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頭陀山) ‘베틀바위 산성길

 

산 행 일 : ‘21. 8. 29(일)

소 재 지 :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산행코스 : 두타광장(제2주차장)→매표소→삼화사→옥류동→두타산성→산성12폭포→수도골석간수→박달계곡→용추폭포→제3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두타산(頭陀山 : 1,353m)이 품고 있는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베틀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베틀 릿지’라고 불리던 험상궂은 바윗길이 암벽산행에 익숙한 전문 산꾼들에게조차 쉽사리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잘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한 비경을 그대로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동해시의 요구로 산림청에서 바윗길 곳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 명품 탐방로로 만들었다. 덕분에 최근 가장 핫한 산행지로 떠올랐고, 기초체력만 보유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국의 산인지 해외 유명한 산인지 구분되지 않는 비경들에 환호하게 된다. 참고로 ‘베틀바위 산성길’은 지난 2019년 9월 착공에 들어가 2020년 8월 1일 베틀바위전망대 1차 개방, 2021년 6월 10일에는 두타산 협곡 마천루까지 4.7km의 잔여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전 구간이 완전 개방됐다.

 

▼ 들머리는 두타광장(제2주차장 : 동해시 삼화동 858-10 )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삼척 방면)’와 ‘42번 국도(북평교차로에서 정선 방면)’를 연이어 달리다가 동막교(동해시 이로동 1282)에서 빠져나온다. ‘효자로’를 따라 동해시가지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삼화삼거리(동해시 이로동)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릉계곡관광지에 이르게 된다. 무릉계곡 힐링캠프장에 마련된 제2주차장(두타광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총 7.3km의 탐방로는 모두 4개(A·B·C·D)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추가된 ‘E’구간은 한꺼번에 걷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 하겠다. 탐방로는 등산로 곳곳에 산재돼 있는 기암과 산림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숯 가마터, 회양목 군락지, 베틀바위, 미륵바위, 산성폭포, 마천루, 쌍폭포, 용추폭포 등 다양한 스토리를 탐방객에게 선보인다.

▼ 길을 나서기 전 ‘호암소(虎岩沼)’부터 눈에 담는다. 사람을 구한 삼화사 스님이 절로 돌아오던 도중 자신을 해치려는 호랑이를 피해 법력으로 계곡을 건너뛰었는데, 호랑이가 따라 넘으려다 빠져 죽은 전설의 장소다. 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소(沼)는 호랑이 빠져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 같이 왜소하기 짝이 없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 그러니 새로 개설되었다는 ‘무릉 달빛 호암소길’이나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해보자.

▼ 무릉계곡 관광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형차 전용인 제1주차장을 지나면 먹거리가 풍성한 상가지역. 산행을 마치고 오래된 벗 형우군과 소줏잔을 나누기로 한 곳이다. 3개월 만에 함께하는 산행이니 오고가는 술잔의 속도가 꽤 빨라지지 싶다.

▼ 상가지역을 통과하자 매표소가 나온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2천원. 그런데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다른 지역의 산들과는 달리 이곳은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징수의 주체가 ‘사찰(삼화사)’이 아닌 ‘지자체(무릉계곡 관리사무소)’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돈을 낼 수 있겠다는 얘기이다.

▼ 작년에 다녀온 ‘베틀릿지’(A구간)는 생략할 요량이다. 그렇다고 기념사진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두타산(頭陀山)의 진면목이 바로 저 암봉들이니 말이다. 특히 저 ‘베틀바위 릿지’ 구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사람들 말고는 그림의 떡이던 신비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열검사(發熱檢査)를 거쳐야만 했다. ‘마스크 착용’과 ‘안심 콜’ 또한 필수다. ‘손 소독’은 그나마 선택. 코로나의 여파가 이젠 산속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무릉계곡관리사무소를 지나, 다리(무릉교)를 건너면 ‘베틀바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입구에 큼지막한 ‘베틀바위 산성길’ 표지판이 서 있다.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우리 부부는 그냥 통과다. 해가 바뀌었다지만 다녀온 길을 다시 가기보다는, 모처럼 산행을 따라나선 벗 형우군과 소줏잔 나누는 시간을 조금 더 갖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잠시 후 도착한 무릉반석 근처 천변에는 금란정(金蘭亭)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라고 한다. 광무 7년(1903) 유림제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금란계를 만들어 한일합방 국치에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해방 이후 당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이어받아 지었다는 것이다. 정자에는 화가 심지황(沈之潢1888∼1964)이 쓴 현판 외에도 최중희(崔中熙,1895-1990)가 초서로 쓴 '관동기관(關東奇觀)'이란 액자도 걸려있었다. 금란정이 강릉지역의 기이한 볼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 ‘무릉반석(武陵磐石)’에 내려선다. 그 옛날 누군가가 심었다는 복숭아꽃은 보이질 않고, 대신 1,500여 평의 반석에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만 가득하다. 심지어는 부백(府伯), 찰방(察訪), 토포사(討捕使)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아무튼 저 반석에는 줄잡아 850여 명에 이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썼다는 석각(石刻)은 길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조품인데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라고 새겨져 있다.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짜기‘라니 능히 신선이 놀다 갈만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 일주문 근처 풍경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절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지라 연등(燃燈)을 예상했는데, 느닷없는 리본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정체가 아리송한 글자까지 적혀있다. 절에서 내걸었으니 범어(梵語)겠지?

