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병산(石屛山, 1055.3m)-두리봉(斗里峰, 1033m)

 

산행일 : ‘16. 5. 26()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과 강릉시 왕산면·옥계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삽당령헬기장866.4m두리봉석병산910m고병이재석화동굴삼층석탑산계3리 마을회관(산행시간 : 4시간 4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모처럼 백두대간 마룻금을 밟아보는 산행이다. 자연생태적, 인문지리적, 문화적, 산업적으로 다양한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이 땅의 핵심축이며 민족정기의 상징이자 귀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인 백두대간, 2003년에 종주를 마쳤으니 13년에 다시 밟아보는 셈이다. 감회가 새로운 마룻금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지도와 나침반이 필수일 정도로 희미했던 길은 이젠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일 정도, 거기다 중간 중간에 길이 뚫려 마룻금으로의 진입도 한결 수월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백두대간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걷는 두리봉과 석병산을 낀 구간은 보통 삽당령에서 시작되어 백봉령에서 끝을 맺는다. 물론 반대방향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하던지 그 특징은 같다. 일단 능선에 오르고 나면 큰 오르내림이 없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넘나드는 특징 말이다. 거기다 이번 구간은 순수한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이 구간은 바위로 이루어진 석병산 정수리 부근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저 원시의 냄새가 짙은 울창한 활엽수 숲을 거닐며 호연지기를 가다듬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쳐도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절골로 내려가는 하산코스이다. 짧은 거리에서 1000m 이상이나 되는 고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볼 것도 없는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니 거의 죽음의 코스라고 보면 된다.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삽당령(揷唐嶺 :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

영동고속도로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타고 태백시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왕산면의 송현리와 목계리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삽당령(揷唐嶺)이다. 삽당령은 동서(東西)로 나뉘는 분수령(分水嶺), 즉 강릉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그리고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으로 몸을 섞는 송현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이다. 참고로 삽당령이란 이름은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짚고 왔던 지팡이를 버리고(꽂아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자를 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정상에서 북으로 대기(大基) 가는 길과 서쪽의 고단(高丹) 가는 길이 나뉘는데, 이 세 갈래 길의 생김새가 삼지창과 같다고 하여 삽현(揷峴)’, 또는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삽당령(揷堂嶺)’으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해발고도 680m의 고갯마루에는 이곳 삽당령이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그 뒤 저만큼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내판도 보인다. 백두대간과 삽당령의 유래를 알리는 글과 함께 삽당령에서 닭목령까지의 등산지도가 그려져 있다.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지어져 있다. 한 토막의 옛 얘기라도 적혀있을까 해서 다가가 보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당집만 외로울 뿐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성황당은 그 역사가 500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 : 매달 첫째 드는 ()’의 날)에 교통무사고와 풍년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祭物)은 소의 머리와 생식기라고 한다. 6.25 전쟁 때 불탔던 것을 1953년에 개축하였으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또 다시 파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빗돌 앞 국도를 건넌다. 들머리가 맞은편 산자락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커다랗게 이정표(석병산/ 닭목령)를 세워 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임도(林道)를 만난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삽당령이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들머리에 이정표(두리봉 4.5Km, 석병산 6.1Km/ 삽당령 0.1Km)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산행을 시작하고 5분쯤 되었을까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급하다는 듯이 위로 향한다. 오르막에는 둥근 원목(原木)을 잘라 계단을 설치했다. 하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보폭(步幅)과 높이가 일정치 않고 멋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오르막길이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삼거리(이정표 : 두리봉4.3Km, 석병산 5.9Km/ 통행금지/ 삽당령0.3Km)이다. 하지만 막혀있는 걸로 보아 비정규등산로인 모양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그 사나웠던 기세를 일시에 뚝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고 잠시 후 헬기장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만이다. 헬기장 근처(이정표 : 석병산/ 외고단/ 삽당령)에서 외기단 가는 길이 나뉘나 큰 의미는 없을 듯 싶다.




