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신봉(坤申峰, 1,131m)

 

산행일 : ‘17. 8. 8()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사천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보현성지1쉼터거북등어명정 왕복임도 2지점산성마루전망대대공산성보현사갈림길곤신봉 왕복보현사보현성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선자령에서 불과 2.5km 거리에 있는 곤신봉(1131m)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지나치는 봉우리 중 하나로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고, 오롯이 곤신봉만을 찾기 위해 1m가 넘는 고산지대까지 오르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덕분에 곤신봉이 품고 있는 숲과 계곡은 아직까지도 세상의 때가 덜 탄 깨끗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느낄 수 있다. 거기다 맑고 시원한 물은 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정상부에는 거대한 선풍기 같은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어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발을 멈추고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누구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다. 다만 강릉 쪽에서 오를 경우 거의 바닥부터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1m 이상의 고도(高度)를 올려야하는 고생쯤은 각오해야 한다. 아무튼 한번쯤을 올라보는 게 좋겠지만 곤신봉만을 위해 찾기보다는 강릉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대공산성이나 명주군왕릉 등을 포함하는 코스로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보현성지 주차장(광양시 옥곡면 장동리)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타고 삼척방면으로 달리다가 성산면 소재지인 구산리로 들어가기 직전의 삼거리에서 오른편 456번 지방도로 옮긴다. 이어서 보광천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의 415번 지방도로 바꿔 들어가다 보광리사거리에서 왼편(이정표의 보현사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현성지(寶賢聖地)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오늘 산행은 첨부된 아래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곤신봉에서 선자령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낮은목이에서 보현사로 하산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대공산성의 서문에서 곤신봉 방향으로 8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삼거리에서 보현사로 내려오는 것으로 변경했다. 계획했던 원래의 하산길이 너무 험하다는 지인(知人)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현성지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바로 전에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경위도(經緯度) 좌표(座標)까지 표기해 놓은 이곳 특유의 이정표(어명정 2.71Km/ 보현사 1.07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이 바우길 3구간임을 알려주는 이정표(명주군왕릉 10Km/ 보광유스호스텔 1.6Km)가 눈길을 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바우길 3구간의 일부를 걷게 되는 모양이다. 여기서 바우바위를 지칭하는 강원도 말이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은 강원도 사람들이 예부터 걸어 다니던 길을 연결한 강원도 사람들의 길이다. 이를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에서 걷기를 즐기는 대중들에게 알리며 강원도 천연의 자연과 역사ㆍ문화 유적들을 느낄 수 있는 걷기 코스로 열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대공산성 순환등산로외에도 바우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을 모두 걸어보는 셈이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소나무들이 줄을 잇는다. 하나같이 황갈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이다. 사람들은 저런 소나무들을 금강소나무(金剛松)라 일컫는다. 나무의 몸 색깔이 붉다고 적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일본 사람들이 일반 소나무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라니 참조한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일원에서 잘 자라는 이 소나무는 나무 재질이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껍질은 얇고 붉을 색을 띠며, 심재부(深材部)는 붉은색 혹은 적황색을 낸다. 나이테가 조밀하고 잘 썩지 않아 예로부터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됐으며 현존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에도 이 소나무가 쓰였다고 한다. 다른 나무는 그만한 무게를 버텨내지도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란다.



길가 소나무에 '올림픽 아리바우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작년(2016) 말쯤엔가 같은 이름의 트레킹코스를 조성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조성사업이 이미 마무리되었나 보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올림픽(평창)+아리랑(정선)+바우(강릉바우길)라는 의미가 합쳐져 평창의 역사적인 올림픽 개최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지역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온ㆍ오프라인을 통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선정됐다고 한다. 트레킹 구간은 총 연장 131.7km9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선5일장과 나전역, 아우라지역, 구절리역, 노추산, 모정탑길, 안반덕, 대관령 선자령ㆍ옛길, 오죽헌, 경포대 등 평창과 강릉, 그리고 정선의 주요 관광지들을 모두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지그재그로 갈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이고 있다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그나마 그런 오르막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10분도 못되어 걷기 딱 좋을 만큼의 경사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13분쯤 오르면 임도(이정표 : 임도 1지점2.60Km/ 등산로 종점0.41Km)를 만난다.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왼쪽 방향의 임도 1지점으로 향한다. 곧장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오솔길도 보이나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하나 나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는 오솔길로 들어서란다. 뜨거운 햇빛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임도보다는 숲속을 걷는 게 좋다고 생각 되었던 모양이다.



