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샤먼(厦门, Xiamen) - 남정토루(南靖土楼)

 

여행일 : ‘25. 4. 18() - 4. 21()

 

세부 일정 : 산해건강보도, 증조안거리, 중산로, 고량서(숙장화원·일광암), 남정토루(전라갱·유창루·탑하촌), 남보타사.

 

특징 :  샤먼(厦門) : 샤먼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진 푸젠성(福建省, 중국 남동부) 2의 도시. 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 짙푸른 가로수,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걷다 보면 이곳이 중국인가?’ 싶다.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40km 펼쳐지고, 온종일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바다 아래로 사라지는 일몰은 남국의 정취를 닮았다.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정착시켰으며, 가장 먼저 차()를 해외에 알린 도시이기도 하다.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된 철관음(铁观音)이 샤먼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다.

 

 남정토루(南靖土楼) : 복건성 남서부에 위치한 남정토루는 흙으로 두꺼운 벽을 만들고, 목조로 내부를 짜 맞춘 혼합 구조의 주택이다. 규모가 방대하고 양식이 매우 독특하여 신화와 같은 산간 지역의 건축물로 불리는 고대의 아파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전통가옥으로서 건축사적 의의가 있다.

 

 토루(土楼)’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샤먼에서 9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정현(南靖縣, 난징)’으로 가야한다. 서양진(書洋鎭) 복건토루(福建土楼)’라는 이름으로 대형 매표소를 세우고 관광객들을 맞는다. 하나 더. 이웃에 있는 영정구(永定区, 융딩)’에 토루가 더 많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두 지역은 토루 여행객을 유치하는 데 있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코스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전라갱토루군과 탑하촌(塔下村)을 묶어 A코스, 운수요 고진, 화귀루(和贵楼), 회원루(怀远楼) B코스로 묶었다. 두 코스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 당일치기 여행은 어렵다.

 입장료를 받는 곳이니 검표(檢票)는 필수.

 전용 셔틀버스를 바꿔 타란다. 길이 좁아터진 데다 한없이 구불대기까지 해서 대형버스는 통행이 불가능하다나? 하지만 중국의 운전사들은 브레이크도 잡지 않은 채 잘도 달려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나 특종 세상에 소개되어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셔틀버스 운행노선도. 매표소전라갱탑하촌유창루 순으로 오전 830분부터 오후 5(여름철 530)까지 운행한다. ! A코스와 B코스를 다니는 버스가 다르니 꼭 확인해보고 타야 한다는 것도 알아두자.

 전라갱이 있는 상판촌(上坂村)으로 가는 길. 중간 중간 과수원, 차밭, 대나무 군락 등 산촌 풍경을 볼 수 있다. ‘토루도 그중 하나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두세 곳이나 들어서 있었다. 맞다. 이곳 난징현에는 대형 토루만 1,300여 개가 있고, 작은 것들까지 합하면 무려 5,000개에 이른단다. 가히 토루왕국(土楼王國), 토루고리(土楼故里)라 불릴만하다.

 또 다른 토루군(土楼群). 저들 토루는 객가(客家)’의 주택이다. 중국어로 발음하면 커자(Kejia), 국제적으로는 하카(Hakka. 객가의 광동식 발음)로 불린다. 민족적 개념보다는 북방(중원지역)에서 거주하다 전란을 피해 남하하여 광둥성, 푸첸성, 광시장족자치구 등의 산간지역에 정착한 외래이주자(外來移住者)를 토착민인 본지인(本地人)과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30분쯤 올라갔을까 버스가 전라갱(田螺坑) 토루 전망대에 멈춘다. 전라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한데, 가이드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란다. 마을 관람은 않겠다는 것이다. 여행사의 편성표가 그렇다니 어쩌겠는가마는 나처럼 하나라도 더 보고 조금이라도 더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전망대가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아래층은 포토죤 역할도 한다. 아래층에다 사람을 세우고 위층에서 사진을 찍으면 전라갱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관광객이 많을 때는 누구를 찍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전라갱(田螺坑)은 방형(方形)의 토루를 중심에 두고 원형 토루 네 개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방형 토루가 탕에 해당하고, 원형 토루 네 개가 4가지 반찬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휘황찬란한 오중주라고 음악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짝을 이룬 현악기 4대에 피아노 1대가 받쳐주는 형상이라나?

