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당산(桂堂山, 580.2m)
산행일 : ‘16. 5. 1(일)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복내면과 화순군 이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복내우체국→복내교회→능선→철쭉군락지→헬기장→계당산→임도→능선→쌍봉사(산행시간 : 2시간 5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계당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전국의 웬만한 산들을 다 누볐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그 무언가가 없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세울 게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계당산을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늘어났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만큼 이 산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른 볼거리를 갖고 있다.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 ‘쌍봉사(雙峰寺)’이다. 사실 계당산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쌍봉사를 모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다졌다는 철감선사가 창건했고, 그와 관련된 다수의 국보급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절이 그만큼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쌍봉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는 사람들로 넘친다. 그러나 그들은 절만 둘러보고 갈 뿐 계당산은 오르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던 계당산이 요즘 들어 부쩍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로운 철쭉 산행지로 뜨고 있다는 것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점과 비록 광활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화사하게 핀 철쭉무리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한번쯤은 나들이 삼아 찾아볼만한 산임에 분명하다. 다만 햇볕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코스의 특징 때문에 봄철이 아닐 경우에는 산행이 고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
▼ 산행들머리는 복내면사무소(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호남고속도로 주암 I.C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타고 보성방면으로 달리면 15번 국도가 합쳐졌다 다시 나뉘는 곡천삼거리(순천시 송광면 봉산라)와 용암삼거리(보성군 문덕면 용암리)를 지나 복내면의 소재지인 복내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복내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우회전을 하면 저만큼에 우체국이 보인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우체국을 왼편에 끼고 난 길로 들어서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입구에 ‘선돌(立石)마을’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또한 ‘계당산 등산안내도’도 보인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살펴보고 갈 일이다. 계당산 정상까지는 5.9Km, 짧지 않은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갈림길이 많은 것으로 보아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골목 끝에 있는 복내교회를 지나면 11시 방향으로 콘크리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곧이어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숲길)↑ 5.4Km/ 소씨제각 삼거리→ 1.3Km, 계당산 정상 5.3Km/ 복내면사무소↓ 0.2Km)을 만난다. 오른편은 소씨제각을 거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왼편으로 향한다. 조금 더 돌기는 해도 숲길을 걷는 게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 4.98Km/ 복내면사무소↓ 0.52Km)을 만난다. 포장길과 헤어져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비록 포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임도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다.
▼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편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만난다. 아무래도 오늘은 행복한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처음부터 편백나무 숲길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바로 편백나무(Phytoncide)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백나무 숲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뒤이어 배턴 터치((baton touch)를 하는 나무 역시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진 소나무이니까 말이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물론 고도(高度)도 높여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른편으로 크게 휘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산길은 소나무 숲속으로 나있다. 그리고 점점 더 깊어져 간다. 코끝을 간질여오던 향기가 점점 더 짙어져 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소나무 숲길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참나무 숲길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 산길은 구불구불, 이런 길은 느릿느릿 걸어야만 제격이다. 연녹색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길가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누군가 그랬다. ‘이른 봄의 연록(軟綠)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이런 산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 가끔은 산자락이 훤해지기도 한다. 요즘의 대세인 편백나무를 심으려고 벌목(伐木)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그 덕분에 조망이 잘 터진다. 이름 모를 산들이 늘어서 있는 왼편 산자락 아래에는 계산마을(복내면)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동네 앞 들녘이 산골치고는 제법 넓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복내면 소재지인 복내리이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비봉산일 것이다. 그 왼편이 산들은 장채산과 두봉산일 거고 말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굵은 쇠기둥 위에 세운 안테나 보인다. 그리고 곧이어 갈림길이 없는 이정표(계당산 정상 4.4Km/ 복내면사무소 1.2Km)를 만난다. 잠시 후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은 느낌의 산길이 계속된다.
▼ 바람이 시원한 소나무 숲속 그늘을 걷는다. 중간에 흔적이 희미하긴 하지만 갈림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치고 볼 일이다.
▼ 이후로도 산길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없는 보드라운 흙길이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이정표(계당산 정상 3.2Km/ 복내면사무소 2.8Km)를 만난다. 이번에도 역시 갈림길은 없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정표들의 거리표기가 들쑥날쑥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등산로에 심혈을 기울인 보성군청의 노고를 감안해서 그냥 넘기기로 한다.
▼ 5~6분쯤 더 걸으면 임도(이정표 : 계당산 정상↖ 3.0Km/ 소씨제각 삼거리→ 1.0Km/ 복내면사무소↓ 2.5Km)를 만난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갈려나갔던 소씨제각을 경유하는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임도를 따른다. 넓고 평탄한 길이다. 4분쯤 후 ‘내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 2.7Km/ 내동마을→ 0.8Km/ 복내면사무소↓ 2.3Km)을 만난다.
