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봉(786m)

 

산 행 일 : ‘20. 10. 9(금)

소 재 지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 및 동해시 삼화동의 경계

산행코스 : 두타광장(제2주차장)→매표소→베틀 릿지→미륵바위→베틀봉→산성터→무릉계곡→학소대→삼화사→제3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두타산(頭陀山 : 1,353m)이 품고 있는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베틀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베틀 릿지’라고 불리던 험상궂은 바윗길이 암벽산행에 익숙한 전문 산꾼들에게조차 쉽사리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잘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한 비경을 그대로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동해시의 요구로 산림청에서 바윗길 곳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 명품 탐방로로 만들었다. 덕분에 최근 가장 핫한 산행지로 떠올랐고, 기초체력만 보유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국의 산인지 해외 유명한 산인지 구분되지 않는 비경들에 환호하게 된다.

 

▼ 들머리는 두타광장(제2주차장 : 동해시 삼화동 858-10 )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삼척 방면)’와 ‘42번 국도(북평교차로에서 정선 방면)’를 연이어 달리다가 동막교(동해시 이로동 1282)에서 빠져나온다. ‘효자로’를 따라 동해시가지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삼화삼거리(동해시 이로동)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릉계곡관광지에 이르게 된다. 무릉계곡 힐링캠프장에 마련된 제2주차장(두타광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버스에서 내려 무릉계곡 관광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형차 전용인 제1주차장과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상가지역을 통과하자 매표소가 나온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2천원. 그런데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다른 지역의 산들과는 달리 이곳은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징수의 주체가 ‘사찰(삼화사)’이 아닌 ‘지자체(무릉계곡 관리사무소)’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돈을 낼 수 있겠다는 얘기이다. 참!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열검사(發熱檢査)를 거쳐야만 했다. 코로나의 여파가 이젠 산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매표소 앞의 다리(무릉교)를 건너자마자 베틀릿지로 오르는 탐방로(이정표 : 배틀바위 1,5㎞/ 용추폭포 3.1㎞/ 매표소 0,1㎞)가 열린다. 새로 놓인 이 길의 이름은 ‘베틀바위 산성길’. 베틀바위와 두타산성을 잇는 코스라는 의미를 담았다. 금년 8월1일 개장한 이 길은 베틀바위 전망대와 12산성폭포를 지나 박달계곡을 거쳐 무릉계곡 깊은 쪽으로 내려선 다음, 용추폭포와 쌍폭포, 선녀탕의 순서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두타산성을 거쳐 무릉계곡의 ‘옥류동’으로 내려왔다. 박달계곡을 거쳐 용추폭포로 이어지는 구간(들머리에 세워놓은 노선도의 C구간과 D구간의 일부)이 오는 가을 개장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은 거친 바위를 타는 리지등반이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이들만 다니던 길이었다. 접근 불가의 험준한 지형 너머에 있는 두타산 베틀바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녀온 이들의 무용담으로 베틀바위 일대의 기막힌 경관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등산로가 없는 코스였으니 일반 등산객은 언감생심, 다녀올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금년 8월1일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탐방로가 새로 열렸다. 가파른 경사를 부드럽게 누이고 수직의 벼랑에다 계단을 놓아가며 이어놓은 길이다. 동해시에서 ‘잦은 등반사고’를 이유로 탐방로 개설을 요구했고, 동부지방산림청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 탐방로는 곳곳에 산재돼 있는 기암과 산림자원을 관광용으로 활용했다. 들머리 부근의 금강송 군락지에 만들어놓은 ‘휴휴 명상 쉼터’와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는 ‘숯 가마터(아래 사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숯 가마터를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내품는 거친 숨이, 하늘에 닿는 코스가, 오르는 내내 인내를 요구한다. 아름다운 절경을 쉽게 내주지 않는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면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놓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너나없이 희열에 가득 찬 탄성을 내지른다. 자신도 모른 채 말이다.

▼ ‘그림폭포(중대폭포)’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은 아예 ‘대한민국 만세’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부부여행을 나선지 7년. 돌아다닌 나라만도 벌써 40개가 넘었다. 해외에만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더니 이젠 그녀도 애국자가 다 되어가나 보다.

