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산(鼎足山, 869.1m)

 

여행일 : ‘17. 2. 7()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서면

산행코스 : 해담마을다리교통호임도정족산임도버들계곡내현리 버들골양지말 버스정류장(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정족산(鼎足山)은 그 생김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높게 솟아난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솥발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 생김새의 산은 이곳 양양 외에도 전국에 몇 곳이 더 있다. 그중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상남도 양산시의 경계에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정족산(749m)이 가장 유명하고, 인천광역시 강화군에도 정족산(220m)이 있다. 그리고 가장 덜 알려졌지만 경북 경주시에도 정족산(700m)이 하나 더 있다. 그나저나 정족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산행 내내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 산은 여느 흙산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흙길이 보드라워 걷기에는 편하지만 눈에 담을 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조망 또한 정상과 하산 길에 만나게 되는 벌목지역(伐木地域)를 제외하고는 거의 트이지 않는다. 이곳 정족산이 그동안 오지(奧地) 중의 오지로 남아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오지란 말은 이젠 옛말이 됐다. 양양군에서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계단과 안전로프를 설치하고, 곳곳에다 이정표와 산행안내도 등을 세워 일반인들도 마음 놓고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 찾을만한 산은 아닌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해담마을(양양군 서면 서림리 128)

작년 말(2016.11. 24)에 개통된 동해고속도로 양양 I.C에서 내려와 56번 국도를 타고 구룡령(홍천) 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담마을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종합 레저타운인 해담마을을 알리는 광고탑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넓고 깨끗한 하천과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인 해담마을은 자연자원을 잘 활용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레저체험을 접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넒은 계곡에서 물길과 숲길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수륙양용차 타기와 하천의 물길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뗏목·카약 타기등 수상레포츠와 활쏘기, 서바이벌 게임 등의 체험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이곳 해담마을은 지난 2007년 강원도의 새농어촌 건설운동 우수마을에 선정된 이래, 정보화마을(2007), 전통테마마을(2008), 산촌생태마을(2008),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2011) 등에 잇따라 선정되면서 매년 수많은 체험객들이 찾아오고, 7억 원이 넘은 마을소득을 올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농촌체험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산사람들에겐 예외이다. 레저가 아니라 이곳이 정족산 탐방로(9.62km)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다. 이 탐방로는 자연 그대로의 숲속을 거닐도록 나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곳곳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을 만나게 되어 산행과 산림욕을 겸하기에 안성맞춤이란다. 아무튼 마을 앞에 정족산 탐방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족산,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정족산의 유래를 적어놓고, 그 아래에다 들머리인 이곳 해담마을에서 날머리인 버들골(내현리)까지의 탐방로를 그려 넣었다. 거리는 9.62Km 정도가 된단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38선 숨길의 코스도 소개하고 있다. 38선 휴게소를 출발해서 잔교리와 대치리, 명지리, 남천학생체험장, 서림리를 거쳐 영덕리까지 이어지는데 총 길이는 38Km가 된단다. 이름에 맞게 거리를 디자인한 모양이다.



후천(後, 이 일대를 서림계곡이라 부르니 참조한다)’을 가로지르는 예쁘장한 인도교(人道敎)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양양군에서 추진한 산소길 강원 300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정족산과 벽실계곡(벽실골)을 연결하기 위해 넓이 3.5m에 길이 74m의 크기로 만들었는데 예산이 8억 원이나 들어갔단다. 당연히 예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이 다리는 김영철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해담마을을 이 정도로 성장시키다가 지난 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 마을 이장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란다.



벽실골을 오른편에 끼고 난 임도를 따라 2~3분 정도 들어가면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방향표시만 있는 이정표(정족산 정상/ 서림리 정족산 입구)탐방로 안내도’, 그리고 거리표시만 있는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까 마을에서 보았던 탐방로 안내판과 비슷한 안내판이 이곳에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지도는 조금 다르게 그려 넣었다. 해담마을에서 버들골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는 같으나 조금 더 세밀하게 구간을 끊은 후에 각 구간마다의 거리를 표기해 놓았다.



눈에 익지 않은 이정표(정족산 정상 4.84Km/ 서림리 9Km)가 나무기둥에 묶여있다. 보통의 이정표들은 방향과 거리를 함께 표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 정족산은 그것을 둘로 나누었다. 이런 이정표는 매 100m마다 나타난다. 너무 자주 붙여 놓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얼마만큼 진행했는지를 수시로 체크할 수 있어 산행을 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사면을 치고 오른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지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어 별 어려움 없이 능선 위로 올라설 수 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섰다 싶으면 이후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로 연결된다. 산길은 생각보다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던지 밧줄난간까지 매어 놓았다. 조금이라도 힘들다싶으면 의지해서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첫 번째 산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참호(塹壕)가 파여 있다. 가운데에는 평상을 놓고 그 옆에다 탐방로안내도를 세웠다. 이로 보아 ‘38선 숨길을 개설하면서 복원해 놓은 모양이다.



교통호를 이용해 몇 걸음 더 내려가면 또 다른 참호가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는 ‘6.25, 그때의 흔적인 교통호라는 설명판을 세워놓았다. 국군 10연대 제1대대가 경계를 서던 지역이었는데, 당시 북한군 제1경비단 제2보병대대가 서림의 제9중대 전면을 돌파해 산간계곡을 따라 구룡령으로 급진하였단다. 그 아래에 북한군을 막던 당시의 상황들을 나열해 놓았으나 하나 같이 패퇴된 기록뿐이라 옮겨 적는 것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던 우리 아버지와 삼촌들의 역사이니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가파른 구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그 거리가 짧은데다 경사까지도 버거울 정도가 아니기에 그런 표현을 써봤다. 다시 말해 큰 어려움이 없이 진행할 수 있는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진행하면 송신탑(送信塔)을 만난다. 산길은 이 시설을 오른편으로 우회하여 임도(이정표 : 정족산 정상3.64Km/ 서림리1.2Km)로 연결된다. 그리고 비록 잠시지만 오른쪽 방향의 임도를 따른다.



2분 정도 걸었을까 왼쪽 사면(斜面)으로 목제계단(이정표 : 정족산 정상/ 서림리)이 놓여있다. 계단을 오르면 산길은 사면(斜面)을 옆으로 째면서 능선으로 오른다. 그리고 아까 송신탑이 있던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까지 가게 된다. 임도를 내면서 부득이하게 만들어진 절개지(切開地)를 피하려다보니 이렇게 한참을 돌게 만든 모양이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는 이정표(정족산/ 서림리)가 세워져 있다. 아까 들머리에서 거론했듯이 방향만 표기된 이정표이다. 이런 이정표들은 산길이 방향을 크게 트는 곳에는 어김없이 세워져 있다. 이런데도 길을 잃은 사람이 있을까?



둘레길특유의 리본(ribbon)도 보인다. 노란색과 파랑색의 두 가지 색으로 만들었는데 시야(視野)를 벗어나지 않게끔 촘촘히도 매달아 놓았다. 100m마다 나타나는 거리표시 이정표에다 이런 리본들까지 갖추었으니 산행 초심자들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가팔라졌다. 그러나 힘들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울창한 소나무 숲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로회복 기능까지 함유하고 있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라니까 말이다.



아까 들머리에서도 얘기했듯이 오늘 걷고 있는 이 코스는 ‘38선 숨길의 일부구간이다. 산림과 경관이 수려한 숲길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양양판 둘레길로 보면 되겠다. 이 길은 1945년 미·소의 포츠담 선언이후 군()이 남북으로 분할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현북면 잔교리와 서면 서림리를 연결하는 38km구간을 복원해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녹색관광 기반 마련을 위해 추진됐다고 한다. 또한 38선 길은 한국전쟁당시인 1950101,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현북면 잔교리 38선을 넘어 최초로 북진을 시작한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현재 38선 휴게소를 비롯해 현북면 대치리와 명지리, 서면 영덕리 등에 38선 관련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2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조망(眺望)이 열린다. 송전탑(送電塔)을 세우느라 주변 나무들을 제거한 덕분일 것이다. 힘차게 꿈틀대고 있는 저 산릉(山陵)은 응복산에서 조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산길 주변은 산죽(山竹) 군락으로 변해있다. 무릎 아래로 깔릴 정도로 낮게 자랐지만 푸름만은 오히려 더 짙은 것 같다. ‘작은 것이 매운 것이여~’라던 어느 CF 광고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얼마쯤 진행했을까 쉼터가 나온다. 조망터에서 15분쯤 떨어진 지점일 것이다. 자른 통나무를 세워놓은 의자가 눈길을 끈다.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런 쉼터는 서너 번 만났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들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쉼터이다. 쉼터를 지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엄청나게 길기까지 하다. 거리표시만 있는 이정표를 세 개나 만나고야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으니 가파른 오르막길을 400m 가까이나 오른 셈이 되었다. 그러니 이 쉼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 전에 잠시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보라는 배려용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쉼터는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도 만들어져 있다. 잠시 쉬면서 거칠어진 숨결을 고르라는 모양이다.




겨울 산행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눈밭을 헤지며 나가다 보니 힘이 배나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가가 과연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만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위험, 미개설 구간이라고 적힌 경고판도 보인다. 규모를 갖춘 능선이 갈리는 지점 마다 세워놓았는데, 만일 이정표가 없었더라면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겠다.



이후부터 산길은 또 다시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골이 많이 깊어졌다. 고도가 높아졌는지 눈이 쌓여 있는 곳도 많이 늘어났다. 그만큼 산행이 힘들어졌다는 얘기이다.



산길은 30분이 지난 후 또 다른 쉼터를 만나게 한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이번의 것은 아까보다도 더 험난하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있기 때문이다. 허리춤에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며 나간다는 게 만만찮기 때문이다. 밧줄이 매어져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것마저도 없었더라면 사투(死鬪)를 치룰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눈요깃거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시야(視野)가 열리는 오른편에서는 조봉으로 연결되는 산릉이 힘차게 꿈틀거리고,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는 설악산의 대청봉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긴 오르막이 끝났는데 정족산의 정상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제 한 굽이만 오르면 되겠지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능선의 오르내림이 자주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루함에 넌더리를 칠 즈음에야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35분 만이다. 정상에는 널따랗게 데크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전망대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명을 적어 넣은 전망사진을 게시해 놓았다. ‘38선 숨길 안내도도 보인다. 자기가 내려 가야할 코스를 살펴본 후에 하산을 시작하라는 모양이다. 또한 통나무 의자 몇 개를 놓아 쉼터의 기능도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38선 숨길을 조성하면서 매달아 놓은 이정표(정족산 정상, 서림 4.84Km/ 내현 4.78Km)를 보고 이곳이 정족산의 정상이려니 할 따름이다. 참고로 정족산은 산이 생긴 모양새로부터 생겨난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이를 증명한다 할 수 있다. <정족산(鼎足山)은 부 서남쪽 40리에 있다. 세 봉우리가 높게 솟아나서 모양이 솥발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도적사(道寂寺)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양양부읍지에는 <오대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와 도적사의 주맥(主脈)이 되었다. 관문에서 서남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양군읍지에는 남쪽 45리로 기록되어 읍지마다 위치 표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아무튼 조선 시대의 여러 문헌에 산 지명이 수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산의 유래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등산로에 설치된 탐방로 안내판에서 발췌)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시야가 절반만 뚫린 탓에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보고 싶은 풍경들은 모두 다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면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동해바다는 비취색으로 빛나고 그 왼편에는 설악산이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식탁이 아닐까 싶다. 전망대의 아래에다 배치했는데 전망이 뛰어나기 때문에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면서 조망까지도 실컷 즐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허리춤에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며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눈이 조금 덜 쌓인 부분을 골라가며 내려서다 보면 15분쯤 되는 지점(이정표 : 내현리 4.7Km/ 정족산 정상 0.8Km)에서 산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주능선에서 지능선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눈도 많이 쌓여 있지만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조금만 가팔라도 어김없이 굵은 밧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게 버겁다 싶으면 밧줄에 의지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내려오면 멋진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벌목(伐木)을 마친 왼편 산자락이 텅 비면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조망을 돕기 위해 데크로 대()를 만들고 그 앞에다 조망사진까지 게시해 놓았다. 대에 오르면 동해의 너른 바다와 설악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하지만 넋을 빼앗길 필요까지는 없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한층 더 나은 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서는 곳마다 최고의 조망처가 된다고 하는 게 더 옳겠다. 갈수록 시야(視野)가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동해에 대한 조망은 조금 전과 다름없지만 설악산은 아까보다 한결 또렷해졌다.





조망을 줄기다가 또 다시 하산을 이어간다. 그리고 5분 후에는 방향만 표시된 이정표와 탐방로 안내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임도에 내려선다. 안내도에는 정상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34Km로 적고 있다.



임도를 가로지른다.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가파르던 산길은 잠시 후 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힘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긴 심심찮게 나타나는 거대한 소나무들을 구경하면서 오르내리다보면 지루할 틈도 없을 것이다.



30분 후, 또 다른 임도를 만난다. 아까 만났던 임도에서 1.4Km가 떨어진 지점이다. 이번에도 역시 임도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곧장 연결시키지는 않고 오른편으로 50m 정도를 옮긴 후에야 아래로 향한다. 양쪽 모두 이정표를 세워놓았으니 길을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후부터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방향을 크게 트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 놓았지만 약간의 주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구간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들은 대부분 굵다. 또한 여느 토종 소나무들과는 달리 하늘을 찌를 듯이 쑥쑥 솟아올랐다. 거기다 표피가 붉다는 것을 더하면 영락없는 미인송(美人松)의 특징이 된다. 팔등신처럼 잘 빠졌다는 그 미인송 말이다. 참고로 미인송은 금강송(金剛松)의 다른 이름이다. ‘금강산 소나무를 줄인 말인데, 소나무를 자세히 보면 그 껍질이 황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그 외에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 목재가 춘양역으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이 황금색으로 빛나면서 아름다운 자태들을 한껏 뽐내고 있다.




임도를 내려선지 15분쯤 지나면 자잘한 바위들이 널려있는 쉼터를 만난다. 산길은 이곳에서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벼랑에 가까운 비탈길로 보면 된다. 하지만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가면 별 문제 없이 내려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7분 정도를 내려서면 계곡에 이른다. 그러나 산길은 곧장 계곡으로 내려서지를 않고 계곡의 왼편 사면(斜面)을 따라 난 길을 따른다. 그리고 6분 후에 만나게 되는 계곡에부터는 임도를 따라 버들골로 나간다.



양지말 버스정류장(양양군 서면 내현리)

그렇게 6분 정도를 걸어 나가면 차단기가 나오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잘 지어진 펜션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에 세워진 이정표(정족산 정상 4.78Km/ 내현리 0Km)는 물론이고 탐방로안내도에 이곳을 정족산 탐방로 입구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 이쯤에서 산행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대형버스가 마을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정족산 탐방안내도와 이정표(정족산입구 1.8Km/ 남천 체험학습장 1.7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59번 국도변의 양지말까지 20분 가까이를 더 걸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루할 정도로 먼 거리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별빛촌언덕위의 하얀집’, ‘수밸리펜션’, ‘펜션다산방등 길가에 나타나는 어여쁜 펜션들을 눈에 담으며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왕치산(王峙山, 902m)-월루산(月樓山, 758.6m).

 

여행일 : ‘16. 9. 22()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과 여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반천2리 경로당질등봉(537m)큰등봉(820m)왕치산월루산(758.6m)월루마을월루산(715m)반천리마을회관(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지(奧地) 중의 오지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산이다.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 없다. 하지만 등산로는 분명이 나있다. 다만 찾기가 힘들 따름이다. 찾는 사람들이 하도 적은 탓에 잡목(雜木)들이 선답(先踏)한 산꾼들이 어렵게 내놓은 산길은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것도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전체가 다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흙산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첫째 눈에 담아둘 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다. 그런 눈요깃거리들을 만들어 낼 재료인 바위들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조망(眺望) 또한 일절 터지지 않는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두어 곳의 간벌지(間伐地)에서나 잠깐씩 열릴 따름이다. 그것도 겨우 손바닥만큼이나 적게 말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을 다 올라볼 요량이 아닌 사람이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는 산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산행 내내 황금색으로 빛나는 소나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짙은 솔향을 코 끝에 걸치고 걷는 즐거움은 실지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일 것이다.

 

반천2리 경로당(敬老堂 : 정선군 임계면 반천리)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와 59번 국도를 타고 정선방면으로 내려오다 나전삼거리(정선군 북평면 북평리)에서 좌회전하여 42번 국도(동해방면)로 옮기면 잠시 후 여량면 소재지인 여량리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아우라지성당(여량리)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 : 봉정로)를 따라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반천2리 경로당(버스 정류장에는 어전리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들어오는 길에 보이는 하천은 골지천이다. 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한 하천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눈여겨 볼 일이다.




경로당의 뒷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골목의 맨 끝에 있는 민가(民家)의 오른편에 있는 밭을 가로질러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다. 애초부터 이 산자락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 들어선 대가는 혹독했다. 비탈진 사면(斜面)을 올라가는 것만도 부담스러운데, 거기다 능선을 가득 메운 잡목들까지 갈 길 바쁜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아 놓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런 오르막 구간이 무척 짧다는 것이다. 길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6분 정도를 오르다보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섰다고 해서 금방 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흔적을 겨우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산길이 변해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험난한 산행이 계속된다.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커다란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바위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그러다보니 비탈진 사면을 오르내리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나뭇가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길은 여전히 사납다. 오르내림이 힘들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능선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잡목(雜木)들을 헤치고 나가기가 힘들다는 얘기이다.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든 것은 물론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여름 내내 흐르는 땀 때문에 고생했었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오늘은 괜찮다. 경사가 완만하다보니 힘이 덜 들었나 보다. 아니 그보다는 가을색이 완연한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마를 스쳐가는 바람결에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기 때문이다. 그래 우린 이미 가을로 들어섰음이 분명하다. 그 증거가 바로 능선에 가득하게 피어난 야생화(野生花)들일 것이고 말이다.



능선에는 구절초(九節草)가 만발해 있다. 그리고 이련 풍경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된다. 가을의 전령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꽃이니 가을이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나 보다. 구절초는 구일초(九日草), 선모초(仙母草), 들국화 등으로도 불리는데, 민간에서는 꽃이 달린 풀 전체를 약재(藥材)로 쓴다. 치풍과 부인병, 위장병에 좋단다. 언젠가 도예(陶藝)를 하는 지인이 구절초 차()’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산골에 머물며 작업을 하는 틈틈이 채취했다며 보내주었는데 그 향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차의 재료로도 사랑을 받고 있나 보다.



희미한 흔적을 찾아가며 진행하길 15분 만에 말끔하게 벌초(伐草)를 끝낸 묘역(墓域)을 만나고, 곧이어 산길은 작은 안부로 내려선다. 좌우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는 걸 보면 들머리인 반천2리 경로당으로 오기 전. 어느 지점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 밋밋한 경사(傾斜)이다. 거기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이런 길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속도를 떨어뜨린 채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걸어볼 일이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갈 것이다. 이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질 것이고 말이다. 그게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기 때문이다.