황토색깔이 완연한 산길은 일단 곱다. 임도에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데다가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가 없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능선 위에서 삼거리(이정표 : 어명정1.70Km/ 등산로 종점1.01Km)를 만난다. 능선을 따라 오른편으로 난 길은 아까 임도를 만났던 지점에서 헤어졌던 길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능선으로 올라선 산길은 아까보다는 많이 좁아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둘이 어께를 맞대고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이 구간의 특징은 길의 양쪽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왼편이 키를 한껏 높인 소나무들이 기세를 자랑하고 있는 반면, 오른편으로는 소나무에 비하면 작은 몸체를 지닌 굴참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구역을 침범한 무법자들이 없을 리가 없다. 어디서나 청개구리파들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조금은 어색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산이 주는 너그러움이 아닐까 싶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지 않았던가. 그래 이왕에 산에 들었으니 뭔가를 얻어 가보자.



청량감에 젖어 걷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여유롭게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다. 그 흥이 발에까지 스며들었나 보다. 그렇게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3 쉼터를 만난다. 커다란 바위무더기 앞에다 앉은키에 맞춰 절단한 통나무 몇 개를 세워 놓았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3쉼터의 바로 위에서 약간 가파른 곳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금방 끝나버리고, 잠시 후에는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8분쯤 더 걷자 임도가 나온다. ‘거북등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곳이다. 들머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두 개의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하나는 대공산성 순환등산로를 만들면서 세운 이정표(어명정0.60Km/ 임도 2지점0,70Km/ 등산로 종점2.10Km)이고 다른 하나는 바우길 3구간의 거리표시를 나타내는 이정표(명주군왕릉7.8Km/ 보광유스호스텔3.9Km)이다. 맞은편 길가에 세워놓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안내판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일대에서 보호하려는 유전자가 소나무가 아니라 병꽃나무와 옷나무, 미역줄기나무 등이기 때문이다. 이 일대의 소나무(金剛松)는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들 때 사용했을 정도로 그 재질(材質)을 인정받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오른편 임도를 따라 어명정으로 향한다. 이때 사소한 부주의 하나가 큰 사고를 불러오고 말았다. 어명정까지의 거리인 ‘0.60Km’60m로 잘못 읽어버린 것이다.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2~3분 안에 돌아온다며 집사람을 거북등에 남겨놓고 나 혼자 길을 나선 게 불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어명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중간에 만난 현지 등산객에게 물으니 조금 더 가보란다. 그렇게 어명정까지 다녀오느라 20분이 걸려버렸다. 2~3분이면 되돌아오겠다던 남편이니 집사람으로서는 안절부절 못했을 게 당연하다. 거기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으니 무섭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난 스틱까지 내던지며 노발대발하는 집사람의 행동을 생전처음 접할 수 있었다. 다행이 얼마안가 풀리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실수였다.



가는 길에는 오른쪽, 그러니까 동해바다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강릉시가지와 동해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겠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짙게 낀 연무(煙霧)가 대부분의 산하(山河)를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버린 것이다.