▼ 발아래로는 무릉계곡 입구의 상가지역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그 뒤는 쌍용시멘트의 채광장(採鑛場)이다. 나에게는 폐광 이후에 발생될 제반 사회문제에 대처할 입법 문제로 찾아봤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 비탈에 길은 내다보니 비좁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선지 편도(片道)로 길을 내기도 했다. 오가는 사람이 서로 비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으니,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베틀바위 0.5㎞/ 내려가는 길(옛길)/ 올라오는 길)를 잘 살펴보고 들어서야 한다.

▼ 바위 벼랑의 틈을 비집고 길을 내다보니 편도로 길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랜 기간 세찬 풍파를 맞으며 인고의 100여년 세월을 겪어온 ‘회양목 군락지’도 관광자원으로 부활시켰다. 그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음은 물론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고사성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한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경관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 회양목 군락지를 지나면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베틀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탐방로의 주인공은 물론 ‘베틀바위’다. 하지만 탐방로를 딛고 오르는 주변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이에 못지않다. 집채만 한 바위와 수직의 멋진 암벽이 수시로 나타나는가 하면, 바위 사이사이에서는 금강송이 붉은 둥치를 올리고 활개 치듯 자라고 있었다. 원시림의 초록 그늘과 수직의 바위가 교대로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저런 멋진 풍경을 조물주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 천혜의 비경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암벽산행에 익숙한 소수의 사람들만 찾을 수 있었다. 험한 산행코스 탓에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곳이 이젠 명품 탐방로로 바뀌었다. 돌을 쪼아 길을 내었는가 하면, 밧줄에 의지해 올라야만 했던 바위벼랑에는 길고 가파르게 나무계단을 놓았다. 그마저도 힘들었던지 몸을 틀어가면서 위로 향하고 있다.

▼ 길고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베틀바위 전망대(이정표 : 베틀바위↑ 0.2㎞/ 베틀바위 전망대→/ 매표소↓ 1.4㎞)’이다. 100미터도 넘어 보이는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로, 탐방객들은 이곳에서 기암괴석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마주하며 다시 한 번 탄복하게 된다. 산행을 시작했던 제2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 데크로 만든 전망대에는 안내판을 세워 베틀바위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었다. 암릉의 전체적인 생김새가 베틀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산악인들 사이에는 ‘베틀 릿지’, 천하비경 장가계(張家界). 동해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다는 얘기와 함께 ‘옛날 하늘나라의 질서를 어겨 벌을 받던 선녀가 승천을 위해 삼베 세 필을 짜던 곳’이라는 전설도 적어 넣었다.

▼ 전망대에 서면 베틀바위의 전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경관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입체적이기까지 해서 장엄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100m도 넘어 보이는 까마득한 높이의 석벽에는 닭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에서부터 사람의 형상을 닮은 바위에 이르기까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수없이 늘어섰다. 그 바위들 사이사이에는 붉은 둥치의 당당한 금강송이 들어앉았다. 그리고는 묽은 먹색이 번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굵은 붓으로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말이다.

▼ ‘베틀바위’는 창검처럼 솟은 바위에다 수직의 벼랑이 어우러져 두타산에서 가장 압도적이면서 기이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두타산의 계곡이 ‘무릉도원’이라면, 안내판의 문구처럼 두타산의 베틀바위는 ‘장가계’나 황산(黄山)에 비유할 만하다. 과연 내가 우리나라에 있는지가 실감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옛 선비들의 탐방기에는 베틀바위에 대한 얘기는 단 한 줄도 없다고 한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거칠고 험한 길 너머의 풍경이어서 그랬으리라.

▼ 전망대 가운데로 비집고 들어선 바위의 기이한 생김새에 끌려 카메라에 담아봤다.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게 영락없는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요 아래에 있는 삼화사에서 설법이나 법회를 하면서 저 바위에 깃대(幢竿)를 꽂았다는 스토리텔링을 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 그림 속에 빠져 있다가 빠져나오니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린다. 그 길을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무릉도원처럼 혹여 이곳도 나가면 다시 찾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나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던 곳이 바로 ‘베틀바위’였으니 말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다는 진짜 무릉도원처럼.