솔향에 취한 채로 6분쯤 오르면 질등봉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두루뭉술한 게 구릉(丘陵)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질펀하다는 말이 있다. ‘땅이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는 뜻인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정상의 생김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이 봉우리를 질등봉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될 수도 있겠다.



정상은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긴 완전무결하게 버려진 이런 산에서 그런 시설물들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점(405재설/77.6건설부)은 설치되어 있다. 옆에다 삼각점의 관리표찰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위치나 관리번호 등 삼각점의 관리를 위한 제반 사항은 텅 빈 채로이다. 무늬만 삼각점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는 게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이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데, 나보다 한발 앞서 가고 계신 모양이다.



질등봉을 지나면서 산길을 제법 가팔라진다. 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다. 가파른 산길의 일반적인 특징인 갈지()자를 만들지 않고서도, 곧게 산길이 나있을 정도라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하긴 300m 정도의 높이를 50분 동안에 오르면 되니 서둘러가며 고도(高度)를 높여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6분쯤 걸었을까 파평 윤씨묘역(墓域)이 나타난다. 모처럼 조망이 트이는 곳이다. 능선을 깔끔하게 간벌(間伐)을 해놓은 덕분이다. 아무튼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는 것이 강원도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론산과 고양산, 문래산, 각희산 등일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산길은 계속해서 꾸준한 오름세를 유지한다. 주변 풍경도 변함이 없다. 심심찮게 참나무들이 섞여 있을 뿐 온통 소나무들 천지인 것도 같다. 이런 풍경은 20분 이상 계속된다.



변화를 주어가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확연히 변해있다.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던 소나무들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참나무들이 대신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버섯이 자라기 좋은 여건이라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는 야생버섯들이 널려 있다. 대부분이 못 먹는 버섯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가을철 별미(別味)인 싸리버섯이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집사람은 꽤나 많은 양의 싸리버섯을 채취할 수 있었다. 약간의 영지버섯도 땄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40분쯤 진행하면 펑퍼짐한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물론 질등봉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곳에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곁에다 큰등봉이라고 쓴 종이를 내걸어 놓았다. 하지만 박건석선생의 코팅지는 보이지 않는다. 진위(眞僞)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뒤따라오는 일행이 고도계(高度計)를 갖고 있기에 물어보니 잘못된 표시란다. 그렇다. 이곳이 큰등봉이었다면 박건석선생이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본이깔나무(낙엽송) 숲이다. 한때 조림용(造林用)으로 각광을 받던 나무인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오른 것이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다. 외모만 갖고 본다면 소나무들보다도 오히려 한수 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큰등으로 표기된 지점인데 인근 주민들은 큰 질등봉이라고 부른단다. 펑퍼짐한 것이 질등봉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삼각점까지도 설치해 놓지 않았다. 완전무결하게 텅 비어있는 셈이다. 이번에도 역시 박건석선생의 정상표시 코팅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거의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밋밋하게 이어진다. 큰질등봉과 왕치산의 높이가 40m 남짓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길도 많이 또렷해졌다. 모처럼 여유롭게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다. 하지만 볼거리는 없다.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그저 쭉쭉 뻗어 오른 낙엽송을 눈에 담거나, 아니며 혹시라도 만날지도 모르는 싸리버섯이라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5분쯤 걸으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난다. 그리고 곧이어 임도(林道)로 내려선다.



임도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둘로 나뉘어 버린다. 왼편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이 매달려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능선을 탄다고 생각하고 들어설 수밖에 없다.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주변이 온통 넝쿨들로 뒤덮여 있어 길을 찾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다. 가을철 산행의 별미인 다래를 제법 쏠쏠하게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은 월루산 정상 근처에서도 만나게 된다.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발걸음을 멈추고 그 별미를 즐겨볼 일이다. 새콤달콤한 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5분이면 왕치산 정상이다. 정상은 꽤나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헬기장은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벌목(伐木)을 해놓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왕치산의 원래 이름은 왕지산(王旨山)이었다고 한다. 정선읍 봉정리에 왕의 교지(敎旨)를 받은 사람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산이 어찌어찌 하다 보니 왕치산(王峙山)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다. 펑퍼짐한 모양새도 앞서 올랐던 두 봉우리와 같다. 그나마 이곳은 서울마운틴에서 정상표시 아크릴판을 매달아 놓았다. 오지산행을 전문으로 하는 산악회인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들이 없었더라면 자칫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코팅지도 보인다. 이곳도 역시 우리보다 먼저 지나가셨던 모양이다. 잡목에 둘러싸인 정상은 조망(眺望)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는 에워싼 나무 틈새로 북으로 노추산과 사달산, 노목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반륜산과 반논산. 고양산, 문래산 등이 보인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찾아온 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산은 남서쪽 월루마을 방향이다. 잡목들로 둘러싸여 있어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으나 잘 살펴보면 터널(tunnel)처럼 생긴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어서 제법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5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임도를 만난다. 누군가가 월루재라고 적었던 지점인 모양이다.



잘 자란 소나무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임도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차량이 다녀도 좋을 만큼 널따란데다가 포장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는 편안한 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려오는 길에 지나가는 차량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임도를 따르던 집사람의 손길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길가에 보이는 민들레의 잎이 연하다는 것이다. 그런 질 좋은 먹거리를 살림꾼인 집사람이 놓쳤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민들레는 이틀 동안이나 우리 집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임도를 따라 걷기를 10,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 산자락을 향하고 있다. 아무런 표시도 없기에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산악회의 리본도 눈에 띄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저 마땅한 곳을 찾아 오른편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수밖에 없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길이 거칠어진다. ‘이런 이 절로 튀어나오게 되는 길이다. 이럴 수도 그렇다고 저럴 수도 없는 게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다. 바닥은 온통 베어놓은 나무 등걸들 천지, 주의하지 않으면 등걸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위를 내버려둘 처지도 못된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잡목들이 싸대기를 두드려 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산행이 계속된다. 아까 산행들머리에서 고생했던 것도 지금에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이 부근에서 가끔 조망이 트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하도 조망이 귀한 산이기에 이 마저도 감사하게 눈에 담는다. 아무튼 월루마을이 자리 잡은 널따란 분지(盆地)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를 향해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잘 생겼다. 미인송(美人松)인 모양이다. 팔등신처럼 잘 빠졌다는 그 미인송 말이다. 참고로 미인송은 금강송(金剛松)의 다른 이름이다. ‘금강산 소나무를 줄인 말인데, 소나무를 자세히 보면 그 껍질이 황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그 외에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 목재가 춘양역으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이 황금색으로 빛나면서 아름다운 자태들을 한껏 뽐내고 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엎드리는 것이 보인다. 뭔가 또 다른 먹거리를 발견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이 온통 잣나무 천지다. 커다란 잣나무 열매가 바닥에 널려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집사람은 심심찮게 식혜를 만든다. 유난히도 술을 좋아하는 내 속풀이용도이다. 그 식혜에 동동 띄울 것으로 잣 만한 것이 없으니 살림꾼인 집사람이 놓쳤을 리가 없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이어진다. 그리고 수많은 봉우리들을 올라서게 만든다. 혹시 이게 월루산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자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지루한 구간이다. 화부터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친 산길에서 그런 느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35분을 진행하면 송전탑을 만난다.



송전탑을 지나서도 작은 오르내림은 계속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고생시키고 나서야 드디어 월루산 정상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월루봉(768.6m)’으로 표기된 지점인데, 펑퍼짐한 서너 평 남짓의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력을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만이 외로울 따름이다.



박건석선생이 방금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보인다. 우린 그 코팅지를 넣어 인증사진을 찍는다. 그를 앞지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결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인증사진은 결코 찍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친 산길은 월루산을 지나서도 계속된다.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에 얽매이기 보다는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 중의 하나가 다래이다. 새콤달콤한 다래가 이 구간에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야 그저 따먹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일행 중 한명은 비닐봉지로 하나를 가득 채웠을 정도였다.



바위구간도 보인다.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는데 서슬이 시퍼렇다거나 거대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규모는 갖추었다.



15분 조금 못되었을까 산길이 능선을 벗어난다. 왼쪽 방향이다. 그리고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가파름만 해도 버거운데 잡목까지 진로를 방해하는 만만찮은 내리막길이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서면 월루마을;에 내려서게 된다. 월루마을은 달과 같이 둥그렇게 생긴 지형의 분지(盆地) 속에 들어앉은 자그만 산골마을이다. 달빛이라도 비추일 때의 마을이 마치 빛나는 누각과 같다 하여 월루(月樓)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마을을 통과한다. 과수원을 통과하는가 하면 축사(畜舍)의 옆으로 지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금()줄이나 망()을 넘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주민들에게 피해가 되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는 얘기이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피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축사를 지났다싶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편은 반천리로 나가는 길, 산길은 오른편 포장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100m쯤 지난 후에는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아무런 표시도 없기 때문에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럴 때는 눈치가 필요하다. 그저 왼편에 보이는 산의 능선을 향해 치고 오른다고 생각하고 들어서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다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막상 산자락에 들어서고 나면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다. 아무튼 무작정 치고 오를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그것도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말이다.



그렇게 20분 가까이 오르면 능선을 만나게 되고, 잠시 후에는 금()줄이 처져있는 곳에 이른다. ‘통제구역이라는 팻말까지 매달아 놓은 것을 보면 귀한 약초라도 재배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무시해버린다. ‘약초만 캐지 않으면 되겠지하는 자위(自慰)로 위안을 삼으면서 말이다. 금줄을 넘지 않고서는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금줄을 넘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면 5분 후에는 또 다른 월루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는 높이가 768.6m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715m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없다. 대신에 서울마운틴에서 정상표지판을 걸어 놓았다.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방금 전 걸어 놓은 코팅지도 보인다. 그런데 봉우리의 이름을 반천봉이라 적었다. 아마 요 아래에 있는 동네의 이름에서 따온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둘 모두 정답은 아닌 것 같다. 능선상의 최고봉이자 월루산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는 봉우리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봉우리에다 월루산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은 서울마운틴에는 애초부터 동의할 생각이 없다. 그게 만일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건석선생의 작품에 동의할 생각도 없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을 경우 이를 본 다른 이들이 자칫 혼동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이다. 하산 길 초반은 금줄을 따른다.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은 나타난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그마저도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없는 길을 억지로 내가면서 진행하게 된다. 거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기까지 하니 한걸음 내려서기조차 버겁다. 한마디로 악전고투의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20분 가까이를 내려서면 드디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포장이 되어 있는 탓에 멋스러움은 약간 떨어지지만 구절초가 반갑게 맞는 예쁜 길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하니 걷는 게 부담스럽지도 않다. 아니 즐겁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이런 곳에서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치(音癡)인 난 그저 묵묵히 걸어갈 따름이다.


산행날머리는 반천리 마을회관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저만큼에 반천리 마을이 나타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아침에 지나갔던 도로가에 마을회관은 물론 보건진료소까지 지어져 있다. 반천리가 제법 규모를 갖춘 마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이 넘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이라고 봐도 좋겠다.


석병산(石屛山, 1055.3m)-두리봉(斗里峰, 1033m)

 

산행일 : ‘16. 5. 26()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과 강릉시 왕산면·옥계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삽당령헬기장866.4m두리봉석병산910m고병이재석화동굴삼층석탑산계3리 마을회관(산행시간 : 4시간 4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모처럼 백두대간 마룻금을 밟아보는 산행이다. 자연생태적, 인문지리적, 문화적, 산업적으로 다양한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이 땅의 핵심축이며 민족정기의 상징이자 귀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인 백두대간, 2003년에 종주를 마쳤으니 13년에 다시 밟아보는 셈이다. 감회가 새로운 마룻금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지도와 나침반이 필수일 정도로 희미했던 길은 이젠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일 정도, 거기다 중간 중간에 길이 뚫려 마룻금으로의 진입도 한결 수월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백두대간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걷는 두리봉과 석병산을 낀 구간은 보통 삽당령에서 시작되어 백봉령에서 끝을 맺는다. 물론 반대방향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하던지 그 특징은 같다. 일단 능선에 오르고 나면 큰 오르내림이 없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넘나드는 특징 말이다. 거기다 이번 구간은 순수한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이 구간은 바위로 이루어진 석병산 정수리 부근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저 원시의 냄새가 짙은 울창한 활엽수 숲을 거닐며 호연지기를 가다듬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쳐도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절골로 내려가는 하산코스이다. 짧은 거리에서 1000m 이상이나 되는 고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볼 것도 없는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니 거의 죽음의 코스라고 보면 된다.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삽당령(揷唐嶺 :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

영동고속도로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타고 태백시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왕산면의 송현리와 목계리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삽당령(揷唐嶺)이다. 삽당령은 동서(東西)로 나뉘는 분수령(分水嶺), 즉 강릉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그리고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으로 몸을 섞는 송현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이다. 참고로 삽당령이란 이름은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짚고 왔던 지팡이를 버리고(꽂아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자를 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정상에서 북으로 대기(大基) 가는 길과 서쪽의 고단(高丹) 가는 길이 나뉘는데, 이 세 갈래 길의 생김새가 삼지창과 같다고 하여 삽현(揷峴)’, 또는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삽당령(揷堂嶺)’으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해발고도 680m의 고갯마루에는 이곳 삽당령이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그 뒤 저만큼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내판도 보인다. 백두대간과 삽당령의 유래를 알리는 글과 함께 삽당령에서 닭목령까지의 등산지도가 그려져 있다.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지어져 있다. 한 토막의 옛 얘기라도 적혀있을까 해서 다가가 보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당집만 외로울 뿐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성황당은 그 역사가 500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 : 매달 첫째 드는 ()’의 날)에 교통무사고와 풍년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祭物)은 소의 머리와 생식기라고 한다. 6.25 전쟁 때 불탔던 것을 1953년에 개축하였으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또 다시 파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빗돌 앞 국도를 건넌다. 들머리가 맞은편 산자락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커다랗게 이정표(석병산/ 닭목령)를 세워 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임도(林道)를 만난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삽당령이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들머리에 이정표(두리봉 4.5Km, 석병산 6.1Km/ 삽당령 0.1Km)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산행을 시작하고 5분쯤 되었을까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급하다는 듯이 위로 향한다. 오르막에는 둥근 원목(原木)을 잘라 계단을 설치했다. 하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보폭(步幅)과 높이가 일정치 않고 멋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오르막길이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삼거리(이정표 : 두리봉4.3Km, 석병산 5.9Km/ 통행금지/ 삽당령0.3Km)이다. 하지만 막혀있는 걸로 보아 비정규등산로인 모양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그 사나웠던 기세를 일시에 뚝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고 잠시 후 헬기장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만이다. 헬기장 근처(이정표 : 석병산/ 외고단/ 삽당령)에서 외기단 가는 길이 나뉘나 큰 의미는 없을 듯 싶다.




오랜만에 황장목(黃腸木)을 만난다. 소나무 껍질이 황갈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백두대간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물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본다. 황장목은 금강송(金剛松)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금강산 소나무'의 줄임 말, 봉화에서 난 황장목이 춘양역에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간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미인처럼 쭉쭉 잘 빠졌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니 입맛에 맞게 골라 쓸 수 있다.



다시 10분 후, 이번에는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에 올라선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는 산죽(山竹) 숲을 자주 만난다는 것이다. 어른의 어깨높이 쯤 자란 산죽 숲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을 방해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손질을 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길이 또렷이 잘 나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에는 산목련이 한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도의 산하는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들었었다.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철이 바뀌었나 보다. 아니 봄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버렸나 보다.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숫제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눈치이다. 두리봉은 높이가 1,033m나 되는 높은 산이다. 하지만 삽답령의 표고가 680m나 되니 기껏 해봐야 300m 남짓의 고도(高度)만 더 높이면 된다. 그것도 4.5Km이나 되는 먼 거리에서이다. 그러니 고도를 높이려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45분 정도를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길가에 세워진 조그만 이정표(두리봉 80m/ 덕우리재 11.8Km/ 삽당령 4.5Km)울트라 2구간이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울트라마라톤 코스라도 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두리봉(斗里峰) 정상에 올라선다.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音借)한 것에 불과하니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다. 그건 그렇고 두리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이다. 그렇다면 두리봉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리봉이란 이름은 제대로 지어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산봉우리란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한 듯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정상은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 놓았다. 두루뭉술하게 생긴 봉우리의 특성을 살린 모양이다.



석병산으로 향하는 산길은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편이다. 그래선지 뒤돌아본 두위봉은 아까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봉우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두리봉이라는 별도의 이름까지 얻었던 모양이다.



석병산까지의 능선 또한 두루뭉술하게 생긴 건 여전하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골의 깊이가 조금 더 깊어졌고 경사 또한 약간은 더 가팔라졌다. 그렇다고 힘에 부대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진행하면 널찍한 헬기장을 만난다. 이정표가 두 개나 보인다. 하지만 두 개 모두 없는 것만 못하다. 하나는 아예 글씨가 지워져버린 채로 방치되어 있고, 다른 하나(백두대간 수목원 7Km/ 석병산 9.7Km)는 난데없는 지명이 불쑥 나타나 있다. 백두대간 수목원에서 개별적으로 세운 모양인데 대간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시설물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칫 잘못하다간 엉뚱한 곳으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이어가다 보면 양쪽 사면(斜面)의 생김새가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왼편이 엄청나게 가파른데 비해, 오른편은 완만한 편이다. 태백산맥의 특징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내륙과 해안은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능선이 워낙 또렷하다보니 산은 물을 건너지 아니하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체험도 가능하다. ‘내 어깨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비()와 왼쪽으로 떨어지는 비의 운명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체험 말이다. 하지만 우중(雨中) 산행 때나 가능할 테니 오늘은 그냥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으로 만족해야겠다.



14분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트여있는 작은 공간이 보인다. 일단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멋진 풍광을 만난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석병산의 정상, 즉 일월봉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만들어 놓은 액자(額子) 속에 들어앉은 그림이 숫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이다.



조망터에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일월봉5/ 헬기장1시간10/ 두리봉)가 나온다. 백두대간 마룻금은 직진이다. 하지만 석병산의 정상은 왼쪽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는 셈이다. 이는 정상을 둘러보고 난 후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바위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두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석병산의 정상 중 첫 번째 봉우리(어떤 이들은 이 암봉을 상월봉이라 부르기도 한다)로 비록 삼각점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정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건너편에 있는 일월봉이 한눈에 잘 들어오기 때문이다.



삼각점봉에서 약간 내려왔다 다시 오르면 드디어 일월봉, 즉 석병산의 정상이다. 서너 평쯤 되는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은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은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 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듯 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풍경은 보여주지 않는다. 연무(煙霧)가 짙은 탓에 조금 전에 지나온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올 따름이다. 그것도 조금만 멀다 싶으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정상을 빠져나오다 보면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이정표에 일월문이라고 적혀있다. 석병산의 명물이라는 그 일월문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뻥 뚫린 바위굴() 하나가 나타난다. 일월봉(석병산 정상)의 바위벼랑 아래에 뚫린 바위구멍이라고 보면 된다. 일월문(日月門)이란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출 때면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라지만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만다. 비박(bivouac)이라도 해야만 기대해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헬기장 방향, 즉 백두대간의 마룻금을 따른다. 5~6분 후 자그만 헬기장에 올라선다. 버려진 지 오래인 듯 잡초들만 무성하다.