 전라갱은 영정(융딩)에서 이주해 온 황씨 일가의 집성촌이라고 했다. 우렁이를 먹고 자란 이곳의 오리가 가계에 도움이 된데서 우렁이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단다. 가장 오래된 것은 보운루(步雲樓)’. 1796(나라 嘉慶 1) 황백(黃百) 삼형제에 의해 방형(네모)으로 지어졌다. 이어서 화창루(和昌樓, 1364, 1936년 도적의 습격으로 소실되어 재건), 진창루(振昌樓, 1934년 전쟁으로 소실되어 1940년에 재건), 서운루(瑞雲樓, 1918), 문창루(文昌樓, 1966)가 차례로 지어졌다. 하나 더. 현재 전라반장(田螺飯庄)을 운영, 관광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고 했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길은 내리막으로 변한다. 그렇게 10분 남짓 달리면 하판촌에 이른다. 개울가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곳에 복건성 토루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유창루(裕昌樓)’가 있다. 참고로 중국 5대 민가 건축양식 중에 하나인 토루는 769년 당나라 시대 때부터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해 송·원을 거치면서 푸젠성 남서부에 우우죽순처럼 들어섰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은 명나라 때 건축된 것이고, 지역에 따라 1000년이 넘는 토루도 있다.

 현존하는 토루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유창루 토루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나라 때인 1308년부터 1338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니 그 역사가 무려 700년이나 된다. ((((()  5개 성씨(姓氏)가 힘을 합쳐 5층의 원형 토루를 만들었다고 한다.

 유창루로 가는 길. 냇가 양쪽에 마을이 들어서있다. 방형의 토루 두어 개를 지나 유창루로 간다. 토루는 대부분 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앞이 트인 작은 분지에 자리한다고 했다. 전면이나 측면에 하천이 있거나 지하 수맥이 풍부한 위치가 보통이다. 이를 이용해 토루 안에 우물을 팔 수 있었고, 이는 적의 포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근원이 되었다.

 길가 풍경. 토루가 무너지면 저렇게 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화재나 도적의 침입으로 인해 토루가 소실된 적이 있었다니 말이다.

 냇가에 들어선 식당. 아열대 기후라서인지 실내가 아닌 실외에 테이블이 놓여있다.

 유창루의 대문.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외부로 통하는 문은 하나만 만들었다고 한다. 3층까지는 벽에 창도 뚫려있지 않다. 이 또한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지혜의 일환이다.

 유창루(裕昌樓)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 씨족이 사는 토루는 성이나 출신지를 붙여 ○○()’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유창루는 하나가 아닌 5개의 성씨가 힘을 모아 지었다. 출신지가 같다는 얘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동그랗게 지어진 관음청(觀音廳)’이 맞는다. 동그란 건물에 동그란 마당, 그 중앙에 동그란 관음청이라니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 있겠는가. 700년 전 선현들의 예술적 감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관음청에는 말 그대로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토루 중앙은 조상신을 모시는 조당(祖堂) 차지라고 했다. 모시는 조상은 남방으로 갓 이주해 왔을 때 혹은 토루를 처음 건설했던 선조다. 매년 선조의 생일과 기일에는 온 씨족이 조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 조상신과 제사의식이 객가의 정신적 지주라고 한다.

 건물은 5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은 부엌, 2층은 창고, 3층 이상은 침실로 쓰인다고 했다. ! 이곳은 소지섭·한지민 주연의 SBS 드라마 카인과 아벨 촬영지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중국에 간 소지섭과 그를 안내하는 조선족 가이드 한지민이 이곳에서 머물기라도 했었던 모양이다.

 관광지가 된 후 1층은 가게로 변했다. 위를 바라보면 하늘을 향해 뻥 뚫렸다. 건물에는 홍등과 빨래가 줄줄이 걸려있다. 왜 방마다 홍등이 하나씩 걸렸을까? 지금이야 장식용이겠지만 옛날에는 불이 켜지면 식구가 귀가했다는 신호이자 약속이었단다. 불이 다 켜지면 마지막에 귀가한 사람은 대문을 걸어 잠갔단다. 원하지 않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아이디어라고나 할까?

 건물이 기울었다고? 유창루의 특징 중 하나는 비바람과 지진을 견디면서 동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창루를 동도서왜(東倒西歪), 동왜서사(東歪西斜), 왜왜사사(歪歪斜斜)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기울기가 심한 곳은 경사가 15도에 이른다나? 하지만 육안으로 식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런 상태에서도 건물이 무너지지 않아 지금도 토루 건축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1층은 주방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그래선지 안에 샘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고 22개나 된단다. 유창루가 각층마다 54칸의 방(세대)이 있으니 절반에 가까운 세대가 독자적인 샘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5층의 토루는 수직으로 나눠 한 가족이 한 칸씩 사용한다. 2층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출입을 금하고 있는데다 창고라서 볼 것도 없다는 가이드의 사전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3층부터는 주거공간이라 주민들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압박까지 곁들였다.