10분쯤 내려가자 바우길 3코스의 이름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명정(御命亭)’이 나타난다. 2007년에 광화문 복원을 위해 베어낸 소나무의 그루터기 위에다 세운 정자(亭子)라고 한다. 정자의 앞에는 그런 사실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산림청장(서승진)과 문화재청장(유홍준)이 옛날 방식대로 교지(敎旨)를 받은 후, 소나무의 벌채에 앞서 산신과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慰靈祭)를 지낸 곳이라는 것이다. 당시 행사에서는 (), 본 금강송을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광화문 복원 역사에 쓰임을 명함이라는 명령서가 낭독되기도 했다. 벌채 대상 소나무 중 직경이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를 선정해 위령제를 지내고 주변 나무에 북어와 창호지를 묶는 소지 매기, 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헌시낭독, 산신과 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산신굿에 이어 벌목을 거행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 목재를 포함해 광화문 복원을 위해 벌채한 금강소나무는 직경 50-90에 이르는 특대재(特大材) 26()으로 건조 처리 과정 등을 거쳐 광화문의 기둥과 보 등에 사용된바 있다. 참고로 궁궐을 짓는 데 쓰였던 소나무는 황장목이라고 하여 일반인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황장목으로 지정된 곳엔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하여 이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정자의 바닥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유리를 끼워 넣고, 그 아래에 직경 1m 가까이 되는 어명을 받은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전시하고 있다. 덕분에 잘려나간 나무의 나이테가 확인된다. 사람의 나이는 호적으로 알고,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로 안다. 나이테를 보면 어느 해에 가뭄이 들고, 어느 해에 산불이 났는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해 모든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다 받아들인 흔적들이다. 사람에게 사람의 역사가 있듯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있고, 자연의 기록이 있다.



정자 옆에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라는 조금 긴 이름의 둘레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릉 바우길가운데 일부 구간의 이름이란다. 대관령은 전체가 금강소나무와 참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에다 이 길을 내었다.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라는 이름은 10년 전 경복궁을 복원할 때 이곳의 소나무들을 베어 기둥으로 쓴 인연을 살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기둥들은 제 몸 위에 얹어지는 무거운 하중을 견뎌낼 수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대궐의 기둥으로 쓸 수 있는 소나무는 지름이 최소한 90정도는 되어야 한다니 이곳의 소나무들이 얼마나 굵을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거북등으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임도 2지점방향이다.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오른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이곳이 임도 2지점이다. 들머리에 임도 2지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대공산성1.28Km/ 임도 1지점0.40Km/ 어명정1.30Km)와 국가지점번호표지목(마사1245-7288)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아까 어명정에서도 대공산성으로 오를 수는 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 중간에 위치한 산성마루에서 두 길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 길이 더 짧고 수월하지만 난 거북등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 때문에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대공산성(大公山城 : 강원도기념물 제28)’의 안내문을 살펴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보현산성이나 대궁산성으로도 불린다는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대궁산성을 만났을 때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하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물이 흐리지 않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대공산성교라는데 폭우(暴雨) 때를 대비한 안전시설인 모양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침목(枕木) 계단이 나타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면 그 끄트머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조금 더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임도에서 15분쯤 떨어진 지점이다. 이정표(대공산성0.52Km/ 어명정1.60Km/ 임도 2지점0.76Km)산성마루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대공산성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쯤 되는 모양이다. 아까 거론했던 대로 어명정에서 곧장 산길로 들어섰을 경우 이곳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편안하다 싶던 산길이 점차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108계단이라고 적힌 팻말까지 나타나게 만들어버린다. 그 뒤편에 긴 돌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저 계단을 오르면서 가진바 모든 번뇌(煩惱)를 다 떨쳐버리라는 모양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모든 번뇌를 108가지, 즉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 했다. 그러니 계단 하나를 오르면서 번뇌 하나씩을 비워버린다면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난 뒤에는 부처님처럼 해탈(解脫)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온 셈이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집사람의 화도 함께 떨쳐버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백팔번뇌를 떨쳐보라는 ‘108 계단이 과연 효험이 있었나보다. 마음이 여간 허허롭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그 끄트머리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비어있는 가슴에 더 넓은 세상을 채워가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임도 2지점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연무(煙霧)가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망데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밧줄까지 매어 놓았다. 오르내리는 게 힘들 경우 의지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럴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공산성 순환등산로안내도를 보면 이쯤에서 대공산성의 동문(東門)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95×104크기의 장방형 주초석(柱礎石)이 동문 입구에 2m 간격으로 놓여있다고 했다. 석재는 성문 안쪽에서 22정도에 2개의 둥근 문추공(門樞孔)이 있는데 지름 25, 깊이 3~5이며, 바깥쪽으로 가로 17, 세로 9, 깊이 3의 네모진 구멍이 2개씩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성문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표(대공산성 서문 0.50Km/ 전망데크 0.16Km, 어명정 2.14Km) 외에는 이곳에 성문이 있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우물이 나온다. 성의 중심에서 북쪽지역 저지로 내려간 곳에 우물 2곳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샘물이 넘쳐흐르는 데다 표주박까지 놓여있기에 한 모금 마시고 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것이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다.