산길은 여전히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산림생태길 걷기 축제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곳곳에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정도라면 걷기가 아니라 산악마라톤의 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할 것 같기 때문이다.



10분 후 상황지미골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헬기장 1시간/ 상황지미골 2시간30/ 일월봉 15)를 만난다. 통나무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곳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백두대간생태수목원에서 세운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5.9Km/ 석병산 0.6Km)가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도 이정표는 오로지 한 곳, ‘백두대간수목원만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 방향에 백두대간이란 단어까지 들어가 있으니 문제다.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백두대간 줄기를 타야한다는 개념으로 입력이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쪽 방향이 틀린 길이란 걸 알아차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백두대간을 완주했던 나까지도 잠시 헷갈려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백두대간생태수목원강원도산림개발연구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산림 생태 문화 체험단지이다. 강원도 소속의 공공시설이라는 얘기이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할 공공기관에서 이렇게 무책임한 짓을 해도 되는 것이지 모르겠다. 이정표를 이용해 자기들 시설이 그쪽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까지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렇게 길이 나뉘는 곳에는 다른 방향의 표시까지도 해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그것도 그곳이 주된 길이라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지금이라도 시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태수목원 갈림길을 지나서도 넉넉한 육산(肉山)의 모양새는 변함이 없다. 능선을 가득 매운 활엽수 숲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쑥쑥 자라고 있는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도 만난다. 이렇게 높은 곳에까지 조림사업이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정표(골뱅이재 10/ 일월봉 1시간15)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헬기장을 만난다. 어디서 세운 시설물인지는 몰라도 이정표의 적힌 지명이 틀려있다. 고병이재를 골뱅이재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서도 산길은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산길이 서서히 아래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니 자그만 변화는 있었다. 길가의 야생화들 숫자가 부쩍 널어났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들꽃을 피웠다. 보드라운 산들바람으로 와서 곱게곱게 간지러움을 태워 꽃을 피웠다. 지나가던 나는 그 꽃을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바람 같은 사연을 꽃잎에 새기고는 바람결에 기대어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헬기장에서 6분쯤 걸었을까 반반한 분지(盆地) 형태로 이루어진 고병이재에 내려선다. 강릉 산계리와 정선의 임계리를 동서로 잇는 고개다. 쉼터를 겸하도록 조성되어 있는 고갯마루에는 백두대간과 석병산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백봉령/ 석병산)가 세워져 있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은 삼거리이다. 아니 고갯마루이니 사거리로 보는 게 옳겠다. 하여간 이곳에서 절골, 그러니까 산계리(강릉시 옥계면)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



절골 방향으로 내려선다. 백두대간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12분 후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석화동굴/ 절골/ 고병이재)로 나뉜다. 왼편은 절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미개설구간이라고 표시해 놓은 걸로 보아 아직은 이용하지 말라는 모양이다.



절골갈림길을 지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길가에 매어놓은 안전로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저 조심해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내려가면 야트막한 바위봉 하나가 나타난다. ‘유생바위란다. 예로부터 이 지방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아 성균관 유생이 되려는 선비들이 많이 찾아오던 고장이란다. 우뚝 솟은 이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학자를 꿈꾸는 선비들의 의연한 자태를 닮았다고 해서 유생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에 오르면 시원스런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휘휘 늘어진 소나무 가지 아래로 건너편 808m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 왼편에 버티고 있는 산은 아마 석병산일 것이다.




유생바위를 지나서도 산길은 변화가 없다. 여전히 가파른 것이다. 조심조심 내려선다. 그리고 17분 후 이정표(석화동굴/ 고병이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선 쉼터에 이른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서 능선을 벗어난다. 참고로 난 이 구간에서 회양목이 자생종인 줄을 처음으로 알았다. 화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었기에 조경용으로 재배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능선이 온통 회양목으로 차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아니 아까보다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이런데다 계단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물어오는 말투로 보아 집사람이 많이 놀란 눈치다.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가파른 곳에다 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놀랄 만도 하겠다. 지면(紙面)으로나마 강릉시청 직원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통나무계단이 무너져 있는 곳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파른데다가 지반(地盤)까지 무르기 짝이 없는 흙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를 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계단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려디딜 때 무릎이 받게 되는 하중을 스틱 하나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폐허로 변한 공중화장실을 만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지만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때 손님을 맞았던 석화동굴(石花洞窟)’에 내려선 것이다. 지방기념물 제37호인 석화동굴(石花洞窟)은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옥계굴또는 절골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주굴(主窟)의 길이만 약 600m이고, 총연장은 1,000m에 이른다고 한다. 이 굴은 거대하고 화려한 종유석과 석회화폭(石灰華瀑)의 발달을 볼 수 있지만 특히 석화의 밀집 발달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동굴로 들어선다. 하지만 쇠창살로 굳게 닫혀있다. 덕지덕지 녹이 슬어있는 것이 폐쇄된 지 꽤나 오래인 모양이다. 이 동굴은 70년대 초에 개발되어 80년도 까지 일반인에게 개방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재개방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심심찮게 다툼이 있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요즘 관광지로 개발한 석회동굴들이 많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척에 있는 환선굴의 경우 동굴개발과 주변 정리사업에 200억 원이 들어갔다. 이 정도의 규모와 위치에 그 정도의 예산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석화동굴을 지나면서 산길은 좋아진다. 넓은데다 그 경사(傾斜)까지도 완만해졌다. 옛날 석화동굴이 손님을 맞고 있었을 당시에는 수레가 드나들 수도 있었겠다. 잠시 후 아직까지 정비가 완료되지 않은 산길(아까 능선에서 헤어졌던 미 개설구간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이 나뉘는 삼거리를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담쟁이 넝쿨들로 도배된 민가(民家)가 나타난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게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석화동굴을 벗어난 지 14분 만이다.



민가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근처에 민가 몇 채가 들어서 있는데 전체를 아울러 절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공터에 석병산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은 걸로 보아 석병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실상의 산행은 이곳에서 종료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에다 버스를 세워두면 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산행코스가 4시간짜리로 변하게 됨은 물론이다.



공터의 옆에 삼층짜리 석탑이 하나 보인다. ‘산계리 석탑(山溪里 石塔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3)’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기단부의 갑석과 면석이 하나씩만 남아 있어서 하부 구조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의 기단은 새로운 석재로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결실된 부분도 새로운 석재를 끼워서 기단부와 탑신부를 복원한 상태라고 한다. 아무튼 이곳의 지명인 절골과 관련된 유물일 것 같다. 조선후기 까지만 해도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40년경 광뢰 이야순(퇴계 이황 9세손)이 이곳에 왔다가 절을 지키고 있는 스님과 학문으로 담판을 지어 스님을 쫒아내고 절을 허물어 서당으로 이용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진다.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고, 옛 얘기마저 잃어버린 ‘3층 석탑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주고 있다.



산계리 석탑에서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내려 간다. 길가에 널린 산딸기를 따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가도 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복 2차선의 도로인데도 왜 버스가 올라오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거리가 가까워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길은 길고 또 길었다. 묵언(黙言) 걷기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점잖은 입에서 육두문자(肉頭文字)라도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산계3리 마을회관(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이제나 저제나 마을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40, 저만큼에 마을회관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5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40분이 걸린 셈이다. 마을회관 뒤는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에 딱 좋을 정도의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비보림(裨補林,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가 약한 곳에 조성한 숲)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숲이란다. 숲의 한가운데에는 광뢰 이야순선생이 옮겨다 놓았다는 성황당이 있다. 아무튼 오늘은 성황당과 인연이 깊은 날인가 보다. 산행을 시작할 때도 성황당을 만났었는데 산행의 마감도 성황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기마봉(騎馬峰=말탄봉, 383m)-외솔봉(236m)-삿갓봉

 

산행일 : ‘16. 4. 28()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과 옥계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강릉1터널밤재휴게소기마봉외솔봉삿갓봉해파랑길(바우길9구간)심곡마을버스정류장(산행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의외로 괜찮은 산이네요함께 산행을 하고 있던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께서 넌지시 말을 건네 온다. 그렇다. 그의 말마따나 의외이다. 오늘 산행은 산에 대한 기대보다는 산행 후에 바닷바람이나 쐬어볼까 하고 가벼운 아음으로 따라나섰었다. 그러니 산행은 보너스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오르고 보니 나름대로 볼거리가 많은 산이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 오른 산들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거기다 높이가 채 400m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들이다. 그러니 산세(山勢)가 보잘 게 없을 것임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거기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도 없다고 봐야 한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다. 특징대로라면 조망까지도 기대할 수 없어야 하는데, 외솔봉과 삿갓봉에서의 조망이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다.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동해바다의 풍경은 물론이고, 산꼭대기에 배를 이고 있는 정동진의 썬크루즈리조트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거기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편안한 산길은 산행이 아니라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삼아 걸어보기 딱 좋은 산들이다.


 

산행들머리는 밤재휴게소(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

동해고속도로(양양-동해) 옥계 I.C를 빠져나와 7번 국도를 타고 강릉방면으로 달리면 잠시 후 밤재휴게소가 나온다. 옥계면 낙풍리와 금진리, 강동면 산성우2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자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산악회들은 접근이 편하다는 이유로 동해고속도로 강릉1터널의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터널 상단에 강릉1터널이라고 커다랗게 써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의 가드레일(guard rail)을 넘은 후, 터널공사 때 만들어 놓은 급경사 계단을 밟고 오른다. 계단이 끝나면 길은 왼편으로 향한다. 역시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이곳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도로(국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위로 치고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만만한 곳을 하나 골라 치고 오르면 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개척 산행이 시작된다. 길이 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우린다면 별 어려움 없이 구도로까지 오를 수 있다.



7분 후 도로를 만나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밤재 고갯마루가 보인다. 오늘 산행의 실질적인 들머리이다.



즐거웠던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휴게소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로 지나다니는 차량이 끊기다시피 한 여파일 것이다. 참고로 밤재는 고개 주변에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재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옛날 옥계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런 사실을 미리 알리고자 방꾼이 이 고개부터 외치기 시작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휴게소 입구의 오른편에서 산길이 열린다. 요란스럽게 펄럭이는 산불조심깃발들 아래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살펴본 뒤에 산행을 나설 일이다. 길이 헷갈려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완만한 것이 영락없는 산책코스이다. 이곳의 높이는 해발 280m, 오늘 오르게 될 기마봉의 높이가 383m이니 100m만 더 오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숫제 거저먹기인 셈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동해고속도로와 7번 국도가 평행선을 이루면서 달려가고, 그 뒤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버티듯이 줄지어 있다. 왼편에 있는 높은 게 피래산(彼來山)이고 맞은편의 나지막한 산은 어쩌면 청학산일 것이다.



10분 남짓 후 돌탑이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기마봉정상1.4km, 정동진 5.9km/ 금진초교2.7km/ 밤재정상0.4km)가 눈길을 끈다. 거리와 방향 외에 현재 위치의 경도와 위도까지 표기해 놓은 것이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에게야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임도를 벗어나 능선으로 들어선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금진초교 방향, 그러니까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는 것이 정상적인 등산코스이니 일부러 따라서 할 필요까지는 없다. 누군가의 산행 후기에서 이 부근에 돌탑봉이 있다고 해서 올라가 볼 따름이니까 말이다.



그다지 또렷하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오른다. 그리고 8분 후 봉우리(이정표 : 기마봉 정상1.1Km, 정동진 5.6Km/ 금진초교2.3Km/ 밤재 정상0.9Km) 위에 올라선다. 하지만 정상은 10분이나 더 투자해서 올라온 보람이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풍경이다. 선답자가 이름 붙였던 돌탑봉을 떠올리며 돌탑이라도 보일까 해서 두리번거려 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들머리였던 갈림길에 돌탑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지 않나 싶다.



기마봉 방향으로 산을 내려오면 6분 후 임도(이정표 : 기마봉0.9km, 정동진5.4km/ 밤재정상0.9km/ 금진초교2.4km)를 만난다. 아까 산자락으로 올라서지 않았더라면 이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다.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임도는 끝이 난다. 그리고 왼편으로 오솔길이 열린다. 길가의 소나무들이 제법 굵어졌다. 보드라운 황토 땅에 저 정도 굵기의 소나무들이라면 송이버섯이 자라기에 딱 좋은 환경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길가를 따라 비닐 끈들이 길게 메어져 있다. 일종의 금()줄인 셈이다.




길가에 울트라 바우길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총 350Km에 이른다는 강릉판 둘레길인 바우길일지도 모르겠다. 그중의 한 구간이 울트라 바우길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우는 바위를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이다.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는 감자바우라고 하는데 바우길은 이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바우는 바빌로니아(Babylonia)의 신화(神話)에서는 건강의 여신(女神)으로 나타난다. 손으로 한번 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병을 다 낫게 해준다는 여신이다. 이 같은 두 가지의 이미지를(image) 담을 경우 이 길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친한 이웃에 마실 나온 기분으로 걸으며 건강을 챙겨가라는 의미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길을 일러 치유의 길이라 했다. 걷는 이의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구간을 지난다. 비록 옹색하다 싶을 정도로 왜소하지만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난 바위구간이다. 그래선지 서툴게 쌓아올린 길가 돌탑까지도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래서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기마봉에 오른다. 아까 오솔길로 접어든지 15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말뚝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재설21/건설부77.6)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글씨가 지워져 버린 안내판과 이정표가 하나씩 있다. 기마봉의 내력이라도 적어 놓지 않았었을까 싶다. 이런 내용을 말이다. ‘말탄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기마봉에는 신라시대의 옥랑(玉娘)낭자와 윤복(尹福)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곡현(羽谿縣)이라 불리던 당시의 옥계면에 건강하고 잘생긴 윤복이란 청년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30세가 넘도록 배필을 정하지 못하던 윤복이 드디어 옥랑이란 낭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당시는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윤복도 편안히 생업에만 전념할 수 없게 되어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 옥랑이 뒷산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윤복의 무사 귀환을 빌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말 한 필을 주면서 빨리 밤재로 달려가 윤복이를 구하라고 했단다. 꿈속에서 깨어난 그녀는 단숨에 밤재로 달려갔고, 전쟁터에서 다친 채 돌아오다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윤복을 구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그들의 감격스러운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윤복이가 하루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슬픔에 잠긴 옥랑이도 3일 후 윤복이 쓰러져 있던 산에 올라가 죽고 만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두 남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녀가 기도하던 산을 기마봉(騎馬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 머물지 않고 산행을 이어간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망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글씨가 지워져버린 이정표는 일단 제켜놓고 올라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선다.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 금진항으로 내려가게 되니 주의한다. 하여튼 가파르지 않아 부담 없는 내리막길이다. 그리고 완만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12분 후 금진항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정동진/ 금진항1.7Km/ 기마봉800m)는 아까 것과는 또 다른 모양새이다. 위도와 경도의 표기가 없이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동진 방향으로 향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평범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를 따라 매어진 비닐끈 또한 계속된다. 언제부턴가 서슬 시퍼런 출입금지경고판까지 붙었다. 주인 있는 임산물을 무단으로 채취할 경우에는 고발조치 하겠단다. 적힌 내용으로 보아 송이버섯과 능이버섯이 자라는 곳인 모양이다.




8분 후 이정표(정동진3.2km/ 기마봉 정상1.3km. 밤재 정상 3.1km)가 세워진 무명봉 위에 올라선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곳이다. 다른 이는 후기에서 삼각점(묵호401/2005복구)을 보았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간다. 기마봉과 외솔봉 사이의 골이 제법 깊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시야가 트인다. 산허리를 가르고 지나가는 동해고속도로가 또렷하다. 그 뒤로 우뚝 솟아오른 산은 피래산(彼來山)이 분명하다.



잠시 후, 그러니까 무명봉을 내려선지 23분이면 외솔봉에 올라선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울마운틴에서 매달아놓은 정상표지 아크릴판이 보일 따름이다. 그마저도 깨져 있는 게 안타깝지만 말이다. 참고로 외솔봉이란 아래 마을에서 바라볼 때 마치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산 아래에서 보일 정도로 큰 노송(老松)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외솔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정동진 해돋이 관광지가 한눈에 잘 들어오고, 그 뒤에 펼쳐지는 넓고 시원한 동해바다는 보너스라고 해도 될 일이다. 하여간 한없이 넓게 트이는 전경을 바라보면 어느새 내 마음까지도 평화로워진다. 마침 정상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마음 놓고 쉬면서 눈의 호사를 즐겨보자. 이런 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겠는가.



외솔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런데 이정표(정동진1.9km/ 정동진1.9km/ 기마봉2.6km, 밤재정상4.4km)에 문제가 있다. 두 방향 모두 정동진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정동진까지의 거리 또한 같다. 어디로 가든지 정동진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심곡항으로 내려가고 싶을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심곡항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옳은 선택은 오른편 방향이니 주의할 일이다.



오른편 방향, 그러니까 삿갓봉으로 향한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안전로프까지 매어놓았다. 하지만 로프를 매어야할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다. 하지만 등산로를 개설했다는 정동진지역번영회정동2리 청년회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관령 넘어가는 길이 강원도 굽이 길의 진수라고 했다. 어찌나 지대가 험한지 대굴대굴 굴러간다 해서 대굴령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대관령 말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이 길에서 맞는 풍경이 장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정동진의 시가지가 봄바람을 타고 아련한데, 그 너머로 동해가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다. 어디 이게 흔한 풍광이겠는가.



완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능선길을 걷다가 짧게 치고 오르면 삿갓봉 정상이다. 삿갓봉 정상도 외솔봉과 거의 같은 모양새이다. 정상표지석이 없는 것은 외솔봉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외솔봉과 닮았다. 하지한 자세히 살펴보면 외솔봉보다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외솔봉처럼 개인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도 없다. 미리 예습을 하고 오지 않았을 경우 이곳이 삿갓봉의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참고로 삿갓봉은 산봉우리가 삿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디서 바라보아도 삿갓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뛰어나다. 아니 외솔봉보다 한참 더 위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선지 이곳에도 역시 벤치를 놓아두었다. 정상에 서면 봉화쪽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망상해수욕장을 낀 해안선이 둥그렇게 펼쳐지는데 그 오른편에 보이는 산은 망운산이 아닐까 싶다.



삿갓봉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정상에서 왼편으로 1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망바위다. 바위 위에 서면 넓고 시원스런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망망대해(茫茫大海)란 저런걸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자그마한 정동진 시가지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범선 모양으로 생긴 썬크루즈리조트를 오른쪽 산등성이에 얹어놓고 말이다. 참고로 서울 경복궁(광화문)의 정동(正東)에 있다는 정동진은 겨울이면 유난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곳이다. 사계절 많은 이들이 즐겨 찾지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연말이면 더욱 분주해진다. 정동진의 상징과도 같은 해돋이 풍경과 만나기 위해서다.




동해의 너른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하산을 시작한다. 경사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내리막길이다. 삿갓봉까지 오면서 이미 고도(高度)를 많이 떨어뜨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2분 후 삼거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또 다른 모양으로 생긴 이정표(심곡1.9km/ 정동진2.7km/ 현위치표시)가 세워져 있다. 경도와 위도가 표기된 것은 처음에 만났던 것과 같은데 이번에는 재질이 쇠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날씬하게 생긴 것이 외모도 더 반듯해졌다.