 유창루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많은 편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료품은 물론이고 약재나 잡화, 심지어는 악기까지 도심의 골목시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양하다.

 직접 제작하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대부분 컵처럼 간단한 것들이지만 운이라도 좋으면 구금(口琴, 호루라기처럼 입에 대고 분다)이라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그게 마음에 들면 하나쯤 사와도 좋을 일이고. 소리 내는 방법을 적은 팸플릿까지 얹어주니 말이다.

 가이드는 오늘도 환상적인 기념사진을 만들어 주었다.

 점심은 유창대주점(숙박이 가능하다)’에서 했다. 네모 반듯 한 토루인데, 먼저 다녀간 어느 분은 이곳을 취원루(聚原樓)’로 적고 있었다. 여행사에서는 샤먼에서만 즐길 수 있는 중국 가정식(토루식)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 이름표 대신 난데없는 모주석 만세라는 선동적인 글귀가 적혀있다. 가이드는 모택동 주석이 생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그에 걸맞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철저히 무장된 마을인 듯.

 식사는 무척 맛있는 편이었다. 가지·숙주·감자·목이버섯 등의 볶음 요리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상추와 쌈장이 준비되어 있어 한식처럼 맛있게 쌈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참고로 객가는 토루 주변의 물을 이용해서 쌀, 옥수수, 감자, 채소, 과일 등을 경작하며 살았다. 특히 차()는 청나라 때 최상품으로 쳐줄 만큼 유명했다. 당시 유일한 대외 무역항이던 광저우(廣州) 13행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했었을 정도란다.

 객가가 자랑하는 낭주(娘酒)’는 집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북방과 남방의 도작문화가 한데 융합된 객가 쌀은 맛있다고 정평이 나있다. 그 쌀로 빚은 술이 낭주인데 전란을 피해 남방으로 내려온 객가인들이 배고픔에 시달릴 때, 원주민 할머니가 술을 나누어주면서 제조법까지 알려줘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어머니()의 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내판은 탑하촌 물의 고을로 소개하고 있었다. 장저우(漳州)의 유명한 화교마을이자 중국 최초의 15개 명승지 중 하나란다. 다양한 모양의 토루 40여 개가 하천을 따라 들어서 있다고도 했다. 주민들이 하천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양새라 하겠다.

 그러니 어찌 하천을 따라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탑하촌을 향해 강변을 따라 내려간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사하촌(寺下村)이란 게 있다. ‘절 아래 있는 마을을 이르는데, 이곳 탑하촌도 같은 의미이지 싶다. 다만 절()이 아닌 탑()의 아래일 것이다. 그 탑은 장씨 사당의 석룡기간(石龍旗杆)’일 것이고 말이다.

 개울은 곳곳에 다리를 놓아 양쪽 기슭을 연결시킨다. 개중에는 다리 중간에 누각을 지어 풍치를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이방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한마디로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물레방아도 눈에 띈다. 상부의 보()는 물레방아의 동력을 얻기 위해 일부러 쌓은 듯. 둑에 징검다리를 놓아 주변 경관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라고나 할까?

 탑하촌의 중심가쯤 되나보다. 3-4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유명 관광지답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중심가를 지나자 옛 풍경이 펼쳐진다. 탑하촌(塔下村) 옛 마을에 들어왔나 보다. 마을은 50여 개의 사각형·원형 토루와 30여 동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산골짜기와 냇물 사이에 들어서 있다고 했다. 그런 풍경에 반한 호사가들이 탑하촌 세상 밖의 도원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고택들. 하지만 어김없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탑하촌으로 들어온 선조들은 열심히 농사짓는 한편, 이웃과 우애를 쌓아가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독특한 옛 건축물은 물론이고 그들만의 전통문화가 이어져오고 있는 이유이다.

 장원루(帳源樓). 문이 두 개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모양이다. 토루와 일반 건축물이 혼합된 형태이다.

 유덕루(裕德樓). ‘유창루(裕昌樓)’에서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풍경이다. 건축물이 너무 커서 어느 정도 떨어져있어야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데, 유창루에서는 그럴만한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광루(慶光樓)는 방형의 토루이다. 이밖에도 마을 안쪽에는 순창루(順昌樓)와 순경루(順慶樓), 의남루(倚南樓) 등 각양각색의 토루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참고로 토루는 외벽의 형태에 따라 원형, 방형, 반원형, 사각형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보통 원형으로 지어졌다. 원형 토루의 직경은 보통 40~60이고, 둘레는 수백 에 이른다. 토루 하나에는 250~800여 명이 거주하였다.

