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迦智山, 511m)

 

산행일 : ‘15. 4. 6()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장평면과 유치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보림사 주차장학생의집 입구원당암소나무산림욕장가지산상봉망원석팔각정비자림산림욕장보림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가지산은 500m를 겨우 넘기는 아주 자그만 산이다. 그러나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산세(山勢)만은 여느 큰 산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대한불교 선종(禪宗)의 종찰(宗刹)로 대접받는 보림사(寶林寺)를 품고 있는 것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다. 명산(名山)과 명찰(名刹)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지산은 분명 흙산이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정상 어림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규모가 제법 크다. 따라서 부드러운 산길을 산책삼아 쉬엄쉬엄 오르다가, 정상 근처에서는 짜릿한 손맛과 더불어 조망까지 즐길 수가 있다.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 하산 길에는 보림사에 들러 국내에서 네 번째로 많다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둘러보는 재미까지도 있다. 가족나들이 겸해서 찾아도 좋을 거라는 얘기이다. 이 정도의 산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 찾아온다고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보림사주차장(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광주 제2순환도로(호남고속도로 문흥 J.C에서 연결된다) 지원교차로(광주시 동구 용산동)에서 빠져나와 22번 국도와 29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이양면소재지인 오류리까지 온다. 이어서 83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장흥방면으로 달리다가 경림교차로(장흥군 장평면 봉림리)에서 820번 지방도로 옮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유치교차로(장흥군 유치면 용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림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차에서 내리면 일주문이 시선을 끈다. 흔히 접할 수 없는 화려하고 장중한 외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작(包作)이 여러 겹 중첩되어 화려하고 장중한 일주문 정면에는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안쪽에 걸린 선종대가람이라 적힌 현판은 보림사의 역사적 위상을 한마디로 대변해 준다. 현판 구석에는 옹정(雍正) 4, 즉 영조 2(1726)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다. 일주문 또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를 오른편에 끼고 난 820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가로수로 심어진 단풍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다. 벚꽃나무 가로수에 비판적이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요즘 가로수의 대세(大勢)는 벚꽃나무이다. 오나가나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벚꽃나무 천지이다.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를 모르겠다.’며 탄식하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만날 수 있으니 두말하면 무얼 하겠는가.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많다. 벚꽃이 비록 일본의 국화(國花)이긴 하지만 그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일본 벚나무의 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왕벚나무를 가져가서 개량해서 그네들의 국화를 만들었고, 실제 우리가 아름답다며 사방에 심고 있는 벚나무들이 왕벚나무가 아닌 그네들이 개량해 놓은 종자라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왕에 그런 항변을 하고 싶다면 우리네 손으로 개량한 품종을 더 널리 심고 난 뒤에 했으면 좋겠다.



잠시 후 소나무산림욕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고(이정표 : 약수터0.2Km, 학생의 집 0.6Km/ 소나무산림욕장0.8Km/ 보림사0.3Km), 또 다시 그만큼 걸으면 약수터가 나타난다. 빼어나다고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물맛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다.



5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편은 장흥 학생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삼거리 오른편에 커다란 빗돌(碑石) 하나가 보인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이 고장 인사들의 투혼을 기리는 인동초민주동지기념비란다. 그들의 명단(名單)’비를 세우는 취지문을 적은 검은 빗돌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빗돌의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난 길이 하나 나타난다. 가지산 정상으로 가려면 이 길을 따라야 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약수터0.5Km, 소나무 산림욕장 0.7Km, 가지산 정상 1.3Km/ 보림사0.8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로 들어선다. 포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임도(林道)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넓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부담없이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10분 남짓 후 원당암 갈림길’(이정표 : 소나무 산림욕장0.5Km, 가지산 정상 1.1Km/ 원당암0.1Km/ 보림사1.0Km)을 만난다.



원당암으로 향한다. 이정표에다 등산로가 아니라고 표시해 놓았지만 어떻게 생긴 암자(庵子)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 잠시 걸으니 원당암이 나타난다. 전통과 현대가 합쳐진 괴상한 외형을 가진 건물이다. 윗부분은 전통적인 사찰의 지붕이 분명한데, 사방을 둘러싼 벽면은 온통 인조목(人造木)과 유리창들로 둘러싸여 있다. 내심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기를 바랐던 내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순간이다.