약수터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산악회의 진행방향표시지가 지시하는 대로오른편으로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니 능선의 위이다. 잠시 후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이는데, 약수터에서 헤어졌던 길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6분 후 어느 이름 없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물론 약수터부터 계산한 시간이다. 서너 평이나 됨직한 공터에는 대공산성에서 매봉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의 폐쇄기간을 적어놓은 안내판과 구급함이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에 세워놓은 대공산성 순환등산로를 그린 안내도에는 현재의 위치를 서문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성내에 들어와 있었고, 이제 곧 성을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대공산성(大公山城 : 강원도기념물 제28)944m 높이의 보현산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높이 2m에 둘레가 4Km에 달하는 산성이다. 이 성은 남쪽의 제왕산성과 동남 방향의 칠봉산성, 명주성 등에 둘러싸인 고대산성의 거점 성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평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벽은 두께 40×50×20정도의 돌로 쌓았다. 높이 1.5~2.5m, 상부 폭 1.5m, 하부 폭 7m 정도로 축조하였다.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을미의병(乙未義兵) 때에는 민용호(閔龍鎬)의 부대가 이곳에서 약 10개월간 대일항전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1896113일 원주에서 일어난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 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곤신봉으로 향한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대공산성지(大公山城址)’라고 쓰인 빗돌이 나타난다. 옆에는 제법 각이진 바위들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서문(西門) 터인 모양이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는 전설과 발해의 대씨(大氏)가 쌓았다 하여 대공산성(大公山城)이라 불린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은 조금 다르다. 5세기 이전에 이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고 백제는 이곳까지 힘이 미칠 수 없었으며, 5세기부터 시작된 신라와 말갈의 접경 지역은 니하성(泥河城)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으나 발해의 대씨가 축조한 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전설로 전해 오는 백제의 온조왕이나 발해의 대씨가 쌓았다는 설은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거나 오류(誤謬)로 여긴다는 얘기이다. 대신 그들은 조선시대 지리지들이 보여 주는 보현사의 존재와 관련한 명칭인 보현산성에 더 무게를 싣는다. 참고로 산성에 대한 옛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이며 파암산석성(把巖山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지리지 기록에서는 모두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이란 기록은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로보아 신라 말 보현사(普賢寺)가 문을 연 인연으로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 또한 보현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각종 지리지들이 산성의 이름을 보현산성으로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이 오류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는 얘기이다.



안내도로만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서문(西門)으로 대공산성을 빠져나와 곤신봉 방면으로 향한다. 진행방향의 능선 위에 풍력발전기가 보이면 옳게 방향을 잡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곳이 바로 곤신봉 정상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바위를 만난다. 그런데 그 바위가 심상치가 않다.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괴이하게 생긴 것이다. ()을 쏙 빼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고려시대 이후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머리에 쓰던 사모(紗帽)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8분쯤 진행하자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보현사로 연결되는 길이니 염두(念頭)에 새겨두자. ‘낮은목이에서 보현사로 내려가는 코스가 너무 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 코스를 이용해서 하산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갤러리산악회도 그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가 왼편으로 향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곤신봉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겠다.