▼ 삼화사로 오르는 길가의 계곡은 ‘용오름 길’이라고도 불린다. 삼화동 초입에서 용추폭포에 이르는 길이 6㎞의 무릉계곡을 이르는 말인데, 전설에 의하면 약사삼불을 실은 용이 저 계곡을 따라서 두타산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품고 있는 용오름 길, 즉 무릉계곡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 계곡은 두타산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타(頭陀)’라는 이름보다 산이 품고 있는 ‘무릉’이라는 계곡에 더 익숙하다. 두타산을 ‘금강산에 이은 두 번째’라고 옛 선비들이 평가했던 것도 다 무릉계곡 일대의 경관을 높이 친 결과였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삼화사(三和寺). 지위는 비록 월정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천년고찰답게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간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 자장율사가 ‘흑련대’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고 개명,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자 국민들의 갈등을 풀고 화합시키려는 뜻에서 '삼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삼화사의 얼굴마담 격인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은 적광전(寂光殿) 앞에 있다. 이밖에도 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재’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 또는 전수되고 있다.

▼ 절간을 지났지만 길은 여전히 널따랗다. 두타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서 ‘두타(頭陀)’는 고대 인도어(Sanskrit)로 '버리고, 씻고, 닦는다'는 뜻이다. 속세의 번뇌를 떨치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지금 두타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될 수도 있겠다. 맞다. 수행은 예로부터 고행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힘든 여정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었던가.

▼ 무릉계곡의 또 다른 명소인 ‘학소대(鶴巢臺)’는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오랜 옛날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곳. 하지만 <시원한 곳에 배를 띄우니 학(鶴) 떠난 대(臺)는 이미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라고 읊었던 무릉거사 최윤상(崔潤祥, 1810-1853)의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처럼 바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따름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장마 때를 대비해 예비용 다리까지 놓았다. ‘두타산’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치장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무릉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는 암반 위로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발원한 무공해 물이 흐르는 명품 계곡이다. 이 물은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만나면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작은 소(沼)와 담(潭)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릉도원’에 비유해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명승지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 만에 ‘산성갈림길(용추폭포↑ 1.0㎞/ 두타산성← 0.5㎞/ 무릉계곡관리사무소↓ 1.60㎞)에 도착했다. ‘두타산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우리 부부가 올라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작년 이맘 때 탐방로의 미완성으로 인해 중도에서 멈춰야만 했던 ‘베틀바위 산성길’의 잔여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베틀바위 산성길’을 새로 내면서 기존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잠깐 쉬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 산길로 들어선지 30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두타산성(일명 문지방산성)에 올라섰다. 빤질빤질 무던히도 밟았을 문지방. 난(亂)을 피해 올라온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것은 파사왕 23년(102)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조대왕(이성계의 4대 조부)이 몽고군의 침입 때 삼척읍민을 데리고 ‘두타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4년(태종 14년)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높이 1.5m에 둘레 2.5km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최원흘(崔元屹)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병을 전멸시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바위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했을 테니 온전히 남아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 두타산성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등산객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이 최고다. 그런 장소가 바로 이곳 문지방산성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노송이 연출하는 비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나홀로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거기다 세월이 선물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생김새까지 자못 빼어나다.