삼거리로 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어른의 허리춤에나 찰 정도로 자란 산죽(山竹) 숲 사이로 나있다. 경사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만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잠시 후 약수터 갈림길’(이정표 : 소나무 산림욕장0.2Km, 가지산 정상 0.8Km/ 약수터25m/ 학생의 집0.7Km)을 만난다.



몇 걸음 들어서니 약수터가 나온다.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물이 넘쳐흐르고 있어 마시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가팔라진 산길을 잠시 오르면 의미 없는 이정표(가지산 정상 0.7Km/ 보림사 1.3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소나무산림욕장(이정표 : 가지산 정상 0.6Km/ 약수터 0.2Km, 학생의 집 0.7Km/ 비자림 산림욕장 0.9Km, 보림사 1.1Km)이 나타난다. 줄사다리와 철봉 등 운동기구와 벤치, 평상 등을 갖춘 쉼터로 조성해 놓은 공간이다. 이곳에 수령이 많은 소나무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소나무 산림욕장이라 이름을 붙였나 보다.



욕장에는 소나무에서 품어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질병과 신경안정, 그리고 피로회복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홍보판까지 세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배려까지 해두었다. 참고로 산림욕(山林浴)이란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향내와 살균성 물질(피톤치드)이 가득한 신선한 공기를 심호흡하며 심신을 건강케 하는 자연요법이다. 어떻게든 건강을 챙겨보려는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특히나 각광을 받고 있는 방법이다.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이용해서 정신안정과 피로회복, 그리고 여유와 낭만이 있는 산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최적화시켜 놓은 장소가 바로 산림욕장이다.



산림욕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비좁아 진다. 그리고 경사 또한 제법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알맞게 가파르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이정표(가지산 정상 0.4Km/ 소나무 산림욕장 0.2Km)가 세워진 곳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14분 후 전망이 트이는 바위에 이른다. 물론 산림욕장에서부터 소요된 시간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방향으로 볼 때 국사봉과 석교산, 광덕산 등일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암릉으로 볼 정도는 아니지만 바위가 널린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한 그루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암봉에 올라서게 된다. 탐진강을 막아 만들었다는 유치호()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주봉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암봉을 내려서서 흙길을 걷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바윗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상석이 있는 주봉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오르는 것을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고도(高度)를 높일수록 넓어져가는 유치호와 주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주봉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겨우 2.1Km, 그것도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산길을 오르는데 그렇게 걸렸으니 얼마나 서서히 올라왔는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하여간 정상은 봉우리의 위가 높게 솟아오른 형상이라서 너른 공간은 없다. 하지만 10여명 정도 앉을 자리는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라도 함께 있을 경우엔 서로간의 양보는 필수이다. 장소가 협소한 탓에 누군가 인증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할 경우엔 자칫 방해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암봉들의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상봉 방향이다. 세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 개에다 정상석이 있는 이곳 주봉, 그리고 조금 전에 지나왔던 암봉을 합치면 다섯 개가 된다. 어느 글에선가 가지산이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그 외에도 제암산과 천관산, 억불산, 수인산 등 주변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무등산과 조계산, 월출산 등 남도에서 내노라는 산들까지 시야에 잡힌다고 하지만 말하는 산들이 어느 것인지는 구분을 못하겠다. 산에 대한 내 앎이 아직도 초보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 방향의 첫 번째 암봉 옆으로 장평면의 들녘이 펼쳐진다.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생각보다는 너른 들녘이다. 고개를 조금 더 오른편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유치호가 나타난다. 그 넓이가 아까보다 조금 더 넓어졌다.


새를 닮은 바위도 보인다. 언젠가 가은산에서 이와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그 바위의 이름이 새바위였었다.




중간에 있는 작은 암봉을 지나, 또 다시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상봉의 앞에 있는 암봉(아래 사진은 상봉에서 바라본 전위봉의 풍경이다)이 기다린다. 이곳 역시 조망이 좋다. 특히 주봉 방향의 능선이 눈길을 끈다. 반대편에 있는 상봉 역시 볼만하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것이 별 탈 없이 오를 수 있을지 걱정까지 하게 만든다.