▼ 잠시 후 잘 가꾸어진 ‘파주 염씨’ 묘역(墓域)이 나오고 산길은 묘역의 왼쪽 뒤로 올라간다. 그리고 9분 후에는 또 다른 ‘내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 2.1Km/ 내동마을→ 1.5Km/ 복내면사무소↓ 3.4Km)을 만난다.
▼ 이런 길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걷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연다. 크게 숨을 들이킨다. 세상의 모든 청량한 것들이 모두 다 들어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은 웰빙(well-being), 아니 힐링 (Healing)산행이다. 요즘의 화두(話頭)가 힐링인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치유하자(Heal the World)’고 노래한 이후, 힐링은 주위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힐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을 구속했던 빠름을 버리고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첫 단추 아닐까 싶다. 문득 ‘너무 빨리 달리면 경치만 놓치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놓치게 된다.’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귀가 아닐까 싶다.
▼ 5분쯤 더 걸었을까 벤치 두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쉬었다가기로 한다. 정상어림에는 쉼터가 없을 거라는 섣부른 예단(豫斷) 때문이다. 하여간 준비해 온 막걸리로 피로를 풀어본다. 하긴 산길이 하도 편하다보니 지친 기색들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오고가는 정담 속에 술잔을 돌리다보니 20분 이상이나 흘러버렸다.
▼ 쉼터 부근에서 ‘화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계당산 정상↑ 1.5Km/ 화정마을→ 1.8Km/ 복내면사무소↓ 4.0Km)을 저금(分家의 전라도 방언) 내보내고 산행을 이어간다.
▼ 이후부터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산들에 비하면 가파르다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할 정도로 밋밋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완만한 구간이 곳곳에 섞여있기까지 하다.
▼ 능선이 고도(高度)를 높여갈수록 철쭉은 점차 그 개체수를 늘려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주변이 온통 철쭉으로 가득 차버렸다. 산길은 철쭉들 사이로 나있다. 이제 막 꽃 몽오리를 열고 있는 철쭉들에게 눈을 맞추면서 2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오른쪽 북사면(北斜面)에 광대하게 펼쳐진 철쭉군락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 철쭉은 상당히 너른 평원 위에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덕분에 주변에는 햇볕을 가려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직사광선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그랬다. “진달래가 ‘봄의 전령’이라면 철쭉은 봄의 정점에서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다.”고. 햇살이 이렇게 따갑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오월 초하루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이렇게 무더운 걸 보면 올해는 철이 이른 게 분명한 모양이다. 아무튼 철쭉의 유혹은 무엇보다도 강렬하다. 완전한 개화(開花)까지는 아직은 며칠 더 기다려야하지만 이 정도의 선홍빛 아름다움만으로도 나그네를 유혹하기엔 별 무리가 없다.
▼ 신라시대의 향가(鄕歌) 중에 헌화가(獻花歌)가 있다. ‘붉디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 한다면/ 저 꽃을 바치겠나이다.’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꽃을 탐내는 수로부인(신라 선덕왕 때 순정공의 처)에게 신비한 노인이 꽃을 바치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꽃이 철쭉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아리따운 귀부인까지 반했겠는가. 그 아름다움을 쫓아 두리번거려 보지만 아직은 조금 덜 여물었다. 아쉽게도 만개를 하려면 2~3일은 더 있어야할 것 같다. 문화행사인 철쭉제례를 5월5일에 열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점을 감안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철쭉은 5월 초부터 남녘에서 피기 시작한 다음 북상해 5월 말∼6월 초에 전국 산하를 붉게 물들인다.
▼ 군락지의 한가운데에는 벤치를 놓여 두었다. 따가운 뙤약볕에 누가 앉을까마는 등산객을 챙기는 마음만은 고맙기 짝이 없다. 벤치의 뒤에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2개의 바위가 버티고 있다. 마치 보초라도 되는 양 의젓하기만 하다. 바위에 올라서면 조계산과 모후산, 북쪽의 무등산이 아련하다.