언제부턴가 강릉바우길이라는 리본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해파랑길이라는 팻말까지 보인다. ‘해파랑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둘레길이다. 동해안의 상징인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출발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강원도의 북쪽 끝 통일안보공원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770km나 된다. 그 해파랑길이 이곳을 지나는 모양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평지나 다름없다. 보드라운 황톳길은 걷기에 딱 좋을 만큼 곱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나무들이 작아 그늘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름철에 찾았을 경우 고역을 치룰 수도 있겠다. 삿갓봉을 나선지 23분쯤 지나면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잠시 후 '심곡리마을 표지석' (이정표 : 심곡항0.6Km/ 정동진4Km/ 현위치)에서서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왼편 콘크리트 포장길로 들어선다. 입구에 세워진 장승들이 반가운 눈길을 보내주는 따뜻한 길이다.



이제부터는 헌화로 산책길이자 강릉바우길의 제9코스를 따른다. 이 코스는 정동진역을 출발해 모래시계공원과 기마봉 초입의 소방파출소, 그리고 곰두리연수원 입구와 심곡항, 금진항을 거쳐 옥계시장에 이르는 총 14의 둘레길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길이니 염두에 두고 걸어볼 일이다. 참고로 헌화로 산책길이라는 이름의 모티브(motive)는 신라 성덕왕 때 지어진 향가 헌화가’(獻花歌). 내용이야 익히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경국지색의 용모를 가진 수로 부인이 강릉 태수를 제수 받은 남편 순정공과 함께 ‘7번 국도를 따라 부임지로 향하던 길이었다. 수로 부인이 해안가 천길단애에 핀 철쭉꽃을 보며 누군가 저 꽃을 꺾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마침 암소를 몰고 지나던 한 노인이 선뜻 나섰고 그가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가 헌화가다. 길 이름은 바로 이 옛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접한 삼척시 해안 절벽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오래전부터 수로 부인 공원을 조성하는 등 공을 들였던 삼척시로서는 당혹스러울 법도 하다.



산행날머리는 심곡항

잠시 후 지진해일 긴급대피소를 지나면 산길은 오솔길로 변하면서 지그재그로 길을 만든다. 그리고 10분 남짓 후에는 심곡마을에 내려서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도로에 내려서면 심곡리마을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는 서낭당이 지어져 있다. 이 마을에 복을 가져다준다는 영험한 화상(畫像)을 모시고 있는 서낭당이다.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이곳에 살던 이씨 노인의 꿈에 어여쁜 여인이 나타나 함경도 길주에서 왔다고 하면서 내가 심곡과 정동진 사이에 있는 부처바위 근방에 떠내려가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하더란다. 이튿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나가보니 부처바위 끝에 나무궤짝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를 열어보니 여자의 화상이 들어있어 이를 바위에 안치해 두었다. 그런 뒤로 노인이 하는 일들은 모두 만사형통이었단다. 얼마 후 여인이 다시 나타나 외롭다고 하기에 마을에다 서낭당을 짓고 그 안에다 화상을 모셨다는 것이다. 그때 떠내려 온 그림은 아직까지도 색깔이 변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도 마을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서낭당에 이를 고한다고 한다.



심곡항은 조용하고 작은 포구다. 고개 너머 번잡한 정동진에 견줘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마을 끝자락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으니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노송(老松)이 사방을 감싼 틈새로 동해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고 한다. 특히 초겨울에라도 찾을 경우에는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파란색에서 차다 못해 시린 결기마저 느껴진단다.


에필로그(epilogue). 짧은 산행을 끝내고 주문진항으로 이동을 한다. 두 시간의 자유를 주겠단다. 모처럼 바닷가로 산행을 나왔으니 회라도 한 접시 시켜놓고 신선놀음이라도 즐겨보라는 산악회의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나에겐 고민의 시작이 된다. 날것, 그중에서도 특히 비린내가 나는 날것을 좋아하지 않는 유별난 내 식성(食性) 탓이다. 집사람이라도 사줄까 해보지만 그녀까지도 시큰둥한 표정이니 문제다. 이때 진퇴양난에 빠진 나를 구해준건 총무님이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김치찌개를 손수 만들어 왔다며 같이 가자는 것이다. 그녀를 따라 들어선 식당에서 우린 진수성찬을 맞이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몸에 좋다는 잡곡들이 듬뿍 들어간 약밥에다 인공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찌개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거기다 싱싱한 야채 쌈에다 손수 장만했다는 여러 가지 밑반찬들은 어느 유명식당에서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호사스런 상차림이었다. 그 덕분에 난 대취(大醉) 해버렸지만 말이다. 매주 목요일에 산행을 하고 있는 산두레는 버스에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오늘과 같은 인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배려가 있는 산악회이니 어찌 회원들로 넘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총무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리며 오늘 산행을 접는다.

봉화산(烽火山, 691.4m)-두루봉(615m)

 

산행일 : ‘16. 2. 6()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산행코스 : 양지말 화로구이식당가581먹실고개북봉봉화산안흥고개두루봉귀영고개삼마치2리마을회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홍천읍내에서 바라볼 때 남쪽 삼마치 방면에서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화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북봉에 오르는 길에 잠깐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상에서의 조망을 제외하고는 눈에 담아둘만한 눈요깃거리도 없다. 하지만 높이 700m가 채 되지 않는 낮은 봉우리들로 능선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행은 만만치가 않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생각보다 깊고, 거기다 경사 또한 만만찮게 가파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체력테스트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종주 산행보다는 봉화산만 따로 떼어서 산행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산행시간이 조금 짧아지는 것을 감수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참고로 봉화산은 홍천산행 가이드북에 홍천 명산’ 15개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등산로 정비는 다른 산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괜찮은 산들이 많기로 소문난 홍천군에서 봉화산이 차지한 비중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양지말 화로구이 식당가(홍천군 홍천읍 하오안리)

중앙고속도로 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양평방면으로 내려오면 잠시 후 고기 익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곳이 바로 홍천군이 자랑하는 먹거리 골목인 양지말화로구이촌이다. 그리고 구미를 돋우고 있는 냄새는 줄지어 늘어선 식당들이 만들어낸 작품이고 말이다. ‘양지말 오거리에서 좌회전 첫 번째 길인 높은터로’, 홍천 C.C’ 가는 길로 500m쯤 더 들어가는 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좌회전 하자마자 오른편에 홍천원조화로구이식당이 보이니 참조한다. 쉽게 말해 홍천 C.C’ 방향으로 들어가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산자락이 들러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산자락으로 달라붙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사면(斜面)이 사뭇 가파를뿐더러 길까지 희미하다. 혹여 길을 잘못 들어서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 구간이다.



잠시 후 개활지(開豁地)가 나타난다. 왼편 사면(斜面)이 온통 벌거벗고 있다. 유실수(有實樹)라도 심으려고 벌목(伐木)을 해 놓은 모양이다. 이 구간도 역시 산길은 그 흔적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구태여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저 벌목지의 경계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잘라 놓은 나무들이 갈 길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지 않겠는가.



벌목을 해놓은 덕분에 조망(眺望)은 시작부터 좋다. 발아래에는 상·하오안리가 들어앉은 들녘이 펼쳐지고 들녘 뒤에는 이름 모를 산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뒤로 뽈록하게 솟아 오른 건 홍천이 자랑하는 명산 중의 하나인 금학산(854.1m)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르게 위로 향한다. 18분 후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명색이 능선인데 계속해서 오를 수만은 없는 모양이다. 내려서는 구간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오르내리는 골이 만만찮게 깊다. 거기다 경사(傾斜) 또한 상상 외로 가파르다. 만만하게 보고 시작한 산행이 고역(苦役)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첫 번째 봉우리를 지난 지 24분 후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난다. 물론 작은 봉우리들을 꽤나 많이 오르내렸다. ‘뭐 이따위 산이 다 있어요?’ 앞서가던 집사람이 투덜대기 시작한다. 가파른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니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나 또한 그녀 못잖게 힘이 든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느라고 3주 만에야 산을 찾았으니 당연히 힘이 들 것이 아니겠는가.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최소한 3~4Kg의 몸무게를 늘려놓았을 테니까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이 힘들 때 고마운 경우가 있다. 구태여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우회(迂廻)할 때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그런 구간을 만난다.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나 25분쯤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585.7m봉이 아닐까 싶다. 고맙게도 산길은 봉우리의 9부쯤 되는 높이에서 오른편으로 우회를 시킨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우회로이다. 우회를 하고 나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봉화산이 어렴풋이 나타나니 참조한다.




585.7m봉을 지나면 잠시 후 능선 왼편으로 길게 쳐진 검은 그물막을 만난다. ‘장뇌삼 재배지임을 알리는 코팅지가 매달려 있다. 장뇌삼을 지켜내려는 농민들의 고심(苦心)이 만들어 낸 시설물일 것이다. 그리고 공직에서 은퇴 후 홍천의 백암산(내촌면) 자락에다 농장을 차린 큰며느리네 친정 어르신들이 내쉬던 한숨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그네들이 심어 놓았던 장뇌삼이 일부 몰지각한 등산객들의 손길에 의해 초토화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산길은 그물막 옆으로 나있다. 덕분에 길은 임도처럼 곱다. 막을 치려고 주변의 나무들을 정리해 놓은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35분 후에는 521.3m봉에 올라선다. 물론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꽤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느라 고생했음은 물론이다.



521.3m봉에 오르면 비록 나뭇가지 사이에 불과하지만 봉화산이 제법 또렷하게 나타난다. 두 개로 나누어진 봉우리가 만만찮게 뽈록하다. 쉽게 오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521.3m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가파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6분쯤 가파르게 내려서면 먹실고개이다. 오른편 먹실마을 방향으로 난 길이 생각보다 또렷하다. 봉화산을 오르면서 먹실마을을 산행들머리로 잡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먹실고개란 나무가 너무 무성해서 컴컴할 정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먹실고개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가 있어 고달프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커다란 바위들까지 끼어있는 바윗길이 나름대로 풍치가 있고, 노송(老松)들까지 간혹 구색을 맞추어 주기 때문이다.






구태여 바위를 붙잡지 않아도 될 만큼 바윗길은 여리다. 거기다 웬만한 곳에는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주변 풍광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올라도 된다는 얘기이다.



먹실고개를 출발한지 20분 남짓 지나면 북봉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제법 또렷한 산길이 보인다. 장전평리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이어서 안부까지 짧게 내려섰던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이번에는 아예 나무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관할관청인 홍천군에서 늦부지런을 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10분 조금 못되어 봉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20분 정도가 지났다.




허리 높이의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화산 정상은 정상석과 이정표(높은터 1.5Km, 삼마치 3.4Km, 장전평(성산터) 2.4Km/ 금용사입구 2.9Km, 성산터 1.8Km) 외에도 감시카메라까지 갖춘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기다 저만큼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봉화대와 의자들까지 합칠 경우에는 의젓한 쉼터로 변한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뚫려있으니 조망을 즐기면서 쉬었다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뻥 뚫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산불감시초소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주변 산하를 둘러본다. 공작산과 오음산, 금학산 등 홍천의 명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그 외의 산들은 연무(煙霧) 때문에 구분이 잘 안 된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다른 이들의 글에서 조망에 대한 부분을 옮겨본다. <북으로는 구절산, 연엽산, 대룡산, 대룡산에서 오른쪽으로는 홍천 번화가가 멀리 가리산과 함께 조망된다. 가리산에서 오른쪽으로는 백우산, 백암산, 약수산, 공작산 등이 하늘금을 이룬다. 정동으로는 대학산, 발교산, 병무산, 남동으로는 삼마치리 협곡 건너로 오음산과 어답산, 남으로는 한강기맥을 끌고 나아가는 금물산과 성지봉이 멀리의 소군산과 함께 펼쳐진다. 남서쪽으로는 매화산과 까끈봉, 서쪽으로는 용문산과 도일봉, 북서로는 매봉산, 쇠뿔봉, 홍천강 건너 금학산이 우뚝 솟아 보인다.>




정상에서 몇 걸음만 더 내려오면 봉화대(烽火臺)가 복원(復原)되어 있다. 예로부터 성산터 봉화대로 불리어 오던 터에다 홍천군에서 새로이 복원해 놓았는데, 역사적, 교육적 가치는 물론 산행의 즐거움까지 제공하기 위해서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봉화대의 내력을 담은 문헌(文獻)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간이봉수(烽燧)’의 역할만을 수행했지 않나 싶다. 그래선지 홍천군에서도 성산터봉화대에 대한 내력이 아닌 봉화대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만을 적어 놓았다.




하산을 시작한다. 봉화대 옆에 세워진 이정표(높은터 1.5Km/ 장전평(성산터, 국도5호선) 4.6Km, 금룡사(국도5호선) 4.3Km/ 봉화산 0.01Km)가 가리키는 높은 터방향이다. 하산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거기다 바짝 마른 바닥은 조금만 건들어도 풀썩풀썩 먼지가 피어오른다. 내려서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후 로프가 매달린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이후부터는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길을 걷다보면 우람하고 오래 묵은 소나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데 그 소나무들마다 눈에 거슬리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 나무들마다 일정부분이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송진을 채취한 흔적일 것이다. 다른 산들에서 보았던 저런 흔적들은 대부분 일제(日帝)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곳도 그때의 아픈 상처가 아닐까 싶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가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기만 하고,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하다. 거기다 솔숲이 나타나면서 진한 솔향까지 코끝을 스친다. 이건 숫제 웰빙(well-being)산행이다. 아니 솔향 속에 피톤치드(phytoncide)까지 듬뿍 스며있을 터이니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하산을 시작한지 30분 정도 되면 안흥고개에 이르게 된다. 사거리인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삼마치1리가 나오고, 오른편은 안흥마을이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내려설 경우 중간에 홍천 C.C'의 경내(境內)를 통과해야하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누가 날린 지도 모를 골프공에 얻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안흥이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난리 때 아무런 피해도 없이 편안하고 흥하게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갯마루를 지나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어지는 산길 역시 순하기 짝이 없다. 이 구간 역시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경사 역시 거의 느낄 수가 없다. 두루봉까지의 거리가 제법 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무들의 식생(植生)은 굴참, 갈참나무들 일색, 그리고 띄엄띄엄 눈에 띄는 소나무는 혼효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가끔은 조림지(造林地)들도 나타난다. 잣나무와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이다. 그중에서도 잣나무단지는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저렇게 가꾸어가고 있기에 잣이 홍천군의 특산품 중의 하나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안흥고개에서 3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제법 가파르다고 할 수 있는 오름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능선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오음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능선이 둘로 나위는 분기점이다. 그리고 주된 능선은 우리가 걸어온 방향, 즉 봉화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고 말이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얼핏 보면 더 높은 왼편이 옳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니 유의한다.



능선을 걷다보면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인다. 두루봉 구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유일한 바위일 것이다. 당연히 귀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생김새까지도 범상치가 않으니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할 것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7분 정도 능선을 따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중간에 작은 오르내림 몇 번을 했음은 물론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정표가 없을 뿐더러 왼편으로 난 산길이 훨씬 더 또렷하기 때문이다. 두루봉 정상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2분쯤 더 가야만 한다. 하지만 하산지점인 높은 터는 이곳에서 왼편 방향이다.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두루봉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삼각점(홍천 435, 1988 재설) 하나만이 외로울 뿐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시도 없다. 거기다 주변보다 약간 솟아오른 봉우리는 밋밋하기까지 하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둥그렇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름의 유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두루뭉술하게 생겼다. 다른 이들의 산행 후기를 읽다보면 두루봉 정상을 찾고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글들이 자주 눈에 띈다. 왜 그랬을까 궁금했는데 막상 정상에 올라보니 그들의 산행기가 이해가 된다. 정상은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억울해 할 필요도 없겠다.



하산을 시작한다. 7분 후 능선이 두 개로 나뉜다. 귀영고개는 왼편 방향이다. 이정표는 없으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오음산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잠시 후 또 다시 능선이 두 개로 나뉘지만 이번에는 헷갈릴 염려는 없다. 오른편으로만 길의 흔적이 나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산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귀영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산길은 곧장 능선을 치고 나가지를 못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에야 고갯마루로 내려설 수가 있다. 고갯길이 능선을 깊고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귀영고개를 구유(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처럼 생겼다고 했는데, 저렇게 움푹 파여 있어서 그렇게 보았던 모양이다. 귀영고개는 반질반질한 것이 오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귀영고개에서부터는 임도(林道)를 따른다. 오솔길 수준이던 임도는 잠시 후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넓어진다.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이 실제 드나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높은터(삼마치2) 마을

폭신폭신한 느낌의 임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의 포장도로는 무시하고 오른편의 흙길을 따른다. 잠시 후 첫 민가가 나타났다하면 곧이어 높은 터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귀영고개에서 마치2리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전체 산행시간은 4시간20분이 걸렸다. 걸음을 재촉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온전히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참고로 날머리인 높은 터는 다른 곳보다 높은 지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묵방산(墨坊山, 611.4m)-만대산(萬垈山, 680.1m)-호덕봉(虎德峰, 739.4m)-질매봉(603.4m)

 

산행일 : ‘15. 9. 24()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동면과 횡성군 공근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개운저수지주능선묵방산대산호덕봉분기봉질매봉월운리버스종점땀봉산후동리회관(산행시간 : 5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호덕봉 오름길과 질매봉 근처에서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잠깐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늘 오른 네 개의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보면 된다. 대신 등산로가 대부분 흙으로 이루어져 걷기는 편한 편이다. 다만 질매봉에서부터 시작되는 가파르면서도 거친 하산 길은 예외이지만 말이다. 좋은 산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홍천과 횡성 땅에 걸친 탓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 산은 완전히 버려진 느낌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하긴 대간(大幹)이나 정맥(正脈) 등의 종주산행이 유행하면서 세간(世間)에 알려졌을 뿐 그 전까지만 해도 웬만큼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 조차도 모르던 산이었다. 호덕봉 오름길을 제외하고는 볼거리도 없어 시간을 내어서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특히 질매봉 구간은 찾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질매봉에서 시작되는 하산 길은 흔적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험하고 가팔라서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개운저수지(홍천군 동면 후동리)

중앙고속도로 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방면으로 달리다가 갈마곡리(홍천읍)에서 444번 지방도(공작산로)로 옮겨 동면소재지인 속초리까지 온다. 이어서 하나로마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 : 월운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개운리(동면)에 이르게 된다. 산행들머리인 개운저수지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Km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곧장 직진하면 월운리에 이르니 주의할 일이다. 개운저수지 둑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둑 아래를 지나는데 난데없는 삼각점(U홍천16)이 보인다. 삼각점은 산꼭대기에나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 이런 들녘에서까지 보게 된 것이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같이 걷던 청산수산악회의 김철규회장께서 수준점(水準點, benchmark)’이란다. 국토지리정보원의의 통합기준점은 그저 삼각점정도나 알고 있었던 나에겐 생소한 낱말이다. 측량의 기준이 되는 점으로 기준수준면(基準水準面)’에서의 높이를 정확히 구해 놓았다고 하니, 산에 설치된 삼각점과 대비되는 평야의 측량점인 모양이다. 생김새야 여느 삼각점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사진은 생략했다.

