산재해 있다.
▼ 성터를 지났다싶으면 정상이다. 정상의 한가운데는 원뿔형으로 생긴 봉수대가 차지하고 있다. ‘무인산불감시탑’과 이정표(기상대 0.3Km, 등산로종점(두목재) 1.7Km/ 넓적바위 1.2Km, 등산로입구(쌍계사) 3Km)도 보인다. 정상의 봉수대(烽燧臺)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옛날에는 봉수대였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돌로 연대(烟臺)를 쌓고 그 위에다 수북하게 돌을 쌓아올렸는데, 봉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케언(cairn)에 더 가깝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에도 의젓한 봉수가 있었다. 자연적인 바위산 위에 남북 길이 9m, 동서 길이 8.5m, 둘레 30.3m의 원형으로 쌓아올렸는데, 30×20㎝ 크기의 자연석으로 ’난층쌓기‘를 하였단다. 이 봉수는 해남 관두산 봉수(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두산)로부터 여귀산 봉수(현 임회면 죽림리 여귀산)로 전달된 봉홧불을 해남 황원 봉수(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문내면 고당리의 접경 日星山)에 중계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의 하나로 건립되었다. 대략 조선 초기 진도군의 행정체계가 재정비되는 시기, 즉 세종대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에 폐지되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광은 장관이다. 바다건너 해남 땅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두륜산은 물론이고 공룡능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땅끝기맥의 꿈틀거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또 다른 방향에는 높고 낮은 진도의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다. 아까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사천저수지와 삼막봉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더 멀리에 있을 수많은 섬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미세먼지라는 게 우리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긴 꼭 미세먼지 아니더라도 해무(海霧) 때문에 섬이 선명하게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은 봉수대의 바로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첨찰산은 ’뾰죽할 첨(尖)‘에 ’살필 찰(察)‘자를 쓴다. 뾰쪽하게 생긴 산 정상부가 적의 동태나 지세를 살피기에 딱 좋겠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산의 정상에다 봉수대를 설치했었고, 산의 이름 또한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 만일 쉴만한 장소를 원한다면 정상석의 2시 방향에서 길을 찾아야한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30m 정도 들어가면 널따란 바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망까지 탁 트이니 이만한 쉼터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보니 왼쪽이 삼막봉,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건 수리봉, 철마산 등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이 가두어진 곳은 사천저수지라고 했다.
▼ 기상대가 있는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경사가 심하지만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그것도 반반한 곳에 이를 때까지 길게 놓였다. 내려가다 보면 축구공처럼 둥그렇게 생긴 ’진도기상대(珍島地域氣象)‘의 건물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진도·해남 등 전남 남부해안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해 설치한 광주지방기상청 산하의 기상관측 기관인데, 지난 2001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저 기상대는 해돋이와 해넘이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질녘 농도(濃度)를 달리하는 산릉들이 중중첩첩 겹치고 포개지는가 하면, 희미한 능선이 끝나는 곳에 붉게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솟아오르는데 그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라는 것이다.
▼ 계단을 내려서면 헬기장이 나온다. 첨찰산 정상과 기상대가 자리한 동남봉(東南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도 활용을 하고 있는 지 잔디밭이 잘 손질되어 있다. 아무튼 주변 지세(地勢)가 반반한 것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첨찰산성의 중심지가 이쯤이었을 듯도 싶다. 또한 이곳 첨찰산에 ’진도 말목장(馬牧場)의 속장(屬場)이 있었다고 하더니 구릉의 생김새로 보아 그랬을 만도 하겠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곳 진도는 전국 최대 규모의 말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의하면 1414년 제주에서 말 1800마리를 옮겨와 감목관을 설치하고 추자도 주민을 이주시켜 말을 관리했다고 한다.
▼ 헬기장 근처에서 길은 둘(이정표 : 아리랑비→ 1.7Km/ 첨찰산 정상↓ 0.1Km)로 나뉜다. 우리가 하산 코스로 이용하려고 하는 ‘봉화골’은 오른편 방향이다. 하지만 덕신산 등 맞은편의 능선에 있는 산들과 연계산행을 원한다면 이곳에서 직진을 해야 한다.