▼ 사실 계당산의 철쭉은 내놓고 자랑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래봉이나 황매산 등은 차지하고라도 이 부근에 있는 일림산이나 사자산보다도 그 규모(약 3만여㎡)가 한참이나 왜소하다. 그리고 화사함 또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인파에 묻혀 자기 의지에 관계없이 밀고 밀리는 실랑이를 해야만 하는 유명산들에 비해 호젓한 나만의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나를 더한다면 전국 각지의 철쭉들이 연분홍색을 띠는 데 비해 이곳은 진한 선홍빛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 군락지를 빠져나오면 몇 개의 벤치가 놓여있는 널따란 분지(盆地)를 만난다. ‘헬기장(헬기장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계당산 정상↑ 0.4Km/ 개기재→/ 복내면사무소↓ 5.1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곁에 있는 또 다른 이정표(계당산 정상↑ 0.4Km/ 개기재(호남정맥구간)→ 2.8Km/ 복내면사무소↓ 5.1Km)에 개기재 옆에다 ‘호남정맥구간’이라고 부기(附記)를 해놓았다. 그러고 보니 호남정맥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개기재에서 계당산과 봉화산, 군치산, 봉미산을 거쳐 곰치(웅재)에 이르는 제16구간이 말이다. 참고로 호남정맥(湖南正脈)이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주요 산으로는 경각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호남지역의 명산들을 거의 다 품고 있다.
▼ 잠시 후 의외의 풍경을 만난다. 굵직한 노송(老松)들이 늘어선 소나무 숲이 나타난 것이다. 여느 철쭉 군락지들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만나왔던 철쭉 군락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한결같았다. 광활한 초원 위에 고만고만한 철쭉들만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 그늘을 가릴만한 나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이라도 축이면서 쉬었다가기 딱 좋은 장소이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늘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요 아래 그늘에서 준비해온 막걸리를 모두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걷고 있는 나그네를 따라 철쭉들이 보조를 맞추고 있다. 철쭉은 ‘사랑의 즐거움’이란 꽃말을 가진 예쁜 꽃이다. ‘멀리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입술’ 같다고 표현되고, 길 가던 나그네의 걸음을 자꾸 멈추게 했다는 의미로 ‘척촉(躑躅)’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꽃모양이 비슷하지만,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오는 것이 진달래고 잎과 꽃이 같이 피는 것이 철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침목(枕木)을 깔아 만든 계단을 오르면 널따란 구릉(丘陵)이 나타난다. 그중에 가장 높은 곳을 계당산 정상으로 보면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이 지났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뺐으니 순수하게 걸었던 시간으로 보면 된다.
▼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판독 불가), 그리고 두 개의 이정표(#1 : 쌍봉사→ 3.3Km/ 노동←/ 복내면사무소↓ 5.5Km, #2 : 쌍봉사 3.3Km/ 개기재 3.2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정상석 뒤편에 계당산의 유래를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판이 하나 보이지만 ‘계양산 정상’이라는 글씨를 빼놓고는 모두 다 지워져버린 흉측한 몰골로 방치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계당산(桂棠山)의 원래 이름은 중조산(中條山)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의 기록이나 지도에는 중조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계당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시야(視野)가 사방으로 탁트인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주암호 방향의 조계산을 위시해서 모후산과 천봉산, 화학산 그리고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등이 차례대로 펼쳐지는 걸 볼 수 있다. 천봉산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무등산이 아닐까 싶다.
▼ 하산을 시작한다. 쌍봉사 방향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호남정맥(왼편의 노동방향)과도 헤어짐은 물론이다. 내려가는 길 역시 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내리막 능선에 산길 또한 널찍하면서도 또렷하다. 화순쪽 방향은 길이 닦여있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이다. 달리진 점도 있기는 하다. 올라올 때는 소나무 숲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수한 참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 중간에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살짝 올라섰던 산길은 이내 원래의 순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20분 조금 못되어 임도에 내려선다. 그리고 이곳부터 얼마간은 임도를 따른다. 쌍봉사가 위치한 왼편의 화순방향임은 물론이다. 널찍한 임도는 편하다. 대신 나쁜 점도 있다. 햇볕을 가려줄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자칫 여름철에라도 찾았을 경우 소름끼치는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임도는 20분 정도 계속된다. 중간에 희미한 오솔길이 보이기도 하지만 무시하고 곧장 임도를 따른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다가 임도를 버리고 오른편 능선을 탄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들머리에 상당히 많은 산악회 리본들이 매달려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상당히 거칠어진다. 길의 흔적이 희미할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나무들까지 가로막고 있다. 한마디로 애를 먹으며 진행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 탓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가다 나타나는 산악회의 리본들만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특히 난감한 구간이 나타날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국제신문’의 리본들은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면 쌍봉사로 연결되는 843번 지방도에 내려서게 된다. 그리고 쌍봉사가 있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편 길가에 편백나무가 도열해 있는 멋진 길이다. 내려오는 길, 왼편 산자락에 절간을 닮은 한옥(韓屋)이 그림같이 앉아있다. 표지석을 보니 ‘이불제(耳佛齋)’란다. ‘솔바람에 귀(耳)를 씻고 부처(佛)의 경지를 맛보고 싶은 집(齋)’, 그렇다면 ‘암자가 들려준 이야기’의 저자 정찬주선생이 머물고 있는 집이 분명하다. 그의 저서 몇 권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한번 들러볼까 하다가 그의 청정을 깨뜨릴까 두려워 발길을 돌리고 만다. 잠시 후 쌍봉사에서 만날 그의 흔적(漢詩를 우리나라 말로 옮김)들로 대체하기로 하면서 말이다.