▼ 또 다른 볼거리는 ‘백곰바위’. 백곰의 뒷모습을 쏙 빼다 닮았는데, 각도라도 틀라치면 정말 백곰이 뒤돌아 금세라도 움직일 듯하다. 누군가는 저 바위를 코카콜라에서 나오는 북극곰을 닮았다고 했다. 맞다. 어쩌면 저리도 비슷할까? 자연이 만들어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소나무 뒷면으로 보이는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신령한 기운이 깃든 홍송(紅松)이 연출하는 비경은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 눈요기를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성벽 옆을 지나자 산길은 다시 가팔라진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좌우로 펼쳐지는 비경에 이미 취해버렸는데 그깟 잡념이 찾아들 틈이 어찌 있겠는가.

▼ 잠시 후 올라선 바위지대에는 끄트머리에 밧줄난간이 쳐져 있었다. 바위절벽이니 더 이상 가지 말라는 금줄이다. 하지만 산성터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대이니 잠시 머물다가도 좋을 일이다.

▼ 산길로 들어선지 45분. 이정표(베틀바위전망대↑ 1.2㎞/ 산성12폭포→) 하나가 자신를 따라오라며 손짓을 보내온다. 두타산이 품은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산성12폭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10m쯤 들어가자 자연 전망대가 나오면서 두타산성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의 첫 만남은 ‘거북바위’다. 거대한 바위벼랑 위를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둥그런 것은 거북이 등딱지, 길게 튀어나온 것은 거북이 목, 반대편에 붙은 작은 바위는 거북이의 꼬리를 연상시킨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절벽에 들어앉은 다른 바위들도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야외 갤러리인 듯 이곳에서는 고사목 하나조차도 작품이 된다.

▼ 거북바위 아래로 다가가자 ‘산성12폭포’가 성큼 다가온다. 이름 그대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폭포지대다. 폭포의 맨 위는 하늘금. 얼마나 길던지 맨 아래에 있을 소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폭포 하나의 길이를 10m로만 잡는다고 해도 120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다만 수량이 적다는 것이 조그만 흠이지만, 장마철에 찾아온다면 숨 막히는 장관을 볼 수 있을 테니 이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 건너편 바위벼랑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어찌 보면 큰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한데, 작년에 찾아왔을 때 저 절벽의 허리쯤으로 길을 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전하기도 했었다. 장가계나 태항산 등 중국의 유명산들을 돌아다니면서 늘 부러워했던 잔도(棧道). 그게 지금은 저곳에 놓였단다. 이 아니 좋을 손가.

▼ 삼거리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수도골→ 0.5㎞, 마천루 1.2㎞/ 베틀바위전망대↖/ 두타산성↓ 0.4㎞). 드디어 ‘베틀바위 산성길’과 접속한 것이다. 작년 1차 답사 때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지점이다. 미지의 세계로 남겨 둘 수밖에 없던 C코스가 얼마 전 공사를 마치고 등산객들을 향해 얼굴을 내민 것이다.

▼ 잠시 후 산성12폭포의 상부로 내려선다. ‘12폭포’라는 게 본디 기다란 폭포를 의미한다고 했다. 얼마나 길던지 열두 번을 꺾으며 내리친다는 것이다. 까마득히 미끄러지듯 쏟아지듯 내려온 물줄기가 요런 구비들을 워터 슬라이드를 타듯 구르며 떨어져 내린다.

▼ 오른쪽은 수백 길 낭떠러지, 아까 반대편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 12구비의 폭포 가운데 가장 길었던 구간일 것이다. 그나저나 벼랑이 높으니 조망 또한 좋을 것은 당연. 옛 그림에서나 볼 법한 빼어난 경관이 그려진다.

▼ 왼편에는 두어 개의 폭포가 겹치고 있었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두타산을 구르고 떨어져 내려온 물길은 화강암의 암벽에다 골을 내면서 저런 와폭(臥瀑)과 직폭(直瀑)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눈요기만이 아니다. 산을 가로질러 내려온 물줄기가 산산이 비산하면서 더위에 지친 산꾼들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 맨 위의 폭포는 꽤 깊은 담(潭)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선지 못 주변은 더위를 식히려는 산꾼들의 물놀이 터로 변해버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를 안주삼아 박주라도 한 잔 걸친다면 이 아니 신선경일 손가.

▼ 산성12폭포를 지나면 길은 ‘금강바위길’로 이어진다. 마천루 근처에 있다는 ‘금강산바위(어느 바위를 이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길은 새로 다듬어놓아서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정표가 잘 마련돼 있어 길을 찾기도 쉽다.

