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산(遊鶴山, 839m)

 

산행일 : ‘16. 8. 13()

소재지 : 경북 칠곡군 가산면과 석적읍의 경계

산행코스 : 팥재도봉사유학산 정상헬기장신선대837m793m674m철탑다부동전적기념관(산행시간 : 3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자 모양으로 생긴 유학산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하지만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등성이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남쪽으로 높은 바위벼랑을 이룬 곳이 많다. 때문에 멋진 기암괴석과 뛰어난 전망대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을 눈요기 삼아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등산로 또한 잘 정비되어 있다. ‘6.25 격전지 순례 탐사로로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두었고, 어려운 곳에는 쇠사다리도 설치했다. 물론 줄도 매어져 있다. 다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시설물들이 눈에 띈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전쟁 당시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교두보(橋頭堡)이자 대구를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근원이 될 수 있었다. 산행 날머리에 그때의 승리를 기리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팥재에서 이곳까지의 구간은 ‘6·25전쟁 격전지 순례 답사로에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가족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자녀들에게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어떠한 희생이 따랐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팥재(경북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를 타고 대구방면으로 달리다가 다부원앞교차로(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서 79번 지방도로 옮겨 왜관방면으로 향한다. 잠시 후 학산1마을회관 앞에서 우회전하여 석적읍으로 넘어가는 길(유학로)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팥재 고갯마루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국도를 타는 게 싫은 사람들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다부 I.C까지 와서 곧장 79번 지방도를 타거나 경부고속도로 남구미 I.C에서 내려와 석적읍(칠곡군)을 통과한 후 유학로(軍道)를 타고 팥재까지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실제로 청마산악회의 버스는 맨 마지막 방법을 이용했다.




팥재 고갯마루에는 유학산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널따란 광장(廣場)의 한켠에는 축제(祝祭) 때나 사용할 법한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유학산의 비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닐까 싶다.



칠곡군 관광안내도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도봉사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50m쯤 더 들어가면 유학산 6.25격전지 순례 탐사로 안내도와 유학산의 내력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읽어보고 갈 일이다. 우리네 강산을 지켜낸 소중한 역사들이니까 말이다. 이곳 유학산은 1950729일부터 924일까지 있었던 2개월여의 전투 동안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2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이 나라를 구해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계적으로도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발판이 되었다. 그들의 충혼(忠魂)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며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유학산 산행이 우리에게 주는 큰 의의가 아닐까 싶다.



호국(護國)의 길을 따라가며 산행을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희희낙락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충혼(忠魂)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오로지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뛰었을 길이다. 당시 군인들이 들었을 소총 대신에 스틱을 들고, 전투화 대신에 난 등산화를 신었다. 그래 전진이다.



17분 쯤 걷다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유학산 정상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잠깐의 짬을 내여 오른편에 있는 도봉사에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수직의 바위절벽을 병풍삼아 들어앉은 절간이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다만 비구니들의 수행도량(修行道場)이니 그녀들의 청정(淸淨)을 깨뜨리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말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거대한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유학산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 할 수 있는 쉰질바위란다. 어른 키로 50질이나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학바위로도 불려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쉰질바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도 유명하단다.



깎아지른 절벽을 병풍삼아 도봉사(道峰寺)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사찰인데, 가파른 지형에 터를 마련하고 종각과 대웅전, 비로전, 석탑, 산신각, 요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19622월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신라시대의 고찰 천수사의 옛 터에 건립되었으며, 19984월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 등을 증축하였다.



절간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니 안내판 하나가 반긴다. 이곳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6.25전쟁 당시 이곳은 5번과 25, 907번과 908번 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1950813일부터 23일까지 11일간 국군 제1사단 12연대와 북한군 제15사단이 혈전을 벌인 다부동지구 전투의 최대 격전지(激戰地)였다. 고지(高地)의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뀌었고 유학산의 능선과 골짜기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때의 전투는 아군(我軍)의 승리로 끝났지만 우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포연(砲煙) 속에 사라져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국군전사자들의 유해(遺骸)를 발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곳 유학산에서만 123구가 발굴되었단다. 잘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론(無限責任論)도 적혀있다. 제발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심심찮게 올라오는 그와는 반대되는 뉴스들을 접하지 않도록 말이다.



산길은 안내판 옆(이정표 : 헬기장 640m/ 팥재 700m)으로 열린다. 통나무 계단이 반듯하게 놓인 길이다. 그러나 아까 들어갔었던 도봉사의 오른편으로도 산길이 열려있으니 참조한다. 이 오른편 산길을 따를 경우 쉰질바위(학바위) 등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왼편으로 오를 때 만나게 되는 바윗길의 멋진 경관은 포기해야만 한다. 낙동강의 조망도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통나무 계단을 오르고 나면 바윗길이 시작된다. 잘 손질된 길이 기암괴봉(奇巖怪峰) 사이로 이어진다.