곤신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상당히 가파르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곧바로 치고 오르지를 않고 왼편으로 우회(迂迴)를 시키면서 경사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덕분에 오르는 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위로 곧장 치고 오르는 길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탓에 길이 희미하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조금 돌아서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쉽게도 다른 이들의 글에서 보았던 곤신봉 봉우리 아래에 있다는 샘터인 용천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삼거리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시야가 확 트이는 장소에 서게 된다. 백두대간(白頭大幹)과 만나는 선자령 능선이다.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이 훤해진다.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곳을 1m가 넘는 고산(高山)이라 할 수 있을까. 숫제 평원(平原)인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풍력발전기들이 하얀색 날개를 힘차게 돌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능선에 올라선 후에는 오른편 능선을 탄다. 목초지(牧草地)와 숲의 경계선을 따라 길이 나있다. 백두대간, 즉 한반도의 등줄기이다.



이젠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걷는다. 백두대간이란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바람이 거세다. 아니 이건 숫제 바람의 언덕이다. 초원이 펼쳐진 능선을 따라 늘어선 거대한 풍차들이 윙윙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간다. 낯설면서도 어느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 사이에서 희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돌아가는 풍차 아래를 걷는다. 문득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장편소설인 돈키호테(Don Quixote)’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타고 기세 좋게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그 장면 말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목초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초록색 구릉(丘陵)과 바람개비처럼 보이는 흰색의 커다란 풍력발전기, 그리고 푸른 하늘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아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동화의 삽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무척 잘 그린 그림인 것만은 분명하다.



길가에는 너무도 앙증맞고 예쁜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이유이다. 걷기에 편한 구릉지대라서 숨도 차지 않는다. 한껏 여유를 부려가며 들꽃들과 눈 맞추다 보면 10분 조금 못되어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곤신봉 정상에 올라선다.



목초지와 숲의 가운데로 난 길가에 자리한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곤신봉의 위치와 내력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곤신봉의 곤()과 신()은 주역에서 남서방향을 이르는 말로, 우리나라 산 이름 가운데 방위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래선지 곤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를 적어 놓았다. 강릉부사가 집무하는 동헌(칠사당)에서 바라볼 때 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근에는 명당(明堂)이 많아 묏자리로 많이 쓰이지만, 곤신방(坤申方)에서 부는 바람은 떼(잔디)가 잘 자라지 않는 바람이라서 뫼를 쓸 때에는 곤신봉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단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이어간다. 사람의 발길을 많이 타지 않은 듯, 길은 나 있지만 좁은 외길이다. 나무의 잔가지와 뿌리가 자연스럽게 길과 계단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내려설 수 있다. 아니 능선의 경사가 생각보다는 완만한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낮은목이에서의 하산 코스보다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엄청나게 오래 묵은 소나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저 나무들은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때쯤 들깨 씨 반쪽만한 솔씨에서 처음 싹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일합방을 겪고, 숱한 가뭄과 홍수를 겪고, 해방과 6·25전쟁을 겪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렀을 게 분명하다. 사람에게 사람의 역사가 있듯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있고, 자연의 기록이 있다. 산길을 걸으며 이런 자연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또 자연 앞에 우리의 몸을 낮추며 나무처럼 우리 스스로 겸허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갈림길에서 내려선지 40분쯤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부도(浮圖)’ 한 기가 나타난다. 잔재주는 덜 하지만 앙련(仰蓮)의 큰 연꽃무늬가 시원하게 둘러있는 낭원대사오진탑(朗圓大師 悟眞塔 : 보물 제191)’이다. 모든 부분을 평면 8각으로 만든 8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로 한때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탑몸체부(塔身部)를 받치는 기단부의 가운데 기둥과 상륜부(相輪部)의 일부 부재는 없어졌다. 참고로 보현사를 창건한 낭원대사(朗圓大師)834(흥덕왕10)에 출생하여 930(고려태조 13)97세로 입적한 나말여초(羅末麗初)를 빛낸 고승이다. 사굴산파의 창시자이자 강릉단오제의 주신이기도 한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직제자로서, 여기 보현사에 40여 년간 주석하면서 스승의 뒤를 이어 본디 예나라 땅이었던 이 고장의 황량한 풍토에 불광(佛光)을 한껏 펼쳐놓았다고 한다.