 

 

 

둑을 지나면 수로(水路) 옆으로 난 길을 따른다. 아래 사진을 보면 맞은편 산자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잘못 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수로가 끝나면 산양삼 연구단지라는 현수막이 걸린 컨테이너가 보이고, 이어서 마지막 농가(農家)가 나온다. ‘월간 산에서는 허수영씨 집으로 표시했다. 산행들머리는 농가의 맞은편 산자락으로 열린다. 집으로 다가가면 개 짖는 소리가 요란스러우나 개의치 말고 진행하고 볼 일이다. 개들을 가두어 놓아서 물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집 앞에서 사면(斜面) 길로 2분 정도를 오르면 오른쪽 연두색 펜스(fence) 너머로 개운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1974년에 완공된 저수지로 만대산에서 발원한 15개가 넘는 계곡 물줄기가 모두 이 저수지로 흘러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물이 마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콘크리트 댐(dam)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수면(水面)이 낮게 깔려있다. 이곳 홍천 땅도 가뭄이 심했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칫 마르지 않는다.’는 전통이 깨질지도 모르겠다. 어서 빨리 비가 내려 애타는 농심(農心)을 달래주길 빌면서 발길을 돌린다.

 

 

능선에 일단 올라서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긴 오르막과 작은 내림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 사이사이에 잠깐이나마 완만한 구간이 나타남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런 곳마다 어김없이 묘역(墓域)들이 조성되어 있다. ‘전주 이씨경주 이씨’, 그리고 김해 허씨등 성씨들도 다양하다. 어쩌면 이 능선이 풍수(風水)에 뛰어난 곳인지도 모르겠다.

 

 

 

산행을 시작하고 20분 남짓 지나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나무기둥에 뭔가가 매달려 있다. ‘위험물을 설치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판이다. 그러나 귀중한 무엇이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들머리의 컨테이너에 걸려있던 산양삼 연구단지라는 현수막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래도 산양삼을 심어놓았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보다는 목숨에 위협을 받는 위험물을 들먹이는 게 더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415m봉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만이다. 한강기맥(漢江岐脈)의 만대산에서 북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은 묵방산을 지나 동면소재지인 속초리에서 그 여맥(餘脈)들을 개운천(開雲川)과 성수리천(城壽里川)에 모두 가라앉힌다. 그 능선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커다란 노송(老松)들이 보인다. 그런데 나무들이 껍질이 벗겨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강점기(日本强占期) 때 송진 채취로 인한 상처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415m봉으로 오르기 바로 전에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이곳으로 들어서면 415m봉에 오르지 않고도 능선에 이를 수 있으니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들머리에 인천우정산악회의 시그널이 붙어있다.

 

 

 

415m봉에서 내려선 다음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가끔은 완만한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갑자기 시야(視野)가 트인다. 능선에 올라선지 18분 만이다. 양쪽 사면(斜面)이 모두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지도에 자주바위라고 표기된 지점인 모양이다. 먼저 동면 방향이 내다보이는데 들녘보다는 산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이 강원도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가야할 만대산과 호덕봉이 잘 조망(眺望)된다. 오늘 산행은 조망이 잘 트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특히 묵방산을 거쳐 만대산까지 가는 구간에서는 유일한 전망대이니 서둘지 말고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자주바위에서 묵방산까지는 지루한 느낌이 강한 구간이다. 정상이겠거니 하고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보다 높은 봉우리 하나가 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기대와 실망을 두어 번 치르고 난 뒤에야 묵방상 정상은 그 속살을 내보여 준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3분 만이다.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삼각점(홍천428,1988재설)을 빼고는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철저히 버려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조망도 터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가 삼지창(三枝槍)처럼 생긴 소나무에다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이도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만대산으로 향한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능선이다. 능선은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낙엽까지 쌓여있어 폭신폭신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끔 골이 제법 깊은 안부를 만나기도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걸으면 만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만대산 정상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묵방산과 마찬가지이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 또한 같다. 아니 이번에는 삼각점까지 보이지 않으니 더 외롭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정상표지판이 두 개나 매달려있다. 산길은 이곳에서 한강기맥(漢江岐脈)을 만난다. 그리고 호덕봉을 지나 분기봉까지는 기맥을 따르게 된다. 한강기맥이란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쪽으로 비로봉, 계방산, 용문산, 유명산을 지나 양평의 두물머리(양수리)까지 이어지는 161km의 산줄기이다. 우리나라 중부권(中部權)을 가로지르는 이 산줄기는 많은 명산(名山)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조금 후에는 울퉁불퉁한 바윗길도 만나게 된다. 참고로 만대산(萬垈山)은 산행을 시작했던 후동리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1만 가구가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의 만대(萬垈)가 후동리 앞의 너른 들녘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대산을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은 참나무들 세상, 잡티 하나 섞이지 않았을 정도로 온통 참나무들뿐이다. 이런 곳에서는 조망도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걸으면 된다. 그리고 그 길은 거의가 오르막길이라고 보면 된다. 만대산보다 앞으로 가야할 호덕봉의 해발고도(海拔高度)60m정도가 더 높은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리막 구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짧게 내려섰다고 길게 올라서는 것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가장 깊은 안부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바위 하나 구경하지 못할 정도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렇다고 어찌 예외가 없을 리 있겠는가. 중간에 이런 바위가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돌연변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호덕봉 아래의 깊은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한다. 커다란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20m 정도나 되는 직벽(直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든든한 밧줄이 매어져 있다는 점이다. 초심자들이 올라서기에는 다소 벅차게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우회로(迂廻路)가 보이지 않으니 무리해서라도 올라설 수밖에 없다.

 

 

 

벼랑에 올라서면 날카롭게 선 바위 하나가 보인다. ‘월간 산에서 조망(眺望)이 잘 터진다는 것을 특징으로 들고 있는 말코바위가 아닐까 싶다. 양 옆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기 때문이다. 우선 오른편으로는 산행을 시작했던 개운저수지 방향이 잘 조망된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구절산과 연엽산, 대룡산 등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방향에 보이는 산들은 횡성의 어답산과 병무산, 태기산, 발교산 등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말코바위는 위로 치솟은 바위 끝머리가 말()의 코()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길을 가다보면 괴상하게 생긴 나무들이 간혹 눈에 띈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탓에 원시림(原始林)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울퉁불퉁한 혹들은 오랜 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뎌온 훈장들일 테고 말이다.

 

 

말코바위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바나나 모양으로 생긴 어른 키보다 조금 더 큰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월간 산에서 할매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던 바위이다. 그 앞에 있는 바위는 할머니가 식사를 했다는 밥상바위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개국 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가 한 말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저 바위가 할매로 보이려면 보다 더 많은 수양이 필요한 모양이다.

 

 

할매바위를 지나면 잠시 후 또 다른 바위벼랑이 길손을 맞는다. 이번에는 안전로프도 없는 바윗길이다. 그러나 조금만 조심하면 어렵지 않게 위로 오를 수가 있다. 덜 위험하니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벼랑의 위쪽에 틀어 앉은 거대한 소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바위 위에서 맨 몸을 드러내놓고 있는데 바위와 뿌리들이 한 몸인 양 뒤엉켜있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아니 색깔까지도 같은 것이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하다.

 

 

두 번째 바위벼랑을 지나면 호덕봉 정상은 금방이다. 정상은 의외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언제 서슬 시퍼런 바윗길을 지나왔냐는 듯이 말이다. 당연히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다. 그저 외로운 삼각점(홍천307,1988 재설) 하나만이 이곳이 호덕봉의 정상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이정표나 정상표지석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더 한 편이다. 아까 지나온 만대산이나 묵방산은 일부 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정상표지판이라도 있었지만 이곳은 그것마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버려진 산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만대산에서 호덕봉까지는 45분이 걸렸다.

 

 

호덕봉 정상은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건너편에 오음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오른쪽으로 매화산이 조망된다.

 

 

호덕봉을 지나서도 산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능선은 다시 흙길로 되돌아왔고, 나무들도 여전히 참나무들 천지이다. 다만 이번에는 점차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면서 이어진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가파르고 길게 내려섰다가 짧고 완만하게 올라서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 저만큼에서 빨강으로 물든 뭔가가 손짓을 하고 있다. 다가가보니 가을의 전령사라는 단풍나무이다. 빨갛게 물든 잎들을 보니 가을은 벌써부터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나 보다.

 

 

그렇게 얼마간 더 걸으면 산악회 시그널(signal)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봉우리(643.4m, 분기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길매봉으로 가려면 곧바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왼편에 보이는 한강기맥(漢江岐脈) 길이 더 또렷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길매봉 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극소수(極少數)라는 증거일 것이다.

 

 

분기봉(分岐峰)에서 또 다신 산행을 이어간다. 내리막길의 경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길매봉까지의 구간이 제법 길고, 봉우리 또한 몇 개를 오르내리기 때문에 어떤 게 길매봉인지가 헷갈리는 구간이다. 이때는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바위를 좌표(座標)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다. 어른 키보다 조금 더 큰 바위에 작은 바위 하나가 얹힌 형상이다. 어쩌면 지도(地圖)얹힌바위라고 표기된 바위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길매봉은 이 바위를 지나야 만이 만날 수 있다.

 

 

얹힌바위를 지났다싶으면 잠시 후 길매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밋밋한 봉우리로 이루어진 길매봉 정상도 호덕봉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가 없는 것 또한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길매봉 618.4m’라고 쓰인 리본(ribbon)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도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망까지 트이지 않은 것은 호덕봉 정상보다 못한 점이다. 호덕봉에서 길매봉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렸다.

 

 

질매봉에서 5~6분쯤 더 내려가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월간 산에서 게시용 사진으로 올렸을 정도로 조망이 시원스럽다. 왼편, 그리니까 북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벼랑 위에 서면 월운리 들녘이 발아래에 펼쳐지고, 그 뒤 왼편으로 약간 빗겨난 곳에는 인근에서 가장 높다는 오음산이 으스대듯이 우뚝 솟아있다. 이곳에서 길아 두 곳으로 나뉜다. 길의 흔적이 희미한데다, 경사(傾斜)까지 가파른 것은 두 길 모두 매한가지이지만 우린 왼편으로 진행한다. 길의 흔적이 조금 더 또렷하고 선두대장의 방향지시지도 그 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른편 길이 옳지 않았나 싶다. 왼편으로 진행한 결과 엉뚱한 곳(월운리)에 내려섰기 때문이다.

 

 

산악회 오회장님께 포스팅(posting) 사진용 포즈(pose)까지 잡아달라면서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고사목(枯死木)지대를 지난다. 빈 가지사이에 걸린 하늘에 하얀 구름 몇 점이 떠돈다. 그리고 건너편의 산들도 나도 있다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한마디로 괜찮은 풍광을 빚어낸다는 얘기이다. 죽은 나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아본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이 또한 하나의 삶인 것을.

 

 

고사목지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광산(鑛山)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시멘트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삭도(索道) 시설의 상부 지주(支柱)였던 모양인데 오래전에 할 일이 없어져 버린 듯 와이어(wire)도 없이 빈 시멘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버려져 있다. 이곳 홍천은 함금은석영맥(含金銀石英脈)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어 일본강점기에는 금·은광이 여러 곳에서 문을 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도 그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전망대에서 이곳 삭도까지는 15분 정도의 거리이다.

 

 

삭도시설 조금 못미처에서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다. 비탈길의 경사(傾斜)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팔랐기 때문이다. 물론 로프 등의 안전시설도 일절 없다. 그저 설설 기다시피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힘든 구간이라고 하면 보통 오르막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내리막길을 두고 가장 힘들다는 표현을 썼으니 얼마니 험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탈길과 10분 정도의 힘겨운 겨루기가 끝나면 산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탄해진다. 그리고 3분 후에는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이제는 다 왔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그러나 그게 시기상조(時機尙早)였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금방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후부터는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잡목(雜木) 사이를 헤쳐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건너기도 했다. 물론 가시넝쿨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다시 말해 길을 찾기가 힘들뿐더러 험하기까지 하다는 얘기이다. 나중에 이곳을 찾아 올 사람들에게 해줄 얘기는 단 한 마디, 그저 계곡의 아래 방향을 향해 무작정 치고 나가라는 얘기뿐이다.

 

 

 

보이지 않는 길에서 잡목과의 싸움이 끝나면 드디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처음으로 임도를 만난 지 15분 만이다. 이어서 공장건물 옆을 지나면 월운리 진평마을 버스종점(지도에 진평교라고 표기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우린 잘 못 내려온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버스종점에 월운리라는 낯선 지명(地名)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승강장에 개운리라는 지명을 적어놓고 방향표시를 해놓았다는 점이다. 아침에 후동리로 들어가는 길에 지나갔던 마을이 개운리였기 때문이다.

 

 

 

을 잘못 들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왼편에 오음산이 너무 또렷하기 때문이다. 만일 후동리도 내려갔더라면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풍경이다.

 

 

개운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터덜터덜 걷는 일행들이 모두 패잔병을 연상시킨다. 다들 지쳤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기다 길을 잘못 들었으니 어찌 힘이 나겠는가. 하여튼 도로를 따라 7~8분쯤 걷다가 오른편의 채소밭 고랑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고갯마루를 지나니 전원주택 몇 채가 나온다. 후동리의 맨 위에 위치한 민가(民家)들로 보면 될 것이다.

 

 

마을에서 다시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땀봉산(거북산)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해보지만 어떤 게 정상인지 분간이 안 된다. 일행들은 더 찾아보겠다고 계속해서 능선을 타지만 난 그만 두기로 한다. 별 의미 없는 봉우리 하나 더 올라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꽤나 많이 주울 수가 있었다. 집사람의 주전부리용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땀봉산을 찾느라 20분 이상이나 헤맨 꼴이 되어버렸다.

 

 

산행날머리는 후동리 마을회관

산자락을 내려서면 냇가, 그리고 개울 건너 인삼밭을 지나면 후동리 버스종점으로 들어가는 군도(郡道)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묘역(墓域)의 후손들이 성묘하러 가려고 벌초를 해놓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따라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저만큼에 후동리 마을회관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이 5분 정도였으니 온전히 걷는데 소요된 시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 산행에는 두 개의 거북이산을 오르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난 두 곳 모두 들르지 못했다. 숫거북이라는 땀봉산(동막골 거북산)은 어딘 줄도 모르고 지나쳤고, 암거북이라는 구미산(구미마을 거북산)은 답사하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렸다. 오늘 산행을 같이한 일행들 모두 거의 같은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미산을 답사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으나 이들 또한 엉뚱한 산을 올랐으니 말이다. 두 산의 정체는 산행 후에 만난 후동리 이장님의 조언(助言)으로 겨우 알 수 있었다. 하긴 하산 길에 만난 주민들조차도 땀봉산이나 거북산이라는 이름을 듣고 금시초문(今時初聞)’이라는 표정들을 지었으니 초행길인 우리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이로 미루어보아 두 산을 꼭 오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산행 전에 마을 이장님에게 먼저 조언부터 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두면 좋을 정보가 있다. 고려 말 현종 9(1018) 홍천현 시절에는 동면을 영귀면(靈龜面)으로 불렀단다. 그리고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선비들의 시구(詩句)에는 영귀촌(靈龜村)이라는 기록이 자주 나왔단다. 이를 근거로 위의 영귀라는 지명을 이곳 거북산으로 보기도 한단다.

 

십자봉(十字峰, 984.8m)

 

산행일 : ‘15. 8. 18()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경계

산행코스 : 큰양안치고개암봉(700m)백운지맥갈림길가십자봉십자봉가십자봉안부천은사계곡천은사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강원도(원주시 귀래면)와 충청북도(제천시 백운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원주시 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백운산(1,087m)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솟아 있다. 큰양안치에서 시작되는 산행 초반에 잠깐 바윗길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조망(眺望)도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오지(奧地)에 위치하고 있는 덕분에 아직까지도 원시의 숲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천은사계곡과 큰골, 그리고 덕동계곡이라는 물 맑고 경관이 뛰어난 골짜기를 갖고 있다. 때문에 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있어도 골짜기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드물 정도란다. 산 하나만 오르기 보다는 산과 계곡을 함께 넣어 물놀이를 겸한 산행을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큰양안치고개(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산 113-8)

중앙고속도로 남원주 I.C에서 내려와 T.G 앞에서 좌회전 남원주두산위브아파트(원주시 흥업면 흥업리)까지 온 후 19번 국도로 갈아탄다. 이어서 충주방면으로 달리다가 매지교차로(交叉路 : 흥업면 매지리)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를 통과한 후 우회전하여 귀래(충주)방면으로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큰양안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고개 조금 못미처에 매지휴게소(흥업면 매지리)가 있으니 참조한다.

 

 

 

양안치(兩鞍峙)고개는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말의 안장(鞍裝)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는 양아치(兩峨峙)’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얼핏 거지의 비속어(卑俗語)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름 그대로 두 개의 큰 고개(兩峨峙)’라는 뜻이다. 귀래면 귀래리에서 흥업면 매지리 쪽으로 넘어가는 구간에 있는 두 고개를 이르는데, 흥업 쪽의 큰 고개를 큰 양아치’, 그리고 귀래 쪽의 작은 고개를 작은 양아치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양어치(兩御峙)’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고구려왕의 어거(御車)가 매지리에 머물고 신라왕의 어거는 운계리에 머물렀다고 해서 그 경계에 있는 이곳의 지명이 양어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매지 숲유치원으로 들어가는 테마임도(이정표 : 백운산 7.5Km/ 숲유치원 4.?Km)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매지 숲유치원은 어린이들이 숲에서 뛰어 놀면서 숲을 통해 직접 배우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북부지방산림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설이다. 시설의 이름으로 봐서는 독일의 숲유치원(Waldkindergarten)’에서 모티브(motive)를 따왔지 않았나 싶다. ‘어린이들이 숫자나 글자가 아닌 자연에서 뛰어놀게 하라는 독일의 유아교육학자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öbel, 1782-1852)의 사상에 따라 운영하고 있는 독일의 그 숲유치원말이다. 그렇다면 이곳도 건물 밖으로 나가 자연 속에서 흙, 나무 등과 놀며 지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숲유치원의 관리동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들머리에 매지임도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훑어보고 길을 나서도 괜찮을 것이다. 등산로도 표시되어 있어서 산행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잣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광활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어 오른 나무들이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숲이 만들어내고 있는 그늘 아래에는 통나무 의자들을 질서 있게 배열해 놓았다. 아마 숲유치원에서 야외교실로라도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잣나무 숲을 지나면 곧이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은 참나무 숲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20분 후 첫 번째 구호지점표시목(A-2)을 지나면서 가파르게 변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가파름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5분쯤 후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곳에서 쉼터를 만난다. 다들 고생했으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 쉼터에 놓인 의자의 생김새가 심상치가 않다. 절반으로 반듯하게 켠 통나무를 바닥에 놓았는데 조형미를 살리고 싶었던지 한쪽 귀퉁이를 또 다른 통나무로 괴어 놓았다. 설치한 이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쉼터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4분 후에는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들머리에서 30분 거리이다. 헬기장은 한마디로 실망스럽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헬기장이라기에 여느 헬기장처럼 조망이 좋을 것이라고 기대를 잔뜩 하고 올라왔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서도 산길은 오름짓을 계속한다. 하지만 다행이도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산의 사면(斜面)으로 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비록 짧을망정 내리막길을 만들기도 한다. 거기다 가끔은 길가에서 묘하게 생긴 바위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서서히 즐기면서 걸어도 좋을만한 코스라는 얘기이다.