오랜만에 황장목(黃腸木)을 만난다. 소나무 껍질이 황갈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백두대간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물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본다. 황장목은 금강송(金剛松)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금강산 소나무'의 줄임 말, 봉화에서 난 황장목이 춘양역에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간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미인처럼 쭉쭉 잘 빠졌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니 입맛에 맞게 골라 쓸 수 있다.



다시 10분 후, 이번에는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에 올라선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는 산죽(山竹) 숲을 자주 만난다는 것이다. 어른의 어깨높이 쯤 자란 산죽 숲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을 방해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손질을 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길이 또렷이 잘 나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에는 산목련이 한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도의 산하는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들었었다.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철이 바뀌었나 보다. 아니 봄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버렸나 보다.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숫제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눈치이다. 두리봉은 높이가 1,033m나 되는 높은 산이다. 하지만 삽답령의 표고가 680m나 되니 기껏 해봐야 300m 남짓의 고도(高度)만 더 높이면 된다. 그것도 4.5Km이나 되는 먼 거리에서이다. 그러니 고도를 높이려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45분 정도를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길가에 세워진 조그만 이정표(두리봉 80m/ 덕우리재 11.8Km/ 삽당령 4.5Km)울트라 2구간이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울트라마라톤 코스라도 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두리봉(斗里峰) 정상에 올라선다.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音借)한 것에 불과하니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다. 그건 그렇고 두리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이다. 그렇다면 두리봉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리봉이란 이름은 제대로 지어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산봉우리란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한 듯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정상은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 놓았다. 두루뭉술하게 생긴 봉우리의 특성을 살린 모양이다.



석병산으로 향하는 산길은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편이다. 그래선지 뒤돌아본 두위봉은 아까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봉우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두리봉이라는 별도의 이름까지 얻었던 모양이다.



석병산까지의 능선 또한 두루뭉술하게 생긴 건 여전하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골의 깊이가 조금 더 깊어졌고 경사 또한 약간은 더 가팔라졌다. 그렇다고 힘에 부대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진행하면 널찍한 헬기장을 만난다. 이정표가 두 개나 보인다. 하지만 두 개 모두 없는 것만 못하다. 하나는 아예 글씨가 지워져버린 채로 방치되어 있고, 다른 하나(백두대간 수목원 7Km/ 석병산 9.7Km)는 난데없는 지명이 불쑥 나타나 있다. 백두대간 수목원에서 개별적으로 세운 모양인데 대간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시설물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칫 잘못하다간 엉뚱한 곳으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이어가다 보면 양쪽 사면(斜面)의 생김새가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왼편이 엄청나게 가파른데 비해, 오른편은 완만한 편이다. 태백산맥의 특징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내륙과 해안은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능선이 워낙 또렷하다보니 산은 물을 건너지 아니하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체험도 가능하다. ‘내 어깨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비()와 왼쪽으로 떨어지는 비의 운명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체험 말이다. 하지만 우중(雨中) 산행 때나 가능할 테니 오늘은 그냥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으로 만족해야겠다.



14분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트여있는 작은 공간이 보인다. 일단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멋진 풍광을 만난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석병산의 정상, 즉 일월봉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만들어 놓은 액자(額子) 속에 들어앉은 그림이 숫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이다.



조망터에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일월봉5/ 헬기장1시간10/ 두리봉)가 나온다. 백두대간 마룻금은 직진이다. 하지만 석병산의 정상은 왼쪽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는 셈이다. 이는 정상을 둘러보고 난 후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바위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두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석병산의 정상 중 첫 번째 봉우리(어떤 이들은 이 암봉을 상월봉이라 부르기도 한다)로 비록 삼각점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정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건너편에 있는 일월봉이 한눈에 잘 들어오기 때문이다.



삼각점봉에서 약간 내려왔다 다시 오르면 드디어 일월봉, 즉 석병산의 정상이다. 서너 평쯤 되는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은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은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 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듯 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풍경은 보여주지 않는다. 연무(煙霧)가 짙은 탓에 조금 전에 지나온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올 따름이다. 그것도 조금만 멀다 싶으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정상을 빠져나오다 보면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이정표에 일월문이라고 적혀있다. 석병산의 명물이라는 그 일월문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뻥 뚫린 바위굴() 하나가 나타난다. 일월봉(석병산 정상)의 바위벼랑 아래에 뚫린 바위구멍이라고 보면 된다. 일월문(日月門)이란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출 때면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라지만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만다. 비박(bivouac)이라도 해야만 기대해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헬기장 방향, 즉 백두대간의 마룻금을 따른다. 5~6분 후 자그만 헬기장에 올라선다. 버려진 지 오래인 듯 잡초들만 무성하다.



