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꾸려보지만 눈꺼풀은 그냥 주저앉고 싶다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온 국민이 열광하는 월드컵 때문인 것을...

경기가 한창일 때 사무실을 나설 수 밖에 없다.
경기를 못보는게 무지 서운하지만
처삼촌 벌초하듯 하라고 직원들을 독려한 덕분에 이시간에 나마 나갈 수 있었다.
이번 월드컵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나라 경기에 대한 국민의 열기를
한번쯤은 엿봐야 될 것 같아 무리인줄을 알면서도 약속을 해 두었다.
이게 바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전법....

광화문의 인파에 떠밀리다
내 파트너를 껴안겠다고 덤비는 이들이 무서워 찾아든게 심야극장....
동대문운동장 앞 포장마차에 쏘주 한병 시켜놓고 흘러가는 사람 구경....
택시를 못잡아 오가는 길에 들러본 호프집이 두세개....
겨우 집에 도착하니 애고 새벽 다섯시가 이미 지나버렸다.

대충 씻고...
굶을 수는 없으니 서너숫갈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고...
사무실에 나가 꾸벅거리다 겨우 집에 돌아왔으나 편히 눈을 붙일 수는 없다.
산행을 나서려면 일주일분의 일이 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 주문한 고기도 찾고 가락시장에 나가 상추에 배추에 마늘쫑까지...
집안일 제켜 놓고 야체를 씻는 날보고 울 큰놈 하는 말
"아빠! 이런 정성 절반정도만 우리에게 쓰면 일등 아빠일텐데..."
이 노마 자슥들 내가 얼마나 저희들에게 잘하는데 그리 심한 말을......

차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캔맥주부터 찾아 든다.
다음은 소주....
오늘의 목표는 찻속에서 잠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자리 명님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마신 덕분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중리에 도착할 즈음 팀별 산행이라는 명님의 안내에 걱정이 앞선다.
팀별 산행에서 민폐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산을 날라 다니는 산새가 팀장인데....
산행경력이 무지막지한 왕건님은 아예 경쟁에서 제켜 놓고라도,
시아 아니 줄리아(로버츠라고?)의 산행 실력도 익히 아는 바이고...
섬소년님과 민소요님은 두말하면 잔소리...둘이서 소근거리며 천리길도 갈걸?
오직 한명 남은 이는 여란님....
그런데 그 여란님도 1구간의 여란님은 아닌 것이 요즘 눈에 띄게 날렵하다.

안기사님이 주셨다는 떡으로 일단 배를 채우고...
버스를 나서니 도로는 촉촉이 젖어있는데도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2시간만 고생하고 나면 탄탄대로라는 명님의 말을 굳게 믿으며 산을 오른다.
30분이 되었건만 평탄대로다.
아! 끝까지 이런 산행이었으면.....
경사가 심상치 않은게 백운산 밑자락에 다가왔나 보다.
헉헉대고 오르다보면 모든게 귀찮아 지고...
그때 문득 떠오른는 한마디 '내가 왜 산에 왔지?'
우~씨 누구야?
이렇게 죽자사자 오르는 사람에게 내 숨소리 때문에 괴롭다는 인간이?

백운산 정상에 못 미쳐 여명이 찾아오는데
시계도 없건만 어찌그리 시간을 잘 맞추는지 산새가 먼저 알고 지저귄다.
두시간을 조금 더 넘겨 도착한 백운산 정상....
힘들었지만 그래도 세 번째로 도착했다. 아니 네번째인가?
저멀리 덕유산, 팔공산, 지리산이 보인다는 명님의 말은 귓가에만 맴돌고
그저 달구지가 내 놓은 수박과 방울토마토에 눈길을 고정시킬 따름이다.
시원한 수박 한입 물고 오늘도 역시 '아! 장가 잘들어 부러운 달구지...'

오른발은 경상도에 두고 왼발을 전라도에 찍으며 동서화합의 마음으로...
영취산 가는 밋밋한 능선은 저녁등반에 길 잃을세라 뚜렷이 길이 나있고,
무성한 산죽밭이 가는 길을 더디게 만든다 했더니만 어느새 싸리밭이 반긴다.
영취산 정상에서의 아침식사....
나이든 멤버들로 구성된 팀이라서인지 다른 팀에 비해 엄청 퐁요롭다.
옆자리 납지리팀에 들러 맥주 한잔 얻어마시는데,
건너편의 인심 좋은 짱구 이것도 마셔보라 건네는 소주 한잔에 정이 오간다.

영취산이 호남·금남정맥의 깃점이어선지 장수쪽에서 오르는 사람들이 보이고,
쉬흔을 훌쩍 넘긴 부부의 다정하게 걷는 뒷 모습이 유난히 따뜻해 보인다.
아! 저리 사는게 노후의 보람일진데.....

덕운봉을 오른쪽으로 두고 걷는 길에 억새밭이 보인다.
띄엄띄엄 솟은 싸리를 덮어 버릴 듯 휘감은 철지난 억새가 약간은 어설프다.
억새밭을 지났다 싶으니 또 다시 나타나는 산죽...
잊을 만 하면 나타나는 크고 억센 산죽이 갈길 바쁜 산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나는 깃대봉...
뾰쪽하니 솟아서 깃대봉이라는데 봉우리 한켠에 태극기가 걸려있던데 혹시 그래서?
얕으마한 봉우리 하나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트니 작은 샘이 하나 나타난다.
이름은 없으나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도 잘되어 있고
조롱박에 담은 한모금 약수의 시원함에 이게 바로 신선이 아닌지...

이제 15분만 있으면 육십령이라는 명님의 말에 힘차게 발을 떼는데
'세상에 나만 남기고 잘들도 간다'라는 말에 뒤돌아보니 여란님이 아닌가?
평소에 그렇게도 잘 걷던 여란님도 무릎 상할 때가 있나보다.
그리 안해도 여자를 좋아하는 나인데 이런 기회를 어찌 마다할 손가?

놓친 고기는 모두 고래만하다는 낚시매니아와 어디서나 얼마 안남았다는
등산매니아의 거짓말은 비슷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육십령까지는 30분도 더 걸렸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에서
남덕유의 웅자를 볼 수 있었던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아니었을까?

글구 삼겹살 파티......
졸음을 참아가며 씻었던 상추가 빛을 보는게 즐거웠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웃고 떠드는 산과사람들을 볼 수 있어 좋은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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