들머리로 들어선지 10분쯤 지나면 길가의 좁은 공터에 놓인 벤치를 만난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되니 구태여 앉아보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의자의 뒤편으로 나가볼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처음으로 조망이 열리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칠곡의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아쉽게도 낙동강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무(煙霧)가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바윗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위험하지는 않다. 가끔가다 바위가 길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까짓 조금만 우회(迂廻)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4분 후,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조금 전에 집사람이 손짓하던 바위벼랑의 위이다. 벼랑의 초입에 위험한 암벽길임을 알려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조망만 즐기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무튼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곳이다.



10분 후, 또 다른 조망처를 만난다. 바위벼랑을 피해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에서다. 앞서 만났던 풍경들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아까보다는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그만큼 높이 올라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계단을 올라서자 산세(山勢)가 바뀐다. 바위가 사라지는 반면에 길은 고와진다. 흙길로 변한다는 얘기이다. 경사(傾斜) 또한 완만해진다. 오늘같이 무더운 날에도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10분쯤 오르면 이정표(유학정 0.14Km/ 도봉사 0.64Km)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이어지는 산길은 더욱 고와진다. 이번에는 아예 바닥에다 덕석까지 깔아 놓았다. 장마 때의 질퍽거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폭신폭신한 것이 여간 걷기 좋은 게 아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을 만난다. 유학정(遊鶴亭)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정자 앞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839고지 탈환전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실질적인 정상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다. 실제 정상은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이곳 '839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 대구를 공격하려는 공산군과 이를 막으려는 한국군들 사이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주야간에 9번이나 그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고, 당시의 전투에서 아군만 하더라도 600여명이나 목숨을 잃었단다.




정자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웃자란 나무들로 인해 아랫도리가 잘려나가기도 하지만, 동쪽의 팔공산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왜관과 굽이치는 낙동강 물줄기, 그리고 구미의 금오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안내판도 보인다. 인근의 소학산과 기선산, 자고산, 숲데미산은 물론 낙동강과 경부고속도로까지 조망이 된다고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안내도는 자리를 잘 못 잡은 것 같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정자의 아래에다 세워놓은 탓에 경관과 그림의 대비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림의 내용도 문제다. 사진 형태의 그림에다 위치를 표시해야 이해하기가 편한데도 이 안내도는 지도에다 위치를 표기하는 식으로 그려 놓았다.



능선을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도봉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다부리 4.5Km/ 도봉사 0.6Km/ 유학정 0.2Km)를 만나고 곧이어 유학산의 실제 정상에 올라선다.



유학산의 실제 정상은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10m 정도를 들어가니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흉물스런 무인 통신시설이 홀로 길손을 맞는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세울만한 공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유학정 앞에다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나 보다. 참고로 유학산의 원래 이름은 유악산(流嶽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그리 적고 있는 것에 근거한다. 이 문헌은 이 산을 일러 인동현의 동쪽 10리에 있으며, 인동현의 진산이다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지도(朝鮮地圖)’에도 '유악(流岳)'이라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유학산(留鶴山)'이라고 기재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현재 쓰고 있는 '유학산(遊鶴山)'이라는 이름은 ‘1872년 지방지도에 처음 나타난다. 학이 노니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헬기장을 지난다. 사용한지 오래인 듯 웃자란 잡초들만이 무성하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바위들의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바위봉우리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주는 곳들이다. 하지만 정규의 등산로만 고집해서는 이런 조망을 즐길 수가 없다. 모두가 다 등산로에서 몇 걸음씩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837m봉 방향의 조망, 중간쯤에 보이는 암릉이 신선대이다.



바윗길이긴 해도 위험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등산로가 바위들을 피해서 나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철계단 등의 시설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신선대에 이른다. 유학산 제일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몇 그루의 노송(老松)이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까마득한 벼랑 위에는 대여섯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반석(盤石)이 있다. 반석에 앉아 산하를 굽어보면 신선이 된 듯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고 흐뭇하다. 신선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일 것이다.




신선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아니 전체가 다 바윗길은 아니다 곳곳에 바윗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바위길 구간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똑 같은 특징을 지닌다. 오로지 오른편만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백 년을 살아왔음직한 노송(老松)들이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이 보통이 아니다. 기암절벽과 낙락장송이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잘 그린 것들이다.