 태극무늬 물길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이게 하도 맑고 푸르기에 징벽(澄碧)’이란 단어를 넣어 청명징벽(淸明澄碧)’으로 부르기도 한다나? 하지만 비가 내리는 탓에 오늘은 흙탕물로 변해버렸다. 그래선지 보()에서 노닐고 있어야 할 오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개울에는 11개의 다리가 놓여있다고 했다. 개중에는 이렇게 물뿐만 아니라 허공까지 가로지르는 것도 있다. ‘설영교(雪英橋)’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가이드의 뒷모습이 샛길로 사라진다. 그리고는 좁아터진 골목과 언덕배기를 누비며 간다.

 그곳에서 우린 기념품가게 위주로 편성된 다양한 가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객가인들의 삶도 살짝 엿볼 수도 있었다. 탑하촌은 장씨들 집성촌이다. 1000여 명이 거주하는데 평균 연령은 약 88, 100세를 넘은 고령자가 4명이나 되는 장수마을이다.

 길은 장씨 가묘(家廟)인 덕원당(德遠堂)으로 이어진다. 덕원당은 명말청초에 지어진 배산임수형의 사당이다. 폐쇄적인 사합형 구조이며 지붕은 용, 봉황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내부의 신감에 역대 조상들의 신주가 있으며, 장씨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장씨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사당 앞에는 연못이 있고, 못 앞쪽으로 당간 모양의 기둥이 서 있다. 중국어로 석룡기간(石龍旗杆)이다. 윗부분에 용을 새긴 돌기둥으로 행사가 있을 때는 깃발을 단다고 한다. 다른 사당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란다.

 맞은편 기둥까지 합치면 모두 21개가 된다. 기둥에는 이 마을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정치적, 학술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만 기둥을 세울 수 있으며, 반드시 종친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안내판은 필수일 것이다. 탑하촌의 내력과 이 마을에서 배출한 인물들을 자세하게도 알려주고 있었다.

 주민들은 중원에서 이주해 온 하카족이라고 한다. 시조인 장효일랑 비화는 남송 장화순의 10세손이란다. 명나라 선덕 원년 영정 금사에서 이주해왔다나? 이밖에도 마을의 연혁과 이에 얽힌 얘기들을 적었다.

 석룡기간(石龍旗杆)에 대한 소개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 마을에서 배출한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빠질 리가 없다.

 탐방로는 이제 탑하대패주차장을 향해 간다. 여행사의 대형버스가 그곳까지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도로로 내려선다. 이후로는 도로를 따라간다. ‘신령스럽고 빼어난 물의 고장(靈秀水鄕)’이란 애칭에 걸맞게 개울가를 따라 데크길이 놓여있다. 어디까지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탑하대패주차장에 이르면서 남정토루 투어는 끝을 맺는다. 이제 셔먼으로 되돌아가 옵션을 소화하면 오늘 일정은 끝난다. 선택이 가능하다지만 그렇다고 선뜻 거절할 수도 없는 옵션이 거북스럽지만, 그 끝에 맞게 될 엉클 양꼬치(양꼬치+맥주 무제한 제공)’로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왔으니 토루를 짓는 방식에 대해 짚어보자. 공사는 단 하나뿐인 대문의 방향을 먼저 정한다. 대문을 기준으로 삼아 원을 그렸다. 그 선에 외벽의 기둥이 될 말뚝을 줄지어 박고 지반을 다졌다. 외벽은 하단을 돌담으로, 그 위는 오리나무와 대나무로 촘촘히 다져 흙벽을 만들었다. 흙벽의 하단 폭은 170cm, 평균 150cm로 웬만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안쪽에는 나무의 이음을 정교히 해서 방과 복도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와로 지붕을 얹혔다. 이처럼 토루는 방어성이 뛰어났다. 옛날에는 산적과 원주민의 약탈이 끊이질 않았고, 야생동물의 공격도 흔했기 때문이다. 토루 안에는 거주시설 말고도 각종 편의시설이 함께 들어서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지금도 객가인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가축을 기른다. 하나의 작은 집성촌 사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는 물론이고 교육과 혼례 등 모든 것이 토루 안에서 이뤄진다. 혼례는 3대 이상 지나야 같은 성끼리 혼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근친상간에 대해서도 지혜를 발휘했다.