상봉으로 향한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를라치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위험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치고 오를 수는 있겠다. 다만 약간의 모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는지 산길은 벼랑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상봉에 올라선다. 아래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밋밋한 바위봉우리이다. 때문에 조망(眺望)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래서 주봉이 이곳보다 더 낮은데도 불구하고 정상으로 삼았나 보다. 상봉의 정상은 텅 비어있다. 이곳이 상봉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음은 물론이다.



대신 조망만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아까 주봉에서 바라보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주봉보다 고도(高度)가 놓아진 탓인지 그 범위가 더욱 넓어진 듯하다.



하산은 주봉 근처에서 시작된다. 상봉에서 주봉으로 되돌아가다보면 주봉 바로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들머리에 꽤나 많은 리본들이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산 길은 조금 가파르긴 해도 내려서는데 부담이 없는 순한 내리막길이다. 정상에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왔을까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전망대0.4Km, 보림사 1.1Km/ 소나무 삼림욕장0.7Km/ 가지산 정상0.5Km)로 나뉜다. 오른편은 아까 정상으로 올라갈 때 지났던 소나무 산림욕장으로 연결된다.



소나무 산림욕장갈림길을 지나면 적벽돌로 담을 두른 묘역(墓域)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5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멋진 바위를 만난다.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운 선돌, 즉 입석(立石)이다. 이 바위는 유치호()가 담수(湛水)되면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고향땅을 내려다보며 시름겨워했다고 해서 망향석으로도 불린다. 또한 옛날 근처에 은거하고 있던 스님들이 수양(修養)을 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선돌 아래는 바위벼랑이다. 그 덕분에 수인산과 사자산, 억불산 등이 잘 조망된다. ‘망원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멀리까지 잘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선돌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약수터(이정표 : 약수터0.5Km, 보림사/ 전망대0.1Km, 보림사 0.8Km/ 가지산 정상1.0Km)가 나온다. 하지만 우물은 메말라 있다. 관리가 안 되고 있어서 설사 물이 나온다고 해도 마실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보림사에 이를 수가 있다. 각자 들르고 싶은 곳을 정한 다음 방향을 잡으면 그만이다.



오른편 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무엇이 보일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탈을 잠시 오르면 등성이 턱에 전망대가 있다. 반듯하게 잘 지어진 팔각정이다. 국사봉과 뭇 산들이 잘 조망되는 곳에다 자리를 잡았다.



정자(亭子)에 오르면 천년고찰 보림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기록에 의하면 보조국사 체징이 입적(入寂)할 당시 이곳 보림사에는 800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절의 규모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수식어(修飾語)로만 여겼는데 사실이었던가 보다. 저리도 넓은 터에 자리 잡은 걸 보면 말이다. 사실 보림사가 중심이 됐던 가지산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선문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국사도 가지산문의 문도(門徒)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에 이르면서 가지산문 외의 다른 선문들은 모두 쇠퇴했다고 한다. 그때 가지산문 출신의 태고국사에 의해 구산선문이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조계종 모태(母胎)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림사를 선문(禪門)의 종찰(宗刹)이자 조계종의 모태라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약수터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비자림 산림욕장0.5Km, 보림사 0.6Km/ 보림사0.8Km/ 전망대0.3Km, 가지산 정상 1.0Km)을 만난다. 비자림산림욕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비자림산림욕장0.3Km/ 보림사0.4Km/ 가지산 정상1.1Km, 전망대 0.5Km)에서도 역시 비자림산림욕장 방향이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비자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아예 숲으로 변해버린다. 제법 굵은 것이 다들 50~60년은 너끈히 묵었을 것 같다(안내판에는 70~400년생이라고 적혀있다). ‘비자림(榧子林) 산림욕장에 이른 것이다. 비자나무는 제주도와 전남, 경남 등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난대성의 상록 침엽교목으로 표고 150~700m에서 주로 분포한다. 그 열매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며 특히 식용유를 얻기도 하는 등 사람에게 유용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비자림은 산림청과 ()생명의숲국민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주관한 10(209)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비자림은 군락으로 자생하는 비자나무와 물푸레, 노각나무가 상층림을 형성하고 하층에는 장흥 전통 `청태전'의 원료인 녹차가 비자와 함께 숲을 형성하고 있다.