▼ 가파른 오르막길의 끄트머리,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미륵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15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산 아래 풍경을 굽어보는 자리에 누가 일부러 세운 듯이 서있는 미륵바위는 등을 돌린 미륵의 형상을 쏙 빼다 닮았다. 안내판에는 미륵봉 능선에 위치한 이 바위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미륵불과 선비, 부엉이 등으로 나타난다고 적혀 있었다.

▼ 미륵바위에서 20m쯤 더 나아가자 두타산 최고의 자연 전망대가 나타난다. 천애의 절벽 위로 올라서면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무릉도원이 발아래에 깔려있고, 그 너머로는 동해의 만경창파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정표(미륵바위/ 두타산성 0.7㎞/ 매표소 1.7㎞)가 가리키는 두타산성 방향임은 물론이다. 이어서 상당히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5분 정도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두타산성→ 0.5㎞/ 등산로 아님↑/ 베틀바위전망대↓ 0.3㎞)도 직진방향으로 난 능선길이 등산로가 아니라고 적었다. 하지만 두타산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저 능선을 타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가려고 하는 ‘베틀봉’도 저 능선에 놓여있다.

▼ 베틀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구들장처럼 넓적하다지만 너덜길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계단이나 밧줄난간 등의 인위적인 시설은 전혀 없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구간이 ‘베틀바위 산성길’을 벗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 구간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아니 길가에 늘어선 금강송(金剛松)은 볼거리로 꼽을 수도 있겠다.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금강송의 본래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속이 노란 황장목은 표피가 붉어서 적송(赤松), 줄기가 매끈하게 뻗었다고 해서 미인송으로도 불린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겐 유난히 친근한 나무다.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고 태어나 송기를 벗겨 먹으며 허기를 때웠고, 송홧가루로는 술이나 떡을 빚는 등 낭만을 부리기도 했다. 솔가리와 장작으로는 밥을 지었고, 늙어 죽으면 소나무 관에 드러누워 다시 소나무가 지켜주는 산에 묻히는 게 우리네 삶이었다.

▼ ‘베틀바위 산성길’을 벗어나고 40분이 지나서야 ‘베틀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르고 힘든 구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고생 끝에 올라선 베틀봉 정상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었다. 정상석이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삼각점(삼척 402)과 이정표(무릉계 3.2㎞)가 세워져 있지만 이게 어디 정상석만이야 하겠는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산꾼이 정상판을 매달아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사방이 숲으로 가려있어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누군가 쌓아올린 자그만 돌탑마저 없었더라면 사진 한 장 제대로 건지지도 못할 뻔했다.

▼ 이젠 하산할 차례이다. 이정표가 유일하게 가리키고 있는 ‘무릉계(3.2㎞)’ 방향인데 올라왔던 만큼 내려와야 하니 가파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두타산성(頭陀山城)’의 성터로 보이는 돌무더기 위를 걷기도 했다. 동·서·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었다는 외성(外城)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내성(內城)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대궐터(大闕址)’도 있다고 한다. 아니 몽골의 침입 때 이곳으로 피난했다는 이성계의 고조부를 ‘목조(穆祖)’로 추존했으니 그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자 아까 베틀봉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던 ‘베틀바위 산성길(이정표 : 수도골← 1.3㎞/ 베틀바위→ 0.7㎞/ 등산로 아님↓)과 다시 만난다. 이어서 14분 후에는 두타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두타산← 3.6㎞/ 두타산성↑ 0.5㎞/ 베틀바위↓)을 스치듯 지나간다.

▼ 가을이 무르익었는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이 자주 눈에 띈다. 하긴 찬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어제였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 5분쯤 더 내려왔을까 ‘산성12폭포’를 가리키는 이정표(산성12폭포←, 거북바위/ 베틀바위전망대↓ 1.2㎞)가 나온다. 이어서 지시하는 방향으로 10m쯤 더 들어가자 자연 전망대가 나오면서 베틀바위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거북바위’이다. 거대한 바위벼랑 위를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영락없이 살아있는 거북이다.