▼ 하산 길도 역시 골짜기를 끼고 나있다. 이번에는 ’봉화골‘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곧이어 첨찰산 특유의 상록수림이 또 다시 시작된다. 숲은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다. 이렇게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숲은 흔치 않다. 그러니 구태여 발걸음 재촉할 필요는 없다. 온몸으로 숲의 기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아주 천천히 즐기듯이 말이다.
▼ 코끝에 걸치는 공기는 신선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이다. 산소음이온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전라남도 보건환경연구원‘에서 최근(2013년) 이곳 첨찰산의 공기질(空氣質)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다. 당시 공기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산소음이온은 cc당(최대값) 1천753개가 나타났다. 차량통행이 많은 도시지역이 0∼200개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산림치유물질로 널리 알려진 피톤치드 최대농도는 130pptv로 소나무가 우거진 산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상록활엽수 우점(優占)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오존의 농도는 28.5ppb/시간으로 대기환경기준 100 ppb/시간과 비교해 1/3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세먼지농도는 0.046㎎/㎥로 대기환경기준인 0.1 ㎎/㎥의 30∼40%에 불과했다.
▼ 내려오는 내내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이마를 스쳐가는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눈도 호사를 누린다.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동백잎이 빛을 발하며 길손을 유혹한다. 계곡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돌들 사이로 낙숫물도 떨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그렇게 20여분을 내려오면 급경사 등산로가 끝이 나면서 평지길이 나오고 그 길 끝자락에 개울을 가로지르는 데크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산행의 종점지인 ‘진도아리랑비’ 공원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임도(이정표 : 사천광장 0.7Km/ 첨찰산 2.2Km)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에는 ’진도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는 진도아리랑을 기념하는 비이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글씨와 그림,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잠시 후에 들르게 될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비롯된다. 남종화(南宗畵)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운림산방이 진도에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인 노래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은 정선, 밀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아리랑이 이곳 진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일상이란다. 밭일 하던 할머니도 장터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도 흥만 나면 어김없이 아리랑을 불러 젖힌다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구성진 아리랑의 노랫가락에 녹이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삶이 바로 노래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도아리랑‘은 부요적(婦謠的) 성격이 강한 서정민요이다. 현지에서는 ‘아리랑타령’이라고 부른다. 사설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설 내용에 욕·상소리·한탄·익살 등이 응집되어 부인네들의 야성을 거침없이 노출시키고 있으며, 또한 도서 지방의 지역성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사설의 형식은 2행 1연의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이루어지는 분장체(分章體) 장가(長歌)이다. 가창 방식은 기존 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설이 창작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덧붙여질 수 있는 선후창 형식의 돌림노래[輪唱]이다. 돌림노래란 여럿이 부를 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메김소리를 하고 나머지는 맞는소리(맞음소리)를 하는 것으로, 이러한 가창 방식은 집단 노동요의 전형적인 가창 방식과 일치한다.
▼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까지 등재된 ‘진도아리랑’은 비탄조의 ‘정선아리랑’과는 달리 ‘육자배기’ 가락에 판소리의 구성진 목청이 어우러진 진도 지방 특유의 정조(情調)를 지니고 있다. 혼자 부를 때에는 유장하고 슬픈 노래가 되어 신세타령과 같은 표출 기능이 두드러지지만, 노래판에서 여럿이 부를 때에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로 신명을 고양시키고 일체감을 조성·강화시킨다. 갑자기 집사람의 발뒤꿈치가 가벼워진다. 덩실거리는 어깨춤에는 흥까지 넘쳐난다. 진도아리랑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에 고양(高揚)이라도 되었나보다. 누가 저런 여자를 보고 60대라고 하겠는가.