▼ 산행날머리는 쌍봉사 주차장
도로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저만큼에 천년고찰(千年古刹) 쌍봉사(雙峰寺)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주차장이 쌍봉사의 일주문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10분이 걸렸다. 산행 도중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오늘 걸었던 거리는 총 8.8Km이다. 결과적으로 시간당 3Km를 걸은 셈이니 얼마만큼 산행이 수월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하기 전에 먼저 쌍봉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런데 일주문(一柱門)의 현판이 조금 특이하다. ‘00산 00사’라고 써진 게 보통인데 이곳은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이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어쩌면 절의 이름보다는 간직하고 있는 절의 역사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앞의 쌍봉(雙峰)은 이 절을 창건했다는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분명하고, 뒤이어 나오는 사자문(獅子門)이란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열었다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확실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쌍봉사(雙峰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경문왕 때 중국에서 돌아온(문성왕 9년, 847년)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창건(주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했다. 이후 그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고, 창건주의 도호(道號)를 따 사찰 이름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절의 앞과 뒤에 봉우리가 두 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중건(1628년 : 인조 6)과 중창(현종 8년과 경종 4년)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탑)‘와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부도비(탑비)‘가 있다. 그 밖에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堂宇)들이 있으니 참조한다.
▼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대웅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四天王)에 놀라 냉큼 통과해 버리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잠시 멈춰 서서 천왕문의 양 기둥이 만들어내는 네모 안에 대웅전을 넣어보기 바란다. 사진전에 출품해도 될 만큼 멋진 풍경이 나타날 것이다. 특히 ‘부처님 오신 날’을 코앞에 둔 오늘 같은 날에는 화려한 연등들까지 더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 쌍봉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물은 누가 뭐래도 12m 높이의 대웅전이다. 보물(제163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失火)로 건물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2년 수리할 당시의 기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란다. 하여간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전각이 아니라 탑이라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기에 불타버린 것이 더욱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감돌아 난 오솔길을 따라 어느 정도 비탈을 올라가면 트인 곳이 나온다. 거기에 통일신라시대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시대에 걸쳐 첫손에 꼽히는 철감선사의 부도(탑)와 부도비(탑비)가 있다. 철감선사과 관련된 유물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짚고 넘어가 보자. 쌍봉사의 창건에 관한 얘기이다. 동리산 태안사에 있는 혜철(慧澈, 785~861 惠哲이라고도 씀)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무주(지금의 광주) 관내의 쌍봉사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는 쌍봉사가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쌍봉사를 창건했다는 얘기와는 맞지가 않는다. 결국 철감선사가 주석(駐錫)하던 시기에 절의 사세(寺勢)가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의 부도비(탑비)’는 옆에 있는 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기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작이 분명하다. 부도비는 이수의 네 면에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 용의 형상을 현란하게 새겼다. 앞면 가운데에 쌍봉산철감선사탑비명(雙峯山澈鑒禪師塔碑銘)이라는 전액이 두 줄로 새겨져 있다. 윗부분에 불꽃 모양의 귀꽃 세 개를 세웠는데 맨 오른쪽 한 개는 없어졌다.
▼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탑)’은 우리 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가받으며,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석조 부도의 기본 양식인 팔각 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대석이 1매, 중대석과 상대석이 1매, 몸돌이 1매, 지붕돌이 1매로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지붕돌 위에는 동그란 찰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 수법에서는 목조 건축 양식을 본뜨고 있어서 그 무렵 건축 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57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나오려는데 오행시(五行詩)가 적힌 시판(詩板)이 보인다.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라는 시가 적혀있는데 초의선사가 최초로 썼던 작품이란다. 조선 후기의 대선사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가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대흥사와 백련사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곳 쌍봉사에서도 한때 참선을 했던 모양이다. 이유 없이 절간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유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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