산림욕장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벤치들을 여러 개 놓아두었다. 비자나무는 특유의 향기를 배출한다. 맡는 사람의 심신을 맑게 해주는 향기이다. 그 속에는 질병예방과 신경안정은 물론, 피로회복에 까지 효험이 있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까지 듬뿍 들어있다. 편하게 드러누워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실컷 마시고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산림욕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뭔가가 눈에 들어온다. 비자나무들이 각자의 번호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상단에 로고(logo)와 함께 장흥군이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장흥군에서 보호림(保護林)으로 관리하고 있나 보다.



비자나무 숲을 빠져나오는 길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장흥 청태전을 소개하는 홍보판이다. 청태전은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전통차 중 하나로서 전차(煎茶), 돈차(錢茶), 곶차(串茶), 단차(團茶), 떡차(餠茶)라고도 불린다. ‘세종실록지리지고려시대 19개의 다소(茶所) 중 장흥에만 13개소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장흥 전역에는 차나무들이 자생(自生)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까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그 차나무들이 바로 야생 녹차였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보림사

청태전안내판을 보았다 싶으면 곧이어 천년고찰 보림사(寶林寺)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이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1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하지만 최대한으로 느릿느릿 걸은 결과임을 감안해야 한다. 제대로 걸었을 경우 2시간30분이면 충분했지 않나 싶다. 하여튼 보림사는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 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 측면4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겉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860년경 헌안왕(憲安王 : 신라)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 804~880)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체징은 이곳에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로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열었다. 759년에 원표대덕(元大德表)이 세웠던 가지산사가 있던 자리이다. 880년 체징이 입적한 후에 헌강왕이 절의 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는데, 체징이 입적할 당시 무려 800여 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大刹)이었다고 한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三寶林)’으로 통하기도 한다. 참고로 보림사(寶林寺)는 대한불교의 선종(禪宗) 종찰(宗刹)로 대접받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말 가지산문이었던 태고국사에 의해 선문들이 통합되었다고 해서 조계종의 모태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보림(寶林)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보물의 숲'이기도 하다. 현재 국보 2, 보물 8, 유형문화재 15점이 있다. 불국사, 화엄사, 부석사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다. 이왕에 보림사에 왔으니 모두 다 둘러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는 대웅전의 오른쪽 위편에 있는 보조선사 탑비(普照禪師塔碑 : 보물 제158)보조선사 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 보물 제157)‘이다. ’보조선사 창성탑비로도 불리는 탑비는 보조선사가 입적한 지 4년 후인 헌강왕 10(884)에 세워진 부도비(浮屠碑)이다. 전체 높이는 3.46m이고 돌거북과 비신, 비석머리(이수)가 다 온전히 남아 있는데 9세기 말 석비 양식의 전형을 보이는 뛰어난 유물이다. 비석머리는 가운데에 가지산 보조선사 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가 적혔고, 비신에는 보조선사의 행장이 적혀 있다. 보조선사는 애장왕 5(804)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났는데, 성은 김씨였고 그의 집안은 지방의 명문이었다. 어려서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했으며 흥덕왕 2(827) 24세 때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현재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 터가 남아 있는 가야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보조선사 탑비의 위편에는 보조선사 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 보물 제157)’이 있다. 가지산문을 개산한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浮屠)이다. 보조선사가 입적한 후, 옆에 있는 부도비와 함께 헌강왕 10(884)에 세워졌다. 높이 4.1m의 팔각원당형 부도인데, 팔각 지대석 윗면에 아주 얕은 각형 굄을 한 단 새긴 후 그 위에 상··하대석과 몸돌, 지붕돌과 상륜부가 차례로 세워졌다. 그중 몸돌은 유난히 크고 넓다. 팔각의 각 면마다 우주가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기둥머리가 새겨져서 목조 건물의 짜임을 본뜨고 있다.