▼ ’진도아리랑비‘ 근처에 ’아리랑 진돗개 시범 사육장‘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보인다. 진도하면 ’진도‘라는 섬의 이름보다도 섬에서 기르는 토종개인 ’진돗개‘로 유명세를 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진돗개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귀소본능(歸巢本能), 용맹성, 대담성, 결벽성, 수렵본능, 경계성, 비유혹성(非誘惑性) 등의 우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견이자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명견으로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인류가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이 개라는 것은 구석기시대 화석에서 개의 유골이 발견되는 데서 능히 입증된다. 진도의 자랑인 진도개는 가축으로서 사육하게 된 뚜렷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구전(口傳)에 의하면 다음의 4가지 유래설이 있다. 첫째, 남송시대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당하였을 때 남긴 남송국 개가 진도개의 시조를 이루었다는 설. 둘째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군이 강화도에서 관군과 몽골군에게 항거하려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일이 있었다. 그때 몽골군이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관군과 함께 진도에 원정하면서 남기고 간 개의 후손이라는 설. 그리고 셋째는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하였던 국영(관마) 목장의 병견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당시 몽골에서 수입했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우리나라 고유견이 있어 번식 유지해 왔는데 진도에 분포했던 개만이 육지와 격리되어 타견과 혼혈됨 없이 순수 번식으로 고유의 혈통을 보존하여 오늘의 진도개가 되었다는 설이다.
▼ ’아리랑비‘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사천일제’라는 저수지를 왼편에 끼고 걷다보면 저만큼에 사천리가 눈에 들어온다. 운림산방(雲林山房), 첨찰산(尖察山), 쌍계사(雙溪寺), 상록수림(常綠樹林) 등이 있는 사천리 일대는 ‘사천관광지(斜川觀光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고 관광진흥법에 근거하여 지정된 관광지는 아니다. 그저 진도군이 관내 관광지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지리적 권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남종화의 산실이라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호)에 이르게 된다. 작년엔가 둘러본 본 일이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럴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운림산방은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경사지를 다듬어 세웠는데 맨 위쪽에는 허련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있고 오른쪽 후면에는 사천사(斜川祠)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사는 소치의 문중 제각으로 매년 한식날 소치 선생의 6대조 가문이 춘향대제를 봉행하는 건물이다. 그 아래에는 돌담으로 둘러진 터에 살림집인 안채가 지어져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소치가 머물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밖에도 화실과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기념관 등이 있다. 소치는 1856년(철종 7)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1893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소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생가 등을 다 둘러본 뒤 소치기념관(小癡記念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진도 출신의 남종문인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허유, 1808~1892)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소치가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1980년에 운림산방 내에 건립하였다. 허련(허유)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20대 후반에 해남의 두륜산방에서 초의선사의 지도 아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공부했다. 1840년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평생 가장 소중히 모신 스승 추사 김정희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비록 남도의 섬에서 출생하기는 했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유(維)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남종화의 효시로 알려진 왕유(王維)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당대의 명사였던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민영익, 신관호, 권돈인, 정학연 등 권문세가의 고위 관리들과 교유한 그는 장안에 명성이 높았다. 소치를 일컬어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하고, 정문조는 여기에 더해 삼절이라고 평했다.
▼ 기념관은 영상실과 전시실로 구분되는데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畵脈)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가문(家門)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사항 등을 소개한다. 소치 허련의 「송죽매국」, 「양선죽창」, 미산(米山) 허형(許瑩)의 「고사선유」, 「팔곡백납병」, 그리고 남농(南農) 허건(許健)의 「양유춘색」, 「계산유곡」 등 소치의 작품들과 5대에 걸쳐 화가로 활동했던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소치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두는 남종화에 심취했다. ‘소치’라는 아호는 스승인 김정희가 내려주었는데 원나라 때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대치 황공망을 본떠 지은 것이다.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소치에 의해 풍미되기 시작한 남종화는 그의 가계에 의해 이어진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은 소치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로 그의 화풍을 이어받아 산수, 노송, 모란, 사군자 등을 잘 그렸는데 아버지의 화격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미산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을 낳았다. 남농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후 20세기 근대 화단에 한국화의 중심에 자리한 화가가 되었으며, 운림산방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남종화는 소치, 미산, 남농 3대에 걸쳐 이어져 왔고 이러한 가풍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화가로 활동하는 후손들이 많다.