 

 

헬기장을 지난 지 10분쯤 되면 바위의 빈도가 현저히 높아진다. 그러다가 4~5분쯤 후에는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692m봉이 아닐까 싶다. 삼각점봉에서도 시야(視野)는 열리지 않는다. 그저 나뭇가지 사이로 건너편 산줄기가 살짝 내다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 부근에서이 경관은 괜찮은 편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벼랑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주변의 바위들과 어우러지면서 나름대로 볼만한 경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삼각점봉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백운산 6.3Km/ 장군바위 0.5Km/ 대양안치 1.2Km)로 나뉜다. 어디로 갈지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십자봉으로 가려면 능선을 따라 곧장 직진을 해야 하는데도 이정표는 그쪽 방향에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장군바위라는 지명을 떡하니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갈려나가서는 안 되는 백운산은 오른쪽으로 표시되어 있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는 장군바위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정표의 장군바위는 암봉(巖峰)을 이르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른편 백운봉 방향은 암봉을 우회(迂廻)시키는 길이고 말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나면 잠시 후 바위로 이루어진 700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삼각점봉에서 10분 거리이다. 700m봉도 역시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암봉의 특징이자 매력은 누가 뭐래도 조망이라고 할 수 있다. 700m봉은 그런 정형화된 삶을 거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암봉에서 산길은 다시 급하게 아래로 향한다.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사(傾斜)가 가파르면서도 긴데, 다행이도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산길은 벼랑을 내려선 후에도 계속해서 아래로 향한다. 다시 올라가야할 일이 부담스러워 걷기에 좋을 정로도 고운 길까지도 눈에 차지 않는 구간이다. 그러다가 10분 조금 못되어 ‘119 구호지점 표지목(A-5)'이 있는 안부를 지나면서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제법 가파르면서도 긴, 그러나 멋지게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걷게 되는 구간이다.

 

 

 

안부를 지난 지 15분 쯤 되면 커다란 바위들이 능선을 점령하고 있다. 산길은 바위를 좌우로 우회(迂廻)하면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사면(斜面)을 따라 난 비탈길을 안전로프가 의지해서 통과하면 5분 후에는 또 다시 보드라운 흙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8~9분 후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괜찮게 생긴 바위들이 제법 보이고, 가야할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하는 구간이다. 그런 풍광들을 기웃거리며 15분 남짓 걸었을까 좌우로 난 길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정표(백운산 4.4Km/ 대양안치 3.1Km)가 세워진 곳에서 또 다시 길이 흔적이 보인다. 오른편은 천은사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인데 왼편은 어디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이정표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숲도 한층 더 깊어졌다. 그리고 12~3분 후에는 백운산 갈림길(이정표 : 십자봉 1.9Km/ 백운산 3.9Km/ 대양안치 3.6Km)을 만나게 된다. 왼편은 백운산으로 가는 길이고, 십자봉은 물론 곧장 능선을 따라야 한다.

 

 

 

백운산갈림길에서부터 산길은 순해진다. 경사가 거의 없는 흙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거기다 잔디보다 더 고운 풀들이 길바닥을 덮고 있는가 하면 길가엔 야생화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967m(첨부된 지도에는 971m봉으로 표기되어 있다)봉에 올라서게 된다. 십자봉 정상으로 오인해 가십자봉’(가짜 십자봉)이란 이름이 붙은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십자봉1.5Km/ 산촌마을3.8Km/ 양안치, 백운산)로 나뉜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이지만, 산행날머리인 천은사는 오른편 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정상을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가십자봉을 지난 산길은 작은 봉우리(961m) 하나를 살짝 우회(迂廻)하더니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힘들게 다시 올라가야할 일이 걱정은 되지만 코끼리바위 등 심심찮게 나타나는 기묘한 바위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원덕동 갈림길(이정표 : 십자봉0.5Km/ 원덕동1,3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10분 조금 넘게 더 오르면 드디어 펑퍼짐한 둔덕 형태의 십자봉 정상이다. 참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원덕동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헷갈릴 수도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어디로 가더라도 정상 바로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기암(奇巖) 등 조금 더 나은 경관을 즐기려면 오른편의 능선을 타면 되고, 그보다 수월한 길을 택하고 싶을 경우에는 왼편 사면으로 난 길을 따르면 된다. 산행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50분이 걸렸다. 무더위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10평 가까이 되는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거리표시가 지워진 이정표(산촌마을/ 덕동리/ 양안치) 외에도 정상표지석이 두 개나 세워져 있다. 원주시와 제천시에서 하나씩 사이좋게 세워놓은 것이다. 하나의 정상을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 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의 높이 정도는 서로 통일 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십자봉의 원래 이름은 불영대산(佛影臺山)이다. 또 다른 이름은 촉새봉이다. 백운면 덕동리 원덕동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촉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최근 들어 십자가처럼 산 모양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십자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그러나 십자봉이라는 이름은 일제(日帝)가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원래의 이름은 촉새봉이었는데 일제 때 십자봉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촉새와 십자매(十姉妹)는 크기와 생김새가 비슷한 참새과의 조류(鳥類)이다. 하지만 촉새가 우리나라와 만주, 시베리아에 분포된 순수한 토종인 반면에, 십자매는 인도, 말레이반도 등 동남아시아가 원종으로 일본에서 농조(籠鳥 : 새장에 가두어 기르는 새)로 개량한 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애조(愛鳥)인 십자매로 바꿔치기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봉의 십자(十字)와 십자매의 십자(十姉)는 글자가 전혀 다르니 듣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정상은 소문과는 달리 조망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아니 별볼 일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동과 서, 그리고 남쪽은 잡목(雜木)들로 인해 완전히 막혀있고, 남쪽 한 방향으로만 겨우 시야(視野)가 열린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온전하지는 못하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아랫도리는 물론이고 좌우까지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망을 즐기고 싶다면 남쪽으로 주능선을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된다. 2~3분 거리에 헬기장이 있는데 남쪽으로 곧게 뻗은 주능선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넓게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남동쪽으로는 삼봉산이 삿갓을 엎어놓은 듯이 보이고 남으로는 시루봉, 옥녀봉 능선, 그리고 서쪽으로는 미륵산이 보인다.

 

 

 

가십자봉으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십자봉에서 돌아 나오는 데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하산을 시작할 때만해도 부드럽던 산길은 7분쯤 후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가파르게 변한다. 그런데 그 가파름이 얼마나 심하던지 길가에 매어놓은 안전로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참고로 갈림길에서 곧장 능선을 따르는 길도 보이지만 이정표가 없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얼마 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고맙게도 이정표(천은사 2.5Km/ 산촌마을 3.6Km/ 십자봉 2.0Km)가 세워져 있다. 천은사는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서 능선을 벗어난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에는 동막봉(595m)를 거쳐 산촌마을(운계3)에 이르게 되니 참조할 일이다.

 

 

내려서는 길은 한마디로 숲이 깊다. 사람을 들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다. 그렇지 않아도 숲이 울창한데 다래나 칡 등 넝쿨식물들까지 우거져 어떤 곳에서는 햇빛 한 점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거기다 오래 묵어 넘어진 나무들까지 그대로 놓아두니 숲은 한층 더 오묘해진다. 원시의 숲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아마 가십자봉을 출발한지 25분쯤 되었을 게다. 난데없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라는 팻말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옹달샘이 하나 보인다. 누군가 옹달샘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옹달샘의 물은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 고여 있지 않으니 마셔도 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물을 마시러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옹달샘까지만 다녀올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옹달샘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내려오면 드디어 계곡이다. 흐르는 물이 목욕할 정도는 못되지만 땀을 씻기는 충분하다. 더 생각할 필요 없이 주저앉아 세수부터 하고 본다. 시릴 정도는 아니지만 여간 청량한 것이 아니다. 계곡은 원시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다. 울창한 숲 바닥에 두텁게 쌓여 있는 초록색 이끼가 분위기를 한층 신비롭게 만든다.

 

 

이어지는 숲길은 계곡을 따라 나있다. 물론 계곡을 두어 번에 걸쳐 가로지르기도 한다. 천은사까지 40분 가까이 이어지니 제법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길은 고운편이다. 계곡을 끼고 난 길들은 대부분 바닥이 고르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예외이었다. 흙으로 이루어진 구간은 물론이고 돌길이 나타나더라도 바닥이 반반해서 걷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긴 거리에도 불구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내려왔던 이유이다.

 

 

천은사에 가까워질수록 물놀이하기에 좋은 장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계곡의 바닥이 대부분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랗다. 그리고 그 암반 위는 맑디맑은 물이 흐른다. 물이 깊지 않으니 안심하고 어린이들을 풀어 놀 수도 있겠다. 가족단위의 휴식공간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바위가 조금 미끄러우니 애들에게 주의를 시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제나 저제나 물가로 내려갈 기회를 엿보면서 내려서다 보면 저만큼에 여염집 한 채가 나타난다. ‘개 조심, 접근금지라는 경고판이 세워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개인 별장이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은사의 요사채였다. 무턱대고 들어오는 등산객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가십자봉에서 천은사까지는 1시간15분 정도가 걸렸다. 천은사(天恩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사찰이다. 고려 때부터 승려들이 수행하던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100여 년 전에 폐사(廢寺)되었다가 1960년대에 충주 사람 홍성익이란 처사가 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몸에 깊은 병이 있던 그가 백운암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천인(天人)이 나타나 금침을 놓고는 저 아래 물이 양쪽에서 만나고, 산 왼편으로 미륵불이 있는 곳에 절을 지어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말을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 신기하게도 홍 처사의 몸이 씻은 듯 나았고, 천인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천인이 점지한 터에다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천은사란다. 1989년 서울 성관사에 주석하던 임송암(林松岩) 화상이 절을 인수하여 조계종에 등록하고 중창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면 3·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인 대웅전과 요사로만 이루어진 단출한 규모로, 사찰 진입로에 일주문 대신 세운 한 쌍의 도깨비상과 사찰 경내의 포대화상(布袋和尙) 석상 등의 조형물이 있다.

 

 

천은사를 지나서도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은 계속된다.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길이 계곡가로 나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물가로 내려가면 된다. 주중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개울가에서 쉬고 있는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물가로 내려가 반석(盤石)위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계류에 몸을 담갔다. 시리도록 차지는 않았지만 그 청량함은 땀을 식히기에 그만이었다. 이런걸 보고 신선놀음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천은사 계곡은 30년 전만해도 명주골로 불리었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연못에 넣으면 모두 들어간다고 해서 이 일대를 명주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계곡 아래쪽에는 20여 가구가 살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런 연못이 천은계곡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행날머리는 천은사 앞 주차장

개울가 풍경을 기웃거리며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저만큼에 주차장이 보인다. 그리고 천은사의 일주문(一柱門)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을 만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거나 땀을 씻으면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참고로 주차장에는 휴게시설이 있어서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사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이 산골임을 감안하고 이용해야 할 것이다. ‘맛이 없다는 다른 손님의 평이 꼭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먹은 팥빙수가 그 손님의 말을 보충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하긴 이런 산골에서 도시에서 먹던 그런 맛을 찾아야 되겠는가.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산행지가 맞지 않아 3주 만에야 다시 찾은 산악회, 버스에 오르니 오늘도 역시 회장이라는 여성분이 손수 만들었다는 샌드위치(sandwich)를 나누어 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덥석 받아들고 본다. 미안함도 그 횟수가 늘어나다보면 그 농도(濃度)가 옅어지는가 보다. 처음에는 자는 채라도 하면서 사양을 했었는데 이젠 스스럼없이 받아드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그녀의 배려는 샌드위치로 그치지를 않았다. 산행 중에는 수박과 포도 등 과일은 물론이고, 출출할 거라며 삶은 단호박까지 권하신다. 고마운 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 앞선다. 나이 드신 분이 고생해가며 짊어지고 온 것을 얻어먹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산행을 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에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는가. 그냥 맛있게 먹어드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의 배품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친 몸으로 하산지점에 도착해보니 손수 끓였다는 추어탕을 대접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여름철 무더위에 만나는 보양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그런데 거기다 온정까지 듬뿍 담겨있으니 맛이야 보나마나 일 것이다. 음식 자체가 곧 행복이었으니까 말이다. 늦게나마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대미산(大美山, 1,232m )-청태산(靑太山, 1,200m)

 

산행일 : ‘15. 8. 4()

소재지 :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과 평창군 방림면·봉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대미동 동산교농로끝능선삼거리대미산청태산헬기장1등산로청태산휴양림(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두 산 모두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셈이다. 청태산 인근이 국유림경영 시범단지로 지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심심산골 오지(奧地)이다보니 접근이 어려워 웬만큼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까지도 아직 답사를 못해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덕분에 좋은 점도 많다. 산이 온통 원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야생화들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특히 봄이면 산나물이 지천이어서 산행보다도 나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지경이란다. 대신 볼거리는 빈약한 편이다. 바위가 없다보는 특출한 풍경은 애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고, 거기다 청태산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오지 산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청태산자연휴양림에 쉬러 왔다가 겸사겸사해서 오른다면 몰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동산교(횡성군 방림면 계촌리 대미동마을)

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여 42번 국도를 타고 평창방면으로 달리면 운교삼거리(방림면 운교리)가 나온다. 이곳 치안센터에서 좌회전하여 운지로(郡道)를 타고 계촌리(방림면)까지 간다. 계촌교()를 건너자마자 유영공업사 앞에서 이번에는 우회전하여 또 다른 군도(郡道)인 고원로를 따라 들어가다 잠시 후 계촌3리 경로당앞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계촌2(대미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동산교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만일 대미산만 따로 떼어서 오를 경우에는 왼편으로 진행해도 된다. 청태산과 대미산을 잇는 능선의 중간 안부로 올랐다가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대미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미산과 청태산을 연계할 계획이기 때문에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2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에서 보았던 등산안내도'는 이젠 보이지 않는다. 공공기관에서 세운 시설물이 철거된 이유가 뭘까. 어쩌면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의 눈에는 등산객들이라면 그저 피해만 끼치는 사람들로 여겨졌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하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농작물에 손을 대는 등산객들이 내 눈에도 띌 정도였으니 농민들이 등산객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다리를 건너려는데 다석 류영모 묘소라고 적힌 푯말이 보인다.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柳永模 : 1890~1981)선생의 묘역(墓域)이 이 부근에 있는 모양이다. 다석(多夕)은 그의 호인데, 하루 세 끼나 되는 많은 끼니 중에 한 끼만 먹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란다. 사실 그는 1941년부터 하루 한 끼씩만 먹는 금욕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그가 농사를 지으며 머물렀던 곳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산 아래(종로구 구기동)였던 걸로 아는데 무슨 이유로 이곳에다 묘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비록 널리 알려진 이는 아니지만 서울 출생인 그는 개신교 사상가이자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이자 종교가였다.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명이 함석헌선생이었다.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류영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함석헌이 퀘이커(Quaker :17세기 조지 폭스가 창시한 기독교계 신흥 종교)로 종교적 외도를 한 것에 대해서 크게 나무라고 의절하였다. 참고로 그는 종교 다원주의자로 알려진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든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면 등산로는 시멘트포장 임도(林道)를 따른다. 아니 길의 양쪽이 모두 밭이니 정확히는 농로(農路)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다. 꽤 길게 이어지는 이 길을 대하는 등산객들의 느낌은 계절에 따라 판이(判異)할 듯 싶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평원(平原)에 눈()이라도 수북이 쌓일 경우에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질 것이지만,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릴 수 없어 자칫 지옥의 행군(行軍)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뒤돌아본 대미동마을,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전원마을이 마치 그림 같다. 작년에 오스트리아 쪽에서 알프스지역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본 풍경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골풍경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비슷한가 보다.

 

 

길은 고랭지채소밭 사이로 나있다. 우리나라 3고랭지채소단지라고 하면 소위 바람의 언덕이라고 하는 태백시 매봉산(1,303m) 북쪽 사면(斜面)과 태백시 조탄동 지각산(1,079m) 북쪽의 귀내미지역, 그리고 강릉시 왕산면 피동령, 즉 고루포기산(1,238m)과 옥녀봉(1,146m) 사이의 백두대간(白頭大幹) 동쪽 사면(斜面)을 이른다. 비록 ‘3대 단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곳도 역시 해발이 1,232m나 되는 대미산 산자락, 사면은 광활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넓은 편이다. 가을이라도 찾아오면 이 평원은 푸른 배추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양배추와 다른 채소들이 섞여있어 특별한 볼거리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말이다. 문득 요즘 끼니때마다 밥상에 올라오고 있는 배추 속이 연상되면서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거기다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삼겹살까지 더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안주가 어디 있겠는가. 소주가 원래 술일지니 술술 잘도 넘어갈 것이다.

 

 

농로가 끝나갈 즈음이면 채소밭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칠 것 없이 널따란 평원에 나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것만 해도 특이한 볼거린데 거기다 생김새까지도 연리목(連理木)을 닮았다. 두 나무가 중간에서 하나로 붙어있는 형상인 것이다. 문득 연리지에 끝없는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던 장한가(長恨歌)’가 떠오른다. 백낙천이 쓴 장대한 서사시(敍事詩)로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나눴던 사랑이야기이다. 그리고 집사람에게 그 구구절절(句句節節) 사랑표현을 립 서비스(lip-service)라도 해주고 싶은데 집사람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멀리 달아나 있다. 운동부족으로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한 요즘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지런을 떨어도 집사람을 따라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나무를 지나면 양배추 밭이다. 끝도 없이 널따란 밭에는 푸른 양배추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길은 밭의 한가운데로 나있다. 조심해서 걸어야만 배추를 다치지 않을 정도로 좁디좁은 길이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길을 없애야 하겠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는 조심해서 걷는 게 최선이다. 함부로 걷다가 배추라도 상할 경우에는 그나마 있던 길마저도 없애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배추밭을 지나 산자락에 붙는다. 들머리에서 더디지 않는 걸음으로 15분을 걸었으니 제법 먼 거리이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결코 쉽지 않은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산자락에 들어서면 곧바로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임도는 제법 넓다. 그러나 길은 곱지 않은 편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탓에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들이 길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잡목과 잡초가 가득한 것을 빼면 산길의 형편은 좋은 편이다. 비록 오르막길이지만 경사(傾斜)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緩慢)한데다 길바닥은 돌맹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흙길이다. 잡초로 인해 발아래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산길의 풍경 또한 괜찮은 편이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와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3분쯤 지나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로 이루어진 안부이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대미산 1.7Km/ 움트골 2.3Km)에는 대미동마을로 내려가는 방향표시가 없다. 동산교 앞의 등산안내도가 없어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물론 이곳에서는 왼편 능선을 따른다.