다시 7~8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보현사에 이른다. 보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시대에 낭원(朗圓)국사 보현이 직접 창건하여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불리다가 후에 보현사로 개칭하였다. 다른 내용의 전설도 전해진다. 신라 때 천축국(天竺國)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이 강릉의 동남쪽 남항진(南項津)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文殊寺지금의 寒松寺)를 세웠다고 한다. 이 때 보현보살이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내가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을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하고 시위를 당기니 보현사 터에 화살이 떨어졌으므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 후기 순조 때 중건한 대웅전과 요사채·주지실·종각 등과 1982년에 중건한 나한전(羅漢殿) 등의 당우들이 있으며, 절 앞에는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 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와 사자모양을 취한 석물(石物),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물 제191호인 낭원대사 오진탑, 그리고 속세로 나가는 길목에 20여 기의 부도(浮屠)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복층으로 지어진 금강루(金剛樓)의 아래는 사찰의 대문격인 금강문(金剛門)이다. 금강문에는 편지공양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임시로 만들어 놓았다.



뭔가를 적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불자들을 피해 경내로 들어서니 법당(法堂) 영역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영산전삼성각, 그리고 우측에는범종각이 서있는가 하면, 스님들의 처소인 수선당등이 오밀조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법당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도광 2’(1822)의 기록이 있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경4년기미(嘉慶四年己未, 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 1점이 있다.



절을 빠져나오면 금강루 옆에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오진탑비(郎圓大師悟眞塔碑)’가 서있다. 신라 성덕왕때인 914년 보현사를 중창한 낭원대사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높이가 188에 폭이 98, 두께가 20나 되는 이 빗돌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용머리모양의 귀두(龜頭)를 갖추고 등에도 6각의 구갑(龜甲)무늬가 덮여있다. 그 이름에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이라 나와 있으니, ‘범우고(梵宇攷)’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보현사'라고 기록하기 이전의 이 절 이름은 분명히 지장사 또는 지장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빗돌은 고려 태조23(940)에 세워졌으며, 신라말 고려초에 걸쳐 문필을 휘날렸던 최언위가 지은 비명에 의하면 낭원대사는 신라 문성왕16(854)에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 태조13(930)에 이 절에서 입적한 것으로 드러난다.



절을 빠져나온 길손들을 약수터가 맞는다. 다시 속세(俗世)로 돌아가는 중생(衆生)들에게 한 잔의 물로서 배웅이라고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물은 차가우면서도 달콤하다. 아까 대공산성에서 마셨던 물맛보다는 못하지만 감로수(甘露水)로 분류하는 데는 이견을 달지 않아도 되겠다. ! 경내에도 약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보다 물맛이 떨어지는 편이니 갈증을 못 참을 정도가 아니라면 잠시 참아두었다가 이곳에서 물을 마셔보기를 권한다.



보현사 앞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수량(水量)은 비록 많지 않으나 계곡의 너럭바위 위로 보현산에서 흘러온 투명한 물이 흐른다. 또한 주변의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여름철 피서지로 제격이겠다. 하지만 제방(堤防)이 높아 개울로 내려가는 게 만만치는 않겠다. 스님들의 청정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높게 쌓았는지도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보현성지 주차장(원점회귀)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길 오른편 아래로는 계곡이 계속 이어진다. 큰 바위와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들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내려가는 길에는 일군의 부도탑(浮屠塔)들도 만난다. 평범한 범인(凡人)의 눈에도 제법 오랜 세월이 베인 곳이라고 느껴져 마음을 여미게 된다. 아무튼 숲 그늘의 시원한 촉감과 청량한 물소리는 지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주변 풍광에 푹 빠져 걷다보면 저만큼에 보현성지 표지석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