▼ 이번에는 같은 부지 내에 지어진 ’진도역사관‘에 들러보기로 한다. 진도 지역의 역사유물을 보존·전시하고, 진도의 민속과 자연환경 등을 소개하기 위하여 설립한 전시관으로 2003년 10월 31일 개관하였는데 건축총면적은 1,710.87㎡이다. 진도지역 고유의 역사유물을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진도역사관은 삼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문화와 유배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민속유산을 보존하고 후배들에게 계승ㆍ발전시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 총 228점의 전시품이 갖추어져 있는 상설전시실은 선사/고대실(돌보습·돌낫·돌칼·고인돌 모형 등 전시)과 삼별초항쟁 코너(대동사강 영인본·삼별초 무기·용장산성 및 용장산 전투 관련 전시물·남도석성 모형 등 전시), 명량대첩 코너(조선시대 무기 모형과 명량대첩 해전 모형 등 전시), 유배문화실(문곡연보 영인본·목칼과 형틀 등 조선시대 형구 모형 등 전시), 역사의 발자취 코너(망헌선생 유집 영인본·근현대의 진도 지도와 사진 등 전시), 향토문화실(진도군읍지 영인본·화로와 베틀 등 생활도구·쟁기와 홀테 등 농기구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도 향토작가전시실(기획전시실)에는 허백련·하철경·박행보 등 진도 출신 작가들의 서화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진도의 역사와 현황, 민속과 자연환경 등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휴관일은 월요일이다.
▼ ’진도역사관‘의 건물 안에는 ’금봉전시관‘도 들어 있다. 이곳 진도가 배출한 걸출한 화가 중 한사람인 ’금봉 박행보(金峯 朴幸輔)‘ 선생이 기증한 산수화, 문인화 등 작품 109점을 전시해놓았다. 의재 허백련선생과 소전 손재형선생의 사사(師事)를 받은 금봉은 남도문인화의 맥을 이어온 한국 화단의 거목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차례 했으며, 그 기량을 인정받아 문화공보부장관상과 국무총리상을 수상해 남도화맥을 잇는 큰 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각종 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2003년에는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 귀경길에 고군면(古郡面) 바닷가에 위치한 회동리(回洞里)에 들러보기로 한다. 전국 10대 축제 중 하나라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珍島 神秘의 바닷길 祝祭)‘가 열기고 있기 때문이다. 옛 이름이 ’영등축제(靈登祝祭)‘인 이 행사는 음력 2월에 행해지는데 바람을 일으키는 신(神)인 ’영등할머니(뽕할머니라고도 부름)‘를 부르는 ’영등제(靈登祭)‘에서 비롯되었다. 영등할머니는 농작(農作)의 풍흉과 관계되는 농신(農神)의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일기가 순조로우면 풍작을 바랄 수 있으니 말이다. 진도군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와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축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열린다. 하지만 난 바닷길이 열리는 것을 구경하지 못했다. 하루에 두 번 열린다는 시간까지는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義新面 茅島里) 사이 약 2.8km 바다가 조수간만(潮水干滿, low tide and high tide)의 차(差)로 인해 바다 밑이 40여m의 폭(幅)으로 물위로 드러나 바닷길이 열린다는데 신비로움이 있다. 바닷물은 하루 두 차례씩 들고 나는데 이 현상을 보기 위해 매년 국내외 관광객 수십만 명이 찾아와 바닷길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약 1시간의 기적을 구경한다. 참고로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 씨가 진도에 놀러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산이야기(전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상의 얼을 되새기며 걷는 도심 속의 산, 어등산(‘18.2.10) (0) | 2018.02.22 |
---|---|
흙산이면서도 암릉에다 조망까지 갖춘 광양의 가야산(‘17.7.30) (0) | 2017.08.10 |
기암괴석의 바윗길에다 조망까지 뛰어난 '한반도의 대미' 달마산(‘17.4.18) (0) | 2017.05.02 |
도심의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월랑산-태청산-장암산(‘16.9.10) (0) | 2016.09.19 |
작은 산세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골격을 지닌 제석산(‘16.6.4) (0) | 2016.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