 

 

산길은 일단 능선에 올라붙고 나면 수월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대미산은 그게 아닌가 보다.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급하게 위로 향하던 능선은 10분쯤 후 그 기세(氣勢)를 누그러뜨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산길은 급하게 고도(高度)를 높인다. 그렇게 산길은 급경사와 완경사를 번갈아가며 고도를 높여간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쉽지 않은 구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양각색의 야생화(野生花)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은 힘든 것 까지도 잊게 만드는 모양이다. 들꽃에 눈을 맞추다보면 힘들다는 생각이 사라져 버리니까 말이다. 대미산은 약용식물과 야생화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아예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자꽃이다. 샛노란 동의나물꽃과 금괭이눈, 거기다 여러 종류의 바람꽃도 보인다. 나리꽃과 양지꽃은 물론 노랑제비꽃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다들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땅속줄기와 포자로 번식한다는 속새는 아직까지 헐벗은 채로이다.

 

 

 

 

능선에 올라선지 25분쯤 지나면 두 번째 이정표(대미산 0.9Km/ 움트골 3.1Km)를 만난다. 두 이정표의 사이는 고작 0.8Km, 그런데 25분이나 걸린 것을 보면 오르는 길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은 두 번째 이정표를 지나면서 그 기세(氣勢)를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주변 풍경을 기웃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러나 숲이 짙어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거기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지라 볼만한 바위 또한 없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야생화들이 능선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것이다. 이건 숫제 등산이 아니라 꽃 나들이이다. 그리고 이건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누군가 그랬다. 꽃보다 버섯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아래 사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꽃보다 더 화사한 버섯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순백을 자랑하는 것들도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버섯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두 가지만 대표로 올렸다.

 

 

 

꽃과 함께하는 행복한 산행을 10분 남짓하면 덕수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이정표 : 대미산 0.6Km/ 덕수산/ 움트골 3.4Km)인 이곳에서 오른편은 덕수산으로 연결되고, 대미산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대미산으로 가는 주능선 역시 거의 경사가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능선의 윗부분이 제법 널따란 것이 얼핏 보면 평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야생화가 지천이다. 대미산(大美山)엄청나게 아름다운 산이란 뜻이다. 혹시 이런 풍경을 보고 지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이곳은 산나물이 많기로 소문이 나있다. 특히 그렇게 귀하다는 곰취가 지천이라니 봄철에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들꽃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어느새 대미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덕수산 갈림길에서 10, 산행들머리인 대미동을 출발한지는 1시간30분 정도가 지났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음직한 널따란 정상에는 말뚝으로 된 정상표지목과 삼각점(봉평26,1980복구) 외에도 거리표시가 엉망인 이정표(움트골 3.0Km)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아까 덕수산갈림길에서 한참을 더 걸어왔는데도 거리는 오히려 0.4Km가 더 줄어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상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眺望) 또한 없다. 참고로 대미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의외로 밋밋하다. 국립지리원에 따르면 요 아래에 있는 대미동 마을의 뒤편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붙여졌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청태산으로 가는 길은 올라왔던 방향과 반대편으로 나있다. 하산 길은 완만하게 시작된다. 대미산으로 올라올 때 만났던 산죽(山竹)길은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 그렇게 잠시 떨어지던 산길은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은 후에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산이 후덕한 탓인지 내려서는 게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다.

 

 

 

능선은 온통 산죽(山竹)들이 밭을 이루고 있다. 산죽 길은 그 높이가 무릎 전후일 때가 가장 좋다. 걷는데 부담이 없어 더 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행운이다. 오늘 만난 산죽들은 하나같이 걷기에 딱 좋을 만큼만 자랐다. 그렇게 좋은 산죽도 무릎을 지나고 또 허리를 넘고 나면 고역으로 변하게 된다. 자꾸만 휘감는 산죽들을 헤치면서 나가다보면 즐거움은커녕 걷는 것 자체가 고행(苦行)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미산 일대의 능선은 초원(草原) 지대이다. 덕분에 산나물이 지천이다. 어떤 이는 이런 장점을 들며 봄 산행을 권하기도 한다. 그 귀한 곰취나물을 배낭 한 가득히 채워 넣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겨울산행지로도 손꼽힌다. 이 인근이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찾았을 경우 한 폭의 그림이라도 구경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흰 눈에 뒤덮인 설경은 화폭에 담은 수채화(水彩畵)를 말이다.

 

 

대미산에서 내려선지 25분 가까이 되면 참재에 내려서게 된다. 대미산과 청태산의 가운데쯤에 위치한 고갯마루(이정표 : 청태산/ 대미동 3.3Km/ 대미산 1.5Km) 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대미동마을이 나오고, 이정표에 나와 있지도 않을뿐더러 흔적까지 희미한 오른편 길을 따를 경우에는 하축덕마을(봉평면 유포리)에 내려서게 된다. 물론 청태산은 맞은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청태산으로 향하자마자 임도(林道)를 만나게 되고, 산길은 그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곧이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고갯마루까지 300m 가까이 고도(高度)를 낮추었으니 다시 올라가려면 별 수 없었을 게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싶다. 가파른 오르막과의 싸움이 버겁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미산을 넘으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消盡)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짧고 완만한 내리막길도 있다.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면 완만한 내리막길이 짧게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산길의 풍경은 아까 대미산 구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산죽(山竹)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나고 그 위는 참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조망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싸움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참재를 출발한지 30분을 넘기고 나서야 겨우 청태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갖가지 야생화들에 둘러싸인 정상은 아까 올랐던 대미산 만큼은 아니지만 넓은 편이다. 그 한가운데에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목을 세워 놓았다. 그 외에도 등산안내도와 대미산 방향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청태산자연휴양림의 안내판이 보인다. 거기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요 아래에 있는 자연휴양림 덕분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청태산이란 이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관동지방(강릉)으로 가는 길에 이곳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요 아래 그러니까 지금 휴양림이 위치한 곳 부근에서 횡성수령으로부터 점심을 대접 받았단다. 이때 점심상을 폈던 커다란 바위(가로15×세로20)에 푸른 이끼가 잔뜩 끼었다고 해서 청태산(靑太山)이란 휘호를 직접 써서 횡성 수령에게 하사했다는 것이다. 설마 그가 이끼 낀 바위 하나를 보고 휘호까지 썼겠는가. 바위도 바위이지만 그보다 먼저 이곳 청태산의 아름다운 산세(山勢)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힘들게 올라온 만큼 보람도 크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반쪽짜리지만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왼편 그러니까 남쪽 방향으로만 열린다. 비록 희미하지만 건너편에 보이는 산은 백덕산과 구봉대산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보이는 산군(山群)은 치악능선일 것이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더 많은 산들을 가슴속에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연무(煙霧)가 시야(視野)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물론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이다. 잠시 가파르게 내려서면 헬기장(이정표 : 1등산로/ 2등산로/ 청태산 정상 0.3Km)이다. 1등산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매표소 1.3Km/ 3등산로 0.7Km/ 청태산 정상 0.5Km)을 만난다. 이번에는 등산안내도까지 반듯하게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매표소 방향으로 내려선다.

 

 

매표소로 내려서는 하산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길바닥은 사나운 편이다. 계단 노릇을 하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무질서하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산행 내내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돌맹이들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다 로프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바위이다. 왜소한데다 볼품까지 없지만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라 올려본다.

 

 

쉽지 않은 내리막길은 10분 이상이나 계속된다. 그러다가 중간에 이정표(매표소 1.1Km/ 청태산 정상 1.2Km)를 만나게 되면서 순해진다. 거기다 산길은 잣나무 숲 아래로 나있다. 바닥이 폭신폭신 한데다 솔향까지 진하다. 산행에 지쳐있던 육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회복되어 있다. 이게 다 소나무가 내뿜는다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소나무나 잣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이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그리고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보자.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갈 것이다. 그에 따라 심신(心身) 또한 한없이 맑아질 것이고 말이다. 피톤치드의 효과를 믿고 몸을 맡겨 보자는 것이다.

 

 

 

잣나무 숲에 들어왔다 싶으면 다음은 숲 체험 데크로드이다. 청태산자연휴양림의 또 다른 명물로 알려진 시설로 참나무 숲에다 데크로 길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이 길을 걸으며 숲을 느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더뎌진다. 가슴을 연다. 그리고 호흡을 길게 가져간다. 코끝에서 맴돌던 신선한 나무 내음이 어느 샌가 가슴속으로 들어와 있다. 이런 게 바로 힐링(healing)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청태산자연휴양림 주차장

데크로드가 끝나면 곧바로 자연휴양림의 시설지구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친환경으로 지어진 화장실을 시작으로 야영장 등 갖가지 편의시설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휴양림 안으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 내려가면 저만큼에 주차장이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청태산 정상에서 40분 남짓 되는 거리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4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참고로 해발 1,200m의 청태산은 국유림경영 시범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덕분에 인공림과 천연림이 잘 조화된 울창한 산림을 자랑한다. 운영주체인 산림청에서는 이러한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이곳에다 자연휴양림을 만들어 놓았다. 402ha의 너른 숲속에 숙박시설과 체험시설 등 각종 편익시설은 물론이고 청소년의 심신수련을 위한 임간수련장과 삼림욕장, 그리고 청태산을 오르는 등산로까지 잘 정비해 놓았다.

 

 

백석봉(白石峰, 1,170.1m)

 

산행일 : ‘15. 6. 30()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산행코스 : 졸두교1쉼터2쉼터백석봉1,237.5m(주봉)고갯마루 쉼터항골계곡항골탑골공원 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5)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백석봉은 산이 많기로 유명한 정선에서도 ‘9대 명산으로 꼽힐 정도로 괜찮은 산이다. 그러나 외지인들에게는 아직까지 낯선 이름일 따름이다. 이는 바로 곁에 있는 가리왕산의 유명세에 철저하게 가려있는 탓일 게다. 그러나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찾는 이가 드물다보니 아직까지도 원시(原始)에 가까운 자연미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 정상의 바위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곳곳에 너덜지대가 널려있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런 특징 들은 그들만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색깔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상을 제외하고는 일절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고, 항골로 내려가는 구간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자갈길이 길게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수많은 너덜들은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항골에 있는 탑골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손수 만든 것이지만 사방에 널린 돌들이 수많은 탑()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탑들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졸두교(정선군 북평면 나전리)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와 59번 국도를 타고 정선방면으로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졸두교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 근처에 현대오일뱅크의 부광주유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졸두교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다리 아래는 오대천(),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원시(原始)에 가까운 주변 경관에 이끌려 찾아오는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오대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오염되지 않은 맑은 냇물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요인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많지가 않다. 지난해에 왔을 때는 맑은 물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강원 영서지역에 가뭄이 심하다는 뉴스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다리를 건너면 졸드루 펜션마을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인조(人造) 나무에다 잎이나 과일을 형상화한 동그란 판을 매달고 거기다 펜션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들을 적어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것을 보면 안내판을 설치한 목적을 100%, 아니 그 이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졸드루는 작다는 뜻의 졸과 평지라는 뜻의 드루가 합쳐진 말로 작은 뜰을 의미한단다.

 

 

산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천변(川邊)을 따라 이어진다. 물론 임도(林道)이다. 잠시 후 마지막 민가(民家) 옆에 이르면 차단기(遮斷機)가 앞을 가로 막는다. 개의치 않고 통과한다. 나는 차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단기를 지나면 잠시 후 상수도용 집수조(集水槽)를 지나고 이어서 평상이 놓여있는 작은 쉼터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이곳에 백석봉 등산안내도와 이정표(백석봉 3.9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시설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세워진 위치 때문일 것이다. 이정표나 안내도를 이곳이 아닌 졸두교 근처에다 세웠더라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요즘의 화두(話頭)고객만족(Customer Satisfation; CS)’에도 부합될 것임은 물론이다.

 

 

 

물기 하나 없는 석띠골(네이버지도 참조)을 건너 산자락으로 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이어진다. 때문에 경사가 거의 없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주변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저 앞사람만 바라보며 묵묵히 걷는 수밖에 없다.

 

 

 

잘 자란, 그러나 오래 묵지는 않은 황금빛 소나무 숲을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너덜지대가 나온다. 이런 너덜지대는 앞으로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첫 번째 너덜겅을 지나고 또 다른 너덜겅 두어 곳을 더 지난 후, 범위가 넓지 않는 낙엽송 군락을 통과하면 벤치를 갖춘 작은 쉼터(이정표 : 백석봉 2.8Km)를 만난다. 자장율사가 백일기도를 했던 장소라는 2쉼터란다. 대사가 여기서 기도를 드리는 중 부처님의 부름으로 수마노탑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석띠골에서 1쉼터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안내판에 백석암(白石庵)의 흔적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고 적혀있다. 쉼터 근처에 둥그렇게 쌓아올린 돌담이 보이는데, 저게 혹시 그 절터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면 숯가마터로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1쉼터를 지나서도 길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산길은 계속해서 사면(斜面)을 따르고, 그 길은 전과 다름없이 흙길과 너덜겅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점도 있기는 하다. 가파른 길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파름이 하나같이 기껏해야 3~4분이면 끝나버리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를 정도이다.

 

 

 

1쉼터에서 3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2쉼터(이정표 : 백석봉 1.7Km, 항골계곡 6.9Km/ 졸두루 3.0Km)’이다. 울창한 숲속에 벤치를 놓아 무더운 여름철에 제격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물도 눈에 띈다. 비록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있지만 말이다.

 

 

 

2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미리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제까지보다 조금 더 가팔라진다는 얘기일 따름인 것이다. 그저 길 주변의 잘 자란 금송(金松)들을 구경하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다보면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오늘 본 너덜겅들 중에서 가장 큰 너덜겅이다.

 

 

 

 

너덜겅에 이르면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그리고 강원도의 수많은 산군(山群)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른편에는 가리왕산 줄기인 하봉이 또렷하고, 그 왼편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비봉산과 민둔산 등일 것이다.

 

 

너덜지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사납게 변한다. 엄청나게 가팔라진다는 얘기이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거기다 또렷한 볼거리도 없다.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묵묵히 걷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최대한으로 속도를 늦추면서 말이다.

 

 

 

땅만 바라보며 걷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색다른 볼거리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만일 고개를 들고 다른 풍경에 시선을 맞췄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풍경이다. 참나무의 아랫도리가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비탈길과의 힘겨운 싸움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싸움을 끝내고 능선(이정표 : 졸드류 3.2Km)에 올라서면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또 다른 이정표(내려갈 때 90)에 현 위치를 참나무군락지로 표기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은 온통 참나무들로 가득하다.

 

 

산길은 능선을 곧장 치고 오르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사면(斜面)을 따라 오른편으로 100m쯤 나아가다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이정표 : 백석봉 0.6Km). 그러나 향하는 능선은 같다. 올라가는 기점을 오른편으로 약간 옮겨 놓은 셈이다.

 

 

이제부터 산길은 능선을 따른다. 오래 묵은 참나무들로 가득 찬 아름다운 숲길이다. 거기다 능선의 경사(傾斜) 또한 완만하다. 그저 즐기듯이 걷기만 하면 된다.

 

 

능선에 오른 지 15분이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백석봉 0.3Km/ 항골 5.2Km/ 졸두루 4.4Km)에 이르게 된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정상에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함은 물론이다. 삼거리에는 평상을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정상까지 다녀오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다녀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아니면 정상에 오르기 전에 잠시 쉬어가라는 것일 게도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일 수 있게 등산배낭을 이곳에 놓아두고 정상을 다녀오면 될 일이다. 오늘 우리 일행들은 맨 마지막의 용도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배낭 몇 개가 평상 위에서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그 증거일 것이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도 지나온 능선과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주변의 나무들이 굵어졌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참 들꽃들이 늘어난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마타하리 등 화사하게 핀 야생화들의 개체수가 부쩍 늘어났는데도 말이다. 그런 길을 느긋하게 5분쯤 오르다보면 능선은 잠시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에서 7분 정도가 걸렸다. 산행을 시작한지는 정확히 2시간이 지났다.

 

 

정상은 하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백석봉(白石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에 오르면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으레 돌로 만들어진 정상석이 있으려니 지레짐작했었는데, 무늬까지 선명한 나무로 된 사각(四角)정상목이 길손을 맞는 것이 아닌가. 생김새도 마치 가구를 짜 놓은 형상이다. 두드려보면 통통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원목(原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천 개가 넘는 산을 오르내려봤지만 이런 정상표지목은 처음이다. 그래서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정상에는 이 외에도 낡은 이정표(항골돌탑 120)와 삼각점, 그리고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먼저 건너편에 있는 가리왕산(상봉)과 중봉, 하봉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왼편에도 강원도의 수많은 고산준령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이런 게 바로 강원도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이곳 백암봉에는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정상에 신령스런 샘(靈泉)’이 하나 있었는데 만일 부정한 사람이 먹기라도 할라치면 물이 말라(渴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의 바위들이 검은 색을 띠게 되면 수일 내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현재는 있지도 않은 영천의 얘기야 차지하고라도, 바위의 색깔 이야기는 과학적으로도 맞는 얘기일 것 같다. 흰 바위가 검게 보인다는 것은 먹구름에 둘러싸여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그 먹구름이라는 것은 늘상 비바람을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

 

 

바위벼랑 아래에는 가리왕산을 가르며 굽이돌아 흐르는 오대천이 아득하다. 그 물줄기가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며 깎아 만든 사행천(蛇行川)이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남은 여백은 어김없이 작은 마을들로 채워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왼편 마을은 졸두루야영장이고 그 오른편에 보이는 곳은 숙암마을이다. 숙암이란 마을이름은 옛날 어느 원님이 하룻밤 묵어갈 민가(民家)조차 찾지 못해 바위에서 노숙(露宿)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허나 아쉬운 점도 있다. 꼭 저렇게 파헤쳐야 하느냐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가리왕산을 헤집어놓은 스키 슬로프(slope)’ 공사현장이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동계올림픽용을 치르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보기 흉한 풍경인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주봉을 거쳐 남릉으로 연결된다. 주봉까지의 1Km정도 되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주봉이 백석봉 정상보다 100m가까이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능선의 풍경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보기 힘들게 굵고 오래 묵은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넘어져 있는 나무들도 나름대로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들 중의 하나가 터널이다. 그 아래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아니 허리를 숙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는 모습을 닮았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물론 가르침을 받는 상대방도 한정이 있을 수 없다. 오늘도 난 또 하나의 배움을 산에서 얻는다. 겸손을 말이다.

 

 

삼거리를 출발한지 25분쯤 지나면 주봉에 올라서게 된다. 약간 도톰하게 솟아오른 흙봉우리인 주봉(主峰)의 정상에는 이정표(항골 4.3Km/ 백석봉 1.2Km)만 세워져 있을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이경일이라는 사람이 매달아 놓은 코팅지도 없었더라면 이곳이 주봉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뻔하다. 아마 황병지맥을 종주하면서 매달아 놓은 모양인데 그 높이(1,237.5m)가 주봉과 같기에 이곳이 주봉인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곳 1,237.5m은 실질적인 백석봉의 정상이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볼품이 없고, 거기다 조망(眺望)까지 트이지 않기 때문에 정상의 자리를 아우에게 내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로도 능선은 큰 변화가 없이 이어진다. 크고 오래 묵은 나무들이 즐비한 능선을 따라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능선은 가끔 방향을 틀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갯마루 쉼터까지는 능선을 따르는 느낌으로 진행하면 되고, 그 이후에는 이정표만 참고해도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거의 200m 간격으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주봉에서 내려선지 15분 쯤 되면 산길은 능선(이정표 : 항골계곡 2.9Km/ 백석봉 2.4Km)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향한다. 아마 갈미봉(1,264m)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을 벗어나는 모양이다. 이어서 5분쯤 더 진행하면 벤치와 평상을 갖춘 쉼터(이정표 : 항골 2.3Km/ 백석봉 3.2Km)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 쉼터이다.