▼ ‘마천루’로 연결되는 이 길은 올 6월에 개장했다. 길이 열리기 전 이곳은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전인미답의 장소였다고 한다. 거친 암벽으로 이루어진 탓에 전문 산꾼들조차 고개를 내두를 정도였단다. 하지만 지금은 장삼이사가 찾는 관광명소로 변했다. 산림청 및 동해시의 노고 덕분이다.

▼ 첩첩이 쌓인 바위가 하도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위로 올라갈수록 몸집을 부풀리는 바위덩어리들이 흡사 명장의 작품이라도 되는 듯 기이한 형태로 서있는 것이다.

▼ 길은 바위절벽과 바위절벽 사이의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새로 난 길은 푸르렀고 또 그만큼 깊었다. 시야가 툭 터지는 바위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놀이삼아 나온 장삼이사들이 점심상을 차려놓은 채로 뭉그적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 바위절벽으로 나가자 달력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웅장한 자연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맨몸으로 융기한 거대한 암봉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폭포와 적송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이방인에게는 눈에 들어오는 게 모두 신기한가 보다. 바위 틈새에 밀어 넣은 작은 돌멩이들에까지 포커스를 맞추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동굴이지만 경계(警戒)삼아 게시해 본다. 석간수라도 있을까 기웃거리다 입구에 비해 안이 넓은 걸 발견할 수 있었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천정에 머리를 서너 번이나 호되게 부딪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패커(backpacker)들에게는 최상의 비박(biwak) 장소인 듯 비닐장판까지 깔려 있었다.

▼ 잠시 후 또 다른 동굴을 만났다. 아니 아까와는 격이 다른 동굴이다. 하늘을 닿을 듯 높이 솟은 바위 밑에서 규모가 제법 큰 암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암굴로 10여 미터쯤 들어가자 물이 고여 찰랑거린다.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石間水)’이다. 하지만 마시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넘치지 않고 고여 있는 샘물의 위생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길은 숲속으로 나있다. 하지만 한걸음만 빗겨나면 수백 길 낭떠러지이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은 이들이 있나보다. 아찔하기 짝이 없을 텐데도 스릴을 즐기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 금강바위길로 들어선지 50분. 탐방로는 ‘마천루 전망대’에 이른다. 수직의 바위벼랑에다 매달듯 지은 전망대가 아찔하다. 전망대가 있는 자리는 그동안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접근 불가의 공간이었다. 탐방로를 내면서 두타산협곡이 가장 잘 조망되는 이곳을 놓치지 않고 전망대를 들어앉혔다. 전망대의 주위로 치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마치 빌딩 숲처럼 보인다 하여 ‘마천루(摩天樓)’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전망대에 서면 두타산의 협곡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작명가의 시선에 마천루처럼 보였다는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들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신선봉과 폭 100m에 높이가 70m의 거대한 자연암벽 병풍바위, 용맹스러운 장군의 얼굴을 닮은 장군바위 등등 그 하나하나가 별유천지(別有天地)요, 선경(仙境)이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박달계곡 건너편으로 번쩍 솟은 바위들이 보이는가 하면, 용추폭포와 쌍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인다. 천하절경이 눈앞에서 그리고 발아래에서 수려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 이후는 잔도(棧道)를 따른다. 잔도란 험한 바위벼랑에 선반처럼 달아 낸 길을 말한다. 장가계나 태행산 등 중국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하나 둘 선을 보이는 추세다. 두타산도 그 가운데 하나. 시선(詩仙)이자 주선(酒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이 ‘하늘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노래한 잔도가 이곳 두타산에도 놓인 것이다.

▼ 바윗길 그 패이듯 끊어진 자리에 잔도가 놓였다. 촉(蜀)의 제갈량은 위(魏)를 치기 위해 사천성 험준한 산악지형에 길을 냈고, 항우에게 쫓겨 파촉(巴蜀)으로 들어간 유방은 지나온 잔도를 불태우라 명령했었다. 이렇듯 중국에 기원을 둔 잔도는 전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건 병사가 아닌 산천경개를 구경나온 장삼이사가 희희낙락 걷는다.

▼ 협곡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아찔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암벽의 허리를 딛고 걷는다는 설렘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설렘에 겨워 고개를 돌려보니 고릴라 한 마리가 천애절벽에 올라앉아 있는 게 아닌가. 오직 조물주만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라 하겠다.