산길은 여전히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산림생태길 걷기 축제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곳곳에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정도라면 걷기가 아니라 산악마라톤의 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할 것 같기 때문이다.



10분 후 상황지미골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헬기장 1시간/ 상황지미골 2시간30/ 일월봉 15)를 만난다. 통나무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곳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백두대간생태수목원에서 세운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5.9Km/ 석병산 0.6Km)가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도 이정표는 오로지 한 곳, ‘백두대간수목원만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 방향에 백두대간이란 단어까지 들어가 있으니 문제다.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백두대간 줄기를 타야한다는 개념으로 입력이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쪽 방향이 틀린 길이란 걸 알아차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백두대간을 완주했던 나까지도 잠시 헷갈려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백두대간생태수목원강원도산림개발연구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산림 생태 문화 체험단지이다. 강원도 소속의 공공시설이라는 얘기이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할 공공기관에서 이렇게 무책임한 짓을 해도 되는 것이지 모르겠다. 이정표를 이용해 자기들 시설이 그쪽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까지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렇게 길이 나뉘는 곳에는 다른 방향의 표시까지도 해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그것도 그곳이 주된 길이라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지금이라도 시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태수목원 갈림길을 지나서도 넉넉한 육산(肉山)의 모양새는 변함이 없다. 능선을 가득 매운 활엽수 숲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쑥쑥 자라고 있는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도 만난다. 이렇게 높은 곳에까지 조림사업이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정표(골뱅이재 10/ 일월봉 1시간15)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헬기장을 만난다. 어디서 세운 시설물인지는 몰라도 이정표의 적힌 지명이 틀려있다. 고병이재를 골뱅이재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서도 산길은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산길이 서서히 아래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니 자그만 변화는 있었다. 길가의 야생화들 숫자가 부쩍 널어났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들꽃을 피웠다. 보드라운 산들바람으로 와서 곱게곱게 간지러움을 태워 꽃을 피웠다. 지나가던 나는 그 꽃을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바람 같은 사연을 꽃잎에 새기고는 바람결에 기대어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헬기장에서 6분쯤 걸었을까 반반한 분지(盆地) 형태로 이루어진 고병이재에 내려선다. 강릉 산계리와 정선의 임계리를 동서로 잇는 고개다. 쉼터를 겸하도록 조성되어 있는 고갯마루에는 백두대간과 석병산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백봉령/ 석병산)가 세워져 있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은 삼거리이다. 아니 고갯마루이니 사거리로 보는 게 옳겠다. 하여간 이곳에서 절골, 그러니까 산계리(강릉시 옥계면)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



절골 방향으로 내려선다. 백두대간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12분 후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석화동굴/ 절골/ 고병이재)로 나뉜다. 왼편은 절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미개설구간이라고 표시해 놓은 걸로 보아 아직은 이용하지 말라는 모양이다.



절골갈림길을 지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길가에 매어놓은 안전로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저 조심해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내려가면 야트막한 바위봉 하나가 나타난다. ‘유생바위란다. 예로부터 이 지방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아 성균관 유생이 되려는 선비들이 많이 찾아오던 고장이란다. 우뚝 솟은 이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학자를 꿈꾸는 선비들의 의연한 자태를 닮았다고 해서 유생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에 오르면 시원스런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휘휘 늘어진 소나무 가지 아래로 건너편 808m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 왼편에 버티고 있는 산은 아마 석병산일 것이다.