 

 

고갯마루 쉼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산길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으로 나있다. 원시의 숲이 바로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숲은 깊다. 거기다 다래 등 넝쿨식물들까지 함께 어울리다보니 한줄기 빛까지도 허용하지 않을 듯 싶다. 길이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하산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다. 이 정도 길이의 하산코스는 이곳 백석봉 뿐만이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 바닥이 온통 너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길이 계곡을 따라 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까 산을 오를 때 보았던 그 수많은 너덜겅들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산이 온통 너덜로 이루어진 느낌인 것이다. 때문에 내려설 때마다 무릎에 부담이 온다. 거기다 걷는 속도까지 더딜 수밖에 없다. 짜증나기 딱 좋은 코스인 것이다.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되고 35분쯤 지나면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계곡을 따라 내려왔고, 또 어떤 때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개울은 마른 채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극심한 가뭄 탓일 것이다. 그러데 언제부턴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흐르는 소리까지 제법 우렁차진 것이다. 그런데 그 물소리까지 반갑지가 않다. 계속되는 너덜 길의 짜증이 산행의 즐거움까지 앗아가 버린 모양이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짜증은 극에 달한다. 그때 쯤, 그러니까 고갯마루 쉼터에서 내려선지 45분쯤 지나면 저만큼에 데크로 만든 길이 나타난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정도로 등산로를 잘 정비했다는 것은 날머리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날머리는 이곳에서도 거의 1Km를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길의 형편은 많이 좋아진다. 길의 폭도 많이 넓어지고 바닥도 자갈과 흙이 섞여있어 걷기가 아까보다는 많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까지 생겨나는 모양이다. 많이 불어난 물가에 앉아가기 딱 좋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기둥에 쉼터라고 적힌 안내판이 걸려있다. 고갯마루 쉼터에서 5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쉼터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산길은 계곡을 잠시 벗어난다. 그리고 낙엽송 숲을 지나서 가파르게 잠시 떨어지면 또 다시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어서 계곡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잠시 더 내려오면 항골탑골공원(이정표 : 백석봉 5.2Km)에 내려서게 된다. 개울가 쉼터에서 이곳까지는 20분 남짓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항골탑골공원 주차장

공원에 내려서면 물레방아가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다. 이어서 시멘트로 만든 블록을 쌓아올린 커다란 두 개의 탑()을 지나면 드디어 이곳 항골이 유명세를 타게 만든 돌탑군이 펼쳐진다. 도로 오른편 너덜로 이루어진 산비탈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돌탑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돌탑들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사이사이에 글씨를 써넣은 옹기 항아리들까지 배열해 놓았다. 이 탑들은 소망탑으로 불리는데 그 수가 무려 180여 기()나 된단다. 작은 돌맹이를 하나하나 쌓아올린 소망탑부터 마이산 탑사의 돌탑들을 닮은 것들까지 그 생김새도 각기 다르다. 이곳은 옛날 나전탄광이 있었던 자리란다. 폐광촌으로 버려졌던 곳에 주민들이 하나 둘 돌탑들을 쌓기 시작하면서 관광객들이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돌탑군을 지나면 곧이어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4시간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은 시간과 땀을 씻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5분이 걸린 셈이다.

 

 

 

귀경 길에 잠시 백석폭포(白石瀑布)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목에 백석폭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석폭포는 백석봉에서 오대천으로 떨어져 내리는 높이 116m의 인공폭포(人工瀑布)로서 길이 600m, 지름 40의 관()을 매설한 뒤 주변의 계곡물을 끌어올려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물의 양이 적다보니 그 형상은 보잘 것이 없다. 물이 많았더라면 깎아지른 절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광경이 볼만 했을 텐데 말이다. 아쉽지만 이곳의 가뭄이 그만큼 심하다는 얘기이니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오늘도 난 이해가 가지 않는 풍경을 만났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그 첫 째는 양재동에서 버스를 탔을 때이다. 버스의 좌석이 텅텅 비어 있는 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운영진의 얘기로는 유료(有料) 회원의 숫자가 12명에 불과하단다. 그런데도 계획대로 산행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화요산행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진행한다는 회원들과의 약속이라면서 말이다. 당연이 오늘 산행은 적자일 것이다. 그런데도 운영진에서는 살구와 요구르트, 그리고 술빵까지 나누어 준다. 미안한 마음에 냉큼 받지를 못하고 잠을 자는 척 눈을 감아버린다. 두 번째의 상황은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서 맞닥뜨렸다. 구수한 된장찌개과 야채 등이 상 위에 가득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거기다 막걸리까지 올라와 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산행을 진행해 준 것 만 해도 고마운데 말이다. 그 성의가 고마워 굵어진 빗줄기 속에서도 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런 때에는 맛있게 먹어 드리는 게 감사의 표시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어 산악회 운영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병방치(兵防峙, 819.2m)-병방산(兵防山, 860.4m)

 

산행일 : ‘15. 6. 27()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산행코스 : 병방치 스카이워크포토죤병방치 정상임도병방산 정상신흥목장계곡귤암새마을교(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병방치(兵防峙)는 굴암리에서 읍으로 넘어가는 병방산의 고개 길이다. 이 길은 험준한 절벽 사이를 36굽이나 돌고 돌아 천애(天涯) 절벽의 병방벼루(벼랑)를 통과해야만 한다. 절벽 아래로는 깊고 푸른 물로 이어져 나는 새도 쉬어가고, 다람쥐도 한숨 쉬며 간다는 석경(石逕:돌이 많은 좁은 길)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길의 폭이 의외로 넓고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시설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걷는 것은 쉽지가 않다. 크고 작은 돌덩이나 바위로 이루어진 바윗길이 수북이 쌓인 낙엽 탓에 바닥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딜 경우에는 부상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의할 점은 길 찾기이다. 목장 위 무명봉에서 구뎅이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특히 유념해야 한다. 주변 상황으로 보아 길을 잘못 들어설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섰다간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길은 흔적도 없어져버리고 거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윗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이다. 조양강의 물굽이가 만들어낸 한반도 지형이 시선을 놓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병방치 스카이워크주차장(정선군 정선읍 북실리 산105)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와 59번 국도를 타고 정선읍까지 온다. 이어서 정선제1()를 건너자마자 나오는 현대아파트삼거리(북실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더 들어가면 용담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스카이워크전망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아래 지도에서 병방산은 병방치, 그리고 구덩산은 병방산으로 보는 것이 옳다.

 

 

주차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매표소, ‘스카이워크(Skywalk)’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곳이다. 스카이워크는 해발 583의 허공 위에다 ‘U'자 형으로 길게 난간을 만들고 바닥을 강화유리로 깔았다. 물론 지지대는 바위절벽이다. 스카이워크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발아래에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카이워크들은 절벽에다 만들어 놓았다. 아스라이 펼쳐지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을 감상하라는 의미에서다. 이때 사람들은 살 떨리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 절경에 푹 빠져든다. 하나 더, 이곳 병방치의 스카이워크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맞은편에 펼쳐지는 한반도의 모형을 감상하는 전망대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조양강의 물굽이가 만들어낸 기경이 사람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스카이워크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오른편에 보이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입장료 5천원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무계단의 위에 있는 또 다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양강의 물굽이가 이곳 스카이워크에 뒤지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유리 아래로 펼쳐지는 기경(奇景)을 감상하며 느끼는 살 떨리는 공포감을 맛볼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중국 등을 여행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겪어봤기에 아쉬울 것은 없다.

 

 

 

전망대에 서면 발 아래로 굽이치는 조양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면 여량리에서 발원한 조양강이 빚어놓은 작은 산줄기의 모습이 영월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과 흡사하다. 허나 내 눈에는 한반도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게 문제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내 수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곳 주민들도 소불알을 닮았다고 한다니까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축 늘어진 소불알을 닮아도 아주 쏙 빼다 닮았다. 그건 그렇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어디선가 숨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산 아래로 길게 늘어진 쇠줄에 매달려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치듯이 내려가는 것을 보니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던가 보다. 저게 바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부쩍 인기가 높다는 짚 와이어(Zip-wire)’인 모양이다. 이곳 병방치의 짚 와이어는 병방치에서 산 아래에 있는 동강생태학습장까지의 표고차(標高差) 325.5를 시속 70~80의 속도로 내리꽂는다고 한다.

 

 

 

스카이워크를 둘러봤다면 이젠 산행에 나설 차례이다. 산행은 주차장 입구 산자락에 있는 팔각정(이정표 : 병방산 2.8Km/ 귤암리 2.3Km/ 북실리 2.5Km)에서부터 시작된다. 병방산 방향, 그러니까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른다. 100m 남짓 걸으면 임도(이정표 : 병방산 2.2Km/ 북실리/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차량이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 임도는 마침 비포장,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어서 걷기에 딱 좋다. 15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에 이정표(포토존/ 병방산 1.6Km/ 북실리 3.4Km) 하나가 나타난다. 꼭 들어가 봐야 할 곳이다. 아무 의미없이 포토죤(photo-zone)’이란 팻말을 달아놓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20m정도 내려가면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서면 아까 스카이워크 상부의 전망대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소불알이 달랑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까보다 더 정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굽이의 헤어나 잠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청옥산과 가리왕산 등 강원도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파노라마처럼 널따랗게 펼쳐지는 것이다. ()에 문외한일지라도 시 한 수()쯤은 너끈히 짓고도 남을 풍경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5분쯤 더 걸으면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병방치(兵防峙)로 올라가는 들머리이다. 오늘 산행의 주봉인 병방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병방치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산길은 널따란 임도(林道)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길이 점점 좁아진다 싶더니 금새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완만하던 경사(傾斜) 또한 고도(高度)를 높일수록 점점 가팔라져 간다. 그러다가 더 이상 가팔라질 수가 없을 정도가 된 뒤에야 병방치(兵防峙) 정상에다 올려놓는다. 임도에서 산길로 접어든지 18, 산행을 시작한지는 38분이 지났다.

 

 

대여섯 평쯤 되는 정상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물론 조망(眺望)도 터지지 않는다. 정상은 삼각점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 정상표지석은 세워져 있지 않다. 새마포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데 이 정상표지판이 좀 문제다. 이곳의 지명은 병방치가 분명한데도 병방산이라고 잘못 표기 해 놓은 것이다. 다음에 오르게 될 봉우리가 병방산인데도 말이다. 산의 이름을 제멋대로 고치는 일은 삼가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북실리에서 이곳 병방치로 오르려면 뱅뱅이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뱅뱅이재란 36굽이의 길을 뱅글뱅글 돌아서 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곳 병방치도 그 뱅뱅이에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나 싶다. 뱅뱅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임도를 따른다. 3분쯤 걸었을까 송전탑(送電塔)이 보인다. 산길은 송전탑(이정표는 양쪽 방향을 똑 같이 등산로라고만 표기했다) 아래로 나있다. 3분쯤 내려섰다가 다시 3분쯤 올라서면 평상(平床)이 하나 놓여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바윗길 하나가 나타난다. 일단 들어서고 본다. 명품 전망대들은 대부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평상에서 기다리겠다는 집사람까지 부득부득 끌고 들어간다. 멋진 풍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서이다.

 

 

 

 

애써서 나가본 전망대는 실망스럽다. 물굽이가 만든 지형, 그러니까 한반도의 모형을 바라보기에 딱 좋은 장소이지만 아쉽게도 나무들이 시야(視野)를 가려버린 것이다. 오메가(Ω)의 윗부분을 싹둑 잘라버린 모양새이다. 그러나 병방산(새마포의 표지판은 구덩산으로 적고 있다)을 조망하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없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병방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것도 흠하나 없는 온전한 모습이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물론 오른편은 바위벼랑이 계속된다. 잠시 후 왼편에 임도(林道)가 나타난다. 그리고 산길과 임도로 연결되는 샛길도 보인다. 아까 송전탑에서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이곳에서 산길로 올라서는 방법도 있었을 것 같다.

 

 

임도를 봤다싶으면 곧이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무척 가파르다. 오른편은 역시 바위벼랑, 나뭇가지 사이로 조양강의 물굽이가 내다보인다. 바위벼랑 쪽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오르는 게 힘들 경우 붙잡고 오르라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위험하니 넘어가지 말라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길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중간에서 완만한 구간을 만들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내려가기도 한다. 또한 두어 곳에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는 그만큼 이 구간의 난이도(難易度)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고도(高度)를 높일수록 가팔라지던 산길이 끝내는 로프에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끝에서 삼거리(이정표 : 병방산 정상/ 목장 2.4Km/ 북실리 5Km)를 만난다. 병방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전망대에서 40, 병방치에서는 한 시간 남짓 되는 지점이다.

 

 

 

두세 평 남짓의 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병방산의 정상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병방치와 매한가지이다. 그리고 새마포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이정표가 정상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이곳의 표지판도 역시 지명을 잘못 적고 있다. 병방산을 구덩산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삼거리에서 보았던 정선군청에서 세운 이정표만 봐도 이곳이 병방산임은 너무나 분명한데도 말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만일 이곳을 구덩산이라고 부른다면 조금 있다가 오르게 될 구뎅이산은 또 뭣이란 말인가. ‘구뎅이구덩이의 사투리인데 그렇다면 한 산에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두 개나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병방산(兵防山)이란 이름은 한 사람만 지켜도 천군만마가 근접하지 못할 요새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위로는 천애절벽(天涯絶壁)이요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강물이니 능히 그럴 만도 하겠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목장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이어지는 산길의 풍경은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길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게 14분 정도를 걸으면 계단이 나온다. 바윗길을 내려가기 편하도록 만든 모양인데, 전망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진행방향에 강원도의 고산준령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산릉(山陵)에 자리 잡고 있는 신흥목장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산길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위험할 것까지야 없지만 걷는 게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돌들을 심어 놓은 듯한 바윗길이 고르지 못한 탓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큰 이유이다. 그렇게 16분 정도를 걸으면 안부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 길이 나뉘지만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지도(地圖)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길의 흔적으로 봐서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안부를 지나면서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경사(傾斜) 역시 아까 병방산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힘겹다. 걸어온 거리로 봐서 서서히 지쳐가는 시간이니 올라가는 게 힘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저 서서히 오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가는 집사람은 지칠 줄을 모르나보다. 나물만 보면 정신없이 산자락을 헤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덕분에 다음 한 주는 내내 산나물 반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면 길 왼편에 철선(鐵線)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쪽 나뭇가지 사이로 신흥목장의 초지(草地)가 내다보인다. 아마 등산객들이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인 모양이다. 아니면 가축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일 게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높고 험한 곳에다 어떻게 목장을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목장을 만들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의 한국인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철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왼편에 목장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타난다. 개의치 않고 곧장 능선을 따른다.

 

 

목장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을 넘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산길은 바위를 타고 넘거나 우회하면서 연결된다. 위험하다고까지는 볼 수 없으나 속도를 내기는 불가능한 구간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낙엽(落葉)에 가려있는 허방들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닥의 바윗길이 고르지 못하고, 거기다 참나무 낙엽들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수북하게 쌓여있기 때문이다.

 

 

목장갈림길을 지난 지 15분 조금 못되었다싶으면 철쭉군락지가 나타나고, 이어서 철쭉들이 만들어낸 터널을 통과하면 무명봉에 올라서게 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구뎅이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무조건 오른편(西陵)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느낌은 곧장 나아가라고 하니 그게 문제다. 훤한 것이 길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곧장 나아가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선두대장이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이 앞섰던 모양이다. 봉우리에서 내려서자마자 길은 그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 그저 선두대장이 깔아 놓은 진행방향표시지를 이정표 삼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표시지가 띄엄띄엄 깔려있다 보니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길을 놓치다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육두문자(肉頭文字)가 목구멍까지 치며 오른다. 다만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길의 흔적이 희미한 것 정도는 약과였다. 조금 후에 나타나는 바윗길은 길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음은 물론 위험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가파른 바윗길에 놓인 돌맹이들은 조금만 건들어도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행여 그 돌맹이들이 구르기라도 할 경우에는 앞서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덮칠 수밖에 없다. ‘돌맹이가 구를 수 있으니 건들지 마세요.’ 뒷사람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바윗길이 끝나면 이번에는 너덜길, 이곳도 역시 디디기만 해도 돌들이 무너져 내린다. 거의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설설 기며 내려갈 수밖에 없다. ‘에이 ×앞서가던 일행의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 쏟아진다. 내가 내뱉고 싶었던 욕지거리다. 이미 두어 번이나 엉덩방아를 찌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때를 맞추어 사람들의 입에서 봇물처럼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구뎅이산을 못 오른 것만 해도 불만인데 산길까지 험하니 어찌 성질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눈요깃거리도 있다. 녹색 이끼로 뒤덮인 바위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오지(奧地), 그러니까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진작가들은 이런 비경(秘境)을 찾아 일부러라도 찾아드는데, 우리는 공짜로 구경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이겠는가. 오늘 난 또 하나의 인생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삶이란 항상 좋을 수도, 그렇다고 나쁜 일만 계속되지도 않는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납고 험한 바윗길은 계곡(나중에 지도를 확인해보니 안골로 표기되어 있었다)에 내려서서도 계속된다. 바닥은 거칠고 길의 흔적이 없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내려가면 드디어 길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걷기가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가시넝쿨들이 온통 길을 점령하고 있는 탓에 걷는 데는 오히려 더 사납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가끔 산딸기들이 입맛을 돋워주는 것이다. 새콤달콤한 맛이 그야말로 천하일미(天下一味). 하긴 점심시간이 지난 지 이미 한참이나 되었으니 맛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름대로 괜찮아진 길을 따라 17~8분 정도를 내려오면 길은 계곡을 떠나 왼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묵밭을 만난다.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은 듯 밭은 온통 망초들로 가득 차 있다. 새하얀 꽃으로 뒤덮인 밭이 또 다른 포토죤을 만들고 있다. 볼품없는 망초들도 저렇게 무리지어 피어나니 어느 꽃밭에도 뒤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들꽃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자 장점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귤암새마을교

묵밭을 빠져나오면 곧이어 임도를 만나게 되고, 눈앞에 펼쳐지는 나팔봉의 절경을 눈에 담으며 잠시 걸으면 군도(郡道)인 동강로에 내려서게 된다. 우리가 내려온 계곡이 안골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도로변에 동강로하스라는 황토펜션이 보이니 기점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귤암새마을교까지는 이곳에서 10분 가까이를 더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추가로 걷게 되는 걸음걸이가 싫지는 않다. 아니 싫어질 틈이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발걸음의 속도에 맞추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나팔봉의 바위벼랑의 자태가 너무 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4시간10분이 걸렸다. 물론 온전히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