▼ 가까이 다가가자 거북이가 자신의 몸집을 성큼 부풀린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처럼 말이다. 대신 넘치던 생동감은 사라지고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세상에는 완벽함이란 없는 모양이다.

▼ 근처에는 거북바위 말고도 볼거리들이 참 많았다. 절벽에 들어앉은 바위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외 갤러리인 듯 이곳에서는 고사목 하나조차도 작품이 된다.

▼ 거북바위 아래로 다가가자 ‘산성12폭포’가 성큼 다가온다. 이름 그대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폭포지대다. 폭포의 맨 위는 하늘금. 얼마나 길던지 맨 아래에 있을 소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폭포 하나의 길이를 10m로만 잡는다고 해도 120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다만 수량이 적다는 것이 조그만 흠이지만, 장마철에 찾아온다면 숨 막히는 장관을 볼 수 있을 테니 이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 건너편 바위벼랑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어찌 보면 큰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미공개 구간인 C구간(12산성폭포↔박달계곡)의 탐방로를 저 절벽의 허리쯤으로 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항산 등 중국의 유명산들을 돌아다니면서 느껴왔던 바램이다. 제비집처럼 절벽에 매달아 놓은 잔도(棧道), 생각만 해도 스릴 넘치지 않는가.

▼ 탐방로로 되돌아와 몇 걸음 더 걸으니 바위 끄트머리에 밧줄난간이 쳐져 있다. 바위절벽이니 더 이상 가지 말라는 금줄이다. 하지만 산성터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대이니 잠시 머물다가도 좋을 일이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두타산성(일명 문지방산성)에 내려선다. 빤질빤질 무던히도 밟았을 문지방. 난(亂)을 피해 올라온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것은 파사왕 23년(102)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조대왕(이성계의 4대 조부)이 몽고군의 침입 때 삼척읍민을 데리고 ‘두타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4년(태종 14년)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높이 1.5m에 둘레 2.5km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최원흘(崔元屹)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병을 전멸시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바위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했을 테니 온전히 남아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 두타산성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등산객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이 최고다. 그런 장소가 바로 이곳 문지방산성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노송이 연출하는 비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나홀로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거기다 세월이 선물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생김새까지 자못 빼어나다.

▼ 소나무 뒷면으로 보이는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신령한 기운이 깃든 홍송(紅松)이 연출하는 비경은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참! 요것조것 살펴보기는 했는데 ‘백곰바위’는 눈에 담지 못했다. 백곰의 돌아선 뒷모습을 쏙 빼다 닮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행을 나서기 전에 미리 알아봐두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일이다.

▼ 산성터에서 내려오는 길도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베틀바위 산성길’을 새로 내면서 기존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내려오니 ‘무릉계곡’이다. 이정표(용추폭포↑ 1㎞/ 무릉계곡 관리사무소→ 1.6㎞/ 두타산성↓ 0.5㎞)는 무릉계곡을 대표하는 볼거리인 쌍폭포와 용추폭포가 왼편에 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우린 주차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둘러본 곳이기도 하지만, 함께 산행을 한 친구 형우군이 그럴 시간에 소주나 한잔 더 하자고 권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피해 횡성 별장에서 숨어살다 보니 속세의 이야기가 많이 그리웠나 보다.

▼ 탐방로는 이제 무릉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는 암반(巖盤)위로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발원한 무공해 물이 흐르는 명품 계곡이다. 이 물은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만나면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작은 소(沼)와 담(潭)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릉도원’에 비유해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명승지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도연명의 소설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나오는 지명이다.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을 따라가다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만났다는 지상낙원의 땅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 뒤에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천국과도 같은 이상향의 땅. 전국의 명승 곳곳에 보이는 ‘무릉(武陵)’의 지명은 모두 여기서 따왔다.