이번에는 원형대로 복원(52)되었다는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각(殿閣)의 앞에 국보 제44호인 보림사 삼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및 석등(石燈)이 있기 때문이다. 석탑은 두 기가 동서로 마주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석등이 한 기, 그리고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두 탑과 석등은 상륜부를 포함한 부재를 거의 다 갖추고 있는데,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나 석등 가운데 이처럼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두 탑 모두 신라 경문왕 10(870)에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졌으며, 두 탑 가운데 동탑의 높이는 5.9m, 서탑은 5.4m이며 구조는 똑같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상하 두 단의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3층 몸돌이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동탑에는 5, 서탑에는 3), 보개가 다 갖춰져 있고 다만 수연과 찰주 및 거기에 꽂히는 용차와 보주가 빠져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건립 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고 또한 원래의 모습을 거의 온전히 갖추고 있는 보림사 삼층석탑은 다른 석탑들의 건립 년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며 당시 석탑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석등 또한 석탑과 같은 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석등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석등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장식이 많이 된 예라고 한다. 높이는 3.12m이며 전체적으로 몸매가 단정하고 아담한 인상을 준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문을 열어본다. 선문 종찰 보림사의 주불(主佛)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 국보 제117)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조선사가 주석하던 당시부터 있던 불상이며 높이가 2.74m나 되는데 한국전쟁 때 이전의 대적광전은 불타 없어졌으나 이 불상은 무사했다고 한다. 좌대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만이 남아 있지만 신라 하대에 많이 조성된 철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명문(불상의 왼쪽 팔꿈치 위쪽에 860여 자에 이르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을 통해 조성 년대(헌안왕 2, 858)를 확실히 알 수 있어서 9세기 이래 지방의 선종 사찰에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데 기준이 된다고 한다.



대적광전 맞은편에 있는 사천왕문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역시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어느 절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외관을 지녔다. 하지만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만은 결코 범상하지가 않다. 중종34(1539)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다른 절들의 사천왕상은 보통 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魔鬼)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보물 제12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문까지 둘러봤다면 이젠 동부도 차례이다. 동부도는 일주문을 나선 후에야 만날 수 있다. 일단 절간을 빠져나온 뒤 820번 지방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왼편 산자락에 부도 6기가 있다. 그중 맨 위쪽에 있는 것이 보림사 동부도(東浮屠)’이며 보물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3.6m이며 팔각원당형 양식의 기본을 따랐고 상륜부를 포함한 모든 부분이 온전하게 남은 고려 시대 부도이다. 이 부도는 형태와 구조가 깔끔하고 세련되었으나 조각 수법은 입체감이 없고 섬약하다. 전체적으로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서 몸체가 가늘어 보이며 특히 중대석과 지붕돌이 좁으므로 그런 느낌이 더욱 강조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부도의 형식을 이어받으면서도 고려의 특징이 가미된 예로서 고려 시대 부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에필로그(epilogue), 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부처님 말씀과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5) 중심에서 개인의 참선과 깨달음, 성불을 중시하는 선종(9) 중심으로 큰 틀에서의 변화를 겪는다. 보림사는 바로 그 선종의 9개 산문(山門) 가운데 최초 문파인 가지산파의 중심이 된 절이다. 이런 절에 들렀으니 어찌 창건에 얽힌 설화 하나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 하버드대학의 연경도서관에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라는 책자가 있다. 조선 초기(初期) 세조 3(1457)에서 10(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여기에 보림사의 창건설화가 적혀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元大德表)이 인도의 보림사와 중국의 보림사를 거치며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데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더란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龍沼, 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는 메운 후에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보림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구전설화는 주인공을 보조국사로 삼고 있는데 그 내용도 조금 더 극적으로 변한다. 보조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나라 안 곳곳을 살피던 중에 가지산에 와보니 좋은 절터가 있는데 큰 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었다. 보조선사는 궁리 끝에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숯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흙짐과 숯짐을 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못은 메워졌다. 보조선사는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 쫓겨난 두 용은 서로 하늘에 오르려고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어 용소가 생겼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