유생바위를 지나서도 산길은 변화가 없다. 여전히 가파른 것이다. 조심조심 내려선다. 그리고 17분 후 이정표(석화동굴/ 고병이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선 쉼터에 이른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서 능선을 벗어난다. 참고로 난 이 구간에서 회양목이 자생종인 줄을 처음으로 알았다. 화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었기에 조경용으로 재배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능선이 온통 회양목으로 차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아니 아까보다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이런데다 계단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물어오는 말투로 보아 집사람이 많이 놀란 눈치다.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가파른 곳에다 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놀랄 만도 하겠다. 지면(紙面)으로나마 강릉시청 직원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통나무계단이 무너져 있는 곳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파른데다가 지반(地盤)까지 무르기 짝이 없는 흙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를 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계단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려디딜 때 무릎이 받게 되는 하중을 스틱 하나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폐허로 변한 공중화장실을 만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지만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때 손님을 맞았던 석화동굴(石花洞窟)’에 내려선 것이다. 지방기념물 제37호인 석화동굴(石花洞窟)은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옥계굴또는 절골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주굴(主窟)의 길이만 약 600m이고, 총연장은 1,000m에 이른다고 한다. 이 굴은 거대하고 화려한 종유석과 석회화폭(石灰華瀑)의 발달을 볼 수 있지만 특히 석화의 밀집 발달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동굴로 들어선다. 하지만 쇠창살로 굳게 닫혀있다. 덕지덕지 녹이 슬어있는 것이 폐쇄된 지 꽤나 오래인 모양이다. 이 동굴은 70년대 초에 개발되어 80년도 까지 일반인에게 개방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재개방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심심찮게 다툼이 있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요즘 관광지로 개발한 석회동굴들이 많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척에 있는 환선굴의 경우 동굴개발과 주변 정리사업에 200억 원이 들어갔다. 이 정도의 규모와 위치에 그 정도의 예산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석화동굴을 지나면서 산길은 좋아진다. 넓은데다 그 경사(傾斜)까지도 완만해졌다. 옛날 석화동굴이 손님을 맞고 있었을 당시에는 수레가 드나들 수도 있었겠다. 잠시 후 아직까지 정비가 완료되지 않은 산길(아까 능선에서 헤어졌던 미 개설구간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이 나뉘는 삼거리를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담쟁이 넝쿨들로 도배된 민가(民家)가 나타난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게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석화동굴을 벗어난 지 14분 만이다.



민가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근처에 민가 몇 채가 들어서 있는데 전체를 아울러 절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공터에 석병산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은 걸로 보아 석병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실상의 산행은 이곳에서 종료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에다 버스를 세워두면 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산행코스가 4시간짜리로 변하게 됨은 물론이다.



공터의 옆에 삼층짜리 석탑이 하나 보인다. ‘산계리 석탑(山溪里 石塔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3)’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기단부의 갑석과 면석이 하나씩만 남아 있어서 하부 구조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의 기단은 새로운 석재로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결실된 부분도 새로운 석재를 끼워서 기단부와 탑신부를 복원한 상태라고 한다. 아무튼 이곳의 지명인 절골과 관련된 유물일 것 같다. 조선후기 까지만 해도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40년경 광뢰 이야순(퇴계 이황 9세손)이 이곳에 왔다가 절을 지키고 있는 스님과 학문으로 담판을 지어 스님을 쫒아내고 절을 허물어 서당으로 이용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진다.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고, 옛 얘기마저 잃어버린 ‘3층 석탑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주고 있다.



산계리 석탑에서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내려 간다. 길가에 널린 산딸기를 따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가도 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복 2차선의 도로인데도 왜 버스가 올라오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거리가 가까워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길은 길고 또 길었다. 묵언(黙言) 걷기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점잖은 입에서 육두문자(肉頭文字)라도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산계3리 마을회관(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이제나 저제나 마을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40, 저만큼에 마을회관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5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40분이 걸린 셈이다. 마을회관 뒤는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에 딱 좋을 정도의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비보림(裨補林,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가 약한 곳에 조성한 숲)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숲이란다. 숲의 한가운데에는 광뢰 이야순선생이 옮겨다 놓았다는 성황당이 있다. 아무튼 오늘은 성황당과 인연이 깊은 날인가 보다. 산행을 시작할 때도 성황당을 만났었는데 산행의 마감도 성황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