▼ 내려오는 길, 웅성거리는 소리를 따라 왼편 산자락으로 오르니 ‘학소대(鶴巢臺)’가 있다. 오랜 옛날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곳이다. 하지만 <시원한 곳에 배를 띄우니 학(鶴) 떠난 대(臺)는 이미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라고 읊었던 무릉거사 최윤상(崔潤祥, 1810-1853)의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처럼 바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따름이다. 아니 그가 보았을 물줄기까지 이젠 메말랐으니 오히려 삭막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 계곡을 따라 25분쯤 내려오자 삼화사(三和寺)에 이른다. 지위는 비록 월정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천년고찰답게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간이다. 주법당인 적광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약사전, 비로전 등 18개 전각이 서 있으며, 보물 제1277호인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등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재’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 또는 전수되고 있다. 하지만 무슨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경내가 하도 어수선해 사진을 찍기도 힘들었다. 참고로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 자장율사가 ‘흑련대’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고 개명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간절히 발원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자 국민들의 갈등을 풀고 화합시키려는 뜻에서 '삼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삼화사에서 내려오는 길가의 계곡은 ‘용오름 길’이라고도 불린다. 삼화동 초입에서 용추폭포에 이르는 길이 6㎞의 무릉계곡을 이르는 말인데, 전설에 의하면 약사삼불을 실은 용이 저 계곡을 따라서 두타산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품고 있는 용오름 길, 즉 무릉계곡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 계곡은 두타산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타(頭陀)’라는 이름보다 산이 품고 있는 ‘무릉’이라는 계곡에 더 익숙하다. 두타산을 ‘금강산에 이은 두 번째’라고 옛 선비들이 평가했던 것도 다 무릉계곡 일대의 경관을 높이 친 결과였다.

▼ 용오름 길에 있는 ‘무릉반석(武陵磐石)’으로 내려가 봤다. 양사언이 새겼다는 각자를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5천㎡나 된다는 넓은 바위에는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부백(府伯), 찰방(察訪), 토포사(討捕使)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아무튼 저 반석에는 줄잡아 850여 명에 이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무릉반석 근처 천변에는 금란정(金蘭亭)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라고 한다. 광무 7년(1903) 유림제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금란계를 만들어 한일합방 국치에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해방 이후 당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이어받아 지었다는 것이다. 정자에는 화가 심지황(沈之潢1888∼1964)이 쓴 현판 외에도 최중희(崔中熙,1895-1990)가 초서로 쓴 '관동기관(關東奇觀)'이란 액자도 걸려있었다. 금란정이 강릉지역의 기이한 볼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썼다는 석각(石刻)은 길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조품인데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라고 새겨져 있다.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짜기‘라니 능히 신선이 놀다 갈만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석각의 하단에는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는 문구도 보였다.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뜻이다. 이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또한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의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로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왔던 때도 신미년(1571년)이며,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 산행 날머리는 제3주차장

무릉반석을 빠져나오면 잠시 후 매표소가 나오고, 이어서 1·2주차장을 거치면 산행이 종료되는 제3주차장에 이른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산행거리가 7㎞ 남짓인 점을 감안하면 속도가 더디었던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금란정 근처에 있는 ‘최인희(崔寅熙, 1926~1958)’의 시비(詩碑)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고장 출신 시인인데 그의 대표 시(詩) 낙조(落照)가 새겨져 있었다. ‘골 따라 산길 더듬어 오르면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로 시작되는 그의 시와는 달리, 오늘 난 천년만년 함께 지내고 싶은 집사람에 더해 오래 묵은 친구까지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에필로그(epilogue), 우리나라에는 ‘무릉(武陵)’이란 이름의 명소가 꽤 많다. 하지만 도연명의 무릉도원 같은 지상낙원까지는 못 된다 해도 그에 견줄만한 경치는 단연 동해시의 명승인 ‘무릉계(武陵溪)’가 아닐까 싶다.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 V자로 깊이 파낸 칼자국 같은 4㎞ 남짓의 긴 계곡. 그곳이 ‘무릉계’다. 무릉계곡은 계곡 전체가 굵은 붓으로 먹을 듬뿍 찍어서 그려낸 듯 신비롭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두타산 무릉계곡을 ‘선계(仙界)’, 그러니까 ‘신선의 세상’에다 비유했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감히 뛰어넘었다는 얘기이다. 1977년 무릉계곡이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