신선대를 지난지 20여분 만에 유학산의 제2봉인 837m봉에 오른다. 유학정에서는 50분이 걸렸다. 높이가 상봉과 2m 차이에 불과해 또 다른 주봉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선지 일부 지도에는 두 봉우리 모두를 유학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열 평쯤 됨직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1950813일부터 924일까지의 전황을 설명한 상세한 상황판을 세워 놓았다. 당시 이 '837고지'는 대구 진입로를 방어하는 최고 요충지였다. 인민군 제13사단이 먼저 점령한 고지를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13의 숫적 열세를 딛고 탈환한 곳.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매일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참 이정표(674고지 1.24Km/ 820고지 600m)가 보이기도 한다. 비록 전황안내판 아래에서 나뒹굴고 있지만 말이다.



837m봉을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유학산의 또 다른 명물로 지도에는 ‘V자형 소나무로 표기되어 있다. 산길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양 옆으로 휜 가지를 뻗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난 젊은가 보다.



‘V자형 소나무에서 12분 정도 더 가면 봉우리 하나가 나온다. 지도에 836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봉우리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조망 역시 허락되지 않는다. 그냥 지나쳐버리면 되겠지만 길 찾기에 주의는 필요하다. 정상 직전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뉘는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천평리(가산면)로 내려서게 되니 주의한다.



이후로도 바위등성이를 타는 산행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13분 후에는 또 다른 바위 전망대에 올라선다. 아까 지나왔던 신선대보다도 한결 더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멋진 전망대이다. 앉아서 쉴 자리도 더 넓고 편한 것은 물론이다. 발아래에는 전적기념관이 있는 다부동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한가운데를 중앙고속도로가 ‘S'자를 그리면서 지나간다. 황학산과 백운산, 가산 등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옴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왜관과 구미, 대구 시내도 시야에 잡힌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가파르게 아래로 내려섰다가 짧게 올라서면 793m봉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방향표지판이 떨어져 나간 빈 스테인리스 막대 하나와 삼각점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삼각점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해서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광주 출신의 산악인 백계남씨가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793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주변은 온통 철쭉들 천지, 봄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꽃 잔치가 볼만 하겠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유학산의 동쪽 끝봉인 674m봉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674고지 탈환전안내판과 이정표(다부동 전전기념관 1.56Km/ 837고지 1.24Km)가 자리를 지킨다. 이곳은 1950813일부터 92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다. 국군 1사단은 인민군 13사단과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국군이 8부 능선까지는 여러 차례 올랐지만 고지에서 아래로 던져대는 수류탄 때문에 번번이 분루(憤淚)를 삼키며 패퇴해야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다 그해 822일 백병전(白兵戰) 끝에 고지 탈환에 성공한다. 그 뒤로도 반격과 재탈환의 공방전이 924일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674m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산길은 넓을 뿐만 아니라 통나무계단을 놓는 등 잘 닦여 있는 편이다. 거의 임도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내려서는 게 쉽지만은 않다. 바닥의 흙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데다가 수없이 많은 돌들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발을 내려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35분쯤 내려오면 오른편 산자락에 송전탑(送電塔)이 보인다. 첨부된 지도에 철탑이라고 표시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곳에서 송전탑으로 연결되는 길이 하나 보인다. 혹시 674m봉 근처에서 이곳으로 곧바로 내려오는 길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민가를 만난다. 다부동(多富洞) 마을에 내려선 것이다. 다부동은 부자들이 많은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이 유유자적 평화롭던 동네는 갑자기 몰아닥친 한국전쟁이란 참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개전 2개월 만에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은 잠시 후 전적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산행날머리는 다부동 전적기념관 주차장(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민가(民家)를 만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중앙고속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농로(農路)를 따라 잠시 걷다가 고속도로의 교각 아래에서 왜관으로 가는 79번 지방도를 건너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유학산을 낀 다부동은 대구 사수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무려 9차례나 뺏고 뺏기기를 거듭하며 온 산과 들판은 선혈로 물들었다. 다부동 전투는 안강 전투와 함께 대구를 지켜낸 전투였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전사 상 빛나는 전투였다. 지금은 비록 그 비극의 흔적이 거의 다 지워졌지만, 그 충혼(忠魂)의 역사만은 남겨두었다. 50여 일 간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적기념관은 13,220의 부지에 전시실, 구국관, 주차장이 있고, 구국용사 충혼비, 구국경찰 충혼비, 백선엽장군 구휼비, 조지훈 시비 등이 있다. 248의 전시실 안에는 45구경 권총, 인민군 다발총 등 무기 장비 59점과 6.25전쟁 약사, 다부동 전투 약사, 그림 등 전시물 126점이 있다. 실외에는 비행기 2, 전차 2, 장갑차 2, 나이키유탄 대포 8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