▼ 잔도가 끝나자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 가파름이 버거워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며 길을 냈다.

▼ 금강바위길로 들어선지 65분. 삼거리를 만났다. 하지만 이정표(용추폭포→ 0.4㎞, 두타계곡관리사무소 2.5㎞/ 수도골↓ 0.8㎞, 베틀바위 2.9㎞)는 두 방향만 표시하고 있다. 철제계단이 왼쪽 방향의 산자락으로 파고드는데도 말이다. 두타산 정상으로 오르는 옛길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이후부터 길은 철제계단을 따른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박달계곡의 진면목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느림의 미학’을 추구해보자. 그리고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의 풍광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차곡차곡 담아보자.

▼ 고개라도 들라치면 ‘마천루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만물상의 기암괴석들이 전망대의 배경이 되어주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발가락바위’. 발가락을 쏙 빼다 닮은 것으로도 모자라 숫자까지도 맞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바위를 마천루라는 그림을 완성시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꼽는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박달계곡의 세찬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폭포들의 아우성이다. 이곳에서 탐방로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 그 소리의 주인들을 만나러 간다.

▼ 맨 윗자리는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차지했다. 청옥산에서 시작된 물은 계곡을 내려오면서 절벽에 부딪혀 가며 굽이치다 이곳에 이르러 3단의 절벽에 폭포를 이루며 수직 낙하한다. 그 모양새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하다해서 ‘용 용(龍)’자에 ‘못 추(湫)’자를 얻었는데, 상단과 중단은 옹기항아리 모양으로 되어있고, 하단은 용소(龍沼)라는 둘레가 30m에 이르는 깊고 검은 웅덩이다.

▼ 폭포 주변은 온통 암각 된 글씨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별유천지(別有天地)에 다녀갔다는 티를 내고 싶은 인간들이 남긴 찌꺼기다. 순사(巡使, 조선시대 지방의 군무를 살피던 임시직)나 부백(府伯, 府使의 또 다른 표현) 등 자신의 벼슬을 자랑하고픈 놈들도 여럿 보였다.

▼ 용추폭포의 조망대는 다리 형식을 취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다리를 놓고 전망대로 삼았다.

▼ 용추폭포를 떠난 물줄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이내 다시 긴 낙하의 꿈을 꾼다. 그게 ‘쌍폭포’라는 또 하나의 절경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된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리가 아니라 암반 위에다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 쌍폭포는 양쪽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말한다. 두타산 쪽에서 내려온 폭포가 왼쪽 박달폭포이고, 청옥산에서 내려온 폭포가 오른쪽 옥류폭포(玉流瀑布)다. 양쪽에서 쏟아지기에 소리도 웅장하고 모양도 장관이다.

▼ 박달폭포는 우리네 한복의 치마를 닮았다. 물이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타고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그래서일까? 여인의 속살을 엿보기라도 한 듯 두근거리는 이유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 쌍폭포를 끝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무릉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17분 후면 얼레지쉼터를 지나 아까 두타산성으로 올라가면서 기점으로 삼았던 삼거리에 이른다. 격랑의 물길도 언제부턴가 얌전해졌다. 그리고 바위를 둘러가며 멋진 계곡의 모습을 연출한다.

▼ 널따란 암반에 기암괴석, 그 사이로 옥수가 흐른다. 무릉계곡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도연명의 소설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나오는 지명이다.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을 따라가다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만났다는 지상낙원의 땅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 뒤에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천국과도 같은 이상향의 땅. 전국의 명승 곳곳에 보이는 ‘무릉(武陵)’의 지명은 모두 여기서 따왔다.

▼ 층층나무 고목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어른의 허리통 두엇을 합친 것보다도 더 굵다. 그게 범상치 않았던지 산림청에서도 안내판까지 매달아놓았다.

▼ 산행 날머리는 제3주차장

폭포에서 출발한지 45분. 학소대와 삼화사, 무릉반석을 차레로 지나면 매표소가 나오고, 이어서 1·2주차장을 거치면 산행이 종료되는 제3주차장에 이른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산행거리가 8.62㎞인 점을 감안하면 속도가 더디었던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천년만년 함께 지내고 싶은 집사람에 더해 오래 묵은 친구까지 함께 하다 보니 그리됐을 수도 있겠다. 이 행복한 순간순간들을 서둘러 보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